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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순광업소직원등 합세 폭약조립.운반
8t 트럭 한대분 광주 시위대에 인계 계엄군 공격용 단한번도 사용안해
도청지하실에 다이너마이트 설치... 만일사태 대비 목사.신부들 직접 지켜
54시위확산 <1>화순 하
다이너마이트.
가공할만한 살상능력을 지닌 다이너마이트를 입수한 시위대는 환호한다. 다이너마이트를 처음 본 순간 광주에서 쓰러져가는 형제들을 어느 정도라도 구할수 있는 방패를 만났다는 생각을 했다. 다이너마이트를 효율적으로 활용한다면 광란상태에 빠져 있는 계엄군들과의 거리를 최소한이나마 유지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한 것이다.
다이너마이트는 계엄군을 가까이 오지못하게 하는 수단이었을뿐 공격용 무기는 아니었다. 5.18기간동안 엄청난양의 다이너마이트가 유출됐지만 계엄군 공격을 위해 사용된 적이 단 한번도 없었다는 사실이 이를 증명한다. 이성전씨등은 다이너마이트를 손에 넣으면서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고 증언한다.
다이너마이트가 시위대에게 전달되던 21일 밤 9시께 시위차량에 타고 있던사람들은 이성전씨와 당시 호남탄좌 화순광업소에 근무하고 있던 김영봉씨등 모두 13명. 이들은 곧바로 신운마을 인근 가정집으로 들어가 다이너마이트 결합작업에 들어간다. 이 다이너마이트가 계엄군들의 광기에 위협받고있는 광주 시민들을 구한다는 일념하나로 13명 모두가 숨을 죽인다. 김영봉씨의 주도 아래 뇌관과떡밥을 연결하고 20-30cm길이로 자른 도화선을 연결한다.
함께 작업에 참여했던 오동찬씨의 증언. 그전에도 다이너마이트를 많이 만져 봤지만 그것이 우리를 지켜주는 자위무기가 되리라고는 상상을 못했다. 2시간이 넘는 힘든 작업이었지만 불평한마디 없었다.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 담뱃불 하나도 조심하여 심혈을 기울였다. 비록 다이너마이트로 무기를 만들고 있지만 제발 이것이 사용되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이 간절했다. 다이너마이트 조립작업을 마친 시위대는 또다시 무기를 구하러 화순일대를 돌지만 이미 모든 무기는 치워진 상태. 차에 싣고 있던 다이너마이트가 터질까봐 숨소리까지 죽이면서 이동을 한다.
무기확보에 실패한 이씨등은 조립된 다이너마이트를 싣고 광주로 향한다. 조심스럽게 광주 동구 지원동에 도착한 시각은 22일 아침 7시. 때마침 지역 방위작업을 벌이고 있던 시민구 지원동팀에게 다이너마이트를 전달한다. (이씨가 조립해 전달한 다이너마이트에 대해 당시 도청을 지키고 있었던 증인들은 전달받은 사실이 없다고 증언하고 있다. 이와관련 일부에서는 1백여발의 다이너마이트가 도청이 아닌 제3의 장소에서 자위무기로 사용된뒤 만일의 사고를 우려한 시민 누군가에 의해 안전한상태로 분해,매장되거나 폐기처리된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
가정집서 조립작업
이성전씨등이 심혈을 기울여 다이너마이트를 조립하고 있던 시각 전남도청에서도 다이너마이트 조립작업이 진행된다. 이날밤 전남 도청 지하실로 옮겨진 다이너마이트는 무려 8t트럭 1대분. 전남도청은 무로 광주시내 중심가를 쑥대밭으로 만들수 있는 엄청난 양이다. 다이너마이트의 출처는 역시 화순.이날 오후 3시께 무기를 구하기 위해 화순 광업소에 들렀던 시위대가 입수한것이다.
화순 광업소 다이너마이트 유출작업에 참여했던 신만식씨(당시 24.방위병신분으로 시위참여)는 엄청난 양에 자신 스스로도 놀랐다고 증언한다. 시위차량을 타고 화순 광업소에 가니까 때마침 다이너마이트를 옮기고 있었다. 아마연락을 받고 어딘가 숨기려고 나서던 참이었던것 같다. 차에서 내린 시위대들이 다이너마이트 운반차량을 둘러싸고 인계를 요구했다. 분위기가 험악해서인지 직원들은 아무런 저하없이 다이너마이트를 내주었다. 잔지 제발 불만 지르지 말라고 사정했다.
뇌관과 떡밥,도화선등을 8t트럭 7대에 나눠싣고 인근 714대대로 향했다. 또다른 무기를 구하기 위해서였다. 인근 714부대에서 무기를 구하는데 실패한 시위차량은 곧바로 광주로 향한다. 때마침 진주하고 있던 계엄군의 철수로 시민들이 도청을 장악했다는 소식이 전해진다. 도청으로 가자 . 그러나 시위대의 걱정은 너릿재. 만에 하나 다이너마이트를 싣고 있던 차량에 총격이 가해지는 날이면 상상할수 없는 참변이 발생할것 은 뻔한 상황. 차에 타고 있던 시위대 모두 의 목숨이 달린 문제 였으나 광주로 이동하는 차량탑승을 포기하는 사람은 나타나지 않는다.
다행히 계엄군의 적극적인 저지가 없어 지원동에서 펑크가 난 1대를 제외한 차량 6대가 전남도청에 도착한다. 전남도청이 순간적으로 술렁인다. 계엄군의 접근을 막기 위한 자위무기를 구하긴 했지만 관리를 잘못할 경우 오히려 시민들에게 피해를 줄수 있다는 우려가 함께 제기된다. 신만식씨의 증언 일단 도청식당에 다이너마이트를 내려 놓았으나 걱정이 앞섰다. 다이너마이트 운반작업에 참여했던 사람들을 다시 소집했다. 목숨을 걸고 이 다이너마이트를 지켜야 한다.
다이너마이트를 지키지 못한다면 우리는 역사의 죄인이 될 수 밖에 없다. 모두의 결의는 확고했다. 대부분은 도청이 함락되던 27일까지 다이너마이트곁을 떠나지 않았다. 화순광업소에서 엄청난 양의 다이너마이트가 유출됐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계엄사는 광주.전남지역에 보관된 다이너마이트 회수작업에 나선다. 오후 4시 30분께 계엄군은 광주지역에 보관돼 있던 화약 2천 6백 49 상자와 뇌괸 3백 55개 ,도화선 4천 6백 m를 광주 외곽으로 옮긴다.
이시각 광주시 동구 지원동 석산작업장에서도 다이너마이트 4상자와 뇌관 1백개가 시민군에게 유출된다. 한편 전남도청 식당에 내려진 다이너마이트는 안전사고 등을 우려해 또다시 도청지하실로 옮겨진다. 시민군은 또 차량고장으로 인해 지원동에 두고 온 다이너마이트 운반작업에 착수 이날 밤 9시께 모든 이동작업을 마친다. 다음 문제는 다이너마이트 조립작업.가공할 분량의 다이너마이트와 뇌관,도화선을 연결하는 작업이 시작된다. 도화선은 길게 연결 도청을 둘러싸고 있는 담장에 설치한다. 만약 계엄군이 무리하게 도청진입을 시도할 경우 함께 죽을 수 밖에 없다는 결의가 함께한다.
다시 신만식씨의 증언
떡밥과 뇌관 결합작업을 벌인것은 사실이지만 도화선을 연결하진 않았다. 형식적으로 다이너마이트 인근에 연결된 것처럼 보이게 해뒀을 뿐이다. 만약 담뱃불이라도 떨어지는 날이면 광주시내가 온통 불바다가 될게 뻔한데 그런 위험한 일은 할수가 없었다. 애초부터 다이너마이트는 위협용이었지 사용돼서는 안된다는 사실을 시민군 모두가 잘 알고 있었다.
전남도청과 다이너마이트.
도청 지하실에 보관된 다이너마이트는 시민군의 당초 의도대로 계엄군의 진입을 저지하는 자위무기로 훌륭하게 제 역할을 수행해낸다. 그러나 무제는 앞으로 며칠이 걸릴지 모르는 다이너마이트 관리작업. 일부시민군과 학생수습위원들을 중심으로 진행되던 관리작업에 당시 수습작업에 참여했던 성직자들도 함께 참여한다.
군탄약처리반 잠입
김성용신부의 회고
25일 6시께라고 기억한다. 학생회장이 피곤한 얼굴로 들어와 광주시내를 불바다로 만들수 있는 다이너마이트를 어른들이 지켜달라고 부탁했다. 결국 목사와 신부가 신뢰할 수 있는 사람들을 데리고 와서 지키기로 했다. 김신부 등 성직자들은 25일 밤 10시께 각자 자신들의 성당과 교회로 돌아가 청년들을 데리고 도청으로 다시모인다.
이때 모인 인원은 모두 13명. 시민 모두가 다이너마이트의 안전을 걱정하고 있을때 다이너마이트를 무력화시키기위한 신군부의 작업 또한 집요하게 진행된다. 25일 오후 2시 30분 26일 반 9시께 도청지하실에는 계엄사에 파견한 탄약처리반이 은밀히 진입,이들 무기들의 분해 작업에 나선다.
(이부분에 대해서는 목격자들마다 상황을 달리 증언하고 있다. 또한 목격자들에 따라 탄약검사반투입경위에 대해 의견대립을 보이고 있다. 자세한 상황은 25일 상황에서 소개한다.)
화순광업소에서 유출돼 7일동안 광주 시민들의 수문장 역할을 해낸 다이너마이트는 27일 새벽 그대로 계엄군의 손에 넘겨진다. 계엄군 진입시 다이너마이트를 폭발시켜야한다는 일부주장이 제기됐지만 실행에 옮겨지지는 않는다. 다이너마이트. 부모형제를 지키기 위한 시민군의 의지와 그 아수라장에서도 이성을 잃지 않으려 했던 광주 시민들의 모습을 간접적으로 보여주는 상징물로 남아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