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독대나 닦아라"… 조롱 이기다
1990년 포철서 공채 공고하자 "여자 뽑는대"… 46년만에 임원
은행장·검사장·철도公 사장… 男 독점 분야에도 '1호' 탄생
한목소리로 강조한 건… 체력
입사 또는 경력시작 이후 수술·입원 횟수는 평균 0.4회"
일주일에 2회는 꼭 운동… 주량은 소주 2잔 정도 마신다"
여성의 敵은 여성이라고?
"독일 등 외국서도 있는 통설"… 5명이 '동의한다' 답변 내놔
대다수는 "女끼리 경쟁하게 남성들이 설정해놓은 편견"
- Getty images 멀티비츠
1990년 공채로 입사한 여성 48명 중 한 명인 최은주 상무는 지난해 3월 포스코 여성 임원이 됐다. 1993년 삼성 공채로 입사한 김정미 삼성 에버랜드 패션부문 상무는 2011년 첫 여성 임원에 올랐다. 지난해 박근혜 대통령이 당선된 이후 잇따라 '여성 1호'가 탄생했다. 첫 철도공사 사장, 첫 여성 은행장, 첫 여성 검사장…. 공항공사, 철도시설공단 등 남성들이 거의 독점하다시피 한 교통과 건설 부문에도 '1호' 기록을 단 여성 리더들이 등장했다. 지난 1~2년 새 기업, 은행, 검찰, 예술계 등에서 잇따라 '천장'을 부순 여성 1호 20인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1호 여성' 6시에 일어나 하루 30통 통화하고 한 달 3권 독서한다
최초 여성들은 오전 6시에 일어나는 경우가 가장 많았다(9명). 여성이 남성에 비해 상대적으로 인맥에 약하다는 것은 적어도 그들에게는 통용되지 않았다. 휴대폰에 저장된 번호는 평균 769개였다. 권선주 IBK기업은행장이 3000개로 가장 많았다. 하루에 걸고 받는 통화는 30통 정도라는 답변이 다수였다. 1년 휴가 일수는 평균 4일. 휴일에는 걷기(8명), 집안일(6명)을 하는 이가 많았다. 그들이 강조한 것은 체력. 일반 직장인보다 덜 쉬면서 더 오래 일하지만 철저한 자기 관리를 위해 "주 2회 이상 운동한다"는 여성이 18명이었다. 입사 혹은 경력 시작 이후 한 번도 입원하거나 수술받은 적이 없다는 답변이 18명이었다. 흡연은 전혀 하지 않았고, 주량은 와인이나 소주 2잔 정도가 평균이었다.
취미로는 산책과 독서가 많았다. "다니는 성당에서도 쓸모 있는 사람이 되고 싶어서" 일주일에 한 번 피아노 레슨을 받는 경우(조희진 서울고검 차장검사)도 있었다. 최연혜 한국철도공사 사장은 철도 여행이 취미였다.
자녀가 2명인 여성(14명)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육아는 시집과 친정에서 골고루 도움을 받았다. "일은 제게 목숨"이라는 손병옥 푸르덴셜생명 사장은 "일과 가정의 균형은 하루 단위로 50대50이 아니라 경력 전체로 봤을 때 반반"이라며 "입학·졸업 때 아이에게 신경 쓰려면 평소 전력을 다해 일에 매진해야 한다"고 말했다. 손 사장은 3년 전 세상을 떠난 남편이 암 선고를 받던 때가 최대의 위기였다고 말했다. "그때 제가 일을 그만두려 하자 남편이 저를 말리며 '당신은 열심히 일하고, 나는 열심히 건강을 다스리자'며 격려해준 것이 아직도 힘이 된다."
'여성에게 가정과 일의 조화는 네버엔딩 스토리'라는 말은 곳곳에서 증명됐다. 포스코A&C 최은주 상무는 딸을 낳기 전날에도 야근을 했다. "내 딸이 언제 태어날지는 내가 안다"고 우겼다고 한다. 출근할 때는 늘 팔목이 퉁퉁 부어 있었다. 천 기저귀만 쓰겠다고 고집해 새벽마다 수십개를 삶아서 널어놓다 생긴 후유증이었다. 그렇게 키운 딸에게 최 상무는 선언했다. "엄마는 일하지 않으면 불행할 것 같아. 그런데 네가 공부를 못하면 엄마는 회사를 못 다녀. 그러니까 열심히 해." 엄마의 말에 "엄마는 돈 많이 벌어와. 각자 자기 일 열심히 하자"던 딸은 올해 서울대 간호학과에 수석 입학했다.
권선주 은행장은 "집안일 해야지, 경쟁에서 밀리지도 말아야지, 그래서 집에서 아기 업고 서서 책을 보며 공부했다"고 말했다.
◇"남자가 어떻게 여자를 모시나" "여자는 집에 가서 장독대나…"
여성과 함께 일하는 것이 익숙하지 않던 조직에서 첫걸음은 쉽지 않았다. 김영란 전 대법관은 "3인 합의 재판부 판사로 발령받았는데, 나중에 듣고 보니 남자 판사들이 저와 같이 근무하기 싫었다고 했다더라"고 말했다. 동료 판사는 물론 아래 직원들도 "여자가 판사인데 어떻게 모시느냐"고 난감(?)해했다. 조희진 검사장은 '여자가 늘어나면 조직의 화력이 약해진다'는 말이 불편했다고 한다. "25년 전 전 직원이 함께 사무실 청소를 하는데 동료이자 팀장이던 남성이 저를 보고 '집에 가서 장독대나 닦아라'고 하더라"(권선주 은행장), "농담조로 '다 되는데 키가 안 되네'라는 말을 듣고 웃어넘긴 적이 있다"(김정미 삼성 에버랜드 패션부문 상무) 등 여성에 대한 고정관념이 밴 언사도 기억에 남는다고 했다.
◇"여자한테 맡겼다가 어찌 되려고" 겁을 낸 조직
1호 여성들이 공통적으로 들은 말은 "이건 여자한테 맡겨본 적이 없어서 안 된다"였다. '유리'를 깬 비결은 논리와 설득이었다. 송연선 이비스 앰배서더 인사동 총지배인은 "여자는 일과 가정 중 가정을 우선하게 돼 있다"며 총지배인 선임에 반대하는 사내 인사를 설득하기 위해 프레젠테이션을 했다. 호텔 수익 담당으로 일한 실적 등 세 가지 이유를 들어 결국 승진에 성공했다. 최은주 포스코 상무는 희망 부서에 자리가 났으나 역시 "여자는 안 해본 일"이라며 난색을 표하는 상사에게 따로 면담을 신청해 일을 따낸 적이 있다. 한국공항공사 최초로 지사장이 된 이미애 대구국제공항 지사장은 "공항은 테러나 보안을 중시하다 보니 여성의 영역이 아니라고 아예 시켜주지도 않던 때가 있었다"고 말했다.
◇여성의 적은 여성? 남성들의 설정이다
이제 이 같은 선입견은 깨지고 있으나, 여전히 회자되는 것은 "여성의 적은 여자"라는 통설이다. "여성이 주류로 인정받지 못하는 구조에서 실제로 나타나는 현상"(조희진 검사장)처럼 '동의한다'는 답이 5명이었다. 여성으로서는 최초로 국공립 오케스트라단의 지휘자가 된 성시연 경기필하모닉오케스트라 예술단장은 "우리나라에만 국한된 말이 아니다"며 "독일에서도 오케스트라 소속 여성끼리 나란히 앉는 것조차 싫어한다는 말도 있다"고 했다.
"남성들이 설정해 놓은 편견"이라는 답이 다수였다. 김영란 전 대법관은 "여성에게는 소수의 자리만 할당해두고, 그걸 갖고 다투게 하니까 나온 말"이라며 "여성의 열악한 환경을 웅변하는 속설"이라고 지적했다. "이해관계의 대립은 성별의 문제가 아니다"(서영경 한국은행 부총재보)는 의견도 있었다. 113년 만에 처음으로 수도 서울의 관문이자 상징인 서울역을 맡은 김양숙 서울역장은 "여성을 따로 구분해서 여성끼리 경쟁시키려는 남성 중심의 사고방식에서 나온 말"이라고 분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