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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산대사(西山大師) 휴정(休靜)이
임진왜란 의병생활을 마친 후 돌아온 것이 69세,
그 후 85세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줄곧 묘향산 원적암(圓寂庵)에 칩거하였다.
그의 임종은 참으로 선사다웠는데 제자 70여 명이 모인 자리에서
거울을 들여다보다가 빙그레 웃으며 한마디 하였다.
八十年前渠是我(팔십년전거시아)
八十年後我是渠(팔십년후아시거)
팔십 년 전에는 네가 나였는데
팔십 년 후에는 내가 너로구나.
그러고 나서 운명하기 직전에 최후로
다음과 같은 임종게(臨終偈)를 읊었다.
生也一片浮雲起(생야일편부운기)
死也一片浮雲滅(사야일편부운멸)
浮雲自體本無實(부운자체본무실)
生死去來亦如然(생사거래역여연)
나는 것은 한 조각 구름이 인 듯하고
죽는 것은 한 조각 구름이 스러지는 것
뜬 구름 자체는 본래 자체가 실이 없나니
죽고 사는 것도 역시 이와 같도다
千計萬思量(천계만사량)
紅爐一點雪(홍로일점설)
泥牛水上行(이우수상행)
大地虛空裂(대지허공렬)
천 가지 계획과 만 가지 생각이
불타는 화로 위의 한 점 눈(雪)이로다
논갈이 소가 물 위로 걸어가니
대지와 허공이 갈라지는구나
대사는 마지막 임종게(臨終偈)를 읊고 나서 많은 제자들이 지켜보는 앞에
가부좌(跏趺座)를 하고 앉아 조용히 잠들듯이 입적(入寂)하였다고 한다.
[비명 제목전문] 비명병서의 전문 번역문을 싣는다.
비명병서는 생애를 산문으로 적고 운문의 비명을 적는다.
이 글은 한문사대가의 한 분이신 월사 이정구 선생의 작품이다.
서산대사가 입적한 후 묘향산 보현사와 금강산 백화암에 부도와 비를 각각 세웠는데 구조물들의 형태는 두 절의 것이 서로 다르나 비문은 둘 다 당시의 이름난 문필가 이정구가 쓴 것으로서 내용이 같다.(같은 시기에 세웠던 묘향산 보현사의 비와 부도는 지난 한국전쟁(6.25) 때 폭격으로 파괴되었음).
월사집 제45권
한국고전번역원 ┃ 이상하 (역) ┃ 2004
비(碑)
有明朝鮮國賜國一都大禪師禪敎都摠攝扶宗樹敎普濟登階尊者西山淸虛堂休靜大師碑銘 幷序
유명조선국사국 일도대선사 선교도총섭 부종수교보제등계존자 서산청허당휴정대사비명 병서
나는 불교의 교설(敎說)은 알지 못하기 때문에 평소에 불설(佛說)을 즐겨 말하지 않으니, 짐짓 불교를 배척하는 데 뜻을 둔 것은 아니었다. 그렇지만 문장으로 허명을 얻어 문병(文柄)을 잡은 지 30여 년이라 승려들이 나의 명성을 좇아 시를 받으러 오는 이들이 날마다 나의 집에 이르렀다. 그래서 식견이 높거나 시를 잘 짓는 승려를 만나면 흔연히 응접하였으니, 이 역시 짐짓 불교를 좋아하는 데 뜻을 둔 것은 아니었다.
내 나이가 아직 어릴 때 이미 휴정(休靜) 스님의 명성을 들었고 그의 시가 세상에 많이 전송(傳誦)되었기에 늘 한번 만나고 싶었으나 뜻대로 되지 않았다.
송운(松雲) 유정(惟政)은 바로 스님의 전법 사문(傳法沙門)이다. 그가 일본으로 건너갈 때 경성(京城)으로 자주 나를 방문했었고, 내가 연산(燕山)에 갈 때에는 그가 청천강(淸川江) 가에서 나에게 증별의 시를 주면서 스님에 관한 얘기를 흥미진진하게 밤낮이 다하도록 하였었다. 이때 스님은 이미 세상을 떠난 지 여러 해가 지난 터라 아득히 그 청향(淸香)을 생각하는 마음만 때로 가슴속에 오갔다.
하루는 공무를 마치고 퇴근하여 집에 홀로 앉아 있노라니, 세 승려가 밖에서 공경히 서서 기다리고 있다고 했다. 불러오게 하여 보니 바로 스님의 제자인 보진(葆眞), 언기(彦機), 확흘(矱仡)이었다. 이들이 상자 속에서 책을 꺼내어 보이며 말하기를 “이는 청허당(淸虛堂)의 유고입니다.” 하고는 이어 두 손을 모아 예(禮)를 갖추고 말하기를, “우리 스승님의 도업(道業)은 후세에 길이 전할 만합니다. 그러나 운산(雲山)이 깊고 적막하니, 세월이 오래가면 더욱 민멸(泯滅)될까 두렵습니다. 그래서 감히 문도(門徒)가 기재한 바로써 행장을 만든 다음 경건한 마음으로 재숙(齋宿)하고 봉함(封緘)하여 천리 길을 가지고 와서 바칩니다. 원컨대 상공(相公)의 글을 받아 비석에 새겨 우리 스승을 불후(不朽)하게 하고자 합니다.” 하였다.
내가 말하기를, “그대 스승의 도는 무(無)로써 유(有)를 삼고 허(虛)로써 실(實)을 삼으니, 보존하길 기다려 보존되는 것이 아니요 민멸하길 기다려 민멸되는 것이 아니니 누가 썩어 없어지게 할 수 있으며, 누가 불후하게 할 수 있겠소. 우리 부자(夫子)는 ‘도가 서로 같지 않으면 함께 일을 도모하지 않는다.’ 하였으니, 스님의 도에 대해 내가 무슨 말을 하겠소.” 하니, 세 승려가 일어나 대답하기를, “도는 본래 서로 같지 않은 것이니, 감히 구차히 같게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같으면서 다른 것도 있고 다르면서 같은 것도 있으니, 가섭(迦葉)의 정전(正傳)으로 홀로 종풍(宗風)을 천명(闡明)하는 것은 진실로 같으면서 다른 것이지만 집안에서는 효도하고 세상에 나와서는 충성하는 것은 어찌 다르면서 같은 것이 아니겠습니까. 오직 상공은 다른 것을 다르다 하고 같은 것을 같다고 하는 분입니다. 우리 스님이 생전에 늘 상공의 풍모를 흠모하셨으니, 은연중에 공과 뜻이 계합하여 명감(冥感)하신 것이 있는 듯합니다. 부디 상공께서는 은혜를 베풀어 주십시오.” 하고 거듭거듭 무릎을 꿇고 절하며 그해가 지나도록 떠나지 않았다. 내가 그 정성을 가상히 여기고 탄식하며 “불교에서 스승에게 전심(專心)으로 공경하는 것이 이와 같구나.” 하였다.
행장을 살펴보건대, 스님의 법명(法名)은 휴정(休靜)이고 자는 현응(玄應)이며 자호(自號)는 청허자(淸虛子)인데 묘향산에 오래 있었기 때문에 서산(西山)이란 호도 쓴다. 속성(俗姓)은 완산 최씨(完山崔氏)이며 이름은 여신(汝信)이다. 외조부인 현감(縣監) 김우(金禹)가 연산조(燕山朝)에 득죄(得罪)하여 안릉(安陵)에 귀양 가서 살았기에 그 후대는 안주(安州) 사람이 되었다. 부친 세창(世昌)은 향시(鄕試)에 합격하여 기자전 참봉(箕子殿參奉)에 제수되었으나 취임하지 않고 시주(詩酒)를 즐기며 살았다. 모친 김씨(金氏)는 늙도록 자식이 없었는데 하루는 꿈속에 한 노파가 와서 “사내아이를 배태(胚胎)했기에 마님을 위해 축하하러 왔습니다.” 하였는데 그 이듬해 경진년(1520, 중종15) 3월에 과연 스님이 탄생하였다.
스님이 3세 때 부친이 등석(燈夕)에 술 취하여 누워 있노라니 한 노인이 와서 말하기를 “어린 사문(沙門)을 뵈러 왔습니다.” 하고 두 손으로 아이를 들고 몇 마디 주문을 외운 뒤 아이의 정수리를 어루만지며 “이 아이 이름을 운학(雲鶴)으로 지으십시오.” 하였다. 그 노인은 말을 마치자 문을 나가더니 어디로 갔는지 훌쩍 사라졌다. 이 때문에 스님의 아명(兒名)을 운학이라 불렀다.
스님은 어릴 때 아이들과 놀 때 혹 돌을 세워 불상을 삼고 혹 모래를 모아 탑을 만들곤 하였다. 조금 성장하자 풍신(風神)이 영수(英秀)하고 학문에 힘써 나태하지 않았으며 지극한 효성으로 어버이를 섬겼기에 고을 원님이 귀여워하였다.
9세 때 모친이 세상을 떠났고, 10세 때에는 부친마저 세상을 떠나니, 스님은 외로운 몸으로 의지할 데가 없었다. 원님이 스님을 데리고 경성(京城)으로 가서 성균관(成均館)에 넣어 주었다. 그러나 성균관에서 스님은 울울하여 뜻에 맞지 않았다. 그래서 동학(同學) 몇 사람과 남쪽으로 가서 두류산을 유람하며 명승지를 구경하고 경서(經書)를 탐독하였다. 그러나 늘 일찍 부모를 잃은 슬픔에 잠겼고 더욱 사생(死生)의 이치를 깊이 느끼게 되었다. 그러다 홀연 선가(禪家)의 돈오법(頓悟法)을 알고 드디어 영관대사(靈觀大師)에게 설법을 듣고 숭인장로(崇仁長老)의 아래에서 삭발하였다. 그리고 7, 8년 동안 명산을 두루 다니며 수행하고 30세에 선과(禪科)에 합격하였다. 대선(大選)을 거쳐 선교양종 판사(禪敎兩宗判事)의 지위에 이르렀다.
하루는 스님이 탄식하며 “내가 출가한 본의가 어찌 여기에 있으리오.” 하고는 즉시 인수(印綬)를 풀어 반납하고는 지팡이 하나를 짚고 금강산으로 돌아와 〈삼몽사(三夢詞)〉를 지었는데, 그 시에,
主人夢說客 주인은 손님에게 제 꿈 얘기를 하고
客夢說主人 손님은 주인에게 제 꿈 얘기를 하네
今說二夢客 지금 두 꿈 얘기를 하는 나그네도
亦是夢中人 이 역시 꿈속의 사람이어라
하고,
향로봉(香鑪峯)에 올라 시를 지었는데, 그 시에,
萬國都城如垤蟻 만국의 도성은 개미집과 같고
千家豪傑若醯鷄 천가의 호걸은 초파리와 같아라
一窓明月淸虛枕 창에 가득 밝은 달빛을 베고 누우니
無限松風韻不齊 무한한 솔바람 소리 곡조도 많아라
하였다.
이로부터 더욱 명성과 재능을 감추고 산문(山門)을 나가지 않으니,
도를 물으러 오는 이들이 날로 많아졌다.
기축년(1589, 선조22)의 옥사(獄事) 때 요승(妖僧) 무업(無業)이 무고하여 스님이 체포되었다. 그러나 스님의 공사(供辭)가 명백하고 개절(凱切)하니, 선묘(宣廟)가 스님의 억울한 정상을 알고 즉시 석방하는 한편 스님의 시고(詩稿)를 가져오게 하여 보고는 탄상(歎賞)하였으며, 어필로 묵죽도(墨竹圖)를 그려 하사하고 시를 읊어 바치게 하였다. 스님이 즉시 절구(絶句)를 바치니 선묘가 역시 어제(御製) 절구 한 수를 내리고 은상(恩賞)을 매우 후하게 주고 위로하여 산으로 돌려보냈다.
임진년(1592)에 대가(大駕)가 서쪽으로 몽진(蒙塵)하여 용만(龍灣)에 머무르니, 스님은 즉시 장검을 비껴들고 진알(進謁)하였다. 이에 선묘가 하교(下敎)하기를, “세상의 난리가 이와 같은데 그대가 구제할 수 있겠는가?” 하니, 스님이 눈물을 흘리며 배명(拜命)하고 말하기를, “국내의 승려들 중 늙고 병들어 군대에 편입할 수 없는 자들은 신이 명령하여 자기 절에서 분향 축원하여 신명의 도움을 빌게 하고 그 나머지 승려들은 신이 모두 통솔하여 군진(軍陣)에 달려가 충성을 바치겠습니다.” 하니, 선묘가 의롭게 여겨 스님을 팔도십륙종 도총섭(八道十六宗都摠攝)에 임명하는 한편 지방관들에게 유시(諭示)하여 스님을 예우하게 하였다.
이에 송운(松雲)은 7백여 명의 승려를 거느리고 관동(關東)에서 일어났으며, 처영(處英)은 1천여 명의 승려를 거느리고 호남(湖南)에서 일어났으며, 스님은 문도(門徒) 및 스스로 모인 승려 1천 5백 명을 거느렸다. 그리하여 도합 5천여 명의 승군(僧軍)이 순안(順安) 법흥사(法興寺)에 모여 중국 군사와 선후하여 성세(聲勢)를 도왔으며 모란봉(牧丹峯)의 전투에서 죽이고 사로잡은 적이 많았다. 이에 중국 군사가 드디어 평양을 탈환하고 송도(松都)를 수복하자 경성의 적들이 밤중에 도주하였다. 스님은 용사 백 명을 보내 대가(大駕)를 영접하여 환도(還都)하게 했다. 명(明)나라 제독(提督) 이여송(李汝松)이 서찰을 보내 칭찬하였는데 그중에 “나라를 위해 적을 토벌함에 충성이 해를 꿰뚫으니, 경앙(敬仰)해 마지않는다.”라는 말이 있었고, 또 다음과 같은 시를 보내 주었는데, 그 시에,
無意圖功利 공리를 도모할 뜻 없이
專心學道仙 오로지 전심하여 도만 닦더니
今聞王事急 이제 왕사가 위급하단 말 듣고
摠攝下山嶺 총섭이 산을 내려오셨구려.
하였다.
중국 제장(諸將)들도 다투어 서찰과 선물을 보내왔다. 적이 퇴각하자 스님은 아뢰기를, “신의 나이 여든에 가까워 근력이 다했으니, 군사(軍事)를 제자 유정(惟政)과 처영(處英)에게 맡기고자 합니다. 그리고 신은 도총섭의 인수(印綬)를 반납하고 묘향산의 처소로 돌아갈까 합니다.” 하니, 선묘가 그 뜻을 가상히 여기고 그 늙음을 안타깝게 여겨 국일도대선사(國一都大禪師) 선교도총섭(禪敎都摠攝) 부종수교보제등계존자(普濟登階尊者扶宗樹敎)란 호를 내렸다.
이때부터 스님은 의(義)와 도(道)는 더욱 높아지고 명성은 더욱 무거워져 두류산, 풍악산, 묘향산 등을 왕래하매 제자가 1천여 명이 되었으며 이 중 출세(出世)한 제자가 70여 명이었다.
갑진년(1604, 선조37) 정월 23일, 묘향산 원적암(圓寂菴)에 제자들을 모아 놓고 분향(焚香)하고 설법한 뒤 자신의 영정(影幀) 뒤에 쓰기를,
八十年前渠是我 팔십 년 전에는 저 사람이 나이더니
八十年後我是渠 팔십 년 뒤에는 내가 저 사람이로구나
하고, 송운과 처영에게 부치는 서찰을 쓴 다음 가부좌를 한 채 서거(逝去)하니, 나이는 85세이고 법랍은 67세였다. 기이한 향기가 방 안에 가득하여 21일이 지난 뒤에야 비로소 사라졌다.
제자 원준(圓峻)ㆍ인영(印英) 등이 다비(茶毗)하여 영골(靈骨) 한 조각과 사리(舍利) 세 개를 얻어 보현사(普賢寺)와 안심사(安心寺)에 봉안하였으며, 또 영골 한 조각을 제자 유정ㆍ자휴(自休) 등이 금강산으로 모시고 가서 신주(神珠) 몇 개와 함께 유점사(崳岾寺) 북쪽에 부도(浮屠)로 모셨다.
우리 동방은 태고화상(太古和尙)이 중국 하무산(霞霧山)에 들어가 석옥(石屋)의 법을 이어받아 환암(幻庵)에게 전하고, 환암은 구곡(龜谷)에게 전하고, 구곡은 정심(正心)에게 전하고, 정심은 지엄(智嚴)에게 전하고, 지엄은 영관(靈觀)에게 전하고, 영관은 서산(西山)에게 전하였다. 이것이 실로 임제(臨濟)의 정파(正派)인데 서산이 홀로 그 종지(宗旨)를 얻었다 한다.
스님의 저술로는 《선가귀감(禪家龜鑑)》, 《선교석(禪敎釋)》, 《운수단(雲水壇)》 각각 한 권과 《청허당집(淸虛堂集)》 8권이 세상에 인행(印行)되어 있다.
아, 스님의 도의 천심(淺深)은 내가 자세히 모르지만 스님의 유고는 내가 이미 다 읽어 보았다. 시(詩)를 보매 스님의 자득(自得)한 뜻을 알 수 있고, 문(文)을 보매 스님의 높은 조예를 알 수 있었다. 비록 그 조어(措語)가 혹 아순(雅馴)하지 않은 곳도 있으나 글자마다 살아 있고 구절마다 비동(飛動)하여 흡사 고검(古劍)이 칼집에서 나오매 서늘한 바람이 이는 듯하다. 왕왕 개원(開元)ㆍ대력(大曆)의 시와 매우 비슷한 것도 있으니, 불가(佛家)의 혜휴(惠休)ㆍ도림(道林) 정도는 말할 것도 없다.
더구나 환난을 만나서도 그 조수(操守)를 잃지 않아 감옥에 갇힌 상태에서 임금의 지우(知遇)를 입었으니, 임금이 시고를 자청해서 보고 시를 지어 바치게 한 영광과 어필로 시를 쓰고 그림을 그려서 내려 준 것은 참으로 전고(前古)에 없던 각별한 권애(眷愛)였다. 그리고 국난을 당하자 의병을 모아 중국 군사를 도와 삼도(三都)를 수복하고 대가(大駕)를 영접하여 환도(還都)하고는 곧 인수(印綬)를 반납하고 옷깃을 떨치며 산으로 돌아갔으니, 그 출처(出處)의 절개는 고인(古人)에 비겨도 손색이 없다.
대저 선비가 세상에 태어나 누군들 당시의 임금에게 지우를 입고 공명(功名)을 세워 스스로 현달하고 싶지 않겠는가. 그러나 재능을 품고도 펼치지 못하고 종신토록 이름이 세상에 알려지지 않는 사람이 어찌 한량이 있겠는가. 그런데 스님은 일개 치의(緇衣)의 신분으로 성명이 대궐에 알려지고 명성이 후세에 전해졌으니, 선문(禪門)에서 이러한 공업(功業)을 이룰 수 있을 줄 누가 생각했으랴. 이와 같은 분의 명(銘)을 쓰니, 나의 붓에 부끄럽지 않다.
그 명은 다음과 같다.
金天之西 금천의 서쪽
薩水之濱 살수의 물가에
淑氣亭毒 맑은 기운이 모여
乃降眞人 이에 진인이 탄생했어라
屳婆抱送 신선 노파가 안아 보냈고
釋老提携 불가 노인이 손을 잡아 인도했지
天開寶光 하늘은 보광을 열었고
帝借金鎞 상제는 금비를 주었어라
靈符妙契 신비한 꿈의 징조와 꼭 맞아
秀骨超凡 준수한 골상이 범상치 않았으니
蚌珠出海 진주가 바다에서 나온 듯하고
龍鏡發函 용경이 상자에서 나온 듯하여라
失怙無依 부모를 여의고 의지할 데 없어
千里負笈 천리 먼 한양으로 공부하러 가서
淹貫諸家 제자의 서적들을 두루 섭렵하여
卓然自立 학문을 쌓아 우뚝 자립하였지
乃超覺路 그러다 불교의 길로 들어서더니
遂登法席 마침내 스승으로 법석에 오르니
祖月重輝 조사의 달빛이 다시금 비침에
群昏一廓 중생의 어리석음이 한바탕 걷혔지
餘事詩聲 도 닦는 여가에 지은 시의 명성이
上徹楓宸 위로 대궐에 계신 임금께 들렸으니
殊恩異渥 그 남달리 우악한 성은이야말로
榮耀千春 영광이 천추에 길이 빛나도다
身雖巖穴 몸은 비록 암혈에 묻혀 살아도
忠不忘君 충성은 임금을 잊지 못하였네
遇難一呼 난리를 만나 한 번 부르자
義旅如雲 의병의 무리 구름처럼 모였지
協助天戈 이에 중국 군사를 도우며
憑仗靈祐 부처의 영험에 의지하였나니
驅除腥穢 더러운 오랑캐를 몰아내고
福我寰宇 우리의 강토에 행복을 주었어라
出而濟世 나가서 세상을 구제함에는
名動華夷 그 명성이 화이에 진동하였고
入而修定 들어와서 선정(禪定)을 닦음에는
法闡宗師 종사로서 진리를 천명하였도다
在掌靈珠 손바닥 안에 쥐고 있는 명주
虛明自玩 그 허명한 빛을 스스로 즐기고
倘來榮辱 외부에서 오는 덧없는 영욕은
如夢一幻 한바탕 꿈과 허깨비처럼 여겼지
瞻彼妙香 멀리 저 묘향산과
與夫金剛 금강산을 보니
寔唯淨界 이야말로 청정한 세계라
宜我法王 우리 법왕이 거주하실 곳이지
來往諸天 이에 제천을 내왕하니
百靈護持 온갖 신령들이 호위하였네
乘化返眞 세연이 다해 입적하니
去又何之 떠나서 또 어디로 갔는고
功紀人間 공적은 인간 세상에 기록되었고
道在山中 도는 산중에 남아 있어라
一片貞珉 이 한 조각 비석이여
萬古英風 만고에 영명한 풍모로다
[금강산 서산대사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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