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술만큼 놀란에게 어울리는 수식어가 있을까. 현란한 플롯 구성과 화려한 스타 배우, 그리고 광활한 아이맥스 화면까지 놀란은 우리를 마술사처럼 매혹시킨다. 플롯의 마술사라는 명칭에서 알 수 있듯, 놀란은 야바위꾼의 손짓으로 전통적인 이야기 구성에서 벗어나 플롯을 창조적으로 배치함으로써 미학적, 상업적 성취를 이뤄내고자 한다. 당장 <메멘토>만 보더라도, 놀란은 플롯을 통해 단기 기억상실증에 걸린 이의 내면을 관객에게 보여준다. <덩케르크>에서는 하늘과 땅, 그리고 바다에서 벌어지는 에피소드들을 매끈하게 조직함으로써 영국 역사의 거룩한 신화를 탄생시킨다. <프레스티지> 역시 플롯 구성이 눈에 띄는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영화 초반부와 결말에서 반복적으로 마이클 케인은 마술의 세 단계를 알려준다. 첫 단계는 평범한 것을 보여주는 ‘플레지’이고, 두 번째 단계는 눈속임으로 그 평범한 것을 사라지게 만드는 ‘턴’이다. 마지막으로 이 영화의 제목이기도 한 ‘프레스티지’는 그 사라진 것을 다시 현현하게 하는 단계이다. 케인도 그렇고 영화의 모든 사람이 입 모아 얘기하는 게 마술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이 ‘프레스티지’ 단계이다. 즉, 사람들은 사라지는 것만으로 만족하지 않고, 다시 나타나길 바란다는 것이다. 그래야 마술은 놀라운 것이고 성공적일 수 있다.
이러한 마술의 세 단계는 이 영화의 구성과도 닮아있다. 영화는 크리스찬 베일이 휴 잭맨을 살해한 혐의로 교도소에 수감된 시간대에서 출발한다. 그리고 영화는 과거로 돌아가 크리스찬 베일이 왜 휴 잭맨을 살해했는가를 살펴본다. 물론 과거에는 또다른 과거가 놓여 있다. 크리스찬 베일과 휴 잭맨이 견습 마술사였던 시절과 휴 잭맨이 궁극의 순간이동 마술 장치를 얻기 위해 테슬라를 찾는 시절이 서로 교차하며 펼쳐진다. 영화는 세 층위의 시간대가 교묘하게 교차 편집되면서 우리를 혼란하게 한다. 마치 마술사가 마술을 펼치기 전에 현란한 손짓과 몸짓으로 우리의 시선을 분산하듯이. 당최 이 영화가 어떻게 흘러가는지 알 수 없을 때쯤 영화는 놀라운 반전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끝이 난다. 마술에서 ‘프레스티지’가 중요한 이유는 다른 데 없다. 바로 ‘반전’의 묘미이다. 사라진 줄로만 알았던 게 다시 나타나는 것만큼 신기하고 놀라운게 있을까. 이를 보여주듯, 크리스찬 베일과 휴 잭맨은 사라진 뒤 다시 나타남으로써 서로에게 놀라움과 함께 복수를 행한다. 그렇다면 이 영화는 단순히 반전 영화일 뿐일까. 여름밤 불꽃놀이처럼 단순히 우리는 신기하고 놀라운 것을 본 것뿐일까.
크리스찬 베일과 휴 잭맨이 연기한 캐릭터는 어떤 인물인가. 둘 다 마술에 미친 인물 아닌가. 크리스찬 베일은 두말할 것도 없고, 휴 잭맨 역시 아내를 잃은 슬픔으로 광기에 사로 잡힌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그 역시도 마술이 더 중요했다. 그들은 마술을 위해서라면 자신의 삶까지도 버리는 그런 광인인 것이다. 이들이 이토록 마술에 사로잡힌 이유는 무엇인가. 휴 잭맨은 영화 결말부에서 이렇게 말한다. 현실에 찌든 인간들이 자신의 공연을 보고 환상에 빠지는 순간, 그 순간을 너무나도 사랑했다고 휴 잭맨은 밝힌다. 물론 유명해지고 싶은 욕망도 있을 테다. 그러나 휴 잭맨이 밝혔듯이, 사람들을 즐겁게 해주고 싶다는 아주 사소하고 기특한 욕심이 있었던 것이다. 이런 욕망은 비단 휴 잭맨만의 것일까. 이 대사는 어쩌면 놀란 스스로가 하는 말이기도 하다. 사람들에게 환상을 보여주는 영화감독으로서의 자아가 이 대사에 투영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무엇보다 이런 마술적인 스펙터클은 영화라는 매체의 고유한 속성이기도 하다.
크리스찬 베일과 휴 잭맨의 어리석은 복수극을 보여주는 듯한 이 영화는 어딘가 교훈극처럼 마무리된다. 이 영화 내내 반복되는 것, 무언가를 얻기 위해서라면 대가를 치러야 하는 법이라는 교훈. 그 교훈을 모든 인물이 알고 있음에도, 그 누구도 실행하지 못한다. 휴 잭맨은 죽는 순간에야 무언가를 깨달았다는 듯이 그 말을 되새긴다. 하룻밤의 불장난 이후에는 잔인한 대가가 반드시 따라온다는 교훈은 어쩌면 인물들뿐만 아니라 영화 자체에도 해당되는 말인지도 모른다. 영화가 탄생하고 우리에게 안겨준 것은 놀랍고 신기한 충격들이었다. 그러나 그런 충격들은 우리의 정신적 고양이나 사회ㆍ정치적 진보를 불러오기는커녕, 스펙터클이라는 이름으로 우리의 허영심과 환각을 불러일으켜 소비 자본주의를 오히려 고착화하는데 이바지하지 않았나하는 물음으로 이어지게 한다. 이것은 영화가 세계를 망치고 있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영화라는 것이 이토록 자본주의와 떼려야 뗄 수 없다는 것이다. 다시 영화로 돌아와면 생각해보면, <프레스티지>는 단순히 신기하고 환상스러운 것을 보여주는 영화가 아니다. 오히려 환상적이고 놀라운 것 이면에는 어두컴컴하고 칙칙한 진창 같은 현실이 있다는 점을 말하는 영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