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북 청주한씨 시조묘(그림처럼 아름답다) 1.청주 한씨 본관은 청주, 시조는 한란(韓蘭), 인구는 75만(2015년 대성순위 10위), 30여개파가 있다. 12정승 6왕비를 배출한 삼한갑족이고 시조묘에 대하여 다수는 조선8대명혈로 인정한다. 조선8대명당의 목록에 대하여 ①신순겸 ②김번 ③김극뉴 ④정문도 ⑤정사까지는 거의 의견이 일치하고 나머지 3개혈에 대하여 한란, 이당, 신성용을 포함시키는 것이 다수설이다. 위의 명당에 대하여도 혈이 안된다는 小數의견이 있으나 한란의 묘에 대하여는 8대명혈에 포함시키지 않더라도 혈이 안된다는 의견은 없는 것 같다.
2. 시조의 내력과 행적 * 한란의 상계(上系)에 관하여 한씨세보는 중국에서 망명온 기준(箕準, 노자의 후손)이 마한의 왕이 되어 姓을 한씨로 바꾸었고 한란은 기준의 40세손이라 함에 대하여 학자들은 한국고유의 성이라한다. 한씨들은 기준을 1세조로 삼지 않고 고려 개국공신 한란을 기세조로 계산한다. * 한란의 생몰년도는 불명하다. 충북 영동 난곡리227-7에 있는 기적비(1986 년 건립, 보호각인 淸韓閣을 2011년 준공)에 의하면 난곡리에서 출생하여 학생을 가르치다가 중년에 청주 方井洞(현재의 方西洞)에 이주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기록에 의하면 왕건(877~943)은 918년(왕건41세) 궁예를 철원 명성산에서 격파하고(궁예는 도망처서 굶어 죽었다) 고려 왕위에 오른 다음 이듬해 송각(지금의 개성)으로 천도하였는데 한란을 송도 건설책임자로 임명하였다.(배현경이 후임 책임자) 私見인 즉, 황간지방의 토호이던 한란은 왕건에게 포섭되어 송악으로 이주하였다가 태조2년 이후에 청주 방서동으로 이주한 것 같다. 왕건의 세력지는 송악이고 궁예의 세력지는 철원이며 후백제의 도읍은 완주(지금의 전주)이었다. * 이후 한란은 방서동에 터를 잡고 方井을 파고 무농평(務農坪)을 개간하였고 무농亭을 짓고 주민들을 지도하여 영농에 힘쓴 결과 많은 재산을 모았다. 928년(고려태조11년) 왕건이 견훤을 토벌하기 위하여 방정동을 지나가자(이때 왕건에게 우물물을 떠주었더니 왕건이 네모우물이라 말한 것에서 방정이란 명칭이 붙여졌다) 물자를 조달하고 종군하여 전공을 세운 덕에 개국벽상공신 삼중대광태위에 녹훈되었다. 왕건은 925년부터 견훤을 공격하여 929년 고창(古昌, 지금의 안동)에서 대승하고 936년 후백제를 평정하였다. 私見으로, 왕건이 928년 방서동을 지나면서 한란과 합류한 것은 929년에 있은 안동전투로 가는 길이었다고 추측한다. 군사10만명이 방정물을 먹었다는 설화가 있으나 안동전투에 참전한 군사는 각기 2만명으로 추측된다. * 한란이 살던 마을을 대머리 마을(현재 대머리 공원이 있다))이라고도 하는데 방서동(다음지도상 용암동과 방서동 경계에 있다. 지번에 오류가 있을 수 있다)에는 시조제단비, 방정, 무농정이 있다. * 한 씨들의 방정리 봉심전말(奉審顚末)에 의하면 시조 이후 후손들이 흩어지고 유기(遺基, 버려진 터)되어 있었는데 1618년(광해10년)에 여명공 이진영이 은퇴 후 살 곳을 찾다가 현지인의 도움으로 방정리에서 한태위 유허지를 찾게 되어 우물을 준설하고 가옥을 셨고 가족을 데리고 왔다. 그러나 청주한씨 시조제단비 에 의하면, 청주목사 한백겸이 1605년(선조38년) 문중 문헌에 시조 마을이 방정리에 있었다는 등의 고증으로 고증하고 이조참판 동생 한준겸이 비문을 써서 시조제단비를 세웠다고 한다. 그렇다면 시조제단비가 있는데도 13년 뒤 잃어버린 시조 마을을 찾았다는 것은 이상하다.
3. 한란의 생몰년도 * 난곡리에 출생하여 장년에 청주로 이주하였다는 점, 918년 송악건설에 참여한 점, 왕건이 고려를 건국 한 918년에 왕건의 나이가 41세이었던 점을 종합해 보면 한란의 나이도 왕건과 비슷하였을 것이다 * 언제 죽었는가? 왕건은 925년부터 견훤을 공격하였는데 927년 팔공산 전투에서 신숭겸의 희생으로 겨우 목숨을 건졌고 929년 고창(古昌, 지금의 안동)전투에서 대승하였다. 이 전투를 계기로 견훤은 권위를 잃어 아들에게 배신당하고 935년 고려에 투항하고 후백제와의 일리천(一利川, 현재 선산읍 낙동강)전투에서 고려의 선봉장이 되었다. 일리천 전투는 쌍방이 모든 병력을 동원한 일대 결전이었는데 후백제는 6만5천, 고려는 8만7천명이 참전하였고 고려의 군사중에는 말갈등 북방유목민 9천명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 전투에서 견훤은 선봉장으로 큰 공을 세웠으나 울화병으로 사망하고 그의 아들들도 생포되어 처형되었다. 나무위키를 보면 고려의 참전 주요 인물 13인을 열거하였는데 한란은 보이지 않는다. 이전에 죽었을 가능성이 많다. * 私見을 말하자면 한란은 왕건과 동년배쯤 되고 후백제와의 최후 결전인 일리천 전투 이전에 사망하였던 것 같고(그런 연유로 시조마을이 쉽게 버려졌다?) 왕건이 928년 방서동을 지나면서 한란과 합류한 것은 929년에 벌린 안동전투로 가는 길이었다고 추측한다.
4. 시조묘 * 충북 가산리 산18 머미마을에 부부쌍분으로 모셨다. 집앞을 지나가는 태조에게 우물물을 대접하였는데 태조가 우물이 네모꼴인 것을 보고 방정(方井)이라 하였다. 현재 묘지아래 진응수가 나오는 네모꼴 우물(가산리546)이 있다. 나는 묘지아래의 우물이 태조가 말한 方井이라고 오해하고 청주 방서동의 유적을 알지 못한 탓으로 기존의 간산기에 오류를 범하였기에 다시 고쳐 쓴다.
* 묘소신도비에 의하면 1659년 파손된 것을 1663년 개장하여 석물을 복원하고 1768년 한익모가 찬하여 신도비를 세운다고 쓰여 있다. 방서동 시조제단비는 1605년에 건립하면서 이곳 신도비는 훨씬 뒤에 세워진 점으로 보아 아마도 몇 년간 파손상태로 있은 것이 아니고 상당기간 평장으로 있었던 것이 아닌가 추측한다. 시조이후 2~5세손은 비무장지대에 있어서 실묘지경이라 한다.
* 한란묘 행룡---멀리 속리산 서쪽에서 말티재를 넘고, 가덕산, 문의청남대 IC, 척산리 산75고지, 소조 국사봉, 신송리592 과협을 거쳐 주산을 세우고 혈처로 내려왔다. * 소국(小局)---혈장은 주산에서 중출로 가늘게 내려와 참외와 같은 산등을 만들고 멈추었는데 장유의 끝은 약간 솟아올라 밑에서 보면 금성처럼 생겼고 가까운 안이되었다.. 內청룡은 바로 앞에서 고개를 돌려 혈처를 배알하고 백호는 넓게 감싸는데 군(軍) 부대가 철망을 처서 물 빠지는 수구를 찾기 어려웠다.. * 한란의 묘소—부인 소씨합장 * 전순---이 묘의 특장(特長)중 하나이다. * 전순에서 본 전경---먼 산들이 몇 겹으로 비단 휘장을 둘렀다 * 머미마을 방정---이 묘가 명혈임을 인정하는 증표이다. * 눈에 보이는 것은 모두 아름답고 암공하는 강물도 아름답다. 어떤 이는 옥호 저수의 물형이라 했다(안동 김 씨 김번의 묘도 옥호저수형이라 하며 전순이 자체 안산이 되었으나 이 묘의 전순이 더 좋다). 병목에 묘가 쓰였고 수구가 불통주(不通舟) 격이므로 붙일 수 있는 이름이지만 전경에 펼쳐진 울타리를 고려한다면 옥등이 걸려 있는 옥등괘벽형으로 멀리까지 비추리라. 그림처럼 아름다워서 적이 생길 여지조차 없다. 명실상부한 조선 8대혈이다. 혹자는 영광 한광윤(6세손)의 묘를 두고 용사취회형으로 7왕비, 4정승의 발복지라고 하나 이 묘에 비할 바도 아니고 그 묘의 비문에는 의리장이라 쓰여있다.(상권, 영광 용사취회형 참조) 원천적으로 왕비(王妃) 부마(駙馬)란 권력다툼의 소산이고 이조말 세도정치는 망국의 원인이었다.(2023.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