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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교회 이현래 목사의 즉시복음
보시기에 좋았더라
2023. 3. 26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하시고 보시기에 심히 좋았다고 하셨다. 이것이 축복이다. 하나님이 심히 좋으면 그것이 축복이다. 성경은 모두 복음이고 없으면 안되는 말씀이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 이것이 맨 처음 복음이다. 만일 이 말씀이 없다면 우리는 무엇이겠는가. 내가 아무리 똑똑하다 해도 누가 지었느냐가 더 중요하다. 우리가 아메바에서 나왔다면 똑똑할지는 모르지만 좀 비참하지 않겠는가. 그래서 나는 성경에 있는 이 말씀이 복음이라고 생각한다. 이 말씀이 없으면 어차피 아메바 새끼밖에 더 되겠는가. 그래서 나는 이 말씀이 너무나 감사하다. 내 인생에 축복이다. 나는 하나님은 모르지만 나를 그분이 지으셨다는 것이 축복이다.
우리는 이런 나라에서 사는 것이다. 이것만도 우리의 자랑이다. 나를 지으신 아버지가 이런 분이다. 특별히 우리 한국 사람들은 조상이 어떤 분이라는 것을 자랑으로 여긴다. 이 모든 것을 하나님이 지으셨다. 이 말씀이 없으면 아무것도 없는 것이다.
그러니까 성경 말씀은 모두 복음이다. 왜 이 복음이 이렇게 가리워져 있고 사람들에게 축복이 안되었는가? 이것이 문제지 복음이 없어서 안되는 것이 아니다. 문제는 이것이 가려져 있기 때문에, 모르기 때문에, 좋아하지 않기 때문에 불행하는 것이다. 이래서 세상이 시끄럽고 어지럽다.
해결은 아주 간단하다. 하나님이 지으신 것이 다 좋으면 그것이 행복이다. 문제의 원천이 좋으면 물이 좋은 것 아니겠는가. 이 한 가지 사실이 빗나갔기 때문에 모든 것이 빗나간 것이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다고 하실 때는 이유가 있어서 좋다고 하셨지 그냥 좋다고 하셨겠는가. 그러므로 우리는 이분을 알면 된다.
“심히 좋았다.”하신 그분이 누굴까? 지으신 모든 것을 보니 좋았다고 하셨다. 자연을 보면 그 안에는 양육강식이 있고 우리가 볼 때 비참한 것이 많이 있다. 그런데도 보시기에 심히 좋았다고 하셨다.
우리가 알 수 없는 말이다. 무엇을 보고 좋다 하셨는지 우리는 알기 어렵다. 우리 같으면 그렇게 만들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실험 결과에 따르면 어떤 동산에 토끼만 놔두면 어느 날 다 없어져 버린다고 한다. 그러니 양육강식도 다 필요해서 있는 모양이다. 우리가 볼 때는 사자에게 잡아먹히는 양이 비참하다. 그런데 우리는 모르지만 그렇게 자연히 조정되는 것 같다.
좌우지간 하나님은 나를 보고 좋아하셨다는 것이다. 그것뿐이다. 다른 것은 몰라도 나를 보고 참으로 좋아하셨다는 것, 나라는 인간을 보고 좋아하셨다는 것, 이것이 축복이다.
그러나 그 나는 어떤 나인지 잘 몰랐다. 왜냐하면 세상에서 ‘저 사람은 정말 하나님이 좋다 하셨던 그 사람이다.’라고 보여지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런 사람은 드물다. 혹시 있을지 모르겠는데 찾아보기 어렵다. 만나보기도 어렵다. 혹시 있다 해도 그 사람 혼자뿐이지 다른 사람은 아니다.
그런데 우리가 예수라는 사람을 만났을 때 이 사람을 보았다. 예수는 어떻게 보면 기이한 사람이고, 어떻게 보면 어려운 사람이고, 어떻게 보면 모르는 사람이다.
아브라함도 짐작이 가고 이삭도, 모세도 짐작이 된다. 다윗도 짐작이 되고 다말도 짐작이 된다. ‘이들이 이래서 그랬구나.’ 하고 알게 되는데 예수라는 사람을 만나면 도무지 알 길이 없었다. 사람들은 모두 예수를 믿고 있는데 믿고 있는 그 예수를 모른다.
나도 그러했다. 예수를 기록한 복음서를 보면 내가 알 수 있는 예수는 20% 정도밖에 안되었다. 그것도 내 입장에서 보아서 내게 복이 되는 부분만 알았지 그 외에는 전혀 몰랐다. 그래서 ‘나 같은 사람이 어떻게 다 알겠느냐.’ 이렇게 생각하고 그것으로 만족했다. 먹을 것이 많고 양식이 많아서, 나는 그것을 먹고 또 그것을 교회에 나눠주었다.
그래서 우리 교회를 말할 때 천하에 없는 교회라는 말까지 나왔다. 자유롭고 평안하고 형제간에 우애 좋고……, 세상에 이런 교회도 드물다. 그래서 그런 말을 듣고 교회에 온 사람이 더러 있다. 그런데 그것은 한계가 있다. 교회라는 것이 항상 좋은 것도 아니고 항상 똑같은 것이 아니기 때문에 늘 불안정하다.
요즘 우리 교회를 보고 어떤 사람은 ‘왜 교회가 이렇게 쪼가리가 나 있느냐?’ 이렇게 생각하고, 오히려 어떤 사람은 “그러면 그렇지 뭐 너희가 천하에 없는 교회라고 하느냐.”라며 비난하는 사람도 있다. ‘왜 저런가?’ 하고 찾는 사람도 있다. 이것도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해야 되지 우리가 이렇게 되고 싶어서 되었겠는가. 어쩌다 이렇게 된 것이고, 또한 그렇게 되어가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나는 ‘문제는 그 예수라는 사람이 누군지를 아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다.’라고 생각한다. 나도 만족하고 좋았지만 누가 “이제는 어떻게 합니까?”라고 물으면 “어떻게 하기는 이 사람아, 사람이 사람으로 태어나서 사람답게 살다가 사람으로 죽으면 되는 것 아니냐. 무엇을 더 바라느냐.”라고 대답했다. 나는 그것으로 만족했기 때문에 여러 사람에게 이렇게 대답했다. 그러나 그것은 완전한 대답이 안되었다. 내가 예수를 그렇게 좋아한다 해 놓고 마지막에 와서 그 정도면 곤란하지 않은가.
그런데 참으로 특별한 동기가 생겨서 내가 예수를 추적하게 된 것이다. 거기서 나는 “내가 만날 만한 예수, 우리가 만날만한 예수를 만났다.”라고 소리를 친 것이다. 내가 만난 예수는 여러분도 만날 수 있는 사람이다. 왜냐하면 나도 죽고 그분도 죽으니까, 다른 것은 모르지만 이것 하나는 같지 않은가.
그래서 ‘야! 이렇게 쉬운 예수도 있네.’라고 생각했다. 예수를 알려고 그렇게 헤맸는데 ‘이렇게 쉬운 예수를 놔두고 어떤 예수를 찾았던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런데 이에 대해 여러가지 말이 나왔다. 그래서 ‘야, 이상하다 더 알아보자. 더 알아보자.’ 하고 찾을 수밖에 없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예수는 만민이 싫어하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 사람의 마지막을 보니까 만민이 다 싫어한다. 어느 한 사람도 좋아할 수 없는 사람이다.
아마 그런 줄 알고 예수를 믿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뭔가 나보다 낫고 뭔가 나에게 도움이 되는 분으로 알고 예수를 믿지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샤람, 버려진 사람, 누구도 환영하지 않는 사람, 무덤에서 시체마저 없어져 버린 사람으로 알고 믿겠는가.
우리는 시체마저 없는 까닭을 몰랐다. 부활해 버려서 시체가 없다고 한다. 그런데 부활해서 온 예수를 직접 만난 사람들이 사도들이다. 40일을 함께 살았다고 한다. 그런데도 그들에게 예수는 전혀 모르는 사람이었다. 승천하는 날 제자들이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라고 물었다고 한다. 전에 물었던 것을 또 물었던 것이다. 십자가 이전에 묻던 말을 계속 물었다는 것은 제자들이 예수를 몰랐다는 뜻이다. 부활하셨어도 몰랐다는 말이다. 제자들에게 예수는 모르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오순절에 큰 충격을 받고 베드로는 서서 말하기를 “너희가 죽인 예수를 하나님이 살리셨다.”라며 유대인들을 향해서 담대하게 외쳤다. 그래서 기독교가 시작된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그 마져도 없지 않은가! 그것마저도 없으니 모든 것이 막연하다.
바울은 우리가 함께 죽었으니까 함께 산다고 했다. “같은 모양으로 죽었으면 같은 모양으로 산다.” 이렇게 말했다. 그러나 함께 죽은 일이 없다. 전에 내가 로마서를 말할 때 여러가지 말을 했다. 그러나 어느 것도 확실성이 없었다.
요한일서에는 엉뚱한 말이 나온다.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자가 아니면 세상을 이기는 자가 누구냐(요일5:5).” 이 말을 거꾸로 하면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자는 세상을 이긴다는 것이다. 기독교인 중에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지 않는 자가 있겠는가. 하지만 세상을 이기는 자가 있는가? 기독교가 이렇게 오래 되었고 교회가 이렇게 오래 되었지만 이 말에 대답을 못한다.
요한은 바울이나 다른 사도들이 다 죽은 후에도 오래 살았다. 이 말은 바울이 뿌려놓고 간 교회의 실상을 다 보고 한 말이다. 그러니 오늘날 교회를 보고는 더 하지 않겠는가. “나는 예수를 하나님 아들로 믿습니다.” 하는 기독교인에게 “그러면 세상을 이깁니까?”라고 물으면 할 말이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를 다시 알아야 한다. 이것이 예수를 다시 알아야 하는 동기다. 예수를 다시 알아야 한다.
신약성서 학자로 유명한 불트만이라는 사람은 예수가 신화라는 사람들이 많이 일어나니까 “아니다. 신화가 아니다.” 하고 비신화화운동을 했다. 자기가 할 수 있는 데까지 다 까발려 보고 신화라고 할 수 있는 부분을 다 떼 버렸던 것이다. 그러고 나니까 아무것도 없었다.
그러니 할 말이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모르는 사건들 안에서 실존적 결단을 한다고 했다고 한다.
우리는 그런 말을 듣고 살아왔다. 내가 그러했다. 물로 포도주를 만들었는데 도대체 그것을 알 수 없었다. 포도주 한 잔을 얻어먹고 나면 끝이었다. 그래서 나도 그렇게 결정했다.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분은 모르지만 이것이 내 인생에 어떻게 도움이 되는가?’ 하고 “우리 인생에 예수라는 분이 오면 썰렁했던 잔치집 같던 내 인생이 풍성해진다.” 이렇게 결단하고 받아들였다. 그래서 좋았다.
다른 문제도 다 그러했다. 오병이어로 오천 명을 먹이고 부스러기만 열두 광주리가 남았다고 한다. 그러니 이것을 믿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모르게 되었다. 그런데 나는 거기서 “나는 생명의 떡이요” 하신 그분의 말씀을 따라서 ‘야, 저분이 우리의 양식이구나. 내가 저분을 먹으면 생명의 양식을 먹는구나.’ 이렇게 받아들였다. 이것이 실존적 결단이다. 모르니까 이렇게밖에는 더 이상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런데 불트만이라는 사람이 마지막에 한 말이 그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예수의 십자가 사건만은 신화가 아니라 역사다. 진실이다.”라고 했다는 것이다. 나는 거기서 힘을 얻어서 예수를 십자가에서 찾기로 했다.
그 결과 마지막이 이러하다.
그는 어디에도 쓸 데 없는 사람이다. 버릴 수밖에 없다. 남이 아니라 내가 그러하다. 여러분이 그러하다. 그런 예수가 어디 필요하겠는가. 나와 여러분만 그러하겠는가. 세상 모든 사람이 다 같다.
그런데 하나님이 왜 그래놓았을까? 이것도 생각해봐야 한다. 하나님 자신이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셨는데 왜 그렇게 놓아 두셨을까? 뭔가 우리에게 보여주셔야 되지 않는가. 하나님이 마지막 보여주신 예수는 그런 예수다. 아주 쓸모없는 사람이다.
그런데 자세히 보면 그 사람이 나다. 나고 여러분이다. 남이 아니다. 그 사람은 나보다 더 많이 버려진 사람이고, 완전하게 버려진 사람인데 우리는 거기서 잃어버린 나를 찾게 된다. ‘아, 하나님이 만들었다는 사람이 이런 사람이구나.’라고 알게 된다. 우리는 하나님이 만드신 사람을 모른다. 내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모른다. 그런데 거기서 보면 ‘아, 이 사람이 나구나.’라고 알게 된다.
어떤 사람도 이것을 피해갈 길이 없다. 언젠가는 만나게 된다. 언젠가는 이 사람을 만나야 한다. 피할 수 없는 우리 인생의 운명이다. 어느 한 사람의 운명만이 아니라 피할 수 없는 모든 사람의 운명이다.
나는 이 사람 안에서 때로는 살 길을 얻었다. ‘아, 여기 감추어진 비밀이 있구나.’라고 알고 그분을 받아들이고 나니까 내 인생이 아주 가벼워졌다. 아무 문제가 없게 되었다. 모든 문제가 사라져 버렸다.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모르는 그 모든 문제들이 다 사라졌다. ‘왜 이런 문제가 나에게 있었는가?’ 하는 모든 것이 사라졌다.
전에는 그런 것도 내 나름대로 ‘이래서 이런 문제가 온다. 저래서 저런 문제가 온다.’라고 해석했다. 그러나 내가 알아도 해결할 수 없었다. 세상 사람 말대로 팔자소관이라는데 내가 어쩌겠는가. ‘왜 나는 재수없이 10대 소년으로 결핵에 걸려서 모든 소망이 다 끊어졌던가.
그래도 살았으니 다행이라고 알아야지 어쩔 수 없지 않은가. 죽은 사람이 얼마인가. 나와 한 병실에 누워 있던 나와 나이가 같은 사람은 죽어서 나갔다. 그런데 나는 거기서 살아서 나왔다. 우리가 모르는 것이다. 의학적으로 이유가 다 있겠지만 왜 그 사람은 죽었고 왜 나는 살았는지 우리는 모른다. 하지만 그것을 떠나서 내 인생이 기구했다. 그것뿐이 아니다. 모든 문제에 해답이 없었다.
그런데 이 자리에 오면 완전한 해답이 생긴다. 그리고 원인이 없어져 버린다. 그것은 내가 아니다. 진짜 나는 예수 안에 있는 그 사람이다. 그 사람이 잃어버린 나다. 그런데 그 사람을 딱 보고 나니까 내 모든 짐이 없어졌다.
예수님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편히 쉬게 하겠다.”고 하셨다. 크게 위로가 되었다. 하지만 짐이 다 없어지는가. 가벼운 것은 없어졌지만 짐이 계속 왔다. 그런데 이 자리에 오니까 비로소 ‘아, 이 말이 그말이구나.’라고 알게 되었다. 나는 원인 모를 짐을 지고 있었던 것이다.
여러분도 잘 생각해 보기 바란다. 여러분에게 일어나는 여러가지 일들이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근원을 다 알겠는가. ‘저 사람은 안그런데 나는 왜 이런가. 딴 사람은 안그런데 나는 왜 이런가.’ 이에 대한 답이 없다. 옆에서 위로한다고 했지만 그것이 위로가 되겠는가.
내가 병중에 있어 보니 위로해 주는 것이 반갑지 않았다. 부담스럽고 아무도 오지 않았으면 좋겠고, 망해 보니까 망한 것을 위로해 주면 더욱 슬퍼졌다. 돈을 보태주면 좋은데 돈은 안주고 위로만 하니 그런 사람이 정말 싫었다. 그래서 나는 아침을 먹으면 그런 말을 안들으려고 일찌기 예배당으로 올라갔다. 예배당이 동네 뒤에 높은 데 있어서 거기는 아무도 없었다. 아무도 만나고 싶지 않아서 나는 거기서 하루종일 있다가 저녁에 내려왔다. 슬픈 사람에게 위로라고 해 주면 더 슬프다.
그런데 이 예수를 만나니까 위로하고 말 필요도 없다. 다 원인무효되고 판이 다른 판으로 바뀐다. 내가 잊어버리려고 해서 잊게된 것도 아니고 무시하려고 해서 무시한 것도 아니다. 해결하려고 해서 해결된 것도 아니다.
내가 막판에 이르렀을 때 내 생각에 내게 필요한 것은 돈밖에 없었다. 돈 외에는 내게 필요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돈만 있으면 그래도 숨을 쉬겠다.’고 생각했는데 아무도 나에게 돈을 주는 사람이 없었다. 망하면 돈을 더 안준다. 잘될 때는 돈을 갖다 맡기는데 망하면 있던 돈도 빼가버린다. 기업이 망할 그렇게 망한다. 잘되어 갈 때는 돈을 갖다 맡긴다. 우리가 주식을 사 주면 그 돈은 기업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그런데 그 기업이 망하면 너도 나도 다 주식을 팔아버린다. 그러면 그 기업의 빚이 더 많아지고 만다. 이상하게 잘 되면 도와주는데 망하면 아무도 안도와준다. 그래서 더 비참해진다.
그런데 친구의 도움으로 나는 집을 빠져나왔다. 그래서 학교라는 데를 가니까 돈 문제는 어디로 싹 사라졌다. 공부해야 되는 것만 문제지 다른 것은 아무 문제가 없었다. 밥 먹여주고 잠 재워주고 공부만 하라는 것이었다. 세상이 이렇게 판이 달라질 수 있겠는가! 나는 공부를 좋아한다. 공부를 하면 잘되니까 아주 신나는 길을 걸었다. 그래서 내가 판이라고 하는 것이다. 이유가 있다.
미국에 가면 누가 나에게 영어로 물어볼까봐 조마조마하다. 그런데 칼 기를 타면 거기서 해방된다. 영어를 몰라도 된다. 그래서 칼 기가 돈이 더 비싸다. 그래도 한국 사람은 다 칼 기를 타고 다니는 것이다. 칼 기에 타자마자 시끌벅적하다. 500여명이 타서 다 한마디씩 하니 얼마나 시끄럽겠는가. 말 못하는 세계에서 말을 하는 세계로 해방되었으니 판이 얼마나 달라졌는가. 미국에 가면 영어 못하는 것이 부끄럽다. 그런데 칼 기를 타면 부끄러운 것이 없어진다. 내가 변한 것이 아니라 판이 바뀐 것이다.
여러분도 문제가 있거든 문제가 없는 세계로 옮겨와야 한다. 거기서 해결할 수 있는 것도 있고 해결할 수 없는 것도 있다. 해결할 수 없는 것이 문제지 해결할 수 있는 것은 문제도 아니다. 그래서 나는 이 사람을 만민에게 소개하려고 하는 것이다. 내 판을 바꿔 준 사람이니까 다른 사람 판도 바꿔 주지 않겠는가! 똑같다. 나에게 해 주신 것이나 다른 사람에게 해 주신 것이나 똑같다. 누구라도 이분을 만나면 그 사람의 세계가 싹 열려 버린다.
그 다음에는 나와 아무 상관도 없다. 자기대로 다 잘되는데 내가 무슨 관계가 되겠는가. 아무 관계가 없다. 그래서 나는 무거운 내 짐을 다 벗었다.
나는 좋은 양식을 얻어다 좋은 양식을 먹여야 하는 부담이 있었다. 나도 기뻐서 했지만 그래도 못하면 안되니까 부담이었다. 또한 나는 좋은 품행을 보여줘야 했다. 그러나 나도 사람인데 그렇게 쉽게 되겠는가. 여러분이 모르는 내가 또 있다. 감추고 싶은 내가 또 있다. 이런 짐을 지고 살아야 했던 것이다. 그런데 이제는 판이 바뀌었으니까 그럴 필요가 없게 되었다.
우리는 세상을 살 때 조심조심해야 살아야 한다. 조금만 방심하면 밑으로 떨어지게 마련이다. 여러분이 나를 좋아하시지만 내가 여러분을 실망시킬 일이 없겠는가. 그렇지 않다. 아주 크게 실망시킬 일들이 얼마든지 있다. 이것을 공개하면 여러분은 다 기절초풍하고 달아날지 모른다.
그래도 어느 날인가 필요하면 하려고 한다. 왜냐하면 이제 나는 다른 판에 살고 있으니까 이제는 해도 상관없다. 다 달아나도 상관없다. 다 그 자리인데 달아나도 어디로 달아나겠는가. 예수 안으로밖에 달아날 데가 없다. 그러면 또 같이 만나게 된다. 거기서 만나면 또 만난다.
나는 이 복음이 너무나 신기한 복음이라고 생각한다. 여러분도 경험하고 있는 분들이 많을 것이다. 형제 자매들이 나와서 간증하는 것은 그냥 말하는 것이 아니고 옛날에 간증하는 것과 다르다. 지금 간증하는 것은 전혀 차원이 다르다.
젊은이들이 나와서 팔팔뛰고 있지 않은가! 이들은 무엇을 아는 사람들이 아니다.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들이다. 성경도 모르고 교회도 모른다. 세상도 잘 모른다. 어디 가도 별로 자기를 내놓을 수 없는 사람들이다. 그런데 어떤 새 판을 만나니까 저렇게 뛰는 것이다. 그러니 다른 판에서는 이해할 수 없는 사람들이다.
그래서 비난하는 사람도 있고, 비아냥하는 사람도 있고, 제지해야 한다는 사람도 있고 여러가지다. 하지만 아무도 제재할 수도 없고 반대할 수도 없다. 자기들이 잘 사는데 무엇 때문에 가서 간섭하겠는가. 자기들이 행복하다는데, 잘산다는데 내가 가서 뭐라고 하겠는가. 참으로 이상하다. 남이 잘산다는데 왜 뭐라고 하겠는가. 남이 잘살면 축하해 줘야 되지 왜 나무라겠는가.
나도 오랫동안 예수 믿고 교회생활을 했지만 이런 일이 있으리라고는 한번도 상상도 못했다. 한번도 상상해 본 일이 없다. 나는 10살부터 예수를 믿었다. 그런데도 한번도 본 일도 들은 일도 없다. 그래서 신기하다. 야, 내가 죽기 전에 이런 것을 다 보다니! 이런 신기한 일을 다 보다니! 하나님이 하셨다고 해도 좋고 아니라고 해도 좋다. 신기하다.
MX세대를 자세히 보자. 심오한 말씀이 있는 것도 아니다. 성경 지식이 있어서도 아니다. 우리가 볼 때는 아무 이유가 없다. 그런데 자기들끼리 저렇게 좋다고 한다. 이것이 비밀이다. 생명의 신비고 비밀이다. 판이 다른 것이다. 그래서 그런 것이다. 나는 이 새판으로 모든 사람이 옮겨왔으면 하는 간절한 소망이 있다. 그러면 이제 모든 사람이 이 세계를 누리게 될 것이다.
나는 문만 열어주었을 뿐이지 지금부터는 나와 관계된 것이 아니고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 그 사람과 관계된다. 그래서 내 짐이 없어져 버렸다. 나도 그 사람이 되고 자기들도 그 사람이 된다.
MZ 세대는 “너도 사람, 나도 사람”이라고 한다. 마찬가지로 다 사람이다. 누구도 그렇지 않은 사람이 없다. 사실은 아닌 사람이 아무도 없다. 이렇게 젊어서 알면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쓰임이 된다.
다 늙어서 알아봤자 얼마나 쓰이겠는가. 나는 죽을 날이 멀지 않으니까 아주 바쁘다. 그래서 다른 말은 일체 하지 않으려고 한다. 다른 일로는 관계도 갖지 않으려고 한다.
어차피 돌아올 것이니 누구나 그럴 사람, 그러고 있을 사람이다. 어차피 돌아온다. 내가 오라고 하지 않아도 결국 스스로 오게 된다. 그러니 있는 사람들을 격려나 하고 이래야 되지 내가 억지로 할 것도 없다.
그런데 이것이 요즘 전염병처럼 퍼져간다. 초대교회에서 그러했다. 예수 믿는 사람이 증가하니까 염병이라 했다. 염병이라는 말은 전염병이라는 뜻이다.
우리는 코로나로 3년을 마스크를 쓰고 고생을 했다. 전염이 되니까 방어해야 한다. 전염 속도가 빨랐으면 인류가 멸망할뻔 했는데 이제는 방역지침을 해제했다고 한다. 해제한다고 그 균이 없어진 것이 아니다. 코로나 바이러스가 약해졌을뿐이다. 면역을 가진 사람이 늘어났을 뿐이지 코로나 균은 여전히 있다.
하나님 나라도 하나님이 스스로 만드시지 우리가 만들 수 없다. 하나님 나라를 만들려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노력하고 있는가. 적어도 이천 년을 그렇게 노력했는데 하나님 나라는 커녕 세상만 더 커져 버리고 말았다. 교회는 그 세상 속에서 일부분에 불과하게 되었다.
어떤 곳에는 아예 교회가 없어지고 있다. 시간이 더 갈수록 교회들은 없어질 것이다. 문명이 커져 버리니까 교회가 필요없게 된 것이다. 옛날에는 병 고치러 교회 갔지만 이제는 병 고치러 교회에 갈 필요가 없다. 우리 나라 같은 경우에는 세계적으로 가장 의료보험제도가 잘 되어 있는 곳이다. 2,3천 원이면 병원에 가는데 왜 교회에 가겠는가. 이제는 병 고치는 교회도 한물 갔고, 신비를 찾는 교회도 한물 갔다.
옛날에는 방언만 해도 신기했다. 밤새도록 목이 쉬도록 기도한다니 부러웠다. 나는 그것이 부러워서 나도 해 보려고 했지만 결국 못하고 말았다. 나도 상당히 그것 때문에 시간을 많이 보냈어도 경험을 못했다. 되는 사람은 잘되는데 안되는 사람은 안된다. 그런데 이제는 그것도 필요없게 되었다.
방언을 안해도 알아듣는 말을 하루 종일 하는데 방언이 무슨 필요가 있는가. 방언하는 사람들끼리 만나면 자기들끼리 방언으로 말하기도 하고 박수치고 찬송하기도 한다. 삼각산에 가 보니 아침에 일어나서 군데 군데 모여서 찬송을 하는데 그 찬송이 알아듣지 못하는 방언찬송이었다. 그때는 그것이 부러웠다.
그런데 이제는 부러울 이유가 없다. 앉으면 찬송이고 앉으면 간증이고, 잠잘 줄 모르고 하고 있는데 무엇 때문에 그런 것이 필요하겠는가. 성경에도 알아듣는 말을 해야 되지 알아듣지 못하는 말을 하면 어찌 되겠느냐고 바울이 말했다. 그러니 기왕 하려면 남이 알아듣는 말을 하는 것이 좋지 않겠는가.
그런데 이것이 지금 보편화되고 있다. 아무도 따로 하나님을 알라고 할 필요가 없게 된다고 하셨다. “이래야 안다. 저래야 안다.” 할 필요도 없다는 것이다. “기도를 열심히 해라. 금식을 해라. 성경을 많이 공부해라.” 할 필요가 없게 되었다. 안해도 다 알게 되는데 뭐하러 하겠는가. 어린아이로부터 어른에 이르기까지 다 하나님을 알기 때문에 하나님을 알라고 할 필요가 없어진다는 것이다. 이것이 예레미야서에 있는 말씀이다. 새 언약의 말이다.
새 언약의 보편화, 그 날이 왔다. 어린양이 통치하는 세계가 왔다. 그날이 오겠는가 싶었는데 왔다. 생명수가 흐르는 통치가 있다. 밤이 없고 어둠이 없고 애곡하는 것이나 슬퍼하는 것이 없고 모든 부정적인 것이 다 사라져 버린 세계가 왔다. 비록 대구, 이 작은 골짜기에서 있는 일이지만 젊은 형제 자매들에게 오지 않았는가!
주님만 오시면 모든 것이 해결된다. 그래서 요한계시록은 “주 예수여 어서 오시옵소서. 그의 은혜가 있을지어다. 아멘.” 이렇게 마쳤다. 옛날에는 이것이 해석이 안되는 말이었다. 언제 그런 나라가 오겠는가. 그런데 지금 우리 눈 앞에 오고 있다. 우리는 보고 있다. 아직 전세계로 퍼지지 않아서 그렇지 우리는 보고 있다.
씨만 있으면 된다. 씨 하나가 있으면 퍼지는 것은 순간적이다. 원래 사과가 있었겠는가. 씨 하나가 모든 사과가 된 것 아닌가! 씨가 나타났다. 실험농장에서 나타났다. 이제는 갖다 배급하면 된다. 누구든지 배급하면 된다.
이것도 너무 신속하게 배급이 되고 있다. 생각할 수 없도록 신속하게 배달되고 있다. 지난 번에 기택이가 양자역학에 대해서 말하는데 신기했다. 동에서 서에서 번쩍번쩍 한다고 한다. 시간도 없고 거리도 없고 번쩍번쩍 전달이 된다고 한다. 그런 날이 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