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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종(世宗)께서 집현전(集賢殿)을 설치하고 문사(文士)로서 이름 있는 사람 20명을 뽑아 경연관(經筵官)을 겸하게 하고는 모든 문한(文翰)의 일을 모두 여기에다 맡겼다. 일찍 집무하여 늦게야 파하였고, 일관(日官)이 때를 알려야만 비로소 퇴근하였다. 아침저녁의 식사 때에는 내관(內官)을 대객(對客)으로 삼았으니, 신하를 두텁게 대우하는 뜻이 지극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서로 다투어 권면하여 재주가 크고 훌륭한 선비들이 많이 나왔다. 정하동(鄭河東)ㆍ정봉원(鄭蓬原)ㆍ최영성(崔寧城)ㆍ이연성(李延城)ㆍ신고령(申高靈)ㆍ서달성(徐達城)ㆍ강진산(姜晉山)ㆍ양(兩) 이양성(李陽城)ㆍ양(兩) 성하산(成夏山)ㆍ김복창(金福昌)ㆍ임서하(任西河)ㆍ노선성(盧宣城)ㆍ이광성(李廣城)ㆍ홍익성(洪益城)ㆍ이연안(李延安)ㆍ양남원(梁南原)과 성삼문(成三問)ㆍ박팽년(朴彭年)ㆍ이개(李塏)ㆍ유성원(柳誠源)ㆍ하위지(河緯地) 같은 이는 모두 걸출한 사람들이었고, 그 나머지 문원(文苑)에서 유명한 이들도 이루 헤아릴 수 없었다. 병자년의 난에 세조(世祖)께서 집현전을 파하시고는 문신 수십 명을 뽑아 겸예문(兼藝文)이라 하여 나날이 만나 생각한 바를 의논하더니 성묘(成廟)께서 즉위하시자 집현전에 의거하여 다시 홍문관(弘文館)을 설치하였고, 또 본관(本官)으로써 경연관을 겸하게 하여 대우하기를 더욱 두텁게 하였다. 매양 궁중에서 빚은 술을 내렸고, 또 승정원(承政院)을 불러모아 승지(承旨)로 하여금 대음(對飮)하게 하였으며, 용산강(龍山江) 가에 당(堂)을 지어놓고 관관(館官)에게 번(番)을 나누어 독서하게 하였다. 또 상사(上巳)ㆍ중추(中秋)ㆍ중양(重陽)의 가절에는 교외에서 놀게 하였고, 후히 주악(酒樂)을 내렸으니, 그 총애와 영광이 지극하였다. 그러나 문명(文名)이 있는 것으로 말하면 이는 세종조의 번성하던 때와는 같지 않았다.
○ 전조(前朝)의 과거에는 다만 지공거(知貢擧) 1명과 동공거(同貢擧) 1명이 있어서 미리 합격자를 차정(差定)하였기 때문에 홍분유취(紅粉乳臭)의 빈축을 면하지 못하였다 국초에도 여전히 이러한 구폐를 이어오다가 세종 때에 이르러 격례(格例)를 고쳐서 모두 옛 제도를 썼다. 이조에서 시관(試官)으로 마땅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을 임시로 입계(入啓)하여 낙점을 받았으며, 시관이 된 자는 명을 받들어 시험 장소에 나누어 가서 삼관(三館)에다 과거 볼 사람들을 모아놓고 그날 새벽에 하나하나 이름을 불러 과장에 들여보냈다. 이때 수협관(搜挾官)이 문 밖에 나누어 서서 의금(衣襟)과 상자를 조사하였는데, 만약 문서를 가지고 있는 자가 있으면 붙잡아 순탁관(巡綽官)으로 보내 이를 결박하게 하였다. 만약 과거장 밖에서 발견되면 1식년(式年 4년마다 한 번씩 과거를 보이는 해)의 과거를 못 보게 하고, 과거장 안에서 발견되면 2식년의 과거를 못 보게 하였다. 밝기 전에 시관이 대청에 나와 촛불을 켜놓고 앉으면 그 엄숙한 것이 신선(神仙) 속의 사람과 같았었다. 삼관원(三館員)이 뜰로 들어와 과거 볼 사람의 자리를 정해주고 나가는데, 날이 밝으면 방(榜)을 펴서 글제를 내걸었고, 오정(午正)이 되면 시지(試紙)를 걷어 도장을 찍어 삼관에 돌려준다. 그러면 옥상(屋上)에 올라 대종(大鍾)을 들고 선생을 부르고, 뜰에 임하여서는 신래(新來)를 부르며, 또 허방(虛榜)을 써서 창(唱)하였는데, 이는 모두 고풍이었다. 날이 저물면 북을 쳐서 재촉하고 글이 다 이루어지면 수권관(收卷官)에게 바쳤으며, 다시 등록관(謄錄官)에게 넘기되, 자호(子號)를 권의 양쪽 끝에다 쓰고 또 감합(勘合)을 써서 이를 두 개로 자르는데, 하나는 봉명(封名)이고 하나는 지은 글이었다. 봉미관(封彌官)은 봉명을 받아 물러가서 별처에 있고, 등록관이 서사인(書寫人) 등을 모아 주묵(朱墨)으로 문권을 전사(傳寫)하되, 사동관(査同官)은 본초(本草)를 읽고 지동관(枝同官)은 주초(朱草)를 비준하여 시관에게 넘겨 높고 낮은 것을 품제(品題)한 뒤에 봉미관(封彌官)으로 하여금 봉명(封名)을 뜯어 방(榜)을 쓰게 하였다. 강경(講經)하는 법은 자호(字號)를 써 사서오경(四書五經)에 붙이고, 또 자호를 생(栍 종이 쪽지나 대쪽으로 만든 찌)에 써서 통(筒) 속에 넣어둔다. 과거 볼 사람이 강송할 글이름을 써서 바치면 시관이 생을 뽑는데, 만약 천(天) 자를 뽑으면 경서에 붙인 천 자를 찾아서 다만 대문(大文)을 써 준다. 과거 보는 사람은 대문을 읽어서 해석하고 시관은 주소(註疏)를 강론하며, 아전이 통(通)ㆍ약(略)ㆍ조(粗)ㆍ불(不)의 넉 자를 써서 강첨(講籤)을 만들어 각각 시관 앞에 놓는다. 한 책의 강론이 끝나면 아전은 허첩(虛揲)을 가지고 위로 올라가며, 시관이 차례로 강첨을 점고하여 다수에 의하여 취한다. 이때 서로 등(等)이 같으면 아래로부터 초장(初場)에서 강경한 분수(分數)와 중(中)ㆍ종장(終場)에서 제술(製述)한 분수를 통계하는데, 그것을 취하는 사람은 한 사람이 아니었고 점고도 한 사람이 하지는 않았다. 나라의 공도(公道)는 오직 과거에 있는 것이다.
○ 옛적에는 동궁(東宮)이 경복궁(景福宮)에 있었는데, 곧 대내(大內)의 동쪽이었다. 문묘(文廟)께서는 세자가 되시어 20여 년을 항상 이 궁에서 거처하였고, 서연(書筵)과 시강(侍講)을 하는 곳은 자선당(資善堂)이 되었으며, 백관의 조회 받는 곳은 계조당(繼照堂)이 되었다. 세종께서 말년에 몸이 불편하시어 여러 기무(機務)를 친히 보살피지 못하시자, 문묘께서 기무를 대행하였으되, 조정의 관리로서 어질고 유명한 사람을 뽑아 첨사(詹事 동궁의 정3품관)로 삼고 집현전의 10명을 경연관으로 삼으며, 또 10명을 서연관(書筵官)으로 삼았다. 계조당은 동궁의 바깥 뜰에 있었는데, 지금은 철거되어 그 터도 없다. 세조(世祖) 때에는 경연청이 동궁 안에 있었고, 또 책들을 동쪽 별실에 갖추어 홍문관(弘文館)이라 하였다. 자선당은 뒤에 문종의 혼전(魂殿)이 되어 경희궁(景禧宮)이라 하였고, 또 세조의 혼전이 되어 영창궁(永昌宮)이라 하였으며, 또 정희왕후(貞熹王后)의 혼전이 되어 태경궁(泰慶宮)이라 하였고, 성종(成宗)의 혼전이 되어 영사전(永思殿)이라고 하였다. 문묘께서 성학(聖學)이 고명하였고 문장이 화려하고 아름다웠으며, 또 필법이 신묘하였는데, 세상에 전하는, “천홍만자(千紅萬紫)가 봄바람과 다투더니 봄이 다하자 한 점의 홍(紅)도 없구나.” 하는 구절은 바로 문묘께서 지으신 글이다. 동궁으로 계실 때에 황금빛 귤 한 쟁반을 집현전에 보냈더니 귤을 다 먹자 쟁반에 글이 쓰여 있었는데, 이는 문묘께서 반초행서(半草行書)로서 귤에 대하여 쓴 시였다. 그 시에,
하셨는데, 시와 글씨가 모두 절세의 귀한 보배였으므로, 여러 학사(學士)들이 그려서 전사(傳寫)하려고 하였으나 안으로부터 들여보내라는 독촉이 있었으므로 쟁반을 붙들고 차마 놓지 못했었다. 조정에서 극성(棘城)의 전염병을 근심하여 관원을 보내어 제사를 베풀 때 집현전에서 글을 지어 입계(入啓)하므로, 문묘께서 어필(御筆)로 개제(改題)하셨으니, 사의(詞意)가 모두 섬부(贍富)하고 효유하심이 매우 절실하였으며, 문사(文詞)가 매우 좋아 사람들이 모두 탄복하여 마지않았다. 제사를 지낸 뒤에는 병세(病勢)가 점점 숙여져서 지금까지도 백성들이 편안하고 물건들이 넉넉하였다. 또 천성이 지극히 효성스러워서 성상을 섬기시되 반드시 정성을 다하셨다. 세종(世宗)께서는 일찍이 앵두를 좋아하셨으므로 문묘께서는 손수 앵두를 심으셨는데, 지금까지 궁궐에 가득 찬 앵두는 모두 그때 심은 것들이다. 상(喪)을 당해서는 슬퍼하심이 지극하셔서 파리해진 얼굴을 차마 볼 수가 없었다. 의묘(議廟 임금이 승하한 뒤에 묘호(廟號)를 의논하는 것)할 때에는 효(孝) 자를 쓰려고 하였으나, 너무 덕에만 치우친 것이라 하여 문(文) 자로 시호를 삼았다. 내가 어렸을 때 예겸(倪謙)과 사마(司馬) 두 사신이 우리나라에 왔었는데, 세자인 문묘께서 나아가 소명(詔命)을 맞으시는 것을 바라보았더니 그 얼굴이 아름답고 수염이 길어서 웅위(雄偉)하심이 보통이 아니었다.
○ 삼관(三館) 풍속에는 남행원(南行員 조상의 덕으로 하던 벼슬아치)이 그 두목을 상관장(上官長)으로 삼아 공경해서 받들었고, 새로 급제하여 분속된 자는 신래(新來)라 하여 욕을 주어 괴롭혔으며, 또 술과 음식을 요구하되 대중이 없었으니 이는 교만한 것을 꺾으려 함이었다. 처음으로 출사(出仕)하는 것을 허참(許參)이라 하고, 예(禮)를 끝내면 신면(新免)이라 하여 신면을 하여야만 비로소 구관(舊官)과 더불어 연좌(連坐)해서 잔치를 베풀었다. 말관(末官)이 왼손으로 여자를 잡고 오른손으로 큰 종을 잡아 먼저 상관장을 세 번 부르고, 또 작은 소리로 세 번 불러서 상관장이 조금 응하여 아관(亞官)을 부르면, 아관이 또한 큰 소리로 부른다. 하관(下官)이 이기지 못하면 벌이 있었으나, 상관이 이기지 못하면 벌이 없었다. 지위가 높은 대신이라도 상관장의 위에는 앉지 못하고, 세 관원 사이에 끼어 앉아서 부르되, 정일품에는 오대자(五大字), 종일품에는 사대자(四大字), 이품에는 삼대자(三大字), 삼품 당상관에는 이대자(二大字), 당하관은 다만 대선생(大先生)이라 부르고, 사품 이하는 다만 선생이라 부르되, 각각 성(姓)을 들어 이를 칭하였고, 부르고 난 뒤에는 또 신래자를 세 번 부르고, 또 흑신래자(黑新來者)를 세 번 부르는데, 흑(黑)은 여색(女色)이다. 신래자는 사모(紗帽)를 거꾸로 쓰고 두 손은 뒷짐을 하며 머리를 숙여 선생 앞에 나아가서 두 손으로 사모를 받들어 올렸다 내렸다 하였는데, 이것을 예수(禮數)라 하였다. 직명(職名)을 외우되 위로부터 아래로 내려가면 순함(順銜)이요, 아래로부터 위로 올라가면 역함(逆銜)이며, 또 기뻐하는 모양을 짓게 하여 희색(喜色)이라 하고, 성내는 모양을 짓게 하여 패색(悖色)이라 하였으며, 그 별명(別名)을 말하여 모양을 흉내내게 함을 ‘3천 3백’이라 하였으니 욕을 보이는 방식이 많아 이루 헤아릴 수 없었다. 방(榜)을 내걸고 경하(慶賀)하는 날에는 반드시 삼관(三館)을 맞이한 뒤에 연석(筵席)을 베풀고 예를 행하였는데, 만약 신은(新恩)이 불공하여 삼관에게 죄를 지으면, 삼관은 가지 아니하고 신은도 또한 유가(遊街 급제자가 풍악을 앞세우고 웃어른이나 친척들을 찾아보는 것)하지 못하였다. 삼관이 처음 문에 이르러 한 사람이 북을 치면서 ‘가관호작(佳官好爵)’이라고 부르면, 아전들이 소리를 같이하여 이에 응하고 손으로 신은을 떠받쳐 올렸다 내렸다 하는데, 이를 경하(慶賀)라 하였고, 또 부모와 친척에게 경하하는 것을 생광(生光)이라 하였으며, 또 최후에 여인(女人)을 받들어 경하하는 것을 유모(乳母)라 하였다. 또 신은(新恩)은 방(榜)이 나는 대로 의정부ㆍ예조ㆍ승정원ㆍ사헌부ㆍ사간원ㆍ성균관ㆍ예문관ㆍ교서관ㆍ홍문관ㆍ승문원 등 여러 관사의 선배를 배알하고, 포물(布物)을 많이 걷어 이것으로 연회를 위한 음식을 만드는데, 봄에는 교서관이 먼저 행하되 홍도음(紅桃飮)이라 하고, 초여름에는 예문관이 행하되 장미음(薔薇飮)이라 하였으며, 여름에는 성균관이 행하되, 이를 벽송음(碧松飮)이라 하였다. 을유년 여름에는 예문관이 삼관(三館)을 모아 삼청동(三淸洞)에서 술을 마셨는데, 학유(學諭) 김근(金根)이 몹시 취하여 집으로 돌아가다가 검상(檢詳) 이극기(李克基)를 길에서 만났는데, “교우(交友)는 어디서 오는 길이길래 이렇게 취하였느냐.”고 묻자, 대답하기를, “장미(薔薇)를 먹고 온다.” 하니, 듣는 이들이 모두 냉소(冷笑)하였다.
○ 성균관은 오로지 교훈(敎訓)을 관장하는 곳으로 국가에서 양현고(養賢庫)를 설치하여 관관(館官)으로서 이를 겸하게 하고, 항상 유생(儒生) 2백 명을 양성하였다. 상당부원군(上黨府院君) 한명회(韓明澮)는 임금께 아뢰어 존경각(尊經閣)을 지어 경적(經籍)을 많이 간행하여 여기에 두었고, 광천군(廣川君) 이극증(李克增)은 임금께 아뢰어 전사청(典祀廳)을 세웠으며, 나도 또한 임금께 아뢰어 향관청(享官廳)을 세웠다. 그 뒤에 성전(聖殿)의 동서무(東西廡)와 식당을 개축하고, 베 5백여 필과 쌀 3백여 석을 내리셨으며, 또 학전(學田)을 내리셔서 이것을 관중(館中)의 수용에 충당하게 하였는데, 이극증이 아뢰기를, “이제 성은을 입사와 미포(米布)를 많이 받았사오나, 비옵건대, 주식(酒食)을 갖추어 조정의 문사와 여러 유생을 모아 사문(斯文)의 성사(盛事)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하니, 성묘(成廟)께서 윤허하여서 이때 문사들이 명륜당에 크게 모였었다. 찬거리가 극히 정갈하였고, 승지가 궁중의 좋은 술과 어주(御廚)에 있는 맛있는 음식을 주어, 인마(人馬)의 왕래가 잇닿아 끊이지 않았다. 계축년 가을에는 성균관에 거둥하시어 선성(先聖)과 선사(先師)에게 제사 드리고 하연대(下輦臺)에다 장전(帳殿)을 마련하였다. 문신과 재신(宰臣)ㆍ추신(樞臣)은 장전 내에 입시하고, 당하관인 문신들은 뜰에 줄을 지어 앉았으며, 8도의 유생이 경사(京師)에 운집하니, 무려 수만 명이나 되었다. 상하가 모두 꽃을 꽂고 연회석에 참석하였으며, 새로 지은 악장(樂章)으로 연주하여서 이를 권하였고, 각 관청이 나누어 음식을 장만하였다. 성상께서 자주 내신(內臣)을 보내어 이를 살피시어 사람들이 모두 취하도록 마시게 하고 배불리 먹도록 하였으니, 전고(前古)에는 없던 일이었다.
○ 대저 선생(先生)을 맡은 사람은 그 스승에게서 수업을 하였으나, 한갓 입으로만 익힐 뿐이고, 문리(文理)를 알지 못한 데다가 또 자기 의견만 고집하여 도무지 통하지 않았다. 제학(提學) 유진(兪鎭)은 〈대학서(大學序)〉의 ‘극지참유(極知僭踰)’의 설(設)을 논하여 말하기를, “나의 마음이 대학의 이치를 극진히 안다고 할 것 같으면, 이는 참람한 뜻이 있는 것이다.” 하였고, 사성(司成) 이문흥(李文興)은 말하기를, “한 설(說)은, “내가 지극히 참람하여 죄를 면치 못할 것으로 안다.” 하였고, 한 설은, 유제학의 말과 같으니 이 말을 마땅히 두 가지 면으로 볼 수밖에 없다.” 하였다. 사예(司藝) 번우향(潘佑享)은 말하기를, “《논어(論語)》의 ‘위정 이덕(爲政以德)’에 있어서 만약 덕(德) 자를 먼저 해석하고 이(以) 자를 뒤에 해석한다면 너무 덕(德) 자의 힘이 지나치므로, 먼저 이 자를 해석하고 뒤에 덕 자를 해석한다면 성인의 자연의 공효(功效)에 맞는다.” 하였으니, 이와 같이 집착하는 곳을 다 기록할 수 없으나, 항상 강당(講堂)에 앉아서 서로 시비를 다투어 혹은 노기가 얼굴에까지 나타나는 일이 있었으니, 비록 이치에 통달한 이라도 그 무리들의 세력을 꺾을 수가 없었다.
○ 지금 문벌(門閥)이 번성하기로는 광주 이씨(廣州李氏)가 으뜸이고, 그 다음으로는 우리 성씨(成氏)만한 집안도 없다. 광주 이씨는 둔촌(遁村) 이후로 점점 커졌으니 둔촌의 아들 지직(之直)은 참의(參議)였고, 참의는 아들이 셋인데 장손(長孫)은 사인(舍人)이었고, 인손(仁孫)은 우의정(右議政)이었고, 예손(禮孫)은 관찰사(觀察使)였으며, 사인의 아들인 극규(克圭)는 지금 판결사(判決事)로 있다. 우의정에게도 다섯 아들이 있었는데, 극배(克培)는 영의정(領議政) 광릉부원군(廣陵府院君), 극감(克堪)은 형조 판서(刑曹判書) 광성군(廣城君), 극증(克增)은 광천군(廣川君), 극돈(克墩)은 이조 판서(吏曹判書) 광원군, 극균(克均)은 지중추(知中樞)였으니, 모두 일품(一品)에 올랐는데, 이 네 아들은 공이 있어 군(君)으로 봉한 것이다. 광성군은 비록 일찍 죽었으나 그 아들 세좌(世佐)는 지금 광양군(廣陽君)이며, 문자(文字)ㆍ문손(文孫)도 높은 반열에 서서 서로 잇따라 끊이지 않았다. 우리 성씨(成氏)는 창녕부원군(昌寧府院君) 이후로 점점 커졌다. 부원군에게는 세 아들이 있었는데, 맏아들 석인(石璘)은 좌정승인 창녕부원군이었고, 다음 석용(石瑢)은 유수(留守)였으며, 그 다음은 나의 증조인 예조 판서이다. 정승의 아들인 발도(發道)는 좌참찬이었고, 유수의 아들인 달생(達生)은 판중추였으며 개(槪)는 관찰사가 되었다. 증조께는 세 아들이 있었으니, 맏아들은 곧 나의 조부(祖父)인데 지중추부사였고, 다음인 유(柳)는 우참찬이었으며, 그 다음인 급(扱)은 첨지중추부사였다. 나의 선고께서도 3형제였는데, 아버지는 맏이로서 지중추부사였고, 다음은 우의정 창성부원군(昌城府院君)이었으며, 그 다음은 형조 참판이었다. 우리 형제도 셋인데, 큰형은 좌참찬이요, 다음형은 정언(正言)이며, 막내는 나다. 창성부원군의 아들은 참의인 율(慄)이었는데, 율 이후에는 부진하였고, 참판의 아들은 셋이었는데, 맏이인 숙(淑)은 동지중추부사이고, 다음인 준(俊)은 병조 판서이며, 그 다음 건(健)은 형조 판서요, 나 또한 예조 판서이니, 삼형제가 일시에 삼조(三曹)의 판서가 된 것은 고금에 드문 일이다.
○ 남대문 밖에서는 승지(承旨)가 끊이지 않고 많이 나왔는데 나의 조부인 공도공(恭度公)과 선친인 공혜공(恭惠公)과 숙부인 양정공(襄靖公)과 형님인 문안공(文安公)이며, 입성(笠城) 유공(柳公)과, 익성(益城) 홍공(洪公)과, 서평(西平) 한공(韓公)이 모두 승지였고, 근래에는 나와 한서천(韓西川)ㆍ신성지(愼成之)ㆍ강용휴(姜用休)가 모두 이 벼슬을 배수하였다.
○ 신라왕(新羅王)이 정월 15일에 천천정(天泉亭)에 거둥하였더니, 까마귀가 은(銀)으로 만든 함을 왕 앞에 물어다 놓았는데, 함 속에는 글이 쓰여 있되 단단히 봉해져 있었고, 그 겉면에 쓰이기를, “열어보면 두 사람이 죽고, 열지 않으면 한 사람이 죽는다.” 하였다. 왕이 이르기를, “두 사람의 목숨이 끊어지는 것보다는 한 사람의 목숨이 끊어지는 것이 낫다.” 하시자, 대신이 의논하기를, “그렇지 않사옵니다. 한 사람이란 임금을 말하는 것이옵고, 두 사람이란 신하를 말하는 것이옵니다.” 하여, 드디어 열어 보았더니, 그 속에는 “궁중의 거문고 갑(匣)을 쏘라.”고 쓰여 있었다. 왕이 말을 달려 궁으로 들어가 거문고 갑을 보고 활을 힘껏 당겨서 쏘니, 갑 속에 사람이 있었다. 이는 바로 내원(內院)의 번수승(樊脩僧)이 왕비(王妃)와 사통하여 왕을 죽이려고 그 시기를 미리 정하였던 것인데, 왕비는 중과 더불어 모두 죽음을 당하였다. 왕은 까마귀의 은혜를 생각하여 해마다 이날에는 향반(香飯)을 만들어 까마귀를 먹였는데, 지금까지도 이를 지켜 명절의 아름다운 음식으로 삼고 있다. 그 만드는 법은 찹쌀을 쪄서 밥을 짓고, 곶감ㆍ마른 밤ㆍ대추ㆍ마른 고사리ㆍ오족용(烏足茸)을 가늘게 썰어서 맑은 꿀과 맑은 장(醬)을 섞어 다시 찐 다음 다시 잣과 호도 열매를 넣어 만드는데, 그 맛이 매우 좋아 이를 약밥[藥飯]이라 한다. 속언에는, “약밥은 까마귀가 일어나기 전에 먹어야 한다.” 하였으니 대체로 천천정(天泉亭)의 고사(故事)에서 연유한 것이다.
○ 한 해의 명절에 거행하는 일이 한 가지뿐이 아니나, 섣달 그믐날에 어린애 수십 명을 모아 진자(侲子)로 삼아 붉은 옷에 붉은 두건을 씌워 궁중(宮中)으로 들여보내면 관상감(觀象監)이 북과 피리를 갖추어 소리를 내고 새벽이 되면 방상시(方相氏)가 쫓아낸다. 민간에서도 또한 이 일을 모방하되 진자는 없으나 녹색 죽엽(竹葉)ㆍ붉은 형지(荊枝)ㆍ익모초(益母草) 줄기ㆍ도동지(桃東枝)를 한데 합하여 빗자루를 만들어 대문[欞戶]를 막 두드리고, 북과 방울을 울리면서 문 밖으로 몰아내는 흉내를 내는데, 이를 방매귀(放枚鬼)라 한다. 이른 새벽에는 그림을 대문간과 창문에 붙이는데, 그림에는 처용각귀종구(處容角鬼鍾馗)ㆍ복두관인(僕頭官人 급제하여 홍패(紅牌)를 받을 때 쓰던 관)ㆍ개주장군(介冑將軍)ㆍ경진보부인(擎珍寶婦人) 그림ㆍ닭 그림과 호랑이 그림 따위였다. 섣달 그믐날 서로 인사하는 것을 과세(過歲)라 하고, 정월 초하룻날 서로 인사하는 것을 세배(歲拜)라 하는데, 정월 초하룻날에는 모두 일을 하지 않으며, 모여서 다투어 효로(梟盧) 놀이를 하면서 술을 마시고 즐겨 논다. 새해의 자(子)ㆍ오(午)ㆍ진(辰)ㆍ해(亥) 일에도 이렇게 하였고, 또 어린이들은 다북쑥[蒿]을 모아서 동산에서 불을 지르는데 해일은 훈가훼(薰猳喙)라 하고, 자일은훈서(薰鼠)라 한다. 모든 관청은 3일에 한하여 출사하지 아니하고, 서로 친척이나 동료들 집으로 가서 명함을 던졌는데, 대가집에서는 미리 함(函)을 만들어서 이를 받았다. 근년 이래로 이 풍습이 갑자기 고쳐졌으니, 또한 세상이 변천했음을 알 수 있다. 이달 보름날은 원석(元夕)이므로 약밥을 만들고, 2월 초하룻날은 화조(花朝)라 하여 이른 새벽에 솔잎을 문간에 뿌리는데, 속언으로는, “그 냄새나는 빈대가 미워서 솔잎으로 찔러 사(邪)를 없앤다.” 한다. 3월 3일을 상사(上巳)라 하는데 속언으로는 답청절(踏靑節)이라 한다. 이날에는 사람들이 모두 교외의 들로 나가 놀았는데, 꽃이 있으면 꽃술을 지져서 술을 마시고, 또 새로 난 쑥으로 설고(雪糕)를 만들어 먹는다. 4월 8일을 연등(煙燈)이라 하는데 세상에 전하는 말로는 이날이 석가여래(釋迦如來)가 탄생한 날이라 한다. 봄에는 아이들이 종이를 오려서 기(旗)를 만들고 물고기 껍질을 벗겨 북을 만들어 떼를 지어서 길거리를 돌아다니며 등불 켜는 기구를 구걸하는데, 이를 호기(呼旗)라 한다. 이날이 되면 집집마다 장대를 세워 등불을 걸었으며, 부호들은 크게 채색한 등대(燈台)를 세웠는데, 층층이 달린 그 많은 등불은 마치 하늘에 별이 펼쳐진 것과 같아서 도인(都人)들은 밤새도록 구경하였고, 무뢰한 젊은이들은 이것을 건드리는 것을 낙으로 삼았는데, 지금은 불교를 숭상치 않으므로 혹 연등놀이를 한다 해도 옛날에 번성하던 것과는 같지 않다. 5월 5일은 단오(端午)라 하여 애호(艾虎)를 문에다 걸고 창포(菖蒲)를 술에 띄우며, 아이들은 쑥으로 머리를 감고 창포로 띠를 하며, 또 창포 뿌리를 뽑아 수염처럼 붙였다. 도인(都人)들은 길거리에 큰나무를 세워 그네놀이를 하였고, 계집아이들은 모두 아름다운 옷으로 단장하고 길거리에서 떠들썩하게 채색한 줄을 잡고 서로 다투며, 젊은이들은 몰려와서 이것을 밀고 끌고 하여 음란(淫亂)한 장난이 그치지 않았는데, 조정에서 이것을 금하여 지금은 성행하지 않게 되었다. 6월 15일은 유두(流頭) 날인데 옛날 고려의 환관(宦官)들이 동천(東川)에서 더위를 피하여 머리를 풀고는 물에 떴다가 잠겼다가 하면서 술을 마셨음으로 유두라 하였다. 세속에서는 이로 인하여 이날을 명절로 삼고 수단병(水團餠)을 만들어 먹었으니, 대개 회화나무 잎 가루를 냉수에 일어 먹던 유속인 것이다. 7월 15일은 속칭 백종(百種)이라 하여 승가(僧家)에서 1백 가지 꽃 열매를 모아 우란분(盂蘭盆)을 베풀었는데, 서울에 있는 여승(女僧)의 암자(庵子)에서 더욱 심하였으므로 부녀자들이 많이 모여들어 곡식을 바치고는 돌아가신 어버이의 영혼을 불러 제사지냈다. 왕왕 중들이 탁자(卓子)를 설치하고 제사를 지냈는데 지금은 엄금하여 그 풍속이 없어지게 되었다. 중추(中秋)의 달구경, 중양절의 높은 데 오르기, 동지(冬至)의 팥죽, 경신일(庚申日)의 밤새우기 등 모두가 옛날의 유속이다.
○ 임금의 명을 받들고 사신(使臣)으로 가는 사람이 있으면 동료들이 모두 맞이하여 술자리를 베풀었고, 또 떠나는 날에는 모두 교외로 나가서 전송하였는데, 비록 훈귀(勳貴)한 대신이라도 속태를 면치 못하였다. 오직 홍익성(洪益城)만이 임금의 명을 받들고 궁궐에 나아갔을 뿐이었고, 다른 곳에는 인사를 가지 않았으며, 또 일찍이 마중이나 전송도 하지 않았다. 심지어 서울로 오는 사신이나 각 도의 감사가 떠나는 날도 다만 녹사(錄事)를 보내어 한 병의 술을 가지고 가서 전송하게 하였으니, 당시 사람들이 그야말로 재상의 체모를 얻었다 하였다. 홍인산(洪仁山)은 과거에 급제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세조(世祖)의 정란(靖難)을 도와 성상의 총애를 입어 상사(賞賜)를 많이 받았다. 또한 재물을 모으는 데에 힘써서 돈꾸러미를 모아 둔 것이 거만(鉅萬)이나 되었으며 곡식은 그 배(倍)나 되었다. 향노(鄕奴)로서 물화(物貨)를 가져와서 바치는 자가 그치지 아니하며, 짐을 실은 수레가 문 밖에 가득 차고 늘어선 사람들이 거의 만 명이나 되었다. 대궐 같은 집을 지었는데, 못가에다 당(堂)을 지으니, 세조(世祖)께서 ‘경해(傾海)’라는 두 글자를 써 주셨다. 이름 있는 유생과 큰 선비들을 초청하여 연회를 베풀지 않는 날이 없었으니, 음식이 넉넉하여 비록 하증(何曾)의 만금(萬金)의 음식이라도 이보다 더하지는 않을 것이다. 관현악(管絃樂) 소리가 맑게 울려 밤낮으로 그치지 않으니, 좌객(坐客)들이 그 위엄에 눌려 만취(滿醉)하지 않을 수 없어 말을 거꾸로 타고 집으로 돌아 갈지경이었고, 기생들의 전두(纏頭)에 쓰이는 돈도 또한 헤아릴 수 없었다. 부귀를 누린지 20여 년에 명성과 권세는 더욱 빛났다. 일찍이 길가에서 상기(象棋 장기) 두는 사람을 보고는, “백성이 생업을 일삼지 아니하고 다만 세월만 허비하니 벌하지 않을 수 없다.” 하고는, 드디어 그 사람으로 하여금 개똥을 먹게 하니, 그 사람이 씹어 먹자 또 그 상자(象子 장기알)를 먹게 하였다. 그러나 그 사람이 깨물어 먹으려고 하여도 먹지 못하자 공(公)은 마침내 이를 용서해 주었다. 그 뒤 공은 상기의 이치를 조금 깨닫고는, “노년의 심심풀이로는 이 놀이만한 것이 없다.” 하고 늘 상기 두는 중을 맞아 그와 더불어 대국하였다. 내가 어렸을 때 보니 진일(眞逸) 선생이 노선성(盧宣城)ㆍ최세원(崔世遠)과 더불어 과장(科場)이 급박하자 겨울밤 산방(山房)에서 책을 읽었는데, 문득 등불이 꺼졌다. 화로 속에는 재만 차 있고 불은 없었으며, 이때에는 달도 없고, 더욱이 눈이 쌓여 정강이가 묻힐 정도였다. 그러나 선생께서는 5리 밖의 촌가까지 걸어가서 불을 구해왔으니, 그 돈독한 의지가 이와 같았다. 또 점치기를 잘하여 항상 말하기를, “자반(子胖)은 지위가 인신(人臣)으로서 가장 높은 곳에 오를 것이고, 최세원도 또한 조단(朝端)에 유명할 것이나, 나는 비록 고생스럽게 공부를 하지마는 목숨이 길지 못할 것이다.” 하였다. 선생이 병상에 눕자 대부인(大夫人)이 눈물을 흘리면서 문병을 하니, 선생은 말하기를, “나는 어머니의 아들이 아니며, 우리 형제는 나중에 모두 재상이 될 것인데, 이들이 어머니께 효도하는 자식이 될 것입니다.” 하더니, 그 뒤에 다 그의 말과 같이 되었다. 최세원은 경서와 사적을 많이 읽었고, 담론을 잘하였다. 심심원(沈深源)과 더불어 개울을 사이에 두고 살았는데, 심의 집에서는 매양 이웃 친구들을 맞이하여 주연을 베풀었고, 항상 장기와 바둑을 일삼았다. 심원이 하루는 친구와 더불어 창기 집에서 술을 마시고 돌아오니, 그 부인이 크게 노하여 다투기를 그치지 않고는 말을 빼앗아 나가지 못하게 하며, 또 문을 닫고 들어오지 못하게 하여 이웃 친구인 윤사걸(尹士傑) 등은 개울가에서 나란히 앉아 건너오지 못하였다. 세원은 산보하다가 이를 보고 큰 소리로 말하기를, “저 편에 변(變)이 있어서 너희들이 강을 건너지 못할 뿐이겠지.” 하였는데, 대개 이 말은 양쪽의 일을빗대어 말하였던 것이다.
○ 최세원이 일찍이 말하기를, “내가 김관(金瓘)과 함께 반궁(泮宮)에 있을 때, 김관은 명성이 자못 높아 동료들이 추장(推獎)하였다. 나 역시 태산같이 우러러보아 그의 뒷자리를 따랐으나 사마시(司馬試)의 방(榜)을 창(唱)하는 날에는 내가 그의 앞열(列)에 서서 윗자리를 배수(拜受)하였고, 김관은 내 뒷열에 서서 나의 다음 자리를 배수하였으니, 참으로 우스운 일이었다.” 하였다. 또 말하기를, “전강(殿講)하는 날에는 옷섶을 정제(整齊)하고 용수석(龍繡席) 위에 앉으니, 시관(試官)이 경(經)의 뜻을 묻기를 마치 도적을 찾아내는 것같이 하였다. 내가 좌우(左右)로 대답하기를 마치 교만한 말[馬]이 다른 말을 무는 것같이 하여 드디어 제1이 되었다.” 하였다. 방을 내어걸고 나서는 유가(遊街)하면서 장통방(長通坊)으로부터 내려오는데, 쌍일산(雙日傘)은 발[簾]을 번쩍이는 것 같았고, 우부(優夫 벼슬아치 집에서 부리는 하인)가 춤을 추기를 나는 참새같이 하였다. 나는 검붉은 말을 타고는 고삐를 잡고 뛰어 초요경(楚腰輕 기생(妓生) 이름)의 집 앞에 이르러 우부에게 말하기를, “잠깐 들을 말이 있으니, 너가 소리를 높여 불러라.” 하였더니, 우부는 어허랑(御許郞)을 부르는데 그 소리가 하늘을 덮을 지경이라, 초요경이 그 소리를 듣고는 검은 머리를 되는 대로 꽂고 동백기름이 흐르는 초록색 겹옷을 입은 채, 붉은 소매를 걷어올리고 문에 기대어 내다보므로, 내가 앞에 있는 나졸(羅卒)에게 명하기를, “네가 항상 교만하여 내 말을 듣지 않더니, 오늘 일은 과연 어찌된 일인가. 내가 예조 좌랑(禮曹佐郞)이 되면 너는 나의 종아리채를 감당해 내겠느냐.” 하게 하였더니 초요경이 화가 나서 입술을 삐죽거리고 종종걸음으로 들어가면서, “이제야 볼기 위에 먼지를 털게 되었구나.” 하였다. 또 말하기를, “내가 과거에 급제하면 모름지기 밀양 부사(密陽府使)가 되어 만리장성(萬里長城)과 같은 허리에 풍모란난발(風牧丹亂髮)의 은대(銀帶)를 띠고, 청천(淸川) 가에서 흰 구름 같은 장막(帳幕)을 석양(夕陽)에 높이 둘러치고는, 흑룡(黑龍)의 알[卵]과 같은 의자에 걸터앉아 팔을 들어 지휘하는 것이 나의 소원이다.” 하니, 큰 형이 시(詩)를 지어 말하기를,
하였다.
○ 내가 사는 서산(西山) 남쪽에는 여승(女僧)의 암자가 있는데, 갑술(甲戌)년 7월 16일에 암자에서 우란분회(盂蘭盆會)를 베풀어 선비집 부녀자들이 많이 모였었다. 여자들이 뒷 소나무 언덕에 올라가 더위를 피하는데, 소나무 사이에 버섯이 많이 났는데 향기롭고 고와서 먹음직하였다. 여자들이 탐내어 삶아 먹더니, 많이 먹은 이는 엎어져 기절해 버렸고, 조금 먹은 이는 미쳐서 소리를 지르고, 혹은 노래하면서 춤을 추었으며, 혹은 슬피 울고 혹은 노하여 서로 때리기도 하였는데, 국물을 마셨거나 냄새를 맡은 이는 다만 어질어질 하였을 뿐이었다. 자녀들이 듣고는 머리를 풀어헤치고 달려와 모였는데, 암자에는 다 들어갈 수 없어 혹은 산기슭에서 혹은 밭가운데서 각각 병자를 구제하니, 길가의 구경꾼이 저자와 같았다. 주문을 잘 외우는 사람이 있으면 다투어 맞이해서 배[腹]에다 주문을 읽었고, 또 은사발에 불결한 것을 담아 옥수(玉手)로 물에 반죽하여 푸닥거리하여 버리니, 상하ㆍ귀천이 한데 섞여 분변할 수 없었다. 오정(午正)이 지나자 비로소 깨어나기는 하였으나, 이 때문에 병이 든 사람도 혹 있었다.
○ 비해당(匪懈堂 안평대군(安平大君))은 왕자로서 학문을 좋아하고 시문을 잘하였으며, 서법이 기절(奇絶)하여 천하 제일이었다. 또 그림 그리기와 거문고 타는 재주도 훌륭하였다. 성격이 부탄(浮誕)하여 옛것을 좋아하고 경승(景勝)을 즐겨 북문(北門) 밖에다 무이정사(武夷情舍)를 지었으며, 또 남호(南湖)에 임하여 담담정(淡淡亭)을 지어 만 권의 책을 모아두었다. 문사(文士)를 불러모아 12경시(景詩)를 지었으며, 또 48영(詠)을 지어 혹은 등불 밑에서 이야기 하고 혹은 달밤에 배를 띄웠으며, 혹은 연구(聯句)를 짓고 혹은 바둑 장기를 두고 풍류가 끊이지 않았으며, 항상 술마시고 놀았다. 당시의 이름있는 선비로서 교분을 맺지 않은 이가 없었고, 무뢰하고 잡업(雜業)을 하는 이도 많이 모여들었다. 바둑판과 바둑알은 모두 옥(玉)으로 만들었고, 또 금니(金泥)를 글자에 입히고 사람에게 명주와 생초를 짜게 하여, 곧 붓 가는 대로 글씨를 쓰다가 진초(眞草)와 난행(亂行)을 구하는 사람이 있으면 모두 내주는 일이 많았다. 나의 중씨(仲氏)인 성간(成侃)이 유명하다는 소문을 듣고 사람을 시켜 부르므로, 중씨가 가서 뵙고는 정자 가운데 있는 여러 시에 화답하니 시구가 뛰어나고 절묘하여 안평대군(安平大君)은 드디어 공경히 대접해 보내면서 뒷날 다시 만나기를 기약하였다. 그런데 대부인께서 중씨에게 일러 말하기를, “왕자의 도(道)는 문을 닫아 손을 멀리하고 근신하는 길밖에 없는 것인데, 어찌 사람을 모아 벗을 삼느냐. 패할 것이 뻔하니 너는 같이 사귀지 말아라.” 하시므로, 그 뒤에 재삼 불렀으나 끝내 가지 않았더니, 얼마 안 가서 패사(敗死)하였다. 온 집안은 모두 대부인의 문장과 감식(鑑識)에 탄복하였다.
○ 유방효(柳方孝)는 태재(泰齋) 선생의 동생인데, 심준(沈濬)ㆍ윤복(尹福)과 더불어 남대문 밖에서 살았다. 아비의 허물로 말미암아 벼슬길에 나아가지 못하였으나 집안이 모두 넉넉하여 소리하는 기생까지 집에다 두고 매양 손을 맞아 술을 많이 마시니, 이웃에서 이를 삼로(三老)라 하였다. 혁혁한 재명(才名)은 없었으나 주색(酒色)을 스스로 즐기니, 또한 한때의 호걸이었다. 방효는 음률을 조금 알아 항상 조정의 명사들을 맞이하여 주연을 베풀었고 술과 안주가 풍성하였다. 날마다 그리하여도 가재(家財)가 군색하지 않았으며, 만년에는 벼슬이 사품(四品)에 이르렀다. 참판 김서(金鉏)의 자는 자고(子固)인데, 평양 부원군(平壤府院君) 조준(趙浚)인 문충공(文忠公)의 외손이었다. 명문에서 태어나 젊어서는 방랑하여 검속을 받지 않았으나 학문을 좋아하여 글을 잘 지었고, 또 행서와 초서를 잘하였으며, 거문고의 운치도 절묘하였다. 여러 번 장원급제하여 나이는 비록 젊었으나 사귀는 사람은 모두 당대의 거경(鉅卿)이었다. 술자리 베풀기를 좋아하였고 술 마시는 기구나 모든 일용품이 모두 극히 호사스럽고 문아(文雅)는 한때에 떨쳤다. 남강(南江)에 서재(書齋)를 짓고 또 성균관 북쪽 골에 쌍계당(雙溪堂)을 지어 매양 봄에는 친구를 맞아 시를 짓고 술을 마시면서 자적(自適)하여 사람들이 삼절(三絶)이라 지목하였는데, 시(詩)ㆍ서(書)ㆍ거문고를 잘하였다. 위비(痿痺 중풍)를 앓아 기거하지 못하였으나 담론하고 술 마시며 읊조리는 것은 조금도 다름이 없었고, 언제나 만든 가마를 타고 산에 올라 꿩을 사냥하였으며, 만약 친구 집에 이르면 가마를 멈추고 함께 앉아 이야기하니, 채기지(蔡耆之)가 일찍이 희롱하여 말하기를, “매 새끼는 살이 쪘으나 앉아 있는 자고(子固)는 편하지 않으니 취할 것이 없도다.” 하였다. 기지의 집 대문이 자고의 문과 서로 마주보고 있어 손이 올 때마다 술상을 차려 반드시 부르니, 기지는 웃으면서 말하기를, “내가 네 고을의 교관(敎官)이냐.” 하였다.
○ 음식과 남녀는 사람들의 큰 욕망인데도 지금 색(色)을 모르는 사람이 셋 있다. 제안(齊安)은 무한히 아름다운 아내를 두었으되 항상 말하기를, “부녀자는 더러워서 가까이하지 말아야 한다.” 하여, 마침내 부인과 마주앉지 않았고, 생원(生員) 한경기(韓景琦)는 상당부원군(上黨府院君)의 손자인데, 마음을 닦고 성품을 다스린다는 구실로서 문을 닫고 홀로 앉아 일찍이 그 아내와 서로 말한 일이 없었으며, 만약 종년의 소리라도 들리면 막대기를 들고 내쫓았다. 김자고(金子固)에게는 외아들이 있었는데 어리석어서 콩과 보리를 분변하지 못하였고, 또한 음양의 일을 알지 못하므로 자고는 그 후사가 끊어질 것을 염려하여 그 일을 아는 여자를 단장시켜 함께 자게 하고 운우(雲雨 남녀의 교정(交情))을 가르치려 하니, 그 아들은 놀라 상 밑으로 도망쳐 들어갔다. 그 뒤에는 붉게 단장하고 족두리한 여자만 보면 울면서 달아났다.
○ 성묘(成廟)께서는 학문이 깊고 문사(文詞)에 고색(古色)이 있어서 문사(文士)에게 명하여 《동문선(東文選)》ㆍ《여지요람(輿地要覽)》ㆍ《동국통감(東國通鑑)》을 편찬하게 하였고, 또 교서관(校書館)에 명하여 인행하지 않는 책이 없었으니, 《사기(史記)》ㆍ《좌전(左傳)》ㆍ《사전춘추(四傳春秋)》ㆍ《전후한서(前後漢書)》ㆍ《진서(晉書)》ㆍ《당서(唐書)》ㆍ《송사(宋史)》ㆍ《원사(元史)》ㆍ《강목(鋼目)》ㆍ《통감(通鑑)》ㆍ《동국통감》ㆍ《대학연의(大學衍義)》ㆍ《고문선(古文選)》ㆍ《문한유선(文翰類選)》ㆍ《사문유취(事文類聚》ㆍ《구소문집(毆蘇文集)》ㆍ《서경강의(書經講義)》ㆍ《천원발미(天元發微》ㆍ《주자성서(朱子成書)》ㆍ《자경편(自警編》ㆍ《두시(杜詩)》ㆍ《왕형공집(王荊公集)》ㆍ《진간재집(陳簡齋集)》과 같은 것은 내가 기억하는 것이며, 그 밖에 인행된 서적도 또한 많았고, 또 서강중(俆剛中)의 《사가집(四佳集》ㆍ김문량(金文良)의《시우집(拭疣集)》ㆍ강경순(姜景醇)의 《사숙재집(私淑齋集)》ㆍ신범옹(申泛翁)의《보한재집(保閑齋集)》을 모았는데, 오직 이윤보(李胤保)와 우리 문안공(文安公)의 시문만 잃어버려서 인간(印刊)하지 못한 것이 한스러운 일이다.
○ 내가 저술한 것으로는 《시집》15권, 《문집》15권, 《보집(補集)》5권,《풍아록(風雅錄)》2권, 《주의(奏議)》6권, 《부휴자담론(浮休子談論)》6권, 《용재총화(慵齋叢話)》10권,《금낭행적(錦囊行跡)》30권이고, 편찬한 것은 《풍소궤범(風騷軌範)》30권, 《악학궤범(樂學軌範)》6권, 《상유비람(桑楡備覽)》40권인데, 비록 남의 이목(耳目)에 알려지지는 않았으나 지난 일을 상고하고 심심풀이로 보기에는 족하다.
○ 능실(陵室) 옆에 재사(齋社)가 있는 것은 옛날부터 그러하였는데, 건원릉(建元陵)ㆍ현릉(顯陵)에는 개경사(開慶寺)가 있었고, 제릉(齊陵)에는 연경사(衍慶寺)가 있었으며, 후릉(厚陵)에는 흥교사(興敎寺)가 있었고, 광릉(光陵)에는 봉선사(奉先寺)가 있었으며, 경릉(敬陵)ㆍ창릉(昌陵)에는 정인사(正因寺)가 있었다. 영릉(英陵)을 여주(驪州)로 옮겨 신륵사(神勒寺)를 보은사(報恩寺)로 고쳐 재사(齋社)로 삼았는데, 헌릉(獻陵)만이 사(社)가 없는 것은 태종(太宗)의 유명(遺命)으로 그렇게 된 것이다. 사대부도 또한 무덤 옆에 재암(齋庵)을 지었는데, 이는 불교를 숭상해서가 아니라 승도(僧徒)로 하여금 묘산(墓山)을 지키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 장악원(掌樂院)은 음률을 아는 사람을 관원으로 삼았는데, 박연(朴堧)ㆍ정심(鄭沈)은 모두 낭료(郞僚)로부터 마침내 제조(提調)에 이르렀다. 당시에 박씨(朴氏) 성을 가진 벼슬아치가 있었는데, 나이가 많아 실직하였으므로 《율려신서(律呂新書)》를 대강 배워 상소를 올려 악관(樂官)이 되기를 구하였더니, 조정에서는 잘 모르고 이를 기용하여 드디어 주부(主簿)를 겸하게 하였다가 다시 첨정(僉正)으로 높여 쓰니, 매양 사람들을 대하면 5음 12율(律)의 껍데기만 논하였다. 사람들은 모두 풍류를 아는 줄만 알았으나 실상은 한 가지도 제대로 아는 것이 없었으므로, 이 사람을 아는 어떤 사람이시를 지어 기롱하기를,
하였다.
○ 세조조(世祖朝)에서 전경법(轉經法)을 행하니, 이는 고려(高麗)의 옛 풍습이다. 그 법은 번개(幡蓋 화려한 양산[日傘])를 앞세우고 누런 뚜껑이 있는 여(輿)에 황금으로 만든 작은 불상(佛像)을 안치한 다음, 앞뒤에는 악인(樂人)이 주악(奏樂)하면서 양종(兩宗)의 중 수백 명이 좌우로 나누어서 따르고, 각각 명향(名香)을 받들어 경(經)을 외우며, 소승(小僧)은 수레에 올라 북을 치는데 경을 외우는 것이 그치면 음악을 하고 음악이 그치면 경을 외운다. 부처를 받들고 궁궐에서 나오면 임금께서 광화문까지 배웅하시고, 해가 지도록 시가(市街)를 순행하여 혹은 모화관(慕華館)ㆍ태평관(太平館)에서 낮 공양(供養)을 받들어 각 관청의 관리들이 분주히 물건을 바쳤는데, 오직 견책(譴責)을 받을까 두려워하여 육법공양(六法供養)을 베풀었고, 피리소리ㆍ북소리ㆍ염불소리가 하늘을 진동하니, 유가(儒家)의 부녀자들이 물밀듯 모여들어 구경하였다. 예조 좌랑 김구영(金九英)은 나이가 많고 몸도 뚱뚱한데다가 종종걸음으로 걸어가니 땀이 물흐르듯 하고 먼지가 얼굴에 가득히 앉아 구경하는 이가 모두 웃었다.
○ 성묘(成廟)께서는 독실하게 학문에 뜻을 두시어 3시(時)로 강서(講書)하시고 밤에는 옥당에 입직(入直)하는 선비를 불러 함께 강론하시며, 강론이 끝나면 술을 내려 조용히 고금의 치란(治亂)과 민간의 이(利)ㆍ폐(弊)를 물으셨는데, 편복(便服)으로 서로 대하고 각중(閣中)에는 다만 촛불 하나만을 켰을 따름이었다. 혹시 밤 늦게 만취되어 나오면 어전(御前)의 촛대를 내려 주시고 원(院)으로 돌려 보내셨으니, 이는 김연거(金蓮炬)가 끼친 풍속이다.
성묘께서는 문소전(文昭殿)이 오래되어 허물어졌다 하시며 드디어 개수(改修)하게 하시고, 5분의 신주(神主)를 옛 동궁(東宮)인 자선당(資善堂)으로 이안(移安)하실 때 친히 거둥하시서 제사를 지냈으며, 또 개수가 끝난 다음 다시 환안(還安)하실 때에도 또한 이와 같이 하시고는 드디어 용봉대막(龍鳳大幕)을 후원(後苑)에다 치시고 크게 풍류와 잔치를 베풀었으며, 안마(鞍馬)ㆍ채단(彩段)ㆍ사라(紗羅)ㆍ포백(布帛)ㆍ호숙(胡椒)ㆍ궁시(弓矢) 등의 물건을 하사하셨으되, 그 공의 높고 낮은 데 따라 각각 차등이 있게 하시니, 대개 수보감역(修補監役)ㆍ제조낭청(提調郞廳)ㆍ승지(承旨)ㆍ배제집사관(陪祭執事官)ㆍ시위재추제장(侍衛宰樞諸將)ㆍ담여환관(擔輿宦官)ㆍ충의위(忠義衛)ㆍ전악(典樂)ㆍ반감(飯監)등이 모두 이에 참여하였다. 내수(內豎)들이 명을 받들어 여러 번 나와서 술을 권하여 사람들이 모두 취하여 나왔다. 내가 그때 예조 판서가 되어 친히 그 일을 당하였는데, 모두가 한때의 성사(盛事)였다. 지금 와서 생각하니, 여러 위의 신주를 모시고 옛 동궁에서 문소전(文昭殿)까지 왔다가 얼마 안 되어 돌아가셔서 옛 동궁(東宮)을 혼전(魂殿)으로 삼고 상담(祥禫) 후에 문소전에 부(附)하였으니, 그 징조가 이미 나타난 것인가 싶다.
○ 궁중에서 왕자가 탄생하면 권초의 예[捲草之禮]라는 것이 있는데, 탄생한 날 다북쑥으로 꼬은 새끼를 문짝 위에 걸고, 자식이 많고 재화가 없는 대신에게 명하여 3일 동안 소격전(昭格殿)에서 재(齋)를 올리고 초제(醮祭)를 베풀게 하는데, 상의원(尙衣院)에서는 5색 채단을 각각 한 필씩 바쳤고, 남자면 복건[幞頭]ㆍ도포ㆍ홀(笏)ㆍ오화(烏靴)ㆍ금대(金帶)요, 여자면 비녀ㆍ배자(背子 덧옷)ㆍ혜구(鞋屨) 등의 물건을 노군(老君) 앞에 진열하여 장래의 복(福)을 빌었다. 밤중에 제사가 끝나면 헌관이 길복(吉服)을 입고 사람을 시켜 포단(布段)과 관복(冠服)을 메게 하여 앞세우고, 궐내에 가서 방문 밖에 이르러 탁상에다 진열하고는 향불을 피우고 재배하면 내인(內人)이 받아들여 갔으며, 현관은 다북쑥 새끼를 걷어 푸대 속에 넣어 이것을 옻칠한 함에 넣고는 붉은 보자기에 싸서 문 밖으로 나가 조심스럽게 그 함을 봉한 다음, 내자시(內資寺)의 정(正)에게 주면 정하게 이를 받들고 가서 그 사(司)의 창고에 넣어 두는데, 만약 여자면 내섬시(內贍寺)에서 이를 주관하였다. 갑인(1494)년 봄에 원자(元子)가 탄생하실 때 내가헌관이 되어 행사를 맡았다. 대개 소격서(昭格署)는 중국 도가(道家)의 행사를 모방하여 태일전(太一殿)에서 칠성(七星)과 제숙(諸宿)을 제사지내는데, 그 상(像)은 모두 머리를 풀어헤친 여자 모양이었다. 삼청전(三淸殿)에서는 옥황상제(玉皇上帝)ㆍ태상노군(太上老君)ㆍ보화천존(普化天尊)ㆍ재동제군(梓潼帝君) 등 10여 위를 제사지내었는데 모두 남자의 형상이었다. 그 외에 안팎의 여러 단(壇)에는 사해용왕(四海龍王)과 신장(神將)과 명부시왕(冥府十王)과 수부(水府)의 여러 신을 모셔 위패에 이름을 쓴 것이 무려 수백이었다. 헌관과 서원(署員)은 모두 흰옷에 검은 두건으로 재를 올렸고, 또 관(冠)을 쓰고 홀(笏)을 들고 예복을 입고 제사를 지냈으되 제전(祭奠)은 과실ㆍ인절미ㆍ차(茶)ㆍ과자ㆍ술이며 분향백배(焚香百拜)한다. 도사류(道士流)는 머리에 소요관(逍遙冠)을 쓰고 몸에는 얼룩얼룩한 검은 옷을 입으며, 경쇠[磬]를 24통(通) 울리고 난 뒤에, 두 사람이 도경(道經)을 읽고 또 축사(祝辭)를 푸른 종이에 써서 태우는데, 그 하는 일이 어린애 장난과 같았지만 조정의 벼슬아치가 헛되이 발사(祓祀)를 받드니, 한 번 제사지내는 데 드는 비용이 너무도 많았다. 내가 시를 지어 말하기를,
하였다.
○ 중추(中樞) 민대생(閔大生)은 나이 90여 세였는데, 정월 초하룻날 조카들이 와서 뵙고는 그 중 한 사람이 말하기를, “원하건대 숙부께서는 백 년까지 향수(享壽)하소서.” 하니, 중추가 노하여 말하기를, “내 나이 90여 세인데 내가 만약 백 년을 산다면 다만 수 년 밖에 살지 못할 것이니, 무슨 입이 이렇게 복 없는 소리를 하느냐.” 하고는 드디어 내쫓았다. 또 한 사람이 나아가 말하기를, “원하건대, 숙부께서는 백 년을 향수하시고 또 백 년을 향수하옵소서.” 하였더니, 중추는 “이것은 참으로 송수(頌壽)하는 체모(體貌)로다.” 하고, 잘 먹여 보내었다.
○ 예조(禮曹)는 옛날 주관(周官) 종백(宗伯)의 직인데, 사제(祠祭)ㆍ연향(宴享)ㆍ사대(事大)ㆍ교린(交隣)의 모든 예문(禮文) 등을 맡아보아 그 임무가 실로 가볍지 않았다. 이조는 정사(政事)를 조정하고, 병조는 군기(軍機)를 맡으며, 호조는 재리(財利)를 주관하고, 형조는 징송(徵訟)을 맡으며, 공조는 백공(百工)의 역사(役事)를 관장하였으니, 오직 예조가 가장 아름답다 하겠다. 비록 큰 일을 만나면 몹시 바빠서 틈이 없으나 일이 끝나면 항상 한가로웠다. 일본(日本)ㆍ여진(女眞)의 사신을 접대할 때에는 당상관 세 사람이 모두 무늬 있는 예복을 입었고, 예빈시(禮賓寺)는 연회를 베풀었으며, 악관(樂官)들은 연주를 하였다. 각도의 감사(監司)ㆍ병사(兵使)와 연경(燕京)으로 가는 사신에게 내리는 연회도 이와 같이 하였는데, 공연(公演)을 마친 뒤에 여러 빈객을 거느리고 다시 낭청에서 종일 이야기하고 술 마시며 주악(奏樂)하는 소리가 연속되었으니, 사그락사그락하는 비단 옷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내가 일찍이 사은사로서 연경으로 가니, 예부 상서 주홍모(周洪謨)가 와서 회동관(會同館)에서 연회를 베풀었는데, 회회(回回)ㆍ라마(剌麻)ㆍ운남(雲南)ㆍ만면(蠻緬) 등 모든 나라 사람들이 상서 앞에 꿇어 앉아서 매매(賣買)할 일을 우러러 호소하면, 상서는 일일이 해설하되 받아들일 것은 받아들이고 물리칠 것은 물리치므로, 그때에 나는 공경하고 사모하기를 마지않았다. 내가 판서가 되었을 때, 왜와 여진이 매양 연회가 끝나면 다투어 앞에 나와 꿇어 앉아 각각 그 뜻을 진정하였는데, 이는 비록 크고 작은 것은 같지 않으나 그 규모에서는 매한가지라 하겠다.
○ 세종조(世宗朝)에 신상(申商)은 예조 판서가 되고, 허조(許稠)는 이조 판서가 되었는데, 신은 해가 중천에 떴을 때 집무하러 나가서 해가 기울면 돌아오고, 허는 이른 아침에 집무하러 나가서 해가 지고 난 뒤에 돌아왔었다. 하루는 허가 먼저 나가서 조(曹)에 앉았는데 신이 이조에 이르렀다가 얼마 안 되어 돌아갔다는 소리를 듣고 사람을 시켜 가서 고하기를, “어찌 늦게 출근하여 일찍 파하시오.” 하니, 신이 크게 웃으면서 말하기를, “대인은 일찍 출근한다 해도 무슨 이익되는 일이 있으며, 내가 비록 늦게 출근한다 하나 무슨 손해를 끼치는 일이 있습니까. 각각 자기의 수완에 달려 있을 따름입니다.” 하였다. 신은 때에 임하여 결단을 잘 하였고, 허는 부지런하되 각박하게 시행하니 성격이 같지 않은 것이다.
○ 최세원(崔勢遠)은 일찍이 말하기를, “내 친구 중에 강진산(姜晉山)ㆍ노선성(盧宣城)ㆍ성하산(成夏山)은 모두 음탕하고 못난 사람이로되, 오직 서평(西平) 한경신(韓敬愼)만은 절조가 있다 하여 나도 또한 당시의 성인(聖人)이라 말했더니, 이제 와서 보니 성인이 아니로다.” 하므로, 사람들이 그 연고를 묻자, 대답하기를, “하루는 새벽에 일어나 울타리 틈으로 가만히 들여다보니, 서평이 문 앞 추녀 끝에 앉아 있는데, 어린 종년이 세숫물을 올리니까, 서평이 세숫물을 움켜서 종년 얼굴에 뿌리면서 희롱하는데 이것이 어찌 성인의 소위이겠는가.” 하니, 사람들이 모두 절도(絶倒)하였다.
○ 진일(眞逸) 선생이 말하기를, “꿈에 제학(提學) 이백고(李伯高)를 만났는데 이백고는 용이 되고 나는 용을 붙잡고 날아서 강을 건널 때, 내가 떨어질까 걱정하니 용이 돌아보고는, ‘내 뿔을 꼭 잡아라.’ 하였다. 드디어 강언덕에 그쳐서 보니, 초목과 인물이 모두 인간 세상의 것이 아니었기로 꿈을 깨어 백씨께 말하였더니, 백씨가 말하기를, ‘백고는 당시의 큰 덕망이 있는데다가 일찍이 중시(重試)에 뽑혔는데, 그대가 그 뿔을 잡았다 하니 반드시 중시에 장원으로 뽑힐 것이다.’ 하였다.” 하더니, 얼마 안 가서 백고는 주살당하였고 진일도 또 병이 들었는데, 병중에 시를 지어 백씨에게 대신 쓰게 하니 그 시에,
하니, 백씨가 말하기를, “이 시가 크게 생기(生氣)가 있으니 그대는 마땅히 병이 나으리라.” 하였으나, 그 이튿날 죽었다. 이는 모두 흉한 징조요, 아름다운 징조가 아니었다.
○ 나는 예조 판서로서 장악원의 제조(提調)가 되었는데, 손에게 베푸는 연향과 사신에게 내리는 연향과 악공을 선발할 때에 음악을 듣지 않는 날이 없었고, 또 태평관(太平館)에 왕래할 때에도 동리의 사면이 모두 악인(樂人)과 기녀의 집이었다. 숭례문 밖의 민보(敏甫)ㆍ여회(如晦)의 두 집 비복(婢僕)들이 모두 선수(善手)임으로 내가 일찍이 지나다가 들어가서 들었고, 또 대가(大家)집 옆에 홍인산(洪仁山)ㆍ안좌윤(安左尹)의 두 큰 집이 있는데, 또한 비복들에게 음악을 가르쳐서 그 소리가 청아하고 밤이 깊도록 그치지 아니하여 매양 누워서 이것을 듣는 것이 또한 즐거움이었다. 내가 일찍이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빈한한 선비가 부지런히 독서하지만 명성을 차지하지 못하고 죽는 사람이 많거늘, 나는 나이가 어려서 급제하여 벼슬이 육경(六卿)에 이르고, 밤낮으로 노래 부르는 가운데 있으니 어찌 홀로 태평(太平)의 즐거움을 누림이 이와 같은가.” 하였더니, 얼마 안 가서 성묘(成廟)께서 돌아가셨으므로 내가 예관(禮官)으로서 친히 염습(斂襲)을 받들어 통곡하면서 거적자리에서 잤고, 또 임금의 관(棺)을 모시고 산릉(山陵)으로 가니, 그 사이 궁인의 휘장과 백관의 뜰에서 곡성이 밤낮으로 그치지 않았다. 이때 비통한 것을 당하여 머리가 희고 늙은 지경에 또 이와 같은 변을 만나니, 대개 즐거움이 지극하면 괴로움이 오는 것은 자연의 이치다. 내가 어려서 방옹(放翁)과 더불어 서로 정분이 두터워 빈 집에 우거하면서 독서를 하였는데, 이웃 친구인 조회(趙恢)의 집과 서로 몇 리 정도 떨어져 있었다. 그 집에 능금나무가 있었는데 하루는 방옹이 내게 말하기를, “졸다가 병을 얻는 것은 조(趙)의 집에 가서 능금을 먹는 것만 같지 못하다.” 하므로, 이에 두 사람이 함께 가보니 능금이 나무에 가득하여 찬란하게 붉었으되 문이 닫혀 들어갈 수가 없었고 주인을 불렀으나 또한 대답이 없었으며, 동복(僮僕)들은 문 안에서 술 마시고 웃으면서 떠들썩한데다가 소낙비가 한줄기 쏟아졌다. 문 앞에는 큰 말이 회(槐)나무에 매어 있었고, 작은 말이 또한 서너 마리 있을 뿐 한 사람도 없었다. 방옹이 말하기를, “주인이 손님을 따돌리기를 이같이 심하게 하니 이 말을 훔쳐가는 것만 같지 못하다.” 하므로, 나도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이 한 마리씩 타고 시냇가로 내달아 어정거리면서 독서하는 곳에 와서 두 말을 창고 속에 매어 두었는데, 방옹이 말하기를, “잡아먹고 싶다.” 하므로, 내가 말하기를, “어찌 이런 도리가 있겠느냐. 이러면 도적과 다름 없다.” 하였더니, 방옹은 말하기를, “회(恢)가 비록 이 일을알지라도 관(官)에 고하지는 않을 것이다.” 하고는, 드디어 절구공이를 들고 말 머리를 치려고 하므로 내가 붙잡고 이를 제지하였더니, 이튿날 회가 왔는데 눈이 퀭하고 얼굴이 초췌하므로 방옹이, “자네는 어찌 편치 않은 기색(氣色)이 있는가.” 하고 물었더니, 회는 말하기를, “어제 처고모가 금포(金浦) 향야(鄕墅)로 돌아가려 하여 말을 문 밖에 매어 두었더니, 도적이 말을 훔쳐갔으므로 온 집안이 급박히 사람을 나누어 찾고 있으며, 나도 고양(高陽)과 교하(交河) 등지를 순력(巡歷)하였으나 지금까지 찾지를 못하여 이 때문에 근심이 쌓여 있다.” 하였다. 조금 있으니 말이 창고 속에서 울므로 방옹이 웃으니 회가 가서 본즉, 곧 그 말이므로 회는 한편 노하고 또 기뻐하면서 꾸짖기를 마지 아니하니 이때 만당(滿堂)이 크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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