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간체(簡體) vs 대만 번체(繁體) “우리 글자가 정통 한자”
다시 불붙은 ‘번간지쟁’
중국이 작년 유엔 공용어서 번체 퇴출시키자
발끈한 대만 “세계무형유산 등록할 것” 선언
최근 양안 간 정치적 긴장 완화에 찬물 우려
중국에서는 한자(漢字)를 간체화(簡體化)해 쓴다. 한자의 번잡한 획수를 줄여 만든 글자다.
반면 대만과 홍콩 등에서는 전해져 내려온 획수를 그대로 살린 번체(繁體)를 사용한다.
최근 중국의 간체자와 대만의 번체자 사이의 한자 정통성 논쟁이 뜨겁다.
중국어 패권을 둘러싼 양안(兩岸·중국과 대만) 간의 ‘번간지쟁(繁簡之爭)’으로 불린다.
“오직 대만에서만 정통 한자와 완전한 중화문화를 배울 수 있다.”
지난 1월 말 대만사범대학 춘절(春節·중국 설) 제례식에 참석한 마잉주(馬英九) 대만총통은 대만의 ‘중화문화 정통론’을 제기했다. 화교 대상의 중국어 교육 메카인 대만사범대를 찾아 번체자가 한자의 뿌리이자 이를 사용하는 대만이 중화문화의 정통임을 선언한 것이다.
▶마잉주의 ‘번체
정통 한자’ 발언 배경은 무얼까. 지난해 유엔에서 번체자를 축출한 게 계기가 됐다.
유엔은 원래 중국어 문서를 번체자로만 표기했다.
그러다 1971년 중국이 대만을 몰아내고 유엔에 가입하면서 번체자와 간체자 병용 시대가 열렸다.
그러나 유엔은 지난해 간체자로 중국어 표기를 통일했다.
대만이 분개한 것은 물론이다. 71년 유엔에서 쫓겨난 이후 두 번째 유엔에서의 퇴출이라며 흥분하고 있다. 최근 양안 간 정치적 긴장 완화 분위기와는 사뭇 다르다.
◆“간체자 제창하되 번체자 반대 않는다”
중국이 청(淸)대 『강희자전(康熙字典)』에 수록된 4만7035자에 이르는 한자를 2238자의 간체자로 통폐합하는 문자개혁을 단행한 것은 1956년이다. 2년 뒤엔 한자 발음을 로마자로 표기하는 ‘한어병음’ 방안도 시행했다.
장쩌민(江澤民) 전 국가주석은 92년
“모든 인쇄물에는 간체자만 사용한다. 양안의 한자에 관한 차이는 현상을 그대로 유지한다.
서예(書法)에는 번체자 사용도 무방하다”는 지침을 내렸다.
“간체자를 제창하되 번체자를 반대하지 않는다”는 입장을 천명한 것이다.
조바심 내지 않고 점차 세를 불려 문자 통일을 노린다는 지구전 전략이다.
▶간체자 중국어의 전 세계 보급으로 ‘간체자
정통 한자’의 대세 굳히기 전략도 추진 중이다.
■전 세계 대학생 중국어 경연대회인 ‘차이니즈 브리지(漢語橋)’
■중국어 교육 센터인 ‘공자학원’
■인터넷 중국어 학습 프로그램인‘중국어 만리장성(長城漢語)’
■중국어 비즈니스능력 평가시험인 비즈니스중국어시험(BCT) 확산 등이 그 구체적인 방법이다.
지난해 7월 후난성에서 열린 제7회 차이니즈 브리지 대회에는 세계 50개국 대학생 600여 명이 참여했다. 2004년 서울에 처음으로 문을 연 공자학원은 현재 전 세계 249곳에 세워졌다.
중국이 지난해 공자학원에 투입한 자금만 미화 1억 달러(약 1300억원)에 달한다. 2008 베이징 올림픽 개막식에서 각국 선수단은 국가명칭을 중국어로 음역해 적은 간체자 획수 순서에 따라 입장했다.
중국이 ‘차이나 스탠더드’를 표방하면서 간체자 획수에 따라 전 세계를 줄 세운 대표적인 예다.
◆“번체자는 정체자로 불러야 마땅하다”
마잉주 총통은 “수천 년 내려온 정통 한자에 필획을 더하지 않았는데도 번체자라고 부르는 것은 잘못”이라며 “정체자(正體字)가 바른 명칭”이라고 주장했다. 지난해 중국 관광객의 대만 관광이 허용됐을 때도 “중국 대륙의 관광객 유치를 위해 간체자를 사용하지는 않을 것”이라며 “미래엔 중국인들이 모두 번체자를 사용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특히 번체자가 지난해 유엔 공용어로서의 신분을 상실한 데 격분한 대만은
최근 번체자를 세계무형유산에 등록해 문자의 주도권을 만회하겠다는 계획을 추진 중이다.
류자오쉬안(劉兆玄) 대만 행정원장은 최근 “춘절 이후 ‘산·관·학 추진소조’를 구성해 세계 각국 주요 대학들의 서명을 받아 4년 안에 번체자의 세계무형유산 등록을 완료하겠다”고 강조했다.
국력에서는 중국에 비할 바가 아니지만 한자의 획수를 그대로 살린 번체자가 중국 고전에 대한 이해를 훨씬 높인다는 점에서 대만의 도전은 중국에 큰 위협이 아닐 수 없다.
지난해 3월엔 중국의 국민가수 쑹쭈잉(宋祖英) 등 문화·예술계 전국정치협상회의(정협) 위원들이
‘간체자로 인해 전통문화의 뿌리가 사라지고 있다’는 우려를 나타내며 소학교에서 번체자 교육을 시작해야 한다고 제안하는 등 대륙에서도 다른 목소리가 나오고 있는 것이다.
◆“한자와 중국어, 구분해 가르쳐야 한다”
한국은 중·고교에서 주 1~2시간씩 한문을 배운다. 한문 시간에 배우는 한자는 번체자다.
간체자는 일반계 고교에서 제2 외국어로 중국어를 선택했을 때 배운다.
91년 3.1%에 불과하던 중국어 선택 학생 비율은 지난해 26.3%로 급증했다.
전국 174개 대학 중 중국어 관련 학과를 개설한 대학도 130개 교나 된다.
한국 사회 일각에선 전 세계 간체자 사용 인구가 번체자 사용 인구보다 압도적으로 많다는 현실을
근거로 고문 위주의 한자교육 대신 소통에 유용한 간체자를 교육하자고 주장한다.
그러나 2000년 교육인적자원부가 한자능력검정시험을 국가공인 자격으로 인정하고, 기업 채용시험에 한자를 도입한 뒤 ‘한자’(正字) 교육 붐 또한 거세다.
각종 한자검정시험만 8개가 넘고, 한자 사교육 시장 규모만 수천억원대에 이른다.
양안 간의 한자 논쟁에 대해 김현철 연세대 중어중문학과 교수는 “한국은 한자 교육과 중국어 교육은 구분하되 어느 한쪽도 소홀히 하면 안 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간체자를 가르치자’는 주장은 중국어 교육에 국한된 문제일 뿐
국어 어휘의 52.1%를 차지하는 한자어 교육은 ‘정자’로 하는 것이 맞다고 주장했다.
<신경진 중국연구소 연구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