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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 강의 -도올 김용옥
제 15강 : 무아란 무엇인가?
오늘 이렇게 여러분들, 많은 분들이 스튜디오에 나와주셔서 방청해주시는 것 감사합니다. 사실 지난번 강의가 구룡사에서 한 강의가, 불교 이론의 모든 것을 총체적으로 요약한 강의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강의내용이 어려웠거든요. 너무 중요한 것이 압축적으로 강의되었기 때문에, 오늘 다시 그 강의내용을 반복해보려고 해요. 다시 한 번, 요약을 해보겠습니다.
싯달타라는 사람은 역사적으로 존재했던 X라고 보자. 카필라성의 왕자다. 뭔지는 모르겠다. 그게 중요한 것은 아니고, 역사적 인물이 있었다면, 그 인물 당대 전통 바라본 시각이라든가, 당대문학에 능통한 베다문학 - 이란을 거쳐 인도에 들어온 아리안족들이 만든 신에 대한 제식의 찬가. 산스크리트어로 쓰임. BC1500-1200년경에 성립. 사람이였든게 분명하고, 대단한 지식인이였던 것 같아요. 이 이상 얘기하고 싶지 않습니다.
어떤 인생의 고뇌를 느껴 출가로부터 시작했어요. 일체개고 - 모든 것이 고다 고통스럽다. 고의 반대가 뭐라고 생각하세요? 낙이라고 생각하시죠? 그러면 일체개고로부터 벗어나서, 낙으로 가는 거라고 생각해요? 고라는 말이 인도말로는, 두카라는 말인데, duhkha 번역이 고가 되니까. 반되 락이 된다. 마치 우리가 고에서 벗어난다는 것이, 즐거움으로 가는 것이다. 즐거움으로 가는 것, 오해하기 쉬운데, 중요한 것은 낙은 고의 일종이다 일종이에요. 인생이 즐겁다고 한들, 어떻게 즐겁기만 하겠어요. 즐거운 시간 지나가면 고통이 오고, 고의 반대 낙이 아니란 말이에요. 주위에 즐겁다하며 잘 사는 사람들 있어. 그런데 그런 사람보면 대부분 사기꾼이거든. 도둑놈들이거든. 인생은 절대 즐거울 수 없어요. 해탈자에게도 인생은 즐거울 수 없습니다.
그러면 두카의 반대말은 뭐냐? santi 평화 평화라고. nirvanam santam 열반은 평화로운 것이다 내가 묵었던 호텔도 산탐호텔이였는데, 고요하고 편안하다. 고 - 평화, 고요함 해탈 추구는 고도 아니고, 락도 아닌 그런 고락을 초월한 인간이 사는데 어떠한 경우에도 고도 락도 오는 거에요. 고는 근원적 의미에요. 고는 단순히 고통스럽다는 것이 아니라 인간 존재의 모든 한계상황을 총칭하는 근원적이고 우주적인 명제이다.
고통스럽다고, 일체개고 아니에요. 왜 죽을 수 밖에 없는가. 거기에 대한 공포가 있고, 왜 한계사항을 가지고 있느냐. 태어난게 원망스럽다. 본질적인 근원적인 것에 대한 성찰. 여기서부터, 이 사람은 출가를 했어요. 뭐를 했다고 하죠? 처음에 선정주의의 깊게 들어갔다고 했어요. 선정, 뭐의 특별한 상태라고 한다면, 아편쟁이가 있다가 깨어난 것일 수 있다. 근원적으로 적정한 평화로운 마음 확보할 수 없다. 선정은 싯달타에게 영원한 벗어남을 제공하지 못했다. 고행을 해도, 안된다. 인간의 유체로부터 해방, 이건 흔해빠진 초월주의에요. 모든 금욕주의가, 기독교에도 우리에도 모두 다 있죠. 초월주의와 금욕주의는 상통하는데, 이는 다 이원론적 분열을 전제로 하고 있어 고를 가중시킨다.
옛날 중세기부터 금욕주의 신부님들 있잖아요. 육체 고통을부터, 이건 이원론. 고행론 기초에는 인간에 영혼이 있고 고귀한 건데, 이것이 더러운 육체에 갇혀 버렸다. 육체를 학대해. 정신만을 깨끗하게 해서, 분리시킨다. 이건 철저한 이원론. 이건 절대적인 뭐가 있단 말이잖아요. 이건 불교에 정면으로 위배되요. 영,육 이원론의 영혼초월주의는 항구적인 아트만을 전제로 한다. 바로 그러한 아트만이 고의 근원이다. 어떤 영혼이 있는데, 행복한 거고, 육체라는 감옥에 갖혔다. 나의 위대한 영혼이 더러운 육체에 갖혀서, 이건 유치한 서양 철학에 오염이된 것. 우리 나라 소설도 그런 거 밖에 없어. 그래서는 안되겠다. 이 사람은 기나긴 사색으로 들어갔어요. 내가 원하는 근원적인 것으로부터 해방될 수 없다.
보리수 밑의 싯달타는 선정에만 몰입한 것도 아니고, 악마와 투쟁한 것도 아니다. 인간의 근원적 문제들을 깊게 깊게 사색한 것이다. 근원적인게 뭐냐? 기나긴 사색 끝에 도달한게 연기라고 했죠. 연기론에 도달했다. 연기라는 건, 모든 것은 의존해서 같이 일어난다. 산다는 것은 죽기 때문에 의식하는 것이잖아요. 죽음과 삶은 같이 일어난 것이죠. 연기로. 짧은 거라는게 독립적으로 있어요? 없는 거란 말이죠. 대비되어서, 긴 것과 짧은 것, 같이 일어나는 거죠. 우리는 따로 생각한단 말이에요. 인간 삶이 따로 있고, 죽음이 따로 있다. 모든 것을 같이 일어나고, 어떠한 사물이든지 독립해서 있을 수 없단 말이에요. 고립적으로 존재할 수 없는 거에요. 고기 - 고립되어 단독적으로 일어난다. 여러분들이 지금 강의를 듣고 있으니까 하는 거지, 미쳤다고. 연기의 실상을 알자. 이건 당대에 굉장히 여러운 것이였어요.
왜 내가 태어났는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취함이 있기 때문이다. 12연기 과정. 별로 중요하지 않아요. 이거 불교에서 중요한 것으로 되어 있으나, 이건 상당히 후대에 형성된 것입니다. 싯달타 설법 모아서 만든 거라고 생각해요. 역사적 붓다는 정확하게 12연기를 설하지 않았다. 12연기는 다양한 연기관계를 설한 파편들이 후대에 종합되어 성립된 것이며, 그것은 아쇼카 3차결집 이후의 사건이 분명하다.
그러니까 상당히 복잡한 이론이 들어가는데, 우리나라에서는 동국대학에 아주 존경스런 분이 계셨어요. 고익진(1934-1988) 전남 광주출생. 동국대학교 불교학과에서 공부하고 그곳에서 평생을 정진하다 교수로서 생애를 마쳤다. -의 위업은 그의 필생의 작업이었다. 불행하게도, 오래 못하시고, 돌아가셨어요. 아주 대학자입니다. 고익진 선생은 20세기 한국 대석학이실 것입니다. 만나자고 해도, 돌아가시고 못 뵈었어요. 평소 질환이 심하셔서, 안타갑게 생각합니다. 그 양반 장례식 때 가서, 뵙고 말았는데, 이 양반의 아함법상의 체계성 연구 (고익진 지음) 우리나라 초기 불교 연구에 획기적인 것. 소개를 안하겠으나, 불교 연구하는 사람들, 천하의 명저로 꼽히는 것이기 때문에 소개를 합니다.
붓다의 12연기. 자기도 아함경을 보면, 권위있는 붓다가 아니라, 싯달타는 오만하기 이를 데없고, 사악하기 헤아릴 길 없는 중생들 속에서 처참할 정도로 고생하면서 진리를 위해 싸우는 지혜와 사랑의 인간으로 나타나 있다. "아함"을 읽는 이는 누구나 부처님이라기보다는 인간 싯달타의 너무나도 청순한 인간미에 우선 눈시울이 뜨거워질 것이다. 이런 느낌은 다른 경전에서는 맛볼 수 없는 것이다. 설득시킬려고 하고, 자기 주장하려고 눈물. 핵심은, 모든 것은 연기로 환원될 수 있다. 연기라는게 어떻게 나왔냐? 원리 12처로부터 고익진 선생 주장 12처 -6근 : 감각주관 들어가는 것. 결국은 뭐냐면, 이 모든 일체법이 아니미 설심이 없으면 꽝이에요.
(주/ 아니미 설심이 뭐랴?오역? 안이비설신의 아닌감?)
삼라만상은 아니미설심으로 수렴. 이게 있기 때문에 저것 : 6, : 감각대상 체계적으로 아함경을 중심으로 연구해 놓은 명저입니다. A가 있고 B도 있고, C도 있고, A를 멸하면 B도 없어지고, C 도 없어지죠. 무명이 없어지면, 노사까지도 없어진단 말이에요. 모든 법이 하나의 자기를 가질 수 없단 말이에요. 연기의 모든 항목을 제법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연기 속의 제법은 불변한 자기(아트만)를 가질 수 없다. 뭐냐면, 결혼이 성립되었다. 모든 세간의 법이라는 것이 만들어지면 없어질 수 있단 말이야. 절대적인 자기 모습을 가지고 있지 않단 말. 제법이 항상, 고정불변의 자기 동일성을 가지고 있지 않다.
제법무아. 제법무아란 말이, 연기론에서 도출된 가장 중요한 거에요. 그런데 간단치 않아요. 제법무아는 연기론에서 도출되는 자연스러운 결론이다. 그러면 우리가 무아라는 거를 잘 설명해 보자는거에요. 여러분들 말이죠. 무아 생각해보자구요. 지금 내가 지금 걷잖아요. 내가 걷고 있습니다. 내가 말하죠. 내가 강의하고 있어요? 내가 싯달타의 말을 전하고 있어요? 내가 걷는다고 그럴 적에, 내가 걷는다. 그러면 이건 분명히 우리 말, "내가 간다" 내가 가는데, 여기서 그러면 내가 있어서 가는 것입니까?
내가 간다 = 내가 있어서 그 "내"가 간다. 이것은 과연 정당한 명제인가? 가기 전에 어떤 내가 있어야 되죠? 백묵이 간다. 백묵이 있고, 이게 가는 걸로 생각하시죠. 내가 간다도, 내가 간다인데, 내가 있어서 가는 것일까? 그럼 보세요. 비가 온다. 이해되세요? 비가 있어야죠. 비라는게 있어요? 그러니까 비가 내린다. 그럴 적에, 내리는 것하고, 비가 따로 있나요? 비가 내린다 - "비"와 "내림"은 과연 분리될 수 있는 두 개의 다른 새태일 수 있는가? 예를 들면 구름이 내려온다. 구름은 떠 있을 때, 내려오면 구름이 아니잖아요. 다시, 꽃이 핀다. 그러잖아요. 피어있지 않은 꽃이 있어요? 피어있으니 꽃이지. 봉우리가 핀다. 말이 안되잖아요. 꽃이 핀다하면, 피어있는게 또 핀다는 말이잖아. 꽃이 핀다. - 꽃과 핌은 과연 분리될 수 있는 두 개의 다른 새태일 수 있는가? 그 꽃이 핀다라는 말이 되요? 안되요? 그런데 꽃이 핀다에서 꽃이 있고, 핀다라는게 따로 있다고 생각해요.
중론 - 2세기경 인도의 대사상가 용수에 의하여 지어진 중관학의 대표적 저작. 동국대 김성철 교수의 번역이 있다. 여기 한 번 같이 읽어봅시다. 거사적불거. 불거사불거. 리거불거자. 부제삼거자. 이거부터 생각해봐요. 가는 놈인즉 가지 않는다. 무슨 이야기냐면, 가는 작용(술부)을 떠난 가는 놈(주어)이 따로 있어서, 가 가는 놈이 가는 것은 아니다. 가는 놈이, 가버린 것에 이미 가버린 것에는 감이 없다 아직 가지 않은것에도 역시 감이 없다 가고 있는 것은 감니까? 이미 가버린 것과 아직 가지 않은 것을 떠나, 지금 가고 있는 중인 것에도 역시 감은 없다. 그럼으로 가고 있는 것은 가지 않는다는 말도 되는 것.가는 놈은 가지 않는다. 가는 기로에서 분리되어서 가는 건 아니란 말이야. 가지 않는 놈이 갈순 없잖아. 가는 놈과 가지 않는 놈을 떠나서 제 3의 가는 놈은 없다. 있을 수 없다. 어려워요?
3번째. 거자유거. 즉위이중법. 일이거자법. 이위거법. 어려운데, 잘 보세요. 가는 놈이 갔다. 간다라면 가는 놈이 간다하면, 가는 것에 두 개의 법이 생길 수 밖에 없다는 거야. 가는 놈 속에 이미 감이 있잖아요. 그러면 간다고 하는 술부에 이미 감이 있잖아요. 그러면 2개가 있잖아요. 동어반복 - 토톨로지 그런데 우리 말을 보면, 문제가, 철수가 간다. 될 것 같죠. 그러면 철수는 가는 놈이지. 그러면 가는 놈이 간다는 것이 된다고. 그러면 우리는 말을 하는 동시에 모순이 되는 거라고. "가는 놈이 간다"는 동어반복의 오류를 범하고 있다. 가는 놈(주부)과 감(술부)을 분리하는 동시에 이런 오류에 빠진다. 가지 않는 놈이 간다. 안되요. "가지 않는 놈이 간다"는 모순의 오류이다. 언어라는 거는 우리가 이 세계를 전혀 반영할 기능이없다는 거에요. 거울이 있잖아요. 왜 봐? 비추잖아요. 거울이 있는 그대로 비추지만, 언어로 되어있는 거울 .그걸로 우리는 살고 있단 말이에요.
그런데 이 언어라고 하는 거울이 개판이란 말이에요. 언어라는 거울(사유체계)은 이 세계를 있는 그대로 반영하지 않는다. 알고보면, 말이 안된다는 거에요. 그러니까 우리들이 할 적에, 불이 났다. 하면, 생각해봐. 딴 문제지만. 언어학에서 영어를 배울 적에, 주어, 술어가 있다고 하잖아요. 서양 언어에 있어서 주부와 술부의 관계는 실체와 속성의 관계와 일치한다. 우리 때 부터 주어를 꼭 써라. 이런 것 배웠어요. 불이 났다. 어느 집이 주체를 밝히고, 어디에서 몇 시에 났습니다. 그렇게 해요? 그냥 불히고 말지. 불! 이라는 이 명제는 분리될 수 없는 그 총체적 새태에 대한 언급이다.
현대 문법학에 번역문법, 생성문법. 변형문법 - 춈스키에 의하여 시도된 새로운 언어학의 물결. 생성문법이라고도 한다. 그거를 트랜스폼에 들어가 언어의 밑바닥에 있는 것을 만들어 냈어. 그 문법에서 밝힐려는 것은 궁극적으로 인간의 사유의 법칙을 밝히려는 것. 표층구조를 변형시켜 심층구조를 찾아내는데 그 궁극적 목표는 문법 그 자체의 발견이 아니라 인간의 보편적인 선험적 사유구조를 밝히려는 것이다. 문법의 구조를 밝히면, 인간의 사유구조를 알 수 있다. 그 사람이 얼마나 밝혔는지는 알 수 없겠으나, 요즘 비실거리는 것 같던데, 언어라는게 반드시 주어중심으로만 생각할 수 없단 말이에요. 주어가 없이도 성립하는 문장. 충분히 성립. 주어줌심의 문법에서 요즘에는 동사중심으로, 문법학에서도. 주어중심설 - 동사중심설 니가 어떤 상태에 있느냐? How are you? 근데 우리는 "안녕하십니까?" 어디갔어요? 주어가 없어요. 사실 주어가 없는게 우리 말에 더 아름다운 언어에요. 불교적 사유를 하는 거에요. 주어가 숨은 주어로 감추어져있다 할지라도, 명제에 있어서 주어가 꼭 필요충분조건은 아니다. 술부를 주어의 종속으로만 이해하는 것은 실체적 사유의 오류에속하는 것이다. 내가 여기 있어서 불변의 내가 있어서 가는 것은 아니란 말이에요. 이해가 가요? 무슨 말인지 이해가 가요? 나라는 주어는 감이라는 술부 속에만 존한다.
내가 여러분들과 교감하고 이야기하는 속에 김용옥이가 있습니다. 이 내가 망가지면 김용옥이 망가져. 늘 내가 있어서 내가 가는게 아니란 말이야. 좀 더 쉽게 생각해 봅시다. 이렇게 어려워요. 연기론 간단한게 아니에요. 어려운 문제가 한두개가 아니에요. 이론이라는게. 한 번 봐요. 우리가 내가 살고 있는 집에 큰 책상있고, 정원이 있어요. 병원이 있단 말이야. 잔디밭이 있단 말이야. 그것을 잔디밭이라고 불러요. 들으면 어떻해? 풀이 있고, 적당한 사이즈로 머리를 자르듯이, 잘라서, 있을 때는 잔디밭이라고 해요. 근데 잔디밭이라는 것을 잔디밭으로 유지하기 위해선 엉청 고생해야 되. 난 요즘에 이가 갈려서, 없앨려고. 서양에서 온 것. 동양 원래 잔디밭 없는 거에요. 태정 - 우리나라의 전통적 정원술에는 "잔디밭"이라는 것이 없다. 이끼가 덮인 마당이 있었을 뿐이다.
서양놈들이 만든 것인데, 잔디밭이라는 것이 아름다운 것 같지만, 유지하려면 매일 잡초 뽑아야죠. 시누이웬수, 바랭이웬수 이런 말. 매일 바랭이 뽑는다고. 나도 요즘 바랭이웬수에요. 잡초많지, 벌레 많지. 잡초밭 보면, 지렁이도 있고, 모기도 있고, 잔디밭이라는 주어적 실체는 있을 수 없다. 잔디밭이라는 주어는 그것을 끊임없이 잔디밭으로 민들고 있는 술어적 상태 속에서만 존하는 것이다. 잔디밭이 낭만적일 거 같지? 모기 때문에 키스도 못해. 멀리 잔디밭으로 보이게 하려면, 계속 노력을 해야되. 안그러면 잡초, 민들레꽃. 흉악한 민들레, 버들 나무가 오르고 그러면 잔디밭이 아니게 된단 말이에요. 마찬가지로, 잔디밭이 있어서 잔디밭이 있는게 아니에요. 끊임없이 유지하려는 것으로 동일성이 유지되잖아. 같은 체계. 동일성의 유지하는 그것이 이것이 소위 아트만이라고 해요.
자기동일성체계 = 아트만 그런데 이 아트만이 있을 수 없단 것. 왜? 연기. 서로 연기되어 있잖아요. 잡초, 지렁이랑, 연기적 상태란 말이에요. 잔디밭이라는 자기가 없어요. 김용옥이라는 것은 잔디밭이랑 똑같이. 6의 12승 개의 잔디와 같은 거. 생물학적으로. 이 세포들 간의 관계 속에서 김용옥이 있는 거지. 관계가 깨지면, 금방 내가 아니게 된다. 나는 눈, 코, 귀 이런 모든게 연기적으로 되어 있는 건데, 김용옥 동일성 체계 유지하기 위해 작동하고 있는 것. 그 작동체계가 없어지면 아트만이 없어진다.
가합 =- 임시적으로 합쳐진 상태 나라는 존재는 오온의 가합이다. 그것은 나가 아니다. - 싯달타 - 이게 싯달타의 혁명적 발상이란 말이야. 모든 자기가 없는거야. 나는 걸어가는 속에만 있는 거에요. 내가 산다. 되요? 그게? 내가 산다 - 내가 먼저 존재하고 그 내가 살아가는 것일까? 나와 삶이 분리될 수 없다면, "내가 산다"라는 명제도 성립할 수 없다. 나와 삶이 따로 있는게 아니란 말이에요. 나는 나의 인생을 살아간다. - 나의 인생 밖에 나라는 존재자가 있게 된다. 그러므로 이 명제도 성립할 수 없다. 나는 나의 인생을 살아간다. 웃기는 이야기죠. 아니 내가, 인생 밖에 내가 따로 있고, 웃기는 이야기에요. 그런데 우리는 다 쓰고 앉았어. 근사한 문장이라고. 어떻게 내가 나의 인생을 살아가? 분리될 수 없는데. 근데 마치 불변의 나가 있는 것처럼. 관조하고 있는 것처럼. 이것이 언어의 오류, 사고의 오류. 이것을 연기의 눈으로 지적한거여.
싯달타는 우리의 사고의 오류를 연기론으로 지적한 것이다. 그러니까 이렇게 되면 일체가 뭐냐면, 연기가 되어 있으면, 내가 있기 때문에 너가 있잖아요. 여기서도. 강의자자 있기 때문에 관중이. 연기론으로, 내가 없으면 너가 없어지죠. 너 죽어. 없어지면, 때릴려던 내가 없어지든 거에요. 언어적으로 분리해가지고 생각. 내가 없어지면 너도 없어지죠. 그러면 이것과 저것은 동체대비 하나가 되는 거에요. 동체대비 - 너와 나, 주관과 객관의 언어적 분별이 사라지고 모든 것이 한 몸이 될 때 비로소 대자대비의 마음이 생겨난다. 그러니까 불교의 이론이라는 것은 아가페, 사랑을 베풀어라. 개같은 소리가 없어요. 연기를 깨닳아라. 근원적으로 나가 없다라는 것을 깨닳아라. 연기의 핵심이에요. 얼마나 귀중한 가르침이에요?
불교의 윤리는 신앙에서 생기는 것이 아니라 깨달음에서 저절로 우러나오는 것이다. 무슨 이야기냐 하면은, 무아론으로 가면 무서워지는게 뭐냐면, 모든 형이상학적 실체학이 무너지는 거에요. 무아론은 모든 실제를 무너뜨린다 그러므로 모든 형이상학이 존립할 수 있는 근거가 무너진다. 불교는 철저히 반형이상학적이다. 이것도 없고, 저것도 없고 다 없어져요. 다 연기된 존재이고, 없어진다. 그러면 무슨 이야기냐면, 불교는 철저히 이 연기론에 의해서 생겨난 불교, 철저하게 반형이상적인 것. 철저하게 형이상학을 거부했다. 불교는 현상론이다. 불교의 본체론이란 연기론일 뿐이다. 연기론이 곧 살상론이요, 실상론이 곧 본체론이요, 본체론은 곧 현상론이다. 불교에서 말하는 모든 실상과 본체가 연기일 뿐이요, 현상일 뿐이다. 이것이 2천여년 동안 서양철학이 불교를 이해할 수 없었던 가장 중요한 이유였다.
불교는 해겔의 형이상학의 붕괴가 일어난 19세기 후반부터 겨우 이해되기 시작했다. 그것은 기나긴 불교의 동면이었다. 아트만화 시켜 실체화 시켜 놓은 것에 대한탐구. 무슨 우주가 유한하나? 무한하나? 안하나? 신이 있다 없다? 신이 있다고 해도 참이고, 없다해도 참이라는 거야. 이런 경우를 칸트는 안티노미라 불렀어. 이율배반이다라는 거야 안티노미 : 이율배반. 서로 모순되는 두 명제가 동시에 성립하는 사태 안티노미, 이율배반이다 이거야. 영혼과 육체는 동일하냐? 별개냐? 동일하다고 말할수도있는 것이고, 아니다라고 할 수 있는 것이고, 싯달타는 침묵한다. 말하지 않았어요. 싯달타는 형이상학적 명제에 대해서는 시종일관 침묵을 지켰다. 이것이 원시불교의 소박함이다. 심지어, 여래는 사후에 존속하느냐? 생존하지 않느냐? 이것도 이렇다 저렇다 말할 수 없는 것.
일체의 언변하지 않은 것. 싯달타 사상을 무기라고 해요 무기 - 기술할 수 도 없고, 설명할 수도 없다는 뜻. 형이상학적 명제는 절대적 해결이 있을 수 없다. 설사 해결된다 할지라도 그것은 우리 해탈에 아물런 도움을 주지 않는다. -달라이라마와 도올의 만남- 1권 222-3쪽 모든 실체 존립근거를 무너뜨려요. 존립근거가 거기서 깨지는 거에요. 무아론에 있어서 핵심적인 거는, 무아론은 결국 형이상학의 거부로 나가고, 형이상학이라는 것ㄴ, 형이상학적인 탐구라는 건, 언어로써 구상. 실체화해서 형이상학 만든 것. 모든 이런 형이상학 언어에 속아서, 그래서 원시불교에서 선의 핵심이 들어있는 것. 통하게 되어 있음. 싯달타는 언어를 통해서 언어를 부정해야 한다. 빠져들면 안된다. 우리는 언어를 통해서 언어를 부정해야 한다. 이러한 원시불교의 사상에 이미 선불교적 요소가 다 들어있다.
저번에도 추석 이야기하니까 날리야. 인터넷에다, 부모하고 처다보는데 낙짝이 뜨거웠다. 논란의 공방이 되어선 안될 문제. 춘성 스님. 그 스님의 말이라고 하는 것은 어떻게 보면, 언어적 직찹(?집착)에서 깨어나게 하는 것. 춘성스님의 일화는 벽암록을 뛰어넘는 우리시대의 공안이다. 그것은 논쟁꺼리가 아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깨우침을 줄 때만이 의미있는 것이다. 나는 그 순간에 그 때에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때, 선의 본질을 깨우친 거야. 그말을 들을 적에 낮짝이 뜨겁다느니 개짝의 이야기를 하는 거야. 그 사람의 무소유적인 것을 설파. 춘성스님같은 위대한 사람이 있다는 것이 자랑스럽습니다. 이 양반이 보통 때는 빤스도 안 입고 살아요. 주무시지도않아요. 베개도없이, 이불도 없이, 승려들이 같이 자면, 주무신다. 딴 사람들이 자면, 좌선한다. 미안할까봐. 평생을 그렇게 사신 분. 이 양반은 그야말로, 육두문자로 일관해 살았지만, 실수한 번 없었어요. 자기의 계율을 어긴 적이 없어요. 그래서 이런 분에게 존경이 있는 것이고, 결국은 무아. 자비로 끝난 거에요. 깨닳아야 할 거는 뭐냐면, 언어로 싸여있는 나를 해체시켜야 한다. 무아는 언어로 구성된 나의 헤체이다. 우리는 언어에 의해서 끊임없이 기만당하는 존재라는 것은 싯달타는 2천 5백년 전에, 이미 설파하신 대철학가. 사상가였다. 이거를 알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