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질마재문학상, 해오름문학상 묶음>
제3회 질마재문학상 심사평
질마재문학상의 후보로 천거된 여러 시집들을 쌓아놓고 심사위원들이 한 자리에 앉아 돌려가며 읽고 각자의 소감을 피력했다. 독회를 마친 뒤 심사위원들은 김요일 시집 『애초의 당신』을 제3회 질마재문학상 수상작으로 결정했다. 오랜 절필 끝에 시작詩作을 재개한 김요일의 많은 시편들은 술에 젖어 있고 노래의 벅찬 리듬들을 머금고 있다. 다른 한편으로, 사랑을 갈구하는 몸짓들의 안타까움과 시대에 저항하는 불온한 기운들도 넘친다. 수작으로 꼽을 만한「체 게바라에게」「아바나의 피아니스트」「순례의 노래」「카치올리의 음악가」등의 시편들은 ‘술’과 ‘혁명’과 ‘연애’에 목을 매다는 낭만청년의 순진무구함과 발칙한 정서들을 난만하게 펼쳐낸다. 에릭 사티, 에곤 실레, 지미 헨드릭스, 체 게바라 들은 지난 연대의 낭만 청년들이 섬기던 구루들이다. 그러나 어쩔 수 없이 그도 중년으로 접어들면서 그것들은 “대략, 난감大略難堪”한 ‘과거’로 화석화 되고 있다. 낭만은 줄고 마침내 말라버린 뒤 그 빈자리를 현실의 건조함이 메우고 있는 것이다. 시집 전반의 정서적 기조가 청년기를 덧없이 흘려보낸 보헤미안의 회고적 쓸쓸함인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그럼에도 김요일 시인의 작품에는 시대의 아픔이 자아로 스며들어 만드는 서정적 무늬를 포착하는 능력이 돋보였고, 무엇보다도 소통의 힘이 대단했다. 이를테면 “안녕, 쓸쓸히 머리 푼 가로수야 마른 잎들아/나는 너를 떠난다/색 바랜 청동의 영웅도, 자욱한 최루탄 연기 같은 추억도/이젠 게워 내련다 돌아보지 않으련다”(「우드스탁을 떠나며」)와 같은 시편에 묻어나는 슬픔과 고통은 개인적인 것이면서도 그 뿌리는 시대의 그것과 잇대어 있다. 결론적으로 심사위원들은 그의 시들이 문학상의 중압감을 견딜 만한 충분한 내공과 뛰어난 문학적 성취를 보여주고 있다는 데 동의했고, 그의 시집을 제3회 질마재문학상의 수상작으로 흔쾌히 결정했다.
이창수 시집 『귓속에서 운다』는 세련된 수사도 없고 형식의 새로움도 없다. 일견 평이해 보이는 이창수의 시는 비범한 관찰에서 나오는 반전이 있다. 비범한 관찰은 시적 상상력이 양질전화良質轉化하는 계기가 되고, 사유가 비범하게 평지돌출平地突出하는 순간으로 반전한다. 망아의 찰나 체험을 담은 「큰 새 두 마리와 큰 뱀과 나」라는 시가 인상적이다. “큰 새 두 마리와 큰 뱀”은 상상력의 태초, 원초의 체험이다. 어린 시적 화자는 “큰 새 두 마리와 큰 뱀”이 계시하는 삶 너머의 삶이 뿜어내는 압도적인 낯섦, 그 초연함이 불러일으킨 경이 때문에 놀라 도망간다. 아무튼 많음과 하나, 큰 것과 작은 것, 영원과 찰나가 경계없이 어울리는 원융무애圓融无涯한 세계를 엿보았다는 게 중요하다. 이 소년 화자가 주관의 발견과 경이의 체험을 했다는 사실에 주목하자. “흙탕물”에서 “하늘”을 꿰뚫어 보는 이 놀라운 체험이 그를 시인으로 키운 자양분이 되었을 것이라고 짐작한다. 이창수의 언어들은 꾸밈이나 과장이 없이 담담하다. 이 담담함이야말로 이창수의 개성이다. 아울러 당대 시적 유행에 휩쓸리지 않고 자기만의 길을 뚜벅뚜벅 가고 있는 성실성도 돋보인다. 심사위원들은 이런 이유들로 이창수를 제3회 해오름문학상의 임자로 지목하였다.
심사위원: 김남조. 문효치. 장석주(글)
질마재문학상 수상자 대표시 김요일
애초의 당신 외 4편
태초의 이전부터 오신다더니
꽃과 바람
물과 불
하늘과 땅 어디에도 보이시지 않네
터진 듯 쏟아 내리는 별빛 속에도 묻어오지 않으시고
전생의 전생에도 보이지 않으시는
우주의 바깥에 계신 당신
모든 이즘(ism)의 프리즘인
처음의 줄기이자 분열의 마지막인
아, 당신은
근황
고통을 뼈대 삼아 집을 지었죠
이젠 그립지 않아요
사막에서의 생활은 상상 너머의 일이죠
가끔씩 치유술사가 들러
차마 조율할 수조차 없는 참담한 일상의 아가리 속으로
새로운 정령精靈을 불어넣어 주기도 하지만
그런 게 다 무슨 소용, 누군가 버리고 간 늙은 낙타는
권태를 등짐 진 채
썩은 내 나는 침 뱉으며 모래언덕 넘어요
수취 거부 우편함엔 방부제 가루 같은 먼지만 쌓여 가고
휘휘친친 거미줄 감으며
홀로 잠들 그물 침대 깁고 있어요
애당초 천국이란 건 없었으니
이곳이 지옥일 리 없죠
나는 뻐덩뻐덩 말라 가는 물고기
누구든 내 영혼 사 가세요
비싸게 굴 이유가 없죠
Love Song
야무나(Yamuna) 새벽 강에 옷 내어놓고
눈먼 하늘 반짝이는 알몸 바라보네
그렁그렁 별빛은 더 찬란하고
꽃등불 파는 소녀 아직 강가에 나오지 않았는데
나는 크리슈나, 당신은 라데
소의 꼬리가 소를 흔들며 오르차(Orchha) 언덕 넘어가네
아바나의 피아니스트
오래전에 나는 아바나 해변의 재즈 피아니스트였네
부에나 비스타 소셜 클럽 같은
유명한 악단의 멤버는 아니었지만
가끔, 취한 ‘체 게바라’가 찾아와 클럽의 연주를 듣고 가기도 했었지
바다가 보이는 작고 낡은 바에선 언제나 음악이 끊이질 않았다네
석양을 칵테일 잔에 담아 마시던 이국 아가씨의 뺨이 발그레 물들 때
잘 기른 콧수염을 만지작거리며 다가가
이마에 입맞춤해 주기도 했었지 아바나에선
그렇게 사랑을 시작한다네
기분이 나면 맘보나 차차차를
제국의 거리에, 살구꽃 냄새 나는 불온한
유인물을 뿌리고 돌아온 새벽에는
슬픈 살사를 두드렸다네 오래된 건반이 부서지도록
그럴 때면 샛노란 양철 지붕 위로
푸른 달빛이었는지, 굵은 빗줄기였는지
혁명이었는지, 고백이었는지
폭포처럼 방언처럼 쏟아져 내렸었고
누구랄 것도 없이 먼저 깊고 아픈 꿈을 꾸기 시작했었지
아득히 그리운 그곳
아바나에선 모두가 시인이라네
시가든 대마초든 다디단 담배를 물고 아무 곡조나 흥얼거리지
아무도 무언가를 적지 않지만
인생을 조금 아는 사람들의 눈에선
당신 닮은 수련꽃 몇 번이나 피고 졌다네
예전의 나는 아바나 해변의 재즈 피아니스트였네
산타루치아 해변이나 이태원의 숨은 뒷골목에서였는지도 모르지만. 차차차.
카치올리의 음악가
-詩人을 위한 카덴차
K는 국경 너머 카치올리라는 작은 마을 서북쪽에 위치한 숲의 가장 높은 나무 위에 살고 있었다. K는 자신의 분비물로 빚어 만든 ‘급진고물소急進古物所’라는 고치에 기거하고 있었는데, 밖에서 보았을 땐 커다란 호박벌집처럼 보였으므로 누구에게도 간섭받지 않을 수 있었다. 그가 기거하는 방이 누에의 것과 다른 점이라면 고치의 상단에 안팎으로 여닫을 수 있도록 문의 역할을 하는 장치가 달려 있고 안에서 밖을 조망할 수 있는 아주 작은 창을 달았다는 것이다.
가장 높은 곳에서 가장 먼저 해 뜨는 숲을 내려 보고 해 지는 하늘을 바라볼 수 있었지만 아름다움에 대해서 노래할 처지만은 아니었다. 태양의 위편에 살고 있다는 神이라는 자는 허구한 날 술에 취해 뿌연 햇살과 매캐한 새벽 공기를 뿌려 대기 일쑤였고 하루 이틀 사흘 고치 안에서 빈둥거리던 K도 잊히지 않을 생을 살아가야겠다는 결심에 카치올리 마을의 서쪽에 있는 음표 만드는 공장으로 거처를 옮겨야 했기 때문이었다. 명맥이 끊긴 지 오래인 버려진 음표 공장에서 K가 했던 일은 음악가들이 만들다 실패한 음악의 부서진 껍질이나 낡고 시들어 버린 음표들을 모아 반짝반짝 윤이 나게 닦은 다음 음악가들이 눈치채지 못하게 거리의 가로수며 술집 구석의 먼지로 혹은 도서관 창가 책상 모서리의 햇살로 달아 놓는 일이었다. 그러면 음악가들은 산책을 하거나 술을 마시다가 K가 몰래 달아 놓은 음표에게서 영감을 받아 새로운 음악을 창조해 내었다.
처음 K가 음표 공장의 문을 열었을 때 카치올리에 사는 그의 술꾼 친구들을 비롯한 마을 사람들뿐만 아니라 내로라하는 음악가들, 도도한 숲 속의 배꼽 없는 요정들마저 깜짝 놀랐다. 그의 솜씨가 천부적이기 때문이었다. 그가 뿌려 놓은 음표들은 매일 새벽 거리에서 은 종으로 울려 퍼졌고, 밥 짓는 저녁이면 푸른 연기로 자욱하게 마을을 뒤덮었다. K로 인해 카치올리는 시보다 사랑스러운 곳으로 넘쳐 나기 시작했고 책 속에 길이 있다고 생각했던 사람들은 책 밖으로 난 새 길을 따라 산책하기도 했다. 카치올리 마을에 가면 음악이 흘러넘친다는 소문을 듣고 9000킬로미터 밖의 집시들도 유랑을 끝마치고 마지막 거처로 살기 위해 무리 지어 찾아들기도 했다. 놀다 지쳐 심심해진 소녀들은 가지 끝에 발그레한 열매로 매달리기도 하고 눈꽃이 되어 날아다녔다. 졸리진 않았겠지만 잠이 들면 마을 사람들은 백 가지의 꿈을 꾸곤 했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유일한 마을의 음표 가공 수리사인 K가 급진고물소에 가는 것도 잊은 채 몇 십 년 동안 공장 구석에서 먹고 자며 더러운 음표를 열심히 닦아 마을 이곳저곳에 장치를 하는 동안 마을 사람들은 서서히 그를 잊어 가기 시작했다. 음악가들은 더 이상 새로운 음악을 만들지 않아도 행복할 수 있다고 믿기 시작했고 마을 사람들은 별보다 반짝이는 마을 도처의 음표들도 당연히 존재하던 것으로 여겼다. K를 칭송하던 사람들도 그를 지나치면서 모른 체하거나 어이, 잘 지내지. 언제 한잔하지? 따위의 인사를 건넬 뿐이었다.
마을은 여전히 아름다워 보였고 사람들도 언제나처럼 즐거워 보였다. 공연장은 마치 새로운 것 같은 옛날 노래를 들으며 술 마시고 춤추는 사람들로 넘쳐 났다. 노인이 된 구부정한 K는 공연장에 버려진 오래되고 새로울 것 하나 없는 음표들을 빗자루로 쓸어 담으며 뚝뚝 눈물을 흘리곤 했다. 그의 눈물을 봐 줄 사람은 없었다. 그의 말에 귀 기울여 줄 사람도 없었다. 그는 미소를 잃어 갔고 말문이 막혀 갔다. 봉인된 침묵은 사실도 존재도 의미 없는 것으로 만들어 버렸다.
K는, 카치올리의 음악가는 아니었지만 ‘어쩌면 나는 음악가인지 몰라’라는 생각을 하기도 했고, 마을의 노예는 아니었지만 ‘내가 노옌가?’라는 의문을 불쑥불쑥 떠올리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그는 소스라치게 놀라거나 마른 잎을 말아 담배 태우며 쿨룩쿨룩 억지 기침을 했다. ‘쿨룩쿨룩, 이 모든 게 다 내 잘못이야’라고 K는 중얼거렸다. ‘이건 아니야, 이건 정말 아니지’라며 고개를 저었다. 바꿀 수 없다면 떠나야 한다고 생각했다.
천 번의 망설임 끝에, 공장을 떠난 K는 다시 그의 고치 급진고물소로 돌아왔다. 고치 속 작은 방에 누워 K는 불편하지만 가장 편할 긴 잠을 청하기로 했다. 갑자기 그는 수십 년 동안 잊고 지낸 빈둥거리던 본연의 K가 그리워졌다.
‘그 좁은 방 안에서 불편하게 구부리고 누워 주머니 속에 넣어져 있던 몇 개의 음표를 만지작거리는 것을, K는 가장 좋아했지.
그 좁은 방 안에서 불편하게 구부리고 누워 오랜 노래 부르는 것을, K는 가장 좋아했지.
불멸을, 신화를, 혁명을, 꿈을, 말하지 않고 만지지도 않고, 먼지보다 더 작은 알갱이로 둥둥 띄워 놓고
그 좁은 방 안에서 불편하게 구부리고 누워 그것들을 천천히 들이마시는 것을, K는 가장 좋아했지.’
K는 고치의 문을 닫고 수십만 가닥의 붉은 핏줄로 문틈을 꿰매기 시작했다. 작은 창으로 스며든 핏빛 햇살은 이상하리만치 그를 평안하게 감싸 주었다.
⼁수상 소감⼁
시에 대한 끈을 놓지 말라는 명령
아직 상을 받는다는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쥐구멍으로라도 숨어들고 싶은 심정입니다. 20년 넘게 시를 써 오면서 ‘내가 시인인가?’하는 의심을 수없이 해왔습니다. 시의 윤리와 삶의 윤리를 그네 타듯 넘나들며 시를 배반하기도 했고 몸과 삶을 팽개쳐두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상이라뇨. 가당치도 않다는 생이 들었습니다.
청년 시절 ‘새롭지 않으면, 낯설지 않으면 예술이 아니다’라고 생각했습니다. 새롭고 낯선 것들이 새로운 정서를 만들어 내고 새로운 정서가 예술과 문화를,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 간다고 생각했습니다.
1994년 실험장시『붉은 기호등』이 출간되었을 때 말이 많았습니다. ‘실험시의 극점에 선 작품’이라는 극찬도 있었지만 ‘서정의 기본도 안 되어 있다.’, ‘예술을 치장한 쓰레기다.’라는 악평도 많았죠. 예상했던 일이었으니 섭섭하진 않았습니다. 하지만 기뻤던 건 제가 좋아했던 시인들-하재봉, 장정일, 박정대, 성귀수 등-과 소설 쓰는 정영문이 제 시를 좋아해 주었습니다. 그걸로 끝이죠, 신났습니다. 배불렀습니다.
『붉은 기호등』 출간 이후, 누구도 예측할 수 없는 질서와 색다른 언어의 꼴을 지닌 책을 써 보고 싶다는 욕심을 가졌습니다. 10년 동안 수없이 지우고 쓰고 만들고 버렸지만 아무것도 건질 게 없었습니다. 극단의 언어 실험을 모색하다 실패한 거죠. 시인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진저리처질 정도로 시가 싫었습니다. ‘이번 생은 시인으로써 망했다.’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시를 버리기로 했습니다.
바로 그 때 노래가 찾아왔습니다. 꿈으로 찾아오기도 하고 기억 잃고 취해 잠든 밤, 삐뚤빼뚤한 메모로 아침의 머리맡에 놓이기도 했습니다. 시가 나를 버리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번 수상 시집『애초의 당신』은 자서에서 밝힌 것처럼 오페라 아리아 ‘남 몰래 흐르는 눈물’을 부르고 싶을 때, 라디오헤드의 ‘Creep’을 부르고 싶을 때, 뽕짝 ‘아득히 먼 곳’을, 김현식의 ‘비처럼 음악처럼’을 부르고 싶을 때가 있듯 내 속에서 흘러나온 여러 색의 노래들을 김요일식으로 풀어 놓은 것들입니다. 시보다 훌륭한 해설을 써준 박정대 시인의 표현처럼 목에 힘 빼고 진성이 아닌 가성으로 흥얼거린 것들이죠. 이번 시집은 젊은 시절 꿈꿨던 ‘진짜 예술’은 아니지만 혼자 좋아라 흥얼거리는 ‘김요일 노래 모음’ 쯤은 된다고 할까요?
시집 출간 후 1년 동안 시를 쓰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번 수상을 시에 대한 끈을 놓지 말라는 명령으로 받아들이겠습니다. 더 제대로 된 시를 쓰라는 질책으로 품에 안겠습니다. 언제가 될지는 몰라도 정말 좋은 시 한편 꼭 쓰겠습니다. 심사위원 선생님들께, 선후배 시인들께, 자못 쑥스러운 표정으로 인사올립니다. 고맙습니다.
⼁작품론⼁
끊어진 기타줄 이후,
김춘식 문학평론가
애초의 당신은 시인 김요일이 꿈꾸던 상상, 동경의 세계와 그의 지나온 실제적 삶, 추억이 서로 뒤엉켜 만들어진 시집이다. 그래서 이 시집의 이중적 구조에는 상당한 부분의 알레고리가 포함되어 있다. 현실에 대한 시인의 알레고리적인 풍자, 그리고 자조와 냉소가 그가 지향하고 꿈꾸는 어떤 절대성 아래 재배치되어 있는 상황이라고나 할까.
그래서 권태, 냉소, 풍자, 천박함으로 넘쳐나는 현실의 기묘한 뒤틀림 위에 그는 순례자와 음악가, 혁명가, 그리고 연인의 세계를 펼쳐 보인다. 진정한 “생은 다른 곳에” 있다는 암시로 넘쳐 나는 그의 시편들에는, 그의 정신적 거처가 언제나 ‘국경 밖’, ‘세계 밖’, ‘우주 밖’ 등 어떤 경계의 외부로 설정된다. 그가 만나야 할 당신도 외부에 있지만, 더 본질적으로 말하면 그가 떠나 온 곳은 이 세계가 아니라 “카치올리”와 같은 저편에 있는 마을이다. 그가 머물고 있는 ‘현실’이란 그저 일시적으로 거쳐 지나가는 곳이므로 그는 현실 속에서 언제나 순례자이고 나그네임을 자처한다.
“그런 게 다 무슨 소용, 누군가 버리고 간 늙은 낙타는/권태를 등짐 진 채/썩은 내 나는 침 뱉으며 모래언덕”(「근황」 부분)을 넘어간다는 진술에서 보듯이, 버려진 낙타이거나 실패한 혁명가인 시인은 ‘참담한 일상’의 권태를 견디며 계속 어디론가 떠돌아야 하는 유목의 숙명을 타고난 자이다. 현실에 대한 시인의 냉소가 주로 일상의 권태, 천박함, 가식 때문이라는 점에서 그는 시인으로서의 품격과 영혼에 관한 일종의 ‘판별자’를 자부하는 듯한데, 그 판별의 기원에는 시인이 실패한 혁명가, 버림받은 음악가처럼 싸움에 패배한 자라는 조건이 중요하게 자리 잡고 있다.
결국 시는 언제나 현실을 변혁시키는 혁명적 의지를 지니고 있지만 결국은 실패할 수밖에 없다는 결론이 그의 시 안에는 이미 전제 되어 있는 셈이다. 실패한 혁명가와 떠돌이 악공, 집시, 순례자의 공통점은 현실을 바꾸려는 열렬한 열망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결국은 현실이 아닌 다른 곳에 자신의 거처를 지니고 있다는 점이다. “카치올리”는 이 점에서 국경 밖의 은신처, 도피자, 떠돌이인 이단자들의 마을이라는 점에서 시인의 숙명이 시작된 곳이고 그 곳의 풍속을 물려받은 자들은 이 지루한 일상에서도 ‘카치올리’의 추억에 파묻혀 자신들만의 노래와 사랑, 눈빛을 주고받고 있는 것이다.
출렁이는 선창에서는 독주 한 잔에도 취하는 법
소진된 고통과 유리 파편 같은 자책은 사랑 이후의 일
파도치며 흔들리며
꿈꾸며 꿈 깨며
-「밀항密航」 부분
“사랑 이후”가 바로 ‘실패한 혁명’과 같은 의미라는 것은, 앞에서 말한 내용들을 생각하면 아마 쉽게 추측이 가능할 것이다. 독주에 취한 듯이, 꿈꾸며, 꿈 깨며, 출렁이며 가는 생이란, 배위의 ‘밀항객’처럼, 이미 현실을 떠나 있는 삶이다. 시인 스스로를, 현실을 비껴 달아나는 ‘망명객’으로 그려내고 있는 이런 장면들은 ‘국경’을 벗어나야만 하는 자신의 ‘운명’에 대한 강변强辯이기도 하다. 실패자이므로, 그래서 국경을 벗어나는 것만이 일상으로부터의 유일한 탈출이므로, ‘밀항과 망명’은 시인에게 아주 구체적인 이미지로 표현된다. 즉, ‘밀항’은 흔들리고, 비몽사몽으로 취하며, 고통으로 소진하고 자책하는 삶의 방식과 등가인 것이다. 집시 같은 떠돌이의 고단함이 오히려 ‘일상의 권태’를 벗어나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지금 시인은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 삶이란, “묶인 배,//붉게 녹슨 눈을 껌벅이며/끼익-익-/목쉰 노래만 부른다//어디로든 가고 싶어/천 번 만 번은 출렁거렸을/묶인 배의 빈 그물처럼//(사랑은, 꿈은, 혁명은, 세상은)//비린 흔적만 가득하다//만선滿船이다”(「묶인 배」 부분, p. 30~31)에서 보듯이, 엄연히 존재하는 ‘완강한 구속’이기도 하다. 시인의 열망만큼이나 그 ‘묶는 힘’ 또한 강한 것이 ‘살아가는 것’의 실체라는 것을 또한 시인은 잘 알고 있다.
시인이 “마틸다, 술 한 잔 주오/세상은 천박하고/기타줄은 잘도 끊어지네/마틸다, 술 한 잔만 주오”(「마틸다」 부분, p. 53)라고 노래 할 수밖에 없는 이유, 새벽까지 ‘은경이네’라는 술집에서 오지 않는 누군가를 기다리며 술잔을 기울이는 이유도 모두 이 ‘묶임’을 견뎌내고 망각하기 위해서이다.
스스로를 아름다운 실패자로 만들기 위한 시인의 고투는 이 점에서 처절하기까지 하다. ‘혁명가, 시인, 꿈, 사랑, 음악가’는 아름다운 존재로 스스로를 각인시키기 위해 지금 세상을 처연하게 비껴가고 있는 것들이다. ‘카치올리’가 유난히 미학적인 이미지로 그려지는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일까. ‘카치올리’는 이 세상의 밖에 있는 상상의 마을로서의 몽환적 이미지를 모두 지니고 있는 곳으로 나타난다.
카치올리,
유랑을 끝낸 집시들의 마지막 거처
사시사철 태양만한 보름달이 떠 있지
푸른 연기 자욱한 마을은
국경 밖에 있어
-「카치올리로의 초대」 부분
“사시사철 태양만한 보름달이 떠 있는” 마을에서 사람들은 “백 가지의” “뻔하고 낭만적인 꿈”을 꾼다. 집시의 마을처럼, 음악과 춤과 결혼식 따위가 있는 곳, 시인은 그곳이 바로 자신의 거처라고 말한다.
여기서 미학주의자인 김요일 시인은 낭만적이면서도, 탕진과 소진, 자책으로 인해 더욱 아름다울 수 있는 어떤 ‘역설’을 표현하려고 시도한다. 스스로를 아름다운 실패자라고 말함으로써 오히려 역설적인 승리를 얻을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한 탐색이라고나 할까. 시인은 온몸으로 자신을 던져 그 역설을 실험하고 있는 것이다.
가장 처절한 실패자로 전락함으로써, 바꾸어 말하면 가장 비참한 패배자로 자신을 연기演技함으로써, 역으로 세상 밖에 자신의 ‘성소’聖所를 세우는 전략이라고 할까. 실제로 시인이 구원 혹은 절대적인 것에 대한 추구를 ‘미적인 방식’으로 구현해 내는 장면은 이 시집의 곳곳에서 발견된다.
당신의 그렁그렁 단잠 든 소리에
그렁그렁 내 눈에 별 뜬다 별 진다
페르세우스, 헤라클레스, 세페우스, 페가수스, 카시오페이아……
당신이 존재하는 마을의 이름이라지
-「별」 부분
‘당신’이라는 성소, ‘카치올리’라는 마을, 별들이 사는 별자리 등 시인이 꿈꾸는 이상은 역설적으로 너무 커다랗고 아름다운 것을 지향하기 때문에, 현실과 이 지구 위의 일상을 오히려 아주 하찮은 것으로 만든다. 그러니, 사실 ‘그렁그렁’하며 눈으로 별을 바라보는 자는 이 하찮은 땅 위에서는 실패자이지만, 오히려 저 거대한 별들의 ‘위대한 주민’인 것이다.
성스러운 곳으로부터 떨어져 나와 이 하찮은 땅 위에 발을 디딘 자들이 바로 ‘시인이요 음악가’라는 그의 생각은 역설적으로 말하면, 이 하찮은 ‘세속주의’ 앞에서는 절대로 고개를 숙이고 싶지 않다는 자존심과 자부심에서 나온 것이다. 지상을 부정하고 초월적인 어떤 곳에 자신을 위치시킴으로써 “타락천사”의 이미지를 ‘예술가’에게 부여하는 방식 자체는 그다지 새로운 것이 아니지만, 중요한 것은 그 연기의 철저성에 있다고 할 것이다.
거기 계세요, 제가 갈게요
당신은 바다에서 가장 높은 산
(중략)
거기 계세요
태양과 바람의 경계에서 가장 상처 깊은 뿌리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피안彼岸의 장르인
당신
-「무인도」 부분
철저하게 외로운 존재, 모든 타자로부터 버림받은 존재, 꺾을 수 없는 자존심으로 스스로를 망쳐 버리는 존재, 무수한 소문을 무릎 쓰고 사랑을 향해 매진하는 존재, 이 모든 것은 안온과 평화를 포기하고, 위험과 모험 속으로 자신을 던지지 않고는 달성할 수 없는 이미지들이다.
이 시집 곳곳에 나타나는 ‘혁명을 꿈꾸었다’는 독백을 그냥 지나칠 수 없는 까닭은 이런 맹목적 이상주의가 김요일 시인의 가장 중요한 시적 전략이기 때문이다. 그가 바라보고, 지향하는 아름다움이란 이렇듯 철저한 연기演技와 생의 기투가 없이는 불가능한 것이다.
비록, 지금 연기演技라고 말하고 있지만 이것은 단순한 꾸밈이나 어설픈 흉내를 말하는 것은 아니다. 말 그대로, 혼신을 다 받친 연기, 즉 예술적 포즈를 의미한다. 사실 따지고 보면, 모든 미적인 것은 인위적인 것이고, 꾸며지는 것이다. 그렇다면 문제는 어떻게 꾸미느냐, 즉, 연기하느냐에 달려 있는 것 아닌가. 앞에서 ‘철저성’을 말한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다.
철저하게 외롭기 위해서는 철저하게 외로운 자의 ‘포즈’를, ‘이미지’를 만들어야 하듯이, 지상의 모든 하찮은 것으로부터 버림 받은 대신, 저 높은 곳을 향해 도약하는 자가 되기 위해서는 ‘완벽한 패배자’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패배의 처절함이, 국경 밖의 ‘성소聖所’를 더욱 간절하고 아름다운 곳으로 만드는 근원적 조건이기 때문이다.
“피안의 장르인/당신”이 “가장 높은 산”이고 “가장 상처 깊은 뿌리인 까닭도 여기에 있다. 어떤 것이든 상처가 깊은 만큼 오히려, 높고, 닿을 수 없는 간절한 것으로 만들어 질 수있는 것이다.
태초의 이전부터 오신다더니
꽃과 바람
물과 불
하늘과 땅 어디에도 보이시지 않네
터진 듯 쏟아 내리는 별빛 속에도 묻어오지 않으시고
전생의 전생에도 보이지 않으시는
우주의 바깥에 계신 당신
모든 이즘(ism)의 프리즘인
처음의 줄기이자 분열의 마지막인
아, 당신은
-「애초의 당신」 전문
이번 시집의 맨 앞에 실린 표제작 「애초의 당신」은, 모든 세속적인 것을 초월한 어떤 것에 대한, 시인의 형이상학적인 열망을 토로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것이 단순한 ‘구원’ 혹은 절대자에 대한 ‘복속’을 의미하는 것은 절대 아니다. 오히려, 시적 자아의 끊임없는 자기 확장 의식이 도달한 어떤 지점이 바로 ‘태초’, ‘우주 바깥’이었을 뿐, ‘당신’이 어떤 절대적 존재를 가리키고 있지는 않다.
오히려 앞에서의 역설을 끌어 온다면, 종종 사랑의 대상으로 호명해 온 ‘당신’이, 태초 혹은 우주 바깥으로부터 온 것으로 확장되고 높아짐으로써 시인 자신의 ‘사랑’과 ‘자아’가 역설적인 ‘자기확장’을 이루는 방식이라고 읽힌다. ‘당신’을, ‘피안의 장르’로 호명함으로써 ‘당신’을 마음에 품거나 사랑하는 나는 바로 그 피안을 품은 자가 되는 것이다.
소문을 버리고, 병을 잊고
피를 씻는 저녁
창을 때리는 저 음악은 당신이 작곡한 슬픈 노래구나
버릴 수 없다면 아무 것도 낳을 수 없는 법
붉은 비에 젖어 떨고 있는
당신을, 버린 나는
당신을, 가진 나는
-「사랑」 부분
예를 들면, 인용한 작품에서 나는, ‘당신’을 버렸기 때문에 오히려 당신을 (영원히) 가질 수 있게 되었다. 버릴 수 있었기에 낳을 수 있듯이, 무엇인가를 지우기 때문에 더 ‘아름다운’ 무엇을 얻을 수 있게 된다. ‘당신’을 손에 닿지 않는 ‘까마득한’ 곳에 데려다 놓음으로써 ‘나’의 사랑은 불가능하지만 가장 숭고한 것이 된다.
이 점에서 김요일 시인은 미적인 것에 대한 순교를 자처하고 있는 셈이다. 완전함을 추구하기 때문에 모든 사소한 것들은 아프고 아쉬워도 ‘한때’거나, ‘그뿐’이거나 ‘견뎌낼 수’ 있는 것이다.
저 소리는
가장 완전한 음(音)
저 몸짓은
누구도 흉내 내지 못할 춤
태양이 쏘아 댄 은(銀)화살에
심장을 맞은 놀란 새들은 까맣게 하늘을 덮고
프투투투
일제히 제 날개에 붙은 은가루를 털어 댄다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숨 한번 쉬지도 않고
쉴 새 없이 장악하며 무장해제 시키는
저 아름다운 은빛 테러
폭설, 당신이라는 이름의
- - 「폭설」 전문
모든 아름다운 것에 ‘당신’이라는 수사를 붙이는 사람만큼 강한 욕망을 지닌 사람이 있을까. 아름다움에 대한 매혹을 넘어서 이런 수사는 ‘소유’를 전제로 한 것이다. 완전함에 대한 소유욕, 흉내 내지 못할 춤과 아름다움에 대한 매혹을 ‘당신’이라는 말로 서슴없이 뱉어내는 것이 바로 김요일식(式)의 수사법이다. ‘당신’이라고 호명하는 순간 그것은 이미 ‘사랑’을 전제로 한 것이 되고, 비극적이든, 낭만적이든, 어떤 절대를 지향하게 된다.
사소한 것들과 절대 사이는 이렇게 갈라진다. 상처 입고, 흔들리고, 취하고, 고통 받는 것이 사소한 일인 까닭은 언제나 ‘절대로서의 당신’이 있기 때문이다. 저편에 서 있는 당신을 보듯이, 김요일 시인은 그가 가질 수 없었던 것들을, 지금, 모두, 저편으로 옮겨 놓고 있는 지도 모른다. 또 다른 세상을 만듦으로써, 그의 모든 동경과 낭만을, 저편으로 던짐으로써, 역으로, 그는 이곳의 고통을 아무렇지도 않은 소소한 것으로 만든다.
「순례의 노례」에서 시인은 ‘카치올리’를 신이 사는 곳이라고 말하고 그 곳에서 신을 만나 “그도 한 잔, 나도 한 잔” 술을 마시겠다고 말한다. 호기롭기도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생을 송두리 채 포기한 자의 비장한 ‘실존적 기투’가 돋보이는 장면이기도 하다. “가자, 신이랑 한잔하러”라고 말함으로써 ‘피안’은 또 다른 시인의 놀이터가 된다. 시인이 신과 동격으로 상승하고 확장하는 이런 장면 또한 상당히 의도적인 것이다.
바람이 꽃잎을 흔들고
흔들린 꽃잎은 상처를 흔들고
마음을 흔든다
흔들린 마음 하나
더할 수 없이 위중해진
단단한 슬픔이 되어
목구멍을 막는다
그래
그냥 어떤 사소한 사건이라고 못 박아 두자
꽃그늘 하나 드리우지 못하는 가여운 나무의,
그 깡마른 그림자의,
말라가는 비애쯤이라 해 두자
운명적이라는 말은 아무 때나 쓰는 말이 아니지
점등 별의 망루에 올라 잠시 스위치를 켰을 뿐
그래, 그래
그냥
쓸쓸한 별의 벼랑 끝에서 잠시
아찔, 했을 뿐
황홀, 했을 뿐
뿐,
- 「뿐」 전문
사실 이 시집 전체에서 시인의 본심은, 오히려 「뿐」이라는 위 시의 제목처럼, 가슴을 후벼 파는 슬픔과 위중해진 마음을 ‘느낀다’는 사실에 있다. 그러나 시인은 그것을 그냥 “뿐”이라는 심드렁한 말로 애써 표현하려고 한다. 「자유무덤」, 「카치올리의 음악가」 같은 작품에 나타난 알레고리적인 풍경은 그가 이미 ‘상처받은 자’라는 사실을 잘 나타낸다.
아이러니하게도, 사랑했으므로, 상처받았고 그래서 ‘위중해진 마음’을 품어 버린 것이 그의 진정한 ‘병증病症’일 것이다. 그런데도, 그의 대부분 작품은 그러한 상처를 그리움이나 사랑, 낭만적 동경, 실패한 자의 초상 등 다른 방식으로 ‘연기’한다. 시인의 자존심이 그런 ‘위중해진 마음’을 그대로 세상에 내려 놓을 수는 없도록 한 것 같다. 차라리 신神하고 ‘한잔 하자’라고 맞짱을 뜰 지라도, 스스로 사소하고, 하찮은 존재로는 남고 싶지는 않다는 뜻일까.
“잊히지 않는 생을 살아야겠다”(「카치올리의 음악가」)는 생각으로 마을로 내려온 K가 결국 “바꿀 수 없다면 떠나야 한다”고 생각하며 자신의 방으로 돌아온 것처럼, 시인 K(김요일)는 어쩌면 모든 것을 “자신의 잘못”으로 돌린 채, 지금 자신의 방으로 돌아가려고 하는 것은 아닐까. 바꿀 수 없었기 때문에 모든 아름다움은 이곳이 아니라 본연의 자기에게 있었다고 생각하는 것이 진정으로 ‘상처’를 넘어서는 방법인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시인 K’가 자신의 시집을 통해 그가 겪은 상처와 그의 아름다움에의 동경이 무엇인지를, 마침내 ‘모두’ 보여주었다는 점만은 분명한 사실이다.
<김요일 연보>
1965년 4월 18일-김종해 시인과 박영자 여사의 장남으로 태어남.
1983년 8월-숭실고등학교, 계원예술고등학교 재학 중 여러 차례의 정학과 가출 끝에 학교를 자퇴하고 검정고시 시험에 합격.
1984년~1995년-숭실OB남성합창단에서 테너로 단원 활동.
1986년-서울교육대학에 입학하였으나 학내 시위를 배후 조종하였다는 혐의로 구속수감 되고, 무기정학 처분을 받는 등 우여곡절 끝에 7년 만에 대학을 졸업함.
1990년 2월-가수 송시현이 부른 <가야할 나라>의 작사로 ‘제3회 한국노랫말대상’ 대상 수상.
1990년 9월-《세계의 문학》에 「자유 무덤」 외 4편을 발표하며 작품활동 시작.
1992년 2월-아내 손민경과 결혼.
1992년 8월-장남 김새힘(군복무. 한양대학교 연극영화과 휴학중) 태어남.
1994년 4월-실험장시 『붉은 기호등』을 문학세계사에서 출간. ‘실험시의 극점에 선 작품’, ‘예술을 치장한 쓰레기’라는 문단의 엇갈린 평가를 받으며 ‘시적 불운’의 길을 걷기 시작함.
1994년 9월-장녀 김새별(덕원예술고등학교 미술과 3년) 태어남.
1994년 9월-홍대 클럽 <발전소>에서 하재봉, 성귀수, 주종환과 한국 최초의 집단 시 퍼포먼스를 펼침.
1994년~2004년-극단의 언어 실험을 모색하다 실패하고 10년 동안 글을 쓰지 못함.
2004년 11월-『현대시학』 2004년 11월호에 「아바나의 피아니스트」 외 2편을 발표하며 작품활동 재개.
2011년 3월-시집 『애초의 당신』을 민음사에서 출간.
2012년 5월-시집 『애초의 당신』으로 제 3회 질마재문학상 수상.
현재 <문학세계사>와 시전문계간지 <시인세계>에서 기획이사로 재직하며 좋은 책과 깐깐한 시지詩誌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