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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불어 사는 세상을 위한 시민회의(시민회의)
 
 
 
카페 게시글
쉼터^^ 스크랩 팔십삼일째 無題-1 [내면과의대화, 김영국]
현운 추천 0 조회 29 11.02.15 20:48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신::::::아침에 어디 갔다 왔냐?
나::::::네, 누가 만나자고 해서 잠깐 나갔다 왔지요,
         아니? 그런데 어디 갔다 왔는지 다 아시잖아요?
신::::::그래 다 알지만 그래 본다고 했잖냐,
나::::::꼭 그래야 해요?
신::::::그래야 네 글을 보는 팬들이 오늘 아침에는 네가 어디 갔다 온 것도 알고 그러지,
나::::::예? 그러니까 팬 써비스란 말이예요?
신::::::그래, 그러면 않되냐?
        그래서 다 서로 느낌이 오고 가는 거지..
        그게 인과관계구..
        그래서 서로 정도 들구..ㅎㅎ
나::::::그렇게 깊은 뜻이?...ㅎㅎ
신::::::네가 내 속을 어떻게 따라오냐...ㅎㅎ
         어떻냐?
        그래서 대화 분위기 좋아지지 않았냐?
나::::::예? 더 깊은 뜻이?ㅎㅎ....
신::::::그럼, 일거 양득이구,
         도랑치구 가재 잡구..
         꿩먹고 알먹구.....
         그나 저나 오늘 이야기는 길어 질지도 모르는데 빨리 시작하자,
나::::::그래요?
       그럼 어서 시작하세요,
신::::::어제 어디까지 이야기 했지?
나::::::임신한 것까지 말씀하셨는데요,
신::::::오, 그래...잘 기억하고 있구나...ㅎㅎ
         그렇게 늑막염, 복막염으로 쇠약해진 네 어머니는,
         네 외할아버지가 지어준 한약을 먹고 건강이 좋아지며 너를 임신하게 됐지만,
         아직 복막염은  낫지 않았으며,
         몸도 아이를 낳을 정도로 건강해진 것은 아니었다,
         그러자 어른들은 크게 걱정했으니,
         아이도 산모도 모두 잃게 생겼기 때문이다,
         그래서 낙태까지도 생각했으나,
         철저한 천주교인들이었기에 아이나 산모의 운명을 하늘에 맡기기로 하고 말았다,
나::::::그러니까 저는 태아 때부터 애물 단지였군요,
신::::::산달이 가까워지자 복막염으로 배에 차는 물을 주사기로 빼지만,
         네가 자라면서 배가 너무 불러오니 네 어머니는 버선도 벗고 신고 할 수 없었다,
        그러다가 산달이 가까워지자 다행히 네 어머니의 건강이 약간 호전되며 너를 낳았다,
        (음 44,12,10일 = 양 45,1,23일)
         그래서 4년 전에 태어난 네 형과 너는 형제가 됐으며 너는 차남이었다,
         그렇게 너는 천신만고 태어났으나,
         네 어머니는 병고에 아이까지 낳자 젖도 나오지 않았고,
         또 건강이 너무 나빠져 도저히 너를 키울 수 없었다,
         이때 마침 네 아버지는 영등포에 직장이 생겨 네 할아버지 집을 나와 네 형을 데리고 딴 살림을 냈을 때였다,
         그러자 할 수 없이 너는 고태골(지금의 망우리와 같은 공동묘지)에서 네 할머니가 맡아 키우게 됐으니,
         그 때는 2차 세계대전의 막바지로 의식주가 몹씨 어려운 시기였기에,
         갖난 너에게 먹일 음식 역시 마땅치 않았으니,
         너는 미음과 소젖으로 그날 그날 연명하게 되었고,
         정제되지 않아 지방질이 많은 소젖을 그대로 먹은 너는 설사가 끊일새 없어 병을 달고 살았다,
         네가 얼마나 몸이 약했는지 3살이 넘도록 힘이 없어 제대로 걷지도 못하고,
         너무 말라 얼굴은 눈 뿐이었으며,
         앉을 때도 너무 힘이 없어 두 팔로 앞을 받혀야 했기에 개구리 자세였다,
나::::::제대로 먹지 못해 그 정도로 몸이 약했다는 이야기군요,
        이야기 들으니 테레비죤에서 본 극빈국인 아프리카의 어린들이 생각나네요,
신::::::어쨋든 너는 그렇게 태어나 젖은 못 먹었지만 네 할머니의 지극한 정성으로 생명을 유지해 왔다,
        그 때에 네 할머니가 너를 얼마나 지극 정성으로 키웠는지 늙어 망령들어 정신 없을 때도 너만 찾았고,
         운명 할 때에도 너를 찾았다,
        이 당시 네 어머니가 너를 데리고 친정에 갔을 때 너를 본 네 외할아버지는,
        "그 아이 어디 커서 사람구실하겠냐? 어디다 갔다 버리라" 고 했다며,
        그 말을 네 어머니는 죽기 전까지도 섭섭해 했다,
        그러다가 네 나이 만 3년 6개월이 지난 늦 여름 날,
        너를 보러온 네 아버지는 네 몰골을 보고는,
        저러다가는 아이가 죽겠다는 생각이 들어 너를 데리고 네 아버지 집으로 갔으니,
        드디어 너를 포함한  4식구는 명실공히 한 가족이 되었다,
        잘 듣거라,
        여기까지가 첫 매듭이다,
나::::::예? 여기까지가 첫 매듭이라니요?
신::::::우선 듣기만 해라,
        그 다음,
        1948년 늦 여름부터 명실공히 한 가족이 되어 출발한 너희 가족은 네 아버지의 직장 안정으로  점차 좋아지다가,
        1950년 6,25전쟁 발발 후,
        네 아버지 아래 형제 둘이 경찰관인 것이 소문나 숨어 지내다가,
        1951년 1월 6일 온 가족이 서울을 벗어나 부여까지 피난 가게 되었고,
        부여에서 피란민 마을 반장을 보며 유엔에서 보낸 구호물자로 살았다,
        그러다가 그 이듬해 1952년 봄부터 외국에서 처음 들여온 개량종 "레그혼" 닭을 여러마리 기르기 시작했으니,
        이 당시는 닭알이 지금과 달리 몹씨 귀해 10개면 그 당시 쌀 한 말과 바꾸고도 거슬러 받았다,
        그러자 그 이듬해인 1953년 봄에는 닭이 40여 마리로 늘어 알을 하루에 몇 십개씩 낳았으며, 
        그 해 1953년 여름 닭병이 돌아 닭들이 모두 죽을 때까지 계속되었다.
        생활은 유엔에서 주는 배급으로 충분했기에 가정 경제는 갈 수록 풍족해졌으니,(만 8세)
        이때가 너희 가정이  생활하던 중 가장 안정되고 풍족하고 평화로운 시기였다,
        잘 들어라,
        여기까지가 두번째 매듭이다,
나::::::네, 알았습니다,
        듣기만 하라면서요?
신::::::그래, 말 잘 듣네,ㅎㅎ
         한편,
         네 어버지는 피란민 반장 일을 보면서 부여군청을 드나들며 알게된 피란민중 동경제국대학을 나온 농학박사 황선영씨와 규암면에 농과대학(후에 백제중학교가 되었음)을 창립해 황선영씨가 교장이고 네 아버지가 교감이 됐다,
         그리하여 1953년 봄 첫 신입생을 모집하게 되었으니,
         1953년 봄에는 한 참 전쟁중이 었고,
         당시 대학생은 군에 입대하지 않아도 되었기에 많은 사람이 웃돈을 얹어 입학하려고 했었다.
         이때에 황 교장은 웃돈을 많이 주는 사람부터 뽑자고 했고,
         네 아버지는 시험을 쳐서 실력대로 뽑자고 하였으니,
         두 사람에게는 갈등이 생기게 되었고,
         드디어 생사를 함께하듯 가깝던 황교장과 네 아버지 사이에 입학시비로 말썽이 나기 시작하였다.
나::::::예, 그 때가 자세히 생각납니다,
         그 당시 아버지는 받은 입학금을 큰 쌀푸대에 담아 가져 오셔서 천정에 숨기셨다가 이튿날 가져 가시곤 했지요,
         지금도 생생히 기억나는게 저녁마다 집에 오시면 어머니와 같이 황교장의 부정직한 이야기를 하시며 걱정스런 의견을 나누시더라구요,
         지금도 제가 기억하는 것은 부정입학을 아버지가 끝까지 말리자 황교장이 몇몇 사람을 추천해서 입학시켜 달라고 하더래요,
         그래서 알아 봤더니 황교장이 따로 뒷 돈을 받았더라고 어머니에게 말씀하시며 아버지가 속상해 하시더라구요,
신::::::어? 그 때 기억이 지금도 나냐?
나::::::네, 사실 저도 그 당시에 부모님의 이야기를 곁에서 들으며 철저한 천주교인이었던 아버지가 옳다는 것을 알았고,
         저는 그때부터 부정부패에 굴복하지 않으시는 아버지가 아주 자랑스러웠으며 아버지를 존경하게 됐지요,
신::::::그렇구나,
         그러니까 그 때가 네 나이 만 8살이 넘었으니 기억이 날 만도 하구나,
         나는 또 네가 머리가 좋아서 그 때 일을 기억하는 줄 알았더니 나이좀 먹었네...ㅎㅎ
나::::::으이그...꼭 그렇게 말씀하셔야 속이 시원해요?ㅎㅎ
신::::::그럼 이제부터 네가 이야기해라,
         네가 기억이 다 난다니까,
나::::::아이 참,
        걍 하던 대로 하세요,
        제가 모르는 것도 많이 아시던데요,
신::::::그래?
         알았다 그럼,
         자, 다시 시작한다,
        그렇게 네 아버지가 교장과의 부딪침으로 속상해 하며 부여 군청을 드나들 때에 알게 된 천황록이라는 사람이 있었으니,
        이 사람은 이북에서 피난온 사람으로서 충남 서산군 해미면에 사무실이 있고,
        현장은 고북면에 있는 "피난민 정착 사업소" 소장이었다,
        그 사람이 네 아버지를 부 소장으로 영입하겠다고 여러번에 걸쳐 제의하고 있었다,
나::::::아, 천황록씨요?
         기억나요,
         눈도 크고 목소리도 굵고 뚱뚱하고 잘 웃어요,
         지금 생각하니까 아주 남자답게 호걸로 생겼었어요,
신::::::그래,
         이제 기억이 더러 난다고 제법 참견하는구나,ㅎㅎ
나::::::아 왜 말도 못하게 해요?
         아니까 안다고 하는데요,
신::::::그래 알았다,
         그러자 네 아버지는 교장의 부정으로 학교 일이 마음에 안 들어 착잡한데,
         천 소장이 그런 제의를 하자 네 어머니와 상의하게 되었고,
         그 결과 부소장으로 가기로 하였으니,
         1953년 늦 가을 스산한 바람이 불 때에 너희 가족은 해미로 이사 했다,
         그러니까 네가 초등학교 2학년 2학기 때 였지,
나::::::네, 기억납니다,
        그때 큰 트럭에 이삿짐을 싣고 그 뒤에 틈틈이 식구들이 타고 가는데 늦 가을이라 많이 추웠던 기억이 나요,
신::::::그래 네가 가끔 양념을 넣어라,ㅎㅎ
        그래야 이야기가 삭막하지 않지,ㅎㅎ
        그 곳에 가서 보니 천소장 역시 피난민에게 나오는 배급 물품을 부정으로 처분하여 착복하고 있었다.
        처음엔 설마? 했으나 항상 장부와 현물이 차이가 많아 회의 때마다 네 아버지는 자꾸 따지게 되었고,
        그 결과 네 아버지와 천소장 일파는 또 다시 정의와 불의로 갈라지게 되었다.  
나::::::맞아요,
         기억이 나요,
         어느 약간 추운 날이었어요,
         아버지가 저와 형을 부르시더니 밤이 되면 큰 다리밑 창고에 가서 누가 물건을 꺼내 가는지 숨어서 보라고 하시더라구요,
        그래서 밤이 되어 형하고 둘이 숨어서 보고 있으니까 창고에서 꺼낸 물건을 어떤 사람들이 자전거에 잔득 싣고 계속 나가더라구요,
         그러고 보니 그 당시 몇년 간 기억은 황교장과 아버지의 갈등과 천소장과 아버지의 갈등이네요,
         그리고 그 당시에 아버지는 항상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악한 일을 하면 죄를 받으니까 황교장이나 천 소장은 반드시 하느님의 벌을 받을 것이라고,
         철저한 천주교인이며 순교자의 후손으로서 청념결백하기에 자랑스럽고도 존경하는 아버지의 그런 말씀은,
         듣는 저 역시 악한 일은 나쁜 일이니까 반드시 하느님의 벌을 받을 것이라고 생각하게 됐지요,
신::::::그랬구나,
        너는 그때의 상황과 네가 존경하는 아버지의 그런 말을 듣고 선과 악에 대한 개념이 확고해 졌구나,
나::::::그런가요?
        생각해 보니 그런 것도 같네요,
        아, 참 그 뒤에 아버지께서 들으셨다는 소식인데요,
        황교장은 아버지와 헤어지고 2년 후 중풍으로 죽었구요,
        천 소장도 아버지와 헤어지고 2년 후에 중풍으로 죽게 됐다는 소식이 왔대요,
        아버지께서 그 이야기를 하시며 악한 짓을 했기에 그들은 당연히 벌을 받았다고 하셨어요,
        그때는 저도 아버지의 말씀대로 그 사람들이 하느님의 벌을 받았다구 생각했지요,
신::::::이렇게 네 아버지가 천소장 일파와 선과 악으로 대립되어 갈등을 빚고 있을 때에,
        네 아버지는 가끔 서울을 다녀오곤 했다,
        그럴 때에 친척되는 사람이 네 아버지에게 일제시대에 호황을 누리던 야시장 회사를 같이 설립하자고 제의 했으니,
        천소장 일파와의 2년에 걸친 깊은 갈등이 견디기 힘들었더 네 아버지는,
        네가 4학년 2학기인 1955년 가을 모든 것을 훌훌 털어버리고 서울로 올라 왔다,
        그렇게 서울로 올라 오자 일단 너희 집은 일정한 수입이 없어 졌고,
        그때까지 저축했던 돈으로 생활도 하고 회사 설립에 필요한 자금도 지분으로 넣었으나,
        회사 설립은 지지부진 1년 이상 끌다가 1957(12세)년 봄에는 야시장 허가마저,
        당시 동대문시장 연합회 회장이던 이정재에게 떨어져,
        너희 집은 폭삭 망하게 되었다,
나::::::와!...기억나요,
        그 때에 폭삭 망해 우리는 삯월세로 ?겨났으니까요,
신::::::그래,
        그 충격으로 너 낳고 계속 몸이 약했던 네 어머니마저 죽었으니 네가 얼마나 힘들었을지 알겠다,
나::::::물론 저도 힘들었지만,
        우리 아버지는 더 힘드셨을 꺼예요,
        사업 실패해서 재산 다 들어 먹었지요,
        아버지 나이 46세에 40세인 부인이 죽었지요,
        아들은 아직 16살 12살로 어려 가계에 도움은 않되지요,
        물론 일정한 수입도 없지요,
        그래서 집안 망하고 어머니 돌아 가신 그해 1957년 6학년 겨울 방학에는 저라도 돈을 벌어야겠기에,
        을지로 6가 방산시장에 있던 장난감 공장에 취직했어요,
        겨우내 연탄까스 냄새에 머리 아프며 3개월간 일했으나 결국 회사가 부도나  월급을 한 푼도 받지 못하기도 했었지요,
신::::::잘 들어라,
        여기까지가 세번째 매듭이다,
나::::::네? 여기가 또 매듭이예요?
신::::::그래,
나::::::웬 매듭이 자꾸 나와요?
신::::::두 번의 매듭이 더 있다,
나::::::그래요?
신::::::그래 그 때에 너희 집은 망해도 그렇게 망할 수가 없었지,
         너희 가정은 아주 최악의 상태가 이어졌다,
        그러나 네 아버지도 있는 집에 태어나  호강하다가  5년제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 쯤 집안이 폭삭 망했기에,
         이런 저런 막 일은 할 생각도 못해 보았고,
         또 해 보지도 않았으니 쉽사리 엄두도 못 냈다,
        그렇게 삯월세 방으로 ?겨 난 뒤에도 수입이 없으니,
        너희는 1957년 겨울을 우동공장에서 우동부스러기를 사다가 끼니를 때우곤 했다,
        그러다가 삯월세도 못내게 되니 이듬해인 1958년 초 여름에는 삯월세방 마저 ?겨나,
        집없는 빈민들이 모여 살던 한강 모래사장으로 천막치고 나가게 되었다,
        너희는 천막 살 돈도 없어 몇 십년 가지고 있던 고급 세이코 괘종시계를 팔았다,
나::::::예, 다 기억납니다,
        그 여름 뜨거운 뙤약 볕에서 한강에 수영하러 온 사람들에게 제가 도너스 진빵 아이스케키등을 팔아서 먹고 살았거든요,
        아버지는 사업에 실패하시자 모든 걸 포기 하시고 그냥 집에만 계시더라구요,
        그러니 어떻게 해요?
신:::::: 그래, 그래도 네 형은 16살이 되었기에 노동판에 뛰어 들었지,
         그러다가 9월 15일에 비가 많이 와 한강에 홍수가 나게 되었으니,
         그곳에 천막치고 살던 빈민들은 모두 서울시의 조치로 미아리 송천동으로 이주를 허락받았고,
         그 해 겨울을 나도록 밀가루 배급도 주었다,
         그러자 너희 3부자는 산 비탈을 평평하게 골라 약 16평쯤 되는 땅에 브러크와 기름 종이를 얹어 집을 지었고,
         봄이 되자 여기 저기서 가내 수공업 일꺼리를 찾아 그럭 저럭 먹고 살았다,
나::::::맞아요,
         그 때에 저도 일자리를 찾아  이리 저리 옮겨 다녔지요,
         혜화동에서 흑석동까지 다니는 합승택시 차장도 하며 거기서 먹고 잤었고,
         중림동 다방에서 커피도 끓이고 심부름도 하며  먹고 자기도 하며 1년여가 흘렀지요,
신::::::그래,
         한 편 네 아버지는 부근에 집 짓고 이사왔던 아이가 셋이 있는 과부를 알게 되어 동거하기 시작했다,
나::::::맞아요,
         기억이 납니다,
         어느 겨울 직장을 그만 두고 집에 갔더니 아버지는 우리 집을 팔고 그 아주머니네 집으로 아주 들어가셨더라구요,
신::::::그래,
         너희들이 나가 있으면서 가끔씩 집에 왔으니 네 아버지는 너무 외로웠지,
나::::::그랬겠지요,
         저도 그 당시에는 어려서 몰랐었는데 지금 생각하니 아버지께서 참 외로우셨겠어요,
신::::::그래, 너도 나이 먹으니 알겠지?
나::::::네, 그나 저나 아버지께서 그렇게 되시자 제가 그 아주머니 집에 계속 있기가 좀 그렇더라구요,
         그래서 1960년 3월 20일에는 부근에 있던 기와공장에 취직했습니다,
         그런데 그 일이 얼마나 힘이 든지 어린 저에게는 무리였나 봐요,
         몇달은 버텼는데 도저히 더 이상 힘이 들어 못 버티겠더라구요,
         그래서 8월이 되자 그만 두고 강원도 삼촌집에 가서 13일간 쉬다가 그것도 마당치 않아,
         다시 서울로 올라와 삼각지에 사는 이모네 집에 갔지요,
         그랬더니 마침 이모네가 식구들끼리 집을 대대적으로 수리하고 있었어요,
         그러니까 이모가 저보고 갈 곳이 마당치 않으면 집 짓는데 심부름이나 하라고 하더군요,
         그러다가 어느덧 집도 다 지어가고 초 가을이 됐어요,
         그러던 어느 날 이모와 같이 시장에 가는데 큰 길 입구에 나가자 마자 이발소가 눈에 보이더군요,
         흘깃 들여다 보니 최고급 시설로 큰 어항도  있고 열대수도 있는등..눈에 확!~뜨이더군요,
         저는 무심코 "저런 데서 한 번 일해 봤으면 좋겠다"고 했더니,
         이모가 "그래? 그럼 내가 한번 말해 볼까? 이 집이 나하고 곗돈 같이 하는 집이거든"하더군요,
         "그런데 요즈음 이 집 여자가 계를 하나 다시 만든다고 나 보고 하나 들어 달래 그러니까 너를 써주면 계를 든다고 해 볼께"하시더군요,
         사실 삼각지는 우리가 해미에서 올라와 망해서 이사할 때까지 살던 곳이라 동네 사람들은 우리를 알지요,
신::::::어이구 이젠 네가 다 기억하는 부분이라구 네가 다 설명하는구나,ㅎㅎ
나::::::예? 그렇게 됐나요?ㅎㅎ
         아무 생각없이 그랬네요, ㅎㅎ
신::::::더 계속해라,
         잘 하고 있다,
나::::::그러더니 이모가 그 이발소 집에 들렸고 곧 이발소 집 아주머니가 "저를 보자"고 한대요,
         갔더니 이발소집 아주머니가 "얼굴도 예쁘장하고 꼭 이발소 타입"이라며 내일부터 당장 일을 나오라고 하더군요,
        그래서 이튿날 부터 이발소에 들어가서 머리 감는 것부터 배웠지요,
신::::::그게 몇월 몇일인지 기억나냐?
나::::::아마 1960년 11월 8일이지요?
신::::::그래 맞았다,
         여기가 네번째 매듭이다,
나::::::그래요?
         그러면 매듭은 끝난 거예요?
신::::::아니다,
         한 번 더 있다,
        다시 기억나는 대로 이야기를 계속해라,
나::::::예, 그래서 거기서 머리 감는 것을 시작해서 간단히 어깨와 팔을 주물러주는 안마까지 배웠지요,
         이렇게 이발소에 들어가서 부터 그 일이 저에게는 안정된 직장이 되었어요,
        그렇게 직업이 안정되자 저는 차츰 주변에 있는 사람들과의 부딪침인 인과관계를 느끼게 되어 생각하게 되었고,
        그러다 보니 결국 약속을 꼭 지키고 상대에게 더 주지도 않고,
         더 받지도 않아야 된다는 식의 생활 방식이 되었습니다.
         지금도 생각하면 그때 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이것을 노트에 메모까지 해 두며 연구했답니다,
신::::::잘 하고 있다,
         더 계속해라,
나::::::이렇게 꼭 주고 받으며 생활하면 아무 문제될 것이 없을 줄 알았는데 이러한 세월이 약 2년5개월 지난 1964년 4월,
        믿고 있던 동료가 이권이 개입되자 순식간에 태도가 돌변하는 것을 본 저는 이러한 저의 생활 방식이 완전한 인간 관계일 수가 없다는 큰 충격을 받게 되었으니,
        약속을 꼭 지키고 반드시 주고 받는 생활방식에 깊은 회의를 느껴 삶에 의욕을 잃을 정도로 깊이 고민하였습니다.
         그렇게 고민하기를 7개월,
         1964년 11월 중순 직장 책임자의 집에 갔다가 우연히 책 꽂이에 꽂힌 톨스토이의 인생독본이란 책을 빌려 읽게 되었는데,
         생소한 느낌이 드는 제목이 마음에 들어 이 책을 읽은 저는 큰 충격을 받았으니,
         삶에 있어서 이런 생각과 문제로 고민하고 방황한 사람이 나뿐이 아니고,
         그 구절 구절을 깨닳은 사람들은 모두가 저와 같이 인생의 깊은 번민 속에서 헤매었던 것임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완전한 인간관계 진리에 살기 위한 저의 인생 목적은 다시 방향이 결정되었으니,
         저는 그 책의 내용을 완전 소화하려고 한 줄거리를 읽으면 그 뜻을 모두 알 때까지 몇 번이고 되풀이 해서 읽었고,      
         그 뜻대로 곧 실천에 옮겼으며,
         제가 12세 때에 있었던 천주교에 큰 공을 세운다는 예언이 바로 이 길이라고 까지 생각하였습니다.
         이 때의 저는 누가 저에게 시비를 걸고 모욕을 주고 업신여겨도,
         또 자존심을 참을 수 없이 건드려도 끝까지 참고 무저항으로 넘겼습니다.  
         그리고 모든 고통은 순간만 넘기면 되고,
         그것이 일생이 되어 육신이 죽으면 저는 영광스러운 진리의 삶을 산 것에 기뻐하리라고 생각했던 것이지요.
         또 육신의 고통은 원자로 이루어진 물질이 느끼는 것일 뿐,
         정말 저의 생명인 정신이 느끼는 것은 아니며,
         오히려 육신은 정신의 평화를 깨뜨리는 적이니,
         육신을 괴롭혀 고통을 참는 것은 곧 정신이 육신을 이기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하여 저는 어떠한 고통이라도 얼마던지 참아 넘기려 했고 실제로 닥치는 모든 어려움을 참아 넘겼습니다.
         한편으로는 교회의 건물을 보면,
         건물을 지은 돈으로 헐벗고 굶주린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 것이 옳고,
         정말 진실로 신을 믿는 사람이라면 교회 건물이 없어도 빈 터에서 예배 보는 것을 전혀 싫다고 하지 않을 것이며,
          하느님도 진정 그것을 원하실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이왕 교회를 지었으면 모든 만물을 창조하신 하느님이 보시기엔 누구나 똑 같은 자녀인데,
         하느님의 뜻대로 하느님을 섬긴다는 교회 자체가 왜 문을 잠그고 수위실을 두며,
         그 추운 겨울에 떨고 있는 집도 없고 의지할데 없는 수 많은 노숙자들을 왜? 못 들어가게 하며  차별하는지,
         예수도 자기를 따르려면 모든 것을 팔아서 어려운 사람들을 주고 따르라고 했는데,
         교회의 사무실이나 간부들의 사무실은 스팀과 좋은 가구가 있고 아무나 들어가지도 못하게 하는지,
         또 미사 때에 입는 옷은 왜? 그렇게 좋고 화려해야만 하는지,
         만약 미사 때 앞에 누더기를 걸치고 추위에 떨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 옷을 당장 벗어 입혀 주기를 하느님께서는 진정 원하실 것이 아닌가.? 하는 등 의문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한번은,
         이러한 의문에 대하여  교회에선 어떻게 해명하는지를 듣기 위하여,
        명동 성당에 가서 교회의 간부(자칭 당시 노기남 대주교 비서)등 3, 4명이 있는 곳에 가서 토론을 했습니다.
         처음에는 제가 미치거나 성당에 트집 잡아서 구걸 하러 온 사람인줄 알더니,
         나중엔 제가 묻는 진정한 의미를 이해하고는 한참 토론을 벌였습니다.
         그리고는 모인 사람들의 결론이,
         결국 “인간은 약하여 그 모든 것을 실천하지 못하기 때문이다”는 것이었습니다.
         아울러 하느님이 실제로 존재하는가 하는 질문에는 자칭 신학교 4학년 학생이,
         “하느님의 존재에 대하여 인간은 어느 정도 이상은 도저히 알 수가 없다.
         그러므로 인간은 더 알려고 하는 것부터가 미련한 것이다.
         그리고는 결론이 남들이 있다고 하니 그냥 믿으면 된다.” 는 것이었습니다.
         더구나 어떤 사람은 “믿어서 손해 날 것이 있느냐?” 라는 이야기까지 했습니다.
         이후부터 저는 교회나 성당에 대하여 환멸을 느꼈으며,
         인간이 진실하게 사는 것은 오직 편견 없이 파헤친 인생독본의 뜻만이 옳다고 생각하게 되어,
         더욱 인생독본만을 파고 들고 뜻대로 철저히 실천하려 했습니다.
         그리고 모든 사람이 하느님의 같은 아들 딸이면 모두 형제 자매인데,
         그런 입장에서 저 보다 비록 조금이라도 어려운 사람이 있으면,
         당연히 나와 동등한 처지로 이끌어 주어야 한다는 생각에 저는 제가 소비하는 모든 것을 절약했고,
         또 어딘가에 있을 (인도, 파키스탄, 방글라데시, 아프리카 등)하루 3번 식사도 못하는 사람들을 생각하여,
         식사량도 아주 최소한으로 줄였습니다.
         그랬더니 항상 배가 고프고 기운이 없어서 어쩌다 한 번 웃게 되면 웃음이 잘 그쳐지지 않았고,
         또 배가 몹시 고프니 말도 하기 싫고 모든 것이 귀찮기만 하였습니다.
         이렇듯 육신은 괴롭지만 마음만은 진리로 알고 있는 최후의 한계점까지 실천하고 있다는 생각에,
         보람을 느껴 항상 행복하고 또 한 없이 평안하고 고요하기까지 하였습니다.
         또 겨울이라서 밖에 나가면 거리에 어려운 사람들(지게꾼, 신문팔이, 껌팔이, 버스표 팔이 거지 등) 이 즐비한 때라,
         저는 눈에 띄는 대로 주머니가 텅 빌 때 까지 무조건 남 모르게 돈을 나누어 주곤 하였습니다.
         이 때는 옷도 물론 사 입지 않고 입던 삼각 팬티 하나는 추위에 떨고 있는 거지 어린이를 입혀 보내,
         하나 남은 팬티로 밤에 빨아 아침에 입거나 또 덜 말랐으면 바지만 입고 있거나 하였습니다.
         정신은 육신이 헌 옷을 입거나 벗고 있거나 관계없고,
         오히려 참고 헌 옷을 입으면 그것은 곧 보다 더 어려운 사람들과 일체가 되는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지요.
         그리하여 그 고통을 (마음은 행복했지만 고통이라고 생각 됐음) 일생 동안 견디어 먼저 가신 뭇 성인들의 뒤를 밟으려 했던 것입니다.
         여하간 이 당시,
         저의 영혼은 거추장스러운 그 아무 것도 걸치지 않고 아주 티끌하나 없이 깨끗하고 순수한 알몸인 것 같은,
         경험 없이는 이해하기 곤란한 정도의 상쾌한 기분이었습니다.
         오랜만에 목욕을 할때  머리부터 샤워기 물을 맞으며 씻으면 한 없이 날아 갈 듯 상쾌한 기분이 들듯이….
신::::::됐다,
        오늘 네 이야기는 여기까지 하자,
        이제 아까부터 내가 매듭이라고 한 이유를 알려주겠다,
        1,
        첫번째 매듭이라고 했던 1945년 1월 23일부터 1948년 늦 여름까지(3년 6개월),
       네가 어렵게 태어나 부모와 떨어져 할머니 밑에서 젖을 못 먹어 설사와 갖은 병으로 고생하던 3년 6개월 간은,
       곧 구약 때는 이스라엘 민족이 수 백년간 이집트에서 갖은 고생을 할 때와,
       신약과정 역시 출발부터 어렵게 시작해 로마제국의 박해를 받던 3~400년 시기와 일치하고,
       2,
       두번째 매듭이라고 했던 1948년 가을부터 1953년(8세) 봄까지는,
       네 아버지가 할머니에게서 너를 데리고 와 제대로 된 가정을 이루었으니,
       이 때에야 비로소 너희 가족은 네 아버지를 중심으로 하나의 가정으로서의 체계가 세워졌다.
      그러므로 이 시기는 예수의 아버지 요셉  때와 마찬가지로 네 아버지가 구약의 판관과 신약의 교구장의 역할이었다,
      즉,
      구약과정과 신약과정에 있어서 3,4세기의 어려운 시기를 지나,
      비로소 하나의 개체 집단이 되어 발전하는 구약에는 판관시대에서 최 전성기인 왕국시대까지와,
      신약때는 교구장 시대와 느낌의 동질로서 최 전성기인 기독교 왕국시대까지 이어진 시기다,
      3,
      세번째 매듭은 1953년 봄부터  1957년(12세) 봄까지로,
      황교장과 천소장과 네 아버지가 선과 악으로 갈리며 대립하던 시기로서,
      구약과정 때는 유대왕국과 이스라엘왕국으로 갈렸고,
      신약과정 때는 동후랑크와 서후랑크와 이탈리아로 갈린 시기와 같은 의미다,
      4,
      네번째 매듭은 1957년 봄부터 1960년 3월 20일과 11월 8(16세)일까지로,
      집안이 폭삭 망해 갖은 고생으로 방황하던 시대로서,
      구약과정 때 이스라엘 민족이 포로로 잡혀가 갖은 고생을 할 때와,
      신약과정 때 교황의 포로 생활로 교단이 어려움을 겪으며 방황할 때와 일치 한다,
      5,      
      다섯번째 매듭은 1960년 3월 20일부터 1965년 2월 20일까지다,
      즉,
      마르틴 루터가 1517년에 종교개혁을 부르짖고 난 후,
     수 십년 후에 성경 번역을 완료하여 일반인이 볼 수 있도록 펴 냄으로서 명실공히 신교의 출발이 되었듯이,
      1960년 3월20일(15,17)에 집을 나와 방황하다가 1960년 11월에야 드디어 안정된 직장을 가지게 되었다,
      즉,
      1960년 3월 20일 (만15.17세) 부터 네 나름대로의 자율적 판단시기가 시작되다가,
      1960년 11월 8일에야 안정된 직장이 생겨 생활이 안정되었고,
      1961년 봄부터 3년 간 구약시대 사람들과 똑같이 꼭 갚아 제로(0)를 이루는 식의 생활을 실천해 봄으로 인하여,
      구약과정에서 사람들이 느꼈던 느낌을 모두 체험했으며.
      그러다가 1964년 4월부터 7개월 간은 구약말기의 사람들과 똑같이,
      꼭 갚아 제로(0)를 체험하는 식이 완전한 인간관계가 될 수 없다는 커다란 좌절과 방황을 맛보았고,
      그러다가 7개월이 지난 그 해 11월 중순부터 1965년 2월 20일까지 3개월간,
       신약과 같은 인생독본을 읽고 철저히 실천함으로 써,
      신약을 믿고 실천하며 느끼다가 죽은 신약시대 사람들의 느낌을  모두 체험하게 되었으니.
 

 

 


       이것은 곧,
       1945년 1월 23부터 1965년 2월 20일까지 20년 삶 과정에서, 
       자녀인 인간이 부모이신 하느님과 "인과관계"를 맺어 우주 원칙을 정립한 천주교인이, 
       구약 과정 2000년과 신약 과정 2000년,
      그리고 꼭갚아 제로(0)를 체험하는 구약진리와,
       이해와 양보로 제로(0)를 체험하는 신약진리를 모두 체험한 것이 되었다,
       즉 이것은
        1,
        아담에서 노아를 거쳐 아브라함에 이르러 자녀인 인간이 부모이신 창조주 하느님의 뜻을 우선으로 체험하는 우주 원칙 인과관계 성립후, 
        2,
        야곱부터 예수까지 꼭 갚아 제로(0)를 체험하는 구약진리와,
        3,
        예수부터 지금까지 이해와 양보로 제로(0)를 체험하는 신약진리를,
        성장시켜온 하느님과 같은 질의 앎(체험)이 된 것이다,
         4,      
         그 결과 앎의 질이 하나(合一)된 전체성(0)의 하느님과 개체성의 너 사이에,
         우주 원칙이 흐르기 시작했으니,
         하느님의 뜻은 너를 통하여 드러날 수 있게 되었다,
         그 이후에 너에게 일어 난 일들은 내일로 미루자,
나::::::아니? 그런데 오늘 이야기는 너무 심한 거 아니예요? 
          저는 그냥 우주 원칙만 이야기하고 말려고 했는데 이게 무슨 일이래요?
         이런 제 개인적인 체험은 이야기하지 않아도 우주 원칙이 과학적으로 입증되면 차츰 다 알아 들을 것 아닌가요? 
         왜? 굳이 지금 이런 개인적인 체험이야기를 해서 읽는 분들에게 혼란이 오게 한대요?
         십년 공부 나무아미타불이 되는 거 아닌가 모르겠네요.
         휴......그 동안 사이비들이 난리쳐서 이런 문제에 대해 사람들이 얼마나 예민들 한데....걱정되네.... 
         오늘은 일진이 사납나 보네요?
신::::::그게 아니니 걱정마라,
           이 문제도 어차피 밝혀야 할 일이니까.
           밝힌다고 어쩌고...
           안 밝힌다고 어쩌고...할 문제가 아니다, 
           네가 나와 대화가 왜 가능한지도 다 밝혀야 우주 원칙을 이해한 사람이라면 너와 나의 대화를 더 이해하게 된다,, 
나::::::그래요?
신::::::이제까지 너와 나의 대화를 읽고도 알아 듣지 못했거나, 충분히 알아 들어도 마음이 닫혀있어 내키지 않는다면,
          우주 원칙에 의해 "그것은 그들의 몫일 뿐" 너는 최선(0)을 다 했으니 마음을 비워(0)라,
나::::::그런가요?
신::::::그럼 "아이들이 부모가 공부하란다고 공부하냐? 어떤 계기가 생겨 스스로 공부할 이유를 느껴야 공부하지, 
        우주 원칙이 밤이 깊어야 새벽이 오고, 곪은 것은 곪을 만큼 곪아야 터져 낫고.... 이미 곪은 것이 내 살이 될 수는 없다...
        그렇기에, 
        신과 나눈 이야기 3권 519p에서 신나이 신도 닐에게 이렇게 말했다,
        <<"너희가 받아드리기만 한다면"이라고..
        닐의 답변::
        좋습니다,
        그렇다면 예수의 일을 놓고 어디 한번 말장난을 해보기로 하죠,
        신나이 신의 답변::
         전혀 그렇지 않다,
         내가 다 털어놓고 이야기해주마,
         너희가 예수라 부르는 그 인간의 영은 이 지구의 것이 아니었다,
         그 영은 그냥 인간의 몸을 가득 채워서, 자신을 아이로서 배우게 했고,
         그런 다음 어른이 되어서는 스스로 깨닫게 했다,
         그가 이런 일을 한 유일한 존재는 아니다,
         모든 영은 "이 지구 출신이 아니다"
         모든 영혼이 다른 영역에서 와서 몸으로 들어갔다,
         그렇다고 모든 영혼이 특정한 한 "생애"안에 혼자 힘으로 깨닫는 건 아니다,
         예수는 그렇게 했다,
         그는 고도로 진화된 존재였다(너희 중 일부가 신이라 불러온 존재),
         게다가 그는 목적을 가지고,
         임무를 띠고 너희에게 왔다,
         닐의 답변::
         우리 영혼을 구하기 위해서요,
         신나이 신의 답변::
          어떤 의미에서는 그렇다,
          하지만 끝없는 천벌에서 구하기 위해서는 아니다,
          너희가 상상하는 식의 천벌같은 건 없다,
         그의 임무는 '참된 자신'을 모르고 체험하지 못하는 상태로부터 너희를 구하는 것이었고, 지금도 그러하다,
         그는 너희가 무엇이 될 수 있는지 보여주는 것으로 그것을 증명하고자 했다,
         너희가 받아들이기만 한다면,
         사실 너희 자체를 보여주는 것으로,
         그는 본보기를 보이는 것으로 앞장서고자 했다,
         그가 "나는 길이요, 생명이니, 나를 따르라"고 말한 이유가 이것이다,
         그는 너희 모두가 자기 "지지자"가 되라는 의미에서 "나를 따르라"고 하지 않았다,
         그가 그렇게 말한 건,
         너희 모두가 그를 본보기 삼아 신과 '하나'되라는 의미에서다,
         그는 "나와 아버지는 하나다,
         그리고 너희는 내 형제다"고 말했다,
         그라도 그 점을 이보다 더 잘 알아 듣게 표현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대화가 내일로 이어지니 그런줄 알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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