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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주의 신학과 성경논쟁
역사 비평학의 태동과 발전 한계와 극복을 중심으로
들어가는 말
자유주의 신학을 이야기할 때 성경해석 분야에 있어서는 보통 고등비평 (higher criticism) 혹은 역사비평학 (historical criticism)이라 불리워진 학문 영역을 논하게 된다. 역사비평학은 그것에 대한 전문적인 지식이 있건 없건 또는 그것을 옹호하든 비판하든 이미 그 영향력이 광범위하게 미쳐지고 있다.
목회자가 설교준비를 위해 주석서를 읽을 때 교사나 평신도가 성경을 이해하기 위해 도움되는 책들을 읽을 때 접하게 되는 많은 책들이 역사비평학이라는 도구를 사용해서 연구되어지고 다듬어진 책들임을 발견하게 된다. 자유주의 신학자들뿐만 아니라 보수주의 신학자들로 자처하는 학자들까지도 이 도구를 무시할 수 없는 것이 현실의 상황이다.
그러나 이렇게 심대한 영향을 미치는 역사비평학이 결코 결함이 없다거나 완성된 성경해석 방법론은 아니다. 이 글에서는 성경해석 분야에서 논쟁의 초점이 되는 역사비평학의 발전 과정을 살피면서 긍정적인 면 및 부정적인 면을 지적함으로써 우리의 신학자세와 성경이해에 보탬이 되고자 한다.
I. 역사비평학이란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딤후3:16)라는 구절은 기독교인의 가장 기본적인 신앙고백이다. 이러한 신앙을 바탕으로 신구약 성경을 읽어 내려가노라면 읽는 가운데 수많은 의문점들을 발견하게 된다. 성경 안에서 여러 책들이 서로 다른 주장을 하고 있는 점 예를 들면 예언자 아모스는 성전에 가서 죄를 더하라(암4:4)고 성전을 비판하였는데 예언자 학개는 성전을 빨리 짓지 않는다고 책망하고 있다(학1:4). 성경이 알려주는 바에 따르면 아모스의 시대와 학개의 시대는 다르며 성전의 상황도 다름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열왕기와 역대기는 도일한 시대에 대해 이야기를 하면서도 내용이 다르며 같은 내용이면서도 연대 및 인명 지명이 다른 경우를 보게 된다. 이는 열왕기 저자의 상황과 역대기 저자의 상황이 다르며 신학도 다르기 때문으로 풀이해 볼 수 있다.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이지만 수세기에 걸쳐 서로 다른 역사적 상황 속에서 서로 다른 사람들의 손으로 기록되어진 것으로 오늘 우리 손에는 한글로 번역된 서로 다른 66권의 책들이 합쳐져서 하나의 성경으로 들려져 있다.
그러므로 각각의 책들이 혹은 한 책 안에서도 구분되어지는 부분들이 어떤 시대적 배경과 상황에서 무슨 목적으로 누구에게 말하려고 그리고 누구에 의해 기록되어졌는가 하는 질문은 성경을 대하는 독자에게는 가장 기본적인 물음인 것이다. 역사비평학은 이러한 의문을 풀어주려고 시도한 해석방법으로서 유용하게 사용되고 있지만 동시에 그 한계성이 드러나며 때로는 맹목적으로 달리기만 하는 자동차와 같은 위험한 모습도 엿보인다.
II. 역사비평학의 태동
19세기에 절정을 이룬 역사비평학은 그 태동이 17-18세기에 있었다기보다. 오히려 교부시대 더 추적해보면 신구약 성경 안에서도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시편에는 표제가 있는 시들이 있다. 예를 들면 시편 60편 표제를 보면 “다윗이 교훈하기 위하여 지은 믹담 영장으로 수산에둣에 맞춘 노래 다윗이 아람 나하라임과 아람소바와 싸우는 중에 요압이 돌아와 에돔을 염곡에서 쳐서 일만 이천인을 죽인 때에”라고 사무엘하 8장 38절과 10장 15-20절의 상황임을 지적하여 기록되어 있다. 이 표제에서 저자가 누구이며 어떤 상황에서 무슨 목적으로 이 시를 썼는지에 대해서 관심을 갖고 밝힌 내용은 바로 역사비평학에서 관심을 갖고 알아내고자 하는 것들이다. 그리고 히브리어성경에는 표제와 시의 본문을 별도로 구분하고 있지 않지만 우리가 읽는 번역판인 한글성경에는 표제를 괄호에 넣고 작은 글씨로 표기하여 이 표제가 후대에 첨가된 것임을 암시해 주고 있다. 이 또한 역사비평학의 산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구약성경은 기독교인의 경전일 뿐만 아니라 유대교의 경전이기도 하다. 유대교의 랍비들은 일찍부터 오경과 욥기는 모세가 기록하였고 이사야서 잠언 전도서 아가 등은 히스기야왕과 그의 사람들에 의해 저술(편집)되었다고 주장하여 저자 및 편집자에 대한 관심을 나타내었다. 역사비평학은 유대교 랍비 뿐만 아니라 기독교의 초대교회 안에서도 연구된 흔적들이 있다. 랍비들과 초대교회의 기독교인들은 성경의 “문자적 의미”와 “영적 의미”를 분리하면서도 영적 의미를 강조할 뿐만 아니라 문자적 의미도 경시해서는 안됨을 지적하였다. 안디옥 학파의 사람인 몹수에스티아의 데오도르 (Theodore of Mopsuestia, 약 350-428)는 깊은 영적 의미는 반드시 성경 본문의 문자적 의미에 기초해야 된다고 역설하였다. 이 문자적 의미는 다분히 성경을 비평적으로 보는 견해를 포함한 것이었다.
그러나 초대교회와 교부들의 성경해석은 기독론적으로 신구약 성경을 해석하려 하였고 문자적 역사적 의미보다는 우의적 (allegorical) 해석 방법을 사용하여 영적 의미를 찾기에 몰두하였다. 유대교의 랍비들 역시 우의적 해석 방법을 광범위하게 사용하였으며 역사비평적 성경해석 방법은 태동의 기미는 있지만 미미할 수밖에 없었다. 어거스틴 (Augustine, 354-430)은 다음과 같이 역사비평학에 대해 경고하였다
“만일 성경 내에서 발견된 명백한 모순 때문에 당황하게 된다면 이 책의 저자가 실수하였군 하며 간단히 말해버려서는 안되고 그 대신 사본에 문제가 있거나 번역이 잘못되었거나 혹은 이해력이 부족하다는 데 주목하여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성경은 신성한 것이다. 다른 책들을 읽을 때 독자는 자신의 견해 때문에 또는 이해력이 부족해서 저자의 생각과 다른 경우가 있을 수 있겠지만예언자이든 사도 혹은 전도자이든 그들에 의해 말해진 것이 실려있는 이 경전을 우리는 진리로 받아들여야만 한다.”
중세기에는 기독교인들보다. 유대교의 랍비들이 오히려 히브리어 연구에 몰두하였고 구약성경을 비평적인 안목으로 보았다. 주석서들을 저술한 랍비 아브라함 이븐 에즈라 (Abrkham Ibn Ezra)는 오경의 모세 저작설을 의심 하였으며 모세 벤 사무엘 기탈리아 (Moses ben Samuel Gikatilla)는 이사야서 39장과 40장 사이에는 분명한 구분이 있음을 지적하였다.
르네상스 인문주의자들은 고전 연구에 몰두하였고 문법적 과학적 방법을 개발시켰으며 문서비평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비록 종교개혁가들인 루터와 칼빈 등은 직접 역사비평학을 발전시키지는 않았지만 역사비평학이 발전할 수 있는 여건을 조성시켜 주었다. 교회의 전통보다는 개별적으로 성경으로 돌아가서 고전을 연구하는 르네상스의 영향력과 동반하여 히브리어와 헬라어 연구부터 출발하는 성경해석을 함으로써 비평적 연구의 촉진제 역할을 하였고 성경의 문자적 의미에 관심을 갖도록 하였다. 칼빈의 주석서에는 히브리어가 많이 사용되었으며 성경의 역사적 상황에 대한 그의 관심도 높았음을 엿볼 수 있다.
III. 역사비평학의 발전
역사비평학의 발전은 역시 17세기부터라 보아야 할 것이다. 그들의 전제는 다음과 같다
① 성경은 다른 책들과 같이 동일한 비평적 방법으로 연구되어질 수 있다.
② 성경은 저술되고 전달되는 긴 역사가 있는 책이다.
③ 오경의 내용에 있어서 특정한 스타일 및 반복 등이 나타남을 볼 때 한 저자의 작품이 아니었을 가능성이 높다
④ 성경의 여러 책들은 여러 사람에 의해서 개별적으로 특수한 상황에서 특별한 목적을 위해서 기록되어졌다
그들 학자들 가운데는 홉스 (Thomas Hobbs, 1588-1679), 스피노자 (Benedictde Spinoza, 1632-1677), 그로티우스 (Hugo Grotius, 1632-1677), 가톨릭 신부인 시몽 (Richard Simon, 1638-1712)등이 많은 활약을 하였다. 스피노자의 원래의 이름은 바룩으로 유대인이었으나 성경에 대한 비평적 견해 때문에 유대인 공동체에서 축출당하였다(1656). 즉 17세기 역사비평학의 발전은 비교적 소수에 의해서 조심스럽게 행해졌으며 가톨릭이든 개신교든 유대교에서까지도 역사비평학의 발전을 그리 달가워하지 않는 상황이었다.
역사비평학의 본격적인 발전은 18세기부터라 보아야 할 것이고 19세기에 이르러 꽃이 피었다고 볼 수 있다. 18세기는 영국과 미국의 이신론자 (deist)들의 영향을 받게 되는데 그들은 톨란드 (Toland), 클락 (Clark), 틴달 (Tindal), 제퍼슨 (Jefferson) 등이다. 그들은 성경에 나오는 기적이라든가 하는 초자연적 사건들을 부정하며 “종교를 이성의 영내에” 두기를 원하였다.
이 영향을 받은 독일학자 라이마루스 (Hermann Samuel Reimarus, 1694-1768)는 출애굽 규모가 60만 히브리 장정(출12:37-38)이었다는 것은 역사적으로 불가능하다면서 다음과 같이 지적하였다.
“60만 장정과 아내와 아이들까지 합하면 약 300만명 그리고 가축 및 동물들의 숫자까지 합하면 적어도 5,000의 수레가 필요하고 30만 개의 텐트가 있어야 한다. 10명씩 한줄로 걸어도 3,000km의 긴 행렬이 될 것이다.”
18세기에 역사비평학의 초석을 닦은 책은 아이히호른 (Johann Gottfried Eichhorn, 1752-1827)의 3권으로 된 구약개론 (1780-1783)이라 할 수 있겠다.
1. 자료비평 (Source Criticism)
18-19세기의 역사비평학의 초점은 오경 연구에 있었는데 주로 자료비평 (source criticism) 혹은 문서비평 (documentary criticism) 또는 문서설 (documentary hypothesis)이라 일컫는 연구가 활발하였다
비터 (H.B. Witter, 1683-1715)와 의사인 아스트룩 (J. Astruc, 1684-1766)에 의해 주창된 문서설은 신명(神名)의 차이를 주시하였으며, 그라프 (K. H. Graf, 1815-1869)와 퀴넨 (A. Kuenen, 1828-1891)에 의해 급속히 발전되었다. 자료비평의 결과를 집대성한 학자는 벨하우젠 (J Wellhausen, 1844-1918)으로서 이른바 J(야외문서), E(엘로힘 문서), D(신명기 문서), P(제사장 문서)의 순서로 구분되는 오경의 문서들을 “이스라엘 역사 제1권”에서 발표하였다.
벨하우젠은 이스라엘 종교가 단순한 형태에서 복잡하고 체계적인 형태로 발전하였음을 가정하였다. 벨하우젠은 이러한 역사의 진화론적 견해를 바탕으로 하여 이스라엘 종교를 이야기할 때 출애굽부터 시작하였고 족장시대를 초기 형태로 인정하지 않았다. 그는 예언자들을 높이 평가하였으며 오경은 포로후기의 산물임을 밝혔다. 참고로 그가 피력한 이스라엘 종교의 발달과 J.E.D.P 각 문서의 위치를 도표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표1)
(표1)
● 성소
1) J. E : 여러곳의 제단과 성소
2) D : 한 장소에서 제사드리도록 함
3) P : 한 장소에서 제사드리는 것이 기정사실임
● 희생제사
1) J. E : 간헐적으로 자유롭게 드림
2) D : JE와 비슷 (에스겔은 규정화 하려 함)
3) P : 규정화된 상태 - 누가, 언제, 어떻게 제사드리는지 규정
● 축제
1) J. E : 즐거운 농경축제
2) D : JE와 비슷 (유월절과 무교절이 합쳐져 있는 상태)
3) P : 추수기를 중시하기 보다 달력에 의해 축제일 결정됨 (대속죄일 첨가)
● 성직자
1) J. E : 평민과 제사장 구별없음
2) D : 제사장은 레위인
3) P : 아론 계열이 제사장이며 레위인은 하위직에 종사
● 성직자 수입
1) J. E : 재물에서 나오나 규정되지 않음
2) D : 일부분의 규정화
3) P : 확실히 규정됨 (십일조 및 다른 수입 명칭들)
벨하우젠이 연구한 주석적 결과는 많은 비평을 받아왔지만 그의 비평적 연구방법은 그대로 계승되어 명실공히 19세기의 역사비평학을 대변해 주는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교회의 반발에 부딪혀 1882년 그가 교수직을 사임하게 되었으며 이는 그 당시의 분위기가 문서설을 용납하기 어려웠다는 것을 반영하는 것이다.
에발트 (H. Ewald, 1803-1987)는 벨하우젠의 스승이었으며 그 당시 대부분의 학자들을 비판하였고 성경을 계시로 그리고 성경에 궁극적인 통일성이 있음을 확신하였다. 그러면서 그는 성경은 하나님의 계시인데 인간의 대화 가운데 주로 나타나며 하늘로부터 들려오는 목소리가 희귀함을 또한 지적하기도 하였다.
신학적 이유를 들면서 벨하우젠의 문서설을 반대하는 학자들도 많았지만 보다 더 근본적인 의의를 제기한 학자들도 있었다. 어드만 (B.D. Erdman)은 벨하우젠의 전제인 진화론적 도그마를 공격하면서 이스라엘 역사와 종교사에 관해 의의를 제기하였다. 비록 포로시기 또는 포로후기에 제사장들에 의해 오경이 완성되었다. 하더라도 제사에 관한 체계는 포로시기 이후에 확립된 것이 아니라 이미 시행되어 온 것을 정리하였다는 견지에서 모세시대 때도 레위 제사체계의 기본적인 틀이 형성되었다는 것을 부정할 이유가 없다고 하였다. 더 나아가서 카수토 (Umberto Cassuto)는 J.E.D.P로 구분하는 것을 거부하고 실제로 이 다양한 면들은 다만 한 저자의 의도적인 문체 변형일 뿐이라고 주장하였다.
어드만과 카수토는 문서설을 포함한 역사비평학에 근본적인 의의를 제기하고 있으나 많은 학자들은 과학적 비평 방법의 유효성을 인정하는 범위 안에서 해결점을 모색하려 하고 있다. 최근에는 D가 먼저냐 P가 먼저냐 하는 논쟁이 열기를 더해가고 있으며 많은 학자들이 P문서 자체가 포로전 왕국시대의 산물임을 주장하고 있다. 카우프만 (E. Kaufmann)은 P는 J,E시대 부근이라 주장하였고 헤이스 (J. H. Hayes)는 요시아왕 때 발견된 율법책이 D가 아니라 P임을 월력체계의 변경과 연관시켜 설득력 있게 주장하였다.
2. 양식사 비평 (Frm Criticism)
양식사 비평의 선구자는 단연 궁켈 (H. Gunkel)이다. 궁켈은 벨하우젠의 연구를 기초로 하고 있으며 각 문서들이 문자로 기록되기 이전의 구전(口傳) 시기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 지금 문서화된 여러 설화와 율법 규정들의 구전 시기의 배경은 어떤 특정한 장소와 관습과 관련을 맺고 있으며 각기 특수한 “삶의 자리 (Settinginlife)"가 있음을 그는 지적하고 있다. “우물의 노래”와 “포도원의 노래”가 다르며 “결혼 축가”와 장례식의 “만가”의 형태가 다를 것이 분명하다. 이러한 노래들의 형태는 이스라엘 지역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고대 중동 문화권 속에서 얼마든지 서로 영향받고 영향을 줄 수 있는 보편적인 노래의 형태인 것이다. 각기 흩어져 있으며 각기 독특한 문학 유형으로 표현된 것들이 모여져서 연속적인 이야기로 형성되었다는 것이다. 궁켈은 창세기와 시편연구를 주로 하였으며 그의 동료 그레스만 (Hugo Gressmann)은 출애굽기와 역사서들을 연구하였다.
양식사 연구의 장점은 성경의 각 부분 부분을 깊이 연구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반대로 이 연구방법의 결점이기도 하다. 즉 긴 이야기를 짧은 단위로 나누어 연구하다. 보니 성경을 단편적으로 조각내어 짧은 문장의 분석을 세밀히 할 수는 있지만 여러 단편들을 연결시키는 연결점을 찾지 못해 결국 성경해석이 파편들의 집합처럼 되어버린 것이다. 예를 들면 볼프 (H. W. Wolff)는 아모스서의 발전 단계를 6단계로 나누었다. 또한 작은 단위 일수록 순수하고 고대의 것이라는 가정은 역사비평가들로 하여금 9장밖에 안되는 아모스서를 40-50개의 작은 단위로 나누게 하였다. 너무 파편화된 작은 단위는 단위 자체의 구조와 내용 및 정황 등에 대해 충분히 설명할 수도 없게 되는 것이다.
3. 전승사 비평
전승사적 방법 (taditiohistrical method)은 구전으로 전승되는 단계에서 그 전승내용과 전승의 과정에 관심을 기울인다. 폰 라트 (G. von Rad)와 노트 (M. Noth)는 이 분야를 대표하는 학자들이다. 폰 라트는 “짧은 역사적 신앙고백들 (short historical credos : 신6:20-24, 26:5-9, 수24:2-13)"이 원래 가나안 정착 초기에 길갈 성소에서 발생했으며, 이 신앙고백을 바탕으로 야웨기자 (J)는 다양한 전승들을 추가하여 J문서를 형성시켰다고, 그의 논문 “육경의 양식비평적 문제”에서 밝혔다. 그러나 폰 라트의 연구에 있어서 문제는 그 짧은 역사적 신앙고백들이 J연대보다 후대의 것으로 보여진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폰 라트가 관심 두는 문제 즉 J가 어떤 목적으로 그러한 모든 것을 기록하였는가 라는 물음과 기본적인 전승들이 어떻게 전달되어 왔는가에 대한 관심은 상처입지 않고 그 중요도를 유지하고 있다.
노트 (M. Noth)는 신명기를 제외한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를 4경이라 구분하여 여기에 담긴 자료의 전역사 (prehistory), 즉 자료의 배경과 성장과정을 다루었다. 노트는 여러 다양한 전승들을 집합시키는 다섯 개의 주제들을 발견하였으며 그것들은 족장들에게 주어진 약속 출애굽 광야사건 시내산 계시 가나안 정착 등이다.
IV. 역사비평학을 넘어서서
청동기시대에서 철기문명으로 전환된 시대는 주로 1200년경으로 주전 13세기 말에 해당되는데 아브라함의 이야기가 철기문명을 배경으로 되어 있다면 무언가 아브라함 이야기에는 내용상 층이 있고 내용의 전달과정이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마치 땅속을 파고들면 여러 개의 지층을 만나게 되듯이 성경에도 그 내용의 층들이 있음을 가정하게 된다. 이스라엘의 역사를 기록할 때 같은 시대 같은 인물들 동일한 사건을 다르게 묘사하거나 강조점에서 차이를 나타내는 열왕기와 역대기를 비교해 보면서 각 역사가들의 신학적 의도가 다르다는 것을 그리고 그들의 시대적 배경도 다름을 알 수 있다.
역사비평학의 태동과 그 발전을 지켜보면 처음부터 새로운 학문 영역을 창설한다는 의도보다는 성경에서 발견되는 모순 충돌 등, 어려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하나의 방법으로 출발하였고, 오늘날까지도 역사비평학은 변화와 발전을 계속하고 있다. 역사비평학은 문제해결을 위한 하나의 도구이다. 성경연구를 위한 방법론으로서 언제나 그 자체의 변화 개선 발전이 요구되는 어떤 것이다.
역사비평학은 기본적으로 성경을 다른 문학 작품과 다르다는 것을 인정하지 아니하고, 다른 문학 작품을 분석하듯이 같은 방법으로 객관적이고 과학적인 안목으로 성경을 해석하고자 한다. 그러나 성경은 문학성 외에 종교성이 있는 책이다. 역사비평학이 종교성을 충분히 표현하는 데는 완전하지 못한 도구임을 자인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역사비평학을 넘어선 성경해석 방법이 모색되고 있는데 대표적인 것은 경전비평 (Canonical Criticism)과 구조주의 (Structualism) 그리고 신비평학 (New Critics) 등이다. 아직 완숙되지 않은 방법들이지만 새로운 방법을 모색해야만 하는 지금 시점에서는 그들이 돌파구로 보이는 것이다.
“경전비평”이라는 단어에서도 보여주듯이 이 새로운 방법들이 역사비평학을 제외시키거나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기존 역사비평학의 업적을 충분히 활용하면서 그 결함을 극복해 보려는 노력인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기본적으로 역사비평학에 있어서 경전이라는 것은 해석 작업의 지침이 되는 것이 아니라 제거되어져야 하는 방해물로 여겨진다는 데에 있다. 왜냐하면 경전화된 문서는 원래의 의미를 즉 역사비평가들이 찾아내고자 하는 의미를 모호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여기에 역사비평과 경전비평의 갈등이 있다.
성경을 경전으로 받아들이며 결점을 극복하는 방안 가운데는 성경의 많은 부분이 설교의 형태로 보존되어 있음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신명기는 모세의 설교형태로 나와 있으며 역대기 기자도 레위인의 설교들을 많이 싣고 있다. 예언자들이 외친 그 목소리를 그대로 담은 예언서의 부분들은 역시 예언자들의 설교로 가득 차 있다.
여러 가지 자료를 모아 기록하여 편집한 저자와 편집자 역시 어떤 메시지를 전하려는 신학적 의도로 저술하여 편집하였음을 밝히 알아볼 수 있다. 메시지를 전하려고 하는 것은 바로 설교자의 자세이며 설교의 상황 (context)에서 그 글들을 살펴보아야 한다.
설교는 종합적인 상황이다. 설교자는 수사학적 방법을 동원하여 예화와 예문들을 사용하여 가급적 청중의 가슴에 부딪히는 메시지를 전하려 한다. 양식사 비평의 결과로 단편화된 본문보다는 하나의 주제 혹은 하나의 설교문같이 다소 큰 묶음으로 된 성경본문임을 알고 해석도 본문이 설교임을 감안해서 행해져야 할 것이다.
역사비평학을 오늘의 신앙세계인 설교현장과 연결시키기 위해서는 그 중간에 교량역할을 할 수 있는 신학작업이 필요하다. 역사비평학을 통해 얻어진 것은 성경의 시대에 관한 것으로 수천년 전 팔레스틴과 주변의 중동세계에 관한 이야기로서 문화, 풍습, 언어 등이 오늘날 우리의 것과는 판이하게 다른 것들이다. 이러한 이질적인 것들이 우리에게 무슨 의미를 줄 수 있겠는가 여기에는 신학작업이 필요한데 문제는 신학작업이 부진하다는 데 있다. 히브리어 연구를 통해 히브리인의 독특한 사고방식을 알아내려는 노력도 설득력을 잃어버렸고 2차대전 이후 한동안 베트남 전쟁 전까지 기세를 올렸던 “성경신학 운동 (Biblical Theology Movement)"도 힘을 잃어버렸다. 성경신학의 위기 (Biblical Theology in Crisis)를 맞아 뚜렷한 대안을 찾지 못한 상태로 성경신학은 역사비평학과 설교자 사이의 교량역할을 충실히 감당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역사비평학을 유용한 도구로 사용하려면 역시 성경신학이 뒷받침해 주어야만 한다는 사실을 이야기할 수밖에 없다.
맺는 말
이제까지 자유주의 신학의 성경해석 방법인 역사비평학에 대해 살펴보았다. 주로 역사비평학의 태동과 발전 과정을 더듬으면서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을 동시에 조명해 보았으며 이 방법론을 넘어설 수 있는 돌파구도 생각해 보았다. 역사비평학은 과학적인 도구로서 성경을 문학적으로 역사적으로 분석하는 데에는 유용한 도구이지만 성경을 경전으로 보는 신앙의 세계와는 거리가 있다.
그러나 문제가 있는 방법이라 해서 중요한 도구를 도외시 할 것이 아니라 그 장점을 살리고 단점을 극복 보완하여 성경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도록 사용할 필요가 있다. 또한 이 방법의 결과인 과학적이고 객관적인 정보를 신앙의 세계와 연결시켜 주는 신학적인 작업이 요구된다.
정중호/신학박사(에모리대)/오번 한인장로교회에서 시무/ 계명대학 신학교과 조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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