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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김준권의 판화세상 원문보기 글쓴이: 화각인김준권
제 4 장 17세기 바로크 판화
4-1. 바로크 판화의 전개
미술사에 있어서 바로크란 르네상스 이후 17세기 유럽 미술을 칭하게 된다. 그 의미는 광범위하고 시대와 지역적에 따라 서로 다르게 사용되어 혼란스럽기까지하다.바로크는 ‘이그러진 진주’라는 보석상에서 사용되는 용어로 미술사에서의 의미는 “불규칙과 불균형, 그리고 황당무계하고 기묘한것”을 뜻한다. 이 시대에는 하나의 공통된 미적 형식을 만들어 내기보다 시대적 의미로 바로크적 정신이라고 말한다. 바로크 미술에 불규칙하거나 이상함, 기묘함이 전부는 아니다. 그러나 고전미술, 즉 르네상스 미술의 엄격한 이성적 추구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자신을 표현하고자 하는 정신이 바로크 미술을 불규칙하고 이상하게 보여지게 한 것이 아닌가 한다. 판화에 있어서도 인그레빙 기법이 그네상스 미술을 대표한다면 바로크는 에칭기법으로 자유롭고 쉽게 자신을 표현하는 동판화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바로크 미술이 르네상스 미술을 수용하면서도 대립된 성격으로 성명되는 것은 현대에 이르러서이다. 독일의 미술사가로 고대 미술을 강조한 뵐폴린은 ‘고전’과 ‘바로크’라는 두 개의 성격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즉 클라식 양식이라고 말하는 고전미술과 바로크 미술의 특성을 선적인 것과 회화적인 것, 그리고 면적인것과 구성적인 것, 닫혀진 형태와 열려진 형태, 다양한 것의 통일성과 통일되면서도 다양함, 절대적 명료성에 대해 상대적 명료함으로 설명하고 있다.
분명 바로크는 르네상스시대보다 변칙적이고 화려한 표현이 등장하고 개인의 자유를 누리는 것 같으면서도 프랑스처럼 로얄 아카데미 미술학교가 탄생되어 철저한 고증으로 그림을 그리는 아카데미 미술이 진행되기도한다. 바로크를 어느 한가지로 설명하거나 규정짓기보다 포괄적으로 해석해야한다. 그러한 가운데 일반적으로 17세기 시대적 상황과 르네상스와 다른 새로운 미술의 성격으로 우리는 “화려한 선들이 등장하고 교차하며, 비틀어지고 절단된 듯한 매스와 굴곡의 대비가 심한 것이다. 특히 바로크 미술은 규범에 사로잡힌 균형이나 조화, 안정과는 거리가 먼 정열과 상상의 세계를 중요시 하는 예술”이라고 지적한 것에 동의하게 된다.
17세기 판화의 가장 특징적인 모습을 우리는 바로크 의미에서 찾기보다 기법과 작가에서 찾게된다. 즉 이 시대에 에칭(Etching)기법에 의한 동판화가 제작되는 것이며 렘브란트라는 회화의 거장이 판화를 회화못지않은 예술품으로 만들었던 것이다. 16세기 르네상스 전성기 시기의 판화는 대부분 인그레빙 동판화이다. 이 기법은 매우 힘든 작업으로 동판에 선을 직접 조각하기 때문에 드로인과 같은 자유로운 표현이 힘들다. 이러한 기술적 과정을 해결하고자 에칭 기법이 17세기 중반 이후 본격적으로 사용하게 된다.
에칭은 인그레빙과 달리 드로잉처럼 힘들이지않고 원하는 그림을 그릴 수 있다. 그 기법은 동판 위에 산에 민감하지 않은 왁스를 덮고 펜촉과 같은 니들로 그림을 그리고 부식을 시킨다. 판화가는 부식된 깊이에 따라 선의 굵기를 조절한다. 결과적으로 인그레빙보다 훨씬 간편하면서 원하는 선묘를 부식시간을 조절하면서 만들어낸디ㅏ. 물론 두 기법에 따라 서로 다른 선의 성격이 만들어진다. 뷰렝으로 새긴 인그레빙 기법의 선들은 이성적이고 명확하며 날카로운 느낌으로 대단히 차갑다. 반면에 에칭에 의한 건들은 감성적이고 불분명하며 부드럽고 따뜻한 느낌을 준다. 그 예를 뒤러의 인그레빙작품과 렘브란트의 에칭작품을 비교해보면 쉽게 알 수있다.
에칭이 만들어진 곳은 북유럽 네덜란드이다. 네덜란드 동판화가들은 등록된 공방에서 공동작업으로 판화를 제작하였다. 그러나 몇몇 유명 작가들은 개인적으로 판화를 만들고 판매도 하며, 새로운 기법을 실험하면서 에칭기법이 탄생된 것이다. 사실 인그레빙으로 판화를 만들기 위해서는 어려서부터 뷔렝을 다루는 기술을 익혀야만 하였고, 화가들은 판화를 하고싶어도 기술적 어려움으로 못만들었던 것이다. 이때 네덜란드의 몇몇 화가들이 그라운드를 입힌 동판에 펜으로 드로잉하듯이 그림을 그리고 부식하여 잉크로 볓장씩 찍어내는 에칭 기법이 성공한다.
17세기 네덜란드에서 잉그레빙 동판의 질서 정연한 표현에서 벗어나 처음으로 에칭 기법을 성공시킨 판화가는 비트워치(Buytewech)였다. 그는 30년 남짓한 짧은 생애동안 드로잉처럼 표현되는 에칭기법을 개발함으로써 판화제작의 간편화와 싼가격으로 판화의 대중화를 가져다준 출발점으로 기록되고 있다. 현재 그의 드로잉과 에칭은 복사된 것만 남아있어 아쉬움을 준다. 그의 에칭은 네덜란듸 풍의 인물 묘사와 들판 풍경을 자주 그려쓴ㄴ데 마치 중국의 산수화나 서예같은 느낌은 준다. 그는 당시 주위에서 요구한 소재들이나 로마풍을 거부하고 상징적인 풍경을 창조하였다.
비트위치와 같은 동시대 에칭의 천재적 인물은 세게르(Hercules Seghers)이다. 그는 에칭 마스터라고 불리웠으며, 렘브란트와 견줄만한 전문 동판화가이다. 세게르가 발명한 독자적 기법을 사용하지는 안았으나 렘브란트는 그의 에칭판을 몇 개 모사하면서 에칭을 실험하였던 것은 사실이다. 세게르는 그라운드 용액으로 약물 시럽을 동판에 덮은 후 그림을 그렸다. 부식된 선들은 잉크가 너무 많이 삽입되어 너무 넓게 나타나기도하였다. 또한 넓은 면은 아쿠아틴트 기법과 같은 효과를 만들어내었다. 그의 대표적 에칭은 풍경판화로 환상적인 느낌과 높은 하늘밑에 안정된 네덜란드 마을을 그리고 있는 것이다. 폐허와 달뱇이 흐르는 넓은 마을과 무표정한 분위기의 버려진 골짜기들이 대단히 인상적이 작품이다.
4-2. 루벤스 (1577-1640)
루벤스 (Paul Rubens)는 17세기 바로크 성격을 가장 잘 나타낸 화가이며 판화공방을 운영한 바로크 시대의 대표적 작가이다. 그는 수많은 제자들을 두고 그림을 마치 판화의 공방에서 제작된 대량생산 기법으로 제작하기도 하여 화가로서의 명성과 사회적 지위를 획득한다. 30년대부터 루벤스는 동판 조각사들을 고용하는 판화공방을 만들어 자신의 그림들을 복사하게한다. 사실 시간을 절약하고자 판각사를 고용하지 않고 그 자신이 직접판화를 제작하였다면 어떠한 판화 작품이 만들어졌을까 하는 추축을 해본다.
30대 후반에 루벤스는 티치아노의 유명한 그림들을 판화를 통해 알게 되는데, 그는 이러한 인쇄물을 판권을 얻어내어 자신의 제작소에서 다시 만들어 북유럽에서 판매하기도 한다. 동시에 티치아노의 그림을 통하여 루벤스는 르네상스 후기의 예술세계를 배우고 이해하며 활기찬 해로운 시대의 그림을 창조하게된다.
루벤스는 30세때 한 지방출신의 잉그레빙 판각사를 고용하여 유화와 다른 깔끔한 펜 그림처럼 모사하는 판화를 제작하게한다. 사실 판화는 루벤스의 유화에 나타난 바로크적 융대한 흐름을 표현하기는 부적합했다. 이러한 점들을 해결하고자 숙련된 판각사들을 동원(당시 12명을 고용하였다고 함)하여 역동적 선과 조화를 이룰 수 있는 판화를 제작하게 한다. 이들에게 화려함을 표현할 수 있도록 밝은 빛의 명암부터 어두움에 이르기까지 유연하게 용해시킬수 있는 단계의 회색 톤을 만들어 자신의 회화와 유사하게 만든다. 그러나 그늬 판화스타일은 기술적인 면보다 화려한 느낌의 대담한 바로크적 표현이 주목될 뿐이다.
루벤스는 이탈리아에서 대중이 좋아하는 예술적 표현과 당시대의 사상을 극화시키는 것을 배웠다. 1608년경 그는 플랑드르에서 가장 큰 도시 안트워프에서 책표지 판화제작에 몰두하기도 한다. 당시 그에게 책표지를 주문한 인쇄업자 모르투스(Moretus)는 “루벤스는 책표지 하나를 만드는데 휴일에만 작업을 하여 6개월씩이나 걸렸다.”고 불평했다. 그러나 그것이 이상한 일은 아니다. 같은 시간을 들여 그린 그의 그림이 당시 100길드(huilders)라고 할 때, 판화밑그림은 5-20길드정도였기 때문이다. 루벤스의 표지화는 호화로운 인쇄를 애호하는 파리인들이 좋아하였으며 프랑스에서 급속히 바로크적 성격의 장식판화가 등장하기 시작한다.
한편 루벤스 역시 목판화를 제작하였는데, 그의 화려한 성격의 잉그레빙 동판화에 비해 목판화는 너무 단순한 느낌을 준다. 이같은 루벤스의 목판화 이후 서양에서는 19세기 말 고갱(Gauguin)과 20세기 초 독일 표현주의 목판화가 등장하기까지 완전히 정지된다. 루벤스의 목판화를 고전시대 최후의 걸작으로 형가하나 몇점 찾아보기 힘들다. 루벤스의 목판화는 잉그레빙 기법처럼 판에도 가능한 거미줄 같은 복잡하고 세밀한 선들로 짜임새 있게 밑그림을 그린다. 그는 판각사들에게 한치의 오차도 없이 그대로 복사하여 옮기도록 하였으며, 칼로 조각하기에 쉽도록 완벽한 형태와 구성을 구축했다.
4-3. 렘브란트 (1606-1669)의 에칭
a) 에칭과 자화상
렘브란트(Rembrandt)는 에칭 기법을 누구보다 먼저 실험하고 본격적인 판롸작품을 만든 17세기 네덜란드의 최대 화가이며, 판화를 독립된 예술품으로 인정받게 만든 판화가로 판화사에 영원히 기록될 인물이다. 그는 너무도 다양한 모습을 지니고 있어 어떤 한 면만 묶어 설명하기 힘들다. 바로크 시대에 활동한 그는 어떤 북 유럽인보다 르네상스의 핵심과 바로크 특성을 잘 보여주었다. 렘브란트는 음영의 대가, 즉 빛의 예술가로 부르기도 하며, 판화에서는 에칭기법으로 회화못지않은 빛의 표현과 때로는 명암이 전혀 없이 3-4개의 선만으로 인물을 그리는 다양함과 지적인 면을 동시에 보여준다.
특히 렘브란트의 20여점이 넘는 유화와 에칭의 자화상은 한 예술가의 자서전적인 기록인 동시에 훌륭한 예술품으로 인정받고 있다. 20대에 만든 에칭의 자화상은 거울을 통하여 찡그린 얼굴 표정을 즉흥적으로 그리고 있다. 이는 젊음의 가벼움과 연민, 그리고 두려움까지 나타내고 있으며, 촛불이 비치는 음영효과로 명암이 잘 나타난 판화이다. 33세에 그는 부유한 상속녀 사스키아와 결혼하고, 풍족한 생활과 인기있는 초상화 주문제작으로 암스텔담 사회의 유명인사가 된다. 이 당시 그린 자화상에는 화려한 복자의 여유있는 귀족으로 자신의 모습을 그린다. 이것은 한편 지방 경매장에서 본 라파엘 초상화를 모사한 것으로 이탈리아 르네상스 화풍을 나타내고 있다. 또다른 에칭의 자화상 판화는 난간에 기댄 베레모를 쓴 아첨꾼같은 표정의 자화상이다. 그는 이탈리아 르네상스 시대 귀족처럼 넓은 소매옷 복장으로 과장된 허풍스런 모습으로 그려져있다.
정략적 결혼과 물질적 허영에 빠진 예술가의 면모는 부인 사스키아가 죽고 개성적 화풍으로 주문한 집단 초상화를 그렸을 때 주문자들은 렘브란트를 거절하게된다.이후 경제적인 어려움 속에서 렘브란트는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거울에 비쳐 보면서 자화상을 그린다. 이제 42세에 모든 것을 삼킬 듯한 눈과 탐색하는 듯한 손, 사색하는 얼굴이 보는 사람들을 압도하고 있다. 보는 것과 그리는 것에 대한 렘브란트의 강박관념은 하나의 굳은 자세로 영혼의 소리를 중요시하게된다. 그는 그가 본 것이 짐승이든, 예수가 설교하는 것이든, 무언가 그 내면을 파악할 때까지 자신을 몰두하고, 끈질긴 노력과 본능으로 핵심을 속필로 쏟아낸다. 1648년 이때 만들어진 에칭 초상화들은 고독속에 스스로를 표현하는 새로운 예술의 출발이며 판화의 새로운 장이 펼쳐지기 시작하는 것이다.
렘브란트는 자화상을 비롯하여 그를 도와준 친구들의 초상이 에칭을 통하여 나타난다. 친구의 초상화는 귀족들의 주문화와 달리 그의 작업실 의자에 빈손으로 앉아있는 자연스런 모습으로 애정이 담긴 포즈이다. 41세에 그는 오랜 친구인 얀 식스(Jan Six)의 전신상을 에칭으로 만든다. 품위있게 옷을 입은 젊은 귀족이 말쑥하게 정리된 전통적인 방에 서서 무언가 읽고 있다. 렘브란트는 그 자세와 배경 효과로 인물에 초점을 맞추어 세심한 터치와 중량감있는 명암을 나타낸다. 그는 이때 여러개의 드로잉과 유화 등을 남기며 가장 귀중한 에칭초상화로 이것을 꼽는다.
거의 말년에 렘브란트는 파산선고를 받고, 이때 집관리인 토마스 쟈콥의 초상을 드라이 포인트로 만든 것이 있다. 이 작품은 그의 며 안되는 드라이포인트 기법 판화로 파산된 자신의 처량함이 더욱 강하게 느껴진다. 두꺼운 유리창으로부터 들어오는 빛은 인물을 부드럽게 감싸주면서도, 밝고 어두운 대비가 강하여 화가의 불행에 냉정할 수 밖에 없는 창백하고 냉정한 늙은 얼굴을 비추고 있다. 육체는 맑은 정신을 담기에는 너무 늙었다. 여기서 렘브란트는 또 다른나라, 또 다른 사람으로부터 온 것 같은 깊은 곳에 인간의 힘을 남기고 있다. 다른 어떤 예술가도 그렇게 오랜 비극적 인간의 체험을 직접 여행한 예술가는 없을 것이다.
b) 렘브란트와 성서
사회적 명성을 잃고 경제적 파산에 외로움 속에서 렘브란트는 점점더 성서와 가까워지게 된다. 그는 매일 매일의 일상속에서 신과 인간의 관계를 깊이있게 생각하며 예술과 연결시켜 그 의미를 찾는다. 여기서 그는 어떤 다른 주제보다 성서를 자주 택하였고 특히 실험적 표현이 가능한 에칭으로 성서를 번역하고있다. 성서를 주제로 한 그의 판화는 회화보다 더 효과적이었으며 대중을 위한 선물이라고 행각하였다. 그는 스스로를 회화에 투입시켰던 것 만큼 전심전력으로 흑과 백의 에칭속에 자신을 집어넣었다.
렘브란트의 가장 야심적인 종교적 판화는 그리스도와 많은 사람들을 등장시켜 화면을 가득 채우는 복잡한 구성이 특징이다. <그리스도의 봉사>(1640)에서도 그랬으며, 기타 다른 작품에서도 공통된 구성을 발견하게된다. 그리스도의 인간적인 체취와 그 주변에 있는 가난한 사람들, 그 반대로 질투와 시기하는 모습, 바리세파 사람들, 이 모든 상황이 한 장면으로 축양되어있다. 렘브란트의 에칭기법은 이같은 다양함을 총망라하여 명쾌한 대답을 내려주었다.
<군중 앞에 있는 그리스도>(1635)는 같은 구도의 그림과 여러개의 에칭판이 만들어졌다. 특히 이 작품은 성서에 대해 깉은 이해와 통찰력을 보여주는 작품으로 섬세하고 기교에 찬 빛의 효과가 가장 잘 나타난 작품이다. 이것으로 그는 많은 이익을 가져다 준 판권을 얻기도 하였다. 그는 이 그림에서 그리스도의 머리와 가슴부분을 완성시키지도 않고 배경만을 가득채운 에칭을 만들었다. 그리스도는 사형을 선고받은 네덜란드 죄수들처럼 문밖에 홀로 서있고, 반면 좌우 상하의 어둠속에서 적들의 난투는 비극적인 축제처럼 이어지고 있다. 이 작품은 1세기 전에 그려진 루카스 라이덴의 잉그레빙 동판화 <그리스도의 출현>을 그대로 모사한 것이다 그 느낌은 완전히 다르다. 루카스의 인그래빙은 중세적 인물들로 가득판 인위적인 질서의 딱딱한 구성인데 반해 렘브란트의 작품은 현실적 인물들로 실제 상황을 그대로 읽게하여 준다. 이같은 구성은 또한 그리스도와 빌라도가 높은 곳에 있었다는 성서의 요한 복음에 충실한 구도라고 볼 수 있다.
렘브란트는 이처럼 같은 내용의 그림을 그리면서 원근법에 의한 루카스의 작품보다 훨씬 혀닛ㄹ감을 느끼게 하면서도 성서에 충실히 한다. 여기서 그는 하단부에 위치한 군중과 승려들을 마치 파르테논의 마차행렬보다 더 짜임새있게 일직선으로 짜맞추어 놓았다. 그들의 단순한 앞뒤모습은 서로서로의 밀접한 관계를 나타내어 감상자들로 하여금 사건을 같이 보게 한다. 개인들은 긴밀하게 밀착시켜 표현한 군중은 숀가우어가 인그레빙한 <골고다의 그리스도>와 같은 전통적 느낌을 갖게 하면서 나아가 발전된 군중 표현이다.
<군중핲에 있는 그리스도> 일곱 번째 판에서 렘브란트는 구경꾼의 행렬을 지워버린다. 이는 주제가 모호해지고 감상자의 마음을 혼란스럽게 한다는 지적이다. 또한 전경에 나타난 군중들의 복잡함은 높은 위치의 그리스도를 약화한다고 생각하여 하단 양 끝에 인물 몇몇만 남긴다. 아마츄어 예술가는 여백의 두려움 때문에 없애버리는 것을 주저하게 되지만, 렘브란트와 같은 경우 필요없는 것을을 과감하게 없앰으로써 그의 독창적 우수함을 보여주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이같은 생략은 신성과 인류, 즉 그리스도와 바라바, 성직자와 평민의 대비가 강조된다. 렘브란트는 그리스도와 빌라도를 우리와 직접 마주치게 하며 양쪽에 군중들을 그려 더욱 중심된 주제를 클로즈업하듯 확대하여 조여준다.
c) 렘브란트의 테크닉
렘브란트 사후 10년쯤 뒤, 피렌체의 비평가 발디누치(Baldinucci)는 렘브란트의 에칭 판화를 그 이전에도, 그 이후에도 결코 이루어진 적이 없는 놀라운 기법이라고 평한다. 또한 그가 만든 에칭의 선들은 뚜렷한 윤곽선 없이도 깊이를 갖고 있으며 풍부하고, 강력한 음영을 이룩하였다라고 말한다. 이것은 렘브란트의 테크닉만을 칭찬한 것이 아니라 예술성과 기술의 완벽한 결합을 지적한 말이다. 렘브란트는 자신의 주제에 맞추어 에칭기법을 사용했다. 전통적인 작업방식과 재료를 버리고, 표현하고자 하는ㄴ 주제에 무언가 새로운 기술을 창안했다.
쉑스피어의 희곡이 각각의 문장과 어휘에 의해 예술성이 좌우되듯이, 회화나 판화의 예술성도 각각의 선이나 색조가 빝바탕이 되어야 한다. 렘브란트와 고야(Goya)는 자기가 하고 싶은대로 할 수 있는 소재와 기법을 추구하는 자세로 작업을 하고 판화헤서 그 비결을 찾아내었다. 결과적으로 이들은 독창적 판화를 만들어 회화의 한계와 그림에 대한 끊임없는 주문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렘브란트는 10대 후반부터 에칭을 하기 시작했음이 틀림없는데, 동판에 그의 싸인이 들어가고 날짜가 기록된 것은 22세부터이다. 이때 그는 자화상과 인체묘서, 걸인 등을 실물크기로 150여개 에칭을 습작으로 남긴다. 20대 후반에 그는 전문 판화가들의 작품을 모작하면서 판화에 충격적인 흑백의 효과를 받아들이고 회화와 비견될 만큼 두껍고 무게있는 명암의 선들로 본격적인 테칭 판화를 만들기 시작한다. 렘브란트의 <수태고지>(1643)는 빛을 등진 천사의 등장과 당황하여 도망하는 모습의 사람과 소들의 현란한 드라마로 그려진다. 특히 어둔 구름의 표현은 무대배경처럼 극적 효과를 살리며 밤을 돋보이게 한다.
회화와 드로잉을 모사하는 에칭에 싫증난 그는 같은 주제를 다르게 표현하는 방법을 탐색한다. 즉 붓이나 연필에 의한 단순한 선들이 일차적인 초부식으로 불규칙한 명암이 나타나는 기법등이다. 또한 그는 동판에 부식된 선묘에만 잉크를 묻히는 테칭도 만든다. 이는 복잡한 작업을 단순화 시키며 밝고 어두운 톤을 극대화 시킨 것이다.렘브란트는 중간 톤을 표현하기 위해서는 인그래빙 기법을 혼용하고, 검은색 표현은 드라이포인트 니들을 사용함으로써, 보다 더 자연스러운 에칭 동판화를 만들어 나간다.
1640년경의 작품인 <그리스도의 봉사>에서 이같은 기법이 잘 나타난다. 이 작품은 인그레빙과 에칭, 드라이포인트 등 다양한 기법의 혼합으로 그의 가장 대표적 판화작품중의 하나이다. 작품의 중앙에 등장하는 그리스도는 감상자를 향하고 있으며 병자와 버림받은 이들을 어둠속에서 이끌어내고 있다. 전체적 분위기는 마치 극적인 연극무대처럼 보이며 주인공들을 향해 밝은 조명이 비추어진 것 같다. 그러나 그의 후기 작품들은 대부분 조급하게 만들어지고 점점 더 단순한 표현기법으로 미완성의 거친 느낌이 강한 작품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