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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의 산별노조운동
- '전평'을 중심으로 -
1. '전평'에 주목하는 이유
오늘 우리가 나눌 이야기는 한국에서의 산별노조운동입니다. 지난번 월례토론회에서 서구 산별노조의 역사적 경험을 대략 살펴보았다면 오늘은 우리의 지난 역사를 살펴보는 것이 목적입니다. 이러한 큰 두가지 줄기를 바탕으로 다음 번 월례토론회의 구체적이고 세세한 이야기들을 스스로의 관점속에서 고민하고 판단할 근거를 마련하자는 취지입니다. 그런 점에서 오늘까지의 이야기는 경기를 시작하기 전의 준비운동이 되는 셈입니다.
한국에서의 산별노조운동, 그 중에서도 전평을 중심으로 살펴본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지난 역사를 되짚어보며 전평에 주목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많은 분들이 궁금해하셨을 줄로 압니다. 얼핏 짐작가는 바가 없지는 않을 겁니다. 전평이 산별노조를 토대로 한 조직이었겠지 하는.
예. 맞습니다. 전평은 산별노조를 기초로 한 최초의 전국적 조직이었습니다. 물론 일제하의 노동자운동 속에서도 산별노조의 지향은 물론이거니와 미흡한 형태이긴 하지만 산별노조는 존재했고, 60∼70년대의 한국노총도 형식상으로만 보면 산별노조의 꼴은 갖추고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일제하의 산별노조운동은 사실상 전평이 그 결과물이고 완성된 형태였다는 점, 한국노총의 기형적인 산별노조 경험은 노동자의 자주적 선택과는 무관하게 위로부터 강제되었다는 점에서 전평이 당연 중요하게 언급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 이 점만 확인하자고 전평을 이야기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해방 직후 전평을 정점으로 전개된 노동자운동은 심각한 경제파탄 상태 하에서의 생존권 투쟁이자, 일제 식민지에서 벗어나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는 과도기에 발생한 사회변혁운동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둘 사이의 관계는 무 자르듯 구분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즉, 당시의 노동자운동은 협소한 조합주의적 전망에 갇혀 있었던 것이 아니라 사회변혁의 전망을 갖고 목적의식적으로 전개된 운동이었습니다. 이를 위해 노동자계급은 산별노조를 토대로 전평의 깃발 아래 단결한 것입니다. 우리는 이 점에 주목하고자 합니다.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현재 우리가 걸어온 길, 걸어가야 할 길을 반성적으로 모색하자는 것입니다. 물론 당시의 상황은 국내외 정세는 물론 각 정치세력의 형성, 자본주의의 발달 정도나 노동자계급의 구성과 상태 등 모든 것이 오늘날과는 판이하게 달랐습니다. 따라서 전평의 운동을 반추하며 현재 노동자운동의 방향을 고민해 보자는 것은 그러한 운동을 우리가 재현해야 한다거나, 하나의 모범으로 삼아야 한다고 단순히 주장하는 것이 아닙니다.
또한 전평을 살펴보는 것은 선배 노동자들의 투쟁의 역사를 되찾는 것이기도 합니다. 지금은 어떨지 모르겠습니다만, 한때 전평을 거론하는 것 자체가 불온시되거나 공안수사기관의 내사 대상인 적이 있었습니다. 우리가 선배 노동자들의 투쟁을 자유롭게 논하고 정당하게 자리매김하도록 노력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고 꼭 필요한 일입니다. 그리고 이는 전평이 와해되고 대한노총, 한국노총이 그 자리를 차지하면서 지난 수십년간 굴절되어 온 우리 노동자운동의 역사를 올곧게 펴는 작업이기도 합니다.
2. '전평'을 살펴보기에 앞서 - 한국 노동조합 조직의 역사적 변화과정
1) 일제하 시기
1920년대 초반의 주된 노동조합 조직은 지역 내의 여러 직종들을 망라한 '지역별 노조'였습니다. 이러한 지역별 노조는 편의상 노조라는 이름을 붙였지만 우리가 현재 일반적으로 이해하고 있는 노조의 모습과는 달랐습니다. 이 시기에 전국 각지에서 조직되었던 노동단체들의 강령이나 목적들을 살펴보면 대개 지식 계발, 품성 도야, 근면저축 장려, 사치품 배격, 기술 장려, 상부상조 등이었습니다. 이는 노동조합 발전 초기의 미숙함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지만 당시 민족계몽, 실력양성론 등으로 대표되는 민족주의 사상이 노동운동에 강한 영향력을 끼치고 있었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그리고 이때의 지역별 노조는 노동자와 농민의 구분이 별로 없었는데 '일을 해서 먹고사는 사람'은 아무나 개별적으로 가입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1922년경부터는 새로운 사상이 급속히 퍼져가면서 노동조합에 대한 인식도 달라지고, 일하는 사람들이 모호하게 뭉뚱그려진 지역별 노조라는 조직형태도 변화를 겪게 됩니다. 그 사상이라는 것은 당시 '신흥사조'로 불리우며 큰 반향을 일으켰던 사회주의입니다. 1917년 11월 러시아 혁명의 성공은 사회주의 사상이 세계적으로 확산되는 기폭제 역할을 했고, 조선에서도 이 영향을 강하게 받아 사회주의는 이전의 민족주의가 차지하던 자리를 대체하게 됩니다. 이러한 조건 속에서 만들어지기 시작한 노동조합은 그 강령이나 목적에서 노동계급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이전처럼 추상적인 지식 계발, 품성 도야 등이 아닌 계급의식의 고양, 계급교양 등을 강조하는 내용을 넣는가 하면, 신사회 건설에 대한 열망을 표현하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사상적 영향과 함께 공업화가 미약하게나마 진행되면서 다양한 직종의 노동자들이 생기게 되자, 이전의 지역별 노조는 노동자와 농민이 분화됨과 동시에 직업별 노조로 발전해갑니다. 그러다가 1920년대 중반 즈음에는 '직업별 노조'가 지배적인 형태로 자리를 잡습니다.
그런데 당시의 노동조합 조직형태는 여기서 머물지 않습니다. 서구에서의 일반적인 노동조합 조직형태의 변화 흐름과 마찬가지로 1920년대 후반으로 접어들면서 당시 조선에서도 직업별 노조가 점차 산별노조로 이행해가는 모습을 보입니다.
이러한 이행은 1926∼27년 사이에 노동자운동 내에 산별노조로의 조직방침이 채택되면서 본격화하는데 이는 다음과 같은 예에서 구체적으로 확인됩니다. 먼저 1926년 7월 13일자 동아일보 기사내용 중 부산지방 철공조합 창립을 보도한 부분에서 '부산의 노동운동이 아직 산업별로 조직되지 못한 것은 일반이 다 유감으로 인정하던 바 ...'라는 대목이 있는데 이는 당시 노동운동의 조직적 과제가 산별노조 건설이었음을 말해줍니다. 또한 이러한 인식은 하나의 방침으로써 나타나기도 합니다. 그러한 예로는 1927년 8월 조선노농총동맹 상무집행위원회에서의 노동, 농민 양 동맹의 분리방침에 따른 규약통과 시 산별노조로의 전환 방침이 제시된 것이라거나 1928년 1월 조선문제에 대한 「코민테른 결정서」에서 산업별 조합의 조직을 촉구한 것 등을 들 수 있습니다.
아무튼 산별노조로의 이러한 전환 방침은 1928년 6월 10일 출판노동조합의 결성으로 서울의 인쇄출판업에서 가장 먼저 실행되었고, 1929년 7월 20일에는 산별노조를 기초로 한 전국적 조직결성 사례로 전기종업원조합이 결성됩니다. 그리고 1930∼1931년 사이에는 전국 각지의 노동단체들을 통해 산별노조 건설이 본격화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산별노조운동은 1930년대 이후 일제의 탄압이 거세어지고 이에 따라 비합법활동이 증가하면서 외형적으로는 쇠퇴하게 됩니다.
그러나 30년대 이후에도 산별노조운동의 명맥은 완전히 소멸되지 않고 혁명적 노동조합운동을 통해 그 명맥이 지속되었고, 이것이 해방직후 80여일만에 그토록 신속히 전평을 결성할 수 있었던 주요한 원인이었습니다. 당시 전평이 발간했던 『노동자신문』의 다음과 같은 기사는 이를 잘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그러면 8월 15일 이후 노동운동은 대체 어떠한 형태로 전개되고 있는가? 우선 노동운동의 합법화로서 대중적 조직이 나타나게 되었으며 그것도 과거로부터 비합법운동을 계속하여 오든 부문이 먼저 조직의 체계를 가지고 대중적 조직으로서 전환되었든 것이다. 예컨대 경성의 섬유공조합, 출판노조, 용산의 금속노조, 인천의 금속노조, 항만노조, 함흥의 화학공조합, 부산의 부두노동자조합, 원산의 운수노동자조합 등이 그러한 것이다.'(「전평이 가지는 역사적 사명」,『全國勞 者新聞』, 제2호, 1945. 11. 16).
1930년대 당시에 활발히 전개되었던 혁명적 노동조합운동은 일제의 가혹한 탄압에 의한 비합법적 조건과 어용·개량주의 노조가 득세하는 과정에서 생겨난 운동이었습니다. 이 운동은 또한 국제적인 노동자운동의 흐름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었는데, 1930년 프로핀테른의 「조선의 혁명적 노동조합운동의 임무에 관한 테제」('9월테제')나 범태평양노동조합 서기국의 「조선의 범태평양노동조합 비서부 지지자에 대한 동 비서부의 서신」('10월서신') 등이 끼친 영향도 적지 않습니다.
한편 혁명적 노동조합운동은 이전 시기와 마찬가지로 산별노조 건설을 조직적 목표로 삼고 있었습니다. 이에 따라 혁명적 노동조합의 조직형태 또한 아래로부터의 통일전선 형태인 공장위원회를 강화하면서 산별노조의 지부를 구성하고, 각 산별노조의 지부간에는 지부협의회를 꾸리는 한편 이를 바탕으로 도협의회, 전국중앙협의회까지 상향적으로 건설할 계획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계획은 일제의 악랄한 탄압과 비합법적 활동의 한계로 인해 전국에서 통일적으로 전개되지는 못했습니다. 혁명적 노조가 일제에 의해 발각되면 하나의 조직사건이 되었는데, 대표적인 것으로는 제1차∼제4차 태평양 노동조합 사건, 흥남 적색노조 사건, 원산 적색노조 사건 등이 있습니다. 이러한 조건 속에서도 혁명적 노조운동은 전국에서 치열하게 전개되었고, 해방직후 전평 결성의 밑거름이 됩니다.
지금까지 살펴 본 일제하 시기 산별노조운동에서 나타난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산별노조로의 조직형태 전환이 그 사회경제적 근거에 비해 정치적 이유가 훨씬 강했다는 점입니다. 물론 서구에서의 산별노조 건설 시기에 나타나는 미숙련노동자, 실업자 증가 등의 객관적 조건도 무시할 수는 없습니다. 1930년을 전후한 시기는 세계대공황이 닥치면서 일본 자본주의에 큰 영향을 주었고 이는 곧바로 조선에도 영향을 미쳐 산업합리화 등이 촉진되면서 광범위한 미숙련노동자의 형성, 실업자의 증가를 가져왔습니다. 또한 30년대 이후는 주로 군수품 위주였지만 공업화가 이전 시기에 비해 급속도로 진척되면서 공장노동자의 수가 크게 증가되는 시기였습니다. 그러나 이 시기의 산별노조운동이 공업화가 집중적으로 진전된 부문이나 지역보다는 인쇄출판업과 서울이나 평양, 원산 등 운동의 선진성이 강한 부문과 지역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는 것은 이 운동의 정치적 성격을 가늠하게 합니다.
<그림 1> 일제하 시기 노동조직의 변화과정
지역별 노조 -----> 직업별 노조 -----> 산업별 노조 -----> 혁명적 노조
(1920년대 초반) (1920년대 중반) (1920년대 후반, (1930년대 이후)
1930년대 초반)
2) 대한노총과 한국노총
① 대한노총
한국노총의 전신인 대한독립촉성노동총연맹(이하 대한노총)은 1946년 3월 10일 반공, 반전평의 기치를 내결고 결성되었습니다. 대한노총은 현장의 기반이 전혀 없는 우익청년들이 중심이 되어 조직한 것으로, 이승만을 비롯한 우익세력과 미군정의 지원하에 테러와 폭력을 포함한 갖은 수단을 동원하여 전평의 조직기반을 파괴해 나갔습니다.
대한노총이 얼마나 우스운 조직이었냐 하면 그 실질적 모체인 대한독립촉성전국청년총연맹(이하 독청)을 살펴보면 알 수 있습니다. 독청은 당시 급증했던 실업자들과 월남한 청년들을 중심으로 한 조직이었는데, 월남한 청년들 중에는 친일경력자이거나 대지주, 자본가, 종교인 등 북조선에서 숙청리스트에 오른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이런 사람들을 징발하여 대한노총을 만들었으니 당연히 현장의 기반이 없었고, 이들은 노동운동에도 별다른 관심이 없었습니다. 또한 대한노총은 전평이 와해되고 48년 남한 단독정부가 수립되기 전까지는 조합비를 받아 본 예도 없고 각종 기부와 구걸로 활동을 유지했습니다.
한편 이 당시 전평이 산별노조 체제였던데 반해 대한노총은 지역별 체제를 근간으로 했습니다. 즉 각 직장에 지부·분회의 단위노조를 조직하고, 행정구역에 구애됨이 없이 한 지역에 있는 단위노조들을 결합하여 '지구연맹'을 조직하는 방식이었습니다. 그리고 지구연맹보다 상위에는 형식적으로 시, 도연맹을 두긴했으나 중앙조직은 각 지구연맹을 기반으로 하였습니다. 대한노총이 이러한 지역별 체제를 택했던 것은 각 지역에서의 공동행동을 효율적으로 할 수 있었고, 지역별로 조직되어 있던 반공우익 청년단체들과도 원활히 협력하여 전평을 파괴하는 활동을 효과적으로 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대한노총의 공작은 1947년 5월 말에 발표된 미군정의 「노동운동 지도방침」에 의하여 더욱 용이하게 수행됩니다. 이 방침의 골자는 노동조합의 요건으로 '순수한 경제투쟁을 목적으로 해야 한다'는 것과 단체교섭의 단위를 '공장·사업장 등의 직장단위(산업별 등 기타의 단위는 금지)'로 제한하면서 '배타적 교섭대표제(과반수대표 노조가 전종업원의 단체교섭권을 획득)'를 실시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는 결국 전평을 거세하고 대한노총을 육성하겠다는 방침이었숩니다. 특히 배타적 교섭대표제에 의한 '대표노조선거'는 폭력과 강압으로 진행되면서 대한노총의 조직확장에 결정적 역할을 했습니다.
아무튼 이러한 과정을 거친 대한노총은 1953년 노동법 제정과 함께 기업별 노조를 근간으로 조직이 안착화됩니다. 이는 위의 과정을 토대로 함과 동시에 당시 한국 정부가 일본의 노동법을 모방하면서 단체협약을 기업단위로만 체결하도록 했기 때문에 사실상 기업단위의 노조만이 법적으로 가능하게 된 것입니다.
② 한국노총
한국노총의 등장은 1961년 8월 5일 세칭 '9인 위원회'로 불리웠던 '한국노동단체 재건조직위원회'의 발족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이 위원회는 중앙정보부의 지휘하에 '반공태세를 강화하고 재건조직위원회의 지도하에 산업별 단일 조직체제를 확립한다'는 내용의 '노동운동의 기본정책'과 '재건조직요강'을 작성하고 15개 산별노조의 재건조직 위원을 '지명'했습니다.
이에 따라 1961년 8월 16일부터 25일까지 부두, 연합, 출판, 전력을 제외한 철도, 섬유, 광산, 미군종업원, 체신, 운수, 해상, 금융, 전매, 화학, 금속 등 11개 산별노조가 결성되었고, 1961년 8월 30일에는 '한국노동조합총연맹'(한국노총)이 정식으로 결성됩니다. 또한 1961년 9월 20일 부두노조, 21일 연합노조, 22일에는 전력노조가 추가로 결성됩니다. 이후 70년대까지 한국노총은 그 산하에 16개의 산별노조와 1개의 연합조합, 10개의 시도협의회, 27개의 지구협의회를 가진 산별체제 형식으로 존재해 왔습니다.
한국노총의 단체교섭은 그 주체가 직장지부 또는 지역지부의 기업별 분회가 되는 것이 일반적이었고, 조합원의 범위는 정규직 종업원에 한정되었습니다. 또한 노조가입 방식은 개별적 가입이 아닌 유니온 샵(union shop) 방식이 지배적이었습니다. 한편 단체교섭의 사례만 보면 기업별 방식이 아닌 예외적인 것들이 있기도 했는데, 대표적인 것으로는 전국섬유노조의 전국적 수준의 통일교섭(1966∼1976년까지), 자동차노조의 지역별 통일교섭, 해상노조의 선주협회와의 중앙교섭, 고무업종 등에서의 공동교섭(1976) 등이 있습니다.
5·16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 군사독재정권이 대한노총을 해산시키고 자신의 구미에 맞게 새롭게 단장시킨 한국노총은 70년대까지 형식상으로는 산별노조 체제를 유지했으나, 이때의 산별노조는 그 결성과정에서도 보여지듯 철저히 위로부터 조직된 노동통제 기구의 역할을 했습니다. 이는 유신체제를 찬양, 맹종했던 한국노총의 행태에서도 그 성격이 분명히 드러납니다.
그러나 '민주화의 봄'이라고 일컬어진 80년 초, 노동조합운동에도 민주화의 싹이 트기 시작했습니다. 민주노조운동의 시작을 이야기하며 우리가 곧잘 예를 드는 '원풍모방'도 한국노총 산하 섬유노조의 한 지부였습니다. 이러한 민주화 움직임은 섬유, 금속, 금융, 광산노조 등으로 확산되면서 한국노총 내부를 부분적이나마 아래로부터 뒤흔드는 움직임을 보입니다.
역시 12·12쿠데타로 권력을 장악한 전두환정권은 이러한 움직임을 가만히 두고보지 않고 일단의 조치를 취하는데, 그것이 바로 1980년 12월 말의 노동법 개악입니다. 이 개악안에는 기업별 노조를 강제하는 조항과 함께 복수노조 금지, 제3자 개입금지, 쟁의냉각기간 연장 등의 독소조항이 포함되었습니다. 정권은 이를 통해 노동자들의 투쟁을 개별적인 경제투쟁으로 최소화시켜내면서 전국적 단결과 정치투쟁으로 발전할 가능성을 차단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조치로 인해 기존의 형식적인 산별노조는 기업별 노조의 연합체로 재편됩니다.
그러나 분단 이후 수십년간 어용노조의 굴레에 묶이고 억압과 착취에 짓눌려왔던 노동자들은 87년 노동자대투쟁을 통해 다시금 역사의 무대로 등장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러한 영향으로 그해 11월 국회에서 통과된 노동조합법은 '근로조건이 결정되는 사업 또는 사업장 단위에서만 노동조합을 결성할 수 있다'는 기업별노조 강제조항을 삭제하여 노조설립형태를 자율화합니다. 그러나 복수노조 금지, 제3자개입 금지 등 실제 산별노조로의 전환을 가로막는 법적, 제도적 장애물은 이후에도 여전히 존속하였습니다.
이러한 법적, 제도적 제약은 지난 97년 3월 정리해고제, 파견근로제 법제화의 반대급부로 제시된 상급단체의 복수노조 금지조항 철폐(기업단위의 복수노조 금지조항은 2001년 12월 31일까지 유효)로 인해, 2001년까지 개별 기업단위의 조직대상 중복문제만 걸리지 않는다면 전국적 산업별 단위노조는 법적으로 설립이 가능해졌습니다. 참고로 현재 전국적 산업별 단위노조의 구성과 범위에 대한 법적, 제도적 제약 요소는 전국규모의 기준에 대한 판단, 동종산업의 범위에 대한 해석, 개별 기업단위의 한시적 복수노조 금지조항에 따른 조직대상 중복문제, 전직실업자 이외의 조합원 가입자격 등의 문제로 줄어들었습니다.
<그림 2> 해방 이후 전국적 노동조직의 변화과정(1987년 이전, 괄호 안은 결성일)
대한노총 ---+----------------------> 한국노련 ----------> 한국노총
(1946. 3. 10) | +--> (1960. 11. 25) (1961. 8.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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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국노협 ---+
(1959. 10. 26)
3. '전평'에 대하여
1) 해방직후의 상황
① 정치적 상황
일제의 항복 이후 미군정은 해방군이 아닌 점령군으로서 한국에 발을 들여놓았습니다. 점령군이라는 것은 미군정이 당시의 조선을 일본의 일부로 파악하고, 따라서 전쟁에 패배한 국가 영토의 일정지역을 지배하는 형태로 남조선에 진주했다는 것을 말합니다. 이러한 미군정의 인식은 1945년 9월 7일 일본 요코하마에서 맥아더 사령관 이름으로 발표된 포고령 제1호에 ''전승군'은 금일 북위 38선 이남의 조선지역을 '점령''한다고 직설적으로 표현한 것에서도 잘 드러납니다.
미군정은 또한 소련의 세력팽창에 맞서기 위해 '친미적인 단일정부'를 한반도에 수립하고자 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일제하 민족해방운동을 주도하며 가장 강력한 대중적 영향력을 갖고 있던 좌익세력을 어떻게든 제압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해방직후 이러한 미국의 의도를 지지할 만한 세력은 거의 형성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취약한 기반을 보완하기 위해 미군정은 이승만과 한민당을 중심으로 한 친일반공세력을 활용하고 또 적극적으로 후원하면서 우익세력을 결집하는 데 모든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이는 일본에서 행한 미군정의 정책과는 겉으로만 보면 반대됩니다. 일본에서는 우익과 재벌의 힘이 너무 강했기 때문에 차후 이를 억제할 목적으로 재벌을 해체하고 노동조합을 장려하는 정책을 사용했기 때문입니다.
미군정은 또한 경찰기구를 개편하면서 간부의 80% 이상을 일제하 식민경찰에 종사했던 조선인들로 채움으로써 좌익세력 탄압에 이골이 나 있던 사람들을 적극적으로 활용했습니다. 1946년 봄, 미군정청의 여론조사에 따르면 조사대상 49%가 미국에 의한 해방상태보다 일제시기를 더 선호할만큼 당시 조선의 민중은 미군정에 대한 극심한 반감을 나타냅니다. 해방은 되었으나 일제하에서 권세를 누리던 친일파를 비롯하여 식민지 민중에 대한 탄압의 전면에 나섰던 경찰 등이 그대로 건재했기 때문입니다.
한편 1945년 12월 개최된 모스크바 삼상회의는 미국측의 제의로 조선에 대한 한시적 신탁통치안을 결정하고, 향후 조선에 통일적인 임시정부를 수립하기 위해 미소공동위원회를 개설, 이 위원회는 임시정부 설립을 위해 조선의 각 정당·사회단체와 협의하도록 결정했습니다. 그러나 이때부터 사실상 미국은 한반도의 분할을 불가피한 것으로 보았습니다. 결국 1947년 1, 2차에 걸친 미소공동위원회가 최종 결렬된 후, 미국은 자신의 영향력 하에 조선을 통일하거나 또는 남조선만의 단독정부수립 정책을 국제적으로 승인받게 하려는 시도로 인구비례에 의한 총선거안을 유엔에 제출하였습니다. 이 결과 1948년 5월 10일 남조선 단독정부 수립을 위한 총선거가 실시되었고, 이승만이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되면서 분단은 기정사실화되고 미군정은 막을 내립니다.
이렇듯 약 3년여에 걸친 미군정 시기는 그 후 한국에 대한 미국의 일관된 정치, 경제, 군사적 지배의 초석을 마련함으로써 한국을 전후의 미국에 의한 세계 지배체제를 특히 정치, 군사적으로 유지하는 전진기지로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이후 한국현대사 자체의 기본적 방향을 규정하는 초기조건을 만들어 놓았습니다.
그렇다면 당시 미군정과 우익의 대립축에 있었던 좌익세력 및 여타 대중운동은 어떠했을까요. 당시 좌익세력의 주축은 무엇보다 1945년 9월 11일 재건된 조선공산당(이하 조공)과 1946년 11월에 창당한 남조선노동당(이하 남로당)이었습니다. 조공의 경우 앞에 재건이란 수식어가 따라다닌 것은 조선공산당이 1925년 4월 처음 창건된 후 네차례에 걸친 조직침탈과 내부적인 문제 등으로 인해 1928년 해산한 다음 1930년대 이후의 조공 재건운동을 토대로 다시 만든 것이기 때문입니다. 남로당은 조선공산당, 조선인민당, 남조선신민당 삼당이 합당, 대중정당을 표방하며 탄생한 것으로, 1949년 조선노동당에 통합되기까지 단선단정 반대투쟁을 주도했고, 대한민국 단독정부 수립 이후에는 무장투쟁을 전개했습니다.
한편 해방직후 각기의 부문에서 폭발적으로 터져나온 대중운동은 조공을 비롯한 좌익과 밀접한 관련을 맺으며 완성된 체계를 갖추기 시작했습니다. 대표적인 것으로는 전평을 비롯해 1945년 12월 8일 결성된 조합원 330만명의 전국농민조합총연맹(이하 전농) 그리고 조선청년총동맹(이하 청총), 조선부녀총동맹(이하 부총) 등이 있습니다. 그리고 좌익계 군사단체도 있었는데, 상비군 1만 5천명과 예비군 10만명을 가진 조선국군준비대와 3천 5백여명의 회원을 가진 학병동맹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들 군사단체는 각각 국준준비대 사건, 학병동맹 사건을 계기로 미군정과 경찰에 의해 강제해체되었습니다.
이 시기는 또한 이러한 좌익정당과 대중단체들을 중심으로 광범위한 민족통일전선운동이 전개되기도 했습니다. 그 대표적인 결과물이 1946년 2월 15일 결성된 민주주의민족전선(이하 민전)입니다. 민전은 미소공동위원회에 적극 대응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으로 이승만과 한민당의 파쇼·친일파 세력, 법통을 고집하던 중경임정 계열을 제외한 모든 세력의 결집을 목표로 했습니다. 이에 따라 정당으로는 조선공산당, 조선인민당, 독립동맹(신민당의 전신), 그 외 대중단체로는 전평, 전농, 청총, 부총 및 각 부문단체 그리고 중앙인민위원회 등이 여기에 참가했습니다.
② 노동자계급의 상태
해방 직후인 1946년 현재 방직, 기계, 화학, 목재, 식료 등 중요부문의 공업생산은 1939년에 비해 무려 70%이상 줄어들었습니다. 공장과 공장노동자 수도 급격히 감소했습니다. 전매사업장과 국영사업장을 제외한 공장 수는 1944년 6월 현재 9323개에서 46년 11월에는 5249개로 43.7%나 감소했고, 여기에 속한 공장노동자 수는 30만 520명에서 12만 2,159명으로 59.3%나 줄었습니다. 이는 해방 이전 자본가와 기술자의 80% 이상이 일본인들이었는데, 이들이 귀국하면서 기존 공장의 생산시설이나 원료물자, 생산품을 밀매, 소각하고 그렇지 않더라도 기술이전이 안 되면서 공장이 폐쇄되거나 작업이 중단된 때문이었습니다.
이와 더불어 실질임금은 1936년을 100으로 기준할 때 1945년 6월에는 108.88이었으나 이것이 동년 12월에 이르자 37.14로 폭락하였습니다. 또한 남조선의 실업자도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 1946년 11월 15일 현재 실업자 수가 약 110만 2천명에 달했는데, 이중 57.8%는 징용노동자로 끌려갔거나 만주 등지로 이주했던 사람들이 귀환하면서 발생한 실업이었습니다. 이는 해방 직전 1944년 조선 전체의 노동자 수가 약 212만이었고 남조선의 경우 8·15를 전후하여 약 100만명 정도의 노동자가 있었음을 감안할 때, 취업노동자와 실업노동자의 수가 거의 1 : 1에 육박하는 엄청난 것이었습니다.
이렇듯 해방직후 노동자계급의 상태는 실업자가 범람하고 취업노동자의 경우에도 기아임금과 열악한 노동조건에 시달리는 비참한 것이었고, 물자부족과 악성 인플레이션 등으로 전 조선민중은 엄청난 고통을 맞이했습니다. 당시 경성방직 노동자들이 처해있던 실상을 소개한 다음의 기사는 조선의 노동자계급이 처해있던 비참한 상태를 생생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해방직후 당시 경성방직 여직공들은 지옥같은 기숙사에 살면서 썩은 호박죽을 먹고 영하 20도를 넘는 엄동에 인조견 홑옷과 맨발로 2교대 24시간 노동에 졸림과 피로에 넘어져가는 지독한 처지에 놓여있었다. 해방직후 몇달 사이에만도 영양부족과 피로에 의하여 30여명의 사망자가 발생했고, 전 직공의 40%가 폐결핵 환자였다. 이들은 외출의 자유도 없이 먼 고향에서 찾아온 부모형제와 만날 자유도 없이 감옥 이상의 노예생활에서 신음하고 있었다.'(『해방일보』, 1945. 10. 25).
2) 전평의 결성과정 및 체계
① 결성과정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약칭 전평)은 해방 이후 불과 80여일만인 1945년 11월 5∼6일 40개 지역, 조합원 50여만명을 대표하는 16개 산별노조 505명의 대의원이 참가한 가운데 서울 중앙극장에서 역사적인 결성대회를 치릅니다.
전평의 결성 움직임은 1945년 9월 26일 서울의 경성토건노조 사무실에서 10개 산업별 대표 51명이 모여 조직결성을 결의하는 회의를 갖고, 이틀 후인 9월 28일 각 산별의 노동자 활동가 대표 511명이 참석한 가운데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 준비 대표자대회를 개최한 것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곧이은 9월 30일 제1회 전평 준비위원회가 개최되고, 이 준비위원회는 허성택, 박세영 등의 상임위원 10명을 선출하고 부서결정 등의 사항에 대해 협의했습니다. 그리고 상임위원들은 몇차례 회의를 갖고 11월 10일 이내로 전평 결성을 위한 모든 준비를 끝내기로 했고, 11월 1일 광산노조를 시작으로 11월 4일까지 16개의 산별노조가 결성되면서 마침내 전평이 모습을 드러냅니다.
그리고 소련군이 진주했던 북한지역은 전평 결성대회의 결정서 제10항에 의거하여 동년 11월 30일 전평 북조선총국을 창설, 사실상 독자적인 활동을 전개했으며, 북조선총국은 46년 5월 25일 확대집행위원회를 소집하여 북조선직업총동맹(위원장 최경덕)을 발족시키고 완전히 독립하게 됩니다.
한편 전평은 결성 당시 노동조합의 가장 중요한 임무가 '민족통일 전선에 참가하야 진보적 민주주의 정부를 수립하고 인민공국을 건설하는 사업'에 있다고 하면서, 이는 노동조합이 '조선노동계급의 경제적 정치적 사회적 문화적 향상과 궁극적 해방을 위한 투쟁을 자기 임무로 삼는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이러한 인식을 토대로 전평은 자신의 결성목적을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더욱이 조선의 자주독립과 진보적 민주주의를 위하야 중추세력(中樞勢力)을 차지하고 선두에서 가장 용감히 싸울 조선노동계급은 목적의식적(目的意識的)으로 굳세인 단결을 시급히 하라고 내외정세는 우리들을 불으고있다. 그것은 종래 일본제국주의의 살인적 탄압하에서 지하에서 소 구릅파적 조직과 十五일 이후 급격한 과도기인 이 짧은 기간에 전국 각지에서 노동조합은 자연발생적 분산적(分散的)으로 광범히 조직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무통일적 노동조합을 가지고서는 닥쳐오는 현 정세(現情勢)에 대처할수 없게되었다.
그리하야 우리 조선노동운동을 보다더 높은 단계(段階)로 끌어올려 목적의식적으로 통일지도하기 위하야 산업별적단일노동조합(産業別的單一勞 組合)을 재편성하야 전국적 동일지도기관을 조직하여야 되겟다는 부르지즘에서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준비위원회가 생기게 된것이며 급속한 시일내에 전국대회를 소집하야 전국평의회를 내놓자는 의도(意圖)에서 나오게 된것이다.'(「全評의 當面任務」,『全國勞 者新聞』, 제1호, 1945. 11. 1).
전평은 이러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아래와 같이 '상향식'과 '하향식' 방법을 결합시키는 조직원칙을 기본으로 삼았습니다.
'八월十五일 이후 전조선 각 중요산업도시를 중심으로 전개된 노조운동은 자연발생적 지역적 수공업적 혼합형적 조직체를 벗어나지 못하였나니 이것을 목적의식적 지도에 의하야 전국적으로 정연한 산업별적 조직으로 체계화 강력화식혀야 될 것이다. 예컨대 금속 화학 섬유 교통 등의 산업부문의 노동자를 전국적으로까지 종적(縱的) 조직체로 조성식혀 이 여러 전국적산업별단일노동조합이 총결합하야 전국평의회를 결성하는 것이다. 그러나 현하 국내국외적 정세에 비추어 이와같은 완전한 상향적(上向的) 조직을 위한 투쟁에 힘쓰는 동시에 우선 중요산업부문의 단일노조를 중심으로 전평(全評)을 결성하야 민주주의적 중앙집권의 힘으로 다시 하향적(下向的)으로 자체의 조직역량을 강화식혀 참으로 대중우에 토대를 둔 굿센 전국평의회가 되도록 모든 힘을 집중해야될 것이다.'(「선언(宣言)」,『全國勞 者新聞』, 제2호, 1945. 11. 16).
전평은 또한 당면의 시급한 과제로 다음과 같은 일반행동강령을 채택하고 운동을 전개합니다.
一. 노동자의 일반적 생활을 보장할 최저임금제를 확립하라.
一. 八시간 노동제를 실시하라.
一. 七일 一휴제와 연(年) 一개월간의 유급휴가제(有給休暇制)를 실시하라.
一. 부인노동자의 산전 산후 二개월간 유급휴가제를 실시하라.
一. 유해(有害) 위험작업은 七시간제를 확립하라.
一. 十四세 미만의 유년노동을 금지하라.
一. 노동자를 위한 주택, 탁아소, 오락실도서관, 의료기관을 설치하라.
一. 노동자의 이익을 위한 단체계약권을 확립하자.
一. 해고와 실업은 절대 반대한다.
一. 일본제국주의, 매국적 민족반역자 및 친일파의 일체 기업을 공장위원회(관리위원회)에서 보관하고 관리권에 참여하자.
一. 실업, 상병(傷病), 노폐(老廢) 노동자와 사망한 노동자의 유족생활(遺族生活)을 보장하는 사회보험제를 실시하라.
一. 착취를 본위로 한 일체 청부제를 반대하자.
一. 언론, 출판, 집회, 결사, 파업, 시위의 절대 자유.
一. 十八세 이상의 남녀 선거권 및 피선거권을 부여하라.
一. 농민운동을 절대 지지하자.
一. 조선인민공화국을 지지하자.
一. 조선의 자주독립 만세.
一. 세계 노동계급 단결 만세.
② 조직체계
전평의 조직은 처음 16개 산별노조(금속, 섬유, 토건, 통신, 철도, 화학, 전기, 출판, 교통운수, 식료, 광산, 목재, 조선, 어업, 일반봉급자, 해원)의 135개 지부와 함께 각 지역의 전반적인 노동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설치한 11개의 지방평의회로 구성되었습니다. 지방평의회는 전국평의회의 지부가 아닌 연락기관으로서의 위상을 갖고 있었고, 경성, 인천, 삼척, 부산, 마산, 목포, 군산, 대구, 대전, 광주, 전주 등 총 11개 지역에 만들어졌습니다.
그러다가 1947년 전평 2차 대회 이후에는 이전의 16개 산별노조에서 목재, 조선이 빠진 14개의 산별노조와 합동노조 및 5개 직업별 노조와 직업별 노조위원회로 그 구성이 변화하고, 지방평의회는 이 대회에서 도평의회 방침이 채택된 후 47년 5∼6월경 9개 지역에 도평의회가 결성되는 것과 함께 11개의 지구평의회로 개편됩니다.
또한 각 산별노조의 지부 밑에는 공장분회를 조직했고 각 공장 내에는 직장반을 두었습니다. 한편 전평은 지리상 연락이 어렵거나 소공장지역 혹은 노동자의 수가 적어서 산업별적 분회를 조직하기 어려운 지대에 장래 산업별로 재편성할 것을 염두에 둔 과도기 형태의 합동노조를 조직했습니다.
그러나 1947년 6월 이후 전평은 미군정의 불법화 조치로 인해 비합법적 노조로 전환하게 됩니다. 이에 맞추어 조직을 보존하기 위한 노조 조직의 세분화가 진행되었는데, 예를 들어 대공장의 조합은 5인 단위로 조를 편성하고 다시 조 책임자 5명 정도로 반을 편성한 뒤 각 반의 책임자를 모아 직장반회의를 구성, 여기서 마지막으로 공장 전체의 분회위원회를 형성한다는 식이었습니다.
한편 전평의 결성당시 규약에 명시된 각 기관은 다음과 같습니다. 우선 최고결의기관으로 매년 1회 각 조합의 대의원들이 참석하는 '정기대회'가 있고, 집행위원회가 필요하다고 결정하거나 가입조합의 3분의 1 이상이 요구할 시 개최하는 '임시대회'가 있습니다. 이때 대의원은 가입조합의 조합원 오백명 당 1명으로 배정했습니다. 그 아래에 집행위원장, 부집행위원장, 집행위원 및 각 산별노조 대표자로 구성된 '확대집행위원회'가 있고, 대회에서 선출된 집행위원으로 구성한 '집행위원회'가 있습니다. 또한 집행위원장, 부집행위원장, 상임위원으로 구성된 '상임집행위원회'가 있고, 여기서 상임집행위원은 각 부서를 분담하여 일상업무를 처리하는 일을 맡았습니다. 그리고 대회에서 피선된 감사위원으로 구성한 감사위원회도 있었습니다. 이 외에도 결성 당시 서기부, 조직부, 선전부, 조사부, 재정부, 쟁의부, 부인부, 청소년부, 실업대책부, 원호부 등 모두 10개의 부서를 두었습니다. 이 중 쟁의부는 1946년 3월 4일 산업건설부로 개편되어 1947년 초까지 유지되었고, 1947년 전평 2차 대회에서 총무부, 문화부, 기관지부가 신설되었습니다. 이때 각 부서의 책임자들은 각 산별노조 중앙위원회의 해당 부서 책임자들로 소위원회를 구성하여 전문적으로 연구하며 직접연결 지도하는 역할을 맡았는데, 이는 통일적이고 집중적인 사업실행을 위해서였습니다. 이 외에 각 분회의 경우는 분회위원회를 구성하여 여기에 책임자 이하 조합비를 징수하고 회계를 맡는 재정, 문서작성·출판물 배포·통신원의 일을 맡는 선전 등 최소 3명을 배치하고, 대공장의 경우는 부녀·청년 등 기타 필요에 따라 부문의 책임자를 두도록 했습니다.
다음으로 전평의 조직규모를 살펴보면, 1945년 11월 창립 당시 1,194개 분회에 조합원이 50여만명이었고 1946년 2월에는 1,676개의 분회에 조합원이 573,475명에 이릅니다. 그리고 1945년 11월 30일 결성된 북조선총국의 경우는 14개 산별노조에 21만여명의 조합원이 포괄되어 있었습니다. 참고로 전평 조합원의 성별 연령별 구성을 살펴보면, 1946년 2월 현재 남녀비율이 75 : 25이었고, 연령별 비율(청소년 : 장년)은 남자의 경우가 60 : 40, 여성의 경우는 80 : 20이었습니다.
<그림 3> 전평 결성 당시의 조직체계(단, 세계노련은 1946년 6월에 정식 가입)
북조선총국 -------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 ------ 세계노동조합연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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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 산별단일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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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 지방) 산별지부 ----- 지방평의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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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장) 분회 합동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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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장) 반
3) 전평의 주요 활동
① 공장관리운동과 산업건설운동
해방 직후 일제 및 친일조선인 자본가는 원료물자를 소각하고 생산품을 밀매하는 한편, 아무런 생계보장 없이 노동자들을 거리로 내쫓았습니다. 이에 따라 공장가동의 중단과 해고가 빈발하고 임금은 폭락하였으며 물자부족은 심각한 상태에 이르렀습니다. 이러한 상황에 맞서 노동자들은 생계비를 획득하기 위한 강력한 경제적 요구투쟁을 전개합니다. 이러한 투쟁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 '해산수당(혹은 퇴직금) 쟁취투쟁'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투쟁은 곧 한계를 드러냅니다. 해산수당을 쟁취함으로써 당장의 생계는 유지할 수 있다지만, 이는 기업의 해산과 노동조직의 해산을 인정하는 것이고 실업상태는 악화될 것이 뻔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전평은 이러한 자발적 투쟁을 '노동자에 의한 공장관리'와 '실업의 해소'라는 관점에서 보다 발전된 형태로 전개시키는 노력을 합니다. 즉, '해산수당' 이나 물가등귀와 생활조건의 급변을 이유로 한 '임시수당'을 쟁취할 경우 그 전액을 분배한 뒤 해산해 버리지 말고 이를 기금으로 조성하여 공장을 운영할 수 있으면 그렇게 하던지, 그렇지 않고도 공장을 운영할 수 있으면 장래의 투쟁기금 혹은 공제기금으로 적립하도록 한 것입니다.
이러한 노력도 있었지만 해방 직후 노동자들은 생산시설을 접수하여 관리운영하는 공장관리운동을 활발히 전개하고 있었습니다. 이 운동은 생산하지 않으면 자신이 굶는다는 의미에서 절박한 생존권 투쟁이기도 했고, 일본인 혹은 조선인 친일자본가를 몰아내고 생산기관을 노동자 스스로의 손에 넣으려는 목적의식적 권리투쟁이기도 했습니다. 이는 곧 거대한 규모로 번지기 시작, 1945년 11월 4일 현재에는 16개 산별노조 산하 분회에만도 728개의 공장관리위원회가 구성되어 있었고, 이에 속한 노동자의 수는 8만 8천여명에 다다를 정도였습니다. 한편 이러한 자주관리운동의 흐름은 공장뿐만 아니라 언론기관, 극장, 학교 등 전사회적으로 번져나갔습니다.
이렇게 노동자들 스스로가 공장을 관리하고 운영한 결과, 당시의 경성방직 영등포공장의 경우 8시간 노동제를 실시하고 야근을 철폐했음에도 불구하고 일제 시기 12시간씩의 강제노동에 시달렸을 적보다 생산액이 훨씬 증대되었고, 조선피혁 영등포공장의 경우도 노동자들이 구성한 관리운영위원회가 주1일 휴가와 8시간 노동제를 실시하고 병원, 이발소, 소비조합 등 후생시설을 정비하는 동시에 고장난 기계를 수선·활용하여 해방 전에 비해 무려 2∼3배의 능률을 올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미군정은 노동자들의 자발적이고 창의적인 이 운동이 자본주의 질서를 부정하는 움직임으로 발전할 것을 우려하여 1945년 12월 국·공유 재산은 물론 일본인 사유재산 모두를 미군정이 접수한다는 방침을 밝히고 접수된 공장에는 그 관리인을 임명했습니다. 이는 노동자들 스스로의 공장관리운동을 전면적으로 부정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미군정의 정책과 함께 전평에서도 기존의 공장관리운동에 영향을 미칠 조치들을 발표합니다. 1945년 11월 30일 제시된 「산업건설 등에 관한 방침」이 그것인데,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1. 파업은 수단이고 목적이 아니다. 양심적이고 건전한 생산에 대해서는 파업을 행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생산에 적극 협력한다.
2. 조선 자주독립을 원조하는 미·소 양군에 대해 협력한다. 이번 조선 해방에 있어 미·소·중의 공적에 대해서는 만강의 감사와 경의를 표한다. 또한 카이로회담, 포츠담선언, 전평대회석상에서의 로빈슨 노무과장의 언명 등의 진보적 정책은 그대로 실시될 것을 기대하며, 그리하여 자주독립과 민주적 자주경제 건설을 원조하는 정책에 적극 협력하고 국내 안정을 꾀한다.
3. 양심적 민족자본가와 협력하여 부족공황을 타개한다.
4. 비양심적 악덕 모리배를 배격한다.'(『해방일보』, 1945. 11. 30)
이 방침의 취지는 자주독립과 경제건설을 원조하는 미군정의 정책에 협력하며, 양심적 민족자본에 대해서는 파업을 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생산에 적극 협력한다는 것입니다. 문자 그대로만 보면 얼핏 노자협력주의로 볼 수도 있는 이러한 전술을 전평이 내걸었던 것은 크게 두 가지 이유에서였습니다. 하나는 실업과 물자부족이 너무나 극심한 탓에 공장가동을 통해 실업자를 구제하면서 조직화의 기반을 마련한다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점차 마찰을 빚고 있는 미군정과의 관계에 변화를 모색해보자는 것이었습니다. 이는 당시의 정세를 바라본 관점에서 나온 것이었습니다. 즉 1945년 12월 모스크바 삼상회의의 결정은 미소원조 하에 조선의 자주독립을 보장하여 줄 것으로 기대되었고, 한반도 전체에 걸쳐 힘의 우위를 자신하고 있던 좌익의 입장에서 보면 굳이 공장관리운동을 고집하며 미군정과 불편한 관계를 만들 필요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전평은 1946년 1월 이러한 방침을 더욱 구체화하여 '지령 제6호' 「산업건설운동을 중심으로 한 당면투쟁에 관한 지령」을 발표합니다. 이 내용에 따르면 전평은 아직 노동자계급의 주체역량이 미약하기 때문에 '노동자 대중의 투쟁을 목적의식적으로 지도할 수 있는 자기역량의 확대강화'가 필요하다는 것을 전제하고, 산업건설운동을 통해 '민족통일전선에 있어서의 노동자계급의 영도권을 보장'하는 한편 '광범한 미조직 노동자 및 실업자 대중을 투쟁에 동원하며 조직'할 것을 강조합니다. 이 지령에 제시된 구체적인 투쟁 목표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I. 애국적 민족자본과 협력하여 산업을 건설하자.
I. 생산을 증가시켜서 부족공황을 극복하자.
I. 휴지(休止)공장을 빨리 재개하라.
I. 실업자와 전재(戰災)빈민에게 의식주와 직업을 보장하라.
I. 8시간 노동제를 실시하라.
I. 시간외 노동에는 임금을 배액 지불하라.
I. 저물가 정책을 실시하여 국민생활을 안정시키라.
I. 물가등귀에 따라서 임금을 인상하라.
I. 부녀노동자에게 매월 3일간의 유급 생리휴가제를 실시하라.
I. 기업 내의 스포츠, 오락, 욕탕 등의 설비와 탁아소, 의료기관 등의 설비의 완비, 그 노동자에 의한 관리.
I. 노동자의 이익을 위한 단체계약권의 체결.
I. 실업자와 전재민에게 전등, 가스, 수도료 및 집세를 면제하라.
I. 쌀과 일용 필수품을 배급하라.
I. 물자영단(物資營團) 보관물자를 협동조합을 통해서 배급하라.
I. 일본 제국주의 및 매국적 민족반역자, 친일파의 모든 기업을 자주적 관리위원회·공장위원회에 보관시키거나 그 위원회를 관리에 참여시키라!
I. 군수산업을 평화산업으로 재편성하라!
I. 모리배의 기업관리, 물자 방매(放賣) 착복 절대 배격.
전평상임위원회는 또한 산업건설운동을 전문적으로 연구하고 한층 강력한 건설투쟁을 위해 1946년 3월 4일 기존 쟁의부는 규약상 그대로 두고, 그 부원으로 대책위원회를 구성하여 '산업건설부'를 신설했습니다.
이리하여 1946년 초부터 미군정과 본격적으로 대립하는 9월 총파업 이전까지 산업건설운동이 주류를 이루게 됩니다. 그렇지만 위의 투쟁항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공장관리운동의 흐름이 완전히 소멸된 것은 아닙니다. 산업건설운동의 과정 속에서도 기업관리권 참여와 노동조선 개선을 위한 공장 내 노동자의 발언권 확보운동, 악덕관리인 배척운동 등 다양한 형태로 그런 흐름은 이어졌습니다.
한편 '지령 제6호'는 위의 과제들을 각 기업에서 실현하기 위한 지침을 내립니다. 이에 따르면 기업내 활동은 노조의 기업내 분회 총회와 분회위원회의 확립을 기본으로 하면서 종업원대회의 개최를 통해 전종업원을 포괄하는 투쟁위원회를 조직하고 능률증진과 노동조건의 개선을 도모한다는 것이었고, 이 투쟁위원회는 산업건설운동의 종결과 동시에 자주적 공장위원회로 발전·전화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또 이 투쟁에 동원된 노동자를 조합에 가입시켜 투쟁의 종결과 함께 획립·조직된 분회를 망라하여 산별지부 및 타지방 평의회 등의 대회를 소집하고 각 기관을 확립한다는 계획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계획은 제대로 실현되지 못했고, 자주적 공장위원회로의 발전전망도 다소 모호한 것이었습니다.
여기서 한가지 살펴 볼 것은 전평 서기국의 한 철이 주도한 산업건설운동에서의 우익적 편향인데, 이는 많은 내부적 비판을 받았습니다.
'우익적 경향의 현저한 예는 기업 내에 있어서의 노동자 대중의 '기본적 이익과 권리'를 위한 투쟁을 대중과 함께 대중적으로 전개하는 투쟁적 노동조합으로서의 기본적 투쟁방법을 말살시키고 또는 대중투쟁의 수단과 방법을 기피하고 영국 신사적 '점잖은' 간부들의 소위 외교교섭으로 만사가 해결되리라고 하는 태도 등을 지적할 수 있다. 외교적 교섭이 성공하는 것은 언제든지 강력한 대중투쟁의 토대 위에서만 가능한 것이다. 이것은 전투적 노동조합운동의 ABC에 속하는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의 예는 무슨 문제가 발생하였을 때 하등의 투쟁도 전개하지 않고 소위 '여론'을 환기함으로써 해결을 보자는 것이 있다. 이것 역시 좋지 못한 우익적 신사적 사상의 하나이다. 여론이라는 것은 노동자의 단결이 굳세고 그 투쟁이 강력하고 유리할 때에만 노동자의 편이 되는 것이 보통이다. 그러므로 여론을 환기하는 것도 물론 필요하지만 그것을 유리하게 이용하는 데에도 노동자 자신의 강력한 투쟁이 없이는 문제가 되지 않는 것이다.'(「두 개의 偏向에 對한 對內鬪爭을 展開하자 - 産業建設運動에 나타난 右翼及超左翼的(우르트라) 偏向」,『全國勞 者新聞』, 제23호, 1946. 6. 14).
이러한 비판에도 불구하고 한 철 등이 주도한 전평 서기국은 1946년 6월 13일 지령 제24호 「일상 노동운동과 군정협력에 관한 지지의 건」, 6월 17일 특별지령 제24호「조합활동 특히 직장 내 활동태도에 관하여」, 7월 14일 「지령 제24호 중 파업전술에 대한 부분의 추가해설」 등에서 파업, 태업 및 시위·정치운동을 가급적 하지 말라는 놀라운 지시를 내립니다. 그러나 이는 2개월 뒤 전평 상임위원회에 의해서 공식적으로 비판되고 폐기됩니다.
이런 편향을 보여 주기도 한 산업건설운동은, 9월 총파업 이후 1946년 12월 전평 서기국이 전면교체되고 산업건설부가 축소되면서 점점 소멸해갑니다. 그러나 산업건설부 자체는 1947년 2월 전평의 2차대회까지도 유지됩니다.
② 9월 총파업
1946년 5월 미소공동위원회가 무기한 휴회에 들어가자 미군정은 좌익에 대한 공세를 강화하고, 남조선을 항구적인 미군기지로 전환시킬 계획을 발표했습니다. 반공우익세력은 공위의 휴회를 결렬로 선전하며 단정수립 움직임을 본격화했고, 좌익 단체와 인사들에 대한 테러를 강화했습니다.
그러나 조공을 비롯한 좌익은 여전히 '미군정에 반성의 기회'를 주어 민주주의 노선으로 복귀시키고, 미소공위를 재개시켜 한반도 문제를 평화적으로 해결한다는 전망을 유지했습니다. 미소공위가 재개될 가능성이 있는 상황에서 전면적으로 미군정에 대항하는 정책은 채택하지 않은 것입니다. 그렇지만 좌익은 반동경찰과 우익의 테러에 대해서 '정당방위의 투쟁을 전개하여 역공세로' 나아갈 것을 주장했습니다.
이러한 좌익 전반의 정세인식 변화와 함께 전평의 정책도 일정한 변화를 보입니다. 이전의 산업건설운동은 노동자의 이익의 관점에서 재조정되었고, 협력의 조건도 극히 제한되었으며 이 경우에도 노동자의 이익을 위한 투쟁의 관점이 견지되었습니다.
이러한 '신전술'을 배경으로 하여 최초의 전국적 총파업이 전개되었습니다. 총파업은 1946년 9월 23일 7천여명의 부산 철도노동자들의 파업으로부터 출발하였습니다. 24일에는 서울 철도노동자들이 파업에 돌입했고, 전국의 4만여 철도노동자들이 합류하여 전국의 수송망이 마비되었습니다. 25일에는 경성출판노동조합이 파업에 돌입했고, 26일은 경성전기가 파업을 단행했으며, 10월 1일에는 서울시내 전차가 3시간 동안 부분파업을 하고, 각 지역의 우체국도 파업에 돌입했습니다. 또한 학생들은 동맹휴학으로 이에 동조하고 정치적 시위운동으로 발전했습니다.
전평은 총파업의 개시를 기해 '남조선 총파업 투쟁위원회'를 조직하고, 26일에는 '기아와 테러의 전율의 구렁텅이에서 전 민족을 구출하고 생존과 자유의 길을 열고 조국의 완전한 자주독립을 위해 남조선 4만 철도노동자를 선두로 사생존망(死生存亡)의 일대 민족투쟁을 개시한다'는 요지의 「총파업투쟁선언서」를 발표하고 다음과 같은 요구조건을 내걸었습니다.
1. 쌀을 달라. 노동자, 사무원, 모든 시민에게 3홉 이상 배급하라.
2. 물가등귀에 따라 임금을 인상하라.
3. 전재민, 실업자에게 일과 집과 쌀을 달라.
4. 공장폐쇄, 해고 절대 반대.
5. 노동운동의 절대 자유.
6. 일체의 반동테러 배격.
7. 민주주의적 노동법령을 즉시 실시하라.
8. 민주주의운동의 지도자에 대한 지명수배와 체포령을 즉시 철회하라.
9. 검거 투옥중인 민주주의운동자를 즉시 석방하라.
10. 언론·출판·집회·결사·시위·파업의 자유를 보장하라.
11. 학원의 자유를 무시하는 국립대학안(案)을 즉시 철회하라.
12. 『해방일보』, 『인민보』, 『현대일보』 기타 정간중인 신문을 즉시 복간시키고 그 사원을 석방하라.
한편 10월 1일에는 대구에서 시위 중이던 노동자가 경찰의 발포로 사망하게 되자 대구지역 노동자들의 파업투쟁은 격렬한 형태로 전개되었습니다. 이를 계기로 하여 대구경북 지방을 중심으로 한 인민항쟁이 경남, 전남지방으로 들불처럼 번져나갔습니다. 지방으로 확산된 총파업이 농민들과 결합하여 대중봉기의 양상으로 나타날 수 있었던 것은 당시 미군정의 양곡강제수매정책에 대해 농민들의 불만과 분노가 극에 달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10월 중순 경 대구와 부산을 제외한 지역에서 대체적으로 마무리된 이 총파업에는 파업참가자 수가 25만명에 달했고, 인민항쟁으로 발전한 10월에는 파업 및 시위참가자의 수가 연인원 230여만명에 달해 3. 1운동 이래 최대규모의 대중투쟁 기록을 남겼습니다. 또한 11월 중순까지 지속되었던 파업 및 시위에서는 3만명 이상의 노동자, 농민, 좌익활동가 등이 체포되는 가혹한 탄압을 받았습니다.
이 총파업과 인민항쟁은 이전 시기의 운동과 비교해 몇가지 특징들을 보여주었습니다. 개별공장, 소규모 지역을 중심으로 한 투쟁에서 전산업과 전지역으로 확산된 투쟁을 만들었다는 점, 농민과 학생 등 타 계층과 함께 장기간에 걸친 전투적 연대를 이루어 냈다는 점, 파업과 시위 및 반동테러와 무장반격에 대한 자위적 무장반격 등 다양한 투쟁형태를 구사했다는 점, 경제적 요구와 정치적 요구를 결합시키고 미군정의 정책을 규탄·폭로했다는 점 등이 이전과 구분되는 것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총파업과 인민항쟁은 여러 가지 한계 또한 노출했습니다. 위로부터의 통일전선과 아래로부터의 통일전선이 소홀히 된 채 좌익의 영향력이 있는 의식적 대중이 독자적으로 진출하면서 결과적으로 미군정과 우익의 우세한 물리력 앞에 노출되어 조직역량의 파손이 심각했다는 점, 여전히 신전술의 입장에서 미군정을 투쟁을 통한 민주주의 노선으로의 견인대상으로 여김으로써 미군정의 유혈탄압에 적극적으로 대처하지 못한 점 등을 들 수 있습니다.
전평은 9월 총파업 이후에도 3·22 총파업, 2·7 총파업, 5·8 총파업 등 수차례의 총파업을 전개했습니다. 1947년 3·22 총파업은 당시 빈발하던 공장폐쇄, 해고 및 테러에 적극 대응하기 위한 것으로, 전평은 '남조선해고폭압반대투쟁위원회'를 조직하고 '해고 반대, 해고자 복직, 테러단 해체, 노동운동의 자유' 등의 요구를 내걸고 투쟁을 전개했습니다. 이 투쟁은 철도, 체신, 전기, 금속노조 등이 주도했으며 약 50만명이 파업 및 시위에 동참했습니다. 1948년의 2·7 총파업은 남한 단독정부를 수립하고자 조사 나온 유엔임시조선위원회 반대, 남조선 단독정부 수립 반대, 미소양군 동시철수, 이승만 타도, 임금 두배 인상 등을 요구한 것이었고, 5·8 총파업은 5월 10일로 예정된 남한 단독정부 수립을 위한 총선거를 반대했던 정치파업이었습니다.
이러한 일련의 투쟁과 미군정의 탄압으로 1946년 9월 총파업 이후 47년 3월 현재까지 해고된 전평 조합원 수만도 1만 2천여명에 달했습니다. 그리고 1947년 6월 미군정 이대위 노동부장은 '정치색을 띤 노동조합은 정당한 단체로 인정하지 않겠다'는 담화문을 발표하며 전평을 불법화했습니다. 미군정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1947년 8월 이후 좌익세력 전체를 대상으로 대대적인 검거작전을 벌여 전평을 비롯한 거의 모든 대중조직이 지하화하거나 파괴되었습니다. 이런 조건 속에서도 전평은 1948년 초까지 약 50만명의 조합원을 유지하며 끈질기게 활동했습니다. 그러나 전평은 1948년 5·10 남한 단독선거 이후에는 별다른 활동을 하지 못했고, 1949년에는 조직이 거의 붕괴되었습니다.
4) 전평의 운동에 덧붙여
전평은 해방 이후 약 3년여에 걸치는 짧은 시기 동안 급격한 성장과 패배를 경험했습니다. 이러한 성장과 패배는 우선 해방공간이라는 당시의 특수한 상황이 전제되지 않고서는 올바로 이해될 수 없습니다. 특히 당시는 미군정이 일관된 의도를 갖고 남조선에 강한 규정력을 행사하긴 했지만 미소공동위원회가 1, 2차에 걸쳐 완전히 결렬되기 전까지는 모스크바 삼상회의 결정에 의거하여 한반도에 자주적 민족국가 수립의 가능성이 남아있었고, 정권의 주도권을 어느 세력이 잡느냐 하는 중대한 기로에 서 있었습니다. 따라서 좌우의 정치세력들은 물론 어느 대중단체들도 정치화되지 않을 수 없는 조건이었고, 노동자계급은 자주적 민족국가를 수립하고 반제·반봉건 혁명을 완수해야 한다는 객관적 과제를 짊어지고 있었습니다.
이와 함께 전평을 주도했던 사람들을 살펴보는 것이 필요합니다. 이들은 대부분 일제하에서 치열하게 노동자운동, 조공 재건운동을 위해 분투하다 투옥되었거나 지하에서 비합법활동을 지속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해방이 되자 이들 운동역량이 모두 집결하여 당을 재건하고 전평을 비롯해 모든 부문의 대중운동을 활발하고 신속히 조직해나갔습니다. 각 지방에서는 이들이 주도가 된 인민위원회가 치안과 행정을 담당하며 실질적인 권력을 행사했고, 국군준비대, 학병동맹 등 상당한 규모의 군사조직까지 만들 수 있었습니다. 이들이 이렇게 압도적인 대중적 영향력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일제에 맞서 누구보다도 가장 헌신적으로 투쟁했던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특히 노동자운동은 그 자체가 민족해방투쟁의 성격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대개의 자본가가 일본인들이었고, 이들 자본가를 상대로 한 투쟁은 자연히 민족해방투쟁으로 여겨졌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요인들이 해방 이후 급속히 전평을 결성하면서도 대중적인 토대를 확고히 할 수 있었던 조건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전평의 운동이 자주적 민족국가 수립과 함께 반제·반봉건 혁명이라는 사회변혁의 전망을 지니고 목적의식적으로 전개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된 원인은 무엇일까요. 이를 주·객관적 요인으로 간략히 짚어본다면, 우선 객관적 요인 중 가장 중요하게 지적할 수 있는 것은 점령군으로 진주한 미군정의 절대적 영향력입니다. 물론 미군정의 이러한 영향력을 믿고, 테러와 폭력을 일삼으며 자신의 권력기반을 다져나간 반공우익세력의 존재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로 말미암아 전평은 여러 가지 편향과 잘못을 스스로 정정하고 새롭게 활동을 전개해 나갈 가능성마저 완전히 박탈당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와 함께 주체적인 문제점도 빼놓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 문제는 당시의 좌익세력 전체에 대한 평가와도 맞물린 문제여서 섣불리 이렇다저렇다 하기는 어렵습니다. 아직까지 당시의 운동 전체를 올바르게 조망할 만큼 연구가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전평의 운동 전체에 대한 일반적인 평가라기보다는 당시에 나타났던 몇 가지 편향을 중심으로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노동조합과 당과의 관계에서 나타난 문제입니다. 예를 들면 쌀획득 투쟁과정에서 나타난 하나의 편향이 있는데, 당시 서울·인천·안성 등 일부지역에서는 '당은 重하고 조합은 輕하다'든가, '조합이 당의 지령에 따라 활동한다'는 모습이 나타났다고 합니다. 따라서 전평은 '당과 조합을 혼동하고, 조합을 섹트화해 버리는' 이러한 편향에 대해 노동조합과 당의 상대적 독자성을 강조하며 내부비판을 가합니다. 당이 당으로서의 기능과 독자성을 발휘하고 조합이 조합으로서의 기능과 독자성을 충분히 발휘해야만 각기 조직을 확대강화시키며 운동을 비약적으로 발전시킬 수 있다는 이유에서였습니다.
한편 노동조합과 당의 관계에 대해 '전평집행위원장과 간부, 각 전국산별간부, 지방평의회의 간부는 물론 각 지방지부, 심지어는 분회의 간부까지도 당원들이었다. 전평의 전기구를 당원들이 장악하고 있었다. ... 당과 노동조합간에 상대적인 자주성이 없었다'고 말하는 분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지적은 자칫 오해의 소지가 있습니다. 대중조직의 주요위치를 당원들이 장악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당과 노조간에 상대적인 자주성이 없다거나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능력있고 헌신적인 당원들이 대중조직을 선두에서 이끄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것입니다. 문제는 당운동과 대중운동이 각각의 기능과 독자성을 발휘하면서 서로의 운동이 상승작용을 일으킬 수 있도록 하는 것인데, 만일 당시의 운동이 그렇지 못했다면 조선공산당과 전평의 운동은 상대적인 자주성을 갖지 못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직 그 운동의 전모가 밝혀지지 않은 상태에서 이렇게 단언하기는 힘듭니다.
다음으로 산업건설운동에서 나타난 일부 우익적 편향을 들 수 있는데, 이에 대해서는 전평의 주요 활동 부분에서 잠깐 살펴보았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편향이 생겨날 수 있었던 데에는 미군정에 대한 인식의 문제가 걸려있습니다. 당시 미군정에 대한 인식의 문제는 비단 전평뿐만 아니라 좌익세력 전반의 낙관적인 정세인식과 궤를 같이하는 것입니다. 낙관적인 정세인식이라 함은 당시 좌익세력이 미군정의 제국주의적 본질을 몰랐다는 뜻은 아닙니다. 문제는 미군정의 본질이 당시 국제정세의 흐름에 비추어 보아 결코 호락호락하게 관철될 수는 없을 것이라 생각했던 점입니다. 사실 2차대전이 끝난 후에 사회주의권의 급격한 팽창뿐만 아니라 프랑스에서 공산당과 사회당의 연정이 들어서고, 영국에서는 노동당이 보수당을 물리쳤으며 당시 미국도 공화당이 아니라 민주당이 집권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생각할만한 이유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인식은 모스크바 삼상회의 결정과 이를 실천하기 위한 미소공동위원회의 설치로 현실로 드러나는 듯 했습니다. 이 때문에 좌익세력은 1947년 7월 2차 미소공동위원회가 결렬되고 나서야 전략을 근본적으로 수정하여 미군정과 정면대결합니다. 그러나 이미 조직역량이 심각히 훼손된 상태에서 이러한 정면대결은 별다른 힘을 발휘할 수 없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정치투쟁과 경제투쟁의 올바른 결합에 관한 문제입니다. 당시의 정세는 정권을 다투는 지극히 정치적인 상황이었고, 따라서 정권수립의 관건인 미소공동위원회의 재개같은 문제도 전평이 나서야했던 것은 분명합니다. 그렇지만 이 과정에서 아래와 같은 편향이 나타나기도 합니다.
''공위 재개를 바란다'느니 '공위의 성공을 바란다'느니 하는 연판장, 성명서, 진정서 등등을 만들어 내는 운동 등등도 이 순간에 있어서는 불가결한 것은 물론이다. 그러나 대중의 절실하고 뼈아픈 요구를 경시하고 이와 같은 운동만을 중시한다면 그것은 문제의 촛점을 망각한 것이며 현실의 투쟁을 희망의 슬로간으로써 해소해 버리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다.'(김양재,「해고반대투쟁의 의의와 그 조직활동의 방법」,『노동조합 교정』, 1987, 돌베개 복간, 145쪽).
한편 대중의 힘에 의거하여 폭발적으로 전개된 9월 총파업에 대한 평가에서도 정치투쟁과 경제투쟁이 올바로 결합되지는 못했다는 반성이 제기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9월 총파업의 피투성이의 투쟁, 쓰라린 경험 속에서 우리는 대중적 토의에 의한 요구의 결정, 정치적 요구와 경제적 요구의 지묘(至妙)하고도 변증법적인 결합이 없이는 투쟁을 승리로 이끌어 갈 수 없으며 또 승리할 수도 없다는 것을 절실히 느꼈다.'(김양재,「해고반대투쟁의 의의와 그 조직활동의 방법」,『노동조합 교정』, 1987, 돌베개 복간, 128쪽).
4. 마무리하며
요즈음 IMF 위기상황을 계기로 민주노조운동의 위기가 논의되고 이를 극복하기 위한 다양한 대안들이 모색되고 있습니다. 그러한 모색들 중 산별노조가 단연 압도적인 화두로 떠오르고 있습니다. 그러나 현재의 주도적인 논의들은 왠지 알맹이가 빠졌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습니다.
산별노조로 전환해야 한다는 근거로 정리해고제 도입과 전임자 임금 금지 등이 기업별 노조에 사형선고를 내렸기 때문이라는 주장이 있습니다. 그런데 정리해고제 도입은 1기 노사정위원회에서 민주노총이 손발을 들어주었고, 전임자 임금 지급 처벌조항이 생긴 것은 96·97 총파업 때 정권에게 결정타를 날리지 못한 탓이 아니었던가요. 또 금속산업연맹의 모 간부는 작년의 현대자동차 정리해고반대 투쟁이 패배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 잘못된 '정리해고 철폐' 기조와 기업별 교섭·투쟁의 한계에 있다고 하면서 이를 산별노조 전환의 근거로 제시하기도 했는데, 이는 본말이 전도된 것이 아닌가요.
이러한 논리들은 곧 모든 문제의 뿌리를 '기업별 노조의 한계'라는 말 한마디로 환원시키고 맙니다. 이렇게 따라가다 보면 우리는 그 뒤에 가리워져 있는 다른 문제들을 볼 수 없게 됩니다.
현재 우리 노동조합운동의 문제가 '기업별 노조의 한계'라는 말로 뭉뚱그려질 수는 없는 것입니다. 상식적인 이야기이지만 어느 한 조직이 어떠한 형식을 갖고 있느냐 하는 것으로 그 조직을 판단할 수는 없습니다. 그 조직을 올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조직 자체의 내용과 형식을 통일적으로 파악하는 것과 함께 전체적인 사회관계 속에서 그 조직이 점하는 위치를 고려해야 합니다.
첫단추의 의미를 아실겁니다. 새로 노조를 만들기보다 어용노조를 민주화하는 것이 수십배 더 힘들다는 것을 우리는 뼈저리게 경험했습니다. 그것이 어떤 목적지로 향하는 지도 모른 채 선뜻 배를 탈 수는 없는 것입니다. 산별노조로의 조직전환 문제도 마찬가지입니다. 먼저 현재의 노동조합운동 상태가 어떠하며, 어떤 한계를 지니고 있는지 그리고 그 극복의 방향은 무엇인지를 대중적으로 또 진지하게 논의하는 과정에서 조직형태 문제도 논의되어야 합니다. 이러한 과정없이 '기업별 노조의 한계'라는 말 한마디로 모든 것을 대체해 버리면, 산별노조만 만들면 다 해결된다는 환상에 빠지기 쉽습니다.
앞에서 우리는 한국에서의 노동조직의 변화흐름을 살펴보았고, 그 증에서도 특히 전평을 중심으로 살펴보았습니다. 한국의 노동자운동은 임금노동자가 등장하기 시작한 이후부터 일제 식민지하의 엄혹한 조건, 전쟁의 페허, 군사독재정권의 탄압을 뚫고 그 가느다란 맥을 끊임없이 이어왔습니다. 그리고 그 정점에 전평이 있었습니다. 전평은 해방 직후 자연발생적이긴 하지만 광범위하게 결성된 노동조합의 대중적 토대를 기반으로 당면의 정세에 능동적으로 대처하기 위해 목적의식적으로 만들어졌던 조직입니다. 이를 산별노조 결성과정과 관련해 본다면, 전평은 산별노조를 전제로 하여 결성된 것이 아니라 전평 결성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전평 준비위원회의 통일적인 방침 아래 각각의 산별노조가 목적의식적으로 조직되면서 만들어진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전평은 해방 직후 노동자계급에게 부과된 객관적 임무를 수행하기 위한 노동자계급의 총단결·총투쟁의 관점에서 각각의 노동자들을 산별노조로 묶어냈던 것입니다. 그러하기에 전평을 중심으로 단결한 노동자계급은 정권수립의 문제에 적극 참가할 수 있었고, 건국의 경제적 기초를 다진다는 의미에서의 산업건설운동, 쌀 획득투쟁을 중심으로 한 광범위한 실업자운동, 9월 총파업, 3·22 총파업, 2·7 총파업, 5·8 총파업 등의 강고한 투쟁을 전개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전평은 미군정과 보수우익 세력에 의해 철저하게 파괴되었고, 뒤이은 한국전쟁의 발발은 그 명맥마저 깡그리 소멸시켰습니다. 결국 전평의 빈 자리는 대한노총과 한국노총이 차지했습니다. 이 과정은 운동의 소멸과 단절의 과정에 다름아니었습니다. 그 후 수십년이 지나, 87년 노동자대투쟁을 통해서야 한국의 노동자운동은 비로소 막힌 숨통을 틔울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현재, 민주노조운동의 상황을 보고 있노라면 그 숨통이 점점 막혀간다는 느낌이 듭니다. 더 늦기 전에 폭넓은 고민과 강단있는 실천으로 이 시기를 헤쳐나가야 합니다. 오늘 살펴 본 한국에서의 산별노조운동이 우리 노동자운동의 과거에 대한 이해는 물론 미래의 전망을 세우는 데 소중한 밑거름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