내가 문학을 하면서 살아가는 동안 고마운 분들이 있다. 아동문예 발행인을 지낸 박종현 선생은 그 중의 한 분이다. 1977년 2월호에 아동문예 동시 추천을 받았다. 그 일은 순전히 박종현 선생의 배려였다. 이렇게 고마운 분이지만 박선생은 조금도 자신의 자랑거리로 드러내지 않았다. 늘 담담한 미소로 맞아주었고 만나면 마음이 평온하고 즐거웠다.
그리운 음성, 박종현 선생
남진원
한국아동문학인협회 모임에서 식사를 하는 도중이었다.
남! 진! 원! 하고 등 뒤에서 또박 또박 크게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돌아보니 한 손을 번쩍 드시며 웃으시는 분이 계셨다. 큰 형님 같으신 박종현 선생!
몇 번 뵙지는 못했어도 내 마음 깊이 계시던 분이었다.
내 이름 석자를 부르는 목소리는 반가움의 대신이었다. 만나면 늘 평온한 얼굴로 반기시는 선생님. 그래서 더욱 정이 드는 분이셨다.
1976년 한국 대표 아동문학 전문지 『아동문예』가 5월에 창간되었다. 그것도 서울이 아닌 전라남도의 빛고을 광주에서 말이다. 이 얼마나 엄청난 일인가. 아무도 엄두를 내지 못한 일을 그분은 하고 계셨다. 나중에는 서울로 올라오셔서 <아동문예>지를 더욱 확장시키셨다.
1976년인 그해 최도규 선생은 본인이 동시 추천을 받았다고 하시면서 내게도 작품을 보내라고 하였다. 마침 <교육자료>와 <새교실> 추천을 마친 뒤라서 난 전에 써 놓았던 작품 4편을 보냈다. 그랬더니 1976년 12월 중에 천료 소감을 보내라는 통지를 박종현 선생으로부터 받았다. 작품과 추천소감은 1977년 2월호에 나왔다.
『교육자료』추천을 박경용 선생께서 하셨는데 <아동문예>지에도 박경용 선생께서 하셨다. 그래서인지, 나는 곧바로 아동문예에 한번으로 추천이 완료된 것이었다. 어찌 보면 박종현 선생의 깊은 배려심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많은 도움을 받았지만 나는 부끄럽지만 아동문예사에 월간지 구독도 못한 가난한 서생이었다. ,형편이 안 되어서 아동문예사에서 동시집도 내지 못하였다. 이 일은 내내 미안함으로 남아있다.
나는 문학에 대한 뜻한 바가 있어 1990년 초에 교직을 그만 두었다. 그러다 보니 먹고 살기 위해 분주하게 뛰어다녀야 했다. 생할은 점차 어려워지는데 문학회 회비와 구독료는 점점 많아지니 걷잡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래도 지금까지 고마운 것은 아동문예사와 아동문학평론사에서는 줄곧 책을 보내주시는 것이다. 아무나 할 수 없는 배려심이다. 그래서 늘 깊은 감사를 껴안고 살아간다.
그리고, 좋은 작품도 아닌 것을 『아동문예』지에 보내도 아무 말 없이 실어주시던 박종현 선생님! 이제 생각하니 속으로는 ‘좀 좋은 작품을 보내주지’ 하는 생각을 많이 하셨을 것 같았다. 그렇지만 모임에서 만나면 아무 내색도 하지 않으시고 그저 반가워하셨다.
어느 날 서울에 갔을 때 박종현 선생을 찾아뵈었다. 인근에 있는 염소탕 잘하는 집으로 안내해 주셨다. 함께 점심 식사를 한 일이 박종현 선생과의 첫 대면이었다. 그후로는 모임에서 만난 일이 고작이었다. 돌이켜보면 자주 찾아 뵙지 못한 일도 아쉬움으로 남는다.
감히 단언한다. 한국아동문학 문단의 중흥을 위해 박종현 선생은 진실로 온 열정을 쏟으셨다. 『아동문예』지를 통해 나온 작가들은 한국 아동문단의 원로 , 중진 들이 되었다. 그리고 지금도 재기발랄한 신인들을 꾸준히 배출하고 있다.
1976년 5월 창간하여 꾸준히 월간지로 발행하였다. 그러다가 몇 년 전부터 격월간지로 바뀌고 2024년부터는 계간지로 바뀐다고 하였다. 어린이들이 줄어드는 인구 절벽으로 아동문학 전문지도 영향을 받는다고 생각하니 이래저래 마음이 아프다.
어찌되었든, 1930년대 근대 문학 이후 1970년대에 이르러서는 아동문학의 신기원을 이루었다. 그것은 『아동문예』지와 박종현 선생의 출현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 우리 아동문학 문단사에 큰 획을 그어놓았다고 할 수 있다.
박종현 선생은 가셨지만 아동문학을 하며 살아가는 내 마음속에는 따뜻하고 자상한 큰 형님으로 늘 자리잡고 있다. 종종 마음속으로 불러본다. ‘그리운 형님!’ 하고 말이다. 그런 나도 벌써 70대에 들어섰고 문단 생활 50여 년이 가까워졌다.
. 사람은 가도 마음에 있으면 영원히 사는 법! 박종현 선생이 늘 생각나지만 글로 정리할 기회가 없었다. 이번에 시간을 내어 붓을 들었다. 감사한 마음을 표현하고 싶은 내 작은 뜻을 적을 수 있어서 한없이 기쁘다. 시 한 편으로 마무리하며 글을 맺는다.
(추모시)
문예지의 금자탑(金字塔)을 세운 박종현 선생
아동문학을 꽃 피운. 반 백년의 흐름속
탑을 쌓듯, 문예지를 쌓아 올린
아동문학지의 금자탑, <아동문예>이어라
걸출한
문인들이 배출되고 또 끊임없이 배출될
아동문학의 산실이여
근대 이후 21세기
어린이들에게는 꿈과 희망과 사랑을 전하고
문인들에게는 발표의 밀원(蜜源)이 되었구려
발행인, 박종현 선생의 위대한 신념
애정 어린 마음의 깊은 각오 없이
어찌 이런 위대한 일 이룰 수 있으랴
어린이들에겐 희망이요
문인들에겐 벗이요
아동문학 문단에선 보배요, 자랑이네
형은 가셨지만
아, 그 발자취 빛나리니
나는 오늘도
문인의 벗, 『아동문예』를
애인처럼 기다린다
내 문학의 중요한 부분에 늘 숨 쉬고 있는
고마운 『아동문예』
그리고, 어찌 잊을 수 있으리오
박종현 선생을.
나는 처음에 글을 쓸 때에는 <아동문예>가 있는 줄도 몰랐다. 최도규 형이 1976년 [아동문예]에 동시가 추천이 되어서 알게 되었다. 도규 형은 내게도 작품을 보내보라고 하였던 것이다.
박종현 선생은 1939년 출생하셔서 2001년에 돌아가셨다. 돌아가기 까지 줄곧 아동문예를 이끌어오며 한국아동문학 발전에 헌신한 분이다.
연말에 서울의 음식점에서 행사가 있어 많은 문인들과 만났다. 식사를 하는 도중에 큰 소리로 누가 내 이름을 불렀다. 돌아보니 박종현 선생이셨다. 그렇게 정겨움을 나타내고 하신 분이었다. 한국동시문학상 수상도 그 분의 배려로 하였고 한국아동문예작가회장도 그분의 권유로 회장직도 맡았던 것이다.
- 『아동문예』 誌,
1977년 2월호에 동시 초회로 추천완료를 하였다.
- 완료 작품 : 아침청소, 등굣길, 다듬이질, 아침교실
1976년 12월엔 「아동문예」추천완료 소감을 보냈다. 동시 추천을 박경용 선생께서 1회로 완료하였던 것이다. 원래는 2회로 추천이 완료되는 제도였다. 그러나 박경용 선생은 1976년 교육자료에서 이미 추천을 했기에 그 능력을 인정받았기 때문이었다.
박종현 선생이 1976년 5월 1일 광주에서 월간 문예지 [아동문예]를 창간하였다. 나는 1976년 11월 경 추천 응모 작품을 보냈다. 그 응모 작품을 박종현 선생은 박경용 선생께 보냈던 것이다. .
추천 완료 작품은 <아침 청소>, <등교길>, <다듬이질>, <아침 교실> 등 네 편이었다.
아침 청소
남진원
묵은 찌끼를
털어내듯
마음을 열면 ,
창을 열면
아!
밀려드는
산 푸른 이야기
빗자루에
한줌 씩 뿌리는
노랫소리 따라
참새들 노란 얘기가
햇살에 붇어
마구 날아든다.
등굣길
남진원
하늘
비꺄 묻은
바람 속에서
이슬처럼
맑은
웃음
감아 돌리는
이야기
꽃 마차
햇살
부벼대는
초록빛 아침을 싣고
산새 노래
휘어진
숲을 달린다.
다듬이질
남진원
빨랫감을 펴 놓으시고
다듬질 하시는
엄마 손가락 새로
새들의 목청
파랗게 묻은
바람
바람을 한아름
뿌리며
뻣뻣한
표정
풀어낸다
이 세상
모든 주름살 풀어낸다
아침 교실
남진원
이슬 머금은
햇살
굴러내리는
풀잎에 젖은
바람
밀려드는
교실
교실마다
창을 열고
그렇게‘ 마음을 열고
곱게
곱게
접어둔 얘기들
아침을
부시게
칫솔질 한다.
* 아동문예에 시 추천을 받을 때의 일이다. 작품을 보내고나서 신비한 꿈을 꾸었다. 고향의 모교 뒷 운동장엔 조그만 밭을 만들어 선생님들이 채소를 심어 가꾸었다. 나는 꿈에 그 밭에 갔다. 밭에는 싱싱한 무가 자라고 있었는데 무 네 뿌리를 뽑는 꿈이었다. 그 후 [아동문예]에 추천된 작품이 4편이었다.
* 아동문예에 추천 작품을 모냈는데 심사를 교육자료에서 추천 해 주신 박경용 선생님이 맡으셨다. 그래서 초회로 추천을 완료했다. 다른 분들은 모두 2회 이상의 추천을 받아야 했는데 운이 좋았던 것이다.
그 후 박경용 선생님과의 만남은 참으로 신기하게 이루어졌다.
서울에서 열리는 한국아동문학회 송년회에 참석하려고 상경하였다. 서울의 종로구의 한 곳에서 방향을 몰라 이리저리 찾던 중 지하철에서 올라오는 한 분이 눈에 띄었다. 생긴 모습이 책에서 뵌 박경용 선생님 같아서 실례를 무릅쓰고 앞에 가서 여쭈어 보았다.
“혹시 박경용 선생님이 아니십니까?”
내가 여쭙자, 누구냐고 묻길래, “정선에 사는 남진원입니다.” 라고 하였더니 손을 잡고 반가와하셨다. 이렇게 서울 한 복판에서 우연히 박경용 선생님을 뵐 수 있었다. 선생님은 한국일보사에 가려던 길이었다고 하셨다. 나는 어디 가서 약주를 한 잔 대접하겠다고 하였더니 선생님은 어느 허름한 음식점으로 데리고 갔는데 싸구려 식당이었다.
찌게 국물을 한 대접 시키고 소주를 하였는데, 서울에 올라온 나를 생각하여 돈을 쓰지 않게 하려는 배려였다. 참으로 소탈한 모습과 인품에 고개가 숙여졌다.
소주를 마신 후에 한일관에서 열리는 행사에 간다고 하니 그곳에 함께 가시겠다고 하였다. 원래 박경용 선생님은 이곳 저곳 문학 단체에 가입하시지 않고 자유롭게 글을 쓰시는 분이었다. 그런데 아마 내가 그곳에 간다고 하니 일부러 함께 가시려고 하였던 모양이었다. 그곳에는 김영일 회장을 비롯하여 김동리 선생, 박화목, 이영호 선생 등 많은 원로 문인들이 계셨는데 동화작가 이영호 선생 옆에 박경용 선생님이 앉게 되었다. 그 분과 입씨름이 벌어져 나는 매우 당황하였던 기억이 떠오른다.
엊그제 이야기 같은데 벌써 32년 전의 일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