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해사 강원이 깨져서 공부를 다 마치지 못하고, 해인사 강원으로 옮겨가게 되었다.
전국의 스님들이 모여드는 해인사 강원은 방부를 들이는 일부터 어려웠다.
”스님 앞에 벌써 40명이나 기다리다가 돌아갔어요.“
그런 이야기를 듣고도 무비스님은 객실에 묵으면서 울력할 시간이 되면 먼저 나가서
빗자루를 들고 울력을 하고, 산에 불이 났다 하면 얼굴을 아는 도반들과 같이 가서
불을 껐다.
‘중이 절에서 사는데 누가 나가라고 할 수 있나?’
누더기도 빨아서 짜지도 않고 척 걸어놨다. 오래오래 시간이 걸리면서 마르라고
그렇게 했다. 산감을 따라다니면서 산의 나무도 지키고, 산에 난 불을 잘 껐다.
”원래 한철 동안만 산감을 사는데 스님, 두 철 할 수 있겠어요?“
”두 철 아니라 2년이라도 하지요.“
”그러면 산감을 두 철 살고 강원에 방부 들이세요.”
영암스님이 총무를 보실 때였다. 그렇게 해인사 강원에 방부를 들일 수 있었다.
어렵게 들어간 해인사 강원의 공부는 치열했고, 치열한 만큼 즐거웠다. 저녁이면 강통을
흔들어서 중강과 발기라는 소임을 뽑고 논강을 준비해서 다음 날 글을 새겼다.
발기라는 소임은 경전을 직접 새기면서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이고, 중강은 논강시간의 사회자다. 서로의 이론과 글 새김을 가감없이 중강이 다 기억했다가 강사스님 앞에서 대표로
발표해야 했다.
먹을 것도 부실해서, 물 한 바가지로 허기를 메우고 그보다 더 배가 고프면 고추밭의 생고추를 따서 먹는 날이었지만, 종이도 귀하고, 책도 귀한 그때, 공부만큼은 하늘을 찌를 자부심으로 가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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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표 구입하기도 어려웠다는 어른스님의 말씀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참 어려웠던 시절 같아요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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