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토리 묵
지난 토요일, 머리를 깎으러 간 남편에게 점심 찬거리를 부탁했더니 다 제쳐두고 도토리묵을 사왔다. 멸치국물을 내어 묵은지를 씻어 쫑쫑 썰어 참기름과 설탕으로 버무린 뒤 김 가루를 올려 묵밥을 만들어 먹자고 했다. 밥은 있고 나머지 과정은 어려운 것이 아니라 알았다고 하고 토요일 오후 늦은 점심을 먹었다. 묵밥을 먹으면서 남편은 나에게 도토리묵 만들 줄은 아니? 라고 우스개소리를 하듯 물었다. 나는 도토리 껍질을 까서 말린 것을 잘게 부순 후, 도토리가루를 내어 물과 1:1 비율로 섞은 다음 눌어붙지 않도록 천천히 주걱으로 저어주면서 끓이다가 점도가 주걱이 설 정도가 되면 스텐레스 사발에 식힌다고 말했다. 남편이 너 그걸 어떻게 아니? 라고 놀라했다. 시집 와 시어머님에게 살며 배웠다고 하니 남편은 입으로만 아는 거 아냐? 라고 했다.
아버님도 어머님도 살아계실 적이니까 작은아들이 돌을 지내고 마구 장난을 치며 걸어 다닐 즈음 이였던 것 같다. 아이들과 가을 산에 갔다가 도토리를 조금 주워왔더니 어머님이 그것 갖고 꿀밤 묵 해먹겠냐고 하셨다. 꿀밤 묵?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도토리를 꿀밤 이라고 부르는 것도 그 때 처음 알았다. 어머님은 절굿공이로 도토리 껍질을 부수어 까놓으시곤 볕에 말리셨다. 그리고는 이 친구 저 친구에게 전화 해 도토리 딴 거 있음 조금만 사라고 하셨다. 그렇게 해서 어머님과 나는 도토리를 더 말렸다. 볕에 말라가는 도토리를 아이들이 밟지 않도록 주의 시키면서. 도토리가 마르자, 나는 성급한 마음에 믹서에다가 넣고 갈려했다. 어머님께선 그렇게 하면 믹서 날을 버린다고 절구에 넣고 한 번 쪄 낸 다음에 갈라고 하셨다. 말씀대로 절구에 쪄서 조각조각 난 도토리를 믹서에 넣고 고운 가루로 만들었다. 다음은 아버님이 오실 때를 기다렸다가 알려주마 하셨다.
일요일, 병원에 계신 아버님께서 집에 다니러 오셨다. 어머님은 도토리가루를 내 와서 물에 개라고 하셨다. 물에 개다가 물을 너무 적게 넣어 되직하게 되었다. 어머님은 끓이면서 물은 더 부어도 되니까 괜찮다고 또 아버님은 이가 안 좋으시니까 차진 것 보단 잘 씹히는 것이 좋다고 하셨다. 소금을 조금 넣고 거품을 내며 끓을 때를 기다렸다가 불을 약하게 줄이고 계속 젓기 시작했다. 그 와중에 막내 녀석은 여기서 이것 만져 저지레하고 저기서 저것 저지레하며 정신을 없게 했다. 그런 막내를 남편이 따라다니며 뒷수습을 하였다. 팔은 아팠지만 막내를 남편이 봐 주어서 수월히 젓기를 끝마쳤다. 스텐그릇에 넣기 전에 참기름을 조금 발라두면 잘 떨어진다고 하셨다. 그리곤 식히기. 그렇게 묵이 두 모 만들어졌다. 점심에 기름장만 해서 묵을 썰어 아버님께 드렸더니 묵을 정말 맛있게 잡수시며 한 모를 싸 가져가셨다. 우리 며느리가 만들었다고 좋아하시면서. 그렇게 두 번 만들었다. 처음 만든 것은 아버님을 위한 것이라 우리가 먹을 수 없었고 두 번째 만든 것은 시이모님께서 어머님 생신이라고 만들어 주겠다고 도토리가루를 사 오신 것으로 만들었다. 도토리가루가 있다는 것도 처음 알았다. 가을이 되면 또 해먹자고 했지만 이듬해 아버님이 돌아가시고 어머님도 계속 몸이 편찮으셨기 때문에 도토리묵 만드는 것을 더 해볼 수는 없었다. 그래도 만드는 방법만큼은 잊지 않고 잘 간직하고 있다. 나도 내 며느리와 손자들을 데리고 도토리를 따러 갔다 와서 묵을 만들어 줄 수 있을까? 그 전에 먼저 아이들을 데리고 산에 도토리 주으러 다녀와야 겠다. 할머니 할아버지께서 좋아하시던 도토리묵이란다. 만드는 방법은 조금 힘들지만 정말 몸에 좋은 음식이란다, 라고 알려주며 아이들과 같이 부모님을 추억해 봐야겠다. 이 가을이 다 가기 전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