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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행이란 무엇인가?
오행을 한번 자세하게 살펴보자! 만세력(萬歲曆;a perpetual calendarknowledge)이란 달력을 보면 사주와 팔자가 나
온다. 그 사주에 나오는 오행이라는 것이다
오행은 목화토금수의 순서로 이야기한다. 이렇게 표현하는 이유는 목생화(木生火)화생토(火生土)토생금(土生金)
금생수(金生水))순으로 서로 돕는 기운(상생)이기 때문에 보통 이렇게 이야기한다
1.목(木)의 기운을 가지고 태어난 영조와 사도세자
목은 인체에서는 간의 속성을 가진 기운을 가르킨다 (엄밀히 보면 물리학적인 간이 아닌 시스템으로써의 간이다
*경락이야기참고)
목에 성질은 성장하는 것이다(사주에 목기운이 부족하면 키가 작은 친구들이 많다)
계절로는 봄을 뜻한다 .맛으로는 신맛을 뜻한다 식초를 생각하면 될것이다.
무엇이든 열심히 할려하는 사람들에게 우리는 쉽게 그 놈 간땡이가 부었네라하는데 이것은 오행설의 영향 인듯하다.
목기운이 부족하면 잘 피곤해져서 매사에 의욕이 없다.
사주에 목기운이 없으면 남자는 초년에 발전이 없다. 우리가 몸이 피곤하면 처음 먹고 싶은 것이 바로 비타민이다.
박카스나 비타오백의 공통점은? 그 맛들은 공통적으로 시다(taste sour )는 것이다. 힘들때 먹는 드링크들이다.
즉 힘이 없는 사람은 목기가 부족한 사람들이니, 추진력이 떨어진다. 그래서 목없는 남자들이 여복이 없는 것이다.
목기가 있는 사람은 공부를 잘한다.文氣가 있다고 한다. 나무를 원료로 하는 종이가 책을 만드는 원료이다.
책이란 것이 존재하여 지식이 더욱 발달 했으니 , 목기가 공부운이라 해도 과장은 아니다 .
역사적으로 지식은 가진자들이 독점했다 .지식이 이렇게 일반화 된것은 20세기 초 정도라 해도 과언은 아닐것이다 .
지식인과 책은 권력자에 의해 자주 적대시 되었다 .캄보디아의 폴포트는 이상적인 농업국가를 꿈을 꾸었다.
그들에게 있어 지식인들은 미제국주의자들의 주구일 뿐이며, 서적들도 다 불필요한 존재 였을 것 이다 .
“프놈펜에서 검은 옷을 입은 젊은이들이 도서관으로 달려가 책을 미친 듯이 끌어냈다. 1차 목표는 국립도서관이었다.
도서관 안마당에 불타버린 종이 산이 만들어졌다. 그 더미에는 미처 다 연소되지 않은 붉은색, 초록색, 흰색 표지들이 보
였다. 찢어진 종이쪼가리가 계단과 여기저기 바닥에 나뒹굴었다. 세계 곳곳에서 학자들이 일부러 찾아와 참고하던 귀한
책들이 구둣발에 밟히고 전날부터 내린 비로 축축해진 땅에 떨어져 젖거나 진흙을 뒤집어쓴 채 찢어졌다. 그런 책들이 정
원과 도서관 건물 앞 거리에까지 마구 떨어져 있었다. 불교학원에서는 캄보디아에서 가장 중요한 연구소중 한 곳에서 크
메르어와 팔리어로 씌어진 책 7만 권이 잿더미로 변했다.”
뤼시앵폴라스트롱 사라진책의역사 에 한대목이다 .그러나 이런 책임이 어찌 일방적으로 폴포트에게만 있겠는가?
미국인들은(정확히는 영국감독이지만) 킬링필드 같은 홍보영화같은 것을 만들어 사실을 은페하려 하나, 진실을 알면 문
제는 간단하지 않다 .미국이나 폴포트나 오십보 백보이다. 미국이 마치 무슨 해결사 인양하는 것은 정말 뻔뻔한 일이다
크메르루즈의 만행은 오행으로 해석하면 정치적인 기운(칼을 상징하는 금기운)이 목기를 제압하는 것이다.
오행에서는 목극금이라 한다. 금기가 목기를 살상할수있다는 것이다.금기운을 가진 이들중에는 정치인들이 많다(뒤에 나
올 박정희 대통령이 대표적이다) 금기가 지나치면 독선이 되고 독선이 가장 최고조가 되면 다른 의견을 없애려 든다.
매사를 정리를 잘하고, 파괴한 후 발전을 도모한다. 진시황도 히틀러 폴포트 박정희도 금기의 사람들이다.
이들의 최후는 다들 비슷했다. 목기는 다양성을 존중하는 기운이기도 하다. 만약 잘하지 못했다 하더라도 창조적인 머리
가 잘 돌아 간다. 그런데 목이 많으면 너무나 창조적이라 그런지 경질적인 병증이 많다.
여기에 그 유명한 영조대왕의 사주가 있다 그전에 장정일의 독서일기에 이런 글이 있다
“성경에 의하면 왕정은 악마의 산물이다 가나안의 도시국가들이 거의 예외 없이 왕정체제 였을 때도, 이스라엘의 신은 왕
정을 허락하지 않았다 “
정말 그런지는 몰라도 아버지가 아들을 죽이는 악마적인 일이 조선왕조시대에 있었다. 사도세자의 아버지,아들을 죽여야
만 했던 비운의 임금, 우리나라 사극의 대표적인 주인공 그가 영조이다 .영조의 사주를 보자 갑술년 갑술월 을해일 정해
시(甲戌年 甲戌月 乙亥日 丁亥時) 팔자에 목(甲甲乙)이 많은 아주 의욕적인 성격의 사주이다 사주에 겁재가 들어 있는데
이 겁재가 있으면 남의 재산을 빼앗아 부자가 된다 .영조의 경우 다른 사람의 희생을 바탕으로 소원을 이루는 운으로 본
다. 물론 본다는 것은 결론을 가지고 해석해나가는 것이다. 그의 아들 비운의 사도세자는 을묘년 무인월 무술일 갑자시
( 乙卯年 戊寅月 戊戌日 甲子時 ) 사도세자와 영조는 공통적으로 사주에 갑(甲)과을(乙) 있는데 겁재(劫財)라 한다 이 겁
재가 들면 지나치게 승부욕이 과한 사람이 되며 다른 이의 기운을 누르게 된다. 또한 지나치게 자기 주장이 강한 사람들
이 이 사주에 속한 사람들이다.
음력으로 윤 오월이었으니 한여름 '임금 몰래 관서지방을 여행했다' '궁녀를 죽였다' '여승을 몰래 궁에 들였다' 등의 상
소가 잇따르 자 영조는 격노했다. 목기운이 강한 사주라 오랫동안 고민하던 사인이 분노가 되었을 것이다
사실 영조의 격노는 오래전부터 준비된 격노이기도 했다. 겁재가 든 사람들은 즉흥적으로 행동하지 않는다.
사주로만 본다면 그는 오랫동안 숙고했을 것이다. 노론의 추대로 집권한 아버지와 그 노론과 앙숙이 된 아들 사도세자는
건널 수 없는 다리를 건넌 상태였다. 노론이라는 뜻은 늙을 老자이다. 즉 나이먹은 사람을 뜻하는 것이 아닌 깊히 있는 논
리라는뜻이다.
노론은 서인의 당파에서 나왔다. 서인들은 호남과 충청 경기를 정치기반으로 한 사람들이다. 경제기반도 튼튼했고
인재기반도 튼튼했다. 율곡이이 정철등 기라성같은 정치인들이 서인출신들이다. 서인에게서 노론이 나오는데, 노론은
원칙을 중시하면서 실용을 추구하는 정치당파였다.
남인이 형식주의를 추구한 반면 노론은 나름 탄력적인 정치를 했다.숙종때 와서 노론의 세력은 강성해진다. 이들은 자신
의 반대당파 남인의 계열인 장희빈의 아들 경종을 인정할수없었다.경종이 급사하고 후사가 없자, 추대된 이가 영조인것
이다. 그러니까 영조는 노론당의 후원으로 왕이되어 경종을 독살했다는혐의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이것은 영조와 정조의 혈통의 비극이며, 그 비극은 조선왕조의 비극이었다.
영조와 정조는 매우 훌룡한 임금이었지만, 그들의 개혁은 노론세력의 강화만을 가져오고, 조선의 가장 중요한 정치파워
였던 공론정치의 파멸을 가져온다. 왕권강화라는 허구적인 명분에 집착한 정조는 결국 김조순 즉 안동김씨에게 세자의
정치후원을 맡기는 오점을 만든다.공론은 무너지고, 당파의 독주가 계속되어 결국 당파의 독주는 패거리정치를 만들고,
허약한 조선은 일본에게 침략되는 비극을 격는다.
다시 사주이야기로 가보자! 영조의 사주는 대체로 다른 이를 극복해야만, 크게 되는 사주이다 사주로 본다면 두명을 극
(kill)해야 자신을 지킨다는 해석도 가능하다 .첫 번째 희생자인 경종이 대표적이다. 장희빈의 아들인 경종은 집권여당인
노론과는 처음부터 같이 갈 수 없는 임금이었다 .장희빈을 사사를 주도한 세력이 바로 노론이었기 때문 이었다 .경종의
병세가 심각해지던 때, 영조는 그의 이복형님에게 환자들에게 먹이는 것을 금기하는 곶감과 게장을 어의들의 주청에도
만류에도 불구 손수 바친다. 잠시 몸이 좋아진 경종은 그것도 잠시 몇일이 지난후에 급사했다 .이때부터 경종 독살설이
퍼진다.
영조에게 큰 정치적인 부담이 되었다.
경종을 직접 독살했던 간접 독살했던 영조는 이 독살에 주인공이 될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다 .이 경종에 죽음에 동정을
표하는 것은 일종에 금기였다고 한다 그 금기에 도전한 것이 사도세자였다. 사도세자를 키운 나인들중 일부가 경종을 모
신 나인들이었다는 것은 사실을 짐작하기 충분 하다 .사도세자의 경종에 대한 추모는 아버지와 집권세력노론에 대한 노
골적인 도전으로 받아들여진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그 이후로도 사도세자는 사사건건 노론과는 불화 한다
이덕일교수의 책을 보면 우리가 사극에서 알고 있던 세자빈(혜경궁 홍씨)의 모습과는 여러 가지로 달랐다 .즉 궁전의 단
순한 아낙이 아닌 사태를 노련하게 해석하는 정치가의 모습 이었다 .이덕일 교수의 글을 매우 탁월하고 재미있다 .특히나
실록이나 기록의 색다른 측면을 부각하고, 그 속에 소설적인 재미까지 혼합하여 매우 재미있는 역사서를 만들었다. 그러
나 객관적인 내용과 주관적인 내용들 사이에서 어떤 대목은 좀 수긍이 가지 않는 것이 사실이다. (또한 그 해석에 대한 정
교한 주석이 아쉬웠다)
실록에 대한 해석은 약간 억지스럽게 느껴지는 것이 사실이다 .특히 혜경궁 홍씨의 묘사는 내게는 억지스럽게 느껴진 것
이 사실이다 .나는 혜경궁홍씨를 꼭 노련한 정치가라고 보고 싶지는 않다 .내가 보기에는 시대가 그녀를 정치가로 밖에
살수 없도록 만들었을 것이다 .그녀에게 정치는 선택이 아니라 필연이었을 것이다. 그녀의 눈물은 자신의 처가의 정치적
인 입지가 약해지는 것에 대한 정치인으로써의 눈물이라는 대목은 일면 수긍이 가지만 좀 지나친 표현이라는 생각이 드
는 것이 사실이다 .그녀는 정치보다는 자식(정조)을 지키려는 어머니로 해석할 수밖에 없었고 생각 한다. 홍씨에게 있어
정치와 남편과 자식은 상호 연결된 현실이었기 때문에 , 정치적인 생각을 배제한 행동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자식을 지켜
야 했기 때문에 더 정치적이어야 했을 것이다. 또한 정조를 훌룡하게 지키고 키운것을 보면 단순히 그녀가 정치적인 목적
만을 가진 자당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여인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그 여름의 이야기로 다시 돌아 간다 .분노한 영조는 사도세자를 부른다 .노한 영조는심지어 칼까지 들었다고 한다 .
처음에는 "자결하라!"고 명했다 .사주상으로 목기가 성한 영조는 혜경궁홍씨의 한중록에서처럼 약간 정신병적인 인물 이
었을도 모른다 .(통계적으로 목기가 성한 사람들은 정신병원에 입원한 사람들이 많다)
세자는 용포를 벗은 채 엎드려 빌었다. 이런 설왕설래가 계속되고 결국 영조는 "쌀 담는 궤를 가져오라"고 최후통첩을 한
다 혜경궁 홍씨는 급히 세손(정조)을 보내 간청케 했다고 한다. "아비를 살려 주옵소서." 슬피 우는 어린 손자를 본 노한
영조는 "나가라!"며 일언지하에 손자를 내쳐버렸다 .그로써는 손자에게 까지 화가 미치는 것이 두려 웠을것이다 .세자는
뒤주에서 절규를 했다
"아바님 아바님, 잘못하였으니 이제는 하라 하옵시는 대로 하고, 글도 읽고, 말씀도 다 들을 것이니 이리 마소서.(한중록)"
영조는 시종일관 강인하게 일을 처리 했다 .목기가 강한 강인한 임금의 기가 느껴지는 대목이다 .그것이 좋은 일이든 나
쁜일이든 목성이 강하면 처음에 추진 했던 일은 이루고 만다 .무엇인가 이룬다는 것은 주변의 기운을 누른다는 뜻으로 해
석된다 .실제 영조사주는 주변의 기운을 누르는 사주이다. 뒤주에 갇힌 지 9일째, 세자는 결국 죽음을 맞이했다. 세자는
배고픔과 갈증에 쓰러졌을 것이다 .아직도 사도세자의 죽음이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이다. 영조는 많은 후회를 했다고 전
해진다. 결국 영조의 정통성부족으로인하여 공론의 정치는 파당의 정치로 변질되었고, 그 변질의 댓가는 너무나 잔인했
다. 영조가 사도세자에게 선위하고 , 사도세자는 공론의 정치를 팼다면 조선의 미래는 달라졌을것이다.안타까운 일이다.
세자가 죽은 선인문 앞에는 순조때로 추종되는 오래된 회화나무 한 그루가 그려져 있다 .나무는 낮게 낮게 자라고 있다.
두사람의 목기운을 상징이라도 하듯이 낮게 낮게 자라고 있다
성공의 연금술사는?운명상담과 자기계발교육프로그램이 있는 2004년에서 2012년까지 8년 역사를 가진 카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