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아름다운 장독대
가장 한국적인 것을 꼽으라고 한다면 그중의 하나는 장독대가 아닐까. 우리네 식탁에서 빼놓을 수 없는 김치, 고추장, 된장, 간장, 젓갈 등 5대 밑반찬을 비롯한 갖가지 반찬을 저장했던 장독대는 분명 한국적이다.
<운흥사 장독대>
부엌과 가까운 곳에, 들고 나기 쉬운 곳에 크고 작은 항아리며 장독을 한곳에 모아둔 장독대는 우리 사회가 농경사회에서 산업사회로 바뀌기 이전에는 우리네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었던 것으로 지금도 농촌에는 장독대가 있어 목가적인 풍경을 연출한다. 장독대만 바라보아도 그 집의 가풍이나 성격을 손쉽게 파악할 수 있다. 손끝이 야물어 부지런하고 정갈한 여인네의 장독대는 언제나 닦고 닦아서 야들야들 번들번들 빛이 나고 윤이 나는 반면 몇 날 며칠을 닦지 않았는지 먼지가 부옇게 쌓여 덕지덕지 앉은 모습만 보아도 그 집 안주인이 게을받고(게으로고) 틀피짓(덜렁거리고 야물지 못함)을 하는지 단박에 그 집의 여인네의 성격을 알 수가 있는 것이 장독대이기도 하다. 가난하여 살림이 적은 집은 적은 대로, 살림이 넉넉한 집은 많은 대로 장독대를 꾸몄다. 담으로 둘러싼 담장 위를 짚을 엮어 얹거나 잘 사는 집에서는 장독대마저 기와를 얹기도 했다. 초가집은 초가집에 어울리레 장독대의 담장을 짚으로, 기와집은 기와집에 어울리도록 장독대의 담장을 기와로 꾸몄다. 이도저도 아닌 집은 그 지의 구조에 맞게 위치한 공간에다 장독대를 설치하여 아담하게 꾸미었다. 이처럼 장독대는 우리의 미의식이 독특하게 표출된 음식문화와 규방문화의 공간이었다.
<겨울 운흥사 장독대>
운흥사(고성군 하이면 와룡리 442번지)에 가면 눈을 사로잡는 아름다운 공간이 있다. 그것은 불상이나 탑이 아니다. 그것은 운흥사가 자랑하는 탱화도 아니다. 이 절의 불심이 뛰어나다는 주지 스림은 수행도량인 절도 아니다. 그것은 절 살림을 대변하는 듯한 조촐한 장독을 마치 꽃잎이 감싸고 있는 형상의 장독대이다. 장독대는 외부인의 눈에 쉽게 드러나지 않은 공간에 위치를 하나 이곳은 그렇지 않다. 산으로 둘러싸이다 보니 자연스럽게 햇볕이 잘 드러나는 공간이 필요했을 터. 지금 놓인 장독대의 위치가 바로 그곳이었을 것이다. 싼 담도 부드러운 곡선이다. 부처도 부드럽고 부처의 말씀 또한 부드럽다. 그중에서도 ‘자비’라는 말이 제일로 부드럽다. 장독대를 둘러싸고 있는 저 담장은 정녕 부드럽고 자비로운 부처의 말씀 그대로이다.
장독대를 가만히 쳐다보고 있노라면 어미닭이 알을 품고 있는 포근함이랄까, 햇볕이 그리운날의 따뜻한 햇볕 한 줌이랄까, 자식에게 음식 한 숟갈 더 넣어주고 싶은 지극한 모성애의 흐뭇함이랄까, 가을 김장철의 맛깔스런 양념 냄새랄까 하여튼 이런 묘한 느낌을 자아내게 한다. 저 장독대와 담장 위에 눈이라도 내려 쌓이면 얼마나 부드러울까. 부드러움이 만들어내는 아름다움이 정녕 이런 것일 줄이야 운흥사에 와서야 비로소 깨닫게 된다.
운흥사雲興寺 <운흥사 전경>
운흥사의 장독대가 아름답다면 운흥사 또한 그 이름 그대로 구름이 뭉개뭉개 피어남 직한 사찰이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절이 위치한 곳이 고성군 하이면 와룡리臥龍里이다. 와룡은 용이 잠자는 곳이니만큼 그곳에는 반드시 구름이 모여들 터. 절 가까운 곳에는 이 근방에서 제일로 높다는 와룡산(799m)도 있다. 그러니 운흥사란 이름을 지은 것인지도 모르겠다. 제갈공명의 별칭이기도 한 와룡은 그 이름부터가 예사롭지 않기에 운흥사 또한 예사롭지 않은 절임에 틀림없다.
<운흥사 영산제>
운흥사는 676년에 의상대사가 창건했다고 한다. 임진왜란 때 사명대사가 이곳에서 승병 6,000여 명을 거느리고 싸웠으며 그때 절이 소실되었다 한다. 그 이후 1651년(효종2년)에 김법성金法成이 중창을 했고, 1731년에 대웅전(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82호)을 중건했다. 특히 1730년에 리연理然 등이 괘불탱(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61호)을 제작하여 매년 음력 3월3일에 영산재를 지내고 있으며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고성 부사를 지낸 오횡묵吳宖黙(1834~?) [조선 말기 문신이며 학자로 본관은 해주이고 자는 성규聖圭이며, 호는 채원茝園이다. 19세기 말에 정선군수 자인현감 함안군수 고성부사 공상소감동工桑所監董 지도군수 및 여수군수 등을 두루 거쳤다. 그는 부임한 지방의 수령으로 있을 당시 자신의 시문은 물론 관청에서 중요하게 집행되었던 일과 내외에서 일어났던 중대한 일 등을 일기체로 엮어 놓았는데, 이것이 오늘날 귀중한 자료로 남겨져 전해지고 있는 것이 총쇄록이다. 그의 저서로느 《채원집》《정서총쇄록》《자인총쇄록》《함안총쇄록》《고성총쇄록》《지도총쇄록》《여재촬요》 등이 있다] 이 쓴《고성총쇄록》을 살펴보면 운흥사에 대한 기록이 몇 차례 언급이 되어 있다. 그 기록을 따라가보자.
<운흥사>
『불우 법천사法泉寺 는 고을 북쪽에 있다. 운흥사는 고을 서쪽에 있다. 내원사는 고을 서쪽에 있다. 안정사는 고을 동쪽에 있다. 문수사는 고을 서쪽에 있다. 장의암은 고을 동쪽에 있다. 용화사는 고을 남쪽에 있다.』 오횡묵 부사가 재직시에는 통영도 고성의 소관이었기에 용화사가 남쪽에 있다고 했다. 운흥사는 서쪽에 있는 사찰이고 당시에 법천사가 존재했는지 법천사는 북쪽에 있다고 했다. 지금은 법천사는 흔적이 없고 부도 몇 기만 남아 있을 뿐이다. 『와룡산 운흥사의 중 금영錦永과 取寬이 찾아와서 좌반佐飯 한 그릇을 드리고 이야기하기를 “본 사찰이 산중에 있지만 과연 오래된 사찰인데 근래에 이웃 마을 나무꾼이 함부로 폐단을 지어 하나하나 말할 수도 없습니다. 별다른 금령이 있은 연후에 보존할 수가 있습니다.”』 운흥사 주변 울창한 숲이 상당기간 남벌로 인하여 폐허화되고 있으므로 이를 금지해 줄 것을 사찰의 승려가 고성부사에게 호소하고 있는 상황을 적고 있다. 『9월10일… 새벽에 덕치를 출발해서 내원동, 석지, 와룡동을 지나 운흥사에 들어가니 여기사 바로 삼한의 옛 큰 절이다. 골 어귀에 헤월당의 비석이 있고 돌아서서 절로 들어갔다. 대웅전이 중앙에 있고 북쪽에는 시왕전이 있고 남쪽에는 나한전이 있고 서쪽에는 극락전이 있고 동쪽에는 칠성각, 천진암이 있고 동쪽 벼랑에는 일곱 기의 부도가 있는데, 응화, 홍찬, 포연, 경선, 기삼, 도현, 긍전 등이 그 승려들이다. 두루 도량을 관람하니 흰 구름이 골짝에 잠기고 흐르는 물이 시내에 울린다. 홀연히 옛날에 용이 누워 있던 곳인가 싶은데 와룡산이 바로 주산이다. 어린 소나무와 아름다운 대나무가 몇십 리의 산을 둘러 있는데, 무너지는 주추와 기울어진 기둥이 사람으로 하여금 황량한 누대의 탄식을 일으키게 한다. 또 말하기를 “수십 년 전에는 이 골짝 안 30리가 모두 한 아름 되는 큰 소나무들이었는데. 통영사또가 금하지 말라는 명령으로 인해 일곱 고을 나무꾼이 일시에 마구잡이로 베기를 매일 수천명씩 하니 십일도 안 되어 민둥산으로 변했습니다. 그 후로 중들고 점점 줄어들고 불당도 훼손되어 저절로 퇴락하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몇 해 전에 통영에 하소연을 해서 겨우 오늘의 모양을 이룬 것입니다.”라고 하면서 모두 한탄하니 나도 분함이 있어, 그 일로 시로 읊었다.
<운흥사 대웅전>
내 들으니 운흥사 삼한시대부터 복지로 소문나, 사방에 산이 둘러 30리 한 지역에 아름드리 소나무 울창하였네. 한 가지도 도끼와 자귀의 남벌을 막아 승려 많고 사찰 부유 이익 많았네. 아첨하는 사람의 요설 나무의 재앙 되어 추상같은 새 명령 대원수 같았네. 하루아침에 민둥산 불모지 되니 돌부처도 그 일에 눈물 흘릴 일. 오정장사의 신검은 어찌 탐욕의 머리 자르지 않는가? 또 행차하여 와룡동에 이르니 마을 백성들이 닭을 잡고 술과 과일을 마련하여 대접한다면서 길을 막고 기다리므로 내가 좋은 말로 타이르고 오방치를 넘어가니 길이 매우 가파르게 있었다.』 오횡묵이 관내순시를 하던 중 운흥사에 들른 사실을 적은 글이다. 여기서 눈여겨볼 대목이 있다. 운흥사가 오래된 사찰이라고 한 것이며 운흥사의 규모에 대해서도 서술하고 있다. 예전에 번성했던 절이 주변 소나무의 남벌로 쇠락해진 경위를 설명하고 있다. 통영의 사또란 필경 통제사일 것이다. 통제영의 통제사가 고성 군민에게 끼친 폐해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는 것을 이 기록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운흥사는 임진왜란과 관련이 아주 깊은 절이다. 승군장이었던 서산대사 휴정(1520∼1604)의 행정을 기록한 《청허당집》에 보면 고성과 관련한 시 한 편이 나온다. 한 소리는 구름 속 맑은 기러기 울음이요, 외로운 돛단배는 먼 길 가는 나그네의 배. 바다 빛은 하늘보다 푸른데, 짝지어 나는 하얀 갈매기. 유유히 흐르는 한 아득한 세월에, 성 밑의 물은 속절없이 흐르네. 누가 알리요, 지초 캐는 사람이 오늘 홀로 성루에 오른 줄을! -<등 철성성루유감 等 鐵城城樓有感>
<대웅전 경내>
이 시에는 고성이라는 말은 한마디도 없다. 바다를 나타내는 돛단배, 갈매기 그리고 성과 성루뿐이다. 단지 이의 제목이 고성의 옛 이름인 철성을 가리키고 있어 서산대사가 고성을 방문했다는 사실을 더듬어 볼 따름이다. 그러나 임진왜란 때 그 바쁜 서산대사가 남쪽 끄트머리 고성 바닷가에싸지 왜 왔을까. 승병들로 왜적과 맞서기 위함이었지 않았을까, 그렇다면 승병들의 집결지인 이곳 운흥사에까지 왔다고 봐야 한다. 또 이순신 장군이 전투의 작전회의를 위하여 세 차례나 운흥사를 방문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이런 까닭으로 인해 운흥사가 왜군에 의해 불타는 불운을 겪었는지 모를 일이다.
<운흥사 영산전>
와룡산이란 지명은 두 곳이다. 하나는 운흥사가 있는 고성 와룡산이고 하나는 사천에 있는 사천 와룡산이다. 고성 와룡산에 대한 옛 문헌에는 “군의서쪽 60리에 있으며 무이산으로부터 왓다. 고려 현종이 일찍이 이곳에서 글을 읽있다”고 기록해 놓았다. 이 기록에서 두 가지를 살펴보아야 한다. 그 하나는 사천 와룡산과 고성 와룡산은 서로 이웃하고 있는 산임에도 불구하고 그 시원은 확연히 구분이 된다. 고성 와룡산은 무이산에서 왔다고 했다. 무이산은 감치산에서 왔고 감치산은 무량산에서 왔으니 결국 고성 와룡산은 사천이 아닌 고성의 진산인 무량산에서 산줄긳사 뻗어온 것이다. 또 하나는 고려 현종이 이곳에 머물면서 글을 읽고 훗날 왕으로 등극했다고 했다. 무슨 사연이 있었을까? 이 이야기는 《철성지》와 《고성지》에 자세히 수록돼 있다. 찾아서 한번 읽어 보자. 『고려의 제8대 현종이었던 순이 이 산에서 우거하면서 글을 읽고 있었는데 그때에 마루 난간에 꽃뱀이 도사리고 있는 것을 보고 사아시란 시를 지었다. 그의 나이 6살이었다. 5살 때부터 하나를 가르치면 벌써 둘을 깨쳤다고 한다.』 「자그마한 뱀 새끼 약초 난간 휘감았는데, 온몸이 붉은 비단 같아 절로 아롱지네. 오래도록 수플 밑에 있으리라 말하지 말게나. 어느 날 용되는 것 어렵지 않다네」 자그마한 뱀 새끼는 현종 자기 자신을 가리킨다. 자신은 이 후미진 와룡산에서 평생을 보내지 않고 어린 뱀이 커서 언젠가 용이 되어 승천하듯이 자신도 왕이 될 것임을 암시하는 시다.
<운흥사 명부전>
이 시의 배경은 이렇다. 당초 고려 제5대왕 경종이 헌애왕후 소생인 송을 남겨두고 재위 6년(982)만에 죽자 두 왕후, 헌애와 헌정(그녀들은 자매지간이고 태조 왕건의 제7자 욱의 딸)은 청상과부의 몸이 된다. 헌애왕후는 아들 송이 있어 외로움을 모르나 헌정왕후는 슬하에 자식이 없어 외로운 몸이었다. 이에 헌정와후(황보 씨)가 사제에 나와 살았는데 한번은 꿈에 곡령에 올라가서 갑자기 소변이 마려워서 소변을 보았더니그 물줄기가 어찌나 거센지 온 나라 안이 바다를 이루었다. 점쟁이가 말하기를 “아들을 낳으면 왕이 되어 온 나라를 차지하겠다.” 하니 왕비가 말하기를 “내가 이미 과부가 되었는데 어떻게 아들을 낳는단 말인가?”하였다. 종실인 욱은 태조 왕건의 제8남인데 그의 집이 헌정왕후와 가까웠고 또한 그들은 숙질간으로 스스럼없이 자주 왕래를 하다 보니 어느덧 사통하여 임신이 되었다. 성종때 일어난 일이었다.
<운흥사>
하루는 그녀가 욱의 집에서 자고 있는데 욱의 처가 도저히 참을 수 없어 마당에 섶을 쌓아놓고 불을 질렀다. 백관들이 달려 나와 불을 껐고 성종도 달려 나와 불 끄기를 독려했다. 욱의 처가 성종에게 불을 낸 사유를 이실직고 하자 헌정왕후는 부끄럽고 후회스러워 집으로 바삐 돌아갔는데 겨우 문에 도착하자마자 태기가 있어 문 앞의 버드나무 가지를 붙잡고 몸을 풀고 죽으면서 유모를 정하여 길러 욱에게 보내라고 유언을 남기고 그녀는 세상을 뜬다. 훗날 이 아이가 현종이다. 아이 때 이름은 순이었다. 욱은 성종 11년(992) 종친의 법도를 지키지 못함을 힐책을 받아 사천군 와룡산으로 유배된다. 아이도 시모와 종자를 딸려서 와룡산의 욱에게로 돌려보내나 부자가 함께 살지 못하도록 하여 떨어져 살았다. 욱은 문장을 전공하여 압송한 내시 고현에게 지어 주기를 “그대와 같은 날 서울(개성)을 떠나왔는데, 그대는 돌아가고 나는 돌아가지 못하네. 나그네의 우리는 서럽게도 원숭이가 갇힌 듯하고, 석별의 정자에선 부럽게도 말이 나는 듯 하다. 제성의 봄빛은 혼백이 꿈과 어울리고, 해국의 풍광은 눈물 옷깃에 가득하네. 성주의 한 말씀 바꾸지는 않을 터이니, 마침내 낚시터에서 늙게는 하시려나”하였다. 또 욱은 지리에 공부가 깊어 일찍이 금 한 주머니를 아들 순에게 주면서 말하기를 “내가 죽으면 이 돈을 술사에게 주어 이 고을 성황당 남쪽 귀룡동에 나를 장사지내게 하되 반드시 엎어서 묻게 하라.”하였다. 마침 욱이 귀향지 배소에서 죽어 아들이 그 말과 같이 술사에게 말하여 엎어서 묻어달라고 청하니 술사가 말하기를 “어찌 그리도 바쁜고?” 하였는데, 과연 그 이듬해 2월에 순이 서울로 돌아가서 즉위하였다. 그가 현종이다. [출처] [고성여행]한국의 아름다운 장독대 <고성의 겉살과 속살을 찾아서/운흥사/대웅전/명부전/영산제/고성문화유산>|작성자 쇳디한국의 아름다운 장독대 달구벌 추천 0 조회 61 15.07.15 17:05 댓글 0 북마크번역하기 공유하기기능 더보기 SNS로 공유하기 펼쳐짐 현재페이지 URL복사 http://cafe.daum.net/suzhoukorean/HaG/1040?svc=cafeapiURL복사 공유목록 닫기 주소가 복사되었습니다. 원하는곳에 붙여넣기(Ctrl+V)해주세요. 공유목록 닫기 게시글 본문내용
한국의 아름다운 장독대
가장 한국적인 것을 꼽으라고 한다면 그중의 하나는 장독대가 아닐까. 우리네 식탁에서 빼놓을 수 없는 김치, 고추장, 된장, 간장, 젓갈 등 5대 밑반찬을 비롯한 갖가지 반찬을 저장했던 장독대는 분명 한국적이다.
<운흥사 장독대>
부엌과 가까운 곳에, 들고 나기 쉬운 곳에 크고 작은 항아리며 장독을 한곳에 모아둔 장독대는 우리 사회가 농경사회에서 산업사회로 바뀌기 이전에는 우리네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었던 것으로 지금도 농촌에는 장독대가 있어 목가적인 풍경을 연출한다. 장독대만 바라보아도 그 집의 가풍이나 성격을 손쉽게 파악할 수 있다. 손끝이 야물어 부지런하고 정갈한 여인네의 장독대는 언제나 닦고 닦아서 야들야들 번들번들 빛이 나고 윤이 나는 반면 몇 날 며칠을 닦지 않았는지 먼지가 부옇게 쌓여 덕지덕지 앉은 모습만 보아도 그 집 안주인이 게을받고(게으로고) 틀피짓(덜렁거리고 야물지 못함)을 하는지 단박에 그 집의 여인네의 성격을 알 수가 있는 것이 장독대이기도 하다. 가난하여 살림이 적은 집은 적은 대로, 살림이 넉넉한 집은 많은 대로 장독대를 꾸몄다. 담으로 둘러싼 담장 위를 짚을 엮어 얹거나 잘 사는 집에서는 장독대마저 기와를 얹기도 했다. 초가집은 초가집에 어울리레 장독대의 담장을 짚으로, 기와집은 기와집에 어울리도록 장독대의 담장을 기와로 꾸몄다. 이도저도 아닌 집은 그 지의 구조에 맞게 위치한 공간에다 장독대를 설치하여 아담하게 꾸미었다. 이처럼 장독대는 우리의 미의식이 독특하게 표출된 음식문화와 규방문화의 공간이었다.
<겨울 운흥사 장독대>
운흥사(고성군 하이면 와룡리 442번지)에 가면 눈을 사로잡는 아름다운 공간이 있다. 그것은 불상이나 탑이 아니다. 그것은 운흥사가 자랑하는 탱화도 아니다. 이 절의 불심이 뛰어나다는 주지 스림은 수행도량인 절도 아니다. 그것은 절 살림을 대변하는 듯한 조촐한 장독을 마치 꽃잎이 감싸고 있는 형상의 장독대이다. 장독대는 외부인의 눈에 쉽게 드러나지 않은 공간에 위치를 하나 이곳은 그렇지 않다. 산으로 둘러싸이다 보니 자연스럽게 햇볕이 잘 드러나는 공간이 필요했을 터. 지금 놓인 장독대의 위치가 바로 그곳이었을 것이다. 싼 담도 부드러운 곡선이다. 부처도 부드럽고 부처의 말씀 또한 부드럽다. 그중에서도 ‘자비’라는 말이 제일로 부드럽다. 장독대를 둘러싸고 있는 저 담장은 정녕 부드럽고 자비로운 부처의 말씀 그대로이다.
장독대를 가만히 쳐다보고 있노라면 어미닭이 알을 품고 있는 포근함이랄까, 햇볕이 그리운날의 따뜻한 햇볕 한 줌이랄까, 자식에게 음식 한 숟갈 더 넣어주고 싶은 지극한 모성애의 흐뭇함이랄까, 가을 김장철의 맛깔스런 양념 냄새랄까 하여튼 이런 묘한 느낌을 자아내게 한다. 저 장독대와 담장 위에 눈이라도 내려 쌓이면 얼마나 부드러울까. 부드러움이 만들어내는 아름다움이 정녕 이런 것일 줄이야 운흥사에 와서야 비로소 깨닫게 된다.
운흥사雲興寺 <운흥사 전경>
운흥사의 장독대가 아름답다면 운흥사 또한 그 이름 그대로 구름이 뭉개뭉개 피어남 직한 사찰이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절이 위치한 곳이 고성군 하이면 와룡리臥龍里이다. 와룡은 용이 잠자는 곳이니만큼 그곳에는 반드시 구름이 모여들 터. 절 가까운 곳에는 이 근방에서 제일로 높다는 와룡산(799m)도 있다. 그러니 운흥사란 이름을 지은 것인지도 모르겠다. 제갈공명의 별칭이기도 한 와룡은 그 이름부터가 예사롭지 않기에 운흥사 또한 예사롭지 않은 절임에 틀림없다.
<운흥사 영산제>
운흥사는 676년에 의상대사가 창건했다고 한다. 임진왜란 때 사명대사가 이곳에서 승병 6,000여 명을 거느리고 싸웠으며 그때 절이 소실되었다 한다. 그 이후 1651년(효종2년)에 김법성金法成이 중창을 했고, 1731년에 대웅전(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82호)을 중건했다. 특히 1730년에 리연理然 등이 괘불탱(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61호)을 제작하여 매년 음력 3월3일에 영산재를 지내고 있으며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고성 부사를 지낸 오횡묵吳宖黙(1834~?) [조선 말기 문신이며 학자로 본관은 해주이고 자는 성규聖圭이며, 호는 채원茝園이다. 19세기 말에 정선군수 자인현감 함안군수 고성부사 공상소감동工桑所監董 지도군수 및 여수군수 등을 두루 거쳤다. 그는 부임한 지방의 수령으로 있을 당시 자신의 시문은 물론 관청에서 중요하게 집행되었던 일과 내외에서 일어났던 중대한 일 등을 일기체로 엮어 놓았는데, 이것이 오늘날 귀중한 자료로 남겨져 전해지고 있는 것이 총쇄록이다. 그의 저서로느 《채원집》《정서총쇄록》《자인총쇄록》《함안총쇄록》《고성총쇄록》《지도총쇄록》《여재촬요》 등이 있다] 이 쓴《고성총쇄록》을 살펴보면 운흥사에 대한 기록이 몇 차례 언급이 되어 있다. 그 기록을 따라가보자.
<운흥사>
『불우 법천사法泉寺 는 고을 북쪽에 있다. 운흥사는 고을 서쪽에 있다. 내원사는 고을 서쪽에 있다. 안정사는 고을 동쪽에 있다. 문수사는 고을 서쪽에 있다. 장의암은 고을 동쪽에 있다. 용화사는 고을 남쪽에 있다.』 오횡묵 부사가 재직시에는 통영도 고성의 소관이었기에 용화사가 남쪽에 있다고 했다. 운흥사는 서쪽에 있는 사찰이고 당시에 법천사가 존재했는지 법천사는 북쪽에 있다고 했다. 지금은 법천사는 흔적이 없고 부도 몇 기만 남아 있을 뿐이다. 『와룡산 운흥사의 중 금영錦永과 取寬이 찾아와서 좌반佐飯 한 그릇을 드리고 이야기하기를 “본 사찰이 산중에 있지만 과연 오래된 사찰인데 근래에 이웃 마을 나무꾼이 함부로 폐단을 지어 하나하나 말할 수도 없습니다. 별다른 금령이 있은 연후에 보존할 수가 있습니다.”』 운흥사 주변 울창한 숲이 상당기간 남벌로 인하여 폐허화되고 있으므로 이를 금지해 줄 것을 사찰의 승려가 고성부사에게 호소하고 있는 상황을 적고 있다. 『9월10일… 새벽에 덕치를 출발해서 내원동, 석지, 와룡동을 지나 운흥사에 들어가니 여기사 바로 삼한의 옛 큰 절이다. 골 어귀에 헤월당의 비석이 있고 돌아서서 절로 들어갔다. 대웅전이 중앙에 있고 북쪽에는 시왕전이 있고 남쪽에는 나한전이 있고 서쪽에는 극락전이 있고 동쪽에는 칠성각, 천진암이 있고 동쪽 벼랑에는 일곱 기의 부도가 있는데, 응화, 홍찬, 포연, 경선, 기삼, 도현, 긍전 등이 그 승려들이다. 두루 도량을 관람하니 흰 구름이 골짝에 잠기고 흐르는 물이 시내에 울린다. 홀연히 옛날에 용이 누워 있던 곳인가 싶은데 와룡산이 바로 주산이다. 어린 소나무와 아름다운 대나무가 몇십 리의 산을 둘러 있는데, 무너지는 주추와 기울어진 기둥이 사람으로 하여금 황량한 누대의 탄식을 일으키게 한다. 또 말하기를 “수십 년 전에는 이 골짝 안 30리가 모두 한 아름 되는 큰 소나무들이었는데. 통영사또가 금하지 말라는 명령으로 인해 일곱 고을 나무꾼이 일시에 마구잡이로 베기를 매일 수천명씩 하니 십일도 안 되어 민둥산으로 변했습니다. 그 후로 중들고 점점 줄어들고 불당도 훼손되어 저절로 퇴락하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몇 해 전에 통영에 하소연을 해서 겨우 오늘의 모양을 이룬 것입니다.”라고 하면서 모두 한탄하니 나도 분함이 있어, 그 일로 시로 읊었다.
<운흥사 대웅전>
내 들으니 운흥사 삼한시대부터 복지로 소문나, 사방에 산이 둘러 30리 한 지역에 아름드리 소나무 울창하였네. 한 가지도 도끼와 자귀의 남벌을 막아 승려 많고 사찰 부유 이익 많았네. 아첨하는 사람의 요설 나무의 재앙 되어 추상같은 새 명령 대원수 같았네. 하루아침에 민둥산 불모지 되니 돌부처도 그 일에 눈물 흘릴 일. 오정장사의 신검은 어찌 탐욕의 머리 자르지 않는가? 또 행차하여 와룡동에 이르니 마을 백성들이 닭을 잡고 술과 과일을 마련하여 대접한다면서 길을 막고 기다리므로 내가 좋은 말로 타이르고 오방치를 넘어가니 길이 매우 가파르게 있었다.』 오횡묵이 관내순시를 하던 중 운흥사에 들른 사실을 적은 글이다. 여기서 눈여겨볼 대목이 있다. 운흥사가 오래된 사찰이라고 한 것이며 운흥사의 규모에 대해서도 서술하고 있다. 예전에 번성했던 절이 주변 소나무의 남벌로 쇠락해진 경위를 설명하고 있다. 통영의 사또란 필경 통제사일 것이다. 통제영의 통제사가 고성 군민에게 끼친 폐해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는 것을 이 기록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운흥사는 임진왜란과 관련이 아주 깊은 절이다. 승군장이었던 서산대사 휴정(1520∼1604)의 행정을 기록한 《청허당집》에 보면 고성과 관련한 시 한 편이 나온다. 한 소리는 구름 속 맑은 기러기 울음이요, 외로운 돛단배는 먼 길 가는 나그네의 배. 바다 빛은 하늘보다 푸른데, 짝지어 나는 하얀 갈매기. 유유히 흐르는 한 아득한 세월에, 성 밑의 물은 속절없이 흐르네. 누가 알리요, 지초 캐는 사람이 오늘 홀로 성루에 오른 줄을! -<등 철성성루유감 等 鐵城城樓有感>
<대웅전 경내>
이 시에는 고성이라는 말은 한마디도 없다. 바다를 나타내는 돛단배, 갈매기 그리고 성과 성루뿐이다. 단지 이의 제목이 고성의 옛 이름인 철성을 가리키고 있어 서산대사가 고성을 방문했다는 사실을 더듬어 볼 따름이다. 그러나 임진왜란 때 그 바쁜 서산대사가 남쪽 끄트머리 고성 바닷가에싸지 왜 왔을까. 승병들로 왜적과 맞서기 위함이었지 않았을까, 그렇다면 승병들의 집결지인 이곳 운흥사에까지 왔다고 봐야 한다. 또 이순신 장군이 전투의 작전회의를 위하여 세 차례나 운흥사를 방문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이런 까닭으로 인해 운흥사가 왜군에 의해 불타는 불운을 겪었는지 모를 일이다.
<운흥사 영산전>
와룡산이란 지명은 두 곳이다. 하나는 운흥사가 있는 고성 와룡산이고 하나는 사천에 있는 사천 와룡산이다. 고성 와룡산에 대한 옛 문헌에는 “군의서쪽 60리에 있으며 무이산으로부터 왓다. 고려 현종이 일찍이 이곳에서 글을 읽있다”고 기록해 놓았다. 이 기록에서 두 가지를 살펴보아야 한다. 그 하나는 사천 와룡산과 고성 와룡산은 서로 이웃하고 있는 산임에도 불구하고 그 시원은 확연히 구분이 된다. 고성 와룡산은 무이산에서 왔다고 했다. 무이산은 감치산에서 왔고 감치산은 무량산에서 왔으니 결국 고성 와룡산은 사천이 아닌 고성의 진산인 무량산에서 산줄긳사 뻗어온 것이다. 또 하나는 고려 현종이 이곳에 머물면서 글을 읽고 훗날 왕으로 등극했다고 했다. 무슨 사연이 있었을까? 이 이야기는 《철성지》와 《고성지》에 자세히 수록돼 있다. 찾아서 한번 읽어 보자. 『고려의 제8대 현종이었던 순이 이 산에서 우거하면서 글을 읽고 있었는데 그때에 마루 난간에 꽃뱀이 도사리고 있는 것을 보고 사아시란 시를 지었다. 그의 나이 6살이었다. 5살 때부터 하나를 가르치면 벌써 둘을 깨쳤다고 한다.』 「자그마한 뱀 새끼 약초 난간 휘감았는데, 온몸이 붉은 비단 같아 절로 아롱지네. 오래도록 수플 밑에 있으리라 말하지 말게나. 어느 날 용되는 것 어렵지 않다네」 자그마한 뱀 새끼는 현종 자기 자신을 가리킨다. 자신은 이 후미진 와룡산에서 평생을 보내지 않고 어린 뱀이 커서 언젠가 용이 되어 승천하듯이 자신도 왕이 될 것임을 암시하는 시다.
<운흥사 명부전>
이 시의 배경은 이렇다. 당초 고려 제5대왕 경종이 헌애왕후 소생인 송을 남겨두고 재위 6년(982)만에 죽자 두 왕후, 헌애와 헌정(그녀들은 자매지간이고 태조 왕건의 제7자 욱의 딸)은 청상과부의 몸이 된다. 헌애왕후는 아들 송이 있어 외로움을 모르나 헌정왕후는 슬하에 자식이 없어 외로운 몸이었다. 이에 헌정와후(황보 씨)가 사제에 나와 살았는데 한번은 꿈에 곡령에 올라가서 갑자기 소변이 마려워서 소변을 보았더니그 물줄기가 어찌나 거센지 온 나라 안이 바다를 이루었다. 점쟁이가 말하기를 “아들을 낳으면 왕이 되어 온 나라를 차지하겠다.” 하니 왕비가 말하기를 “내가 이미 과부가 되었는데 어떻게 아들을 낳는단 말인가?”하였다. 종실인 욱은 태조 왕건의 제8남인데 그의 집이 헌정왕후와 가까웠고 또한 그들은 숙질간으로 스스럼없이 자주 왕래를 하다 보니 어느덧 사통하여 임신이 되었다. 성종때 일어난 일이었다.
<운흥사>
하루는 그녀가 욱의 집에서 자고 있는데 욱의 처가 도저히 참을 수 없어 마당에 섶을 쌓아놓고 불을 질렀다. 백관들이 달려 나와 불을 껐고 성종도 달려 나와 불 끄기를 독려했다. 욱의 처가 성종에게 불을 낸 사유를 이실직고 하자 헌정왕후는 부끄럽고 후회스러워 집으로 바삐 돌아갔는데 겨우 문에 도착하자마자 태기가 있어 문 앞의 버드나무 가지를 붙잡고 몸을 풀고 죽으면서 유모를 정하여 길러 욱에게 보내라고 유언을 남기고 그녀는 세상을 뜬다. 훗날 이 아이가 현종이다. 아이 때 이름은 순이었다. 욱은 성종 11년(992) 종친의 법도를 지키지 못함을 힐책을 받아 사천군 와룡산으로 유배된다. 아이도 시모와 종자를 딸려서 와룡산의 욱에게로 돌려보내나 부자가 함께 살지 못하도록 하여 떨어져 살았다. 욱은 문장을 전공하여 압송한 내시 고현에게 지어 주기를 “그대와 같은 날 서울(개성)을 떠나왔는데, 그대는 돌아가고 나는 돌아가지 못하네. 나그네의 우리는 서럽게도 원숭이가 갇힌 듯하고, 석별의 정자에선 부럽게도 말이 나는 듯 하다. 제성의 봄빛은 혼백이 꿈과 어울리고, 해국의 풍광은 눈물 옷깃에 가득하네. 성주의 한 말씀 바꾸지는 않을 터이니, 마침내 낚시터에서 늙게는 하시려나”하였다. 또 욱은 지리에 공부가 깊어 일찍이 금 한 주머니를 아들 순에게 주면서 말하기를 “내가 죽으면 이 돈을 술사에게 주어 이 고을 성황당 남쪽 귀룡동에 나를 장사지내게 하되 반드시 엎어서 묻게 하라.”하였다. 마침 욱이 귀향지 배소에서 죽어 아들이 그 말과 같이 술사에게 말하여 엎어서 묻어달라고 청하니 술사가 말하기를 “어찌 그리도 바쁜고?” 하였는데, 과연 그 이듬해 2월에 순이 서울로 돌아가서 즉위하였다. 그가 현종이다. [출처] [고성여행]한국의 아름다운 장독대 <고성의 겉살과 속살을 찾아서/운흥사/대웅전/명부전/영산제/고성문화유산>|작성자 쇳디한국의 아름다운 장독대 달구벌 추천 0 조회 61 15.07.15 17:05 댓글 0 북마크번역하기 공유하기기능 더보기 SNS로 공유하기 펼쳐짐 현재페이지 URL복사 http://cafe.daum.net/suzhoukorean/HaG/1040?svc=cafeapiURL복사 공유목록 닫기 주소가 복사되었습니다. 원하는곳에 붙여넣기(Ctrl+V)해주세요. 공유목록 닫기 게시글 본문내용
한국의 아름다운 장독대
가장 한국적인 것을 꼽으라고 한다면 그중의 하나는 장독대가 아닐까. 우리네 식탁에서 빼놓을 수 없는 김치, 고추장, 된장, 간장, 젓갈 등 5대 밑반찬을 비롯한 갖가지 반찬을 저장했던 장독대는 분명 한국적이다.
<운흥사 장독대>
부엌과 가까운 곳에, 들고 나기 쉬운 곳에 크고 작은 항아리며 장독을 한곳에 모아둔 장독대는 우리 사회가 농경사회에서 산업사회로 바뀌기 이전에는 우리네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었던 것으로 지금도 농촌에는 장독대가 있어 목가적인 풍경을 연출한다. 장독대만 바라보아도 그 집의 가풍이나 성격을 손쉽게 파악할 수 있다. 손끝이 야물어 부지런하고 정갈한 여인네의 장독대는 언제나 닦고 닦아서 야들야들 번들번들 빛이 나고 윤이 나는 반면 몇 날 며칠을 닦지 않았는지 먼지가 부옇게 쌓여 덕지덕지 앉은 모습만 보아도 그 집 안주인이 게을받고(게으로고) 틀피짓(덜렁거리고 야물지 못함)을 하는지 단박에 그 집의 여인네의 성격을 알 수가 있는 것이 장독대이기도 하다. 가난하여 살림이 적은 집은 적은 대로, 살림이 넉넉한 집은 많은 대로 장독대를 꾸몄다. 담으로 둘러싼 담장 위를 짚을 엮어 얹거나 잘 사는 집에서는 장독대마저 기와를 얹기도 했다. 초가집은 초가집에 어울리레 장독대의 담장을 짚으로, 기와집은 기와집에 어울리도록 장독대의 담장을 기와로 꾸몄다. 이도저도 아닌 집은 그 지의 구조에 맞게 위치한 공간에다 장독대를 설치하여 아담하게 꾸미었다. 이처럼 장독대는 우리의 미의식이 독특하게 표출된 음식문화와 규방문화의 공간이었다.
<겨울 운흥사 장독대>
운흥사(고성군 하이면 와룡리 442번지)에 가면 눈을 사로잡는 아름다운 공간이 있다. 그것은 불상이나 탑이 아니다. 그것은 운흥사가 자랑하는 탱화도 아니다. 이 절의 불심이 뛰어나다는 주지 스림은 수행도량인 절도 아니다. 그것은 절 살림을 대변하는 듯한 조촐한 장독을 마치 꽃잎이 감싸고 있는 형상의 장독대이다. 장독대는 외부인의 눈에 쉽게 드러나지 않은 공간에 위치를 하나 이곳은 그렇지 않다. 산으로 둘러싸이다 보니 자연스럽게 햇볕이 잘 드러나는 공간이 필요했을 터. 지금 놓인 장독대의 위치가 바로 그곳이었을 것이다. 싼 담도 부드러운 곡선이다. 부처도 부드럽고 부처의 말씀 또한 부드럽다. 그중에서도 ‘자비’라는 말이 제일로 부드럽다. 장독대를 둘러싸고 있는 저 담장은 정녕 부드럽고 자비로운 부처의 말씀 그대로이다.
장독대를 가만히 쳐다보고 있노라면 어미닭이 알을 품고 있는 포근함이랄까, 햇볕이 그리운날의 따뜻한 햇볕 한 줌이랄까, 자식에게 음식 한 숟갈 더 넣어주고 싶은 지극한 모성애의 흐뭇함이랄까, 가을 김장철의 맛깔스런 양념 냄새랄까 하여튼 이런 묘한 느낌을 자아내게 한다. 저 장독대와 담장 위에 눈이라도 내려 쌓이면 얼마나 부드러울까. 부드러움이 만들어내는 아름다움이 정녕 이런 것일 줄이야 운흥사에 와서야 비로소 깨닫게 된다.
운흥사雲興寺 <운흥사 전경>
운흥사의 장독대가 아름답다면 운흥사 또한 그 이름 그대로 구름이 뭉개뭉개 피어남 직한 사찰이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절이 위치한 곳이 고성군 하이면 와룡리臥龍里이다. 와룡은 용이 잠자는 곳이니만큼 그곳에는 반드시 구름이 모여들 터. 절 가까운 곳에는 이 근방에서 제일로 높다는 와룡산(799m)도 있다. 그러니 운흥사란 이름을 지은 것인지도 모르겠다. 제갈공명의 별칭이기도 한 와룡은 그 이름부터가 예사롭지 않기에 운흥사 또한 예사롭지 않은 절임에 틀림없다.
<운흥사 영산제>
운흥사는 676년에 의상대사가 창건했다고 한다. 임진왜란 때 사명대사가 이곳에서 승병 6,000여 명을 거느리고 싸웠으며 그때 절이 소실되었다 한다. 그 이후 1651년(효종2년)에 김법성金法成이 중창을 했고, 1731년에 대웅전(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82호)을 중건했다. 특히 1730년에 리연理然 등이 괘불탱(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61호)을 제작하여 매년 음력 3월3일에 영산재를 지내고 있으며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고성 부사를 지낸 오횡묵吳宖黙(1834~?) [조선 말기 문신이며 학자로 본관은 해주이고 자는 성규聖圭이며, 호는 채원茝園이다. 19세기 말에 정선군수 자인현감 함안군수 고성부사 공상소감동工桑所監董 지도군수 및 여수군수 등을 두루 거쳤다. 그는 부임한 지방의 수령으로 있을 당시 자신의 시문은 물론 관청에서 중요하게 집행되었던 일과 내외에서 일어났던 중대한 일 등을 일기체로 엮어 놓았는데, 이것이 오늘날 귀중한 자료로 남겨져 전해지고 있는 것이 총쇄록이다. 그의 저서로느 《채원집》《정서총쇄록》《자인총쇄록》《함안총쇄록》《고성총쇄록》《지도총쇄록》《여재촬요》 등이 있다] 이 쓴《고성총쇄록》을 살펴보면 운흥사에 대한 기록이 몇 차례 언급이 되어 있다. 그 기록을 따라가보자.
<운흥사>
『불우 법천사法泉寺 는 고을 북쪽에 있다. 운흥사는 고을 서쪽에 있다. 내원사는 고을 서쪽에 있다. 안정사는 고을 동쪽에 있다. 문수사는 고을 서쪽에 있다. 장의암은 고을 동쪽에 있다. 용화사는 고을 남쪽에 있다.』 오횡묵 부사가 재직시에는 통영도 고성의 소관이었기에 용화사가 남쪽에 있다고 했다. 운흥사는 서쪽에 있는 사찰이고 당시에 법천사가 존재했는지 법천사는 북쪽에 있다고 했다. 지금은 법천사는 흔적이 없고 부도 몇 기만 남아 있을 뿐이다. 『와룡산 운흥사의 중 금영錦永과 取寬이 찾아와서 좌반佐飯 한 그릇을 드리고 이야기하기를 “본 사찰이 산중에 있지만 과연 오래된 사찰인데 근래에 이웃 마을 나무꾼이 함부로 폐단을 지어 하나하나 말할 수도 없습니다. 별다른 금령이 있은 연후에 보존할 수가 있습니다.”』 운흥사 주변 울창한 숲이 상당기간 남벌로 인하여 폐허화되고 있으므로 이를 금지해 줄 것을 사찰의 승려가 고성부사에게 호소하고 있는 상황을 적고 있다. 『9월10일… 새벽에 덕치를 출발해서 내원동, 석지, 와룡동을 지나 운흥사에 들어가니 여기사 바로 삼한의 옛 큰 절이다. 골 어귀에 헤월당의 비석이 있고 돌아서서 절로 들어갔다. 대웅전이 중앙에 있고 북쪽에는 시왕전이 있고 남쪽에는 나한전이 있고 서쪽에는 극락전이 있고 동쪽에는 칠성각, 천진암이 있고 동쪽 벼랑에는 일곱 기의 부도가 있는데, 응화, 홍찬, 포연, 경선, 기삼, 도현, 긍전 등이 그 승려들이다. 두루 도량을 관람하니 흰 구름이 골짝에 잠기고 흐르는 물이 시내에 울린다. 홀연히 옛날에 용이 누워 있던 곳인가 싶은데 와룡산이 바로 주산이다. 어린 소나무와 아름다운 대나무가 몇십 리의 산을 둘러 있는데, 무너지는 주추와 기울어진 기둥이 사람으로 하여금 황량한 누대의 탄식을 일으키게 한다. 또 말하기를 “수십 년 전에는 이 골짝 안 30리가 모두 한 아름 되는 큰 소나무들이었는데. 통영사또가 금하지 말라는 명령으로 인해 일곱 고을 나무꾼이 일시에 마구잡이로 베기를 매일 수천명씩 하니 십일도 안 되어 민둥산으로 변했습니다. 그 후로 중들고 점점 줄어들고 불당도 훼손되어 저절로 퇴락하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몇 해 전에 통영에 하소연을 해서 겨우 오늘의 모양을 이룬 것입니다.”라고 하면서 모두 한탄하니 나도 분함이 있어, 그 일로 시로 읊었다.
<운흥사 대웅전>
내 들으니 운흥사 삼한시대부터 복지로 소문나, 사방에 산이 둘러 30리 한 지역에 아름드리 소나무 울창하였네. 한 가지도 도끼와 자귀의 남벌을 막아 승려 많고 사찰 부유 이익 많았네. 아첨하는 사람의 요설 나무의 재앙 되어 추상같은 새 명령 대원수 같았네. 하루아침에 민둥산 불모지 되니 돌부처도 그 일에 눈물 흘릴 일. 오정장사의 신검은 어찌 탐욕의 머리 자르지 않는가? 또 행차하여 와룡동에 이르니 마을 백성들이 닭을 잡고 술과 과일을 마련하여 대접한다면서 길을 막고 기다리므로 내가 좋은 말로 타이르고 오방치를 넘어가니 길이 매우 가파르게 있었다.』 오횡묵이 관내순시를 하던 중 운흥사에 들른 사실을 적은 글이다. 여기서 눈여겨볼 대목이 있다. 운흥사가 오래된 사찰이라고 한 것이며 운흥사의 규모에 대해서도 서술하고 있다. 예전에 번성했던 절이 주변 소나무의 남벌로 쇠락해진 경위를 설명하고 있다. 통영의 사또란 필경 통제사일 것이다. 통제영의 통제사가 고성 군민에게 끼친 폐해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는 것을 이 기록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운흥사는 임진왜란과 관련이 아주 깊은 절이다. 승군장이었던 서산대사 휴정(1520∼1604)의 행정을 기록한 《청허당집》에 보면 고성과 관련한 시 한 편이 나온다. 한 소리는 구름 속 맑은 기러기 울음이요, 외로운 돛단배는 먼 길 가는 나그네의 배. 바다 빛은 하늘보다 푸른데, 짝지어 나는 하얀 갈매기. 유유히 흐르는 한 아득한 세월에, 성 밑의 물은 속절없이 흐르네. 누가 알리요, 지초 캐는 사람이 오늘 홀로 성루에 오른 줄을! -<등 철성성루유감 等 鐵城城樓有感>
<대웅전 경내>
이 시에는 고성이라는 말은 한마디도 없다. 바다를 나타내는 돛단배, 갈매기 그리고 성과 성루뿐이다. 단지 이의 제목이 고성의 옛 이름인 철성을 가리키고 있어 서산대사가 고성을 방문했다는 사실을 더듬어 볼 따름이다. 그러나 임진왜란 때 그 바쁜 서산대사가 남쪽 끄트머리 고성 바닷가에싸지 왜 왔을까. 승병들로 왜적과 맞서기 위함이었지 않았을까, 그렇다면 승병들의 집결지인 이곳 운흥사에까지 왔다고 봐야 한다. 또 이순신 장군이 전투의 작전회의를 위하여 세 차례나 운흥사를 방문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이런 까닭으로 인해 운흥사가 왜군에 의해 불타는 불운을 겪었는지 모를 일이다.
<운흥사 영산전>
와룡산이란 지명은 두 곳이다. 하나는 운흥사가 있는 고성 와룡산이고 하나는 사천에 있는 사천 와룡산이다. 고성 와룡산에 대한 옛 문헌에는 “군의서쪽 60리에 있으며 무이산으로부터 왓다. 고려 현종이 일찍이 이곳에서 글을 읽있다”고 기록해 놓았다. 이 기록에서 두 가지를 살펴보아야 한다. 그 하나는 사천 와룡산과 고성 와룡산은 서로 이웃하고 있는 산임에도 불구하고 그 시원은 확연히 구분이 된다. 고성 와룡산은 무이산에서 왔다고 했다. 무이산은 감치산에서 왔고 감치산은 무량산에서 왔으니 결국 고성 와룡산은 사천이 아닌 고성의 진산인 무량산에서 산줄긳사 뻗어온 것이다. 또 하나는 고려 현종이 이곳에 머물면서 글을 읽고 훗날 왕으로 등극했다고 했다. 무슨 사연이 있었을까? 이 이야기는 《철성지》와 《고성지》에 자세히 수록돼 있다. 찾아서 한번 읽어 보자. 『고려의 제8대 현종이었던 순이 이 산에서 우거하면서 글을 읽고 있었는데 그때에 마루 난간에 꽃뱀이 도사리고 있는 것을 보고 사아시란 시를 지었다. 그의 나이 6살이었다. 5살 때부터 하나를 가르치면 벌써 둘을 깨쳤다고 한다.』 「자그마한 뱀 새끼 약초 난간 휘감았는데, 온몸이 붉은 비단 같아 절로 아롱지네. 오래도록 수플 밑에 있으리라 말하지 말게나. 어느 날 용되는 것 어렵지 않다네」 자그마한 뱀 새끼는 현종 자기 자신을 가리킨다. 자신은 이 후미진 와룡산에서 평생을 보내지 않고 어린 뱀이 커서 언젠가 용이 되어 승천하듯이 자신도 왕이 될 것임을 암시하는 시다.
<운흥사 명부전>
이 시의 배경은 이렇다. 당초 고려 제5대왕 경종이 헌애왕후 소생인 송을 남겨두고 재위 6년(982)만에 죽자 두 왕후, 헌애와 헌정(그녀들은 자매지간이고 태조 왕건의 제7자 욱의 딸)은 청상과부의 몸이 된다. 헌애왕후는 아들 송이 있어 외로움을 모르나 헌정왕후는 슬하에 자식이 없어 외로운 몸이었다. 이에 헌정와후(황보 씨)가 사제에 나와 살았는데 한번은 꿈에 곡령에 올라가서 갑자기 소변이 마려워서 소변을 보았더니그 물줄기가 어찌나 거센지 온 나라 안이 바다를 이루었다. 점쟁이가 말하기를 “아들을 낳으면 왕이 되어 온 나라를 차지하겠다.” 하니 왕비가 말하기를 “내가 이미 과부가 되었는데 어떻게 아들을 낳는단 말인가?”하였다. 종실인 욱은 태조 왕건의 제8남인데 그의 집이 헌정왕후와 가까웠고 또한 그들은 숙질간으로 스스럼없이 자주 왕래를 하다 보니 어느덧 사통하여 임신이 되었다. 성종때 일어난 일이었다.
<운흥사>
하루는 그녀가 욱의 집에서 자고 있는데 욱의 처가 도저히 참을 수 없어 마당에 섶을 쌓아놓고 불을 질렀다. 백관들이 달려 나와 불을 껐고 성종도 달려 나와 불 끄기를 독려했다. 욱의 처가 성종에게 불을 낸 사유를 이실직고 하자 헌정왕후는 부끄럽고 후회스러워 집으로 바삐 돌아갔는데 겨우 문에 도착하자마자 태기가 있어 문 앞의 버드나무 가지를 붙잡고 몸을 풀고 죽으면서 유모를 정하여 길러 욱에게 보내라고 유언을 남기고 그녀는 세상을 뜬다. 훗날 이 아이가 현종이다. 아이 때 이름은 순이었다. 욱은 성종 11년(992) 종친의 법도를 지키지 못함을 힐책을 받아 사천군 와룡산으로 유배된다. 아이도 시모와 종자를 딸려서 와룡산의 욱에게로 돌려보내나 부자가 함께 살지 못하도록 하여 떨어져 살았다. 욱은 문장을 전공하여 압송한 내시 고현에게 지어 주기를 “그대와 같은 날 서울(개성)을 떠나왔는데, 그대는 돌아가고 나는 돌아가지 못하네. 나그네의 우리는 서럽게도 원숭이가 갇힌 듯하고, 석별의 정자에선 부럽게도 말이 나는 듯 하다. 제성의 봄빛은 혼백이 꿈과 어울리고, 해국의 풍광은 눈물 옷깃에 가득하네. 성주의 한 말씀 바꾸지는 않을 터이니, 마침내 낚시터에서 늙게는 하시려나”하였다. 또 욱은 지리에 공부가 깊어 일찍이 금 한 주머니를 아들 순에게 주면서 말하기를 “내가 죽으면 이 돈을 술사에게 주어 이 고을 성황당 남쪽 귀룡동에 나를 장사지내게 하되 반드시 엎어서 묻게 하라.”하였다. 마침 욱이 귀향지 배소에서 죽어 아들이 그 말과 같이 술사에게 말하여 엎어서 묻어달라고 청하니 술사가 말하기를 “어찌 그리도 바쁜고?” 하였는데, 과연 그 이듬해 2월에 순이 서울로 돌아가서 즉위하였다. 그가 현종이다. [출처] [고성여행]한국의 아름다운 장독대 <고성의 겉살과 속살을 찾아서/운흥사/대웅전/명부전/영산제/고성문화유산>|작성자 쇳디한국의 아름다운 장독대 달구벌 추천 0 조회 61 15.07.15 17:05 댓글 0 북마크번역하기 공유하기기능 더보기 SNS로 공유하기 펼쳐짐 현재페이지 URL복사 http://cafe.daum.net/suzhoukorean/HaG/1040?svc=cafeapiURL복사 공유목록 닫기 주소가 복사되었습니다. 원하는곳에 붙여넣기(Ctrl+V)해주세요. 공유목록 닫기 게시글 본문내용
한국의 아름다운 장독대
가장 한국적인 것을 꼽으라고 한다면 그중의 하나는 장독대가 아닐까. 우리네 식탁에서 빼놓을 수 없는 김치, 고추장, 된장, 간장, 젓갈 등 5대 밑반찬을 비롯한 갖가지 반찬을 저장했던 장독대는 분명 한국적이다.
<운흥사 장독대>
부엌과 가까운 곳에, 들고 나기 쉬운 곳에 크고 작은 항아리며 장독을 한곳에 모아둔 장독대는 우리 사회가 농경사회에서 산업사회로 바뀌기 이전에는 우리네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었던 것으로 지금도 농촌에는 장독대가 있어 목가적인 풍경을 연출한다. 장독대만 바라보아도 그 집의 가풍이나 성격을 손쉽게 파악할 수 있다. 손끝이 야물어 부지런하고 정갈한 여인네의 장독대는 언제나 닦고 닦아서 야들야들 번들번들 빛이 나고 윤이 나는 반면 몇 날 며칠을 닦지 않았는지 먼지가 부옇게 쌓여 덕지덕지 앉은 모습만 보아도 그 집 안주인이 게을받고(게으로고) 틀피짓(덜렁거리고 야물지 못함)을 하는지 단박에 그 집의 여인네의 성격을 알 수가 있는 것이 장독대이기도 하다. 가난하여 살림이 적은 집은 적은 대로, 살림이 넉넉한 집은 많은 대로 장독대를 꾸몄다. 담으로 둘러싼 담장 위를 짚을 엮어 얹거나 잘 사는 집에서는 장독대마저 기와를 얹기도 했다. 초가집은 초가집에 어울리레 장독대의 담장을 짚으로, 기와집은 기와집에 어울리도록 장독대의 담장을 기와로 꾸몄다. 이도저도 아닌 집은 그 지의 구조에 맞게 위치한 공간에다 장독대를 설치하여 아담하게 꾸미었다. 이처럼 장독대는 우리의 미의식이 독특하게 표출된 음식문화와 규방문화의 공간이었다.
<겨울 운흥사 장독대>
운흥사(고성군 하이면 와룡리 442번지)에 가면 눈을 사로잡는 아름다운 공간이 있다. 그것은 불상이나 탑이 아니다. 그것은 운흥사가 자랑하는 탱화도 아니다. 이 절의 불심이 뛰어나다는 주지 스림은 수행도량인 절도 아니다. 그것은 절 살림을 대변하는 듯한 조촐한 장독을 마치 꽃잎이 감싸고 있는 형상의 장독대이다. 장독대는 외부인의 눈에 쉽게 드러나지 않은 공간에 위치를 하나 이곳은 그렇지 않다. 산으로 둘러싸이다 보니 자연스럽게 햇볕이 잘 드러나는 공간이 필요했을 터. 지금 놓인 장독대의 위치가 바로 그곳이었을 것이다. 싼 담도 부드러운 곡선이다. 부처도 부드럽고 부처의 말씀 또한 부드럽다. 그중에서도 ‘자비’라는 말이 제일로 부드럽다. 장독대를 둘러싸고 있는 저 담장은 정녕 부드럽고 자비로운 부처의 말씀 그대로이다.
장독대를 가만히 쳐다보고 있노라면 어미닭이 알을 품고 있는 포근함이랄까, 햇볕이 그리운날의 따뜻한 햇볕 한 줌이랄까, 자식에게 음식 한 숟갈 더 넣어주고 싶은 지극한 모성애의 흐뭇함이랄까, 가을 김장철의 맛깔스런 양념 냄새랄까 하여튼 이런 묘한 느낌을 자아내게 한다. 저 장독대와 담장 위에 눈이라도 내려 쌓이면 얼마나 부드러울까. 부드러움이 만들어내는 아름다움이 정녕 이런 것일 줄이야 운흥사에 와서야 비로소 깨닫게 된다.
운흥사雲興寺 <운흥사 전경>
운흥사의 장독대가 아름답다면 운흥사 또한 그 이름 그대로 구름이 뭉개뭉개 피어남 직한 사찰이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절이 위치한 곳이 고성군 하이면 와룡리臥龍里이다. 와룡은 용이 잠자는 곳이니만큼 그곳에는 반드시 구름이 모여들 터. 절 가까운 곳에는 이 근방에서 제일로 높다는 와룡산(799m)도 있다. 그러니 운흥사란 이름을 지은 것인지도 모르겠다. 제갈공명의 별칭이기도 한 와룡은 그 이름부터가 예사롭지 않기에 운흥사 또한 예사롭지 않은 절임에 틀림없다.
<운흥사 영산제>
운흥사는 676년에 의상대사가 창건했다고 한다. 임진왜란 때 사명대사가 이곳에서 승병 6,000여 명을 거느리고 싸웠으며 그때 절이 소실되었다 한다. 그 이후 1651년(효종2년)에 김법성金法成이 중창을 했고, 1731년에 대웅전(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82호)을 중건했다. 특히 1730년에 리연理然 등이 괘불탱(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61호)을 제작하여 매년 음력 3월3일에 영산재를 지내고 있으며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고성 부사를 지낸 오횡묵吳宖黙(1834~?) [조선 말기 문신이며 학자로 본관은 해주이고 자는 성규聖圭이며, 호는 채원茝園이다. 19세기 말에 정선군수 자인현감 함안군수 고성부사 공상소감동工桑所監董 지도군수 및 여수군수 등을 두루 거쳤다. 그는 부임한 지방의 수령으로 있을 당시 자신의 시문은 물론 관청에서 중요하게 집행되었던 일과 내외에서 일어났던 중대한 일 등을 일기체로 엮어 놓았는데, 이것이 오늘날 귀중한 자료로 남겨져 전해지고 있는 것이 총쇄록이다. 그의 저서로느 《채원집》《정서총쇄록》《자인총쇄록》《함안총쇄록》《고성총쇄록》《지도총쇄록》《여재촬요》 등이 있다] 이 쓴《고성총쇄록》을 살펴보면 운흥사에 대한 기록이 몇 차례 언급이 되어 있다. 그 기록을 따라가보자.
<운흥사>
『불우 법천사法泉寺 는 고을 북쪽에 있다. 운흥사는 고을 서쪽에 있다. 내원사는 고을 서쪽에 있다. 안정사는 고을 동쪽에 있다. 문수사는 고을 서쪽에 있다. 장의암은 고을 동쪽에 있다. 용화사는 고을 남쪽에 있다.』 오횡묵 부사가 재직시에는 통영도 고성의 소관이었기에 용화사가 남쪽에 있다고 했다. 운흥사는 서쪽에 있는 사찰이고 당시에 법천사가 존재했는지 법천사는 북쪽에 있다고 했다. 지금은 법천사는 흔적이 없고 부도 몇 기만 남아 있을 뿐이다. 『와룡산 운흥사의 중 금영錦永과 取寬이 찾아와서 좌반佐飯 한 그릇을 드리고 이야기하기를 “본 사찰이 산중에 있지만 과연 오래된 사찰인데 근래에 이웃 마을 나무꾼이 함부로 폐단을 지어 하나하나 말할 수도 없습니다. 별다른 금령이 있은 연후에 보존할 수가 있습니다.”』 운흥사 주변 울창한 숲이 상당기간 남벌로 인하여 폐허화되고 있으므로 이를 금지해 줄 것을 사찰의 승려가 고성부사에게 호소하고 있는 상황을 적고 있다. 『9월10일… 새벽에 덕치를 출발해서 내원동, 석지, 와룡동을 지나 운흥사에 들어가니 여기사 바로 삼한의 옛 큰 절이다. 골 어귀에 헤월당의 비석이 있고 돌아서서 절로 들어갔다. 대웅전이 중앙에 있고 북쪽에는 시왕전이 있고 남쪽에는 나한전이 있고 서쪽에는 극락전이 있고 동쪽에는 칠성각, 천진암이 있고 동쪽 벼랑에는 일곱 기의 부도가 있는데, 응화, 홍찬, 포연, 경선, 기삼, 도현, 긍전 등이 그 승려들이다. 두루 도량을 관람하니 흰 구름이 골짝에 잠기고 흐르는 물이 시내에 울린다. 홀연히 옛날에 용이 누워 있던 곳인가 싶은데 와룡산이 바로 주산이다. 어린 소나무와 아름다운 대나무가 몇십 리의 산을 둘러 있는데, 무너지는 주추와 기울어진 기둥이 사람으로 하여금 황량한 누대의 탄식을 일으키게 한다. 또 말하기를 “수십 년 전에는 이 골짝 안 30리가 모두 한 아름 되는 큰 소나무들이었는데. 통영사또가 금하지 말라는 명령으로 인해 일곱 고을 나무꾼이 일시에 마구잡이로 베기를 매일 수천명씩 하니 십일도 안 되어 민둥산으로 변했습니다. 그 후로 중들고 점점 줄어들고 불당도 훼손되어 저절로 퇴락하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몇 해 전에 통영에 하소연을 해서 겨우 오늘의 모양을 이룬 것입니다.”라고 하면서 모두 한탄하니 나도 분함이 있어, 그 일로 시로 읊었다.
<운흥사 대웅전>
내 들으니 운흥사 삼한시대부터 복지로 소문나, 사방에 산이 둘러 30리 한 지역에 아름드리 소나무 울창하였네. 한 가지도 도끼와 자귀의 남벌을 막아 승려 많고 사찰 부유 이익 많았네. 아첨하는 사람의 요설 나무의 재앙 되어 추상같은 새 명령 대원수 같았네. 하루아침에 민둥산 불모지 되니 돌부처도 그 일에 눈물 흘릴 일. 오정장사의 신검은 어찌 탐욕의 머리 자르지 않는가? 또 행차하여 와룡동에 이르니 마을 백성들이 닭을 잡고 술과 과일을 마련하여 대접한다면서 길을 막고 기다리므로 내가 좋은 말로 타이르고 오방치를 넘어가니 길이 매우 가파르게 있었다.』 오횡묵이 관내순시를 하던 중 운흥사에 들른 사실을 적은 글이다. 여기서 눈여겨볼 대목이 있다. 운흥사가 오래된 사찰이라고 한 것이며 운흥사의 규모에 대해서도 서술하고 있다. 예전에 번성했던 절이 주변 소나무의 남벌로 쇠락해진 경위를 설명하고 있다. 통영의 사또란 필경 통제사일 것이다. 통제영의 통제사가 고성 군민에게 끼친 폐해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는 것을 이 기록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운흥사는 임진왜란과 관련이 아주 깊은 절이다. 승군장이었던 서산대사 휴정(1520∼1604)의 행정을 기록한 《청허당집》에 보면 고성과 관련한 시 한 편이 나온다. 한 소리는 구름 속 맑은 기러기 울음이요, 외로운 돛단배는 먼 길 가는 나그네의 배. 바다 빛은 하늘보다 푸른데, 짝지어 나는 하얀 갈매기. 유유히 흐르는 한 아득한 세월에, 성 밑의 물은 속절없이 흐르네. 누가 알리요, 지초 캐는 사람이 오늘 홀로 성루에 오른 줄을! -<등 철성성루유감 等 鐵城城樓有感>
<대웅전 경내>
이 시에는 고성이라는 말은 한마디도 없다. 바다를 나타내는 돛단배, 갈매기 그리고 성과 성루뿐이다. 단지 이의 제목이 고성의 옛 이름인 철성을 가리키고 있어 서산대사가 고성을 방문했다는 사실을 더듬어 볼 따름이다. 그러나 임진왜란 때 그 바쁜 서산대사가 남쪽 끄트머리 고성 바닷가에싸지 왜 왔을까. 승병들로 왜적과 맞서기 위함이었지 않았을까, 그렇다면 승병들의 집결지인 이곳 운흥사에까지 왔다고 봐야 한다. 또 이순신 장군이 전투의 작전회의를 위하여 세 차례나 운흥사를 방문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이런 까닭으로 인해 운흥사가 왜군에 의해 불타는 불운을 겪었는지 모를 일이다.
<운흥사 영산전>
와룡산이란 지명은 두 곳이다. 하나는 운흥사가 있는 고성 와룡산이고 하나는 사천에 있는 사천 와룡산이다. 고성 와룡산에 대한 옛 문헌에는 “군의서쪽 60리에 있으며 무이산으로부터 왓다. 고려 현종이 일찍이 이곳에서 글을 읽있다”고 기록해 놓았다. 이 기록에서 두 가지를 살펴보아야 한다. 그 하나는 사천 와룡산과 고성 와룡산은 서로 이웃하고 있는 산임에도 불구하고 그 시원은 확연히 구분이 된다. 고성 와룡산은 무이산에서 왔다고 했다. 무이산은 감치산에서 왔고 감치산은 무량산에서 왔으니 결국 고성 와룡산은 사천이 아닌 고성의 진산인 무량산에서 산줄긳사 뻗어온 것이다. 또 하나는 고려 현종이 이곳에 머물면서 글을 읽고 훗날 왕으로 등극했다고 했다. 무슨 사연이 있었을까? 이 이야기는 《철성지》와 《고성지》에 자세히 수록돼 있다. 찾아서 한번 읽어 보자. 『고려의 제8대 현종이었던 순이 이 산에서 우거하면서 글을 읽고 있었는데 그때에 마루 난간에 꽃뱀이 도사리고 있는 것을 보고 사아시란 시를 지었다. 그의 나이 6살이었다. 5살 때부터 하나를 가르치면 벌써 둘을 깨쳤다고 한다.』 「자그마한 뱀 새끼 약초 난간 휘감았는데, 온몸이 붉은 비단 같아 절로 아롱지네. 오래도록 수플 밑에 있으리라 말하지 말게나. 어느 날 용되는 것 어렵지 않다네」 자그마한 뱀 새끼는 현종 자기 자신을 가리킨다. 자신은 이 후미진 와룡산에서 평생을 보내지 않고 어린 뱀이 커서 언젠가 용이 되어 승천하듯이 자신도 왕이 될 것임을 암시하는 시다.
<운흥사 명부전>
이 시의 배경은 이렇다. 당초 고려 제5대왕 경종이 헌애왕후 소생인 송을 남겨두고 재위 6년(982)만에 죽자 두 왕후, 헌애와 헌정(그녀들은 자매지간이고 태조 왕건의 제7자 욱의 딸)은 청상과부의 몸이 된다. 헌애왕후는 아들 송이 있어 외로움을 모르나 헌정왕후는 슬하에 자식이 없어 외로운 몸이었다. 이에 헌정와후(황보 씨)가 사제에 나와 살았는데 한번은 꿈에 곡령에 올라가서 갑자기 소변이 마려워서 소변을 보았더니그 물줄기가 어찌나 거센지 온 나라 안이 바다를 이루었다. 점쟁이가 말하기를 “아들을 낳으면 왕이 되어 온 나라를 차지하겠다.” 하니 왕비가 말하기를 “내가 이미 과부가 되었는데 어떻게 아들을 낳는단 말인가?”하였다. 종실인 욱은 태조 왕건의 제8남인데 그의 집이 헌정왕후와 가까웠고 또한 그들은 숙질간으로 스스럼없이 자주 왕래를 하다 보니 어느덧 사통하여 임신이 되었다. 성종때 일어난 일이었다.
<운흥사>
하루는 그녀가 욱의 집에서 자고 있는데 욱의 처가 도저히 참을 수 없어 마당에 섶을 쌓아놓고 불을 질렀다. 백관들이 달려 나와 불을 껐고 성종도 달려 나와 불 끄기를 독려했다. 욱의 처가 성종에게 불을 낸 사유를 이실직고 하자 헌정왕후는 부끄럽고 후회스러워 집으로 바삐 돌아갔는데 겨우 문에 도착하자마자 태기가 있어 문 앞의 버드나무 가지를 붙잡고 몸을 풀고 죽으면서 유모를 정하여 길러 욱에게 보내라고 유언을 남기고 그녀는 세상을 뜬다. 훗날 이 아이가 현종이다. 아이 때 이름은 순이었다. 욱은 성종 11년(992) 종친의 법도를 지키지 못함을 힐책을 받아 사천군 와룡산으로 유배된다. 아이도 시모와 종자를 딸려서 와룡산의 욱에게로 돌려보내나 부자가 함께 살지 못하도록 하여 떨어져 살았다. 욱은 문장을 전공하여 압송한 내시 고현에게 지어 주기를 “그대와 같은 날 서울(개성)을 떠나왔는데, 그대는 돌아가고 나는 돌아가지 못하네. 나그네의 우리는 서럽게도 원숭이가 갇힌 듯하고, 석별의 정자에선 부럽게도 말이 나는 듯 하다. 제성의 봄빛은 혼백이 꿈과 어울리고, 해국의 풍광은 눈물 옷깃에 가득하네. 성주의 한 말씀 바꾸지는 않을 터이니, 마침내 낚시터에서 늙게는 하시려나”하였다. 또 욱은 지리에 공부가 깊어 일찍이 금 한 주머니를 아들 순에게 주면서 말하기를 “내가 죽으면 이 돈을 술사에게 주어 이 고을 성황당 남쪽 귀룡동에 나를 장사지내게 하되 반드시 엎어서 묻게 하라.”하였다. 마침 욱이 귀향지 배소에서 죽어 아들이 그 말과 같이 술사에게 말하여 엎어서 묻어달라고 청하니 술사가 말하기를 “어찌 그리도 바쁜고?” 하였는데, 과연 그 이듬해 2월에 순이 서울로 돌아가서 즉위하였다. 그가 현종이다. [출처] [고성여행]한국의 아름다운 장독대 <고성의 겉살과 속살을 찾아서/운흥사/대웅전/명부전/영산제/고성문화유산>|작성자 쇳디한국의 아름다운 장독대 달구벌 추천 0 조회 61 15.07.15 17:05 댓글 0 북마크번역하기 공유하기기능 더보기 SNS로 공유하기 펼쳐짐 현재페이지 URL복사 http://cafe.daum.net/suzhoukorean/HaG/1040?svc=cafeapiURL복사 공유목록 닫기 주소가 복사되었습니다. 원하는곳에 붙여넣기(Ctrl+V)해주세요. 공유목록 닫기 게시글 본문내용
한국의 아름다운 장독대
가장 한국적인 것을 꼽으라고 한다면 그중의 하나는 장독대가 아닐까. 우리네 식탁에서 빼놓을 수 없는 김치, 고추장, 된장, 간장, 젓갈 등 5대 밑반찬을 비롯한 갖가지 반찬을 저장했던 장독대는 분명 한국적이다.
<운흥사 장독대>
부엌과 가까운 곳에, 들고 나기 쉬운 곳에 크고 작은 항아리며 장독을 한곳에 모아둔 장독대는 우리 사회가 농경사회에서 산업사회로 바뀌기 이전에는 우리네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었던 것으로 지금도 농촌에는 장독대가 있어 목가적인 풍경을 연출한다. 장독대만 바라보아도 그 집의 가풍이나 성격을 손쉽게 파악할 수 있다. 손끝이 야물어 부지런하고 정갈한 여인네의 장독대는 언제나 닦고 닦아서 야들야들 번들번들 빛이 나고 윤이 나는 반면 몇 날 며칠을 닦지 않았는지 먼지가 부옇게 쌓여 덕지덕지 앉은 모습만 보아도 그 집 안주인이 게을받고(게으로고) 틀피짓(덜렁거리고 야물지 못함)을 하는지 단박에 그 집의 여인네의 성격을 알 수가 있는 것이 장독대이기도 하다. 가난하여 살림이 적은 집은 적은 대로, 살림이 넉넉한 집은 많은 대로 장독대를 꾸몄다. 담으로 둘러싼 담장 위를 짚을 엮어 얹거나 잘 사는 집에서는 장독대마저 기와를 얹기도 했다. 초가집은 초가집에 어울리레 장독대의 담장을 짚으로, 기와집은 기와집에 어울리도록 장독대의 담장을 기와로 꾸몄다. 이도저도 아닌 집은 그 지의 구조에 맞게 위치한 공간에다 장독대를 설치하여 아담하게 꾸미었다. 이처럼 장독대는 우리의 미의식이 독특하게 표출된 음식문화와 규방문화의 공간이었다.
<겨울 운흥사 장독대>
운흥사(고성군 하이면 와룡리 442번지)에 가면 눈을 사로잡는 아름다운 공간이 있다. 그것은 불상이나 탑이 아니다. 그것은 운흥사가 자랑하는 탱화도 아니다. 이 절의 불심이 뛰어나다는 주지 스림은 수행도량인 절도 아니다. 그것은 절 살림을 대변하는 듯한 조촐한 장독을 마치 꽃잎이 감싸고 있는 형상의 장독대이다. 장독대는 외부인의 눈에 쉽게 드러나지 않은 공간에 위치를 하나 이곳은 그렇지 않다. 산으로 둘러싸이다 보니 자연스럽게 햇볕이 잘 드러나는 공간이 필요했을 터. 지금 놓인 장독대의 위치가 바로 그곳이었을 것이다. 싼 담도 부드러운 곡선이다. 부처도 부드럽고 부처의 말씀 또한 부드럽다. 그중에서도 ‘자비’라는 말이 제일로 부드럽다. 장독대를 둘러싸고 있는 저 담장은 정녕 부드럽고 자비로운 부처의 말씀 그대로이다.
장독대를 가만히 쳐다보고 있노라면 어미닭이 알을 품고 있는 포근함이랄까, 햇볕이 그리운날의 따뜻한 햇볕 한 줌이랄까, 자식에게 음식 한 숟갈 더 넣어주고 싶은 지극한 모성애의 흐뭇함이랄까, 가을 김장철의 맛깔스런 양념 냄새랄까 하여튼 이런 묘한 느낌을 자아내게 한다. 저 장독대와 담장 위에 눈이라도 내려 쌓이면 얼마나 부드러울까. 부드러움이 만들어내는 아름다움이 정녕 이런 것일 줄이야 운흥사에 와서야 비로소 깨닫게 된다.
운흥사雲興寺 <운흥사 전경>
운흥사의 장독대가 아름답다면 운흥사 또한 그 이름 그대로 구름이 뭉개뭉개 피어남 직한 사찰이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절이 위치한 곳이 고성군 하이면 와룡리臥龍里이다. 와룡은 용이 잠자는 곳이니만큼 그곳에는 반드시 구름이 모여들 터. 절 가까운 곳에는 이 근방에서 제일로 높다는 와룡산(799m)도 있다. 그러니 운흥사란 이름을 지은 것인지도 모르겠다. 제갈공명의 별칭이기도 한 와룡은 그 이름부터가 예사롭지 않기에 운흥사 또한 예사롭지 않은 절임에 틀림없다.
<운흥사 영산제>
운흥사는 676년에 의상대사가 창건했다고 한다. 임진왜란 때 사명대사가 이곳에서 승병 6,000여 명을 거느리고 싸웠으며 그때 절이 소실되었다 한다. 그 이후 1651년(효종2년)에 김법성金法成이 중창을 했고, 1731년에 대웅전(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82호)을 중건했다. 특히 1730년에 리연理然 등이 괘불탱(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61호)을 제작하여 매년 음력 3월3일에 영산재를 지내고 있으며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고성 부사를 지낸 오횡묵吳宖黙(1834~?) [조선 말기 문신이며 학자로 본관은 해주이고 자는 성규聖圭이며, 호는 채원茝園이다. 19세기 말에 정선군수 자인현감 함안군수 고성부사 공상소감동工桑所監董 지도군수 및 여수군수 등을 두루 거쳤다. 그는 부임한 지방의 수령으로 있을 당시 자신의 시문은 물론 관청에서 중요하게 집행되었던 일과 내외에서 일어났던 중대한 일 등을 일기체로 엮어 놓았는데, 이것이 오늘날 귀중한 자료로 남겨져 전해지고 있는 것이 총쇄록이다. 그의 저서로느 《채원집》《정서총쇄록》《자인총쇄록》《함안총쇄록》《고성총쇄록》《지도총쇄록》《여재촬요》 등이 있다] 이 쓴《고성총쇄록》을 살펴보면 운흥사에 대한 기록이 몇 차례 언급이 되어 있다. 그 기록을 따라가보자.
<운흥사>
『불우 법천사法泉寺 는 고을 북쪽에 있다. 운흥사는 고을 서쪽에 있다. 내원사는 고을 서쪽에 있다. 안정사는 고을 동쪽에 있다. 문수사는 고을 서쪽에 있다. 장의암은 고을 동쪽에 있다. 용화사는 고을 남쪽에 있다.』 오횡묵 부사가 재직시에는 통영도 고성의 소관이었기에 용화사가 남쪽에 있다고 했다. 운흥사는 서쪽에 있는 사찰이고 당시에 법천사가 존재했는지 법천사는 북쪽에 있다고 했다. 지금은 법천사는 흔적이 없고 부도 몇 기만 남아 있을 뿐이다. 『와룡산 운흥사의 중 금영錦永과 取寬이 찾아와서 좌반佐飯 한 그릇을 드리고 이야기하기를 “본 사찰이 산중에 있지만 과연 오래된 사찰인데 근래에 이웃 마을 나무꾼이 함부로 폐단을 지어 하나하나 말할 수도 없습니다. 별다른 금령이 있은 연후에 보존할 수가 있습니다.”』 운흥사 주변 울창한 숲이 상당기간 남벌로 인하여 폐허화되고 있으므로 이를 금지해 줄 것을 사찰의 승려가 고성부사에게 호소하고 있는 상황을 적고 있다. 『9월10일… 새벽에 덕치를 출발해서 내원동, 석지, 와룡동을 지나 운흥사에 들어가니 여기사 바로 삼한의 옛 큰 절이다. 골 어귀에 헤월당의 비석이 있고 돌아서서 절로 들어갔다. 대웅전이 중앙에 있고 북쪽에는 시왕전이 있고 남쪽에는 나한전이 있고 서쪽에는 극락전이 있고 동쪽에는 칠성각, 천진암이 있고 동쪽 벼랑에는 일곱 기의 부도가 있는데, 응화, 홍찬, 포연, 경선, 기삼, 도현, 긍전 등이 그 승려들이다. 두루 도량을 관람하니 흰 구름이 골짝에 잠기고 흐르는 물이 시내에 울린다. 홀연히 옛날에 용이 누워 있던 곳인가 싶은데 와룡산이 바로 주산이다. 어린 소나무와 아름다운 대나무가 몇십 리의 산을 둘러 있는데, 무너지는 주추와 기울어진 기둥이 사람으로 하여금 황량한 누대의 탄식을 일으키게 한다. 또 말하기를 “수십 년 전에는 이 골짝 안 30리가 모두 한 아름 되는 큰 소나무들이었는데. 통영사또가 금하지 말라는 명령으로 인해 일곱 고을 나무꾼이 일시에 마구잡이로 베기를 매일 수천명씩 하니 십일도 안 되어 민둥산으로 변했습니다. 그 후로 중들고 점점 줄어들고 불당도 훼손되어 저절로 퇴락하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몇 해 전에 통영에 하소연을 해서 겨우 오늘의 모양을 이룬 것입니다.”라고 하면서 모두 한탄하니 나도 분함이 있어, 그 일로 시로 읊었다.
<운흥사 대웅전>
내 들으니 운흥사 삼한시대부터 복지로 소문나, 사방에 산이 둘러 30리 한 지역에 아름드리 소나무 울창하였네. 한 가지도 도끼와 자귀의 남벌을 막아 승려 많고 사찰 부유 이익 많았네. 아첨하는 사람의 요설 나무의 재앙 되어 추상같은 새 명령 대원수 같았네. 하루아침에 민둥산 불모지 되니 돌부처도 그 일에 눈물 흘릴 일. 오정장사의 신검은 어찌 탐욕의 머리 자르지 않는가? 또 행차하여 와룡동에 이르니 마을 백성들이 닭을 잡고 술과 과일을 마련하여 대접한다면서 길을 막고 기다리므로 내가 좋은 말로 타이르고 오방치를 넘어가니 길이 매우 가파르게 있었다.』 오횡묵이 관내순시를 하던 중 운흥사에 들른 사실을 적은 글이다. 여기서 눈여겨볼 대목이 있다. 운흥사가 오래된 사찰이라고 한 것이며 운흥사의 규모에 대해서도 서술하고 있다. 예전에 번성했던 절이 주변 소나무의 남벌로 쇠락해진 경위를 설명하고 있다. 통영의 사또란 필경 통제사일 것이다. 통제영의 통제사가 고성 군민에게 끼친 폐해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는 것을 이 기록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운흥사는 임진왜란과 관련이 아주 깊은 절이다. 승군장이었던 서산대사 휴정(1520∼1604)의 행정을 기록한 《청허당집》에 보면 고성과 관련한 시 한 편이 나온다. 한 소리는 구름 속 맑은 기러기 울음이요, 외로운 돛단배는 먼 길 가는 나그네의 배. 바다 빛은 하늘보다 푸른데, 짝지어 나는 하얀 갈매기. 유유히 흐르는 한 아득한 세월에, 성 밑의 물은 속절없이 흐르네. 누가 알리요, 지초 캐는 사람이 오늘 홀로 성루에 오른 줄을! -<등 철성성루유감 等 鐵城城樓有感>
<대웅전 경내>
이 시에는 고성이라는 말은 한마디도 없다. 바다를 나타내는 돛단배, 갈매기 그리고 성과 성루뿐이다. 단지 이의 제목이 고성의 옛 이름인 철성을 가리키고 있어 서산대사가 고성을 방문했다는 사실을 더듬어 볼 따름이다. 그러나 임진왜란 때 그 바쁜 서산대사가 남쪽 끄트머리 고성 바닷가에싸지 왜 왔을까. 승병들로 왜적과 맞서기 위함이었지 않았을까, 그렇다면 승병들의 집결지인 이곳 운흥사에까지 왔다고 봐야 한다. 또 이순신 장군이 전투의 작전회의를 위하여 세 차례나 운흥사를 방문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이런 까닭으로 인해 운흥사가 왜군에 의해 불타는 불운을 겪었는지 모를 일이다.
<운흥사 영산전>
와룡산이란 지명은 두 곳이다. 하나는 운흥사가 있는 고성 와룡산이고 하나는 사천에 있는 사천 와룡산이다. 고성 와룡산에 대한 옛 문헌에는 “군의서쪽 60리에 있으며 무이산으로부터 왓다. 고려 현종이 일찍이 이곳에서 글을 읽있다”고 기록해 놓았다. 이 기록에서 두 가지를 살펴보아야 한다. 그 하나는 사천 와룡산과 고성 와룡산은 서로 이웃하고 있는 산임에도 불구하고 그 시원은 확연히 구분이 된다. 고성 와룡산은 무이산에서 왔다고 했다. 무이산은 감치산에서 왔고 감치산은 무량산에서 왔으니 결국 고성 와룡산은 사천이 아닌 고성의 진산인 무량산에서 산줄긳사 뻗어온 것이다. 또 하나는 고려 현종이 이곳에 머물면서 글을 읽고 훗날 왕으로 등극했다고 했다. 무슨 사연이 있었을까? 이 이야기는 《철성지》와 《고성지》에 자세히 수록돼 있다. 찾아서 한번 읽어 보자. 『고려의 제8대 현종이었던 순이 이 산에서 우거하면서 글을 읽고 있었는데 그때에 마루 난간에 꽃뱀이 도사리고 있는 것을 보고 사아시란 시를 지었다. 그의 나이 6살이었다. 5살 때부터 하나를 가르치면 벌써 둘을 깨쳤다고 한다.』 「자그마한 뱀 새끼 약초 난간 휘감았는데, 온몸이 붉은 비단 같아 절로 아롱지네. 오래도록 수플 밑에 있으리라 말하지 말게나. 어느 날 용되는 것 어렵지 않다네」 자그마한 뱀 새끼는 현종 자기 자신을 가리킨다. 자신은 이 후미진 와룡산에서 평생을 보내지 않고 어린 뱀이 커서 언젠가 용이 되어 승천하듯이 자신도 왕이 될 것임을 암시하는 시다.
<운흥사 명부전>
이 시의 배경은 이렇다. 당초 고려 제5대왕 경종이 헌애왕후 소생인 송을 남겨두고 재위 6년(982)만에 죽자 두 왕후, 헌애와 헌정(그녀들은 자매지간이고 태조 왕건의 제7자 욱의 딸)은 청상과부의 몸이 된다. 헌애왕후는 아들 송이 있어 외로움을 모르나 헌정왕후는 슬하에 자식이 없어 외로운 몸이었다. 이에 헌정와후(황보 씨)가 사제에 나와 살았는데 한번은 꿈에 곡령에 올라가서 갑자기 소변이 마려워서 소변을 보았더니그 물줄기가 어찌나 거센지 온 나라 안이 바다를 이루었다. 점쟁이가 말하기를 “아들을 낳으면 왕이 되어 온 나라를 차지하겠다.” 하니 왕비가 말하기를 “내가 이미 과부가 되었는데 어떻게 아들을 낳는단 말인가?”하였다. 종실인 욱은 태조 왕건의 제8남인데 그의 집이 헌정왕후와 가까웠고 또한 그들은 숙질간으로 스스럼없이 자주 왕래를 하다 보니 어느덧 사통하여 임신이 되었다. 성종때 일어난 일이었다.
<운흥사>
하루는 그녀가 욱의 집에서 자고 있는데 욱의 처가 도저히 참을 수 없어 마당에 섶을 쌓아놓고 불을 질렀다. 백관들이 달려 나와 불을 껐고 성종도 달려 나와 불 끄기를 독려했다. 욱의 처가 성종에게 불을 낸 사유를 이실직고 하자 헌정왕후는 부끄럽고 후회스러워 집으로 바삐 돌아갔는데 겨우 문에 도착하자마자 태기가 있어 문 앞의 버드나무 가지를 붙잡고 몸을 풀고 죽으면서 유모를 정하여 길러 욱에게 보내라고 유언을 남기고 그녀는 세상을 뜬다. 훗날 이 아이가 현종이다. 아이 때 이름은 순이었다. 욱은 성종 11년(992) 종친의 법도를 지키지 못함을 힐책을 받아 사천군 와룡산으로 유배된다. 아이도 시모와 종자를 딸려서 와룡산의 욱에게로 돌려보내나 부자가 함께 살지 못하도록 하여 떨어져 살았다. 욱은 문장을 전공하여 압송한 내시 고현에게 지어 주기를 “그대와 같은 날 서울(개성)을 떠나왔는데, 그대는 돌아가고 나는 돌아가지 못하네. 나그네의 우리는 서럽게도 원숭이가 갇힌 듯하고, 석별의 정자에선 부럽게도 말이 나는 듯 하다. 제성의 봄빛은 혼백이 꿈과 어울리고, 해국의 풍광은 눈물 옷깃에 가득하네. 성주의 한 말씀 바꾸지는 않을 터이니, 마침내 낚시터에서 늙게는 하시려나”하였다. 또 욱은 지리에 공부가 깊어 일찍이 금 한 주머니를 아들 순에게 주면서 말하기를 “내가 죽으면 이 돈을 술사에게 주어 이 고을 성황당 남쪽 귀룡동에 나를 장사지내게 하되 반드시 엎어서 묻게 하라.”하였다. 마침 욱이 귀향지 배소에서 죽어 아들이 그 말과 같이 술사에게 말하여 엎어서 묻어달라고 청하니 술사가 말하기를 “어찌 그리도 바쁜고?” 하였는데, 과연 그 이듬해 2월에 순이 서울로 돌아가서 즉위하였다. 그가 현종이다. [출처] [고성여행]한국의 아름다운 장독대 <고성의 겉살과 속살을 찾아서/운흥사/대웅전/명부전/영산제/고성문화유산>|작성자 쇳디한국의 아름다운 장독대 달구벌 추천 0 조회 61 15.07.15 17:05 댓글 0 북마크번역하기 공유하기기능 더보기 SNS로 공유하기 펼쳐짐 현재페이지 URL복사 http://cafe.daum.net/suzhoukorean/HaG/1040?svc=cafeapiURL복사 공유목록 닫기 주소가 복사되었습니다. 원하는곳에 붙여넣기(Ctrl+V)해주세요. 공유목록 닫기 게시글 본문내용
한국의 아름다운 장독대
가장 한국적인 것을 꼽으라고 한다면 그중의 하나는 장독대가 아닐까. 우리네 식탁에서 빼놓을 수 없는 김치, 고추장, 된장, 간장, 젓갈 등 5대 밑반찬을 비롯한 갖가지 반찬을 저장했던 장독대는 분명 한국적이다.
<운흥사 장독대>
부엌과 가까운 곳에, 들고 나기 쉬운 곳에 크고 작은 항아리며 장독을 한곳에 모아둔 장독대는 우리 사회가 농경사회에서 산업사회로 바뀌기 이전에는 우리네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었던 것으로 지금도 농촌에는 장독대가 있어 목가적인 풍경을 연출한다. 장독대만 바라보아도 그 집의 가풍이나 성격을 손쉽게 파악할 수 있다. 손끝이 야물어 부지런하고 정갈한 여인네의 장독대는 언제나 닦고 닦아서 야들야들 번들번들 빛이 나고 윤이 나는 반면 몇 날 며칠을 닦지 않았는지 먼지가 부옇게 쌓여 덕지덕지 앉은 모습만 보아도 그 집 안주인이 게을받고(게으로고) 틀피짓(덜렁거리고 야물지 못함)을 하는지 단박에 그 집의 여인네의 성격을 알 수가 있는 것이 장독대이기도 하다. 가난하여 살림이 적은 집은 적은 대로, 살림이 넉넉한 집은 많은 대로 장독대를 꾸몄다. 담으로 둘러싼 담장 위를 짚을 엮어 얹거나 잘 사는 집에서는 장독대마저 기와를 얹기도 했다. 초가집은 초가집에 어울리레 장독대의 담장을 짚으로, 기와집은 기와집에 어울리도록 장독대의 담장을 기와로 꾸몄다. 이도저도 아닌 집은 그 지의 구조에 맞게 위치한 공간에다 장독대를 설치하여 아담하게 꾸미었다. 이처럼 장독대는 우리의 미의식이 독특하게 표출된 음식문화와 규방문화의 공간이었다.
<겨울 운흥사 장독대>
운흥사(고성군 하이면 와룡리 442번지)에 가면 눈을 사로잡는 아름다운 공간이 있다. 그것은 불상이나 탑이 아니다. 그것은 운흥사가 자랑하는 탱화도 아니다. 이 절의 불심이 뛰어나다는 주지 스림은 수행도량인 절도 아니다. 그것은 절 살림을 대변하는 듯한 조촐한 장독을 마치 꽃잎이 감싸고 있는 형상의 장독대이다. 장독대는 외부인의 눈에 쉽게 드러나지 않은 공간에 위치를 하나 이곳은 그렇지 않다. 산으로 둘러싸이다 보니 자연스럽게 햇볕이 잘 드러나는 공간이 필요했을 터. 지금 놓인 장독대의 위치가 바로 그곳이었을 것이다. 싼 담도 부드러운 곡선이다. 부처도 부드럽고 부처의 말씀 또한 부드럽다. 그중에서도 ‘자비’라는 말이 제일로 부드럽다. 장독대를 둘러싸고 있는 저 담장은 정녕 부드럽고 자비로운 부처의 말씀 그대로이다.
장독대를 가만히 쳐다보고 있노라면 어미닭이 알을 품고 있는 포근함이랄까, 햇볕이 그리운날의 따뜻한 햇볕 한 줌이랄까, 자식에게 음식 한 숟갈 더 넣어주고 싶은 지극한 모성애의 흐뭇함이랄까, 가을 김장철의 맛깔스런 양념 냄새랄까 하여튼 이런 묘한 느낌을 자아내게 한다. 저 장독대와 담장 위에 눈이라도 내려 쌓이면 얼마나 부드러울까. 부드러움이 만들어내는 아름다움이 정녕 이런 것일 줄이야 운흥사에 와서야 비로소 깨닫게 된다.
운흥사雲興寺 <운흥사 전경>
운흥사의 장독대가 아름답다면 운흥사 또한 그 이름 그대로 구름이 뭉개뭉개 피어남 직한 사찰이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절이 위치한 곳이 고성군 하이면 와룡리臥龍里이다. 와룡은 용이 잠자는 곳이니만큼 그곳에는 반드시 구름이 모여들 터. 절 가까운 곳에는 이 근방에서 제일로 높다는 와룡산(799m)도 있다. 그러니 운흥사란 이름을 지은 것인지도 모르겠다. 제갈공명의 별칭이기도 한 와룡은 그 이름부터가 예사롭지 않기에 운흥사 또한 예사롭지 않은 절임에 틀림없다.
<운흥사 영산제>
운흥사는 676년에 의상대사가 창건했다고 한다. 임진왜란 때 사명대사가 이곳에서 승병 6,000여 명을 거느리고 싸웠으며 그때 절이 소실되었다 한다. 그 이후 1651년(효종2년)에 김법성金法成이 중창을 했고, 1731년에 대웅전(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82호)을 중건했다. 특히 1730년에 리연理然 등이 괘불탱(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61호)을 제작하여 매년 음력 3월3일에 영산재를 지내고 있으며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고성 부사를 지낸 오횡묵吳宖黙(1834~?) [조선 말기 문신이며 학자로 본관은 해주이고 자는 성규聖圭이며, 호는 채원茝園이다. 19세기 말에 정선군수 자인현감 함안군수 고성부사 공상소감동工桑所監董 지도군수 및 여수군수 등을 두루 거쳤다. 그는 부임한 지방의 수령으로 있을 당시 자신의 시문은 물론 관청에서 중요하게 집행되었던 일과 내외에서 일어났던 중대한 일 등을 일기체로 엮어 놓았는데, 이것이 오늘날 귀중한 자료로 남겨져 전해지고 있는 것이 총쇄록이다. 그의 저서로느 《채원집》《정서총쇄록》《자인총쇄록》《함안총쇄록》《고성총쇄록》《지도총쇄록》《여재촬요》 등이 있다] 이 쓴《고성총쇄록》을 살펴보면 운흥사에 대한 기록이 몇 차례 언급이 되어 있다. 그 기록을 따라가보자.
<운흥사>
『불우 법천사法泉寺 는 고을 북쪽에 있다. 운흥사는 고을 서쪽에 있다. 내원사는 고을 서쪽에 있다. 안정사는 고을 동쪽에 있다. 문수사는 고을 서쪽에 있다. 장의암은 고을 동쪽에 있다. 용화사는 고을 남쪽에 있다.』 오횡묵 부사가 재직시에는 통영도 고성의 소관이었기에 용화사가 남쪽에 있다고 했다. 운흥사는 서쪽에 있는 사찰이고 당시에 법천사가 존재했는지 법천사는 북쪽에 있다고 했다. 지금은 법천사는 흔적이 없고 부도 몇 기만 남아 있을 뿐이다. 『와룡산 운흥사의 중 금영錦永과 取寬이 찾아와서 좌반佐飯 한 그릇을 드리고 이야기하기를 “본 사찰이 산중에 있지만 과연 오래된 사찰인데 근래에 이웃 마을 나무꾼이 함부로 폐단을 지어 하나하나 말할 수도 없습니다. 별다른 금령이 있은 연후에 보존할 수가 있습니다.”』 운흥사 주변 울창한 숲이 상당기간 남벌로 인하여 폐허화되고 있으므로 이를 금지해 줄 것을 사찰의 승려가 고성부사에게 호소하고 있는 상황을 적고 있다. 『9월10일… 새벽에 덕치를 출발해서 내원동, 석지, 와룡동을 지나 운흥사에 들어가니 여기사 바로 삼한의 옛 큰 절이다. 골 어귀에 헤월당의 비석이 있고 돌아서서 절로 들어갔다. 대웅전이 중앙에 있고 북쪽에는 시왕전이 있고 남쪽에는 나한전이 있고 서쪽에는 극락전이 있고 동쪽에는 칠성각, 천진암이 있고 동쪽 벼랑에는 일곱 기의 부도가 있는데, 응화, 홍찬, 포연, 경선, 기삼, 도현, 긍전 등이 그 승려들이다. 두루 도량을 관람하니 흰 구름이 골짝에 잠기고 흐르는 물이 시내에 울린다. 홀연히 옛날에 용이 누워 있던 곳인가 싶은데 와룡산이 바로 주산이다. 어린 소나무와 아름다운 대나무가 몇십 리의 산을 둘러 있는데, 무너지는 주추와 기울어진 기둥이 사람으로 하여금 황량한 누대의 탄식을 일으키게 한다. 또 말하기를 “수십 년 전에는 이 골짝 안 30리가 모두 한 아름 되는 큰 소나무들이었는데. 통영사또가 금하지 말라는 명령으로 인해 일곱 고을 나무꾼이 일시에 마구잡이로 베기를 매일 수천명씩 하니 십일도 안 되어 민둥산으로 변했습니다. 그 후로 중들고 점점 줄어들고 불당도 훼손되어 저절로 퇴락하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몇 해 전에 통영에 하소연을 해서 겨우 오늘의 모양을 이룬 것입니다.”라고 하면서 모두 한탄하니 나도 분함이 있어, 그 일로 시로 읊었다.
<운흥사 대웅전>
내 들으니 운흥사 삼한시대부터 복지로 소문나, 사방에 산이 둘러 30리 한 지역에 아름드리 소나무 울창하였네. 한 가지도 도끼와 자귀의 남벌을 막아 승려 많고 사찰 부유 이익 많았네. 아첨하는 사람의 요설 나무의 재앙 되어 추상같은 새 명령 대원수 같았네. 하루아침에 민둥산 불모지 되니 돌부처도 그 일에 눈물 흘릴 일. 오정장사의 신검은 어찌 탐욕의 머리 자르지 않는가? 또 행차하여 와룡동에 이르니 마을 백성들이 닭을 잡고 술과 과일을 마련하여 대접한다면서 길을 막고 기다리므로 내가 좋은 말로 타이르고 오방치를 넘어가니 길이 매우 가파르게 있었다.』 오횡묵이 관내순시를 하던 중 운흥사에 들른 사실을 적은 글이다. 여기서 눈여겨볼 대목이 있다. 운흥사가 오래된 사찰이라고 한 것이며 운흥사의 규모에 대해서도 서술하고 있다. 예전에 번성했던 절이 주변 소나무의 남벌로 쇠락해진 경위를 설명하고 있다. 통영의 사또란 필경 통제사일 것이다. 통제영의 통제사가 고성 군민에게 끼친 폐해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는 것을 이 기록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운흥사는 임진왜란과 관련이 아주 깊은 절이다. 승군장이었던 서산대사 휴정(1520∼1604)의 행정을 기록한 《청허당집》에 보면 고성과 관련한 시 한 편이 나온다. 한 소리는 구름 속 맑은 기러기 울음이요, 외로운 돛단배는 먼 길 가는 나그네의 배. 바다 빛은 하늘보다 푸른데, 짝지어 나는 하얀 갈매기. 유유히 흐르는 한 아득한 세월에, 성 밑의 물은 속절없이 흐르네. 누가 알리요, 지초 캐는 사람이 오늘 홀로 성루에 오른 줄을! -<등 철성성루유감 等 鐵城城樓有感>
<대웅전 경내>
이 시에는 고성이라는 말은 한마디도 없다. 바다를 나타내는 돛단배, 갈매기 그리고 성과 성루뿐이다. 단지 이의 제목이 고성의 옛 이름인 철성을 가리키고 있어 서산대사가 고성을 방문했다는 사실을 더듬어 볼 따름이다. 그러나 임진왜란 때 그 바쁜 서산대사가 남쪽 끄트머리 고성 바닷가에싸지 왜 왔을까. 승병들로 왜적과 맞서기 위함이었지 않았을까, 그렇다면 승병들의 집결지인 이곳 운흥사에까지 왔다고 봐야 한다. 또 이순신 장군이 전투의 작전회의를 위하여 세 차례나 운흥사를 방문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이런 까닭으로 인해 운흥사가 왜군에 의해 불타는 불운을 겪었는지 모를 일이다.
<운흥사 영산전>
와룡산이란 지명은 두 곳이다. 하나는 운흥사가 있는 고성 와룡산이고 하나는 사천에 있는 사천 와룡산이다. 고성 와룡산에 대한 옛 문헌에는 “군의서쪽 60리에 있으며 무이산으로부터 왓다. 고려 현종이 일찍이 이곳에서 글을 읽있다”고 기록해 놓았다. 이 기록에서 두 가지를 살펴보아야 한다. 그 하나는 사천 와룡산과 고성 와룡산은 서로 이웃하고 있는 산임에도 불구하고 그 시원은 확연히 구분이 된다. 고성 와룡산은 무이산에서 왔다고 했다. 무이산은 감치산에서 왔고 감치산은 무량산에서 왔으니 결국 고성 와룡산은 사천이 아닌 고성의 진산인 무량산에서 산줄긳사 뻗어온 것이다. 또 하나는 고려 현종이 이곳에 머물면서 글을 읽고 훗날 왕으로 등극했다고 했다. 무슨 사연이 있었을까? 이 이야기는 《철성지》와 《고성지》에 자세히 수록돼 있다. 찾아서 한번 읽어 보자. 『고려의 제8대 현종이었던 순이 이 산에서 우거하면서 글을 읽고 있었는데 그때에 마루 난간에 꽃뱀이 도사리고 있는 것을 보고 사아시란 시를 지었다. 그의 나이 6살이었다. 5살 때부터 하나를 가르치면 벌써 둘을 깨쳤다고 한다.』 「자그마한 뱀 새끼 약초 난간 휘감았는데, 온몸이 붉은 비단 같아 절로 아롱지네. 오래도록 수플 밑에 있으리라 말하지 말게나. 어느 날 용되는 것 어렵지 않다네」 자그마한 뱀 새끼는 현종 자기 자신을 가리킨다. 자신은 이 후미진 와룡산에서 평생을 보내지 않고 어린 뱀이 커서 언젠가 용이 되어 승천하듯이 자신도 왕이 될 것임을 암시하는 시다.
<운흥사 명부전>
이 시의 배경은 이렇다. 당초 고려 제5대왕 경종이 헌애왕후 소생인 송을 남겨두고 재위 6년(982)만에 죽자 두 왕후, 헌애와 헌정(그녀들은 자매지간이고 태조 왕건의 제7자 욱의 딸)은 청상과부의 몸이 된다. 헌애왕후는 아들 송이 있어 외로움을 모르나 헌정왕후는 슬하에 자식이 없어 외로운 몸이었다. 이에 헌정와후(황보 씨)가 사제에 나와 살았는데 한번은 꿈에 곡령에 올라가서 갑자기 소변이 마려워서 소변을 보았더니그 물줄기가 어찌나 거센지 온 나라 안이 바다를 이루었다. 점쟁이가 말하기를 “아들을 낳으면 왕이 되어 온 나라를 차지하겠다.” 하니 왕비가 말하기를 “내가 이미 과부가 되었는데 어떻게 아들을 낳는단 말인가?”하였다. 종실인 욱은 태조 왕건의 제8남인데 그의 집이 헌정왕후와 가까웠고 또한 그들은 숙질간으로 스스럼없이 자주 왕래를 하다 보니 어느덧 사통하여 임신이 되었다. 성종때 일어난 일이었다.
<운흥사>
하루는 그녀가 욱의 집에서 자고 있는데 욱의 처가 도저히 참을 수 없어 마당에 섶을 쌓아놓고 불을 질렀다. 백관들이 달려 나와 불을 껐고 성종도 달려 나와 불 끄기를 독려했다. 욱의 처가 성종에게 불을 낸 사유를 이실직고 하자 헌정왕후는 부끄럽고 후회스러워 집으로 바삐 돌아갔는데 겨우 문에 도착하자마자 태기가 있어 문 앞의 버드나무 가지를 붙잡고 몸을 풀고 죽으면서 유모를 정하여 길러 욱에게 보내라고 유언을 남기고 그녀는 세상을 뜬다. 훗날 이 아이가 현종이다. 아이 때 이름은 순이었다. 욱은 성종 11년(992) 종친의 법도를 지키지 못함을 힐책을 받아 사천군 와룡산으로 유배된다. 아이도 시모와 종자를 딸려서 와룡산의 욱에게로 돌려보내나 부자가 함께 살지 못하도록 하여 떨어져 살았다. 욱은 문장을 전공하여 압송한 내시 고현에게 지어 주기를 “그대와 같은 날 서울(개성)을 떠나왔는데, 그대는 돌아가고 나는 돌아가지 못하네. 나그네의 우리는 서럽게도 원숭이가 갇힌 듯하고, 석별의 정자에선 부럽게도 말이 나는 듯 하다. 제성의 봄빛은 혼백이 꿈과 어울리고, 해국의 풍광은 눈물 옷깃에 가득하네. 성주의 한 말씀 바꾸지는 않을 터이니, 마침내 낚시터에서 늙게는 하시려나”하였다. 또 욱은 지리에 공부가 깊어 일찍이 금 한 주머니를 아들 순에게 주면서 말하기를 “내가 죽으면 이 돈을 술사에게 주어 이 고을 성황당 남쪽 귀룡동에 나를 장사지내게 하되 반드시 엎어서 묻게 하라.”하였다. 마침 욱이 귀향지 배소에서 죽어 아들이 그 말과 같이 술사에게 말하여 엎어서 묻어달라고 청하니 술사가 말하기를 “어찌 그리도 바쁜고?” 하였는데, 과연 그 이듬해 2월에 순이 서울로 돌아가서 즉위하였다. 그가 현종이다. [출처] [고성여행]한국의 아름다운 장독대 <고성의 겉살과 속살을 찾아서/운흥사/대웅전/명부전/영산제/고성문화유산>|작성자 쇳디한국의 아름다운 장독대 달구벌 추천 0 조회 61 15.07.15 17:05 댓글 0 북마크번역하기 공유하기기능 더보기 SNS로 공유하기 펼쳐짐 현재페이지 URL복사 http://cafe.daum.net/suzhoukorean/HaG/1040?svc=cafeapiURL복사 공유목록 닫기 주소가 복사되었습니다. 원하는곳에 붙여넣기(Ctrl+V)해주세요. 공유목록 닫기 게시글 본문내용
한국의 아름다운 장독대
가장 한국적인 것을 꼽으라고 한다면 그중의 하나는 장독대가 아닐까. 우리네 식탁에서 빼놓을 수 없는 김치, 고추장, 된장, 간장, 젓갈 등 5대 밑반찬을 비롯한 갖가지 반찬을 저장했던 장독대는 분명 한국적이다.
<운흥사 장독대>
부엌과 가까운 곳에, 들고 나기 쉬운 곳에 크고 작은 항아리며 장독을 한곳에 모아둔 장독대는 우리 사회가 농경사회에서 산업사회로 바뀌기 이전에는 우리네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었던 것으로 지금도 농촌에는 장독대가 있어 목가적인 풍경을 연출한다. 장독대만 바라보아도 그 집의 가풍이나 성격을 손쉽게 파악할 수 있다. 손끝이 야물어 부지런하고 정갈한 여인네의 장독대는 언제나 닦고 닦아서 야들야들 번들번들 빛이 나고 윤이 나는 반면 몇 날 며칠을 닦지 않았는지 먼지가 부옇게 쌓여 덕지덕지 앉은 모습만 보아도 그 집 안주인이 게을받고(게으로고) 틀피짓(덜렁거리고 야물지 못함)을 하는지 단박에 그 집의 여인네의 성격을 알 수가 있는 것이 장독대이기도 하다. 가난하여 살림이 적은 집은 적은 대로, 살림이 넉넉한 집은 많은 대로 장독대를 꾸몄다. 담으로 둘러싼 담장 위를 짚을 엮어 얹거나 잘 사는 집에서는 장독대마저 기와를 얹기도 했다. 초가집은 초가집에 어울리레 장독대의 담장을 짚으로, 기와집은 기와집에 어울리도록 장독대의 담장을 기와로 꾸몄다. 이도저도 아닌 집은 그 지의 구조에 맞게 위치한 공간에다 장독대를 설치하여 아담하게 꾸미었다. 이처럼 장독대는 우리의 미의식이 독특하게 표출된 음식문화와 규방문화의 공간이었다.
<겨울 운흥사 장독대>
운흥사(고성군 하이면 와룡리 442번지)에 가면 눈을 사로잡는 아름다운 공간이 있다. 그것은 불상이나 탑이 아니다. 그것은 운흥사가 자랑하는 탱화도 아니다. 이 절의 불심이 뛰어나다는 주지 스림은 수행도량인 절도 아니다. 그것은 절 살림을 대변하는 듯한 조촐한 장독을 마치 꽃잎이 감싸고 있는 형상의 장독대이다. 장독대는 외부인의 눈에 쉽게 드러나지 않은 공간에 위치를 하나 이곳은 그렇지 않다. 산으로 둘러싸이다 보니 자연스럽게 햇볕이 잘 드러나는 공간이 필요했을 터. 지금 놓인 장독대의 위치가 바로 그곳이었을 것이다. 싼 담도 부드러운 곡선이다. 부처도 부드럽고 부처의 말씀 또한 부드럽다. 그중에서도 ‘자비’라는 말이 제일로 부드럽다. 장독대를 둘러싸고 있는 저 담장은 정녕 부드럽고 자비로운 부처의 말씀 그대로이다.
장독대를 가만히 쳐다보고 있노라면 어미닭이 알을 품고 있는 포근함이랄까, 햇볕이 그리운날의 따뜻한 햇볕 한 줌이랄까, 자식에게 음식 한 숟갈 더 넣어주고 싶은 지극한 모성애의 흐뭇함이랄까, 가을 김장철의 맛깔스런 양념 냄새랄까 하여튼 이런 묘한 느낌을 자아내게 한다. 저 장독대와 담장 위에 눈이라도 내려 쌓이면 얼마나 부드러울까. 부드러움이 만들어내는 아름다움이 정녕 이런 것일 줄이야 운흥사에 와서야 비로소 깨닫게 된다.
운흥사雲興寺 <운흥사 전경>
운흥사의 장독대가 아름답다면 운흥사 또한 그 이름 그대로 구름이 뭉개뭉개 피어남 직한 사찰이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절이 위치한 곳이 고성군 하이면 와룡리臥龍里이다. 와룡은 용이 잠자는 곳이니만큼 그곳에는 반드시 구름이 모여들 터. 절 가까운 곳에는 이 근방에서 제일로 높다는 와룡산(799m)도 있다. 그러니 운흥사란 이름을 지은 것인지도 모르겠다. 제갈공명의 별칭이기도 한 와룡은 그 이름부터가 예사롭지 않기에 운흥사 또한 예사롭지 않은 절임에 틀림없다.
<운흥사 영산제>
운흥사는 676년에 의상대사가 창건했다고 한다. 임진왜란 때 사명대사가 이곳에서 승병 6,000여 명을 거느리고 싸웠으며 그때 절이 소실되었다 한다. 그 이후 1651년(효종2년)에 김법성金法成이 중창을 했고, 1731년에 대웅전(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82호)을 중건했다. 특히 1730년에 리연理然 등이 괘불탱(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61호)을 제작하여 매년 음력 3월3일에 영산재를 지내고 있으며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고성 부사를 지낸 오횡묵吳宖黙(1834~?) [조선 말기 문신이며 학자로 본관은 해주이고 자는 성규聖圭이며, 호는 채원茝園이다. 19세기 말에 정선군수 자인현감 함안군수 고성부사 공상소감동工桑所監董 지도군수 및 여수군수 등을 두루 거쳤다. 그는 부임한 지방의 수령으로 있을 당시 자신의 시문은 물론 관청에서 중요하게 집행되었던 일과 내외에서 일어났던 중대한 일 등을 일기체로 엮어 놓았는데, 이것이 오늘날 귀중한 자료로 남겨져 전해지고 있는 것이 총쇄록이다. 그의 저서로느 《채원집》《정서총쇄록》《자인총쇄록》《함안총쇄록》《고성총쇄록》《지도총쇄록》《여재촬요》 등이 있다] 이 쓴《고성총쇄록》을 살펴보면 운흥사에 대한 기록이 몇 차례 언급이 되어 있다. 그 기록을 따라가보자.
<운흥사>
『불우 법천사法泉寺 는 고을 북쪽에 있다. 운흥사는 고을 서쪽에 있다. 내원사는 고을 서쪽에 있다. 안정사는 고을 동쪽에 있다. 문수사는 고을 서쪽에 있다. 장의암은 고을 동쪽에 있다. 용화사는 고을 남쪽에 있다.』 오횡묵 부사가 재직시에는 통영도 고성의 소관이었기에 용화사가 남쪽에 있다고 했다. 운흥사는 서쪽에 있는 사찰이고 당시에 법천사가 존재했는지 법천사는 북쪽에 있다고 했다. 지금은 법천사는 흔적이 없고 부도 몇 기만 남아 있을 뿐이다. 『와룡산 운흥사의 중 금영錦永과 取寬이 찾아와서 좌반佐飯 한 그릇을 드리고 이야기하기를 “본 사찰이 산중에 있지만 과연 오래된 사찰인데 근래에 이웃 마을 나무꾼이 함부로 폐단을 지어 하나하나 말할 수도 없습니다. 별다른 금령이 있은 연후에 보존할 수가 있습니다.”』 운흥사 주변 울창한 숲이 상당기간 남벌로 인하여 폐허화되고 있으므로 이를 금지해 줄 것을 사찰의 승려가 고성부사에게 호소하고 있는 상황을 적고 있다. 『9월10일… 새벽에 덕치를 출발해서 내원동, 석지, 와룡동을 지나 운흥사에 들어가니 여기사 바로 삼한의 옛 큰 절이다. 골 어귀에 헤월당의 비석이 있고 돌아서서 절로 들어갔다. 대웅전이 중앙에 있고 북쪽에는 시왕전이 있고 남쪽에는 나한전이 있고 서쪽에는 극락전이 있고 동쪽에는 칠성각, 천진암이 있고 동쪽 벼랑에는 일곱 기의 부도가 있는데, 응화, 홍찬, 포연, 경선, 기삼, 도현, 긍전 등이 그 승려들이다. 두루 도량을 관람하니 흰 구름이 골짝에 잠기고 흐르는 물이 시내에 울린다. 홀연히 옛날에 용이 누워 있던 곳인가 싶은데 와룡산이 바로 주산이다. 어린 소나무와 아름다운 대나무가 몇십 리의 산을 둘러 있는데, 무너지는 주추와 기울어진 기둥이 사람으로 하여금 황량한 누대의 탄식을 일으키게 한다. 또 말하기를 “수십 년 전에는 이 골짝 안 30리가 모두 한 아름 되는 큰 소나무들이었는데. 통영사또가 금하지 말라는 명령으로 인해 일곱 고을 나무꾼이 일시에 마구잡이로 베기를 매일 수천명씩 하니 십일도 안 되어 민둥산으로 변했습니다. 그 후로 중들고 점점 줄어들고 불당도 훼손되어 저절로 퇴락하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몇 해 전에 통영에 하소연을 해서 겨우 오늘의 모양을 이룬 것입니다.”라고 하면서 모두 한탄하니 나도 분함이 있어, 그 일로 시로 읊었다.
<운흥사 대웅전>
내 들으니 운흥사 삼한시대부터 복지로 소문나, 사방에 산이 둘러 30리 한 지역에 아름드리 소나무 울창하였네. 한 가지도 도끼와 자귀의 남벌을 막아 승려 많고 사찰 부유 이익 많았네. 아첨하는 사람의 요설 나무의 재앙 되어 추상같은 새 명령 대원수 같았네. 하루아침에 민둥산 불모지 되니 돌부처도 그 일에 눈물 흘릴 일. 오정장사의 신검은 어찌 탐욕의 머리 자르지 않는가? 또 행차하여 와룡동에 이르니 마을 백성들이 닭을 잡고 술과 과일을 마련하여 대접한다면서 길을 막고 기다리므로 내가 좋은 말로 타이르고 오방치를 넘어가니 길이 매우 가파르게 있었다.』 오횡묵이 관내순시를 하던 중 운흥사에 들른 사실을 적은 글이다. 여기서 눈여겨볼 대목이 있다. 운흥사가 오래된 사찰이라고 한 것이며 운흥사의 규모에 대해서도 서술하고 있다. 예전에 번성했던 절이 주변 소나무의 남벌로 쇠락해진 경위를 설명하고 있다. 통영의 사또란 필경 통제사일 것이다. 통제영의 통제사가 고성 군민에게 끼친 폐해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는 것을 이 기록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운흥사는 임진왜란과 관련이 아주 깊은 절이다. 승군장이었던 서산대사 휴정(1520∼1604)의 행정을 기록한 《청허당집》에 보면 고성과 관련한 시 한 편이 나온다. 한 소리는 구름 속 맑은 기러기 울음이요, 외로운 돛단배는 먼 길 가는 나그네의 배. 바다 빛은 하늘보다 푸른데, 짝지어 나는 하얀 갈매기. 유유히 흐르는 한 아득한 세월에, 성 밑의 물은 속절없이 흐르네. 누가 알리요, 지초 캐는 사람이 오늘 홀로 성루에 오른 줄을! -<등 철성성루유감 等 鐵城城樓有感>
<대웅전 경내>
이 시에는 고성이라는 말은 한마디도 없다. 바다를 나타내는 돛단배, 갈매기 그리고 성과 성루뿐이다. 단지 이의 제목이 고성의 옛 이름인 철성을 가리키고 있어 서산대사가 고성을 방문했다는 사실을 더듬어 볼 따름이다. 그러나 임진왜란 때 그 바쁜 서산대사가 남쪽 끄트머리 고성 바닷가에싸지 왜 왔을까. 승병들로 왜적과 맞서기 위함이었지 않았을까, 그렇다면 승병들의 집결지인 이곳 운흥사에까지 왔다고 봐야 한다. 또 이순신 장군이 전투의 작전회의를 위하여 세 차례나 운흥사를 방문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이런 까닭으로 인해 운흥사가 왜군에 의해 불타는 불운을 겪었는지 모를 일이다.
<운흥사 영산전>
와룡산이란 지명은 두 곳이다. 하나는 운흥사가 있는 고성 와룡산이고 하나는 사천에 있는 사천 와룡산이다. 고성 와룡산에 대한 옛 문헌에는 “군의서쪽 60리에 있으며 무이산으로부터 왓다. 고려 현종이 일찍이 이곳에서 글을 읽있다”고 기록해 놓았다. 이 기록에서 두 가지를 살펴보아야 한다. 그 하나는 사천 와룡산과 고성 와룡산은 서로 이웃하고 있는 산임에도 불구하고 그 시원은 확연히 구분이 된다. 고성 와룡산은 무이산에서 왔다고 했다. 무이산은 감치산에서 왔고 감치산은 무량산에서 왔으니 결국 고성 와룡산은 사천이 아닌 고성의 진산인 무량산에서 산줄긳사 뻗어온 것이다. 또 하나는 고려 현종이 이곳에 머물면서 글을 읽고 훗날 왕으로 등극했다고 했다. 무슨 사연이 있었을까? 이 이야기는 《철성지》와 《고성지》에 자세히 수록돼 있다. 찾아서 한번 읽어 보자. 『고려의 제8대 현종이었던 순이 이 산에서 우거하면서 글을 읽고 있었는데 그때에 마루 난간에 꽃뱀이 도사리고 있는 것을 보고 사아시란 시를 지었다. 그의 나이 6살이었다. 5살 때부터 하나를 가르치면 벌써 둘을 깨쳤다고 한다.』 「자그마한 뱀 새끼 약초 난간 휘감았는데, 온몸이 붉은 비단 같아 절로 아롱지네. 오래도록 수플 밑에 있으리라 말하지 말게나. 어느 날 용되는 것 어렵지 않다네」 자그마한 뱀 새끼는 현종 자기 자신을 가리킨다. 자신은 이 후미진 와룡산에서 평생을 보내지 않고 어린 뱀이 커서 언젠가 용이 되어 승천하듯이 자신도 왕이 될 것임을 암시하는 시다.
<운흥사 명부전>
이 시의 배경은 이렇다. 당초 고려 제5대왕 경종이 헌애왕후 소생인 송을 남겨두고 재위 6년(982)만에 죽자 두 왕후, 헌애와 헌정(그녀들은 자매지간이고 태조 왕건의 제7자 욱의 딸)은 청상과부의 몸이 된다. 헌애왕후는 아들 송이 있어 외로움을 모르나 헌정왕후는 슬하에 자식이 없어 외로운 몸이었다. 이에 헌정와후(황보 씨)가 사제에 나와 살았는데 한번은 꿈에 곡령에 올라가서 갑자기 소변이 마려워서 소변을 보았더니그 물줄기가 어찌나 거센지 온 나라 안이 바다를 이루었다. 점쟁이가 말하기를 “아들을 낳으면 왕이 되어 온 나라를 차지하겠다.” 하니 왕비가 말하기를 “내가 이미 과부가 되었는데 어떻게 아들을 낳는단 말인가?”하였다. 종실인 욱은 태조 왕건의 제8남인데 그의 집이 헌정왕후와 가까웠고 또한 그들은 숙질간으로 스스럼없이 자주 왕래를 하다 보니 어느덧 사통하여 임신이 되었다. 성종때 일어난 일이었다.
<운흥사>
하루는 그녀가 욱의 집에서 자고 있는데 욱의 처가 도저히 참을 수 없어 마당에 섶을 쌓아놓고 불을 질렀다. 백관들이 달려 나와 불을 껐고 성종도 달려 나와 불 끄기를 독려했다. 욱의 처가 성종에게 불을 낸 사유를 이실직고 하자 헌정왕후는 부끄럽고 후회스러워 집으로 바삐 돌아갔는데 겨우 문에 도착하자마자 태기가 있어 문 앞의 버드나무 가지를 붙잡고 몸을 풀고 죽으면서 유모를 정하여 길러 욱에게 보내라고 유언을 남기고 그녀는 세상을 뜬다. 훗날 이 아이가 현종이다. 아이 때 이름은 순이었다. 욱은 성종 11년(992) 종친의 법도를 지키지 못함을 힐책을 받아 사천군 와룡산으로 유배된다. 아이도 시모와 종자를 딸려서 와룡산의 욱에게로 돌려보내나 부자가 함께 살지 못하도록 하여 떨어져 살았다. 욱은 문장을 전공하여 압송한 내시 고현에게 지어 주기를 “그대와 같은 날 서울(개성)을 떠나왔는데, 그대는 돌아가고 나는 돌아가지 못하네. 나그네의 우리는 서럽게도 원숭이가 갇힌 듯하고, 석별의 정자에선 부럽게도 말이 나는 듯 하다. 제성의 봄빛은 혼백이 꿈과 어울리고, 해국의 풍광은 눈물 옷깃에 가득하네. 성주의 한 말씀 바꾸지는 않을 터이니, 마침내 낚시터에서 늙게는 하시려나”하였다. 또 욱은 지리에 공부가 깊어 일찍이 금 한 주머니를 아들 순에게 주면서 말하기를 “내가 죽으면 이 돈을 술사에게 주어 이 고을 성황당 남쪽 귀룡동에 나를 장사지내게 하되 반드시 엎어서 묻게 하라.”하였다. 마침 욱이 귀향지 배소에서 죽어 아들이 그 말과 같이 술사에게 말하여 엎어서 묻어달라고 청하니 술사가 말하기를 “어찌 그리도 바쁜고?” 하였는데, 과연 그 이듬해 2월에 순이 서울로 돌아가서 즉위하였다. 그가 현종이다. [출처] [고성여행]한국의 아름다운 장독대 <고성의 겉살과 속살을 찾아서/운흥사/대웅전/명부전/영산제/고성문화유산>|작성자 쇳디한국의 아름다운 장독대 달구벌 추천 0 조회 61 15.07.15 17:05 댓글 0 북마크번역하기 공유하기기능 더보기 SNS로 공유하기 펼쳐짐 현재페이지 URL복사 http://cafe.daum.net/suzhoukorean/HaG/1040?svc=cafeapiURL복사 공유목록 닫기 주소가 복사되었습니다. 원하는곳에 붙여넣기(Ctrl+V)해주세요. 공유목록 닫기 게시글 본문내용
한국의 아름다운 장독대
가장 한국적인 것을 꼽으라고 한다면 그중의 하나는 장독대가 아닐까. 우리네 식탁에서 빼놓을 수 없는 김치, 고추장, 된장, 간장, 젓갈 등 5대 밑반찬을 비롯한 갖가지 반찬을 저장했던 장독대는 분명 한국적이다.
<운흥사 장독대>
부엌과 가까운 곳에, 들고 나기 쉬운 곳에 크고 작은 항아리며 장독을 한곳에 모아둔 장독대는 우리 사회가 농경사회에서 산업사회로 바뀌기 이전에는 우리네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었던 것으로 지금도 농촌에는 장독대가 있어 목가적인 풍경을 연출한다. 장독대만 바라보아도 그 집의 가풍이나 성격을 손쉽게 파악할 수 있다. 손끝이 야물어 부지런하고 정갈한 여인네의 장독대는 언제나 닦고 닦아서 야들야들 번들번들 빛이 나고 윤이 나는 반면 몇 날 며칠을 닦지 않았는지 먼지가 부옇게 쌓여 덕지덕지 앉은 모습만 보아도 그 집 안주인이 게을받고(게으로고) 틀피짓(덜렁거리고 야물지 못함)을 하는지 단박에 그 집의 여인네의 성격을 알 수가 있는 것이 장독대이기도 하다. 가난하여 살림이 적은 집은 적은 대로, 살림이 넉넉한 집은 많은 대로 장독대를 꾸몄다. 담으로 둘러싼 담장 위를 짚을 엮어 얹거나 잘 사는 집에서는 장독대마저 기와를 얹기도 했다. 초가집은 초가집에 어울리레 장독대의 담장을 짚으로, 기와집은 기와집에 어울리도록 장독대의 담장을 기와로 꾸몄다. 이도저도 아닌 집은 그 지의 구조에 맞게 위치한 공간에다 장독대를 설치하여 아담하게 꾸미었다. 이처럼 장독대는 우리의 미의식이 독특하게 표출된 음식문화와 규방문화의 공간이었다.
<겨울 운흥사 장독대>
운흥사(고성군 하이면 와룡리 442번지)에 가면 눈을 사로잡는 아름다운 공간이 있다. 그것은 불상이나 탑이 아니다. 그것은 운흥사가 자랑하는 탱화도 아니다. 이 절의 불심이 뛰어나다는 주지 스림은 수행도량인 절도 아니다. 그것은 절 살림을 대변하는 듯한 조촐한 장독을 마치 꽃잎이 감싸고 있는 형상의 장독대이다. 장독대는 외부인의 눈에 쉽게 드러나지 않은 공간에 위치를 하나 이곳은 그렇지 않다. 산으로 둘러싸이다 보니 자연스럽게 햇볕이 잘 드러나는 공간이 필요했을 터. 지금 놓인 장독대의 위치가 바로 그곳이었을 것이다. 싼 담도 부드러운 곡선이다. 부처도 부드럽고 부처의 말씀 또한 부드럽다. 그중에서도 ‘자비’라는 말이 제일로 부드럽다. 장독대를 둘러싸고 있는 저 담장은 정녕 부드럽고 자비로운 부처의 말씀 그대로이다.
장독대를 가만히 쳐다보고 있노라면 어미닭이 알을 품고 있는 포근함이랄까, 햇볕이 그리운날의 따뜻한 햇볕 한 줌이랄까, 자식에게 음식 한 숟갈 더 넣어주고 싶은 지극한 모성애의 흐뭇함이랄까, 가을 김장철의 맛깔스런 양념 냄새랄까 하여튼 이런 묘한 느낌을 자아내게 한다. 저 장독대와 담장 위에 눈이라도 내려 쌓이면 얼마나 부드러울까. 부드러움이 만들어내는 아름다움이 정녕 이런 것일 줄이야 운흥사에 와서야 비로소 깨닫게 된다.
운흥사雲興寺 <운흥사 전경>
운흥사의 장독대가 아름답다면 운흥사 또한 그 이름 그대로 구름이 뭉개뭉개 피어남 직한 사찰이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절이 위치한 곳이 고성군 하이면 와룡리臥龍里이다. 와룡은 용이 잠자는 곳이니만큼 그곳에는 반드시 구름이 모여들 터. 절 가까운 곳에는 이 근방에서 제일로 높다는 와룡산(799m)도 있다. 그러니 운흥사란 이름을 지은 것인지도 모르겠다. 제갈공명의 별칭이기도 한 와룡은 그 이름부터가 예사롭지 않기에 운흥사 또한 예사롭지 않은 절임에 틀림없다.
<운흥사 영산제>
운흥사는 676년에 의상대사가 창건했다고 한다. 임진왜란 때 사명대사가 이곳에서 승병 6,000여 명을 거느리고 싸웠으며 그때 절이 소실되었다 한다. 그 이후 1651년(효종2년)에 김법성金法成이 중창을 했고, 1731년에 대웅전(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82호)을 중건했다. 특히 1730년에 리연理然 등이 괘불탱(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61호)을 제작하여 매년 음력 3월3일에 영산재를 지내고 있으며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고성 부사를 지낸 오횡묵吳宖黙(1834~?) [조선 말기 문신이며 학자로 본관은 해주이고 자는 성규聖圭이며, 호는 채원茝園이다. 19세기 말에 정선군수 자인현감 함안군수 고성부사 공상소감동工桑所監董 지도군수 및 여수군수 등을 두루 거쳤다. 그는 부임한 지방의 수령으로 있을 당시 자신의 시문은 물론 관청에서 중요하게 집행되었던 일과 내외에서 일어났던 중대한 일 등을 일기체로 엮어 놓았는데, 이것이 오늘날 귀중한 자료로 남겨져 전해지고 있는 것이 총쇄록이다. 그의 저서로느 《채원집》《정서총쇄록》《자인총쇄록》《함안총쇄록》《고성총쇄록》《지도총쇄록》《여재촬요》 등이 있다] 이 쓴《고성총쇄록》을 살펴보면 운흥사에 대한 기록이 몇 차례 언급이 되어 있다. 그 기록을 따라가보자.
<운흥사>
『불우 법천사法泉寺 는 고을 북쪽에 있다. 운흥사는 고을 서쪽에 있다. 내원사는 고을 서쪽에 있다. 안정사는 고을 동쪽에 있다. 문수사는 고을 서쪽에 있다. 장의암은 고을 동쪽에 있다. 용화사는 고을 남쪽에 있다.』 오횡묵 부사가 재직시에는 통영도 고성의 소관이었기에 용화사가 남쪽에 있다고 했다. 운흥사는 서쪽에 있는 사찰이고 당시에 법천사가 존재했는지 법천사는 북쪽에 있다고 했다. 지금은 법천사는 흔적이 없고 부도 몇 기만 남아 있을 뿐이다. 『와룡산 운흥사의 중 금영錦永과 取寬이 찾아와서 좌반佐飯 한 그릇을 드리고 이야기하기를 “본 사찰이 산중에 있지만 과연 오래된 사찰인데 근래에 이웃 마을 나무꾼이 함부로 폐단을 지어 하나하나 말할 수도 없습니다. 별다른 금령이 있은 연후에 보존할 수가 있습니다.”』 운흥사 주변 울창한 숲이 상당기간 남벌로 인하여 폐허화되고 있으므로 이를 금지해 줄 것을 사찰의 승려가 고성부사에게 호소하고 있는 상황을 적고 있다. 『9월10일… 새벽에 덕치를 출발해서 내원동, 석지, 와룡동을 지나 운흥사에 들어가니 여기사 바로 삼한의 옛 큰 절이다. 골 어귀에 헤월당의 비석이 있고 돌아서서 절로 들어갔다. 대웅전이 중앙에 있고 북쪽에는 시왕전이 있고 남쪽에는 나한전이 있고 서쪽에는 극락전이 있고 동쪽에는 칠성각, 천진암이 있고 동쪽 벼랑에는 일곱 기의 부도가 있는데, 응화, 홍찬, 포연, 경선, 기삼, 도현, 긍전 등이 그 승려들이다. 두루 도량을 관람하니 흰 구름이 골짝에 잠기고 흐르는 물이 시내에 울린다. 홀연히 옛날에 용이 누워 있던 곳인가 싶은데 와룡산이 바로 주산이다. 어린 소나무와 아름다운 대나무가 몇십 리의 산을 둘러 있는데, 무너지는 주추와 기울어진 기둥이 사람으로 하여금 황량한 누대의 탄식을 일으키게 한다. 또 말하기를 “수십 년 전에는 이 골짝 안 30리가 모두 한 아름 되는 큰 소나무들이었는데. 통영사또가 금하지 말라는 명령으로 인해 일곱 고을 나무꾼이 일시에 마구잡이로 베기를 매일 수천명씩 하니 십일도 안 되어 민둥산으로 변했습니다. 그 후로 중들고 점점 줄어들고 불당도 훼손되어 저절로 퇴락하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몇 해 전에 통영에 하소연을 해서 겨우 오늘의 모양을 이룬 것입니다.”라고 하면서 모두 한탄하니 나도 분함이 있어, 그 일로 시로 읊었다.
<운흥사 대웅전>
내 들으니 운흥사 삼한시대부터 복지로 소문나, 사방에 산이 둘러 30리 한 지역에 아름드리 소나무 울창하였네. 한 가지도 도끼와 자귀의 남벌을 막아 승려 많고 사찰 부유 이익 많았네. 아첨하는 사람의 요설 나무의 재앙 되어 추상같은 새 명령 대원수 같았네. 하루아침에 민둥산 불모지 되니 돌부처도 그 일에 눈물 흘릴 일. 오정장사의 신검은 어찌 탐욕의 머리 자르지 않는가? 또 행차하여 와룡동에 이르니 마을 백성들이 닭을 잡고 술과 과일을 마련하여 대접한다면서 길을 막고 기다리므로 내가 좋은 말로 타이르고 오방치를 넘어가니 길이 매우 가파르게 있었다.』 오횡묵이 관내순시를 하던 중 운흥사에 들른 사실을 적은 글이다. 여기서 눈여겨볼 대목이 있다. 운흥사가 오래된 사찰이라고 한 것이며 운흥사의 규모에 대해서도 서술하고 있다. 예전에 번성했던 절이 주변 소나무의 남벌로 쇠락해진 경위를 설명하고 있다. 통영의 사또란 필경 통제사일 것이다. 통제영의 통제사가 고성 군민에게 끼친 폐해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는 것을 이 기록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운흥사는 임진왜란과 관련이 아주 깊은 절이다. 승군장이었던 서산대사 휴정(1520∼1604)의 행정을 기록한 《청허당집》에 보면 고성과 관련한 시 한 편이 나온다. 한 소리는 구름 속 맑은 기러기 울음이요, 외로운 돛단배는 먼 길 가는 나그네의 배. 바다 빛은 하늘보다 푸른데, 짝지어 나는 하얀 갈매기. 유유히 흐르는 한 아득한 세월에, 성 밑의 물은 속절없이 흐르네. 누가 알리요, 지초 캐는 사람이 오늘 홀로 성루에 오른 줄을! -<등 철성성루유감 等 鐵城城樓有感>
<대웅전 경내>
이 시에는 고성이라는 말은 한마디도 없다. 바다를 나타내는 돛단배, 갈매기 그리고 성과 성루뿐이다. 단지 이의 제목이 고성의 옛 이름인 철성을 가리키고 있어 서산대사가 고성을 방문했다는 사실을 더듬어 볼 따름이다. 그러나 임진왜란 때 그 바쁜 서산대사가 남쪽 끄트머리 고성 바닷가에싸지 왜 왔을까. 승병들로 왜적과 맞서기 위함이었지 않았을까, 그렇다면 승병들의 집결지인 이곳 운흥사에까지 왔다고 봐야 한다. 또 이순신 장군이 전투의 작전회의를 위하여 세 차례나 운흥사를 방문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이런 까닭으로 인해 운흥사가 왜군에 의해 불타는 불운을 겪었는지 모를 일이다.
<운흥사 영산전>
와룡산이란 지명은 두 곳이다. 하나는 운흥사가 있는 고성 와룡산이고 하나는 사천에 있는 사천 와룡산이다. 고성 와룡산에 대한 옛 문헌에는 “군의서쪽 60리에 있으며 무이산으로부터 왓다. 고려 현종이 일찍이 이곳에서 글을 읽있다”고 기록해 놓았다. 이 기록에서 두 가지를 살펴보아야 한다. 그 하나는 사천 와룡산과 고성 와룡산은 서로 이웃하고 있는 산임에도 불구하고 그 시원은 확연히 구분이 된다. 고성 와룡산은 무이산에서 왔다고 했다. 무이산은 감치산에서 왔고 감치산은 무량산에서 왔으니 결국 고성 와룡산은 사천이 아닌 고성의 진산인 무량산에서 산줄긳사 뻗어온 것이다. 또 하나는 고려 현종이 이곳에 머물면서 글을 읽고 훗날 왕으로 등극했다고 했다. 무슨 사연이 있었을까? 이 이야기는 《철성지》와 《고성지》에 자세히 수록돼 있다. 찾아서 한번 읽어 보자. 『고려의 제8대 현종이었던 순이 이 산에서 우거하면서 글을 읽고 있었는데 그때에 마루 난간에 꽃뱀이 도사리고 있는 것을 보고 사아시란 시를 지었다. 그의 나이 6살이었다. 5살 때부터 하나를 가르치면 벌써 둘을 깨쳤다고 한다.』 「자그마한 뱀 새끼 약초 난간 휘감았는데, 온몸이 붉은 비단 같아 절로 아롱지네. 오래도록 수플 밑에 있으리라 말하지 말게나. 어느 날 용되는 것 어렵지 않다네」 자그마한 뱀 새끼는 현종 자기 자신을 가리킨다. 자신은 이 후미진 와룡산에서 평생을 보내지 않고 어린 뱀이 커서 언젠가 용이 되어 승천하듯이 자신도 왕이 될 것임을 암시하는 시다.
<운흥사 명부전>
이 시의 배경은 이렇다. 당초 고려 제5대왕 경종이 헌애왕후 소생인 송을 남겨두고 재위 6년(982)만에 죽자 두 왕후, 헌애와 헌정(그녀들은 자매지간이고 태조 왕건의 제7자 욱의 딸)은 청상과부의 몸이 된다. 헌애왕후는 아들 송이 있어 외로움을 모르나 헌정왕후는 슬하에 자식이 없어 외로운 몸이었다. 이에 헌정와후(황보 씨)가 사제에 나와 살았는데 한번은 꿈에 곡령에 올라가서 갑자기 소변이 마려워서 소변을 보았더니그 물줄기가 어찌나 거센지 온 나라 안이 바다를 이루었다. 점쟁이가 말하기를 “아들을 낳으면 왕이 되어 온 나라를 차지하겠다.” 하니 왕비가 말하기를 “내가 이미 과부가 되었는데 어떻게 아들을 낳는단 말인가?”하였다. 종실인 욱은 태조 왕건의 제8남인데 그의 집이 헌정왕후와 가까웠고 또한 그들은 숙질간으로 스스럼없이 자주 왕래를 하다 보니 어느덧 사통하여 임신이 되었다. 성종때 일어난 일이었다.
<운흥사>
하루는 그녀가 욱의 집에서 자고 있는데 욱의 처가 도저히 참을 수 없어 마당에 섶을 쌓아놓고 불을 질렀다. 백관들이 달려 나와 불을 껐고 성종도 달려 나와 불 끄기를 독려했다. 욱의 처가 성종에게 불을 낸 사유를 이실직고 하자 헌정왕후는 부끄럽고 후회스러워 집으로 바삐 돌아갔는데 겨우 문에 도착하자마자 태기가 있어 문 앞의 버드나무 가지를 붙잡고 몸을 풀고 죽으면서 유모를 정하여 길러 욱에게 보내라고 유언을 남기고 그녀는 세상을 뜬다. 훗날 이 아이가 현종이다. 아이 때 이름은 순이었다. 욱은 성종 11년(992) 종친의 법도를 지키지 못함을 힐책을 받아 사천군 와룡산으로 유배된다. 아이도 시모와 종자를 딸려서 와룡산의 욱에게로 돌려보내나 부자가 함께 살지 못하도록 하여 떨어져 살았다. 욱은 문장을 전공하여 압송한 내시 고현에게 지어 주기를 “그대와 같은 날 서울(개성)을 떠나왔는데, 그대는 돌아가고 나는 돌아가지 못하네. 나그네의 우리는 서럽게도 원숭이가 갇힌 듯하고, 석별의 정자에선 부럽게도 말이 나는 듯 하다. 제성의 봄빛은 혼백이 꿈과 어울리고, 해국의 풍광은 눈물 옷깃에 가득하네. 성주의 한 말씀 바꾸지는 않을 터이니, 마침내 낚시터에서 늙게는 하시려나”하였다. 또 욱은 지리에 공부가 깊어 일찍이 금 한 주머니를 아들 순에게 주면서 말하기를 “내가 죽으면 이 돈을 술사에게 주어 이 고을 성황당 남쪽 귀룡동에 나를 장사지내게 하되 반드시 엎어서 묻게 하라.”하였다. 마침 욱이 귀향지 배소에서 죽어 아들이 그 말과 같이 술사에게 말하여 엎어서 묻어달라고 청하니 술사가 말하기를 “어찌 그리도 바쁜고?” 하였는데, 과연 그 이듬해 2월에 순이 서울로 돌아가서 즉위하였다. 그가 현종이다. [출처] [고성여행]한국의 아름다운 장독대 <고성의 겉살과 속살을 찾아서/운흥사/대웅전/명부전/영산제/고성문화유산>|작성자 쇳디한국의 아름다운 장독대 달구벌 추천 0 조회 61 15.07.15 17:05 댓글 0 북마크번역하기 공유하기기능 더보기 SNS로 공유하기 펼쳐짐 현재페이지 URL복사 http://cafe.daum.net/suzhoukorean/HaG/1040?svc=cafeapiURL복사 공유목록 닫기 주소가 복사되었습니다. 원하는곳에 붙여넣기(Ctrl+V)해주세요. 공유목록 닫기 게시글 본문내용
한국의 아름다운 장독대
가장 한국적인 것을 꼽으라고 한다면 그중의 하나는 장독대가 아닐까. 우리네 식탁에서 빼놓을 수 없는 김치, 고추장, 된장, 간장, 젓갈 등 5대 밑반찬을 비롯한 갖가지 반찬을 저장했던 장독대는 분명 한국적이다.
<운흥사 장독대>
부엌과 가까운 곳에, 들고 나기 쉬운 곳에 크고 작은 항아리며 장독을 한곳에 모아둔 장독대는 우리 사회가 농경사회에서 산업사회로 바뀌기 이전에는 우리네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었던 것으로 지금도 농촌에는 장독대가 있어 목가적인 풍경을 연출한다. 장독대만 바라보아도 그 집의 가풍이나 성격을 손쉽게 파악할 수 있다. 손끝이 야물어 부지런하고 정갈한 여인네의 장독대는 언제나 닦고 닦아서 야들야들 번들번들 빛이 나고 윤이 나는 반면 몇 날 며칠을 닦지 않았는지 먼지가 부옇게 쌓여 덕지덕지 앉은 모습만 보아도 그 집 안주인이 게을받고(게으로고) 틀피짓(덜렁거리고 야물지 못함)을 하는지 단박에 그 집의 여인네의 성격을 알 수가 있는 것이 장독대이기도 하다. 가난하여 살림이 적은 집은 적은 대로, 살림이 넉넉한 집은 많은 대로 장독대를 꾸몄다. 담으로 둘러싼 담장 위를 짚을 엮어 얹거나 잘 사는 집에서는 장독대마저 기와를 얹기도 했다. 초가집은 초가집에 어울리레 장독대의 담장을 짚으로, 기와집은 기와집에 어울리도록 장독대의 담장을 기와로 꾸몄다. 이도저도 아닌 집은 그 지의 구조에 맞게 위치한 공간에다 장독대를 설치하여 아담하게 꾸미었다. 이처럼 장독대는 우리의 미의식이 독특하게 표출된 음식문화와 규방문화의 공간이었다.
<겨울 운흥사 장독대>
운흥사(고성군 하이면 와룡리 442번지)에 가면 눈을 사로잡는 아름다운 공간이 있다. 그것은 불상이나 탑이 아니다. 그것은 운흥사가 자랑하는 탱화도 아니다. 이 절의 불심이 뛰어나다는 주지 스림은 수행도량인 절도 아니다. 그것은 절 살림을 대변하는 듯한 조촐한 장독을 마치 꽃잎이 감싸고 있는 형상의 장독대이다. 장독대는 외부인의 눈에 쉽게 드러나지 않은 공간에 위치를 하나 이곳은 그렇지 않다. 산으로 둘러싸이다 보니 자연스럽게 햇볕이 잘 드러나는 공간이 필요했을 터. 지금 놓인 장독대의 위치가 바로 그곳이었을 것이다. 싼 담도 부드러운 곡선이다. 부처도 부드럽고 부처의 말씀 또한 부드럽다. 그중에서도 ‘자비’라는 말이 제일로 부드럽다. 장독대를 둘러싸고 있는 저 담장은 정녕 부드럽고 자비로운 부처의 말씀 그대로이다.
장독대를 가만히 쳐다보고 있노라면 어미닭이 알을 품고 있는 포근함이랄까, 햇볕이 그리운날의 따뜻한 햇볕 한 줌이랄까, 자식에게 음식 한 숟갈 더 넣어주고 싶은 지극한 모성애의 흐뭇함이랄까, 가을 김장철의 맛깔스런 양념 냄새랄까 하여튼 이런 묘한 느낌을 자아내게 한다. 저 장독대와 담장 위에 눈이라도 내려 쌓이면 얼마나 부드러울까. 부드러움이 만들어내는 아름다움이 정녕 이런 것일 줄이야 운흥사에 와서야 비로소 깨닫게 된다.
운흥사雲興寺 <운흥사 전경>
운흥사의 장독대가 아름답다면 운흥사 또한 그 이름 그대로 구름이 뭉개뭉개 피어남 직한 사찰이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절이 위치한 곳이 고성군 하이면 와룡리臥龍里이다. 와룡은 용이 잠자는 곳이니만큼 그곳에는 반드시 구름이 모여들 터. 절 가까운 곳에는 이 근방에서 제일로 높다는 와룡산(799m)도 있다. 그러니 운흥사란 이름을 지은 것인지도 모르겠다. 제갈공명의 별칭이기도 한 와룡은 그 이름부터가 예사롭지 않기에 운흥사 또한 예사롭지 않은 절임에 틀림없다.
<운흥사 영산제>
운흥사는 676년에 의상대사가 창건했다고 한다. 임진왜란 때 사명대사가 이곳에서 승병 6,000여 명을 거느리고 싸웠으며 그때 절이 소실되었다 한다. 그 이후 1651년(효종2년)에 김법성金法成이 중창을 했고, 1731년에 대웅전(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82호)을 중건했다. 특히 1730년에 리연理然 등이 괘불탱(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61호)을 제작하여 매년 음력 3월3일에 영산재를 지내고 있으며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고성 부사를 지낸 오횡묵吳宖黙(1834~?) [조선 말기 문신이며 학자로 본관은 해주이고 자는 성규聖圭이며, 호는 채원茝園이다. 19세기 말에 정선군수 자인현감 함안군수 고성부사 공상소감동工桑所監董 지도군수 및 여수군수 등을 두루 거쳤다. 그는 부임한 지방의 수령으로 있을 당시 자신의 시문은 물론 관청에서 중요하게 집행되었던 일과 내외에서 일어났던 중대한 일 등을 일기체로 엮어 놓았는데, 이것이 오늘날 귀중한 자료로 남겨져 전해지고 있는 것이 총쇄록이다. 그의 저서로느 《채원집》《정서총쇄록》《자인총쇄록》《함안총쇄록》《고성총쇄록》《지도총쇄록》《여재촬요》 등이 있다] 이 쓴《고성총쇄록》을 살펴보면 운흥사에 대한 기록이 몇 차례 언급이 되어 있다. 그 기록을 따라가보자.
<운흥사>
『불우 법천사法泉寺 는 고을 북쪽에 있다. 운흥사는 고을 서쪽에 있다. 내원사는 고을 서쪽에 있다. 안정사는 고을 동쪽에 있다. 문수사는 고을 서쪽에 있다. 장의암은 고을 동쪽에 있다. 용화사는 고을 남쪽에 있다.』 오횡묵 부사가 재직시에는 통영도 고성의 소관이었기에 용화사가 남쪽에 있다고 했다. 운흥사는 서쪽에 있는 사찰이고 당시에 법천사가 존재했는지 법천사는 북쪽에 있다고 했다. 지금은 법천사는 흔적이 없고 부도 몇 기만 남아 있을 뿐이다. 『와룡산 운흥사의 중 금영錦永과 取寬이 찾아와서 좌반佐飯 한 그릇을 드리고 이야기하기를 “본 사찰이 산중에 있지만 과연 오래된 사찰인데 근래에 이웃 마을 나무꾼이 함부로 폐단을 지어 하나하나 말할 수도 없습니다. 별다른 금령이 있은 연후에 보존할 수가 있습니다.”』 운흥사 주변 울창한 숲이 상당기간 남벌로 인하여 폐허화되고 있으므로 이를 금지해 줄 것을 사찰의 승려가 고성부사에게 호소하고 있는 상황을 적고 있다. 『9월10일… 새벽에 덕치를 출발해서 내원동, 석지, 와룡동을 지나 운흥사에 들어가니 여기사 바로 삼한의 옛 큰 절이다. 골 어귀에 헤월당의 비석이 있고 돌아서서 절로 들어갔다. 대웅전이 중앙에 있고 북쪽에는 시왕전이 있고 남쪽에는 나한전이 있고 서쪽에는 극락전이 있고 동쪽에는 칠성각, 천진암이 있고 동쪽 벼랑에는 일곱 기의 부도가 있는데, 응화, 홍찬, 포연, 경선, 기삼, 도현, 긍전 등이 그 승려들이다. 두루 도량을 관람하니 흰 구름이 골짝에 잠기고 흐르는 물이 시내에 울린다. 홀연히 옛날에 용이 누워 있던 곳인가 싶은데 와룡산이 바로 주산이다. 어린 소나무와 아름다운 대나무가 몇십 리의 산을 둘러 있는데, 무너지는 주추와 기울어진 기둥이 사람으로 하여금 황량한 누대의 탄식을 일으키게 한다. 또 말하기를 “수십 년 전에는 이 골짝 안 30리가 모두 한 아름 되는 큰 소나무들이었는데. 통영사또가 금하지 말라는 명령으로 인해 일곱 고을 나무꾼이 일시에 마구잡이로 베기를 매일 수천명씩 하니 십일도 안 되어 민둥산으로 변했습니다. 그 후로 중들고 점점 줄어들고 불당도 훼손되어 저절로 퇴락하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몇 해 전에 통영에 하소연을 해서 겨우 오늘의 모양을 이룬 것입니다.”라고 하면서 모두 한탄하니 나도 분함이 있어, 그 일로 시로 읊었다.
<운흥사 대웅전>
내 들으니 운흥사 삼한시대부터 복지로 소문나, 사방에 산이 둘러 30리 한 지역에 아름드리 소나무 울창하였네. 한 가지도 도끼와 자귀의 남벌을 막아 승려 많고 사찰 부유 이익 많았네. 아첨하는 사람의 요설 나무의 재앙 되어 추상같은 새 명령 대원수 같았네. 하루아침에 민둥산 불모지 되니 돌부처도 그 일에 눈물 흘릴 일. 오정장사의 신검은 어찌 탐욕의 머리 자르지 않는가? 또 행차하여 와룡동에 이르니 마을 백성들이 닭을 잡고 술과 과일을 마련하여 대접한다면서 길을 막고 기다리므로 내가 좋은 말로 타이르고 오방치를 넘어가니 길이 매우 가파르게 있었다.』 오횡묵이 관내순시를 하던 중 운흥사에 들른 사실을 적은 글이다. 여기서 눈여겨볼 대목이 있다. 운흥사가 오래된 사찰이라고 한 것이며 운흥사의 규모에 대해서도 서술하고 있다. 예전에 번성했던 절이 주변 소나무의 남벌로 쇠락해진 경위를 설명하고 있다. 통영의 사또란 필경 통제사일 것이다. 통제영의 통제사가 고성 군민에게 끼친 폐해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는 것을 이 기록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운흥사는 임진왜란과 관련이 아주 깊은 절이다. 승군장이었던 서산대사 휴정(1520∼1604)의 행정을 기록한 《청허당집》에 보면 고성과 관련한 시 한 편이 나온다. 한 소리는 구름 속 맑은 기러기 울음이요, 외로운 돛단배는 먼 길 가는 나그네의 배. 바다 빛은 하늘보다 푸른데, 짝지어 나는 하얀 갈매기. 유유히 흐르는 한 아득한 세월에, 성 밑의 물은 속절없이 흐르네. 누가 알리요, 지초 캐는 사람이 오늘 홀로 성루에 오른 줄을! -<등 철성성루유감 等 鐵城城樓有感>
<대웅전 경내>
이 시에는 고성이라는 말은 한마디도 없다. 바다를 나타내는 돛단배, 갈매기 그리고 성과 성루뿐이다. 단지 이의 제목이 고성의 옛 이름인 철성을 가리키고 있어 서산대사가 고성을 방문했다는 사실을 더듬어 볼 따름이다. 그러나 임진왜란 때 그 바쁜 서산대사가 남쪽 끄트머리 고성 바닷가에싸지 왜 왔을까. 승병들로 왜적과 맞서기 위함이었지 않았을까, 그렇다면 승병들의 집결지인 이곳 운흥사에까지 왔다고 봐야 한다. 또 이순신 장군이 전투의 작전회의를 위하여 세 차례나 운흥사를 방문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이런 까닭으로 인해 운흥사가 왜군에 의해 불타는 불운을 겪었는지 모를 일이다.
<운흥사 영산전>
와룡산이란 지명은 두 곳이다. 하나는 운흥사가 있는 고성 와룡산이고 하나는 사천에 있는 사천 와룡산이다. 고성 와룡산에 대한 옛 문헌에는 “군의서쪽 60리에 있으며 무이산으로부터 왓다. 고려 현종이 일찍이 이곳에서 글을 읽있다”고 기록해 놓았다. 이 기록에서 두 가지를 살펴보아야 한다. 그 하나는 사천 와룡산과 고성 와룡산은 서로 이웃하고 있는 산임에도 불구하고 그 시원은 확연히 구분이 된다. 고성 와룡산은 무이산에서 왔다고 했다. 무이산은 감치산에서 왔고 감치산은 무량산에서 왔으니 결국 고성 와룡산은 사천이 아닌 고성의 진산인 무량산에서 산줄긳사 뻗어온 것이다. 또 하나는 고려 현종이 이곳에 머물면서 글을 읽고 훗날 왕으로 등극했다고 했다. 무슨 사연이 있었을까? 이 이야기는 《철성지》와 《고성지》에 자세히 수록돼 있다. 찾아서 한번 읽어 보자. 『고려의 제8대 현종이었던 순이 이 산에서 우거하면서 글을 읽고 있었는데 그때에 마루 난간에 꽃뱀이 도사리고 있는 것을 보고 사아시란 시를 지었다. 그의 나이 6살이었다. 5살 때부터 하나를 가르치면 벌써 둘을 깨쳤다고 한다.』 「자그마한 뱀 새끼 약초 난간 휘감았는데, 온몸이 붉은 비단 같아 절로 아롱지네. 오래도록 수플 밑에 있으리라 말하지 말게나. 어느 날 용되는 것 어렵지 않다네」 자그마한 뱀 새끼는 현종 자기 자신을 가리킨다. 자신은 이 후미진 와룡산에서 평생을 보내지 않고 어린 뱀이 커서 언젠가 용이 되어 승천하듯이 자신도 왕이 될 것임을 암시하는 시다.
<운흥사 명부전>
이 시의 배경은 이렇다. 당초 고려 제5대왕 경종이 헌애왕후 소생인 송을 남겨두고 재위 6년(982)만에 죽자 두 왕후, 헌애와 헌정(그녀들은 자매지간이고 태조 왕건의 제7자 욱의 딸)은 청상과부의 몸이 된다. 헌애왕후는 아들 송이 있어 외로움을 모르나 헌정왕후는 슬하에 자식이 없어 외로운 몸이었다. 이에 헌정와후(황보 씨)가 사제에 나와 살았는데 한번은 꿈에 곡령에 올라가서 갑자기 소변이 마려워서 소변을 보았더니그 물줄기가 어찌나 거센지 온 나라 안이 바다를 이루었다. 점쟁이가 말하기를 “아들을 낳으면 왕이 되어 온 나라를 차지하겠다.” 하니 왕비가 말하기를 “내가 이미 과부가 되었는데 어떻게 아들을 낳는단 말인가?”하였다. 종실인 욱은 태조 왕건의 제8남인데 그의 집이 헌정왕후와 가까웠고 또한 그들은 숙질간으로 스스럼없이 자주 왕래를 하다 보니 어느덧 사통하여 임신이 되었다. 성종때 일어난 일이었다.
<운흥사>
하루는 그녀가 욱의 집에서 자고 있는데 욱의 처가 도저히 참을 수 없어 마당에 섶을 쌓아놓고 불을 질렀다. 백관들이 달려 나와 불을 껐고 성종도 달려 나와 불 끄기를 독려했다. 욱의 처가 성종에게 불을 낸 사유를 이실직고 하자 헌정왕후는 부끄럽고 후회스러워 집으로 바삐 돌아갔는데 겨우 문에 도착하자마자 태기가 있어 문 앞의 버드나무 가지를 붙잡고 몸을 풀고 죽으면서 유모를 정하여 길러 욱에게 보내라고 유언을 남기고 그녀는 세상을 뜬다. 훗날 이 아이가 현종이다. 아이 때 이름은 순이었다. 욱은 성종 11년(992) 종친의 법도를 지키지 못함을 힐책을 받아 사천군 와룡산으로 유배된다. 아이도 시모와 종자를 딸려서 와룡산의 욱에게로 돌려보내나 부자가 함께 살지 못하도록 하여 떨어져 살았다. 욱은 문장을 전공하여 압송한 내시 고현에게 지어 주기를 “그대와 같은 날 서울(개성)을 떠나왔는데, 그대는 돌아가고 나는 돌아가지 못하네. 나그네의 우리는 서럽게도 원숭이가 갇힌 듯하고, 석별의 정자에선 부럽게도 말이 나는 듯 하다. 제성의 봄빛은 혼백이 꿈과 어울리고, 해국의 풍광은 눈물 옷깃에 가득하네. 성주의 한 말씀 바꾸지는 않을 터이니, 마침내 낚시터에서 늙게는 하시려나”하였다. 또 욱은 지리에 공부가 깊어 일찍이 금 한 주머니를 아들 순에게 주면서 말하기를 “내가 죽으면 이 돈을 술사에게 주어 이 고을 성황당 남쪽 귀룡동에 나를 장사지내게 하되 반드시 엎어서 묻게 하라.”하였다. 마침 욱이 귀향지 배소에서 죽어 아들이 그 말과 같이 술사에게 말하여 엎어서 묻어달라고 청하니 술사가 말하기를 “어찌 그리도 바쁜고?” 하였는데, 과연 그 이듬해 2월에 순이 서울로 돌아가서 즉위하였다. 그가 현종이다. [출처] [고성여행]한국의 아름다운 장독대 <고성의 겉살과 속살을 찾아서/운흥사/대웅전/명부전/영산제/고성문화유산>|작성자 쇳디한국의 아름다운 장독대 달구벌 추천 0 조회 61 15.07.15 17:05 댓글 0 북마크번역하기 공유하기기능 더보기 SNS로 공유하기 펼쳐짐 현재페이지 URL복사 http://cafe.daum.net/suzhoukorean/HaG/1040?svc=cafeapiURL복사 공유목록 닫기 주소가 복사되었습니다. 원하는곳에 붙여넣기(Ctrl+V)해주세요. 공유목록 닫기 게시글 본문내용
한국의 아름다운 장독대
가장 한국적인 것을 꼽으라고 한다면 그중의 하나는 장독대가 아닐까. 우리네 식탁에서 빼놓을 수 없는 김치, 고추장, 된장, 간장, 젓갈 등 5대 밑반찬을 비롯한 갖가지 반찬을 저장했던 장독대는 분명 한국적이다.
<운흥사 장독대>
부엌과 가까운 곳에, 들고 나기 쉬운 곳에 크고 작은 항아리며 장독을 한곳에 모아둔 장독대는 우리 사회가 농경사회에서 산업사회로 바뀌기 이전에는 우리네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었던 것으로 지금도 농촌에는 장독대가 있어 목가적인 풍경을 연출한다. 장독대만 바라보아도 그 집의 가풍이나 성격을 손쉽게 파악할 수 있다. 손끝이 야물어 부지런하고 정갈한 여인네의 장독대는 언제나 닦고 닦아서 야들야들 번들번들 빛이 나고 윤이 나는 반면 몇 날 며칠을 닦지 않았는지 먼지가 부옇게 쌓여 덕지덕지 앉은 모습만 보아도 그 집 안주인이 게을받고(게으로고) 틀피짓(덜렁거리고 야물지 못함)을 하는지 단박에 그 집의 여인네의 성격을 알 수가 있는 것이 장독대이기도 하다. 가난하여 살림이 적은 집은 적은 대로, 살림이 넉넉한 집은 많은 대로 장독대를 꾸몄다. 담으로 둘러싼 담장 위를 짚을 엮어 얹거나 잘 사는 집에서는 장독대마저 기와를 얹기도 했다. 초가집은 초가집에 어울리레 장독대의 담장을 짚으로, 기와집은 기와집에 어울리도록 장독대의 담장을 기와로 꾸몄다. 이도저도 아닌 집은 그 지의 구조에 맞게 위치한 공간에다 장독대를 설치하여 아담하게 꾸미었다. 이처럼 장독대는 우리의 미의식이 독특하게 표출된 음식문화와 규방문화의 공간이었다.
<겨울 운흥사 장독대>
운흥사(고성군 하이면 와룡리 442번지)에 가면 눈을 사로잡는 아름다운 공간이 있다. 그것은 불상이나 탑이 아니다. 그것은 운흥사가 자랑하는 탱화도 아니다. 이 절의 불심이 뛰어나다는 주지 스림은 수행도량인 절도 아니다. 그것은 절 살림을 대변하는 듯한 조촐한 장독을 마치 꽃잎이 감싸고 있는 형상의 장독대이다. 장독대는 외부인의 눈에 쉽게 드러나지 않은 공간에 위치를 하나 이곳은 그렇지 않다. 산으로 둘러싸이다 보니 자연스럽게 햇볕이 잘 드러나는 공간이 필요했을 터. 지금 놓인 장독대의 위치가 바로 그곳이었을 것이다. 싼 담도 부드러운 곡선이다. 부처도 부드럽고 부처의 말씀 또한 부드럽다. 그중에서도 ‘자비’라는 말이 제일로 부드럽다. 장독대를 둘러싸고 있는 저 담장은 정녕 부드럽고 자비로운 부처의 말씀 그대로이다.
장독대를 가만히 쳐다보고 있노라면 어미닭이 알을 품고 있는 포근함이랄까, 햇볕이 그리운날의 따뜻한 햇볕 한 줌이랄까, 자식에게 음식 한 숟갈 더 넣어주고 싶은 지극한 모성애의 흐뭇함이랄까, 가을 김장철의 맛깔스런 양념 냄새랄까 하여튼 이런 묘한 느낌을 자아내게 한다. 저 장독대와 담장 위에 눈이라도 내려 쌓이면 얼마나 부드러울까. 부드러움이 만들어내는 아름다움이 정녕 이런 것일 줄이야 운흥사에 와서야 비로소 깨닫게 된다.
운흥사雲興寺 <운흥사 전경>
운흥사의 장독대가 아름답다면 운흥사 또한 그 이름 그대로 구름이 뭉개뭉개 피어남 직한 사찰이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절이 위치한 곳이 고성군 하이면 와룡리臥龍里이다. 와룡은 용이 잠자는 곳이니만큼 그곳에는 반드시 구름이 모여들 터. 절 가까운 곳에는 이 근방에서 제일로 높다는 와룡산(799m)도 있다. 그러니 운흥사란 이름을 지은 것인지도 모르겠다. 제갈공명의 별칭이기도 한 와룡은 그 이름부터가 예사롭지 않기에 운흥사 또한 예사롭지 않은 절임에 틀림없다.
<운흥사 영산제>
운흥사는 676년에 의상대사가 창건했다고 한다. 임진왜란 때 사명대사가 이곳에서 승병 6,000여 명을 거느리고 싸웠으며 그때 절이 소실되었다 한다. 그 이후 1651년(효종2년)에 김법성金法成이 중창을 했고, 1731년에 대웅전(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82호)을 중건했다. 특히 1730년에 리연理然 등이 괘불탱(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61호)을 제작하여 매년 음력 3월3일에 영산재를 지내고 있으며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고성 부사를 지낸 오횡묵吳宖黙(1834~?) [조선 말기 문신이며 학자로 본관은 해주이고 자는 성규聖圭이며, 호는 채원茝園이다. 19세기 말에 정선군수 자인현감 함안군수 고성부사 공상소감동工桑所監董 지도군수 및 여수군수 등을 두루 거쳤다. 그는 부임한 지방의 수령으로 있을 당시 자신의 시문은 물론 관청에서 중요하게 집행되었던 일과 내외에서 일어났던 중대한 일 등을 일기체로 엮어 놓았는데, 이것이 오늘날 귀중한 자료로 남겨져 전해지고 있는 것이 총쇄록이다. 그의 저서로느 《채원집》《정서총쇄록》《자인총쇄록》《함안총쇄록》《고성총쇄록》《지도총쇄록》《여재촬요》 등이 있다] 이 쓴《고성총쇄록》을 살펴보면 운흥사에 대한 기록이 몇 차례 언급이 되어 있다. 그 기록을 따라가보자.
<운흥사>
『불우 법천사法泉寺 는 고을 북쪽에 있다. 운흥사는 고을 서쪽에 있다. 내원사는 고을 서쪽에 있다. 안정사는 고을 동쪽에 있다. 문수사는 고을 서쪽에 있다. 장의암은 고을 동쪽에 있다. 용화사는 고을 남쪽에 있다.』 오횡묵 부사가 재직시에는 통영도 고성의 소관이었기에 용화사가 남쪽에 있다고 했다. 운흥사는 서쪽에 있는 사찰이고 당시에 법천사가 존재했는지 법천사는 북쪽에 있다고 했다. 지금은 법천사는 흔적이 없고 부도 몇 기만 남아 있을 뿐이다. 『와룡산 운흥사의 중 금영錦永과 取寬이 찾아와서 좌반佐飯 한 그릇을 드리고 이야기하기를 “본 사찰이 산중에 있지만 과연 오래된 사찰인데 근래에 이웃 마을 나무꾼이 함부로 폐단을 지어 하나하나 말할 수도 없습니다. 별다른 금령이 있은 연후에 보존할 수가 있습니다.”』 운흥사 주변 울창한 숲이 상당기간 남벌로 인하여 폐허화되고 있으므로 이를 금지해 줄 것을 사찰의 승려가 고성부사에게 호소하고 있는 상황을 적고 있다. 『9월10일… 새벽에 덕치를 출발해서 내원동, 석지, 와룡동을 지나 운흥사에 들어가니 여기사 바로 삼한의 옛 큰 절이다. 골 어귀에 헤월당의 비석이 있고 돌아서서 절로 들어갔다. 대웅전이 중앙에 있고 북쪽에는 시왕전이 있고 남쪽에는 나한전이 있고 서쪽에는 극락전이 있고 동쪽에는 칠성각, 천진암이 있고 동쪽 벼랑에는 일곱 기의 부도가 있는데, 응화, 홍찬, 포연, 경선, 기삼, 도현, 긍전 등이 그 승려들이다. 두루 도량을 관람하니 흰 구름이 골짝에 잠기고 흐르는 물이 시내에 울린다. 홀연히 옛날에 용이 누워 있던 곳인가 싶은데 와룡산이 바로 주산이다. 어린 소나무와 아름다운 대나무가 몇십 리의 산을 둘러 있는데, 무너지는 주추와 기울어진 기둥이 사람으로 하여금 황량한 누대의 탄식을 일으키게 한다. 또 말하기를 “수십 년 전에는 이 골짝 안 30리가 모두 한 아름 되는 큰 소나무들이었는데. 통영사또가 금하지 말라는 명령으로 인해 일곱 고을 나무꾼이 일시에 마구잡이로 베기를 매일 수천명씩 하니 십일도 안 되어 민둥산으로 변했습니다. 그 후로 중들고 점점 줄어들고 불당도 훼손되어 저절로 퇴락하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몇 해 전에 통영에 하소연을 해서 겨우 오늘의 모양을 이룬 것입니다.”라고 하면서 모두 한탄하니 나도 분함이 있어, 그 일로 시로 읊었다.
<운흥사 대웅전>
내 들으니 운흥사 삼한시대부터 복지로 소문나, 사방에 산이 둘러 30리 한 지역에 아름드리 소나무 울창하였네. 한 가지도 도끼와 자귀의 남벌을 막아 승려 많고 사찰 부유 이익 많았네. 아첨하는 사람의 요설 나무의 재앙 되어 추상같은 새 명령 대원수 같았네. 하루아침에 민둥산 불모지 되니 돌부처도 그 일에 눈물 흘릴 일. 오정장사의 신검은 어찌 탐욕의 머리 자르지 않는가? 또 행차하여 와룡동에 이르니 마을 백성들이 닭을 잡고 술과 과일을 마련하여 대접한다면서 길을 막고 기다리므로 내가 좋은 말로 타이르고 오방치를 넘어가니 길이 매우 가파르게 있었다.』 오횡묵이 관내순시를 하던 중 운흥사에 들른 사실을 적은 글이다. 여기서 눈여겨볼 대목이 있다. 운흥사가 오래된 사찰이라고 한 것이며 운흥사의 규모에 대해서도 서술하고 있다. 예전에 번성했던 절이 주변 소나무의 남벌로 쇠락해진 경위를 설명하고 있다. 통영의 사또란 필경 통제사일 것이다. 통제영의 통제사가 고성 군민에게 끼친 폐해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는 것을 이 기록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운흥사는 임진왜란과 관련이 아주 깊은 절이다. 승군장이었던 서산대사 휴정(1520∼1604)의 행정을 기록한 《청허당집》에 보면 고성과 관련한 시 한 편이 나온다. 한 소리는 구름 속 맑은 기러기 울음이요, 외로운 돛단배는 먼 길 가는 나그네의 배. 바다 빛은 하늘보다 푸른데, 짝지어 나는 하얀 갈매기. 유유히 흐르는 한 아득한 세월에, 성 밑의 물은 속절없이 흐르네. 누가 알리요, 지초 캐는 사람이 오늘 홀로 성루에 오른 줄을! -<등 철성성루유감 等 鐵城城樓有感>
<대웅전 경내>
이 시에는 고성이라는 말은 한마디도 없다. 바다를 나타내는 돛단배, 갈매기 그리고 성과 성루뿐이다. 단지 이의 제목이 고성의 옛 이름인 철성을 가리키고 있어 서산대사가 고성을 방문했다는 사실을 더듬어 볼 따름이다. 그러나 임진왜란 때 그 바쁜 서산대사가 남쪽 끄트머리 고성 바닷가에싸지 왜 왔을까. 승병들로 왜적과 맞서기 위함이었지 않았을까, 그렇다면 승병들의 집결지인 이곳 운흥사에까지 왔다고 봐야 한다. 또 이순신 장군이 전투의 작전회의를 위하여 세 차례나 운흥사를 방문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이런 까닭으로 인해 운흥사가 왜군에 의해 불타는 불운을 겪었는지 모를 일이다.
<운흥사 영산전>
와룡산이란 지명은 두 곳이다. 하나는 운흥사가 있는 고성 와룡산이고 하나는 사천에 있는 사천 와룡산이다. 고성 와룡산에 대한 옛 문헌에는 “군의서쪽 60리에 있으며 무이산으로부터 왓다. 고려 현종이 일찍이 이곳에서 글을 읽있다”고 기록해 놓았다. 이 기록에서 두 가지를 살펴보아야 한다. 그 하나는 사천 와룡산과 고성 와룡산은 서로 이웃하고 있는 산임에도 불구하고 그 시원은 확연히 구분이 된다. 고성 와룡산은 무이산에서 왔다고 했다. 무이산은 감치산에서 왔고 감치산은 무량산에서 왔으니 결국 고성 와룡산은 사천이 아닌 고성의 진산인 무량산에서 산줄긳사 뻗어온 것이다. 또 하나는 고려 현종이 이곳에 머물면서 글을 읽고 훗날 왕으로 등극했다고 했다. 무슨 사연이 있었을까? 이 이야기는 《철성지》와 《고성지》에 자세히 수록돼 있다. 찾아서 한번 읽어 보자. 『고려의 제8대 현종이었던 순이 이 산에서 우거하면서 글을 읽고 있었는데 그때에 마루 난간에 꽃뱀이 도사리고 있는 것을 보고 사아시란 시를 지었다. 그의 나이 6살이었다. 5살 때부터 하나를 가르치면 벌써 둘을 깨쳤다고 한다.』 「자그마한 뱀 새끼 약초 난간 휘감았는데, 온몸이 붉은 비단 같아 절로 아롱지네. 오래도록 수플 밑에 있으리라 말하지 말게나. 어느 날 용되는 것 어렵지 않다네」 자그마한 뱀 새끼는 현종 자기 자신을 가리킨다. 자신은 이 후미진 와룡산에서 평생을 보내지 않고 어린 뱀이 커서 언젠가 용이 되어 승천하듯이 자신도 왕이 될 것임을 암시하는 시다.
<운흥사 명부전>
이 시의 배경은 이렇다. 당초 고려 제5대왕 경종이 헌애왕후 소생인 송을 남겨두고 재위 6년(982)만에 죽자 두 왕후, 헌애와 헌정(그녀들은 자매지간이고 태조 왕건의 제7자 욱의 딸)은 청상과부의 몸이 된다. 헌애왕후는 아들 송이 있어 외로움을 모르나 헌정왕후는 슬하에 자식이 없어 외로운 몸이었다. 이에 헌정와후(황보 씨)가 사제에 나와 살았는데 한번은 꿈에 곡령에 올라가서 갑자기 소변이 마려워서 소변을 보았더니그 물줄기가 어찌나 거센지 온 나라 안이 바다를 이루었다. 점쟁이가 말하기를 “아들을 낳으면 왕이 되어 온 나라를 차지하겠다.” 하니 왕비가 말하기를 “내가 이미 과부가 되었는데 어떻게 아들을 낳는단 말인가?”하였다. 종실인 욱은 태조 왕건의 제8남인데 그의 집이 헌정왕후와 가까웠고 또한 그들은 숙질간으로 스스럼없이 자주 왕래를 하다 보니 어느덧 사통하여 임신이 되었다. 성종때 일어난 일이었다.
<운흥사>
하루는 그녀가 욱의 집에서 자고 있는데 욱의 처가 도저히 참을 수 없어 마당에 섶을 쌓아놓고 불을 질렀다. 백관들이 달려 나와 불을 껐고 성종도 달려 나와 불 끄기를 독려했다. 욱의 처가 성종에게 불을 낸 사유를 이실직고 하자 헌정왕후는 부끄럽고 후회스러워 집으로 바삐 돌아갔는데 겨우 문에 도착하자마자 태기가 있어 문 앞의 버드나무 가지를 붙잡고 몸을 풀고 죽으면서 유모를 정하여 길러 욱에게 보내라고 유언을 남기고 그녀는 세상을 뜬다. 훗날 이 아이가 현종이다. 아이 때 이름은 순이었다. 욱은 성종 11년(992) 종친의 법도를 지키지 못함을 힐책을 받아 사천군 와룡산으로 유배된다. 아이도 시모와 종자를 딸려서 와룡산의 욱에게로 돌려보내나 부자가 함께 살지 못하도록 하여 떨어져 살았다. 욱은 문장을 전공하여 압송한 내시 고현에게 지어 주기를 “그대와 같은 날 서울(개성)을 떠나왔는데, 그대는 돌아가고 나는 돌아가지 못하네. 나그네의 우리는 서럽게도 원숭이가 갇힌 듯하고, 석별의 정자에선 부럽게도 말이 나는 듯 하다. 제성의 봄빛은 혼백이 꿈과 어울리고, 해국의 풍광은 눈물 옷깃에 가득하네. 성주의 한 말씀 바꾸지는 않을 터이니, 마침내 낚시터에서 늙게는 하시려나”하였다. 또 욱은 지리에 공부가 깊어 일찍이 금 한 주머니를 아들 순에게 주면서 말하기를 “내가 죽으면 이 돈을 술사에게 주어 이 고을 성황당 남쪽 귀룡동에 나를 장사지내게 하되 반드시 엎어서 묻게 하라.”하였다. 마침 욱이 귀향지 배소에서 죽어 아들이 그 말과 같이 술사에게 말하여 엎어서 묻어달라고 청하니 술사가 말하기를 “어찌 그리도 바쁜고?” 하였는데, 과연 그 이듬해 2월에 순이 서울로 돌아가서 즉위하였다. 그가 현종이다. [출처] [고성여행]한국의 아름다운 장독대 <고성의 겉살과 속살을 찾아서/운흥사/대웅전/명부전/영산제/고성문화유산>|작성자 쇳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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