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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12월13일 동지는 불교의 겨울 명절
■ 새 생명의 기운이 싹트기 시작하는 동지(冬至)(2013년동지)
12월이 되면 크리스마스 캐롤이 귓전에 울리고 크리스마스트리와 함께 온통 거리는 하얀 눈위에 썰매를 타고 루돌프 사슴이 끄는 산타클로스의 빨간 옷을 떠올리게 됩니다.
구세군 냄비는 도시의 도처에서 가난한 이웃을 생각하라는 메시지를 던지는 도시의 모습입니다.
삼국시대나 고려 조선 시대에는 겨울이 되면
사찰에서는 동지건대를 돌려서 곡식을 권선하고 시주를 받는 화주승이 걸망을 지고 집집마다 다닙니다. 부잣집에서는 가난한 사람을 도우는 마음을 내게하는 시주의 곡식을 담고, 가난한 집을 만나면 걸망 속의 곡식을 그들에게 나누어 주며 마치 중국의 포대화상처럼 걸망 속에 짊어진 따뜻한 이웃의 마음을 전달하는 사회였습니다.
얼마 전 까지만 해도 스님들이 걸망을 지고 바룻대를 들고 요령과 목탁을 치면서 시주를 권하는 탁발의 길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지금 조계종단에서는 탁발을 금하고 있기에 이제는 탁발승을 보기가 힘들고 가끔 남방불교의 스님들이 새벽 탁발의 길을 행진하는 모습과 스님들에게 골고루 음식을 시주하는 신도들의 모습을 텔레비전으로 볼 수 있을 정도입니다.
저는 이제 우리도 연말연시에 여법한 탁발의 행렬을 장려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가난한 이를 도우는 마음을 내게 인도하고 불자들과 함께 동지팥죽의 색이 나는 옷을 입은 신도들이 크리스마스의 산타처럼 포대화상이 되어 자루를 메고 가난한 이웃을 돕고 어린이들에게는 착한 마음으로 착한 꿈을 꾸는 어린이들에게 버선 속에 선물을 넣어주는 행사를 하였으면 합니다.
사찰에서는 문화공연을 통하여 음악이 있고 시가 있고 음식을 나누어 먹고 함께 즐기며 이웃을 돕는 봉사활동을 잘하는 불자들이라는 칭송도 좀 받고 동남아의 불교 국가에도 도움의 손길을 좀 더 과감하게 하는 불자 사부대중으로 변모하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동지는 서양의 명절인 크리스마스 즉 예수 탄생일로 축하하는 날에 밀려 팥죽이나 쑤어먹는 날로 되어야 할까요?
저는 예수 탄생을 기념하는 미사 보다 태양이 부활하는 동지 명절이 더 우선하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 방송을 듣는 불자님들은 서양의 명절보다 오래 되고 우수한 과학적 근거를 갖고 있는 동지를 좀 더 사랑하고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동지 절기에 대하여 한 번 생각해 보겠습니다.
동지는 일 년 중에서 밤이 가장 길고 낮이 가장 짧은 날입니다. 24절기 가운데 대설(大雪)과 소한(小寒) 사이에 들며, 태양이 남회귀선, 곧 적도의 남쪽 23.5°인 동지선(冬至線)에 이르는 때를 말합니다.
이때 태양은 가장 남쪽에 위치하는데 우리들이 살고 있는 지구의 북반구에서는 낮의 길이가 가장 짧고 반면에 밤의 길이가 가장 긴 날이 됩니다.
동지는 24절기의 하나로서 양력 12월21일 또는 22일 23일 중에 듭니다.
애동지 중동지 노동지
올해는 22(음력20일)일 하순 때에 동지일이니 노동지 입니다. 올해처럼 음력 20일 이후에 하순에 들면 노동지이며, 10일과 20일 사이인 중순에 들면 중동지가 되며, 10일 이전 초순에 들게되는 작년과 내년에는 윤달이 들어 애동지 혹은 오동지 즉 애기동지라 하여 아이들에게 좋지 않은 일이 생긴다 하여 팥죽을 쑤어 먹지 않고 대신 팥 시루떡을 해먹었습니다. 작년처럼 윤달이 드는 해가 2006년 2009년 2014년이니 내년 동지에도 초순에 드는 애동지가 되는 셈입니다.
동지는 음력 11월 초순에 들면 '애동지', 중순에 들면 '중동지', 하순께 들면 '노동지'라고 하는데, 이는 동지가 드는 시기에 따라 달리 부르는 말입니다.
태양이 부활하는 때
고대인들은 이 날을 [태양이 죽음으로부터 부활하는 날]로 생각하고
축제를 벌여 태양신에 대한 제사를 올렸다고 전해집니다. 그리고
주(周)나라(기원전 1046년 ~ 기원전 256년 )에서는
동지를 새해의 시작 곧 설로 삼아 천지신명과 조상신에게 제사를 올렸다고 합니다. 이러한 문화가 생긴 연유는,
동지가 바로 [가는 해의 끝이면서 오는 해의 양(陽)기운이 처음 태동하는 진정한 새해 첫 날]로 여겨지기 때문입니다.
또 우리나라에서는 동지를 '다음 해가 시작되는 날[아세亞歲]' 「亞;버금 아자로써 작은, 흉하다」라는 뜻이니 '작은 설' 이라 하여 크게 축하하였습니다. 그리고 이날에 새해 달력을 주고받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옛말에 '동지를 지나야 한 살 더 먹는다' 또는 '동지팥죽을 먹어야 한 살 더 먹는다' 라는 말이 전해지기도 합니다. 조선 초까지만 해도 동짓날은 어려운 백성들도 모든 빚을 청산하고 새로운 기분으로 하루를 즐기는 날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동지의 풍습 보다 12월이 캐롤과 빨간 색깔의 산타를 중심으로 생각하는 것은 서양 우월주의의 잘못된 관습 때문입니다.
자 그러면 이웃종교인 크리스마스의 역사를 한 번 살펴볼까요.
크리스마스(Xmas;Christmas) 의 기원은 동지(冬至) 축제로 부터입니다.
■ 크리스마스의 어원(語原)을 살펴 봅시다.
크리스마스란 중세기에 사용되던 '크리스뚜스 미사(Christus Missa)'라는 말에서 유래합니다. 고대 영어 Cristes maesse (그리스도의 미사)에서 유래합니다. 그러므로 이 말은 [그리스도]와 [미사]의 합성어 입니다. 크리스마스의 또 다른 이름인 'X-mas'의 'X'는 희랍어의 그리스도라는 단어의 첫 글자를 떼어서 쓰고 있습니다.
그러면 12월 25일은 그리스도의 탄생일일까?
■ 결론적으로 말하면 크리스마스(12월 25일)는 예수의 탄생일이 아닙니다.
동지(冬至) 축제에서 유래된 것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전 세계적인 축제로 화한 크리스마스가
동지(冬至)축제에서 유래된 것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크리스마스는 예수의 탄생을 기념하는 축일로 알려져 왔습니다.
하지만 예수가 12월 25일에 탄생했다는 증거는 전혀 없습니다.
예수 탄생에 대해서는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 기록되어 있으나,
그 월 일에 대해서는 전혀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즉 크리스마스인 12월 25일은 예수의 탄생일이 아니며 그렇게 믿고 있는 것은 기독교가 만들어낸 일종의 신화라고 볼 수 있습니다.
실제 역사의 근원을 따라 올라가보면,
예수 탄생을 축하하는 의식은 4세기(336년경 로마)에 접어들면서부터 행해진 것으로 보이는데, 초기에는 그 날짜가 일정치 않아 1월 6일, 3월 21일(춘분), 12월 25일(동지 축제) 가운데 어느 하루가 선택되었습니다.
로마 교회(서방교회)가 12월 25일을 성탄절로 정한 것은 서기 354년부터로 보여지며, 379년부터는 그리스 교회(동방교회)가 이에 따른 것으로 보인다고 합니다.
그렇다고 한다면
■ 크리스마스의 그 뿌리는 동지 축제에서유래 된 것이라 할 것입니다.
농경(農耕)을 주로하던 로마인들은 12월 21일부터 31일까지의 연말을 농경신 새턴(Saturn(사투르누스): 이탈리아의 고대 곡물신의 이름입니다.. 로마인에 의해 그리스의 크로노스와 동일시 되었지요)그래서 곡물신의 제사일(祭日)로 삼아 성대한 잔치를 벌였는데,
이 제사일 기간을 '사투르날리아(Saturnalia)'라 불렀습니다.
('토요일'을 뜻하는 영어 Saturday의 어원이 Saturn에서 온 것입니다.)
이 사투르날리아 기간 동안에는 일반적으로 연령, 성별, 계급의 구별 없이 각종 연회, 경기, 행렬 등이 펼쳐졌습니다. 그런데 이 기간 중에서 12월 25일은 동지가 지난 다음으로 '태양이 소생하는 날'이라고 하여 특별히 기념되었습니다.
그러므로 크리스마스는 다름 아닌 이 사투르날리아 축제가 변형되어 전래된 풍속인 것입니다.
그리고 또 미트라(Mitra)신의 축일도 이 날이었습니다.
미트라는 태양이 떠오를 때 태양에 앞서는 빛으로서, 어둠을 몰아내는 광명의 신입니다. 본래 페르시아인의 신이었는데 전래되어 유럽 민족의 옛 신성(神聖)으로 자리 잡았던 것입니다.
켈트 민족의 제사계급들도 태양의 기운이 소생하는 이 기쁜 날을 축하하였고 게르만인도 이날을 유쾌하게 축하하였습니다.
이런 문화적 전통위에서, 초대 그리스도교 지도자들이 농경력(農耕曆)상의 성대한 제사일(祭日) 곧, 동지 축제를 정책적으로 예수의 생일과 결합시킨 결과인 것입니다.
따라서
크리스마스의 문화적 전통은
사실상 그리스도교와는 전혀 무관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가히 역사적 아이러니라 할 것입니다.
■ 지금 우리 사회 속에는 시대의 변천에 따라 점차 세속화된 크리스마스를 보고 있습니다.
중세의 크리스마스 행사는 교회 의식(儀式)과 더불어 농신제(農神祭)에 따르는 가장(假裝)행렬의 행사 들이 뒤섞여 행하여졌습니다. 그것이 근세에 이르러서 어린이들이나 가족 중심의 축일로 변모되어 졌습니다.
또 크리스마스와 결부하여 산타클로스의 설화(說話)와 전승(傳承)을 살펴 보겠습니다.
산타크로스는 오늘날의 터키에 해당하는 지역의 주교였던 Santa Claus (Santa klaus) 성 니콜라우스 (그리스어: Άγιος Νικόλαος)라는 실존 인물과 관련된 유럽의 설화입니다.
그는 남몰래 많은 선행을 했는데, 그가 죽은 후 그의 이야기는 노르만족들이 유럽으로 전하게 됩니다. 12세기 초 프랑스의 수녀들이 니콜라우스의 축일 (12월 6일)의 하루 전날인 12월 5일에 과거 성 니콜라우스(어린이를 보호하는)의 선행을 기념해 가난한 아이들에게 선물을 주기 시작했고, 그 풍습이 유럽 전 지역으로 확산되었던 것입니다. 이런 면에서 동지와 포대화상 스님들의 탁발 등를 연결하는 것은 오히려 자연스러운 일일 것입니다.
이러한 선행의 스토리텔링이 17세기 쯤, 아메리카로 이주한 네덜란드인에 의해 '성 니콜라스'의 이름이 네덜란드어로 '성 클라우스'로 발음되었는데, 네덜란드인이 미국으로 이주하면서부터 잘못 불러서 성녀(聖女, 산타)를 뜻하는 것 같은 '산타클로스'라는 애칭으로 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산타클로스가 썰매를 타고 와서 착한 어린이에게 선물을 준다는 이야기와 그에 관련된 행사는 오래된 기원이 아니라, 19세기 초부터 시작된 일이라고 합니다. 결국 한 200년 정도의 역사 속의 이야기의 전승입니다.
결론적으로 크리스마스는 예수 탄생의 미사와는 관련이 없는
서양의 동지축제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다가오는 올해 12월 22일의 동지절과 뒤이은 크리스마스,
이젠 우리 모두가 그 의미를 알고 보내야 할 것입니다. 우리 불자들도 가난한 이웃과 추운 겨울을 보내는 사람을 위한 배려의 마음을 실천하여야 할 것입니다.
동지에 얽힌 불교 설화를 살펴보겠습니다.
우리의 동지설화 역사 속에는 아주 뜻있는 스토리텔링이 있습니다.
1) 선덕여왕과 지귀(志鬼) 에 대하여 살펴볼까 합니다.
(善德女王;27대, 성은 김씨, 휘 는 덕만(德曼)? ~ 647년 음력 1월 8일 , 재위: 632년 ~ 647년)
선덕여왕은 신라 제 27대 임금으로 부처님에 대한 신심이 아주 돈독하여 국사를 돌보는 바쁜 중에도 매일 조석으로 황룡사에 가서 예불 올리는 일을 하루도 거르지 않았다고 합니다.
어느 날 저녁 여왕이 예불을 드리러 가는 도중에 난데없이 어떤 남자「그는 활리역(活里驛) 사람」인데 여왕의 행차에 뛰어들어 소란을 피우기에 여왕은 시종을 시켜 그 남자에게 연유를 물어보았습니다. 그러자 소란을 피운 남자가 말하기를,
"소인은 지귀(志鬼)라고 하는데 평소부터 여왕님을 남몰래 연모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늘 여왕님의 예불 행차를 몰래 지켜보기 여러 날 이었습니다." 하는 것입니다.
여왕이 재차 묻기를, "행차를 늘 지켜보고 있었다는 말이냐?" 하니
지귀가, "예, 그러하옵니다. 하오나 오늘은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서 여왕마마께, 제 연모(戀慕)하는 마음을 하소연하려고 행차에 뛰어든 것입니다."
원래 자비로운 품성의 소유자인 선덕여왕은 그를 참으로 가엽게 생각하여 황룡사까지 동행하게 하였습니다. 이윽고 황룡사에 도착하여 절문 앞의 9층탑 곁에 이르자 여왕은 안으로 들어가면서 지귀(志鬼)에게 말하기를.
"내가 부처님께 예불을 마치고 그대를 궁으로 데리고 갈 것이니 이곳에서 잠깐만 기다리거라" 그러나 밖에 남게 된 지귀는 일각이 여삼추(一刻如三秋)라 예불 시간도 채 기다리지 못하고, 마음에 심화(心火)가 끌어올라 그만 죽고 말았습니다. 참, 지귀란 양반 성미도 급하지요.
그 후에 죽은 지귀는 그야말로 사랑에 한을 품고 죽은 몽달귀신이 되어 여기저기 떠돌아다니니 신라의 방방곡곡에는 이 지귀의 행패가 심하여 많은 사람이 해를 입게 되었다는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이에 이 지귀 귀신을 달래주기 위한 방편으로 해마다 동짓날이 되면 팥죽을 끓여 집집마다 대문에 뿌리고 길에도 뿌렸더니 귀신이 사라졌다고 합니다.
또 「다른 설」이 있습니다.
심신이 쇠약해질 대로 쇠약해진 지귀는 그만 그 자리에서 잠이 들고 말았습니다. 여왕은 불공을 마치고 나오다가 탑 아래에 잠들어 있는 지귀를 보았습니다. 여왕은 그가 가엾다는 듯이 물끄러미 바라보고는 팔목에 감았던 금팔찌를 뽑아서 지귀의 가슴 위에 놓은 다음 발길을 옮기었답니다.
여왕이 지나간 뒤에 잠이 깬 지귀는 가슴 위에 놓인 여왕의 금팔찌를 보고는 놀랐습니다.
그는 여왕의 금팔찌를 가슴에 꼭 껴안고 기뻐서 어찌할 줄을 몰랐습니다. 그러자 그 기쁨은 곧 불씨가 되어 가슴 속에서 활활 타오르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온몸이 불덩어리가 되는가 싶더니 이내 숨이 막히는 것 같았지요, 가슴 속에 있는 불길은 몸 밖으로 터져 나와 지귀를 어느새 새빨간 불덩어리로 만들고 말았습니다(사랑과 기쁨의 감정이 폭발하여 현실의 불로 나타났다는 말입니다).
처음에는 가슴이 타더니 다음에는 머리와 팔다리로 옮아가서 마치 기름이 묻은 솜뭉치처럼 활활 타올랐습니다. 지귀는 있는 힘을 다하여 탑을 잡고 일어서는데 불길은 탑으로 옮겨져서 이내 탑도 불기둥에 휩싸였습니다. 지귀는 꺼져 가는 숨을 내쉬며 멀리 사라지고 있는 여왕을 따라가려고 허위적 허위적 걸어가는데, 지귀의 몸에 있던 불기운은 거리에까지 퍼져서 온 거리가 불바다를 이루었답니다.
이런 일이 있은 뒤부터 지귀는 불귀신으로 변하여 온 세상을 떠돌아다니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불귀신을 두려워하게 되었는데, 이 때 선덕여왕은 불귀신을 쫓는 주문을 지어 백성들에게 내놓았답니다. 「심화요탑(心火繞塔)이란 제목으로 박인량의 수이전에 실렸다가 대동운부군옥(大東韻府群玉)에 전재되었습니다.」 그 내용은 이렇습니다.
“ 지귀는 마음에 불이 일어 몸을 태우고 화신이 되었네.
푸른 바다 밖 멀리 흘러갔으니 보지도 말고 친하지도 말지어다.”
백성들은 선덕 여왕이 지어 준 주문을 써서 대문에 붙였습니다. 그랬더니 비로소 화재를 면할 수 있었습니다. 이런 일이 있은 뒤부터 사람들은 불귀신을 물리치는 주문을 쓰게 되었는데, 이는 불귀신이 된 지귀가 선덕 여왕의 뜻만 쫓기 때문이라고 한답니다.
이러한 심화를 내리는 것이 한방의 팥이 바로 열기를 내리는 것으로 재미있게 연결되는 것 같습니다.
2) 팥죽과 나한님 에 대한 이야기가 부산 마하사에 내려옵니다.
동짓날에 절에서는 팥죽을 쑤어 대웅전이며 나한전 등에 공양을 올리고 온 대중이 팥죽으로 공양을 하며 한 해의 묵은 때를 벗어버리고 새해를 맞이하는 풍습을 우리는 잘 압니다.
그런데 마하사에 공양주 보살은 그만 동짓날 늦잠을 자고 말았습니다.
"공양주 보살. 아니 오늘이 무슨 날인데 잠만 자고 있습니까?
빨리 일어나세요"
스님의 호령 소리에 겨우 기지개를 펴고 나오던 공양주 보살은,
"허 참, 오늘이 바로 동짓날 아닙니까?
동짓날! 빨리 팥죽을 쑤어 부처님께 공양을 올려야지요." 하는 말에
그만 정신이 번쩍 들어 황급히 부엌으로 달려갔지만, 늦잠을 잔 덕분에 아궁이의 불씨마저 꺼져 버리고 회색 재만 남아 있었습니다.
옛날인지라 불씨가 다 사그라들고 없어져버리면 불씨를 다시 얻어 오기 전에는 부엌일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공양주 보살은 그만 가슴이 철렁 내려앉고 눈앞이 캄캄해 질 수 밖에. 부처님께 죄송한 마음은 둘째 치고 당장 주지스님의 불호령이 떨어질 것 만 같아 안절부절 못했습니다. 결국 생각다 못한 공양주 보살은 절 아래 동네의 김서방네 집에 가서 불씨를 얻어오려고 부리나케 발길을 재촉했습니다.
그날따라 찬바람이 쌩쌩 불고 눈은 발목까지 푹푹 빠지니 김서방네 집은 천리 만리나 되는 것 같았습니다. 겨우 김서방네 집에 도착한 공양주 보살은 큰 소리로 김서방을 불러 자초지종 사정 얘기를 했답니다.
그러자 김서방은, "아까 행자님이 오셔서 불씨를 얻어 갔는데 불이 또 꺼졌나요?" 하며 의아한 눈으로 바라보는 것이었지요. "아니, 행자님이라니요? 우리 절에는 행자님이 없는데요?" "그래요? 하지만 조금 전에 어떤 행자님이 와서 배가 고프다고 하시면서 팥죽까지 한 그릇 드시고 불씨도 얻어가셨는데요"
마하사에는 행자님이라곤 없었으니, 공양주 보살은 마치 귀신에 홀린 듯한 기분이 들었지만, 그래도 급한 마음에 불씨를 빌려 가까스로 절에 도착했습니다. 그런데 더욱 놀라운 광경을 보게 되었습니다. 놀랍게도 부엌의 아궁이에 장작불이 활활 타고 있었던 것입니다.
공양주 보살은 급히 서둘러 팥죽을 쑤어 먼저 법당 부처님께 공양을 올리고 곧 나한전으로 팥죽을 받혀들고 갔습니다. 그런데 나한님께 팥죽공양을 올리던 공양주 보살은 그만 까무러치게 놀라고 말았습니다. 공양주를 내려다보며 빙그레 웃고 계시는 나한님의 입가에 붉은 팥죽이 묻어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아이고, 나한님. 잘못했습니다."
공양주 보살은 그대로 엎드려 크게 절을 올리고 또 올렸습니다. 김서방네 집에서 팥죽을 얻어 드시고 불씨를 얻어다가 아궁이에 장작불을 지핀 행자는 다름아닌 바로 그 나한님이었던 것입니다.
어느 절에나 나한전에 모신 나한님은 모두가 미소를 머금고 계시고 그 입술은 한 결 같이 붉은 색인데, 이는 바로 동짓날 드신 그 팥죽이 묻어있기 때문이라고 하는군요. 재미있는 동화 같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 [팥죽의 유래]에 대하여 살펴봅시다.
옛날 중국에 공공씨(共共氏)라는 사람에게 자식이 하나 있었는데 아주 성질이 나빠 나쁜 짓만 하다가 죽었다고 합니다. 그러데 죽어서도 좋은 곳에 태어나지 못하고 귀신이 되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귀신이 되어도 보통 귀신이 아니라 역질(疫疾), 즉 나쁜 전염병을 퍼뜨리는 귀신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전염병에 시달리던 사람들은 궁리 끝에 동짓날 생전에 그가 가장 무서워했던 팥으로 죽을 쑤어 대문이나 집안의 판자에 뿌려 그 역질 귀신을 퇴치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는 중국의 형초라는 지방에서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입니다. 형초세시기(荊楚歲時記)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하나의 전해오는 이야기이고, 이와 같은 관습이 토착화된 데에는 음양오행설과 관련이 있습니다. 음양오행학상 붉은 색은 밝음, 즉 광명(光明) 빛을 표시하는 양(陽)이 대표적인 색깔입니다.
붉은 색깔은 음양(陰陽)상으로는 양(陽), 오행(五行)상으로는 화(火=불), 계절로는 여름, 하루로 치면 정오(正午), 방위로는 남쪽, 오장육부(五臟六腑)에 대비할 때는 심장(心臟), 오상(五常=인간의 감정)으로는 예(禮)에 속합니다.
한편 어둠은 음(陰)에 속하고, 음(陰)은 색깔로 치면 흑색, 즉 검은 색으로 대표하게 됩니다. 검정색은 오행(五行)상으로는 수(水), 방위로는 북쪽, 계절로는 겨울, 하루가운데는 한밤중, 오장육부에 대비하면 신장(腎臟)에 해당하고, 오상으로는 지(智)에 속합니다.
이처럼 붉은색과 검은색은 오행상 서로 반대되는 관계에 있고, 앞서 말씀드린 대로 붉은색은 태양을 상징할 뿐 아니라 낮과 밝음과 건강을 상징하는데 반하여 흑색은 이와는 반대로 밤, 어둠, 질병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옛날에는 질병이 드는 것은 전부 귀신의 소행이라고 보았습니다. 그리고 귀신은 어두운 밤에만 활동을 하는 것으로 믿었습니다. 귀신 이야기를 듣다보면 귀신은 밤에만 활동을 하다가 새벽 첫 닭이 울면 서둘러 사라져 버립니다. 무당이 하는 굿도 밤에 이루어집니다. 다시 말해서 밝은 곳에서는 귀신이 나타나지 않는다는 이야기가 되는 것입니다.
예로부터 중국이나 우리나라는 농자천하지대본(農者天下之大本)이라 하였듯이 농업 위주의 사회였습니다. 따라서 자연히 농산물 가운데서도 붉은 색깔을 띤 팥은 밝음을 상징하는 곡식으로 신성하게 여기게 되었고, 음양오행설(陰陽五行說)과 결부되어 이 팥은 어둠 속에서만 활동을 하는 귀신을 쫓아내는 효험이 있다고 믿게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을 것입니다. 이처럼 모든 일에는 반드시 그에 합당한 이치가 있게 마련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단순한 팥죽 공양만으로는
모든 악귀를 추방할 수는 없다는 말입니다.
요즘 귀신은 옛날과는 달라서 밤에만 활동하는 것이 아니라 낮에도 활동하고 밝은 색깔도 별로 무서워하는 것 같지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좀 더 현대의 귀신에게 알맞은 처방을 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보고 이에 적절한 처방전을 마련해야하는 것입니다.
불교에서의 팥죽의 유래에 대한 설화를 하나 더 소개하겠습니다.
옛날 신라 시대의 이야기입니다.
젊은 선비가 살았는데, 사람은 참으로 진실하였으나, 집안이 궁핍하였습니다.어느 날 과객이 찾아와 하룻밤 묵어가고자 하여 쉬어가게 해주었더니, 다음날 새벽에 길을 떠나기에 앞서 그 과객은 선비에게 서로 친구가 되자고 하였습니다. 이후로
그 과객은 선비에게 종종 찾아와 내년에 벼를 심으라 하면 벼가 풍년이 들고, 고추를 심으라 하여 고추를 심으면 고추농사가 풍년이 되고 그래서 수년간 많은 재산을 모으게 하여 그 선비를 부자로 만들어 주었습니다.
허나, 이상한 것이 그 과객은 늘 /한밤중에 찾아와서는 /날이 새기 전 /닭이 울면 사라졌습니다. 주인인 선비는 재물은 남부러울 것 없이 많이 모았으나, 세월이 갈수록 몸이 계속 야위어가더니 마침내 몸이 아파오기 시작했습니다.
병색이 너무나 심하게 짙어지자, 그 선비는 어느 스님에게 여쭈어 보았는데, 스님께서는 그 과객에게 싫어하는 것이 무엇이냐? 고 물어보라 하였습니다. 시키는 대로 했더니 그 과객은 백마의 피를 가장 싫어한다 하였습니다.
젊은 선비는 스님의 말씀을 새겨들은 이후로,
점점 그 과객이 무서워지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선비는 자기 집의 백마를 잡아 온 집안 구석구석 백마의 피를 뿌렸더니 그동안 친절하던 과객이 도깨비로 변해 도망을 가면서 /
선비에게 저주를 퍼붓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이후로 그 선비는 건강이 다시 좋아 졌습니다. 그런데 해마다 동짓날이면 이 과객이 잊어버리지 않고 찾아오는지라 젊은 선비가 스님께 해마다 백마를 잡아서 피를 바를 수 없으니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하고 방도를 묻게 되었습니다. 스님께서는 그렇다면 팥물이 백마의 피와 빛깔이 같으니 백마의 피 대신 팥죽을 쑤어 그것을 집에 뿌리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이 동짓날 팥죽을 끊이는 유래라 하기도 합니다.
재미있는 설화가 아닙니까?
삼국지의 전략가 제갈량이 남만(베트남)을 평정하러 갔을 때 노수(擄水)의 귀신들이 사람의 목을 원하는지라 밀가루로 사람의 머리 모양을 만들어서 제사를 지낸 것이 만두의 유래라는 이야기를 꺼내며, 자비정신이 넘치는 불교의 동지 이야기가 만두의 전설과 비슷한 점은 바로 불교의 불살생(不殺生)*자비 방생이 그 근원을 이루고 있다고 보는 견해를 밝히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처럼 우리는 동지의 전통을 사찰에서 맛 볼 수 있습니다. 우리의 민속을 종교적 차원에서 받아들여 더욱 그 의미를 심화시킨 불가의 동지절 행사입니다.
이런 전통의 향기를 지켜온 불교인들이 이제 다시 영원히 꺼지지 않는 마음의 불씨를 일체 모든 생명들의 가슴에 불을 지필 수 있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동지 법회를 통해 ‘무명에서 깨어나자’ 라는 것입니다.
동지는 밤이 가장 긴 날입니다. 태양이 상징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태양은 밝음, 광명 그 자체입니다. 또한 태양은 어둠을 물리치고 세상을 밝게 하는 원천이요, 온갖 생명의 에너지원으로 생명의 근원입니다. 바로 이런 의미를 가진 태양이 죽음으로부터 되살아나는 날로서, 부활하는 날로 믿었던 데서 동지절의 기원이 비롯되었다는 것은 매우 상징적입니다.
따라서 불자(佛子)들은 이 날을 ‘어둠을 깨는 날’로 삼자는 것입니다. 물론 동짓날에 몰아내자는 어둠은 ‘낮과 밤의 어둠이 아니라 우리 마음속의 어둠,’ 즉 무명심(無明心)을 뜻하는 것입니다. 무명은 범어(梵語)로 「Avidyā अविद्या)아비드야, 안비드냐」입니다. 비드냐(明)와 안비드냐(無明)의 차이입니다. Pāli: avijjā
부처님께서 깨달으신 진리를 십이연기(十二緣起)로 표현하는데 십이연기의 첫째가 바로 무명(無明)입니다. 무명이란 우리들 존재의 밑바닥에 깔려 있는 근본적인 무지(無知)를 일컫는 말입니다. 생. 노. 병. 사를 가져오는 근본원인, 과거세로부터 무한히 계속되고 있는 무지로서, 범어로는 아비드야, 즉, 밝을 명 즉 밝음의 반대말이 이 ‘아비드야’인 것입니다.
이 무명(無明)으로 인하여 행(行)이 있고, 행으로 인하여 식(識)이 있고, 식으로 인하여 명색(名色)이 생겨나고, 명색으로 인하여 육입(六入)이 생겨나는 것이며, 육입으로 인하여 촉(觸)이 생겨나며, 촉은 수(受)를, 수는 애(愛)를, 애는 유(有)를, 유는 생(生)과 노사(老死)로 이어진다는 것이 부처님께서 깨달으신 십이연기입니다.
무명으로 인해서 온갖 잘못된 행동이 이어지고 마침내 생노병사와 우비고뇌(憂悲苦惱)라고 하는 인생고가 전개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받는 현실의 고통은 바로 이 무명 때문인데 이 무명에서 깨어나기만 하면 생사윤회의 고통을 면할 수 있고, 우리의 삶은 보다 더 윤택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무명(無明)이란 고정불변의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무명이란 진리에 대하여 알지 못하는 깨닫지 못한 어둠입니다. 진리를 깨달으면 곧 사라져 버리는 어둠인 것입니다. 우리는 누구나 부처님과 똑같은 지혜광명이 여래장(如來藏 Buddha-dhātu, Tathāgata-garbha)이라 부르는 곳간에 씨앗으로 마음속에 간직되어 있습니다.
보관일체중생(普觀一切衆生)하니 구유여래지혜덕상(具有如來智慧德相)이라,
부처님께서 “널리 일체중생을 관찰해 보니
여래의 지혜 덕상(德相)이 다 갖추어져 있더라.”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무언가에 의해 가려져서 무명이라는 형태로 되어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밝은 지혜가 무언가에 의해 가려져 있는 상태가 무명이라는 말입니다. 따라서 이 무명만 제거하면 반야지혜가 빛을 발하게 되는 것입니다. 태양은 본래부터 밝게 빛나고 있지만 먹구름이 태양을 가려 어두운 것과도 같은 이치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한없는 세월동안 이 무명을 자기 마음으로 착각하여 알고 길고 긴 잠을 자고 있는 것입니다. 마치 꿈속에서 악몽을 꾸는 것과도 같습니다. 그러므로 이 무명의 긴 잠에서 깨어나는 일이 무엇보다도 급한 일이라 할 것입니다. 무명에서 깨어나야만 생사윤회(生死輪廻)의 고통에서 해방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무명의 긴 잠에서 깨어나지 못하는 까닭에 여래장(如來藏)이라는 보배가 빛을 내지 못하기 때문에 생사윤회의 고달픈 여정을 되풀이 하는 것입니다.
여래장은 곧 불성(佛性)입니다.
부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시고, 또 일생동안 가르침을 펴신 까닭은 바로 이 무명의 긴 잠에서 중생들을 깨워주시고 중생 각자의 심성에 간직된 여래장을 개발키 위해서라는 것을 부처님께서는 대방등여래장경(大方等如來藏經)458b 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선남자야, 비유컨대 가난한 집에 귀한 보배가 있는 것 같으니라. 내가 보배가 있다고 말할 수도 없는 일이므로 주인은 보배 있음을 알지 못하고 거기에다가 일러 주는 사람도 없고 보면, 그 사람은 제가 지닌 보장(寶藏)을 열어 활용해 내지 못한다. 온갖 중생도 이와 같아서 여래의 큰 가르침의 보장이 그 몸 안에 있건만, 그것에 대해서 들은 바가 없기에 알지 못해서 오욕(五慾)에 빠져 든 나머지 생사에 윤전(輪轉)하여 무한한 고통을 당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부처님들께서 세상에 나타나서 중생의 마음속에 여래보장이 있음을 관찰하시고, 여러 보살을 위해서 이 법을 설하셨느니라.”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 「신해품(信解品)」에 등장하는 궁자의 비유도 바로 우리 속에 본래 갖추어 있는 불성의 보석 부처에 대하여 설합니다.
두 번째, 장자궁자의 비유는 앞의 비유품에서 사리불이 수기를 받은 것에 대하여 신해품에서는 수보리존자와 대가전연, 대가섭, 대목건련존자 등 사대성문의 환희에 찬 고백이 설해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환희로운 느낌(깨달음 내용)을 이 장자궁자의 비유로 기술하고 있는 것입니다.
첫 번째 삼계화택(三界火宅)의 비유는 석존에 의해서 설해진 것이고,
이 장자궁자의 비유는 성문제자들의 대표주자들이 화택의 비유와 유사한 내용을 기술하고 있는 것입니다.
부처님은 깨달음을 얻으시고 가장 먼저 5비구에게 21일간『화엄경』을 설하셨습니다.
21일간 최초화엄삼칠일(最初華嚴三七日) 궁자경악화엄시(窮子驚愕華嚴時)입니다.
“어느 장자에게 아들이 있었는데, 그 아들은 어려서 부모를 버리고 가출하여 오랫동안 여러 나라를 전전긍긍하며 50년을 방랑하다가 우연히 본국으로 향하게 되었다. 아버지인 장자는 아들을 찾아 헤매다가 한 성에 머무르고 있었습니다.
그때 마침 거지인 아들은 아버지가 사는 집 문 앞에 서 있었는데, 장자가 임금과 같이 시종들로 둘러싸여 앉아있는 위풍에 두려움을 느껴서 도망가 버립니다. 도망가는 자가 그의 아들임을 알아본 장자는 사람을 보내어 붙잡으려 했는데, 그 아들은 그만 놀라고 두려워서 혼절해 버리고 맙니다.
부처님께서 중생들에게 자신들의 깨달음 행복에 대하여 설하셨지만 중생들은 그 동안의 고통의 삶인 사바세계에 길들여져 있어 행복한 인생에 대하여 가난하지 않고도 살 수 있다는 사실을 믿으려 하지 않는 것입니다.
다음은
아함시(阿含時)로, 녹원시(鹿苑時)이니 『아함경』을 12년간 설함. 阿含十二方等八아함십이방등팔 除糞定價阿含時 제분정가아함시 라 합니다.
거기서 장자는 지혜(知慧)방편(方便)을 쓰는데, 아들을 놓아주고 후일에 그 아들과 비슷한 형상을 한 다른 사람을 보내어 변소 청소부의 일을 하도록 권유하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날이 점점 지나자 장자도 허름한 옷을 입고서 다가가서 다른 곳으로 가지 말고 안심하고 일하도록 위로하면서 점점 친숙해집니다.
무상한 사실에 대하여 눈뜨게 하려는 가르침입니다.
반야시(般若時)는 여러 『반야경』을 21년간 설함입니다. 二十一載談般若 令知寶物般若時 이십일재담반야 영지보물반야시 입니다.
이후 장자는 자신의 아들처럼 생각한다고 하면서 더욱 격려를 해주면서 아버지처럼 생각하라고 말해준다.
바로 부처님의 지혜를 일러줍니다. 세간의 삶 그 속에 진공묘유의 가르침을 베푸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법화·열반시(法華·涅槃時)입니다. 『법화경』을 8년간 설함. 『열반경』을 21일간 설합니다. 終談法華又八年 傳付家業法華時
종담법화우팔년 전부가업법화시 이지요.
그리고 20년이 지나 장자는 죽음이 임박했음을 알고 그 아들을 불러 그의 모든 재산을 관리하도록 맡깁니다. 마침내 죽음이 임박하자 국왕이나 친척 등 모든 사람들을 불러모아 놓고 그가 자기의 친아들임을 밝히고 일체 가업을 그 아들에게 전해준다고 합니다.
이것이 바로 보장(寶藏)이고 여래장(如來藏)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태양이 소생하는 이 동지절에 갖는 동지법회를 ‘무명에서 깨어나자’ “무명을 깸”으로 삼아야 할 것임을 거듭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