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논고> 남해양아리석각의 성좌도 확인 분석
〈소개〉
공신력의 이해 해독이 없는 남해양아리석각에 대한 저명 학자와 강호제현의 학설, 주장, 의견 등은 고대문자설에 착안한 연구가 대부분이고 지배적이다. 그밖에 많은 석각화설이 있으나 가장 유력한 설은 추론의 서불과차(徐市過此)설이다. 이는 석각 전체의 구도와 성좌에 착안하지 못했음은 물론 선각 중심 고대문자 해독의 큰 오류였다.
고대의 어떤 문자 또는 제학설과 관련이 없는 남해양아리석각은 북극성을 축으로 구도, 배열, 크기 및 천체의 자오선과 암각의 경사면 방향이 천문도의 약 ¼에 해당하는 성좌도이다.
암각 왼쪽 아래에는 하늘을 뜻하는 ‘천(天)’자가 새겨져 있고 페가수스자리 위쪽에는 마멸이 심한 성좌도 의미의 각자(刻字) ‘古旨九月十日九月十八日吉辰 金玟成公圖 崔金○石匠手’가 있으며 가을하늘의 별자리인 조랑말자리, 작은곰자리, 세페우스자리, 카시오페이아자리, 백조자리, 도마뱀자리, 페르세우스자리, 안드로메다자리, 삼각형자리, 페가수스자리, 돌고래자리와 일부 성좌의 염소자리, 마차부자리, 양자리, 황소자리, 물고기자리, 현미경자리, 물병자리가 선각되어 있어 우리나라 가을하늘 전면의 성좌도임을 알 수 있다.
Ⅰ. 들머리
경상남도 남해군 상주면 양아리에서 상주해수욕장으로 가는 도로 중간쯤에 금산을 오르는 등산로가 있다. 이 등산로를 따라 25분쯤 걸어 산 중턱쯤(양아리 산4-3번지)에 이르면 목조계단 바른 편에 비교적 넓고 평평한 자연 화강암(거북바위)을 만나게 된다.
길이 4m 60cm, 상단 너비 2m 70cm, 하단 너비 4m인 이 바위는 경상남도기념물 제6호(1974년 2월 16일 지정)로 경내에는 안내판, 스텐 보호담(가로 6m, 세로 5m 21cm) 및 도보용 목조계단이 설치 조경되어 있으며 바위 왼쪽 하단에는 원의 ¼부채꼴(반지름 90cm)형의 석각이 있다.
이 석각은 일명 남해각자, 남해각석, 남해고각, 신시고각, 상주석각, 남해상주리석각, 남해양아리석각, 서불과차, 남해전서불제명석각 등으로 불려오고 있으나 그 실상은 가을하늘의 성좌도이다.
1. 관련 학설
해독하지 못한 이 암각에 대한 학설로는 문치웅의 고대 문화설, 정인보의 선사시대 각석설, 데스판데(인도)의 수렵선각설, 하추도(중국)의 서불기례일출설, 여증동의 가림토 중기 글자설, 허대동의 녹도문 또는 가림토문자설, 최형식의 서화동원설, 이청기의 거란족 문자설, 유펑쥔(중국)의 농경 골각문설이 있으며 그밖에 선사석각화, 고대문자, 화상문자, 그림문자, 새모양 선화, 추상선각, 예일동승(禮日東昇), 산스크리트글자 등의 주장과 의견이 있다.
2. 바른 이해
남해양아리석각은 북극성을 축으로 구도와 위치, 배열과 크기 및 천체의 자오선과 암각의 경사면 방향이 천문도의 약 ¼(◔)에 해당하는 부채꼴의 별자리그림으로 암각의 왼쪽 아래에는 ‘천(天)’자가 각석되어 있고 페가수스별자리 위쪽에는 마멸이 심한 성좌도 의미의 24여자의 각자(刻字)가 있어 고대의 어떤 문자 또는 제 학설과 관련이 없는 성좌도임을 알 수 있다. 다만 오랜 세월 풍우에 위한 마멸과 파석 및 절리로 상당부분 성좌의 크기나 선각이 현재 사용하는 성좌도와 차이가 있어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다.
Ⅱ. 남해양아리석각의 성좌도 확인
1. 사실성(事實性)
남해양아리석각은 매년 9월 중순경의 별자리와 일치하는 선명한 성좌도 선각(線刻)으로 비교적 석질이 좋은 자연암(화강암)에 각석되어 있으며 불규칙한 선각과 오류의 선각도 있다. 화강암에다 별자리를 쪼아 홈으로 갈아닦기한 선각이다. 선각되지 않은 성수도 25수(宿)가 넘는다.
석각 왼쪽 하단에는 하늘을 뜻하는‘天’자의 병각(竝刻)과 북극성을 축으로 하는 좌표의 지시(⏊•)가 있다.
지금까지 발견된 고대의 고인돌이나 암벽에 새겨진 별자리는 홈 또는 확의 모습인데 비해 남해양아리석각은 성수를 성혈(星穴)로 각석한 후 성좌도로 선각했음이 특이하다.
고대 또는 중세 서구 성좌도에 해당하는 남해양아리석각은 천상열차분야지도의 성수(星宿)와 위치가 대부분 일치 또는 유사하나 꼭 닮은 성좌도는 없다.
고구려 석각천문도, 신라의 첨성대 건립, 남해군 연혁 등의 역사성에 비추어 남해양아리석각은 6~7세기에 각석되었음을 추정할 수 있다.
2. 역사성(歷史性)
기원전 2500년 경(또는 그 이전)에서 기원전 50년경 고대 한반도의 고인돌, 석벽 등에 별자리가 새겨져 있고 고분의 벽과 천장에도 사방신을 비롯한 별자리가 그려져 있어 예로부터 우리 선인들의 별자리에 대한 관심과 관측 및 별에 대한 신앙이 두터웠음을 알 수 있다.
고대의 낙랑고분(樂浪古墳), 무용총(舞踊塚), 각저총(角抵塚) 등에서 별자리 그림이나 천문 유물이 발견되었다.
삼국시대에 천문도를 제작하였다는 기록은 있으나 천문도는 전하지 않는다.
7세기 중엽 신라는 세계 최초의 첨성대를 세웠고. 718년(성덕왕 17)에는 천체의 운행과 시간측정 및 물시계를 관리하는 누각(漏刻)을 처음 만들었다. 그리고 이를 관리할 관청인 누각전을 설치하고 누각박사(漏刻博士) 6명과 사(史) 1명을 두었다. 경덕왕 8년(749년) 3월에는 천문박사(天文博士) 1명과 누각박사(漏刻博士) 6명을 두었다. 누각박사는 뒤에 사천박사(司天博士)로 개칭되었다. 이와 유사한 관직으로 고구려에서는 일자(日者), 백제에서는 일관(日官)이 있었다.
고대 서구 성좌도와 유사성이 있는 별자리 암각으로 포항 신흥 화전바위(속칭 오줌바위)에 새겨진 별자리의 선각, 고령 송림리 바위의 수지형 유적 등이 경상도에서 발견된다는 보고서에서는 중세 유럽의 대항해 이후 신라가 사라센과의 교역에서 천문에 대한 영향을 받았다는 견해가 있다.
조선 태조 4년에는 그 이전 석각인 천문도의 탁본에 근거하여 정교한 천상열차분야지도(天象列次分野之圖)가 완성되었고, 숙종 34년(1708년)에는 서양의 영향을 받은 탕약망의 적도남북총성도(赤道南北總星圖)를 모사(模寫)한 천문도가 제작되었다.
전국 각지에서는 성황당 또는 사당과 연계하여 해마다 좋은 시기와 날을 정하여 영성, 노인성 등에 제사를 지냈으며 칠성, 삼태, 태을, 천황 등의 별과 관련된 토속신앙이 생활과 관련을 맺고 있었다. 성신제는 토속 신앙 형태로 우리나라 남쪽 해안 지방의 여러 포구와 일대에서 행해졌고 별신제는 3년제 또는 10년제가 일반적이었다, 그러나 현대의 과학시대에 이르러 이러한 신앙이 점차 사라지고 있다.
3. 허구성(虛構性)
남해양아리석각에 대한 조사 연구는 석학과 강호제현에 의해 활발히 진행되고 있으나, 이해 해독 되지 않은 상황에서 ‘서불과차설’만 난무하고 있다.
추정과 추론은 연구의 빌미가 되므로 또 다른 연구의 소지가 된다. 그러나 이 각석과 관련된 서불과차설은 큰 오해의 발단과 빌미가 되었다. 이는 진나라의 방사 서불이 한반도 또는 한반도 중남부의 해안 지대에 정박했다거나 불로초를 찾아다녔다는 역사적 사실이나 기록이 없음에도 1860년 이후 전설을 꾸며 사실처럼 전하거나 오도하고 있기 때문이다.
서불(徐市) 「일명 서복<徐福>, 서시<徐市>, 서불<徐芾>」은 기원전 255년 제나라에서 태어나 진나라의 방사로 있을 때 전국(戰國)을 통일한 진나라 시황제의 명으로 불로초를 구하려고 배 60척, 일행 5000명(또는 동남동녀 3000명)을 이끌고 단주(亶洲) 또는 이주(夷洲)에 도달했다고 한다. 삼국지와 후한서에 나오는 기록으로 기원전 210년의 일이다.
다른 전설로는 서불이 많은 동남동녀(5000명, 3000명, 600명, 500명, 496명)를 데리고 남해 금산을 지나며 그의 족적을 남겼다는 것이다.
금산을 중심으로 상주 일대에는 석각이 두루 산재해 있다. 어떤 석각도 서불과차와는 무관하다. 그러나 서복 유관기관이나 남해군에서는 상주면 벽련리 84~1번지(벽련다리 봉산언저리, 바닷가로부터 약 30m)를 서불의 상륙지로 추정하고 있으며, 벽련리 105~5번지 입구 도로변(묘소 옆), 양아리 151번지(두모 고개). 남해대로 1267(양아리 산18-3번지), 남해대로495번길 54, 양아리 산 4-3번지(도지정문화재)를 서불과차의 현주소라 하여 관리번호까지 부여하였다.
1860년 청나라 하추도(何秋濤)의 남해양아리석각 탁본 해석 ‘서불기례일출(徐市起禮日出 : 서불이 일어나 뜨는 해에 예를 표하다)이 있자 서불과차의 전설이 사실화되어 서세동점의 격동기에 모화사상가들에 위해 더욱 와전되었고, 1919년 ‘조선금석총람 상(朝鮮金石總覽上)’ 조선총독부朝鮮總督府)의 남해전서불제명석각(南海傳徐巿題名石刻)이 유포되면서 항간의 실화로 회자(膾炙)되기에 이르렀다.
남해양아리석각 위쪽에는 거대한 바위가 있다. 부소암(扶蘇岩・扶蘇庵)이다. 부소암은 시황제의 맏아들 부소가 간신배의 모함으로 진나라를 탈출, 서불과 합류하여 이곳에 와 여생을 마쳤다하여 붙여진 바위 이름이며 암자 이름이다. 중국 사서에는 부소가 변방에서 기원전 210년 사사(賜死)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진나라가 망하자 기원전 108년 한나라는 위만조선을 멸하고 한반도 서북부에 사군(四郡 : 낙랑·임둔·진번·현도)을 설치한다. 진나라 패망으로부터 불과 98년 후의 일이다. 한반도 중남부 지방에는 기원을 전후하여 삼한(三韓 : 마한, 진한, 변한)이 있어 청동기 시대와 초기 철기시대에 접어들어 고조선 문화의 황금기를 맞으면서 가야와 삼국 병존 시대로 이어진다.
제주도 서귀포 소재 서복전시관 광장에는 남해양아리각석이 크게 조형 판각되어 있다. 제주도 정방폭포석각의 모형이라는 것이다. 일명 서불과지라 불리는 제주도 정방폭포석각은 풍화와 낙수, 그리고 그 위에 있는 전분공장의 폐수로 험하게 마멸되어 그 흔적은 물론 고증조차 불가능하다.
거제 해금강 소매물도의 서불과차(徐市過此)로 불리는 석각은 1959년 태풍(사라호)에 바윗돌이 떨어져 나갔다고 한다. 당시의 석각을 입증할 수 있는 어떠한 근거도 없다. 그 곳 와현리 ‘서불유숙지기념비’는 역사적 근거를 제시하지 못한 모순을 안고 있어 비웃음의 대상이 되고 있다.
현존하는 남해의 양아리석각, 고증이 어려운 제주의 정방폭포석각, 사라호 태풍으로 떨어져 나간 거제의 소매물도 석각은 선각의 공통점을 가졌을 것으로 추정 된다.
2001년 3월 제작된 인민교육출판사의 '중국역사 1권 44쪽‘의 진나라 지도에는 대동강까지를 중국 영토로 표시하고 있으며, 2005년 9월 중국 역사교과서 25종 중 11종(중학교 9종, 고등학교 2종)에는 67건의 왜곡 사례가 있다. 또한 중국 지린성 왕칭현 바이초구 티엔성호 섬에 건립(2001년 9월)된 웅녀상은 중국 도교의 한 신녀가 된 의상을 하고 있다.
최근 서불 전설은 심한 각색과 더불어 우리의 자존심과 자긍심을 크게 자극하고 있다. 그 단편으로 2010년 11월 중국의 한 보고서는 ‘제주도민은 서불 또는 동행자의 후손’으로 진나라 이후 중국 영토라고 주장한다. 이제 중국은 이 땅 어디에도 없는 서불과차를 들어 동남공정에 손을 뻗히고 있는 것이다.
우리의 신선사상은 역사와 함께 불로장생을 바탕으로 한 고유 신앙이다. 일찍 공자는(기원전 551년~기원전 479년) 신선사상에 도취되어 우리나라에 와서 살고 싶다했고, 춘추전국시대의 연나라와 제나라는 우리 고유의 신선사상을 흠모했으며 진시황은 봉래각(蓬萊閣)을 지어 불로장생을 기원했다. 한반도의 삼신산(봉래산-금강산, 방장산-지리산, 영주산-한라산)은 서불이 마치 손바닥 보듯 안 것처럼 전설로 꾸며졌고, 신선사상의 불로장생은 불로초와 불사약으로 위장됐다.
한편 2003년 10월 26일 제주도의 서복전시관 개관 이후 제주, 거제, 남해의 서불 관련 학술 심포지엄 및 한‧중‧일 삼국의 서복연구를 위한 협약은 남해양아리석각을 서불과차의 유일한 증거물로 삼아 매년 성대하고 다채로운 행사를 전개하고 있다.
또한 남해군과 남해서복회에서는 현지(상주면 양아리 산4~3)의 홍보판을 비롯하여 상주해수욕장 입구(도로변), 남해유배문학관 경내(남해읍 남변리 555), 남해 중심가(97화전로 앞) 등에 이를 조형판각 또는 비를 세워 서불과차(徐市過此) 또는 서불기례일출(徐市起禮日出)의 흔적인 양, 전설[fiction]이 사실인 양 오도 홍보하고 있는가 하면 중국서복회에서 기증한 서복조각상을 2015년 13일 상주면 두모마을 도로변 주차장에 건립하여 우리의 문화유산을 매도하고 있다.
4. 문학성(文學性)
○ 왕의 남자
<전략>
북극성에다 손가락을 멈추는데, 손가락이 옴푹 들어간다.
“황후성 다음, 꼬리를 마무리질 하지 않고서 뚜렷하게 독립시킨 천추성, 바로 북극성이지. 천추성과 황후성 사이에 천체좌표를 새기고 바로 아래에다 지평좌표를 새겼다는 걸 알 수 있겠나?”
“맨 오른편, 그러니까 오경석‧오세창이 주장했다는 서불기례일출 중에 서(徐)에 해당한다는 저건 어떤 별자리인가요?”
“자세히 보면 저기에 알파벳 P가 적혀 있네. 페르세우스 중심별이지. 저기 뻗친 건 기린 왼발이고. 페르세우스 꼭지 지점의 저 가로선(—)과 아래의 점, 저건 페르세우스 꼭지별 하나와 카시오페이아 3별의 중앙을 표시한 셈이지. 그런데 페르세우스 위쪽 양자리 사이를 좀 보게. 저건 한자 왼 좌(左)가 아닌가. 왼편에 다시 쓴다는 뜻인성 싶네만, 아무튼 그 옆은 시월(九月)하고 길(吉), 그리고 직사각형 페가수스(Pegasus) 오른쪽엔 Po가 새겨져 있고, 저기쯤이 안드로메다별자리 페르세우스자리 왼편 가운데 한 일자 같은 그림 저 사이에 안드로메다(Andromeda)의 A자가 새겨져 있질 않는가?”
<중략>
조세원 씨는 계속 설명하느라 여념이 없었고 연오는 신비한 별자리 암각에 정신이 팔려 있었다.
<하략>
우리의 문학인 ‘간동유람록, 심청전, 선상탄, 간양록, 파한록, 갈도석각가, 조선지, 경세설의 백발가, 기재기이, 금란굴 전설’ 등 어디에도 서불이 한반도 또는 한반도 중남부의 해안 지대에 정박했거나 불로초를 찾아다녔다는 언급과 기록 및 정설이 없다.
5. 유관성(有關性)
남해군 상주면 벽련리 105-5번지(마을 입구 도로변 묘소 옆 관리번호 제2의) 벽련마을양지암각은 비교적 상태가 온전했던 1970년대 초 이금수씨가 탁본하였으며 현재는 마멸이 심해 고증이 어렵다. 이는 벽력과 큰비를 피하려는 청명기원 및 행운기원의 벽사 부적으로 1200년~1300년 전 암각된 것으로 추정된다. 동심원과 사물 또는 동물 형상, 성혈, 문자 및 부호, 청명기원 및 행운기원의 벽사부적 암각 시기는 다를 것으로 추정된다. 벽련마을 양지암각의 ‘천(天)’은 남해양아리석각과 동일하며 성수를 잇는 선각이 없을 뿐이다.
경상북도 흥해읍 신흥리의 화전바위(속칭 오줌바위)에는 성혈을 이은 성좌도의 부분적 선각이 있으며 북두칠성을 형상화한 윷판이 위쪽에 암각되어 있다. 뚜렷한 카시오페아자리 또는 페르세우스자리는 남해양아리석각의 성좌도와 일치한다.
고령군 쌍림면 송림리 바위구멍 유적 두 곳에는 여섯 개의 윷판이 새겨져 있고 한 곳에는 수지형의 독특한 바위구멍 유적이 있다. 동일한 시기에 제작된 것인지는 추정하기 어렵다. 수지형 성혈(星穴) 외곽 원의 새김 형식은 가늘고 깊어 날카로운 도구를 사용한 것으로 보이며 성혈(星穴) 외곽 원을 제외한 송림리 바위구멍 유적은 남해양아리석각과 방향이 동일하다. 6~7세기에 새긴 것으로 추정된다.
사천시 용현면 덕곡리 507(사천시청 앞 진입로)의 지석묘 덮개석은 지상 높이 25cm, 원의 ¼부채꼴인 반지름 260cm이다. 역암인 본 지석묘에는 덮개석에 다수의 성혈이 있으나 오랜 세월로 인한 마멸과 작고 둥근 자갈의 빠진 흔적이 혼합되어 성혈의 구별이 어렵다. 남해양아리석각과 같은 부채꼴 구조이며 북극성을 축으로 한 천체방향과 지평좌표(⏊•)가 동일하다.
Ⅲ. 남해양아리석각의 성좌도 분석
성좌도(星座圖)는 천구(天球)의 별을 지구에서 보는 모습에 따라 형상화하여 붙인 이름이다.
별자리는 보통 비슷한 방향에 놓이지만, 실제로 같은 별자리에 속한 별들이 반드시 가까운 위치에 있는 것은 아니며 문화권과 시대별로도 다르다. 현재는 1930년 국제천문연맹(IAU)에서 1875년의 춘분점을 기준으로 정한 88개의 별자리를 공통으로 쓰고 있다.
1. 부분 이해
1) 중심 성좌도
별의 겉보기 등급 중심으로 살핀 자연석의 남해양아리석각은 天, 각자, 성수, 선각, 방위 표시로 각석되어 있으며 선각의 성혈이 뚜렷하다.
다만 오랜 세월 풍우에 위한 마멸과 파석 및 절리로 상당부분 성좌의 크기나 선각이 현재 사용하는 성좌도와 차이가 있는 바 카시오페이아자리는 안드로메다자리에 포함되어 선각, 삼각형자리는 안드로메다자리에 포함되어 특이한 수지형으로 선각, 크게 각석된 조랑말자리는 물병자리의 일부와 연결 선각되어 있다. 다만 페가수스자리에는 α-β 선각이 없어 가을대사각형을 쉽게 식별하기 어려우며 백조자리와 작은곰자리는 일부 선각이 없어 자세히 살펴야할 부분들도 있다.
2) 일부 관련 성좌도
양자리 α-β는 페르세우스자리 η로 연결 선각, 물병자리 β-α는 페가수스자리 ε-κ로 연결 선각, 물고기자리 ε는 ϕ로 연결되어 다시 안드로메다자리 η로 연결 선각, 황소자리 α(알테바란)은 페르세우스자리 ε로 연결 선각, 마차부자리 α(카펠라)는 페르세우스자리 μ로 연결 선각되었다.
양자리 물병자리 물고기자리 황소자리 마차부자리
[Aries] [Aquarius] [Pisces] [Taurus] [Auriga]
그리고 선각이 난해한 기린자리 5등성은 가까운 페르세우스자리 γ로 연결 선각되었으며 염소자리 δ-ζ-ϕ-β-α에서 ϕ와 현미경자리 ε-ʒ-α에서 ʒ는 두 성좌도가 하나로 선각되었다.
4. 확인 분석의 성과
북극성을 축으로 천체의 방향과 지평방향이 일치하는 남해양아리석각은 암각 왼쪽 하단에 성좌도의 제목인
‘天’이 병각(竝刻)되어 있고 성좌도임을 뜻하는 24여자의 각자(刻字)가 있어 천문도의 ¼(◔)에 해당하는 부채꼴의 가을 성좌도이다. 이는 일반인 또는 비전문가의 민간용 성좌도로 추정된다.
벽련마을 양지암각의 성좌도, 사천시청 앞 지석묘의 방위 표시, 신흥리 화전바위의 성좌도, 송림리의 수지형 성좌의 유적은 남해양아리석각과 일부분 유관하다.
Ⅳ. 관련 학설 반증
1) 고대 문화설
문치웅은 그의 논고 「고조선의 고각 남해석각 해석」에서 이맥의 환단고기(1520년경 편찬) 태백일사 소도경전 본훈 제5(李陌桓檀古記太白逸史蘇塗經典本訓第五) 대변설(太白逸史大辯說註曰南海縣郞河里之溪谷岩上有神市古刻其文曰桓雄出獵致祭三神 - 태백일사 대변설의 주에 이르기를 남해현 낭하리의 계곡 바위 위에 신시의 고각이 있다. 그 글에 이르되 환웅께서 사냥 나왔다가 삼신께 제를 드리다)의 근거와 최치원은 일찍이 신지의 옛 비석에 새겨진 천부경을 얻어 다시 또 첩을 지어 세상에 전했다. 낭하리의 암각은 이런 사실의 흔적이다(崔致遠嘗得神誌古碑所刻之天符經更復作帖以傳於世卽與郞河里岩刻的是皆實跡也)를 들어 남해양아리석각을 녹도문 또는 녹도문자(鹿圖文字)라고 풀이하였다.
(1) 학설 요지 -환웅출렵치제삼신(桓雄出獵致祭三神)
(2) 반증
환단고기의 문자 창제설에 의하면 녹도문은 기원전 3890년경이며 가림토문(가림토 또는 가림다, 가림다문)은 기원전 2181년이다. 주류학계와 실증사학자들은 환단고기를 위서로 보고 있다.
남해군은 삼한시대에 군미국(軍彌國) 또는 낙노국(樂奴國)이었으며 가야시대에는 고령(古寧)가야에 속했을 것으로 추정한다.
신라 신문왕 7년(687) 전야산군(轉也山郡), 경덕왕 16년(757년) 남해군(南海郡), 고려 현종 9년(1018년) 남해현(南海縣), 조선 태종 13년(1413년) 하남현(河南縣)이 되었다가 이후 해양현(海陽縣) 남해현(南海縣)으로 불렀으며 고종 32년(1895년) 남해군(南海郡)이 되었다.
1973년 이동면 갈도(葛島)는 통영군에 편입, 1979년 남해면이 읍(邑)으로 승격되어 1읍 7면이었으며 1986년 이동면 상주출장소가 상주면으로, 삼동면 미조출장소가 미조면으로 승격해 1읍 9면이 되었다.
남해현의 지명은 고려 8대 현종 9년(1018)부터이다. ‘환단고기 태백일사 대변설의 주’에서 ‘남해현 낭하리’의 지명을 사용한 것은 시대와 맞지 않다.
양아리는 500여 년 전 경기도 임진강 가에 있던 양아라는 곳에서 경주이씨가 남해에 이거한데서 유래한다. 낭하리(郎河里) 지명은 맞지 않다. 양아리(良阿里)가 바르다.
남해양아리석각을 고대문자의 녹도문으로 보았을 뿐 녹도문자나 녹도문으로 읽은 근거를 제시하지 못했으며 석각의 구도와 각자(座標, 天, 古旨)를 전혀 살피지 않았다. 한자는 자획의 크기, 순서, 상하좌우의 방향이 바뀌었고 제(祭)와 신(神)은 중복이며 녹도문이 아닌 한자(漢字)의 약자를 인용 또는 오용하였다.
2) 선사시대 각석설
위당(爲堂) 정인보는 ‘왕(王) 혹은 장상대인(長上大人)이 사냥을 나와 멧짐승과 날짐승을 잡으며 물을 건너 이곳에 기를 꽂다’로 해석했다.
(1) 학설 요지
붉은색은 수레와 수레를 따르는 동물, 초록색은 짐승이 화살에 맞은 형상, 보라색은 두 새가 잇달아 날아가는 형상, 분홍색은 물고기 형상, 파란색은 깃대에 깃발이 펄럭이는 형상으로 보았다.
(2) 반증
검은색은 해독이 없으며 석각의 구도와 여러 성혈, 각자(天, 古旨) 등이 누락되어 있다.
3) 수렵선각설
인도의 데스판데는 이 그림의 주제가 ‘이 속은 이 어른의 사냥터 또는 어느 귀 인의 사냥터나 사냥 기념의 표지’라고 해독 하면서 이는 과거 1200~1300년 전의 석각 으로 글자가 아닌 그림의 선각이라고 판단 분석 하였다.
(1) 학설 요지
① 주인공(왕 또는 귀인)이 가마 또는 의자에 앉아 사냥을 구경하고 있음
② 주인의 애견
③ 주인공에게 무엇인가 진상하고 있는 시종
④ 사냥감 ⑤ 최후의 일격을 가하려는 사냥꾼
⑥ 창(사냥 도구) ⑦ 사냥한 짐승
⑧ 관(벼슬 상징의 모자)
(2) 반증
그림의 구도, 사물 및 인물의 크기, 배열 등이 회화의 성격과 멀며 각자와 성혈을 전혀 살피지 않았다.
4) 서불과차설(徐市過此說)
독립운동가요, 서예가였던 위창 오세창의 부친 오경석이 철종 11년(1860) 이 석각의 탁본을 중국 연경에 가지고 가 당시 외교가며 금석학에 조예가 있었다는 하추도(何秋濤)의 ‘서불기례일출(徐市起禮日出 : 서불이 일어나 뜨는 해에 예를 표하다)’이라는 여섯 글자의 감식을 받아 세상에 알리게 된다. 그의 아들 오경석이 선보인 작품 중 임서(臨書)의 하단에는 '此刻立南海郡錦山是磨崖刻 書體奇詭人莫能解但云徐巿題名 我先君曾携拓本至燕京 通徵於博古 釋得徐巿起禮日出六字是秦遺蹟在李斯 作篆之前乃籒文也間焉東邦石墨之冠 : 이 석각은 남해군 금산에 서 있는 바위의 마애각자다. 서체가 이상하고 괴이해 사람들이 능히 해석하지 못했다. 다만 전해오길 서불제명이라 한다. 나의 선친이 일찍 이 탁본을 연경에 가지고 가 옛것에 박식한 선배들에게 징험해 서불기례일출이라는 여섯 글자의 풀이를 얻었다. 이는 진시황 때의 유적으로 이사가 전서를 만들기 이전의 주문이다. 나는 이것이 우리나라 최고의 석물이라 믿는다'의 설명이 곁들여 있다.
(1) 학설 요지
1860년 청나라의 하추도가 ‘서불기례일출(徐市起禮日出 : 서불이 일어나 뜨는 해에 예를 표하다)이라 징험했다.
(出) (日) (禮) (起) (巿) (徐)
(2) 반증
진시황 때는 한자가 정립된 때이다. 그들이 그림 같은 글자를 써 놓을 까닭이 없는데도 학자들은 물론 일반인에 이르기까지 이 그림문자는 중국 진나라 시황제(BC259~BC210)의 시종인 서불(徐市)이 불로초를 구하기 위해 많은 선남선녀와 함께 남해를 지나가면서 남긴 금석문일 가능성이 높다고 오인하고 있다.
진시황과 서불의 입장은 다르다. 망국의 비분에서 진나라를 탈출하는 서불이 자신의 흔적을 남길 까닭이 없다.
서복(서복과 서불은 이명 동인)은 배 60척, 일행 5천명, 또는 동남동녀 3천명을 이끌고 단주(亶洲) 또는 이주(夷洲)에 도달한 후 돌아오지 않았다. 단주나 이주는 대만을 가리킨다. 기원전 210년의 일이다. 라고 『삼국지』와 『후한서』는 적고 있다.
청나라 말 외교관이었고 금석학에도 조예가 있었다는 하추도의 서불기례일출(徐市起禮日出)의 여섯 글자 조합 해독을 위창 오세창은 확신하고 있으나 고문자나 화상문자의 구조에서 자획 또는 글자 크기와 상하좌우의 배열이 전혀 맞지 않음에 비추어 선각 중심의 유사한 글자를 끼워 맞춰 한자의 전자로 오인한 것이다. 즉 페르세우스 중심 별자리를 徐, 양자리 삼각형자리 물고기자리를 巿, 안드로메다자리 케페우스자리를 起, 페가수스자리 백조자리 여우자리를 禮, 조랑말자리를 日, 독수리 중심 별자리를 出로 읽었으며 혹자는 起禮日을 합해 過, 出을 此 또는 之로 읽었다.
Ⅴ. 결론
가을철 별자리그림인 남해양아리석각은 현대 성좌도와 대부분 일치하는 고대 또는 중세 서구 성좌도로 조선조 천상열차분야지도와는 판이한 일면이 있어 동서양의 성좌도가 다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성좌도에서 성수(星宿)의 위치와 부분적 성좌도가 자세히 일치하여 선각의 성혈을 통해 이를 비교 이해할 수 있다.
천체의 자오선과 화강암의 선각바위 경사면 방향이 일치하는 남해양아리석각은 북극성을 축(軸)으로 성좌도의 윤곽을 들어낸 페르세우스자리[Perseus], 안드로메다자리[Andromeda], 카시오페이아자리[Cassiopeia], 삼각형자리[Triangulum], 페가수스자리[Pegasus], 조랑말자리[Equuleus], 백조자리[Cygnus], 도마뱀자리[Lacerta], 세페우스자리[Cepheus], 돌고래자리[Delphinus], 작은곰자리[Ursa Minor]와 성좌도 일부의 염소자리[Capricorn us], 마차부자리[Auriga], 양자리[Aries], 황소자리[Taurus], 물고기자리[Pisces], 현미경자리[Microscopium], 물병자리[Aquarius]에 이르는 가을하늘의 전면을 지금부터 1200~1300여 년 전 우리의 선인(先人)이 정교하게 쪼아 갈아닦은 우리나라 가을하늘의 성좌도로 이는 삼국시대 중기와 후기의 별자리를 연구 이해할 수 있는 최고(最古)의 성좌석각 문화유산이다.
〈참고문헌〉
李錫浩 編輯主幹, 1972, 『韓國名著大全集』 <三國史記上> 大洋書籍, p.222.
이학렬 1988. 『향토 마산의 어제와 오늘』 마산향토사연구회.
朱英淑, 2013. 『亞細亞文藝』 <겨울호> (사단법인)푸른세상, pp.274-289.
김일권, 2009, 『우리 역사의 하늘과 별자리』 고증원, pp.30-51.
학술조사보고서, 2008, 『高靈의 岩刻遺跡』 대가야박물관 p.103 p.197
용현면지편찬위원회, 신재균, 2012 『용현면지』 중문출판사,pp.603-613
문치웅, 2008, 『고조선의 고각 남해석각 해석 제18집』 동아시아고대학회 pp.59-81
남해군지편찬위원회, 2010.02.25. 『남해군지』 시티플랜. p685-688
김중원 옮김, 2009, 『사기열전2』 ㈜한음사, pp.568-569.
김중원 옮김, 2013, 『사기본기』 (주)한음사. pp.226~231.
------------------------------------------------
|
첫댓글 조세원 선생님의 열망이 언젠가는 이뤄질 것입니다^^
본 연구물을 보며 그 열성 못지 않게 남해의 금산 산록 양아리의
성좌도가 더욱 빛남을 봅니다. 다만 지금 남해에서 벌어지고 있는
왜곡된 모화사상의 작태를 어떻게 막을 수 있는가가 문제입니다.
검풍님과 저가 서로 천군만마가 되어 서불과차를 쓰레기차로 만들어 버립시다.
서불과차=쓰레기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