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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어산 마을 전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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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덕면 능촌 마을 주민들이 마을에 대한 이야기를 마치고 마을회관 앞에서 기념촬영을 했다. |
대덕면 무능리(舞陵里)는 어감이 좋지 않다. 일제시대인 1914년의 행정구역 개편으로 인한 폐해는 여러 가지가 있다.
그 중 하나가 저마다의 역사와 문화를 가지고 있고, 그 마을의 특징, 혹은 지리적 조건에서 기인한 마을이름이 뜻 모를 이름으로 바뀌었다는 점이다.
즉 두 개 이상의 마을을 합해 새롭게 이름을 만들면서 단순하게 두 개 이상의 마을에서 한 글자씩 가져와 조합하다보니, 거의 대부분의 마을이름에서 전혀 역사성이나, 그 마을의 특징을 알 수 없게 되어 버린 것이다.
또 일제가 의도했던, 의도하지 않았던, 그 명칭 중에는 어감이 좋지 않거나 웃음거리가 되기 좋은 이름도 적지 않게 눈에 띈다.
안성에도 그런 마을 이름이 적지 않게 보이는데, 무능리도 그런 경우의 하나일 것이다.
그러나 무능리를 구성하고 있는 마을 이름들을 살펴보면, 무능리는 어떤 마을보다도 아름다우면서도 의미있는 마을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특히 무어산의 마을이름 유래가 아름답다.
그 한자표기 그대로 산에서 이 마을을 내려다보면 마치 물고기가 춤을 추듯이 생겼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는 것이 안성군지(1990년)의 설명이다.
마을에서 만난 김병수(65세)씨는 동네가 풍요롭고 살기 좋아 인근 한천의 물고기가 모여서 춤을 추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했다.
1972년 장마로 마을이 없어지고
능촌은 마을 뒷산에 양성이씨의 선대 묘라고 전해오는 큰 무덤이 있다하여 능말이라고 한다는 것이 안성군지나 마을 주민들의 설명이다.
그런데 잘 알려진 것처럼 ‘능(陵)’은 임금의 무덤에 붙여지는 칭호인데, 왕의 묘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능이라고 불리는 것은 이 무덤의 주인공이 왕의 스승을 했기 때문이라는 것이 주민들의 설명이었다.
현재의 무능리는 무어산(舞漁山)마을과 능촌(陵村) 두 개의 행정리로 구성되어 있는데 능촌은 능말이라고 부른다.
능촌은 이외에도 새터, 굴말, 벌말 등이 있었는데 1972년 수해 때 없어졌다고 한다. 무어산은 다시 평장골과 가막산으로 나뉜다.
1972년 수해는 마을의 많은 것을 바꿔 놓았는데, 당시 물이 사람 허리까지 찼고, 많은 가옥이 파손되어 주민들이 마을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무능리는 원래 행정리로 능촌, 평촌, 무어산이었는데, 그 중 평촌 마을은 없어졌다는 것이다.
진주 유씨 집성촌
마을 유래에 대해 능촌은 진주 유씨 이판공파 무장공손파 집성촌으로 마을 입향조는 유종정이라는 분으로 현재 유성호 이장(65세)이 14세 손이 된다고 했다.
약 500년의 역사를 간직한 유서깊은 집성촌이다.
전체 가구의 80%가 진주 유씨였는데, 지금도 30여호의 절반이 진주 유씨다.
이렇듯 유서 깊은 집성촌이다 보니 관련 유물도 출토되었는데, 지난 2004년에 선대 묘를 이장하는 과정에서 50여점의 옷이 출토되어 경기도 박물관에 기증했다.
경기도 박물관에서는 이곳에서 출토된 옷을 복원하고 연구해 지난 2006년 ‘진주 류씨 합장묘 출토복식’을 발간했다.
이 책에 의하면 이곳에서 출토된 유물 중 특히 ‘호표흉배(虎豹胸背)’는 문헌과 초상화에만 존재하던 것으로 실물이 발견된 것은 이곳이 처음이라고 한다.
오래된 옛 무덤에서 출토된 복식은 복식을 연구하는데 뿐만 아니라 생활풍습과 매장풍습 등을 아는데 중요한 자료가 된다.
안타깝게 무능리에서 출토된 복식은 정확한 매장자의 신분을 알 수 없다고 했다. 하지만 마을에서는 그 후손들을 만날 수 있었다.
청주 경씨가 살던 마을
무어산 마을은 현재는 각성받이 마을이라고 하는데, 마을 주민들은 옛날에는 경씨(慶氏)가 살았던 마을일 것으로 추측했다.
마을에 경씨 성을 가진 사람의 무덤이 있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마을 주민들이 이야기하는 경씨 묘는 안성시 문화유적 분포지도(2005년)에도 기록되어 있다.
이 기록에 의하면 무능리 산 2번지 일대에는 청주 경씨(淸州慶氏) 적성공파(積城公派) 묘역이 자리하고 있는데, 이곳에 안장된 인물 중 대표적인 사람이 경순수(慶舜壽, 1582∼1645)다.
경순수는 대덕면 무릉리에서 성장해 자랐다고 하는데 1605년(선조 32년) 문과에 갑과로 급제했으며 이괄의 난이 일어나 한양이 함락될 위기에 처하자 공주의 쌍수산성(雙樹山城)으로 임금을 호종하여 2등 공신에 책록되었고, 병자호란 당시에 인조를 남한산성(南漢山城)에 피신토록 호종하였다.
만년에는 고향에 내려와 학문에 정진하였다고 하는데 이 기록이외에 더 이상 그 유래나 내역을 알 길이 없어 아쉬웠다.
370년 된 느티나무가 보호하는 마을
능촌마을에서는 집성촌답게 다양한 지명과 마을제사, 마을 보호수와 관련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능촌마을에서 들을 수 있었던 지명으로는 새골고개, 망월산, 평장골 고개, 왜골, 동막골, 왜미, 시악꼬부쟁이, 안들, 함바골 고개 등이다.
또 마을입구에는 ‘숲거리’라고 해서 미루나무와 오리나무 가 숲을 이루어 마을을 보호하는 역할을 했는데, 새마을 사업때 베어냈다고 한다.
그래서 마을에 ‘동티’가 나서 큰 굿을 하기도 했다.
그렇지만 마을에는 지금도 경기도 보호수로 지정되어 있는 수령이 370년된 높이 20m, 둘레 5m의 느티나무가 남아 있다.
이 나무는 약 10여 년 전쯤에 병으로 죽을 위기에 있었는데 당시 국회의원이 조치를 해줘서 살아남을 수 있었다는 것이 주민들의 이야기였다.
뿐만 아니라 마을에서는 1960년대 중반까지 우물제사를 지냈는데, 4개의 우물에 돌아가면서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그 중 하나는 지금도 남아 일부 주민들이 식수로 사용한다고 했다.
마을 주민들에 의하면 절터도 있었다고 하고, 무어산 마을에는 물맛 좋고, 옻오른 사람들이 즐겨 찾던 우물이 있었고, 일제시대에는 금을 캐내던 굴이 있었다고 했다.
대덕면장을 지냈고 금릉의숙을 세운 효자 김형배
무능리에서 무엇보다 기대했던 것은 양성면 필산리에서 소개한바 있는 일제시대에 대덕면장을 역임한 김형배(1872년-1953년)면장과 관련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으면 하는 것이었다.
아쉽게 김형배 면장과 그 손자인 김갑수 국회의원이 살던 마을은 1972년 수해로 없어졌다고 하고, 후손들도 남아 있지 않아 자세한 이야기는 들을 수 없었다.
다만 김형배면장의 아들인 김종근씨가 대한 변호사 협회 회장을 지냈다는 사실을 추가로 확인 할 수 있었을 뿐이었다.
양성면에서 미루었던 김형배 면장과 관련된 기록을 소개하자면, 필산리에서 이야기했듯이 효자로 소문났던 김형배 면장의 행적은 당시 널리 알려진 모양으로 1927년에는 안성군청으로부터 효자로 표창을 받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1909년 4월 23일자 <대한 매일신보>를 보면 “안성군(安城郡) 금곡(金谷) 사는 유원로(柳元魯). 이기태(李基台). 김형배(金亨培). 김인식(金仁植). 송규덕(宋圭悳) 등이 금릉의숙(金陵義塾)을 설립하고 청년을 모집하여 열심 교육하여 신사들의 의연금이 많아 점차 흥왕하고 있다”는 기사가 등장한다.
여기서 이야기하는 금곡(金谷)은 현재의 무능리와 명당리, 소내리를 포괄했던 1914년까지 존속했던 금곡면(金谷面)이다.
즉 금곡면의 주민들이 학생들을 교육하기 위해 학교를 설립했다는 것인데, 그 속에 김형배 면장의 이름이 보인다.
양성면 필산리에 있는 김형배 면장의 묘에는 묘비와 함께 김형배 면장의 공덕을 기려 세운 불망비(不忘碑)가 남아 있다.
안성 5대 국회의원 김갑수의 고향
마을 주민들이 그 할아버지 덕을 많이 봤다고 이야기하는, 안성에서 5대국회의원을 역임한 인물이 김갑수(金甲洙, 1912-1995)다.
김갑수 의원은 김형배 면장의 손자이자 대한변호사협회 5대와 6대 회장을 지낸 김종근(金鍾根)의 2남 4녀중 맏아들로 무능리에서 태어나 양성보통학교를 다녔고 15회로 졸업했다.
이후 전주에서 변호사를 하던 아버지를 따라 전주로 갔다가 이후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와 경성제국대학 법학부를 졸업하고 1937년 평양 복심지방법원 판사를 시작으로 법조인의 길을 걷는다.
1953년에 대법관으로 임명되었고, 1960년 4.19학생혁명 후에는 대법원장 직무대리를 지내기도 했다.
이후 1960년에 치러진 제5대 국회의원선거에 고향인 안성에서 무소속으로 출마해 당선되었지만, 5.16군사 쿠데타로 국회가 해산되어 국회의원직을 잃었다.
김갑수 의원은 일제시대 판사경력이 문제가 되어 지난 2009년 발간된 친일인명사전에 이름이 오르기도 했다.
이외에도 다양한 근현대 인물들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는데, 능촌마을에서는 일제시대에 유병일이라는 사람이 부자로 5백석 지기 소리를 들었다고 한다.
자리를 만들어 내다 팔던 마을
흥미로웠던 것이 ‘총올칡’이야기를 다시 들을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이 지면을 통해 보개면 남풍리 상남마을의 특산품 중 하나가 ‘총올칡’이라는 이야기를 한 적이 있는데, 능촌마을에서는 이 총올칡을 이용해서‘자리’를 만들었었다는 것이다.
총올칡은 직접 만들기도 하고, 안성장에서 사오기도 했다고 한다.
총올칡과 왕골과 짚을 엮어 가로 8자, 세로 4자 크기의 자리를 만들었다고 한다.
당시 안성장에 내다팔면 쌀 한말 가격을 받을 수 있는데, 원료 가격을 빼면 실제 돌아오는 소득은 쌀 4되 값이었다.
당시 쌀 한 말은 3일 일해서 받는 품삯이었던 만큼 ‘괜찮은 가격’이었다는 주민도 있었고, ‘그냥 다른 일거리 없어서 했다’는 기억이 엇갈렸다.
이 노끈으로 자리를 만드는 작업은 쉽지 않은 일이어서, 손마디가 파이기 일쑤였다는 것이었고, 약도 변변한 게 없던 시절이라, 그렇게 손이 파이면 소기름을 바르고 자리를 만들었다고 했다.
그렇게 자리를 만들어 팔아, 먹고 살고, 자식들 공부 가르친 것이다.
우리 부모님들, 우리 할아버님들은 그렇게 우리를 가르치고, 살아오셨던 것이다.
능촌마을은 한내와 가까이 있어서 물이 많이 나고 왕골이 자라기 쉬운 환경이라서 자리 만드는 것이 특산품이 될 수 있었다고 하는데, 아쉽게 마을에 남아 있는 자리는 없었다.
안성에서도 제일 풍요로웠던 마을
무어산마을에서는 1970년대까지만 해도 안성에서 소득이 제일 높았던 마을이라는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우리민족은 누가 뭐래도 농경을 생업으로 하는 민족이었고, 가장 살기 좋은 마을은 벼농사가 잘되는 마을이었을 것이다.
무어산 마을은 그 마을 이름 유래에서 보이듯이 한천이 마을 옆을 흐르고 비교적 넓은 경작지를 가지고 있어 벼농사 소출이 단일마을로는 안성에서는 가장 많았던 마을이라고 한다.
그래서 안성에서도 가장 잘 사는 마을로 소문이 났는데, 시대의 변화에 따라, 농업이 홀대받는 세태를 반영하듯, 지금은 가장 가난한 마을 중 한 개 마을이 되었다고 아쉬워했다.
그런 무어산 마을 사람들의 소망 중 하나는 마을회관이 없어 마을에 회관이 지어졌으면 좋겠다는 것이었다.
또 무능리 마을 사람들의 공통된 관심사 중 하나는 무능리 1번지 일원에 총사업비 250억원을 들여 총면적 26만3,000㎡에 2011년까지 완공될 계획이었던 무능일반산업단지가 아직까지도 완공되고 있지 않다면서, 언제 완성되고 기업이 들어와 마을발전에 기여하느냐하는 문제였다.
▲ 진주류씨 복식이 출토된 묘지 주인공의 후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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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능촌마을 이영섭 노인회장(75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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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능촌마을 유성택(61세) 새마을 지도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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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능촌 마을의 수령 370년된 느티나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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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덕면장을 역임한 김형배 면장을 기리는 불망비, 양성면 필산리에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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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을 주민들이 우물제사를 지냈고, 지금 일부 주민들이 식수로 사용하는 우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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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누놀이판. |
첫댓글
위의 사진 두분의 성함이 틀리기에 알려드립니다
유성대 이제인씨로 알고있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런것같습니다. 아마 기자가 잘못 오기를 하듯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