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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인을 위한 국내의 국제선원을 더욱 활성화해야
미국불교 순례시에 찍은 사진들이 여기저기서 부쳐왔다. 어떤 사람은 이메일로 보내주고 조금 더 열의있는 사람은 현상을 해서 보내준다. 늘 마음 속에 찍어두자며 카메라 자체를 가지고 다니지 않는 내 버릇은 이번 여행에서도 예외가 아니다. 몇 년 전 유럽에 갔을 때는 찍기는 많이 찍은 것 같은데 아무도 사진을 챙겨주는 사람이 없이 현재 기억 외는 남아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다. 그러나 마음의 심상은 사라지기 마련이고 결국 남는건 사진뿐이라는 평범한 진리를 다시금 확인하면서 지난 시간을 더듬어 문자로 정리해 두는 것이 유일하게 내가 할 수 있는 일이기도 하다.
이번 여행에서 단연 우리의 관심과 주목을 받은 것은 숭산대선사의 해외포교 방식과 업적이었다. 그러나 얼마 후 선사의 열반소식을 접해야 했다. 빈소가 마련된 수덕사를 다녀오면서 생전에 얼굴한번 친견하지 못한 채 영정으로만 그 마지막 모습을 대하니 그동안 선지식을 제대로 알아보지 못한 내 좁은 안목을 다시금 확인하는 순간일 뿐이었다. 한국인보다 많은 외국인 제자가 喪主로 앉아있었고 어색하지 않는 그들의 큰절하는 모습을 뒤로 하며 분향소를 총총히 나섰다.
“동서남북 지구촌을 돌고돌아 35년.
올바른 法을 보여주기 위하여 하루도 쉬지 않고 달리고 또 달렸네.“
숭산이라고 이름한 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달마대사가 중국에 처음 왔을 때 그 오만한 중화민족을 교화하려고 했으나 은산철벽을 만난 암담함으로 숭산으로 들어가 다시금 스스로를 재정비하여 본격적으로 선불교를 일으켰듯이 스님께서도 그런 각오와 정성으로 오늘 세계에 한국의 선불교를 전했으리라.
몇 년 전 유럽에 갔을 때 장거리 비행기는 잠을 자는 것이 최고라는 소박한 사실을 깨우치고서 이번에 탑승하면서 수면을 방해하는 커피 녹차 등은 아예 피했다. 그 덕분에 두어번 눈을 뜨니 케네디 공항에 내가 와 있었다.
현지 불광선원과 원적사 스님들이 차를 끌고 나와 우리의 숙소까지 운전을 해주었다. 지견스님과는 얼마 전까지 해인사에서 같이 살았다. 이역만리에서 이렇게 만나니 참으로 세상이 좁다는 사실을 다시한번 실감하였다. 차 두 대가 서로 어긋나 한참을 헤매다가 ‘한양수퍼마켓’이라는 한글간판을 기준으로 길을 다시 안내받아 예약식당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한 시간이 훌쩍 지난 뒤였다.
“세계화가 대세이지만 ‘한양수퍼마켓’이라는 한글간판을 보고 다시 이 식당까지 찾아왔으니 한국적 사고를 벗어나긴 힘들었다“라고 만찬사를 하였다.
이튿날 인사이트 메디테이션 센타(Insight Meditation Center/Barre Center for Buddhism Studies) 가는 길의 3시간은 가을을 만끽하게 해주었다. 뉴욕에서 보스톤까지 이 길이 가장 아름다운 시절이라고 했다. 노란색이 기조였다.
이곳 행정책임자인 앤드루(Andrew Olendzki)씨가 몇 마디 우릴 위해 말해 주었다.
“물질적 풍요에서 정신적 풍요를 위한 불교의 역할로 서양문명이 한 차원 높아질 것을 믿는다”고 운을 뗐다. 그야말로 中體西用이 아니라 西體東用이다. 배추벌레는 배추를 먹으면 몸이 파랗게 변하지만 소가 배추를 먹으면 그대로 자기색갈을 유지한 채 자양분이 될 뿐이다. 수미(Sumi D.Loundon)라는 젠마스터인 여인과 결혼하여 다른 종단으로 가버린 일미스님도 여전히 수행자의 모습 그대로 였다.
“60,70년대 동양의 수행자들이 이 땅에 왔을 때 우리는 무조건 열광했었다. 그리고 그들을 如佛대접을 했다. 하지만 결국 그들도 財色에서 자유롭지 못함을 확인하고는 혼란스런 상태를 발생시켰다. 그 한계성을 경험한 이후에 지금은 사람에 의지하지 않고 법에 의지하는 풍토로 바뀌었다. 사람을 무조건 따르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에게 이런 것이 배울 것이 있다고 한다면 초청해서 그 부분만 배우는 식이다.”
하긴 그 옛날 중국에서도 “황벽의 불법이 대단한줄 알았더니 서푼어치도 안되는구나. 난 항상 그의 법을 의심했다.”하고 말한 그 청출어람의 제자 말이 오버랩되었다.
초급과정 전문과정 그리고 수행과 연구를 병행하는 세가지 과정을 동시에 운영하고 있었다. 교육관은 본래 수도원 사제숙소였는데 연구센타로 개조하여 사용한다고 하였다.
인도 및 중동의 역사 속에서는 사원과 성당의 주체변동은 하나의 그냥 정치적 문화적 현상일 뿐이다. 聖殿은 내 것 네 것이 없는 것이 역사인 것이다. LA관음사도 본래는 유태교회였고 서래사의 서래대학은 본래 신학교였으니 이런 문화현상은 현재도 역시 진행중이다. 종교의 흥망성쇄도 제행무상 제법무아의 법칙에서 예외가 아니였다.
내려오는 길에 하바드대학 캠퍼스를 한바퀴 돌았다. 다음 생에는 지혜총명하여 구마라습처럼 몇 개의 외국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할 수 있는 언어능력을 가지게 해달라고 발원했다. 인사이트 메디테이션 센타에서 따라온 한국출신의 보살님은 검소함이 몸에 배여 있었다. 가장 저렴한 가게를 묻고 물어서 찾아 우리를 데리고 가 차와 빵을 먹으면서 쉬도록 배려해주었다.
근처에 캠브리지 선센타를 찾았다. 숭산스님께서 미국의 엘리트 계층들에게 한국선을 전하기 위하여 문을 연 곳이다. 근처에 아이비리그 명문대학들이 많이 분포되어 있고 주로 현지인 위주의 프로그램이 스님의 외국인 제자들에 의해 운영되고 있었다. 외국인과 자연스럽게 포옹을 하며 헤어짐의 인사를 나누는 한국인 여성 젠마스터의 표정과 자세가 전혀 어색해보이지 않는다.
고속도로변의 교통표지판은 뭔지 모르게 디자인이 심플하고 깨끗해 보였다. 가만히 보니 영어표기만 되어있다. 3개국어로 표기된 우리 표지판에 비해 깨끗할 수 밖에. 영어문화권의 우월성이 알게모르게 투영되어 있음을 알고는 씁쓰레했다.
다시 한시간 남짓 달려 프로비던스 선센타에 도착했다. 오늘 우리가 묵을 곳인 동시에 숭산스님 제자들의 미국본사 구실을 하고 있는 것이다.
벽안의 납자들이 한국승복을 입고 경허 만공 고봉 그리고 숭산스님의 영정을 걸어놓고 한글로 예불을 하고 백팔참회를 하고 있는 곳이다. 숭산스님은 이미 祖師化되어 있었다. 백인에게 유색인이 법을 전한 그 노고가 인도인인 달마대사가 중국인에게 법을 전할 때의 어려움에 어찌 견주겠는가. 달마와 숭산이라는 두 스님의 노고가 가슴아리게 전달되어 왔다. 염불가락은 하여튼 우리째는 아니였다. 그건 어쩔수 없는 문화적 차이 이다.
“서건동진 급아해동 역대전등”
이제 그 해동은 미국이다.
재일동포인 전복실씨가 시주하여 지었다는 관음복실선원에서 잤다. 요사체가 정갈하고 깨끗했다. 일화오엽이라고 하더니 숭산일화가 오대양이라는 다섯나무에 잎을 튀워내고 있었다. 부엌에서 우리가 손수 밥을 짓고 국울 끓여 늦은 저녁을 먹었다.
법당에서 새벽예불을 마치고 그곳 스님들과 대화의 시간을 가졌다.
화두선이 어렵지 않느냐고 물었더니 돌아오는 답은 의외였다.
“아주 쉽다.”
차라리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화두를 만나는 것이 더 쉬울것이라는 선지식의 말씀이 꼭 맞다는 생각이 들었다.
본관은 양로원을 개조한 건물이었다.
일본풍의 탑에는 네 모퉁이 풍경에는 물고기가 없었다. 그 이유를 물으니 시끄러워서 떼내버렸다고 한다. 그들의 실용주의적 사고의 근본까지 가릴 수는 없었다. 본래 풍경이란 수행자의 졸음을 경책하기 위한 시끄러움이 그 목적인 것을. 푸른잔디 노란 톤의 단풍이 대비를 이루고 낙엽이 덜어진 오솔길과 넓은 초원이 무슨 영화 속의 한 장면 같았다.
막내 J는 수시로 분위기에 따라 패션을 달리해 톡톡튀는 신세대의 분위기를 연출했다. 날씨 예측이 엇나가 좀 추워보이는 날도 있었다. 중년의 보살님이 밥을 먹다말고 맞은 편에서 가만가만 누가 들을세라 나에게 소곤거리듯이 한마디 한다.
“딸도 저래서 감기든다고 매일 잔소리를 합니다. 지금 잔소리가 목까지 올라오는데 남의 집 자식인지라 겨우 참고 있습니다.”
지금 감기가 대수인가. 남들에게 예쁘게 보이겠다는데. (이것도 세대차이?)
다시 뉴욕으로 돌아왔다. 플러싱 한인촌에서는 영어 한마디 안쓰고 생활할 수 있다고 했다. 한글간판이 즐비하다. 해인사 백련암 원영스님을 만났다. 이곳 플러싱 고등학교에서 열리는 원택스님 초청법회 준비를 위해 이리저리 뛰고 있는 중이였다. 이태리식당에서 우릴 위해 저녁 만찬을 베풀어 주었다. 그 외에도 불광사 상운사 조계사 원불교한국학교 티벳하우스 등을 방문했다. 나름대로 역할과 위상을 가지고 교포사회와 미국사회에 불제자로서 그 소임을 다하고 있었다.
일본사찰을 찾았다. 뉴욕 불교교회(NY Buddhism Church)라는 현판 속에서 Church라는 글자가 유난히 눈에 띄었다. 나카가끼 주지스님의 법문을 들었다. 짙은 눈썹에 풍부한 표정, 능숙한 제스츄어의 얼짱이었다.
“일본의 자동차가 미국에 오면 일본과는 달리 핸들위치가 반대로 바뀐다. 그래도 일본차는 일본차다. 그와 마찬가지로 항상 때와 장소에 맞추어 바뀌더라도 다르마는 다르마다 .Buddhism Church의 Church라는 말도 그 연장선상이다.”
원폭 속에서도 그 위신력으로 피해를 면한 친란대사의 동상을 이곳으로 옮겨와서 세계평화의 상징으로 부각시키고 있다고 하였다.
외국인과 일본인의 법회참여 비율을 물었다. 75:25 정도라고 했다. 아무래도 자국민 비율이 높을 수밖에 없다고 했다. 재정적 기여도는 일본인 80퍼센트 외국인 20퍼센트 정도라고 했다.
국내선 비행기를 타고 서부로 갔다. 국제선보다도 더 검색이 엄하다. 복장의 품새가 넓은 한복 탓인지 그런지 ‘한국승려’라고 해도 막무가내로 더 엄하게 검사를 한다. 기분이 별로다. 9.11테러의 여파는 나에게까지 미쳤다. 그래서 중생계는 관계성으로 이루어진 것이라고 한 모양이다.
관음사 달마사 성불사 고려사 등 교포사회에 영향력있는 사찰들을 둘러보았다. 어려운 환경 속에서 그래도 이만큼 자리를 잡은 것은 주지스님들의 원력이 적지않았다.
무량스님이 사는 태고사로 갔다. 요즈음 “왜 사는가?”라는 책이 한국에서도 인기를 얻고 있다. “하바드에서 화계사까지”라는 책을 쓴 현각스님 만큼의 지명도는 아니지만 그런대로 국내에도 꽤 알려진 스님이기도 하다. 태고사는 모하비(Mojabi) 사막의 샌드캐년에 위치하고 있었다. 바람이 많이 부는 언덕이라 그런지 풍력발전소의 바람개비가 수도 없이 즐비하게 나열되어 힘차게 돌아가고 있는 것도 구경거리였다. 제주도에서 열개 남짓 돌아가는 것도 볼만했는데 여긴 수백개는 되겠다. 친환경발전소인 셈이다.
도봉산 태고사. 산이름을 도봉산이라고 명명해 놓았다.
무량스님 역시 숭산스님의 제자이다. 유색인종이 백인을 교화한다는 것은 여러모로 한계가 있다. 백인들로 하여금 백인을 교화토록 하는 것이 여러면에서 경쟁력을 가진다. 화계사 무상사 연등선원 등 외국인을 위한 국제선원을 활성화시켜 그들로 하여금 한국선을 전하도록 하는 것이 현재로서 가장 가능하고 효율적인 포교전략임을 다시금 확인하는 순간이다. 사막에는 일교차로 인하여 생기는 이슬을 먹고 자란다는 노란꽃을 피우는 관목이 군데군데 보였다. 선인장의 대열도 끝이 없다.
작업복차림의 건축주 무량스님은 미국주류사회에 불교를 전하는 일등공신이었다.
“신도는 없습니다. 모두 함께가는 도반일 뿐입니다. 기독교 불교 등 종교도 없고 불교 내의 종파도 없고 모두가 인간적 존재(Humen Being)만 있을 뿐입니다.”
순한국식 전통목조건물이 미국인에 의해 좌청룡 우백호 안산까지 갖춘 명당에 조성하는 것이 어떤 알 수없는 영감을 준다. 다른 절에는 진짜 신심있는 사오십대 보살님들만이 보시금을 넣는데 여기서는 누구누구 할 것없이 모두 불전함에 돈을 보탠다. 역시 전통건물이 주는 권위는 지역성을 초월하고도 남는다. 할머니 유산을 물러받아 손수 중장비를 운전하면서 십년째 절을 짓고 있는 그를 보면서 정말 ‘전생 한국불교와의 인연’이라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다.
오늘길에 彩雲을 보았다. 상서로움이라고 하면서 모두 기뻐하였다.
태고사에 왔다가 우리 차에 동승한 아함경을 번역한 이상규 변호사가 한마디 거들었다.
“저게 네 눈에 보이면 네 눈에 병이 난 것 같구나.”라는 부처님의 말씀을 그대로 인용했다. 상서러움에도 너무 집착하면 마음에 병이 된다는 말씀이다.
무량스님이 오후에 볼일이 있으니 오전에 일찍 오라고 한 말이 생각났다. 오후에 볼일이라는게 이상규씨를 시내로 데려다주는 일이였다. 어디건 주지의 일이란 별로 차이가 없었다.
가이드의 풍수이야기는 남향집을 주장하는 한국사람들은 습관에 대한 멘트로 이어졌다.하지만 캘리포니아지방에서는 북향집이어야 더 시원하다고 했다. 그것도 모르고 칠레대사관을 남향집으로 지어 에어컨비 전기료가 터무니없이 나와 영사가 본국으로부터 징계를 받았다는 이야기는 지역성을 무시한 일방적 풍수의 오류가 아닌가 하고 생각한다면서 나름대로 사족을 달았다.
허리우드로 갔다. 오스카상 시상식장과 유명배우들의 손바닥이 찍혀서 보존되어 있는 마크랜드, 그리고 시가지 일원을 둘러보았다. 영화거리답게 화려하다. 기사아저씨는 ‘에라잇’하고 한국을 떠났더니 ‘LA'에 와 있더라는 우스개 소리를 했다.
숭산스님이 LA에 1970년대 창건한 달마사로 갔다. 주지 성채스님이 국제포교사를 위한 당부의 말씀을 해주셨다.
“포교사는 주지스님의 눈에 자주 밟혀야 그 역할이 생긴다. 적극적으로 절일에 임하도록 하라. 이제 포교사 법문도 이미 일상화되어 있다. 그래서 활동영역이 점점 더 넓어지고 있다. 혹 놀더라도 주지스님과 절 뒷방에서 함께 놀아야 한다. 그래야 친밀김이 생긴다. 의식을 함께 공유한다는 것이 그래서 중요하다. 지역주민가의 마찰을 없애기위하여 지역주민과의 유대도 물론 중요하다. 그리고 외국인을 위해 영어법회도 한다. 숭산스님의 제자들이 모두 기독교집안의 자제들이다. 젊은세대의 욕구를 성경이 다 채워주지 못하는 것이 그들이 불교를 만난 가장 큰 동기인 것이다.”
이웃의 여러 한국사찰을 둘러 보면서 느낀 점은 나름대로 교포사회를 위해 애쓰고 있었지만 한국국력과 불교세에 비하여 그 역할이 미미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그 이유는 일단 한국승려의 영어구사능력의 부족이다. 그리고 준비없이 무작정 미국으로 오는 것이 가장 큰 이유이라고 현지인들은 입을 모운다. 그곳에서 지식인으로 교수로 활동하고 있는 K 모씨는 이렇게 말했다.
“외국의 불교교단의 경우 종단에서 큰절을 지어 영어구사능력이 있는 여법한 스님을 직접 파견하고 있다. 한국교포 10퍼센트가 불교신도라고 일반적으로 보고 있는데 그나마 개인적으로 오시는 스님들이 ‘한국이 싫어서’ ‘그냥 쉬려오는 기분으로’ 아니면 ‘학교다니는 동안 아르바이트’로 포교를 하니 이런 전문화시대에 무슨 효과적인 결과를 기대할 수 있겠는가. 게다가 승려와 포교사간, 사찰과 사찰간의 고질적인 반목도 마이너스 요인이다. 미국불자는 부처님에게 관심의 초점이 있다. 한국불교 중국불교 베트남불교 티벳불교 등의 구분은 문화의 차이로 이해한다. 그리고 ‘미국사람이 불교를 알면 얼마나 알겠는가?’ 하는 것은 동양인의 착각이다. 불교에 접근해오는 미국인은 이미 기존 불교서적을 모두 마스터한 상태라고 보면 된다. 따라서 ‘한국불교를 아느냐?“가 아니라 ”불교를 아느냐?“고 물어야 한다. 근본불교에 대한 완벽한 이해가 전제되지 않으면 오히려 그들에게 접근하기란 불가능하다. 그 이후에 한국불교의 특징을 부각시켜 설명해야 한다. 현재 이 지역의 현직주지스님들은 교포를 대상으로 포교하면서 살림살이에 급급한 형편이다. 그러다보니 경제적 여력이 없어 포교사를 쓰는 것조차 부담스러워할지도 모른다.”
서래사로 갔다. 대만 불광사 미국 분원이다. 소문대로 거대했다. 안내를 해준 성원스님은 서래대학 교수로서 6개국어를 구사할 수 있다고 했다. 그를 통하여 미국 불교를 들을 수 있었다.
“초창기에는 스즈끼를 중심으로 하는 일본불교의 학문적 영향력이 지대했으며,
1960년대에는 티벳불교가 들어왔고, 그 뒤 세계 각국의 불교가 모두 들어왔다.
한국불교는 현재 기준텍스터가 없으며, 특히 논리성을 중시하는 서구인에게 직관을 강조하기 때문에 저변화에 구조적인 어려움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우선 시급한 일은 텍스터의 단계화를 통한 논리성의 구축이 가장 급선무이다. 그리고 역으로 한국불교의 세계화를 여러분에게 주문한다. 즉 외국불교를 한국에 소개하는 것도 세계화라는 관점에서 보아야 한다. 한국불교를 외국에 소개하는 것만이 세계화의 범주는 아닌 것이다. 일방적인 세계화를 부르짖을 것이 아니라 쌍방의 세계화가 필요한 시대이다.
미국불교는 희망적이다. 왜냐하면 세계의 모든 불교가 모두 들어와 있기 때문이다. 머잖아 미국불교가 세계불교를 이끌어갈 것이다. 종합성이 사상계를 이끌어가지 단일성이 이끌어갈 수는 없다. 불교라는 타이틀아래 꼭 지역이름이 들어가야 하는가? ‘한국의 불교’가 아니라 ‘불교의 한국’이 되어야 한다. 미국은 학교에서 기독교를 강의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일본사람들이 위헌이라고 하여 공립학교에서는 가르치지 못하도록 재판에서 이겼기 때문이다. 그래서 1963년 이후는 기독교는 종교학으로 가르치고 타종교는 지역학이라는 이름으로 강의하고 있는 곳이 미국이다.“
서래사로 갔다.
일만명의 신도를 자랑하고 있었다. 영어 중국어(북경어) 광동어(미국화교 중에는 광동성출신이 많기 때문이다.)로 법회를 운영하고 있었다. 그런데 특이한 것은 LA한국교민이 삼천여명이 등록되어 있다는 것이다. LA한국사찰 전체등록인구가 일천명 정도인 것을 감안하면 한국어로 법회를 진행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이 정도가 다닌다는 것은 무언가 시사해주는 것이 적지않다. 한국교포 역시 대중스님이 함께 살면서 여법하게 정진 포교하는 총림형 사찰을 원한다는 반증이다.
그리고 놀라운 것은 몇 달전에 불광사 소속의 해외 국내할 것 없이 모든 분원의 주지를 40대로 교체했다는 것이다. 디지탈시대에는 신세대 포교감각이 필요하기 때문이라는 것이 주된 이유라고 했다.
그런데 서래사 주지는 영어를 못한다는 것이 의외였다. 그의 통역자는 말레지아출신이라고 했다. 나도 영어가 안받쳐줘 성원스님이 통역을 전담했다. 몇마디 의례적인 이야기를 하고나니 서로 대화과정이 너무 불편해서 묵묵히 있으니 통역스님 둘이서만 뭔가 재미있게 서로 이야기하고 있었다. 여기 역시 출가자의 감소로 많은 부분을 재가자에게 넘기고 있다고 했다. 이런 추세는 어디어디 할 것 없이 이미 대세론으로 굳어진 것 같다.
서래대학에서 총장인 랑카스터(L.R. Lancaster)교수를 만났다. 해인사고려대장경연구소와 인연이 많아 한국에서도 공식석상에서 여러번 뵌 적이 있다. 한국불교를 미국에 소개하는데 많은 역할을 하고 있는 분이다. 서래대학은 특성화로 신생대학의 활로를 모색하고 있었다. 어떤 학문분야이건 불교와 연관시켜 과목을 개설한다고 했다. 기존명문 대학과 동등한 과목으로는 경쟁이 이미 어렵게 된 까닭이다. 심지어 MBA과정도 ‘비영리단체를 어떻게 운영할 것인가’ 뭐 이런 식이다. 물론 비영리단체란 사찰을 가르킨다. 건강을 위해서 축구․야구․럭비를 하는 것이 아니라 소림사 무술을 가르키는 식이다. 여긴 중국어와 영어로 강의를 하기 때문에 두가지 언어를 동시에 습득할 수 있다는 점에서 현재 다소의 경쟁력을 가지고 있다고 했다.
이 대학은 본래 신학교였다. 불교에게는 ‘敵’이라고 하여 팔지 않을려고 해서 화교사업가 이름으로 샀다는 애피소드가 우리를 미소짓게 만든다.
마지막날 LA불교대학 동문회에서 우릴 위해 만찬을 베풀어 주었다. 역시 먹는 것에서 情이 난다. 부르는 노래는 고국에 대한 찐한 회한이었다. 말하지 않아도 그들의 마음이 흘러간 유행가 몇곡으로 읽혀졌다.
김진숙씨 부부가 고려사에 수소문하여 나를 찾아왔다. 두 부부는 내가 월간해인 편집장 시절에 원고청탁관계로 만났다. 일본에서 유학을 하여 박사과정을 마친 두 사람은 현재 미국에 살고 있다. 아들 혜안이는 3개국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하여 내가 구마라집이라는 별명을 붙여 주었다. 참 오랜만이다. 산타모니카 해변으로 갔다. 태평양을 볼 수 있을래나 했더니 해가 져서 아무것도 안보였다. 해운대같은 야경을 기대했었는데 그냥 깜깜할 뿐이다.. 가게도 우리시간으로 아홉시면 초저녁인데 벌써 거의 문을 닫았다.
그 다음날 친구 차까지 두 대를 불렀다. 낮엔 우리 일정 때문에 시간을 뺄 수가 없어 다시 저녁에 또 만났다. 보살님 몇분과 함께 야경이 아름답다는 곳으로 갔다. ‘山城’이라는 일본풍의 레스토랑이었다. 데이트족이 많이 오는 곳이라고 했다. 우리도 그 속에서 야경에 취했다. 노보살님들이 특히 좋아했다. 비로소 외국에 여행온 기분이 난대나 어쩐대나. J와 K 등 몇 명이 뉴욕에서도 야간에 빠져나가 브로드웨이에서 100달러나 하는 뮤지컬을 보고 있으니 미국에 온 실감이 난다고 하더니…. 항상 짜여진 코스보다도 이렇게 일탈된 일정이 오히려 더 자유로움을 느끼게 해주는 여행의 참묘미인 모양이다.
10월 29일부터 11월 6일까지 일정을 모두 소화하고 무사히 돌아왔다. 밀린 일과 바쁜일을 처리하고 나니 많은 시간이 훌쩍 지나가버렸다.
본래자리에 돌아오니 뉴욕에서 가장 큰 한국절인 불광선원을 통도사에서 인수하여 대중처소로 만들어 이 지역의 신앙 구심점으로 만들려는 계획이 성사단계에 있다는 것을 인편으로 전해듣게 되었다. 불사가 원만회향되어 교포사회의 중심사찰로 신앙갈증을 해결해줄 수 있는 명실상부한 총림사찰이 건립될 수 있길 기원했다. 불교신문을 펼쳐드니 미국의 상원의원이며 대통령 후보였던 존 케리가 숭산스님을 추모하는 편지글에서 눈이 멈춘다.
“너무나 사랑하는 제 아들 존도 대선사님의 영향을 받은 수많은 사람들중의 하나입니다. 대선사님의 가르침은 존의 삶에 큰 변화를 주었으며, 저희 가족 모두는 그의 삶의 질을 끊임없이 향상시켜준 대선사님께 마음 속 깊이 감사드립니다. 존은 자신의 가족에게 아낌없고 헌신적인 사랑을 나누어줄 뿐만 아니라, 젊은 세대와 일을 하면서도 숭산대선사의 가르침을 실천하고 있습니다. 존의 삶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제와 제 아내 테레사는 숭산대선사님이 얼마나 훌륭한 일을 하셨는지 가슴깊이 느낄 수 있습니다.”
원철/포교원 신도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