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불교 발전 위해 전력 정진한 비구니 스님들조선시대 200여년의 암흑기를 벗어나 1908년 안봉려관 스님이 관음사를 창건하며 제주불교 중흥의 첫 발걸음을 내딛었다. 하지만 관음사는 1936년 화재로, 1948년 4․3의 광풍 등 시대적 아픔을 딛고 제주민초들의 삶처럼 다시금 일어섰던 것은 ‘학천당 성해 스님’, ‘일오당 법선 스님’의 보이지 않는 노력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제주불교의 산증인인 연종 스님이 세 분의 공덕을 기리는 글을 본지에 보내왔다. 이를 요약 정리해 싣는다. 이번 호를 마지막으로 신년 특집 ‘제주불교의 대모(大母)’를 마친다. <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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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설명 : 관음사 재건 중창불사에 앞장서온 법선 스님(뒷줄 왼쪽에서 두번째)이 지난 1974년 은사인 성해 스님(뒷줄 가운데)과 보현암(현 보현사) 신도들과 함께 중문 천제연 폭포 관광 도중 기념 활영한 것이다. |
학천당 성해 스님갑붓집 딸로 태어났지만 남편과 일찍 사별1936년 화재로 소실된 관음사 재건에 앞장성해 스님의 속세의 성은 국씨이며 본관은 담양이다. 그의 부친은 고려말 투문동 72현 중 한 분인 충신호부 상서국유의 18세 손인 국참봉(우송공)이다. 1889년 7월 21일 국참봉의 장녀로 태어나 이름은 추이다.
자태가 정아하며 품성이 인자한데 여걸장부요, 도량이 넓어서 전남 담양 갑부인 가정에서 모든 재산을 장악 관리하다가 꽃다운 나이 17세에 명문가인 탐진 최씨 문중으로 시집갔다. 불행히도 전생에 부처님의 인연은 가깝고 속세의 인연은 먼지라 시집간지 5년 만인 22세에 부군이 세상을 먼저 뜬다.
남편의 상을 잘 모시고 친정에 돌아와 독수공방에 음식을 끊고 남편과 같이 죽으려고 한다. 인생의 무상함을 느낄 무렵, 삼천리강산 명승고찰에서 큰 스님들의 법문에 감화되어 전라도 백양사 송만암 스님에게 보살계를 받고 ‘성정각’이란 법명을 받는다.
지극정성으로 염불하고 정진하던 중 하루는 꿈에 스님이 나타나서 ‘제주도 한라산에 가서 봉려관 스님을 만나라’ 함에 이상한 일이라 여겼다. 그 발걸음으로 제주도 한라산 관음사를 찾아와 보니 초가집에 한 비구니 스님이 계셨는데 대화를 해 보니 해월당 안봉려관 스님이었다.
성해 스님은 봉려관 스님의 유발상좌가 되기를 청하여 상좌가 되었고 이러한 길몽을 봉려관 스님도 동시에 꾸었다. 관음사는 당시 1936년 화재로 인해 소실되어 봉려관 스님은 산천단 인근에서 수행정진 했었다. 그래서 봉려관 스님을 은사로 하여 유발승계를 받게 되자 아버지에게 간청하여 당시 거금 만원을 남동생 국상현으로부터 받아 1941년 가을에 관음도량에 비로소 기와집 대웅전을 건립하게 되었다.
그로부터 성해 스님은 청정한 계행을 가지고 전국 사찰에 크고 작은 불사에 동참, 단독으로 스님들의 수의 가사를 백량이나 지어서 전국 대덕 스님에게 공양 올렸으며, 몸은 전남 담양에 있었으나 마음은 관음사에 항시 있었다.
50여년 동안 재가불자로 수행하다가 봉려관 스님의 대를 잇고자 지난 1961년 봄 담양 보광사에서 전 조계종 종정 윤고암 스님에게 비구니계를 받고 성해라는 법명도 받았다. 아버지 우송공이 아끼던 ‘우송정’을 참선 염불방으로 개축할 것을 허락 받고 부처님을 봉안했다.
상좌에는 제주에서 올라온 법선 스님을 두었고, 1963년 봄 속세 나이 74세에 부산 범어사에서 동산 스님에게 비구니 구족계를 받으니 호는 ‘학천’이었다. 이에 우송정을 길이 빛내기 위해 ‘우송사’라 명하고 초대 주지에 취임하게 된다.
스님은 지긋한 나이로 제주 관음사에 왕래가 힘들었지만 항시 관음사를 마음에 두었다고 한다. 스님은 1982년 임술년 2월 14일 우송정에서 세수 94세, 법랍 21세로 열반에 들었다.
일오당 법선 스님봉려관스님 시봉하며 성해 스님과 인연 닿아평생 청렴으로 정진하며 비구니 스님의 표상스님의 법명은 법선이며, 호는 일오(一悟)다. 제주시 삼도동 출신으로 1898년(기해년) 2월 14일 생이다. 속명은 홍덕선으로 부친 남양 홍씨 석찬이며, 모친은 진주 강씨 숙진으로 명문가 집안에서 태어나 지혜가 총명한 규수로 성장했다.
독실한 불가의 집안에서 자란 스님은 1925년 관음사 초창기 제주불교협회 창설에 앞장섰던 강태현 거사와 인연이 닿아 백년해로를 약속해 혼사를 치렀으나 불행히도 3년 만에 남편을 잃고 만다.
인생무상을 느낀 스님은 마침내 해월 봉려관 스님을 만나 위로를 받게 되면서 부처님께 귀의하니 이때가 1931년(신미년)이다.
봉려관 스님을 따라 관음사와 인연을 맺게 된 법선 스님은 도량의 허드렛일부터 스님의 시봉까지 힘든 일도 마다하지 않았다. 스님이 수행하는 모습을 지켜보시던 봉려관 스님은 “신심과 계행을 게을리 하지 말며 속세의 인연을 끊고 염불 수행으로 정진하여 장차 관음사 중흥에 이바지하여 불은에 보답하라”고 당부했다.
스님의 가르침에 따라 정진해오던 법선 스님은 마침내 봉려관 스님을 따라 1937년(정축년)에 전라도 담양의 국참봉 댁을 방문하게 되는데 이때 법선 스님은 국추를 만나게 된다. 이분이 바로 법선 스님의 스승이신 성해 스님이다.
이 때 봉려관 스님은 법선 스님에게 이르기를 “이제부터 성해 스님의 유발제자로써 이 집 노부부의 시봉과 대소사를 성심을 다하면, 그 원력으로 관음사 중흥이 이뤄질 것이다”라며 어떠한 고행도 수행 삼아 노력하라고 당부했다.
국참봉 댁에서 법화경을 읽고 따라 쓰는 일과 더불어 집안에서도 사찰과 같이 수행하며 정진하시던 법선 스님은 1938년(무인년) 늦은 봄 자신을 이끌어 주셨던 해월 봉려관 스님이 입적하게 되자 국참봉 거사와 함께 다비식에 동참한 후 국 거사로부터 평생 숙원이었던 관음사 중건을 약속받게 된다.
그 후 1941년(신사년) 봄 국참봉 거사는 성해 스님과 법선 스님 편에 관음사 중건불사에 거금과 도편수 등 목수 32인을 제주에 내려보내니 국참봉 거사와 아들인 상현 거사가 관음사를 재건, 오늘날 제주불교 중흥의 기틀을 마련하게 된 것이다.
그 후 신도의 신심과 원력으로 중건된 관음사는 1948년 4․3의 광풍으로 소실되는 비운을 맞게 된다. 이 참담한 현실 속에서도 부처님을 모시기 위해 당시 관음사 주지 향운 스님, 총무 연종 스님과 대화주 대원각 보살, 신도회장 이차룡을 비롯해 강항규, 이방훈, 김영희, 강원필, 이재은 씨 등이 동참한 가운데 제주시 도남동 856번지에 신 관음사(현 보현사)를 창건하게 된다. 도남동에 보현사를 창건하게 된 배경은 4․3이 진정된 후 도내 사부대중은 관음사를 다시 재건하고 싶었지만 한라산이 입산금지령이 내려지면서 좌절의 다시금 겪어야만 했다. 한라산 입산금지령이 언제 해제될 지 그 아무도 몰라, 도남동에 신 관음사를 창건하게 됐다.
온갖 고난 속에서도 관음사 중건불사를 성취한 법선 스님은 1960년(경자년)에 마침내 담양 보광선원에서 성해 스님을 은사로 사미니계와 법명을 ‘법선’이라 받았다. 1963년(계묘년)에는 동산 스님을 계사로 비구니계를 수지했다.
스님은 신 관음사(현 보현사)에 주석하며 관음사 재건 불사를 염원해오다가 1991년(신미년) 음력 12월 10일 세수 93세에 입적했다.
평생을 사재 하나 없이 청렴으로 실상염불에만 전력해온 스님은 제주불교 본산인 관음사 중흥발전을 위해 전력으로 정진한 비구니 스님으로서 근대 출가자의 표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