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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두로 여물 썰고 소죽 쑤는 내고향 안동 *
여물 썰기
안녕하세요? 안동지역에서 한우(韓牛)는 집안에서 일을 시키며 꼴, 쇠죽, 소먹이기로 산과 들에 가서 풀을 뜯어 먹이며 키운 소를 말한다. 한우가 농우일 수도 있으나, 외국(外國)에 가면 그 나라의 소가 농우가 되기 때문에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다. 어찌 어찌해서 장작에 불이 붙고 불과의 전쟁이 끝나면 그때서야 통나무 장작이 거의 다 타고 알불이 되어갈 쯤 소죽 솥에서 김이 모락모락 그때는 그 냄새가 어찌그리 구수하던지... 어질러진 아궁이 앞을 빗자루로 쓸어 불씨가 날리지 않도록 깨끗이 청소하고 알불에 감자나 고구마를 넣고 구워 먹으면 그 맛이란 지금 먹어도 맛과 멋이 있지,, 우리나라의 한우가 농우가 되면 같은 말이 될 것이다. 한우는 몸빛이 붉은 갈색이며 체질(體質)이 강건하고, 고기 맛이 좋고 특히 일을 잘한다.
농우(한우)
내고향 안동에서 ‘쇠죽’은 짚과 콩, 풀 따위를 섞어 끓인 소의 먹이를 말하는데, ‘우죽(牛粥)’이라고도 하고, 우리들의 고향 안동에서는 ‘소죽’이라고 한다. 이하에서는 ‘쇠죽’으로 통일한다. 옛적 쇠죽의 재료(材料)에는 위의 재료 외에 말린 고구마줄기, 콩깍지, ‘단등개(쌀겨)’, 마른 수수잎 등 여러 가지가 있었다.
시아버지와 작두질 고향 안동 시골마다 그 시절엔 소를 두고 농가(農家)의 반 살림이라고 할 정도로 귀중하게 여겼다. 사람을 대신해서 논도 갈고, 밭도 갈고, 무거운 짐까지 운반해주던 소, 경운기(耕耘機)는커녕 자전거도, 리어카도 없었던 시절, 어찌 농가(農家)의 보배가 아닐 수 있었겠는가.
논가는 농우(農牛)
안동의 날씨가 더워지는 늦은 봄부터 늦은 여름까지 마당 한쪽에 노천(露天) 잠자리를 마련하던 소도, 농가마다 월동준비(越冬準備)가 시작되면, 거처를 외양간으로 옮겨 그 이듬해 봄까지 여물로 끓인 ‘쇠죽’을 먹으면서 겨울을 지낸다. 겨울이라 해서 그냥 쉬는 것은 아니다. 여름 내내 죽도록 일을 했더라도 겨우내 경지정리(耕地整理)를 하느라 무거운 논흙을 실어 나르기도 하고, 땔나무를 해다 날라야 한다.
지방(地方)에 따라 그 구조가 조금씩 다르기는 하지만, 안동지역의 양간은 대개가 사랑방 곁에 붙어있었다. ‘쇠죽’만 끓이는 ‘가마솥’이 걸린 부엌을 가운데 두고, 한쪽은 사랑방이고, 다른 한쪽은 외양간이었다. 그리고 외양간 옆에는 정랑(칙간 ; 화장실)이 있었다 . 정랑의 독 속으로 외양간에서 흘러내리는 ‘소지렁(소의 오줌)’을 받아내기 위해서였다. 외양간과 부엌은 구유를 경계선(境界線)으로 해서 막힘이 없이 툭 터져 있었다.
안동에서 구유’란 마소나 돼지에게 먹이를 담아 주는 그릇으로 소의 경우는 ‘여물’이나 ‘쇠죽’을 담아주는 소의 먹이통이다. 요즘 도회지(都會地)의 부유층 사람들은 이 ‘구유’를 수집(蒐集) 해다가 응접실(應接室)을 꾸미기도 하고, 베란다에 놔두고 화분대용으로 쓴다고도 하는데, 본 일은 없다. 부유층(富裕層)에 아는 사람도 없고, 오라는 부유층도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도 ‘말구유’에서 태어났으니 ‘구유’수집은 어딘가 선(善)을 향한 몸짓 같게도 보인다.
구유
안동지역 부잣집 외양간에는 ‘가마솥’을 경계선(境界線)으로 안쪽에는 장작을 쌓아놓는 ‘나무청’이 있었고, 바깥쪽에는 ‘여물’을 쌓아놓는 ‘여물청’이 있었다. 부잣집의 경우 소가 두 마리도 되었고, 한 마리라도 대개의 경우 거대한 황소였기 때문에 다른 집보다 ‘여물’도 많이 들고, 땔나무도 많이 소요(所要)되었다. 안동 고향의 외양간도 다른 집에 비해 배 정도 더 넓었고, 항상 ‘여물’과 땔나무를 비축(備蓄)해 둬야 했기 때문에 ‘청’이 필요했었다. 서민들의 경우 남녀노소 누구나 가족(家族)이면 ‘여물’도 썰고, ‘쇠죽’도 쑤지만, 부잣집의 경우는 머슴 혼자서 모든 것을 다해야 하기 때문에 ‘여물’이든 땔나무든 항상 여분(餘分)이 비치되어 있어야 했고, 이를 위해서는 비축(備蓄)할 장소가 있어야 했다.
소죽이 다 끊여질무렵...
발에 붙어 떨어지지도 않았답니다.
안동의 서민 가정에서도 거의가 ‘나무청’은 없더라도 ‘여물청’은 마련해 두고 있었다. 바쁜 일철에는 농사일 도중에 ‘여물’을 썰 수 있는 시간이 여의(如意)치 않았고, 무엇보다 ‘여물청’에 ‘여물’이 떨어진다는 것은 그 집의 반 살림인 ‘귀하신 몸’을 굶기기로 작정했다는 뜻이 되어 할아버지의 호통이 떨어지기 일쑤였다. 당시의 경우 안동 사람은 굶는 한이 있더라도 소는 결코 굶겨서는 안 된다는 것이 집안 어른들의 지론(至論)이었기 때문에 어떠한 경우에도 ‘쇠죽’의 재료(材料)인 ‘여물’을 떨어뜨려서는 안되도록 되어 있었다.
때문에 아들이나 손자(孫子)가 동네 사랑방에서 세월 가는 줄 모르고 노닥거리다가 저녁때가 가까워오면서 자식들이나 동생들로부터 ‘여물’이 떨어졌다는 전갈(傳喝)을 받게 되면, 신발을 거꾸로 신고 부리나케 달려가기도 했었다. ‘여물청’에는 ‘작두’가 놓여 있었다. ‘작두’란 한자로 ‘斫刀’라고도 하는데, 짚이나 풀 따위의 마소의 먹이를 발로 디뎌 가며 써는 연장을 말한다. 한약방에서 한약재(韓藥材)를 써는 ‘작두’보다 대여섯 배나 더 큰 것이 ‘쇠죽’재료(材料) 써는 ‘작두’이다. 작두
‘작두질’은 한 사람은 천정(天井)에 내려뜨려진 줄을 잡고 몸의 중심을 잡으면서 ‘작두(斫刀)’를 밟고, 다른 한 사람은 ‘여물’이 되는 재료(材料)를 ‘작두날’에 먹인다. 경우에 따라서는 왼손에 지팡이나 지게 작대기를 짚고 ‘작두질’을 한다, ‘작두질’은 매우 위험하다. ‘작두날’을 들고 밟는 사람과 짚이나 풀을 먹이는 사람의 호흡(呼吸)이 조금만 어긋나면 손가락을 자를 위험(危險)이 언제나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다. 필자의 이웃마을에 사는 영지초등학교(影池初等學校) 6년 후배인 꼬마 처녀의 경우 열여섯 살 때 ‘작두’에 짚을 먹이다가 새끼손가락과 그 다음 손가락을 절단(切斷) 당하는 사고를 당했다.
동네 앞산 바위 꼭대기 마져 그늘이 꼴딱 넘어가고 탱자나무 울타리에서 참새들이 모여 앉아 낮에 못 다한 이야기들을 나누느라고 수다를 떨고 집집마다 밥 짓는 연기가 피어오르기 시작하면 소죽끓일 준비를 해야 합니다.
안동의 시골에서는 주로 남자가 ‘작두’를 밟고, 꼬마 아가씨는 짚을 먹였는데, 두 사람의 호흡이 어긋나면서 ‘작두질’과 짚 먹이는 동작이 일치(一致)하지 못해 오빠가 여동생의 손가락 두 개를 잘라버린 것이다. 병원(病院)도 없는 시골에서 응급처치(應急處置)를 할 수도 없었다. 그 여동생은 몇 년 동안 비관(悲觀)으로 일관하다가 끝내 음독(飮毒)을 하고 말았다. 지금도 살아있다면 61세의 노파(老婆)가 되어 있을 것이다. 가난한 농부(農夫)의 딸로 태어나 남자들이 하는 거친 일을 하다가 불운(不運)을 맞은 것이다. ‘작두’를 처음 갈았을 때는 볏짚도 싹뚝싹뚝, 조짚도 싹뚝싹뚝, 마른 고구마 덩굴도 싹뚝싹뚝 잘도 썰어졌다. 이렇게 해서 손가락 길이 만하게 썰어진 것이 ‘여물’이고, 이를 가마솥에 넣어 물을 붓고 끓여내면 ‘쇠죽’이 된다.
안동에서 ‘쇠죽’을 쑬 때는 맑은 물을 쓰는 게 아니고, 주로 ‘구정물’을 아용했다. 향우님들께서도 아시는 바와 같이 우리의 전통(傳統) 부엌에는 ‘구정물통’이라고 하는 큼직한 독이 하나 놓여 있었다. 부엌에서 사용(使用)한 온갖 허드렛물과 찌꺼기가 거기에 담겨지는데, 이를 ‘쇠죽솥’에 ‘여물’과 ‘쇠죽’을 끓이게 된다.
안동에서는 부잣집이 아닌 이상 밥 한 톨, 김치 한쪽이라도 버리는 일이 없지만, 어쩌다 설거지물에 떨어진 밥톨 하나라도 버리지 않고, ‘쇠죽’에 섞어 먹이기 위해 부엌에는 언제나 ‘구정물통’을 비치(備置)했던 것이다. 때문에 당시에는 ‘음식물 찌꺼기’라는 말은 존재하지도 않았다. 밥 한톨이라도 버리면, 천벌(天罰)을 받는다는 속신(俗信)이 있을 정도였기 때문에 음식물 찌꺼기가 생겨날 리도 없었다. 혹자는 말 못하는 짐승이라고 해도 ‘구정물’로 ‘쇠죽’을 끓여준 것은 너무했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그건 천만의 말씀이다.
안동 시골 고향집에서는 사람에게는 비록 ‘구정물’이었지만, 소에게는 그게 영양가(營養價) 만점인 영양식(營養食)이었다. 소에게 먹이는 사료(飼料)라는 게 짚이나 풀밖에는 없을 때였다. 따라서 당시의 부잣집 ‘구정물’은 요즘으로 치면 ‘웰빙식’에 해당된다고 할 수 있었다. 부잣집의 경우 ‘구정물’에는 쌀 씻어낸 쌀뜨물 들어가, 밥찌꺼기 들어가, 삶은 고구마 껍질 들어가, 그것만으로도 영양가(營養價)가 대단했고, 또 간을 따로 맞출 필요도 없었다. ‘구정물’ 한 동이를 커다란 ‘쇠죽’ 가마솥에 콸콸 붓고, 여물을 꾹꾹 눌러 담아 끓여내면 ‘쇠죽’이 되는데, 부잣집의 경우 거기에 ‘쌀겨’라도 두어 바가지 섞으면 쇠죽에 영양제(營養劑)를 치는 격이었다.
쇠죽 솥
물론 안동 서민(庶民)의 경우는 ‘구정물’이 맹물이나 다름없었고, 사람이 먹을 쌀겨도 없어 소에게까지 줄 것은 더욱 없었다. 일년에 쌀밥을 한두 번밖에 먹을 수밖에 없던 당시의 서민가정에서는 쌀겨 자체가 없었고, 보리쌀 씻은 물도 국을 끓이거나 숭늉 끓여 사람이 먹었기 때문에 ‘구정물’이라야 맹물이나 마찬가지였다.
안동에는 아기들의 대변(大便)에 소화가 되지 않고 섞여 나온 콩알까지 물에 흔들어 먹던 시절이었다. 연간 8조 원어치나 되는 하얀 쌀밥과 기름진 고기를 버리고 있는 지금 사람들이 뼈 속 깊이 새겨들어야 할 말이다. 어쨌든 그런 사정 때문에 당시의 소들을 보면, 부잣집 소들은 살이 통통하게 쪘고, 가난한집 소는 그 집 사람들처럼 피골(皮骨) 이 상접(相接)하듯 야위어 있었다. 겨우내 마른 짚만 삶아 먹였고, 여름에는 풀만 삶아 먹였기 때문이다.
2인 1조가 되어 작두질하는 모습
다시 ‘쇠죽솥’이 있는 외양간으로 간다. 향우님들 중에는 겨울밤마다 외양간에 누워 자는 소가 되새김질을 하는 소리를 방안에서 들어본 기억(記憶)들이 있을 것이다. 함박눈이 소록소록 쌓이는 시골 밤은 그야말로 세상이 쥐 죽은 듯이 고요해진다. 담장 하나를 격한 앞집에서 나는 할머니의 기침소리와 할아버지의 방귀 뀌는 소리까지 들릴 정도로 적막(寂寞)에 싸인다.
안동 시골의 겨울밤에, ‘쇠죽’을 포식(飽食)한 누렁소가 가장 편안한 자세로 외양간에 누워서 ‘싸악~싸악~싸악~’ 되새김질을 하는 소리가 끊어지듯 이어지듯 들려온다. 그 낮 익은 되새김소리는 우리의 또 다른 식구(食口)가 거기에 존재하고 있음을 알려주는 그런 소리였다. 내고향 안동 농우(農牛)는 그냥 가축이 아니고, 그대로 한 식구였다. 따라서 당시의 소는 한 가정의 구성원(構成員)으로써 비록 그 식단(食單)이 ‘여물’이라 해도 먹는 시간은 사람과 같은 시간에 먹도록 했다. 안동 고향 사람들은 아침을 먹은 후 소에게도 아침을 먹였고, 사람이 저녁을 먹으면 소도 저녁을 먹게 했다. 사람보다 먼저 먹으면 먹었지, 결코 늦게 먹는 법은 없었다. 만약 ‘쇠죽’을 퍼주는 걸 깜빡하고 댓돌에 신발을 벗을라치면 “니거(너희) 입만 입이가(입이냐)? 소죽 퍼주고 디가거라(들어가거라).”라는 할머니의 역정이 터지기도 했다.
쇠죽 먹는 농우 모녀
내고향 안동에서는 '쇠죽’을 끓인 가마솥 뚜껑을 떡 열면 허연 김이 천정(天井)까지 확 솟구쳐 오르는데, 나무바가지와 기억자로 꺾어진 나무 갈고리를 이용해서 그 ‘쇠죽’을 ‘구유’에 퍼주면, 이미 벌떡 일어나서 입맛을 다시고 있던 누렁이는 그 커다란 혀를 쑥쑥 내밀면서 흰쌀밥에 고깃국을 먹듯이 맛있게 잘도 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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