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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I. 인도 불교사
7. 해탈解脫과 열반涅槃
1) 해탈解脫
앞에서 이미 논의한 대로 싯다르타는 오랜 수행 끝에 연기의 법칙을 발견하였고, 그 법칙을 무상-고-무아(비아)의 형태로 체계화하였다. 예를 들면 잡아함「염리경厭離經」은 ‘색色은 무상하다. 무상한 것은 곧 괴로움이요, 괴로움은 곧 나[我]가 아니며, 나가 아니면 또한 내 것[我所]도 아니다.’라고 하였다. 그리고 나아가서「무상경無常經」은 오온의 무상함을 바르게 관찰하면[正觀], 싫어하여 떠날 마음이 생기고[生厭離], 이어 기뻐하고 탐하는 마음이 없어지는데[喜貪盡], 이것을 심해탈心解脫이라 한다고 하였다.
무상→고→무아를 바르게 관찰하면 염리→이탐→해탈의 과정을 거치게 된다는 것으로, 종합하면 무상으로부터 시작하여 무상→고→무아(비아)→염리→이탐→해탈의 단계로 간단히 요약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색(수·상·행·식)이 무상하다는 것을 바르게 관찰하면 고-무아(비아)에 이르고, 그것을 알았으므로 염리→이탐하게 되어 인간의 굴레인 윤회에서 벗어난다는 것이다. 무상-고-무아(비아)라는 체계의 최종 결과는 해탈인 것이다.
부처님은 여기서 존재(五蘊)의 무상→고→무아를 깨닫게 되면 그것이 염리(厭離)→이탐(離貪)→해탈(解脫)하게 되는 체계를 나란히 제시하고 있다. 이를 정리하면 무상→고→무아는 이론적 사상체계이고 염리→이탐→해탈은 행위적 실천체계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즉 사상체계는 실천체계로 연결되고 있으며, 이 가르침대로 관찰하고 깨닫게 되면 해탈과 열반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增谷文雄 지음, 홍사성 옮김,『근본불교 이해』 p. 127.)
해탈이란 결박이나 장애로부터의 해방을 의미한다. 그런데 본래 해탈이 업과 윤회를 벗어난 상태를 일컫는 말이기 때문에 윤회사상의 탄생과 동시에 발생하였다고 추측해 볼 수도 있겠다. 이미 불교가 탄생하기 이전부터 요가수행이나 우파니샤드 철학 계통에서도 널리 퍼져 있던 사상인 것이다.
연기를 기반으로 한 불교에서도 해탈을 강조하고 있는 것을 보면, 당시 인도인들이 가진 보편적인 정서였음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이들 경들이 해탈을 말하기위해 모두 ‘색은 무상하다.’라는 것으로 시작한다는 사실이다.
10. 해탈경(解脫經)
“색은 무상하다. 무상한 것은 곧 괴로움이요, 괴로움은 곧 나가 아니며, 나가 아니면 또한 내 것도 아니다. 이렇게 관찰하는 것을 진실한 바른 관찰이라 하느니라. 이와 같이 수·상·행·식도 무상하다. 무상한 것은 곧 괴로움이요, 괴로움은 곧 나가 아니며, 나가 아니면 또한 내 것도 아니다. 이렇게 관찰하는 것을 진실한 바른 관찰이라 하느니라.
거룩한 제자들아, 이렇게 관찰하면 그는 색에서 해탈하고, 수·상·행·식에서 해탈하나니, 나는 이러한 것을 ‘태어남·늙음·병듦·죽음·근심·슬픔·괴로움·번민에서 해탈하였다’고 말하느니라.” (동국역경원 한글대장경. 10. 해탈경(解脫經). )
이 경에서도 앞에서 살핀 바와 같이 색은 무상하고, 무상한 것은 곧 괴로움이지만, 괴로움은 내가 아니며, 내 것도 아니라는 것을 바르게 관찰하면 해탈하게 된다고 서술하고 있다. 역시 시작은 ‘무상’이다. 이와 같이 불교의 초기 경전들은 하나같이 색 무상하다는 전제를 시작으로 색․수․상․행․식의 무상하다고 하고 있다.
요컨대 그 시작은 항상 색·수·상·행·식의 “오온五蘊”인 것이다. 뒤에 쓰인 그 유명한 대승경전『반야심경般若心經』에서도 ‘오온이 모두 공空하다[五蘊皆空]’라고 하여 역시 오온으로부터 시작한다. 그럼 왜 이들 경들은 공통적으로 오온을 시작점으로 하고 있는가?
2) 십이처설十二處說과 사대四大 그리고 오온五蘊
천지자연의 법칙이나 혹은 삼라만상의 근원이 무엇인가 하는 것은, 인간이 탄생한 이래 계속되어온 인류 최대의 관심사다. 그런데 대부분의 종교가 신과 같은 초월적인 존재로부터 우주의 원리를 유추해가는 반면에, 불교는 인간이 인식할 수 있는 구체적 현실세계로부터 그 해답을 찾는다. 인간으로부터 시작하여 관찰과 사색을 통해 세상 만물의 원리를 탐구해 내려고 하였던 것이다. 그 관찰의 산물이 불교에서 주장하는 “12처설十二處說”이다.
‘12처설’은 불교의 분류체계 중 하나로, 간단히 말해 존재 전체를 인간의 마음[心]과 마음작용[心所]으로 보고, 그것을 12가지 처處로 분류 분석한 법체계이다. 12처설의 ‘12’는 안眼·이耳·비鼻·설舌·신身·의意의 “6근六根” 과 색色·성聲·향香·미味·촉觸·법法의 “6경六境”을 가리키고, ‘처(處, āyatana)’는 마음과 마음작용을 생장生長시키는 문(門, dvāra)이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12처설의 구조는 인간의 마음인 ‘육근’은, 인식주체와 마음의 작용인 ‘육경’인 인식객체로 이루어진 것이다.
다시 말해 육근인 눈·귀·코·혀·몸·의지의 여섯 개 감각(인식)기관은 인식주체인 인간존재를 나타내고 있고, 육경인 색·소리·냄새·맛·촉감·법의 여섯 가지 인식대상은 인식객체인 자연환경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세상을 인간과 인간을 둘러싼 자연으로 구분하고, 이를 이론화 한 것이다.
이런 발상은 “인간에 의해 인식되지 않는 것은 일단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봐야 한다.”는 불교의 기본 입장을 강력하게 나타내고 있다. 표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십이처설十二處說 | |
인식주체 | 인식객체 |
인간존재 | 자연환경 |
눈·귀·코·혀·몸·의지 眼耳鼻舌身意 | 색·소리·냄새·맛·촉감·법 色聲香味觸法 |
육근六根 (육처六處, 육입六入) | 육경六境 (육진六塵) |
인간이 인식하지 못하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전제를 깔고 있기는 하다. 그러나 육근이 인식의 주체인 인간이라면, 육경은 인간을 둘러 싼 자연환경과 그 현상을 나타내고 있고, 그러므로 해서 인간이 감지하고 있는 우주 전체는 이 십이처에 모두 포섭된다고 할 수 있겠다. 인간 싯다르타가 본 일종의 세계관이자 우주관인 것이다.
어느 때 생문生聞이라는 바라문이 붓다를 찾아와 “일체(一切, sarva)”가 무엇인가고 물은 적이 있었다. 당시 인도에서 ‘일체’라는 말은 ‘모든 것(everything)’을 의미하는 말로서 우리들이 살고 있는 세상, 세간世間 혹은 우주 전체를 가리키는 대명사였다. 우주의 모든 것과 현상들을 의미하여 바라문은 붓다에게 그의 세계관, 우주관을 물은 것이다.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어느 때 부처님께서 사위국 기수급고독원에 계셨다.
이 때 생문(生聞) 바라문이 부처님 계신 곳으로 찾아와 서로 문안 인사를 나누고, 한쪽에 물러나 앉아서 부처님께 아뢰었다.
“구담이시여, 이른바 일체(一切)라는 것은 어떤 것을 일체라고 합니까?”
부처님께서 바라문에게 말씀하셨다.
“일체란 곧 12입처(入處)를 일컫는 말이니, 눈과 빛깔 · 귀와 소리 · 코와 냄새 · 혀와 맛 · 몸과 감촉 · 뜻과 법이 그것이다. 이것을 일체라고 하느니라. 만일 또 어떤 사람이 ‘그것은 일체가 아니다. 나는 이제 사문 구담이 말하는 일체를 버리고 따로 다른 일체를 세우겠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다만 말만 있을 뿐이니, 물어도 알지 못하여 그 의혹만 더 커질 것이다. 왜냐 하면 경계가 아니기 때문이니라.”
이 때 생문 바라문은 부처님의 말씀을 듣고 기뻐하며 받들어 행하였다. (동국역경원 한글대장경. 319. 일체경(一切經).)
붓다는 일체란 곧 ‘12입처入處’라고 하면서, 12처설을 설하고 있다. 그리고 그것에 대한 설명으로 ‘만일 12입처(12처)를 떠나 일체를 논한다는 것’은 다만 언설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그것은 경계境界가 아니기 때문에 의혹만 더할 뿐이라는 것이다. 현실의 실상이 아니기 때문에 희론戱論에 빠지게 될 것이라는 충고다.
이렇게 붓다는 인간의 인식 주체와 객체인 십이처의 영역만으로 세상 만물을 논하고 있다. 모든 존재는 인간의 인식을 중심으로 존재한다는 불교의 기본적 세계관을 잘 보여 주고 있다고 하겠다. 지금의 시각으로 보아도 붓다의 세계관은 지극히 현대적이고 과학적이라고 하겠다. 붓다는 한 바라문에게 이렇게 말한다.
“삼명三明을 갖춘 바라문으로서 일찍이 한 사람이라도 범천을 본 자가 있는가? 만일 본 일도 없고 볼 수 없는 범천을 믿고 받든다면, 마치 어떤 사람이 한 여인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그의 얼굴을 본 일도 없고, 이름도 거처도 모른다는 것과 무엇이 다르리오.” (『장아함』卷16「삼명경」, 고익진 지음,『불교의 체계적 이해』 p. 24.)
바라문이 받드는 신을 사랑하는 여인에 비유하고 있는데, 극단적이긴 하지만 이는 마치 공자가 “귀신鬼神을 어떻게 섬기면 되겠느냐?”는 자로子路의 질문에 “산 사람도 못 섬기는데 어찌 신령을 섬길 수 있으랴[未能事人 焉能事鬼]”고 한 것과 같은 맥락에서 이해 될 수 있다. 오히려 서술에 있어서는 공자보다 더 직선적이고 진전된 사상으로, 붓다는 현실세계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말하자면 12처설은 인간의 감각기관을 통한 인식만을 믿을 만한 근거로 받아들이면서, 인간을 중심으로 한 세계관을 단순하지만 설득력 있게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한편, 당시 인도에서는 사람의 육신을 비롯한 일체 만물을 구성하는 네 가지 기본 요소로 지地ㆍ수水ㆍ화火ㆍ풍風의 “사대四大”가 받아들여지고 있었다. 이들 중 ‘지地’는 육신을 지탱하는 뼈와 살을 구성하는 요소이면서 만물을 소생시키는 원천으로, 만물의 재료가 되기도 하면서 굳고 단단한 성질[堅城]로 만물을 싣는다. ‘수水’는 인체의 피와 땀 등 몸의 수분을 구성하고, 습윤濕潤을 바탕으로 만물을 성장시키며, 만물을 포용하고 조화하는 역할을 한다. ‘화火’는 열성熱性으로 몸의 기운과 체온을 유지하게 하고 만물을 성숙시킨다. 그리고 ‘풍風’은 호흡과 바람 등 만물을 변화시키는 역동성이자 움직이는 성질[流動性]로 만물을 키운다.
붓다 또한 당시 인도의 사대설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는데, ‘십이처 중에서 눈·귀·코·혀·몸의 ‘오근五根’과 색·소리·냄새·맛·촉감의 ‘오경五境’은 각각 사대로 분석된다고 설하면서, 그러한 사대가 화합한 것이 곧 물질적 형태인 색(色, rupa)’이라고 규정하였다. 그리고 이 물질적인 요소인 색에, 비물질적인 요소인 수受·상想·행行·식識을 추가한 것이 바로 “오온설五蘊說”이다.
물질적인 요소인 색을 바탕으로 개체를 지속적으로 존속시키는 작용, 즉 느끼고[受], 생각하고[想], 작용하고[行], 식별하는[識] 정신적인 기능까지를 모두 포함하고 있는 것이다. 12처 중 안·이·비·설·신과 색·성·향·미·촉은 ‘색온色蘊’으로 통합하고, 의와 법은 ‘수온受蘊, 상온想蘊, 행온行蘊, 식온識蘊’으로 확대한 것이다.
그러므로 ‘오온설’은 인간존재의 근저를 이루고 있는 물질적인 요소에 정신적인 네 가지 요소를 추가해서 물질과 정신을 한 번에 아우르고 있고, 붓다가 ‘오온이 무상하다’고 한 것은 바로 ‘일체一切가 무상하다’고 한 것과 같은 뜻으로 받아들이면 되겠다. 초기 경전은 곳에 따라 5온五蘊, 12처十二處 혹은 18계十八界로 일체를 표현하고 있는데, 이는 모든 것, 세상, 세계, 세간을 뜻하고 있는 것이다.
3) 해탈의 종류
인간이 만일 무상과 고 그리고 무아의 이치를 바르게 깨달으면, 괴로움과 근심을 초월하고, 탐욕을 극복하며, 윤회의 고리를 끊고 해탈에 이르게 된다는 것인데, 여기서 한 가지 주목할 것은 ‘기뻐하고 탐하는 마음이 없어지면 이것을 “심해탈心解脫”이라 하느니라.’라고 하여 특별히 ‘심해탈’을 거론하고 있다는 것이다.
해탈로 번역되는 빠알리어는 다양한데, 그중 자주 등장하는 용어가 ‘위목카(vimokkha, 解脫)’와 ‘위뭇띠(vimutti, 解脫)’다. 위목카-해탈은 해탈의 성취과정을 선정(禪定, jhāna)의 단계와 같이, 1) ‘세간적’, ‘출세간적’, ‘그보다 더 출세간적’이라는 세 단계나 혹은 2) 여덟 단계인 팔해탈(八解脫, vimokkha)로 나눈다. 그리고 위뭇띠-해탈은 집중과 지혜의 작용에 따라, ‘심해탈(心解脫, cetovimutti)’, ‘혜해탈(慧解脫, paññāvimutti)’, 그리고 ‘양분해탈(兩分解脫, ubhatobhāgavimutti)’로 구분한다. 여기서 심해탈은 일반적으로 ‘마음의 풀려남’을, 혜해탈은 ‘지혜를 통한 풀려남’을 그리고 양분해탈은 ‘양쪽 길의 풀려남’을 의미하는데,「무상경」등에서 말하는 심해탈은 위뭇띠-해탈의 하나인 것이다.
한편, 심해탈은 또 ‘일시적으로 기쁨이 수반되는 심해탈’과 ‘흔들리지 않는 심해탈’로 나누어진다. ‘일시적인 심해탈’은 색계色界 또는 무색계無色界 선정禪定을 통한 해탈을 의미하고, ‘흔들리지 않는 심해탈’은 사향사과四向四果를 통한 출세간의 해탈을 의미한다. 특별히 ‘흔들리지 않는 심해탈[不動心解脫, akuppā cetovimutti]은 탐진치가 완전히 소멸된 아라한의 경지에 이른 마음의 해탈을 이른다.
「마하웨달라경(Mahāvedalla sutta)」은 이처럼 다양한 심해탈에 대해서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이들은 네 번째 선정을 성취하여 얻는 ‘괴로움도 즐거움도 없는(adukkhamasukhā) 심해탈’, 무표상에 마음을 기울여서 얻는 ‘표상이 없는(animittā, 無相) 심해탈’, 사무량심을 통해 사방으로 한량없는 마음을 채우는 ‘[네 가지] 한량없는(appamāṇā, 無量) 심해탈’, ‘무한한 의식의 영역(viññāṇañcāyatana, 識無邊處定)’을 극복하여 성취하는 ‘아무것도 없는(ākiñcaññā, 無所有) 심해탈’, ‘자아나 자아에 속하는 것은 없다’라고 성찰하여 얻는 ‘비어있는(suññata, 空) 심해탈’, 그리고 ‘표상이 없는 심해탈’ 가운데 ‘흔들리지 않는 심해탈’이다. 특히, ‘흔들리지 않는 심해탈’은 이들 중에 최상의 상태라고 설명한다. 경전을 통하여 더욱 선명해지는 것은 심해탈에는 여러 가지가 있으며, 이들은 다양한 수행 방법에 의해서 성취될 수 있다는 것이다. (「Itivuttaka」(27)는 별빛이 달빛에 비교되지 못하는 것처럼, 좋은 공덕(puñña)이라고 할지라도 ‘자애(mettā)에 의한 심해탈’의 16부분의 1만큼도 되지 못한다고 설명한다. (정준영 (서울불교대학원대학교),「두 가지 해탈(解脫)의 의미에 대한 고찰 - 니까야(Nikāya)를 중심으로」.))
더 이상의 논의는 생략하지만, 여기서 주목할 것은 이 세 가지 해탈 중에서 ‘혜해탈’과 ‘양분해탈’은 불교수행의 최종목표인 열반을 의미하지만, 대부분의 심해탈은 열반을 의미하지는 않는다는 사실이다. 심혜탈의 경우, 1) 혜해탈과 함께 성취되었을 경우와, 2) ‘흔들리지 않는 마음의 해탈[不動心解脫]’을 얻은 경우에만 열반이라고 한다는 설명이다. 그리고 심해탈의 경우 사마타 수행을 통하여 얻어지는 집중과 관련이 있는 반면에, 혜해탈은 위빠사나 수행을 통하여 얻어지는 지혜와 관련이 있다고 한다.
그러나 논자는 이 세 가지 종류의 해탈에 있어 이러한 구분은, 표면적으로 두드러지는 기능을 나타내는 것이지, 서로 양립할 수 없는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이를테면 깨달음의 과정에서 각각의 해탈은 서로 보완의 관계에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사리불(舍利弗, 사리붓다)은 지혜제일의 혜해탈자이고, 목건련(目健連, 목갈라나)은 신통제일의 심해탈자로 알려져 있는데, 그렇다고 사리뿟따는 선정수행을 하지 않았고, 목갈라나 존자는 위빠사나 수행을 하지 않았다는 의미는 아니라는 것이다. 단지 현저하게 드러나는 특징으로 구분되었을 뿐이라는 것이 논자의 결론이다.
정리하면, 오온이 무상하다는 것을 직관하는 것만으로는 마음의 번뇌를 완전히 멸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해탈과 열반은 동의어가 아니라는 뜻이기도 한데, 오온이 실체가 없다는 것을 지적知的으로도 해탈해야 하고[慧解脫], 수행을 통해 마음에서도 그것을 멸해야[心解脫] 한다는 것이다. 열반은 이 두 가지가 갖추어졌을 때 비로소 실현되는 것으로 둘의 조화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복잡해졌다. 우선은 심해탈과 혜해탈의 경계가 모호하고, ‘흔들리지 않는 마음의 심해탈’은 어떻게 이룰 수 있는지 명확하지가 않다. 그 뿐만 아니라 어디까지 알아야 안다고 할 수 있으며, 얼마나 수행을 해야 그 경지에 이를 수 있는가? 진정한 열반은 어떻게 성취되는가? 혼란스럽기만 하다.
그러나 다행인 것은 사실 이런 복잡한 이론적 논의는, 붓다 사후 후대로 내려오면서 점차 심화되었을 것으로 보인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당시는 열반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었는지 필드의 목소리(?)를 직접 들어 보는 것이 이해에 도움이 되지 않을까?
4) 니르바나, 열반
어느 때 잠부카다카라는 한 유행자가 붓다의 제자인 지혜제일이자, 혜해탈자인 사리불舍利弗을 찾아가 묻는다.
“사리풋타여, 열반, 열반 하는데 도대체 열반이란 무엇입니까.”
“벗이여, 탐욕의 소멸, 진에의 소멸, 우치의 소멸, 이것을 가리켜 열반이라 한다.”
(중략)
“그런데 사리풋타여, 그 열반을 실현하는 데는 어떤 방법이 있는가.”
“벗이여, 열반을 실현하는 데는 좋은 방법이 있다. 그것은 성스러운 여덟 가지의 바른 길(八正道)이다. 여덟 가지의 바른 길이란 정견ㆍ정사ㆍ정어ㆍ정업ㆍ정명ㆍ정정진ㆍ정념ㆍ정정이다. 벗이여, 이것이야말로 열반을 실현하는 바른 길이며, 거기에 이르는 방법이다.”
먼저 열반이란 도대체 무엇인가라고 묻고 있는데, 열반이란 용어가 당시 사람들에게는 다소 생소했었던 모양이다. 당시에는 잘 쓰이지 않았거나 혹은 싯다르타에 의해 새롭게 주창된 개념일 것으로 추측되기도 하는데,어쨌든 그 근원은 붓다의 초기 설법에서 쉽게 찾을 수 있다. 불교 초기에 속하는 붓다의 설법 중에 ‘연소燃燒’라는 제목으로 전해지는 경이 있는데, 유럽의 불교 학자들은 이것을 예수의 ‘산상 수훈’에 비교하여 ‘산상 설법’이라고 부르기도 하는 경전이다.
“비구들이여, 모든 것은 타고 있느니라. 활활 타오르고 있느니라. 먼저 이 사실을 너희는 알아야 한다. 그것은 어떤 뜻인가? 비구들이여, 눈이 타고 있다. 마음도 타고 있다. 모두 그 대상을 향해 활활 타오르고 있다. 비구들이여, 그것들은 무엇으로 말미암아 타는 것이랴. 탐욕의 불꽃에 의해 타고, 노여움의 불꽃에 의해 타고, 어리석음의 불꽃에 의해 타고 있느니라.”
십이연기설은 인간이 갖는 모든 번뇌의 근원이자, 모든 고통의 원인이 무명에서 비롯된 갈애渴愛라고 하였다. 사성제는 고의 근원인 갈애의 소멸해야 한다고 하는데, “세상이 불타고 있다!”로 유명한 이『연소경(燃燒經, 아딧땅경Ādittaṃ)』은 갈애를 말하는 대신 탐욕과 노여움, 그리고 어리석음의 불꽃이 타고 있다고 말한다. 즉 탐진치 세 가지 번뇌를 불꽃에 비유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붓다의 새로운 설명 방식이었다. 이제까지 붓다는, 고조된 욕망을 말하는 데「갈애」渴愛 라는 말을 사용했었다. 그러나 이제, 같은 욕망의 고조된 상태를 나타내면서「연소」라는 말을 쓴 것이었다. 그 새로운 용어는, 불교의 흐름을 따라 큰 영향을 미쳤다. 후세의 불교인들이 흔히「욕망의 불꽃」이라 했을 때, 그것도 이 계열에서 생겨난 용어로 보아야 하리라. 그리고, 붓다가 말하고자 한 것은, 이 비유적인 표현을 따라 이야기한다면, 결국은 그 연소하는 욕망을 가라앉히는 일이라 할 수 있겠다. 그리고, 번뇌의 불꽃이 완전히 꺼질 때, 거기에 나타나는 시원하고 편안한 경지, 그것이 열반임에 틀림없다. 열반이라는 술어는 이런 인생의 현실에 대한 생각을 배경으로 하여, 이상의 경지를 뜻하는 말로서 생겨났던 것이리라. (增谷文雄 著/李元燮 譯,『阿含經 이야기』 pp. 181~182.)
붓다는 갈애, 즉 욕망의 불꽃을 지혜의 바람으로 꺼버리라는, 새로운 표현을 한 것이다. 붓다는 이 비유를 자주 사용하였던 것 같은데, 어느 때 바차婆蹉라는 외도의 방문을 받아 문답을 주고받은 적이 있었다. 그는 여러 가지 형이상학적인 문제에 대해 붓다의 소견을 묻는데, 붓다는 그런 문제가 해탈, 열반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하여 견해 표명을 거부한다. 그러자 바차는 문제를 바꾸어 해탈, 열반에 대해 묻는다. 붓다는 이에 다음과 같이 문답을 이어간다.
“나는 이제 다시 그대를 위해 설하리라. 바차여, 만약 여기에 불이 타고 있다 할 때, 그대는 그것을 불이 타고 있다고 이해할 수 있겠는가?”
(중략)
“바차여, 그러면 그 불은 무엇으로 말미암아 타고 있느냐고 묻는다면 그대는 어떻게 대답하겠는가?”
“그것은 나무가 있기 때문입니다.”
“옳은 말이다. 그런데 바차여, 그 불이 다 타고 꺼졌을 때, 그 불은 어디로 갔느냐고 묻는다면 그대는 어떻게 대답하려는가?”
“대덕이시여, 그것은 적당한 물음이 아닙니다. 그 불은 나무가 있었으므로 탔던 것이요, 이제는 나무가 없어졌기에 꺼진 것입니다.”
(중략)
“이 인생은 괴로움으로 차있다. 그리고 그것은 탐욕과 노여움과 어리석음 때문이다. 사람이 어리석어서 격정의 희롱하는 바가 되어 있는 까닭이다. 그래서 나는 그런 격정을 없애는 방법을 가르치는 것이다. 이리하여 그 격정이 없어지고 보면 불안이니 괴로움이니 하는 것도 없어질 수밖에 없다. 그것은 마치 훨훨 타오르던 불도 그 땔감이 다하고 나면 꺼져 버리는 것과 같다. 그것을 나는 열반이라 하는 것이다.” (아함경 이야기 p.176, 마즈다니 후미오 지음, 정병조 옮김,『현대불교입문』p. 115. 중부 경전 72, 파차구다화유경. 한역 동본, [잡아함경] 34:24 見.)
열반이란 ‘니르바나nirvāna’의 음역어다. 본래는 ‘불어 끄다.’라는 의미의 nir(out)와 vā(to blow)의 합성어로 ‘불어 끔’, ‘불어서 끄는 것’ 혹은 ‘불어서 꺼진 상태’ 등을 뜻한다. 니르바나는 니원泥洹, 열반나涅槃那 등으로 음역하기도 하고, 멸도滅度, 적멸寂滅, 원적圓寂, 무위無爲, 부작不作, 무생無生 등으로 다양하게 의역하는데, 타고 있는 불을 불어서 끄거나 혹은 바람이 불어와 꺼버린다는 소멸(extinction)을 의미한다. 이를테면 타오르는 번뇌의 불꽃을 지혜로서 꺼버려, 번뇌가 완전히 소멸된 상태를 가리키는 말이다.
열반이란 이렇게 탐욕과 노여움, 그리고 어리석음의 불꽃이 꺼진 상태로, 현대적으로는 영원한 평안 또는 완전한 평화를 의미하는데, 미혹迷惑과 집착執着을 끊고 온갖 번뇌에서 벗어난 최고의 경지境地를 말한다. 활활 타는 욕망의 불꽃을 꺼버릴 때 비로소 최상의 안락安樂인 열반적정에 이르게 될 것이다. 앞서의 모든 논의 또한 이 열반의 경지를 알기 위한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 열반은 생사를 넘어선 깨달음의 세계로 불교의 궁극적인 실천 목표이다.
나는 이렇게 들었다. 언젠가 부처님은 사밧티의 제타 숲인 아나타핀디카 동산에 계셨다. 그때 장로 라다(羅陀)가 부처님이 계신 곳으로 와 부처님을 찾아뵙고 이렇게 물었다.
“부처님 마라(摩羅) 마라 하는데 도대체 무엇을 마라라고 하는 것입니까?”
“라다여, 색이 있으면 거기에는 마라가 있다. 죽이는 자가 있고 또 죽는 자가 있다. 라다여, 그러므로 색을 마라라고 보아야 한다. 색을 죽이는 자로 보고 또 죽은 자로 보며 또한 병이고 종기이며 가시이고 아픔이고, 아픔의 근본이 된다고 보아야 한다. 이렇게 보아야 그것이 올바른 관찰이다.”
그리고 부처님은 다시 수ㆍ상ㆍ행ㆍ식에 대해서 똑같이 관찰할 것을 가르쳤다. 글자 라다가 다시 물었다.
“스승이시여, 그러면 도대체 무엇 때문에 그와 같이 바르게 관찰해야 합니까?”
“라다여, 염리하기 위해서 바르게 관찰해야 한다.”
“스승이시여, 그러면 무엇 때문에 염리해야 하는 것입니까.”
“라다여, 해탈하기 위해서다.”
“스승이시여, 무엇 때문에 해탈해야 하는 것입니까.”
“라다여, 그것은 열반을 위해서다.”
“스승이시여, 그러면 도대체 무엇 때문에 열반해야 하는 것입니까.”
“라다여, 그것은 훌륭한 질문이 아니구나. 너는 질문에도 한계가 있다는 것을 모르는 모양이구나. 라다여, 출가수행자가 청정의 삶을 살아야 하는 까닭은 오직 열반에 이르기 위한 것이다. 열반이야말로 궁극적인 것이며 수행의 마지막 목표이니라.” (增谷文雄 지음, 홍사성 옮김,『근본불교 이해』 pp. 128~129. 죽이는 자(殺者): killer. mēretā, māra와 뜻이 비슷한 말. 죽는 자(死者): to die. mīyati, māra와 뜻이 비슷한 말. 남전『상응부경전(23ㆍ1)』「魔」. 한역『잡아함경(6ㆍ10)』「魔」. )
다시 돌아가서 사리불은 열반이 무엇인가고 묻는 잠부카다카의 질문에 (붓다의 가르침대로) 그칠 줄 모르는 욕심[貪]과 노여움[瞋], 그리고 어리석음[癡]의 소멸이라고 말한다. 탐진치貪瞋癡 ‘삼독三毒’을 없애는 것이 곧 열반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열반을 실현하는 방법을 묻는 질문에는 ‘팔정도八正道’를 제시하고 있다. 열반은 다른 것이 아니라 결국 팔정도 수행인 것이다.
열반을 특별한 어떤 것이라고 상상하는 사람들에게 사리불은, 번뇌의 소멸이 곧 열반이고 청정한 수행이야말로 열반에 이르는 길이라고 말한다. 그러니까 불교는 쾌락이나 명예를 추구하는 것도 아닌, 축재 같은 인간의 욕망을 채워주겠다는 것이 아닌, 그렇다고 불가사의한 힘을 얻기 위해서도 아닌, 오로지 청정한 수행만을 내세우고 있는 것이다.
종교의 세계는 인간의 욕망을 비추는 거울이라고 할 수 있으리라. 우리네 인간은 온갖 욕망을 지니고 살아간다. 맛있는 음식을 먹고, 아름다운 옷을 걸치고, 이성을 사랑하고, 재산을 축적하고, 명예와 권세를 쥐고자 한다. 헤아려 보면 인간의 욕망에는 한이 없다. 더욱이 인간은 합리적인 노력으로 그것을 달성할 수 없을 때, 하느님이나 부처님의 힘에 의해 그것이 충족되기를 바란다. 즉 세속적 수단이 좌절됨으로써 종교적 수단에 매달리려 하는 것이다. 이리하여 종교의 세계도 또한 인간이 지니는 온갖 욕망의 소용돌이가 되어 버린다.
그런데 이렇게 종교의 세계에 밀려오는 욕망에 대해서, 세상의 종교 지도자들은 흔히 영합하는 태도를 위하는 것 같다. 어떤 신을 섬기면 부자가 될 수 있다고 말하는 이도 있다. 어떤 수행을 쌓으면 장수할 수 있으리라고 주장하는 이도 있다. 그 밖에도 병을 고친다든지, 장사를 잘 되게 한다든지, 심지어 입신출세로부터 성욕에 이르기까지, 그대로 종교적 대상에 연결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쾌락 · 명예 · 축재 같은 궁극적인 선이 될 수 없는 것들이 닥치는 대로 채택되어 이치에 맞지 않는 해결책이 제시되고 있는 일이 허다하다. 그리고 세상사람 중에는 종교란 본래 그런 것이려니 생각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 (마쓰야 후미오 지음/이원섭 옮김, 알기쉬운 불교1『불교개론』 p. 98.)
그렇다. 세상을 살면서 인간의 욕망을 완전히 무시하고 살 수는 없다. 그러나 이러한 욕망이란 끝이 없게 마련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 욕망을 실현하기 위해 온갖 수단을 동원한다. 결국은 “절망할 수밖에 없는 기교”에 목숨을 걸고 매달리고 있는 것이다. 잘되기를 바라고 부단히 노력하는 것, 끝나지 않는 노력 또한 번뇌일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그 욕망들을 제어하고 열반에 이를 수 있는 것일까? 그 답을 찾기 위해 다시 처음의 의문으로 돌아가자!
우리는 앞서 ‘어디까지 알아야 안다고 할 수 있으며, 얼마나 수행을 해야 그 경지에 이를 수 있는가? 진정한 열반은 어떻게 성취되는가?’라고 물었다. 물론 선종에서는 간단히 그 질문에 대답한다. 이 “의문이 없어질 때!”라고. 이러한 사실들을 무심히 그대로 받아들이면 화날 일도 실망할 일도 없어질 것이다. 최소한 줄어들거나 그 강도가 약화 될 것이다. 오로지 “수행만이 답”이라는 것이다. 그것도 묵묵하게! 그러나 그래도 의문이 가시지 않는다면 다시 필드로 나가 붓다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 보자.
5) 열반의 척도, 두 개의 화살
어느 때 붓다는 제자들에게 묻는다.
“비구들이여, 가르침을 듣지 않는 범부(凡夫)는 낙수(樂受)(상쾌한 느낌)도 느끼며, 고수(苦受)(상쾌하지 않은 느낌)도 느끼며, 비고비락수(非苦悲樂受)상쾌도 불쾌도 없는 느낌)도 느낀다. 가르침을 받은 성제자(聖弟子)도 역시 즐거움을 느끼며, 괴로움을 느끼며 또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감정을 느낀다. 그러면 비구들이여, 가르침을 받는 성제자와 가르침을 듣지 않는 사람들과 어떤 점에 있어서 다른 것일까?” (마즈다니 후미오 지음, 정병조 옮김,『현대불교입문』p. 159.)
여기서 ‘수受’는 물론 색․수․상․행․식, 즉 오온의 ‘수’다. ‘느끼다’는 의미로 오늘날의 심리학에서 말하는 감수感受와 감정感情에 해당하는 개념이라고 할 수 있는데, 즐거움이나 괴로움을 처리하는데 있어, 가르침을 받은 사람과 받지 못한 사람의 차이가 무엇이냐고 묻고 있는 것이다. 간단히 말해 수행을 하면 어떤 면에서 달라지냐는 것이다.
우리에게도 낯설지 않은 “수행하지 않은 사람과 수행한 사람은 어떻게 다를까?”라는 의문이다. 붓다 또한 지금 우리들처럼 이러한 고민에 빠진 적이 있었을 것이고, 그때를 회상하며 제자들에게 직접적으로 물은 것이다. 갑작스런 이 질문에 제자들은 대답하지 못하고 스승에게 설명해주기를 부탁한다. 이에 붓다는 다음과 같이 설법을 이어간다.
“비구들이여, 가르침을 듣지 못한 사람들은 고(苦)인 수(受)에 접하여 걱정하며 피곤하며 서러워하며 가슴을 치면서 울며 어찌할 바를 모를 것이다. 그들은 두 가지 종류의 수(受)를 느낄 것이다. 몸에 속하는 수(受)와 마음에 속하는 수(受)이다. 예를 들면 비구들이여, 한 개의 화살에 맞으며, 또 다시 두 번째의 화살을 맞는 것과 같으니라.” (마즈다니 후미오 지음, 정병조 옮김,『현대불교입문』p. 160.)
사람들은 괴로움[苦]을 접하면(이것이 첫 번째 화살이다), 걱정하며 피곤하며 서러워하며 가슴을 치면서 울며 어찌할 바를 모른다. 마음속에는 불쾌감이 일어나고 노여움이 생긴다. 그러한 감정은 그들을 사로잡고 그들을 괴롭힐 것이다. (이것이 두 번째 화살이다.) 다시 말해 가르침을 받지 못한 범인들은 “신체적인 감수感受”인 고苦의 첫 번째 화살을 맞으면, 연이어 근심하며 한탄하고 가슴을 치면서 헤매는 두 번째의 화살, 즉 “정신적인 감수”를 연이어 맞게 된다는 것이다.
이런 것을 석존은 ‘제이의 화살(矢)’이라는 말로 비유적으로 표현하고 있지만 그것은 결국 감정을 어떻게 처리하느냐 하는 문제라고 생각한다. ‘과문(寡聞)의 범부(凡夫)’ 즉 이제까지 가르침을 듣지 못한 사람들은 이러한 수(受)가 어떻게 하여 생기는지를 모르며 어떠한 성질의 것인지도 모르며, 또, 어떻게 하면 불행에서 피할 수 있는 가를 모른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첫 번째의 화살을 맞으며 또 다시 두 번째의 화살을 받으면서 걱정하며 서러워하여도 어찌할 바를 모른다는 것이다. (마즈다니 후미오 지음, 정병조 옮김,『현대불교입문』 pp. 161~162.)
그렇다면 ‘유문有聞의 성제자聖弟子’, 즉, 가르침을 들은 사람들은 어떤가? 그들 또한 즐거움도 느끼며 괴로움도 느낀다. 과문寡聞의 범부凡夫처럼 멋지게 첫 번째 화살을 맞는 것이다. 그런 점에 있어서는 가르침을 들은 사람이나 듣지 못한 사람이나 다를 바가 없다. 어떤 면에서는 수행을 한 사람들이 오히려 더 민감하게 받아들인다. 깨어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가르침을 받은 제자는 어떤 점이 다를까? 이는 아마 여인의 손길에 ‘고목에 한암하니 한기가 돈다.’고 한 <파자소암婆子燒庵>의 화두가 묻고 있는 것과 동일한 질문일 것이다. 쫓겨난 그 스님은 두 번째 화살은커녕 솔직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첫 번째 화살조차 당당하게 맞지 못했다. 붓다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비구들이여, 예를 들면 첫 번째의 화살이 맞았다하더라도 또다시 두 번째의 화살에는 맞지 않는 것과 같으니라. 그와 마찬가지로 비구들이여, 가르침을 들은 성제자는 고수와 접촉한다 하여도 걱정하지 않으며 피로하지 않으며 서러워하지 않으며 가슴을 치면서 울지 않으며 어찌 할 바를 모르지 않으리라. 그는 다만 하나의 수(受)를 느낀다. 그것은 몸에 속하는 수(受)이며 마음에 속하는 수(受)가 아니리라.” (마즈다니 후미오 지음, 정병조 옮김,『현대불교입문』 pp. 162~163.)
수행자는 어떻게 감정을 처리해야 하는가? 가르침을 받은 수행자는 걱정하지 않으며 피로하지 않고, 서러워하지 않으며 가슴을 치면서 울지 않는다는 것이다. 첫 번째 화살인 ‘신체적인 감수’는 어쩔 수 없이 맞았다 하더라도, 두 번째 화살인 ‘정신적인 감수’는 피한다는 것이다. 그들은 괴로움에 관계된 모든 것에 대해 노여워하지도 않으며, 오랫동안 마음속에 품고 있지도 않기 때문이다. 이어 붓다는 말한다.
“만일 그가 낙수(樂受)를 느끼면 계박(繫縛)을 떠나서 이것을 느끼며, 만일 고수(苦受)를 느끼면 계박(繫縛)을 떠나서 이것을 느끼며, 만일 비고비락수(非苦悲樂受)를 느끼면 계박(繫縛)을 떠나서 이것을 느낀다. 비구들이여 이러한 유문有聞의 성제자聖弟子를 칭하여 생(生)에 의해서 사(死)에 의해서 걱정에 의해서 서러움에 의해서 번뇌에 의해서 절망에 의해서 계박(繫縛)되지 않는다고 말한다.” (마즈다니 후미오 지음, 정병조 옮김,『현대불교입문』 p. 164.)
다시 말해 정법을 들은 존귀한 불제자는 생에도 사에도, 갖은 근심과 한탄 그리고 여러 괴로움과 번뇌에도, 갖가지 번민에도 속박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다. 실로 이것이야말로 이미 정법을 들은 불제자와 아직 정법을 듣지 못한 범인의 차이이며 상위相違이고 차별이라고 하면서 붓다는 설법을 마친다.
‘백성은 따르게 할 수는 있어도, 알게 할 수는 없다.’는 말이 있다. 부모가 자식에게 공부하라고 할 수는 있지만, 머릿속에 넣어 줄 수는 없다는 뜻으로 해석될 수도 있다. 또 독재자가 강압적으로 하면 백성은 무서워서 하라는 대로 하지만, 독재자의 뜻대로 알고 따르게 할 수는 없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한편, 민중은 무지한 자이므로 지도자의 명령에 복종시킬 수는 있지만, 왜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되는가 하는 이유를 알게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뜻으로 새길 수도 있다. 제자를 지도하는 것도 마찬가지여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 따르게 할 수는 있지만, 왜 그래야 하는지 알게 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역으로 제자의 입장에서 보면, 스승을 따라하거나 법에 대해 배울 수는 있지만 정법을 알기는 어렵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럼 다시 또 처음으로 돌아가서 ‘어디까지 알아야 안다고 할 수 있으며, 얼마나 수행을 해야 그 경지에 이를 수 있는가? 진정한 열반은 어떻게 성취되는가?’ 그렇다! 붓다의 이 설법은 자기의 수행 정도를 아는 좋은 척도를 우리에게 제공하고 있다. 요컨대, 우리 수행자는 어떤 일을 당하여(첫 번째 화살) 거기에 어떻게 감정처리가 되는지(두 번째 화살)를 알아보면 자신의 수행정도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그 판단은 여러분 스스로에게 달려 있다.
싯다르타는 깨닫고 나서 ‘하루도 자기를 위해 안일하게 보내신 적이 없으셨다. 임종의 시간까지 제자를 위해 인류를 위해 소비하셨다. 이것이 바로 열반의 활동인 것이다.’ 그런 붓다의 생애를 보면서 우리는 또 한 번 깨닫게 된다. 무아에 기반을 둔 열반이야말로 인간이 추구해야 할 이상이자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유일한 길이라는 것을.
병이 없는 것이 가장 큰 이익이요, 만족을 아는 것이 가장 큰 재물이다.
후덕함은 가장 큰 친구요, 열반은 최상의 즐거움이다. (無病最利 知足最富 厚爲最友 泥洹最樂. (『法句經』204))
“송충이는 솔잎을 먹어야 한다.”는 말이 있다. 어떻게 보면 이 말은 체념이나 좌절의 의미로 받아들일 수도 있다. 그러나 체념이나 좌절이 아니라 세상의 이치, 우주의 섭리로 무심히 받아들이는 경구로 삼을 때, 세상은 고루 평등하게 보일 것이다. 세상의 다양한 모습이나 의견들이 숲을 구성하는 다양한 나무들처럼 느껴져 그것이 “차이”가 아니라 “다름”으로 다가올 때, 세상은 사바가 아니고 극락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사람 되기 어렵거니
비록 죽을 것이라 해도
이리 목숨 있음은 고마워라. (『상응부경(相應部經, Samyutta-nikaya)』 1, 1 (이시카미 요시오 지음/이원섭 옮김, 알기쉬운 불교5『미란타 왕문경』 p. 143).)
6) 열반 그후
재즈에는 악보가 있는가? 재즈는 일반적으로 헤드(Head) - 솔로(Solo) - 헤드(Head)의 도막으로 구성되어 있다. 먼저 주제(테마, 멜로디)를 연주하고 다음 헤드의 윤곽을 유지한 상태에서 각자 솔로를 맡은 악기의 개인 해석부분인 솔로 연주가 펼쳐지고(솔로 즉흥연주, Solo Improvisation), 다음 다시 주제 연주로 마무리한다.
그래서 헤드 부분은 악보가 있는데, 솔로 부분은 보통 악보가 없다. 재즈 한 곡에는 악보가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한 것이다. 해탈은 윤회를 전제로 한다. 그러므로 해탈은 윤회를 필요로 한다. 그러나 앞에서 언급하였지만 붓다는 윤회에 대해 명확한 견해를 밝히지는 않았다. 그렇다면 윤회란 과연 존재하는가? 윤회한다면 무엇이 윤회하는가?
앞에서 우리는 아함 경전에 ‘(오온이) 무상하다고 관찰하라. 이렇게 관찰하면 그것은 바른 관찰이니라. 바르게 관찰하면 싫어하여 떠날 마음이 생기고, 싫어하여 떠날 마음이 생기면 기뻐하고 탐하는 마음이 없어지며, 기뻐하고 탐하는 마음이 없어지면 이것을 심해탈이라 하느니라.’고 서술되어 있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이어 붓다는 다음과 같은 한 마디를 남긴다.
심해탈자는 태어남을 이미 다하고, 청정한 수행의 자세는 이미 서 있으며, 이룰 바를 이미 이루어, 후세에 몸을 받지 않는다는 것을 스스로 안다[我生已盡 梵行已立 所作已作 自知不受後有]. (『잡아함경잡阿含經』)
태어남은 이미 다했고, 범행[계행]은 이미 완성되었으며, 해야 할 일을 이미 다했으니, 다시는 이렇게 윤회하지 않는다는 것을 분명히 안다[他了知: 出生已盡,梵行已完成,應該作的已作,不再有這樣[輪迴]的狀態了]. (『相應部22相應』)
이와 같이 아함이나 니까야, 율장 등 초기불전에는 해탈에 대한 서술이 있고, 해탈한 사람은 자신이 해탈했다는 것을 스스로 안다고 되어 있다. 윤회에 대한 직접적인 설명은 없지만, 중생들을 향해 윤회에서 벗어나 해탈하라고 간곡하게 외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초기경전에는 지속적으로 수행의 목적이 해탈임을 강조하고 있고, 출가하여 범행을 닦아 “해탈지견解脫智見”을 얻으라고 설하고 있다.
그러나 이런 경전의 말씀은 윤회를 전제로 하고 있으면서도, 붓다는 정작 윤회의 유무에 대한 질문에 침묵으로 일관하였다. 윤회에 대한 물음에는 답변을 회피하였으며, 나아가서는 인간의 사유능력思惟能力을 뛰어넘는 질문에는 일관되게 설명하기를 거부하였던 것이다. 그런 형이상학적인 논의는 해탈에 아무런 도움이 안 된다고 하면서 수행에만 집중하기를 주문하였던 것이다. 이 같은 내용은 독화살에 맞은 사람의 비유로 유명한「전유경箭喩經」에 잘 나타나 있다.
말룽카푸타여, 이를테면 어떤 사람이 독 묻은 화살을 맞았다고 하자. 그러면 그의 친구나 동료 또는 친척들은 그를 위해 의사를 데려오려고 할 것이다. 그러나 정작 화살을 맞은 사람이 ‘나를 쏜 사람은 누구인가. 바라문인가 귀족인가, 서민인가 노예인가, 그것을 알기 전에 이 화살을 뽑아서는 안 된다’ 이렇게 말했다고 하자. 그는 이름은 무엇이고 성은 무엇인가. 그리고 또 ‘나를 쏜 그 활은 보통 활인가 아니면 큰 활인가. 또 나를 쏜 그 화살의 깃털은 무슨 털인가. 독수리의 깃털인가 솔개의 깃털인가. 아니면 공작의 깃털인가. 그것을 알기 전에 이 화살을 뽑아서는 안 된다’ 이렇게 말했다고 하자. 말룽카푸타여, 만약 그가 그런 것을 알기 전에 화살을 뽑지 않는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아마도 그는 그 이전에 생명을 잃게 될 것이다.
말룽카푸타여, 이와 마찬가지이다. 어떤 사람이 ‘부처님께서 나를 위해 세계는 영원하다든가 유한하다든가, 또는 세계는 끝이 있다든가 없다든가, 또는 사람은 사후에도 존재 한다든가 존재하지 않는다든가 하는 문제를 설명해 주지 않는다면 나는 부처님 곁에서 수행하지 않을 것입니다.’ 라고 말했다고 하자. 그러면 말룽카푸타여, 그 사람은 내가 그것을 다 설명하기 전에 그 목숨을 잃게 될 것이다.
독화살을 맞은 사람이라면 화살부터 뽑아야지, 화살에 대한 의문 또는 그에 따른 논의는 무의미하다는 것이다. 아까운 시간만 낭비할 뿐이고, 경각에 달린 목숨을 잃게 할 뿐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재미있는 것은 ‘세계는 영원하다든가 유한하다든가, 또는 세계는 끝이 있다든가 없다든가, 또는 사람은 사후에도 존재 한다든가 존재하지 않는다든가 하는 문제를 설명’하다 보면, ‘그 사람은 내가 그것을 다 설명하기 전에 그 목숨을 잃게 될 것이다.’라는 표현이다.
물론 이는 경전에 자주 등장하는 화술로 앞의 ‘그는 그 이전에 생명을 잃게 될 것이다.’라는 문장에 대구가 되는 표현이다. 운을 맞추기 위한 것으로 무시할 수도 있지만, 말 그대로 해석하자면 설명은 가능하지만 그것을 다 설명하려면 시간이 오래 걸린다는 뜻이다. 설명으로 그것을 다 이해시키는 데는, 혹은 이해하는 데는 시간이 오래 걸린다는 의미로 추측해 볼 수도 있겠다.
행간行間을 보면, 설명하는데 시간이 오래 걸린다는 의미보다는 질문(의문)은 끝이 없을 것이라는 뜻(선종에서 말하는 망상)으로도 읽힌다. 안다고 해도 지해 종사知解宗師 밖에는 되지 못할 것이다. 수행하기 전에는 알 수 없다는 뜻으로 물을 마셔봐야 차가운지 뜨거운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어떤 의미로 읽든 그런 철학적 질문에 현혹되어 시간을 허비해서는 안 된다는 충고의 말인 것만은 분명한데, 그럼 왜 붓다는 속 시원한 설명을 하지 않고 오직 수행만을 강조하였을까?
말룽카푸타여, 세계는 영원하다 라는 견해가 있을 때 범행(梵行)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또한 세계는 끝이 있다는 견해를 가져도 범행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말룽카푸타여, 세계가 영원하다하여도, 또는 세계가 유한하다하여도 역시 태어남(生)은 있다. 늙음(老)도 또한 불가피하다. 근심과 슬픔, 괴로움과 번민도 있다. 문제는 그것을 어떻게 극복하느냐에 있다. 따라서 나는 현세에서 그것을 어떻게 극복할 것이냐를 가르치는 것이다.
말룽카푸타여, 세계는 끝이 있다는 견해를 있을 때 범행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세계는 끝이 없다는 견해를 가져도 범행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말룽카푸타여, 세계가 끝이 있든, 끝이 없든 역시 태어남은 있고, 늙음과 죽음도 또한 불가피하다. 근심과 슬픔, 괴로움과 번민도 있다. 문제는 그것을 어떻게 극복하느냐에 있다. 따라서 나는 현세에서 그것을 어떻게 극복할 것이냐를 가르치는 것이다···. 그러니까 말룽카푸타여, 내가 설명하지 않았던 것은 그냥 그대로 내버려 두어라. 또한 내가 이미 설명했던 것은 또한 그대로 받아들여라. (增谷文雄 지음, 홍사성 옮김,『근본불교 이해』 pp. 221~222.)
세계가 끝이 있든, 끝이 없든, 태어남은 있을 것이고, 늙음과 죽음, 근심과 슬픔, 괴로움과 번민 또한 사라지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그것을 극복하는데 있다는 취지이다. 그리고 그런 것에 천착하다보면 청정한 수행인 범행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설명이다. 붓다는 말한다. ‘설명하지 않았던 것은 그냥 그대로 내버려 두어라.’ 붓다의 설명을 ‘그대로 받아들여라.’
그렇다고 붓다가 그런 문제들을 적극적으로 부정하거나 배척한 것도 아니어서 의문을 더한다. 그래서 붓다가 침묵으로 일관한 “14무기十四無記”라고 하는 이 형이상학적 문제는, 예나 지금이나 끊임없이 논란의 한가운데 있게 되었다. 많은 이론들이 난무하였지만 여전히 말끔한 해결은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것이다. 붓다가 답하지 않은 혹은 무의미하다고 간파한 이 질문들은 여전히 해결이 되지 않고 있는데 혹자는 이렇게 말한다.
붓다는 무아와 윤회가 모순이 아니냐는 질문을 하는 제자나 14가지 형이상학적인 질문을 하는 제자에게 직접적인 해답을 제시하지 않는다. 붓다가 그런 행동을 취한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이 무아를 직접 체험하면 스스로 해답을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즉, 그런 종류의 질문은 스스로의 종교체험을 통해 해결될 문제이지 남이 주는 대답을 통해 해결될 성질의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방경일 지음,『초기불교 vs 선불교』 p. 146.)
물론 수행을 열심히 해 부처의 경지에 오르면 해결될 문제라는 것이다. 무상-고-무아를 바로 알면 붓다의 마음 또한 바로 알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현실에 집중하다보면 그렇게 큰 의문은 아닐 수도 있고, 수행을 좀 하였거나 책을 통해 공부를 한 사람이라도 어렴풋하게나마 그 의미를 알 수 있겠다.
재즈에 악보가 있는가?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다. 윤회가 그런 것 같다. 이러면 있고 저러면 없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이 문제는 그냥 풀리지 않는 명제로 남겨두기가 더 어려울지도 모르겠다. 알기 전에는 궁금할 것이기 때문이다. 윤회를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윤회한다면 무엇이 윤회하는가? 끊임없이 의문이 일어난다. 이들 문제들은 세기를 거슬러 여전히 수행자들을 괴롭히고 있는 것이다. 이 의문들로 인해 사람들은 더욱 더 수행에 전념하게 될 것이라는 것은 또 하나의 아이러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