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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불교의 역사와 청년 불자의 사명
들어가며
불교는 1,600년 전 우리나라에 전래되어 우리 민족의 정신적 지주가 되었으며, 찬란한 민족문화를 꽃피우는 원동력이 되어 왔습니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지금 서구에서 들어온 외세종교에 의해 그야말로 뿌리 없는 민족, 혼이 없는 민족으로 탈바꿈해 가고 있습니다. 겉모습은 엄연히 한국 사람인데 정신은 서양 사람으로 바뀌어져 가고 있는 것입니다.
외세종교가 뿌리를 내리기 위해서는 기존의 전통이나 사상ㆍ문화ㆍ종교를 타파하지 않고서는 아니 되기 때문에, 우리는 지금 외세종교에 의해 우리의 것이 철저히 파괴당하여 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우리 것을 되찾아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의 전통종교인 불교를 제대로 알아야 하며, 불교를 알아야 할 소이연(所以然)이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이번 대한불교청년회 경북지구청년회 수련대회에서는 먼저 한국불교의 역사를 살펴보고, 오늘을 사는 청년불자의 사명이 무엇인지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불교전래 이전의 신앙
불교가 우리나라에 전래되기 이전에는 원시신앙이 있었습니다. 우리의 옛 조상들은 천신(天神)ㆍ일월신(日月神)ㆍ지신(地神)ㆍ산신(山 神)ㆍ기타 잡신을 숭배하여 인간의 안심입명을 빌었습니다.
그리고 각 부족들이 그들 부족의 시조를 생전에는 족장으로, 사후에는 조상신으로 봉제(奉祭)하여 부족의 안전을 기원하고 국가적 형태를 갖추게 되자 국가신으로 추존 하였습니다. 이것이 건국신화로 나타났는데, 고구려는 주몽의 어머니와 동명(주몽)을 국신으로, 백제에는 동명을, 신라에는 박ㆍ석ㆍ김 3성의 시조를 국신으로 받아들었습니다. 이 밖에도 민간신앙으로 무속신앙(shamanism)이 있었습니다. 무속의 신관(무당)은 특수한 계급으로 제사를 맡아보고 또 신령과 통하는 마술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되어 원시시대에는 사회적 지위가 높았습니다.
이와 같은 고대의 신앙 중에서도 천신 숭배가 가장 중심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고구려인은 3월과 7월에 천제를 지냈고, 삼한에서는 5월과 10월에 천제를 지냈습니다. 이 행사가 있을 때에는 전 국민이 운집하여 대회를 열었는데, 이는 신전에서 국가의 공론을 논하는 부족 단합 대회였습니다. 이것을 부여에서는 영고라 하고, 고구려에서는 동맹이라 하고 동예에서는 무천이라 하고, 마한에서는 천군이라 하고 진한과 변한에서는 불구내(佛矩內)라 하며, 그 제단으로 삼는 신성한 장소를 소도라 하였습니다. 이러한 고대신앙의 의식은 인지가 아직 발달하지 못한 상황에서 소위 부족국가의 형성에 중요한 이념으로 되었으나, 인지가 발전하고 새로운 주변문화를 접촉하고 수입하면서부터는 부족국가의 이념으로 적당치 못하였습니다. 더구나 전제화한 왕국 중심의 고대국가에 있어서의 정신적인 지주로 적합치 못하였습니다.
3국시대의 불교
불교가 3국에 전래된 것은 고구려 소수림왕 2년(A.D 372년) 전진에서 순도(順道)가 와서 불상과 불경을 전함으로서 그 시초가 됩니다. 그러나 이것은 국가적인 공전(公傳)이며, 실은 이보다 먼저 고구려에 불교가 전해졌으리라는 것은 거의 통설입니다. 그 유력한 예는 『양고승전(梁高僧傳)』에서 순도 이전에 이미 고구려 도인(道人)과 중국 고승과 서신왕래가 있었음을 보여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으로 보아 전진에서 온 불교는 국가적인 전래로서 공적인 초전이라 할 수 있으며, 그 이전의 전래는 민간적인 전래라 할 수 있습니다.
백제는 이보다 12년 뒤에는 침류왕 원년(384)에 동진에서 마라난타가 와서 전하였습니다. 이 두 나라에서는 문화적으로 동경의 대상이 되어있고, 우호관계에 있는 전진 및 동진으로부터 각기 국가적인 사실을 매개로 전해진 듯합니다. 그러므로 이 두 나라에서 불교의 전래가 아무런 마찰이 없이 양국 왕실에 순조롭게 받아들여졌습니다. 신라에서는 눌지 마립간(417~457)때에 고구려를 거쳐 온 아도(일명 墨胡子)에 의하여 불교가 전파되었지만, 그것은 지방에 있어서의 개인 전도에 지나지 않았고 그나마 박해 속에 끝나고 말았습니다. 그러다가 양나라의 사신인 승 원표에 의하여 비로소 신라왕실에 불교가 열려졌습니다. 그 후 왕실에서는 불교의 수용을 위하여 노력하였으나 귀족들의 반대로 실패하고, 그 결과 이차돈이 순교하였습니다(법흥왕 44년, A.D 527). 그러나 오히려 이로 인하여 신라에서도 불교가 공인되었습니다.
3국이 모두 왕실에 의하여 불교가 강력히 지지ㆍ발전하게 된 것은 전제된 왕권중심의 고대국가에 있어서 정신적인 지주로서 적합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불교는 민족 전통의 고대신앙을 재편성하고 새로운 민족의 이념으로 통일시킬 잠재적 가능성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무격신앙 대신 하나의 불법에 귀의하는 같은 신도라는 신념은 다양한 고대신앙의 형태를 하나로 귀일 시키고 동시에 하나의 왕을 받드는 같은 신인(臣人)이라는 관념과 함께 아직은 미숙한 상태지만 발전된 인간의 합리적 사고를 만족시킬 수 있으면서 국가의 통일에 큰 역할을 할 수 있었습니다.
3국에 있어서 불교의 장려와 발전을 살펴보면, 고구려는 고국양왕 때 불법을 믿도록 하는 영을 내려 불교를 장려하였고, 광개토왕 2년(A.D 392년) 평양에 9사(寺)를 지었다 합니다. 그러나 고구려 불교는 영류왕 2년에 도교가 들어온 이후 불교는 그로 인하여 위축되었습니다(연개소문은 도교 장려). 백제는 성왕 때 불교를 일본에 전했으며, 겸익이 율부 72권을 번역하였고, 무왕은 원흥사ㆍ미륵사를 세웠습니다.
신라는 불교가 공인된 후 급속도로 발전하였습니다. 법흥왕은 흥륜사를, 진흥왕 때에는 황룡사, 선덕여왕 때에는 분황사를 세웠으며, 역대 왕들은 불교를 숭상하여 왕명을 불교에서 취하였습니다. 신라 불교는 국가의 보호아래 크게 발전을 하였습니다. 유명한 승려로는 원광(세속 5계)ㆍ자장ㆍ원효ㆍ의상ㆍ원측 등의 고승들을 들 수 있습니다.
3국시대의 불교는 호국 불교적인 이념이 강하였습니다. 국가의 발전을 비는 호국신앙으로 호국경으로 유명한 『인왕경』같은 것이 지극히 존중되었고, 더구나 인왕경설에 의하여 백좌회 [인왕회]〕라는 국가의 평안을 비는 의식이 행하여졌고, 팔관회(八關會)도 백좌회와 마찬가지로 호국적인 의미를 가진 것이었습니다. 특히 불사에 있어서도 백제의 원흥사나 신라의 황룡사 같은 것은 호국의 도량으로서 그 규모가 엄청난 것이었습니다. 더욱이 황룡사의 9층탑이 9개국을 정복하여 그 조공을 받으려는 의지의 상징이었다는 것은 신라의 호국적 성격이 강하였습니다.
3국 중에 제일 늦게 불교를 공인한 신라가 삼국통일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신라인들의 불국토 사상과 그의 이념형성입니다. 신라인은 불교를 수입하여 왕실의 공인으로 인하여 귀족의 패배를 가져오게 되고, 그것은 동시에 왕권의 전제화로 통치권의 확립을 도모하였습니다. 이것은 곧 국가의 기강을 정립하고 신라인을 하나의 이념으로 단합할 기회가 되었습니다. 이 때 왕과 귀족은 통치이념으로 신라가 곧 불국토를 실현할 수 있는 보살의 화신임을 내세웠던 것입니다. 불국토란 다름이 아니라 곧 신라는 부처님의 나라로 이 지상의 가장 행복된 자유와 번영의 나라임을 자각시키는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신라 불국토사상은 화랑도 정신으로 계승 발전하여 삼국통일을 이룩하는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이 화랑도 정신은 불국토사상의 구체적 실현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호국의 자주로 삼았습니다.
통일신라시대의 불교
3국시대 이래(불교공인 이래) 사상계의 중심이 되어온 불교는 통일신라시대에 와서 더욱 융성 발전하여, 위로는 군왕으로부터 아래로는 일반 민중에 이르기까지 모든 신라인에 의하여 한결같이 신봉을 받은 종교였습니다.
3국시대 불교의 중심이었던 호국신앙과 구복신앙이 통일신라에도 그대로 유지되었습니다. 그러나 통일이전에 찾아볼 수 없었던 새로운 경향이 나타났습니다. 당시 당나라에 유학하고 돌아온 승려가 많았는데, 이러한 승려들은 당에 유행한 교과의 교리를 가지고 와서 신라에 전파함으로써 신라에는 여러 개의 대립적인 종파가 성립하게 된 것입니다. 이미 3국 말 고구려의 승 보덕에 의하여 열반종이 이루어졌고, 신라의 자장에 의하여 계율종이 성립하였는데, 통일이후 의상에 의하여 화엄종이 개창되어 이는 특히 귀족들에게 환영받았습니다. 그런데 원효는 이러한 여러 종파의 대립이나 종파의식의 대두를 배격하고 제종파의 모순을 보다 높은 입장에서 융화ㆍ통일되어야 한다는 독특한 사상체계를 세웠는데, 그가 개창한 교파를 법성종(또는 해동종)이라고 합니다.
이상의 4종 외에 진표에 의하여 개창된 법상종을 합하여 신라교종은 5개의 종파로 나누어져 이른바 5교가 이루어졌습니다. 이 교종은 경전을 연구하여 불타의 진리를 찾는다는 교파로 신라 귀족들의 환영을 받았습니다. 교종이 주로 귀족사회에 환영을 받은 반면 민중의 지지를 받은 것은 정토신앙이었습니다. 정토신앙은 이 현세는 고해이므로 여기서 하루 빨리 벗어나서 아미타불이 살고 있는 극락 즉 서방정토에 왕생하기를 바라는 신앙입니다. 그런데 이 극락에 왕생하는 수단은 단순한 것이어서‘나무아미타불’만 외우면(念佛)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불경의 오묘한 진리를 터득하지 못한 무식하고 단순한 자라도 믿을 수 있었으므로 이는 민중에게 대단히 환영을 받았습니다. 이 정토신앙은 원효에 의하여 신라에 전파된 것으로 원효는 파계한 뒤에 방방곡곡의 촌락을 돌아다니며 이를 전파하였습니다. 그 결과 신라인의 십중팔구가 불교를 믿게 되었다고 합니다.
원효는 한국 불교사에 있어서 가장 독창적인 사상가라고 할 만한 인물로서, 그의 사상의 영향력은 널리 중국에 까지 미칠 정도였습니다. 원효의 저작은 86부를 헤아리지만 현존하고 있는 것은 22부입니다. 특히 원효의 「대승기신론소(大乘起信論疏)」는 「해동소(海東疏)」라고도 하여 중국에서 높이 평가를 받은 것으로, 당 화엄종의 완성자인 법장의 교학에 커다란 영향을 미친 것입니다.
원효의 불교사상 가운데 가장 높이 평가받고 있는 것은 그의 화쟁(和諍)사상입니다. 그의 모든 저서를 관통하고 있는 것이 바로 이 사상으로서, 그는 제 경전을 두루 섭렵하여 전체의 불교를 화회(和回)ㆍ종합하였습니다. 그의 이러한 노력은 각각의 저서에서 여러 형태로 나타나지만 그의 일관된 정신은 화쟁사상이었습니다. 화쟁이라고 하는 것은 어느 특정한 경(經)이나 논(論)에 편중되어 한 종파에 소속됨을 지양하고, 불교의 모든 8만 4천의 법문이 하나의 동일한 한 근원[一心]에서 나온 것으로 보아 그 모두를 융합시키려 한 것입니다. 이러한 원효의 화쟁사상은 이후에도 한국 불교의 독특한 회통(會通) 성격으로서 계승되어 왔다.
신라 말에는 당으로부터 선종이 들어와 교종과 대립하게 되었습니다. 선종은 불립문자 견성성불(不立文字 見性成佛, 문자에 의하지 아니하고 자기 성품을 깨달아 부처가 됨)을 주장하여 경전을 위주로 하는 교종과 판이한 성격을 가졌습니다.
신라에 선종을 전한 것은 신행이었는데 도의가 크게 선양하여 가지산파의 개조가 되었다. 나중에 많은 명승이 나서 선종은 9개 문파를 형성하였습니다. 이것이 9산(山)입니다.
9산 | 절 이름 | 개조(開祖) |
가지산(迦智山) | 보림사(寶林寺)-장흥 | 도의(道義 |
실상산(實相山) | 실상사(實相寺)-남원 | 홍척(洪陟) |
동리산(桐裡山) | 대안사(大安寺)-곡성 | 혜철(惠哲) |
도굴산(陶堀山) | 굴산사(堀山寺)-강릉 | 범일(梵日) |
봉림산(鳳林山) | 봉림사(鳳林寺)-창원 | 현욱(玄昱) |
사자산(獅子山) | 흥령사(興寧寺)-영월 | 도윤(道允) |
희양산(曦陽山) | 봉암사(鳳岩寺)-문경 | 지선(智詵) |
성주산(聖住山) | 성주사(聖住寺)-보령 | 무염(無染) |
수미산(須彌山) | 광조사(廣照寺)-해주 | 이엄(利嚴) |
[선종 9산]
고려시대의 불교
고려시대의 사상계를 지배한 것은 역시 불교였다. 고려시대의 불교는 이미 외래종교라 할 수 없을 정도로 보편화되었습니다. 비록 사회적 세력으로 등장한 유신들이라 할지라도 불교를 믿는 것은 오히려 당연한 것처럼 생각하였습니다. 고려의 불교는 신라불교와 마찬가지로 호국불교였습니다. 즉 고려의 귀족들은 개인의 극락왕생을 기원하기보다는 국가의 보호와 융성을 기원하는 데, 불교를 믿는 목적이 있었던 것입니다.
고려를 창건한 태조(왕건)의 훈요10조 가운데 “우리 국가의 대업은 반드시 부처의 호위하는 힘에 의지한 것이다.”라고 하여 불교를 권장하였고, 이러한 태조의 유지를 역대 왕들이 이어 받아 불교를 보호 장려하였습니다. 태조는 개경에 법왕사(法王寺)ㆍ왕륜사ㆍ흥국사 등 10개의 사찰을 창건하였고, 이후 역대 왕들이 많은 사찰을 건립하였는데, 개경에만 70여 개의 사찰이 세워졌습니다.
고려불교는 호국불교였기 때문에 이러한 호국불교의 성격은 국가가 왜적의 침입으로 위기를 처했을 때 불력을 빌어 막자는 것으로 나타나, 3차례의 대장경의 조판이나 연등회ㆍ팔관회 등 각종의 국가적 불교행사가 있었습니다.
고려 초기의 불교는 신라불교의 연장으로서 교리적인 면에서는 이렇다 할 발전이 없었습니다. 태조는 스스로 선종을 믿었으나 종파의 구별 없이 불교를 보호하였기 때문에 선교가 양립하는 형세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점차 선ㆍ교, 특히 교종의 화엄종과 선종이 대립하고 있었으므로, 대각국사 의천(1055~ 101)이 송에 가서 화엄과 천태의 교리를 배우고 귀국하여 화엄종과 선종이 대립되어 있는 불교계의 혁신을 꾀하여 선․교의 일치를 주장, 천태종을 창시하였습니다. 그는 ‘교관쌍수(敎觀雙修)의 입장을 내세워 선관(禪觀) 일변도의 풍토를 경계하였습니다. 대각국사 의천의 천태종 창시는 선종 9산을 자극하고 이들을 단결시키게 하여 조계종이 성립하게 되었습니다. 이리하여 고려의 불교는 고려중기, 5교ㆍ양종의 새로운 편성을 보게 되었ᅟᅳᆸ니다.
조계종의 종풍을 크게 떨치고 그 내면적 통일에 이바지한 승려는 보조국사 지눌(1158~1210)이었습니다. 그는 신라시대에 전래되어 고려 중엽가지 중국 선의 연장에 지나지 않던 선종(禪宗)에 독자적인 선풍을 일으켜, 이른바 한국의 독자적 선풍을 확립하였습니다. 지눌은 선의 종지와 화엄의 교지가 하나임을 깨닫고, 선종과 교종의 모든 문이 견성성불(見性成佛)의 문임을 확신하였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선을 강조하기는 하나 또한 선 일변도에 치우치는 것도 경계하여 선과 교를 모두 아우르는 ‘선교융합(禪敎融合)’, ‘정혜쌍수(定慧雙修)사상을 주장하였습니다. 교ㆍ선 조화의 구체적인 방법은 돈오점수(頓悟漸修)로서, 돈오라 함은 인간의 마음이 곧 부처님의 마음임을 바로 깨닫는 것을 뜻하며, 그 방법은 좌선을 위주로 하되 때로는 염불․독경에 의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이렇듯 돈오를 위해 꾸준히 수행하는 것을 점수라고 하였습니다.
지눌의 뒤를 이어 조계종의 선풍을 크게 발전시킨 이는 태고〔보우〕와 나옹[혜근]입니다. 이들은 원(元)에 들어가 수행ㆍ구법하고 돌아온 승려로서 공민왕의 왕사가 된 이들입니다. 특히 태고는 중국 선종의 일파인 임제종의 종지를 배워온 것으로 유명하고, 나옹은 인도 승 지공법사에게 수학하고 돌아온 것으로 유명하였습니다. 태고의 법통은 그 후 조선 선문의 주류를 이루게 되었고, 나옹의 제자인 자초[무학]는 이성계가 등극한 후에 왕사로서 존경을 받게 되었습니다.
고려 후기 선종의 융성은 무신정권 이후의 고려사회의 불안하였던 정세와도 관련이 있었으나, 한편으로는 고려시대 불교사상의 일단의 발전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고려 말기에 주자학이 전래ㆍ수용되면서, 그 자리를 주자학에 양보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신흥 유신세력의 등장으로 불교는 배격ㆍ이단시되고, 주자학이 새로운 정치 이념의 구실을 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조선시대의 불교
조선시대에는 숭유억불정책을 폈습니다. 그 이유는 첫째 태조 이성계는(개인적으로는 불교를 숭상하였음) 철저한 주자학자인 정도전ㆍ조준 등 신흥세력들의 지지와 옹립을 받아 새 왕조를 열었으므로, 그들 주자학자들의 뜻을 받아 숭유책을 채택하게 되었던 것이며, 두 번째 이유는 불교가 타락하여 사회를 이끌어갈 힘을 상실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통일신라 이래 고려시대까지 사상계를 지배하던 불교가 이미 타락하여 고려말엽부터 완전히 민중들로부터 신망을 잃었으므로 보다 새롭고 유익한 사상이 없는 당시로서는 왕의 권위를 보장해 주고 권위와 질서를 강조하는 사상인 유교 특히 주자학을 채택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역대 왕들의 불교정책을 살펴보면 태조 때 도첩제를 실시하여 승려의 증가를 제한하였으며, 사원의 남조를 금지하였습니다. 태종은 유교 교육을 받고 성장하였기 때문에 철저한 억불정책을 썼다. 도첩제를 강화하였으며, 사원을 정리하여 전국에 242개의 사원만을 남기고 도태된 사원의 소유 토지와 노비를 몰수하였습니다. 세종은 처음에는 억불책을 써서 불교의 종파를 선교 양종만을 두었으며, 선교 양종에 각각 18寺 도합 36본산만 인정하고 사원의 소유 토지를 제한하였습니다. 그리고 불교의식을 금지시키고 유교의식을 따르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만년에 불교를 독실하게 믿어 불사의 중창을 허락하고 유신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궁중에 내불당(內佛堂)을 지었으며, 많은 불경을 간행하여 조선문화에 많은 공헌을 남겼습니다. 세조는 만년의 세종 이상으로 호불의 군주였습니다. 지금 파고다 공원자리에 원각사를 세웠으며 간경도감을 설치하여 각종 불교서적을 한글로 번역하고, 승려의 과거시험인 승과제도를 경국대전에 명시하여 시행토록 하였습니다.
세종ㆍ세조 때 일시 활기를 뛰었던 불교는 성종ㆍ연산군ㆍ중종 때 다시 철저한 억불정책을 펴는 바람에 빛을 잃어갔습니다. 연산군은 승과를 폐지하였고 흥천사․원각사 등 사원을 폐사하여 유흥장으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중종은 연산군 때 일시적으로 폐지된 바 있던 승과를 완전히 폐지하였습니다. 그러나 명종 때 문정왕후에 의하여 불교는 일시적으로나마 빛을 보게 되었습니다. 문정왕후는 독실한 불교신자로서 유신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보우스님에게 불교 중흥을 위촉하고 자기는 절대적인 후원자가 되었습니다. 이때 승과제도 선교양종 및 도첩제가 다시 부활되었습니다. 그러나 문정왕후가 죽자 보우스님은 제주도로 귀양가서 처형을 당하였고, 도첩제는 폐지되었습니다. 이후 역대 왕들은 다시 불교를 탄압하였습니다. 그 결과 승려의 신분은 천인으로 전락하였고, 승려의 교양도 낮아져 교종은 거의 자취를 감추고, 선종의 조계종만이 겨우 명맥을 이어갔습니다. 그러나 일반 백성 특히 아녀자들은 미신적으로 불교를 믿었습니다.
조선시대 역시 호국불교의 성격을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불교는 국가에서 핍박을 받으면서도 임진왜란이 일어나 나라가 위기에 처하자, 서산대사(西山大師) 휴정, 그의 제자 송운대사(일명 泗溟大師) 등이 분연히 일어나 승군을 조직하여 왜군과 싸워 혁혁한 공을 세웠습니다. 서산과 사명에 의하여 침체되었던 조성선 불교는 획기적인 전환을 맞이하였으며, 서산의 법맥으로 오늘날까지 이어져 오고 있습니다. 서산의 선교관(禪敎觀)은 보조국사 지눌의 입장을 계승한 것입니다.
조선시대 불교에 에 있어서 특기할 만한 사실은, 숭유억불정책 하에서 배불론이 등장하자 불교계 내부에서 3교일치(三敎一致)의 회통론(會通論)이 등장했다는 것입니다.
조선 초기의 기화(己和)는 「현정론(顯正論」과 「유석질의론(儒釋質疑論)」을 지어 유학자들의 배불론을 비판하였습니다. 그는 유교ㆍ불교ㆍ도교의 3교의 도를 간략히 언급하고, 유학자들의 배불이론을 비판하면서 불교의 우위성을 밝혔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그의 사상은 유교ㆍ불교ㆍ도교의 가르침이 사실상 근원에 있어서는 동일하다는 3교회통(三敎會通)의 논리 위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서산대사 휴정의 「3가귀감(三家龜鑑)」도 유교ㆍ불교ㆍ도교의 합일을 주장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3교회통의 사상은 유교와의 정면대결보다는 유교와의 융합점을 찾아서 자신의 진로를 찾아보려 했던 조선 시대 불교 승려들의 어려운 현실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일제 식민지 하의 불교
일본의 한국 침략에는 크게 두 가지 방식이 있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하나는 정치ㆍ군사적 침략이고, 또 하나는 종교 특히 불교의 침략이었습니다. 그들은 정치ㆍ군사적 침략을 보다 부드럽게 하기 위하여 먼저 착안했던 것이 승려들의 도성 출입금지 해제였습니다. 일본인들에 의해서 수백 년 동안 도성 출입금지 해제와 8천의 하나로 차별대우를 받던 승려들이 일반 백성들과 동등한 대우를 받게 되자, 일본인들이 기대한 것처럼 한국교단 일부에서는 일제 또는 일제 불교인들에게 호감을 갖게 되는 풍조가 일어났고, 한국사찰 가운데는 일본의 어느 종파와 연합 또는 말사 가입을 희망하는 사찰이 생겨났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움직임은 박한영ㆍ한용운 스님들의 반대에 부딪쳐 성공하지 못하였습니다.
일제에 병합된 후 일본의 정책자들은 한국불교를 왜색화(倭色化)시켜 승려들로 하여금 결혼을 하여 가정을 갖게 하였으며, 또한 주요사찰의 주지를 임명함으로써 그들의 수하에 장악하였습니다. 또한 일제는 한국불교를 강력히 통제하고 장악할 필요성을 느껴 사찰령을 만들었습니다.
사찰령은 한국불교의 실권을 완전히 총독이 장악하도록 만들었는데, 사찰을 개조한다든가 사찰의 내실과 기물까지도 총독의 허가 없이는 건드릴 수 없게 만들었습니다. 한편으로 본산주지 기타 유력한 인사들을 우대 또는 환대하는 것을 주요한 정책으로 하였으니, 일본 사찰의 사찰이라든가 천황폐하 배알 또는 총독에 대한 신년하례 등이 그것이었습니다.
이러한 사찰의 통제와 주지우대 정책은 본사 주지들의 독재와 세속화 현상을 가져와 1920년부터는 한용운ㆍ김병린 등을 주축으로 사찰령 폐지운동과 교단자체의 체질 개혁운동이 일어났고, 이 운동은 일제가 폐망될 때까지 계속되었습니다.
해방 후의 불교
8ㆍ15 해방이후 선진불교인들은 불교 개혁을 시도했으나 구세력이 실권을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아무런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있다가, 1945년 이승만 대통령이 “대처승을 절에서 추방하고 독신승들이 절을 지키도록” 유시한 데 힘입어 효봉ㆍ동산ㆍ청담스님 등이 불교 정화위원회를 구성하였습니다. 당시 정화불사에 참여한 비구승은 300명이 채 못 되었는데, 이 수는 대처승의 10분의 1도 안 되는 수였습니다(당시 대처승 7천여 명). 이러한 비구ㆍ대처 간의 세력대결은 1954년부터 1962년까지 계속되었고, 이 싸움에서 비구측이 일단 승리하였으나, 대처승은 이에 승복하지 않고 법원에 소송을 제기하여 소송문제는 1972년대 가서야 종결을 보게 되었습니다. 결국 비구승은 조계종으로, 대처승은 태고종으로 갈라섰으며, 전국 주요사찰은 대부분 비구승들이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비구승 간에 종권 다툼(1994년, 1998년)이 일어나 공권력이 동원되어 가까스로 사태가 수습되는 일이 벌어지기도 하였습니다.
불교는 이러한 진통을 겪으면서도 1970년대부터 승려의 자질향상ㆍ교육의 쇄신ㆍ포교의 다양화 등을 추진하였으며, 세계불교도연합회를 창설하여 한국불교의 공신력을 높혔습니다.
청년불자의 사명
지금까지 한국불교의 역사를 개략적으로 살펴보았습니다. 그 결과 불교가 흥했을 때는 나라도 부강했고, 불교가 쇠했을 때는 국력도 쇠퇴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한국불교의 현주소는 어떠합니까?
최근 통계청이 조사 발표한 바에 의하면 아직까지 우리나라 종교 인구는 불교가 약간 앞서고 있으나 불교신자는 40대 이후가 대부분이고, 10대의 경우 기독교(천주교 포함)가 무려 70% 이상을 차지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이러한 추세로 나아간다면 10대가 사회의 주역이 되는 20년, 30년 후에는 기독교가 70~ 80%를 차지하고 불교는 군소종교로 전락하게 되고 말게 될 것임은 불을 보듯 뻔한 일입니다. 기독교가 이 땅에 전래된 지 200여년 만에 신자수가 1,000만 명을 육박하고 있는 것은 그들이 일찍이 포교, 특히 어린이와 청소년 포교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집중 투자해 왔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지금 하루가 다르게 변화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변화에 능동적으로 대처하는 자는 살아남고 그렇지 못한 자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다는 것이 역사의 교훈입니다. 종교 또한 예외가 아닙니다. 다이야몬드가 아무리 진귀한 보석이라 하더라도 땅 속에 묻혀 있으면 소용이 없는 것처럼, 부처님의 가르침이 시공을 초월한 ‘위없는 진리’라 하더라도 뭇 사람에게 전해지지 않고서는 알 수가 없는 것입니다. 포교하지 않고 불교의 내일을 기대한다는 것은 나무 위에 올라가서 고기를 구하는 것(緣木求魚)과 다름이 없습니다.
불교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첫째도 포교, 둘째도 포교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스님들의 수도도량을 제외한 전국의 모든 사찰을 포교당화 하고 어린이 법회에서부터 신도회에 이르기까지 신행단체를 조직, 법회위주로 사찰을 운영하여야 할 것입니다.
스님들이 출가한 목적은 깨달음을 얻어 중생을 제도하기 위함에 있지 주지나 하려고 출가한 것은 아닐 것이며, 스님들이 포교나 수행을 하지 않고 무위도식으로 지낸다면 이는 부처님의 혜명을 저버리게 되는 것이요, 출가 목적에도 크게 위배되는 것입니다. 본·말사 주지직을 맡은 스님은 의무적으로 포교를 하도록 하여야 할 것이며 포교에 자신이 없거나 능력이 없는 스님은 스스로 그 직에서 물러남이 마땅하리라고 봅니다.
일찍이 우리의 조상 신라인들은 미래불인 미륵불이 미래의 어느 때에 하생(하생)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여기 신라에 출현하였고, 그러므로 신라는 불국토요 용화세계라는 ‘신라불국토 신앙’의 기쁨 속에 정토를 장엄해간 결과 3국통일을 이룩할 수 있었고, 의상ㆍ원효 등, 세계불교 사상에 큰 발자취를 남긴 고승ㆍ대덕들이 났으며, 열에 여덟ㆍ아홉은 계를 받아 지니고, 촌부ㆍ더벅머리 아이들 까지도 ‘나무아미타불’의 명호를 염하였으며[3국유사], 절과 절이 밤하늘의 별처럼 늘어섰고, 탑과 탑이 기러기 날듯(寺寺星張 塔塔雁行) 불교가 융성했다고 합니다. 절반이란 말도 신라시대에는 절이 민가에 비해 반이나 되었다고 해서 생긴 말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찬란한 신라 불교를 오늘에 다시 중흥시키는 것이 오늘을 사는 청년 불자들의 두 어께에 지워진 역사적 사명이라는 것을 깊이 명심해야 되겠습니다.
만해 한용운 선사는 “오늘 우리 불교의 황량한 모습을 빚은 허물은 옛 사람에게 있지만 내일 우리 불교가 융성하는 때가 온다면 그 자랑은 우리들에게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청년불자 여러분들은 이 나라 불교중흥은 반드시 내가 이룩하겠다는 큰 서원을 세우고, 더욱더 자신을 절차탁마(切磋琢磨)하여 장치 한국불교의 발전에 이바지할 수 있는 큰 일꾼이 되어 주기를 간절히 바라마지 않습니다.
(1996. 7. 28/ 대한불청 경북지구청년회 하계수련대회/ 불국사 무설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