숙종 때 재상 허목과 그 아내 이야기
조선 숙종 때 허목이란 재상이 있었습니다. 그는 남인의 거두로서 노론의 영수인 송시열 등 노론세력을 몰아내고 정권을 잡은 유명한 사람인데, 포양 양포에 가면 허묵에게 쫒겨 귀양살이한 송시열의 유적이 남아있고, 포항시에서는 현재 그곳을 복원하여 관광 자원화하고 있습니다. 2018년 6월 달 신문에 허목이 쓴 글이 국보로 지정되었다는 기사가 났던데, 그는 한석봉 못지않게 대단한 명필가였던 모양입니다.
허목은 벼슬이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정승(좌의정)의 자리에 있었고, 살림은 풍족했으며, 더욱이 빼어난 미모를 지닌 아내를 두었습니다. 허묵은 어여쁜 아내를 무척 사랑했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아침에 일어나니 하인들이 저들끼리 수근 거리는 것이었습니다. 허묵은 하인들에게 물었습니다.
“무슨 일이냐?”
하인 중에서 한 사람이 대답했습니다.
“마님이 아니 계십니다.”
“마님이 아니 계시다니, 정녕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하고 있구나.”
“아침에 일어나 보니 안 계셨습니다요. 소인들은 그 이상도 이하도 모르고 있사옵니다.”
허목은 아내가 쓰는 내당으로 부리나케 달려갔습니다. 과연 하인들의 말대로 그곳에는 아내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시중을 드는 몸종 아이는 분명 간밤에 잠자리에 드는 것을 보았다고 했습니다. 잠자리에 든 아내가 밤사이에 연기처럼 사라진 것이었습니다.
감히 어느 댁이라고, 누가 야밤에 월장을 하여 보쌈을 해 갈수 있었겠는가? 그렇다고 하늘로 솟거나 땅으로 꺼진 것도 아닐 터였습니다. 그런데도 온데 간데 자취가 없으니 귀신이 곡할 노릇이었습니다. 하룻밤 사이에 사랑하는 아내가 행방불명이 된 변고를 당한 재상은 사방으로 사람을 놓아 수소문했지만 종적이 묘연하기만 하였습니다. 그렇게 몇 년이 흘러갔습니다. 허목은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아내를 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어사가 된 그의 친구(박문수)가 찾아왔습니다. 어사 친구는 수인사가 끝나자 말했습니다.
“내가 재 너머 숯막을 지나오다가…”
“어서 계속하게…”
“숯 굽는 영감의 아낙으로 보이는 여자를 보았는데, 아무래도 자네 부인을 닮아 있더란 말일세.”
“뭐라구?”
“내가 잘못 보았는지도 모르지. 자네 부인이 숯장이의 아내가 되어 있을리는 만무하고…아마 얼굴생김이 비슷한 여자가 있었던 게야.”
어사 친구의 말을 들은 허목은 그대로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아내가 숯 굽는 영감의 아내가 되어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지만, 닮았다는 말만으로도 가서 확인을 해보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허목은 기어이 재 너머 심산유곡에 있는 숯막을 찾았습니다. 그가 숯막에 당도해 보니, 숯 굽는 영감의 아낙은 허름한 옷을 입고 얼굴이 온통 숯검정으로 칠해져 있지만 자기 아내임이 틀림없었습니다. 세상에 있을 수 없는 일이 발생한 것입니다. 마침 숯막에는 영감이 없었습니다. 아내는 그를 보자 깜짝 놀랐습니다.
“어째서 당신이 이곳에 와서 갖은 고생을 하며 살고 있는 것이요. 보쌈이라도 당한 것이요.”
“지금의 영감과는 무관한 일입니다. 그는 아무 잘못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된 일이요?”
“제 발로 영감을 따라 온 것입니다. 죄를 묻는다면 달게 받겠습니다.”
허목은 더욱더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숯 굽는 영감의 마누라가 지체 높은 선비의 꾐에 빠져 영감을 버리고 야반도주를 했다면 이해 못 할 일도 아니지만, 남부러울 것 없는 환경에서 호의호식하며 잘 살던 반가(班家)의 아녀자가 자기를 사랑하는 남편을 버리고 도주하여 신분이 낮은 숯 굽는 영감과 살고 있다는 것은, 아무리 이해를 하려고 해도 이해가 되지 않는 일이었습니다. 부인도 자기자신이 저지른 일에 대해 납득을 할 수가 없다고 했습니다.
“집을 나오던 날 밤, 저는 분명히 잠을 자기 위해 이부자리 속에 들었습니다. 그때 창문을 통해‘숯 사시오'하는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그 숯 사라라고 외치는 목소리는 내가 언젠가 많이 들었던 목소리 같았고, 나를 밖으로 불러내는 목소리 같았습니다. 나는 지남철에 이끌리듯 밖으로 나와 숯장사를 따라 이곳까지 오게 된 것입니다. 이곳에 당도하자 마치 전에 살았던 곳 같은 느낌을 받았습니다. 이곳에서 비록 굳은 일을 하며 구차하게 살고 있지만 고생한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습니다. 그 동안 평온하며 행복했습니다.”
허목은 당시의 법도에 따라 자기를 배반한 아내에게 벌을 내려야 마땅하겠지만 차마 아내를 죽일 수는 없었습니다.
“이곳에 살지 말고 백리 밖으로 거처를 옮기시오. 이곳에 계속 있다면 남의 눈 때문에라도 나는 당신에게 벌을 줄 수밖에 없게 되니까요.”
말을 마친 허목은 돌아섰습니다. 그의 발걸음은 천근 무쇠를 매단 것처럼 무거웠습니다. 사랑하던 아내가 자신을 배반했는데, 여전히 아내도 자신도 그 정확한 이유를 알 수가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산마루에 있는 바위에 걸터앉자 깊은 생각에 잠겼습니다.
‘정녕 무엇 때문에 아내는 자신을 배신했던 것일까?’그는 점점 깊숙이 생각에 빠져들었습니다. 그는 어느 순간 자신을 잊는 무념무상(無念無想)의 경지에 이르렀고 그순간 전생이 보였습니다.
전생에 자신은 선객(禪客)이었습니다. 당시 그는 탁발승이 되어 떠돌다가 바로 자기가 지금 앉아 있는 산마루의 바위에 앉아 쉬어 간 적이 있었습니다. 바위에 앉아 있으니, 이 한 마리가 스물거리는 것이 느껴졌습니다. 그는 바지를 뒤집어 이를 손으로 집어내었습니다. 스님이어서 차마 이를 죽일 수가 없어서 바위 위에 버리고 다시 길을 떠나갔습니다. 내버려진 이는 마침 이곳에서 머물다 간 산돼지의 몸에 붙어 생명을 연장했습니다.
이는 참선을 한 스님의 살을 뜯어먹은 인연으로 사람으로 환생하여 그 살을 뜯어먹은 세월만큼을 전생의 스님이었던 현생의 허목과 결혼하여 살았습니다. 그러나 선객이 이를 버렸으므로 지금의 아내도 허목을 버리고, 산돼지가 환생한 숯 굽는 영감에게로 이끌려와 살게 된 것이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법화경(法華經)』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욕지전생사(欲知前生事) 전생의 일을 알고자 하는가
금생수자시(今生受者是) 금생에 받은 것이 그것이다.
욕지래생사(欲知來生事) 내생의 일을 알고자 하는가
금생작자시(今生作者是) 금생에 짓는 그대로이다.
콩 심은데 콩 나고 팥 심은데 팥 나지 콩 심은데 팥 나고 팥 심은데 콩이 날리 없는 것처럼, 이 세상에 원인 없는 결과는 없습니다.
오늘의 나는 어제 내가 만든 결과이며, 내일의 나는 오늘 내가 어떤 삶을 사느냐에 달린 것입니다. 전생에 짓고, 금생에 받고, 금생에 짓고 내생에 받고…여기서 말하는 전생은 내가 태어나기 이전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 이전은 모두 전생이며, 내생은 다음생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 이후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삼생(과거생· 현재생· 미래생)이 마치 개미 채바퀴 돌 듯 얽혀서 돌아가고 있는 것이 우리 인생사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누구를 탓하고 누구를 원망할 수 없습니다. 모두가 내 업보요 내 책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