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년대 중반 아마 초등학교 6학년 쯤이었을까?장터에 사람들이 몰려있어 비집고 들어가니 어떤 서생이 이름풀이를 하고 있었다.
"자 여기 초가지붕에 박이 주렁주렁 달렸어요.
큰 박 하나를 따서 슬근슬근 톱질을 합니다.
흥부놀부 얘기가 아니에요.박이 쩍 갈라지면 속을 다 파냅니다.그럼 뭐가 됩니까?바가지가 되겠죠.그럼 박주인이 바가지에 이름을 붙입니다.
에라 너는 '쌀바가지'해라 하면 쌀바가지가 되는 거고,에라 너는 '똥바가지'해라 하면 똥바가지가 되는 겁니다."
기가 막힌 논리였다.
같은 박의 운명을 타고 나서 한 쪽은 쌀바가지,
한 쪽은 똥바가지가 되는 신세.
이름이 얼마나 중요한 지 이보다 더한 설득력이 있을까?
이어서 이름풀이 하나를 하는데 어린 나는 쿵하고 뒷통수를 한 대 얻어맞는 기분이었다.
박정희(朴正熙)는 당초 朴成熙였는데 이름을
바꿔 대통령이 됐다는 것이다.'이룰성(成)'자를
'바를정(正)'으로 바꿔 획수가 변경(27획에서
25획)되고 이게 혁명의 수가 되었다고.(사실여부는 잘 모르겠음)
이후로 나는 이름풀이(성명철학)를 신봉했고
작명관련 서적을 탐독하기도 했다.
얄팍한 지식으로 얼치기 작명가가 된 나는 여러사람에게 참 나쁜 짓을 많이 했다.가운데 자가 나쁘니 이름을 바꾸라는 둥 멋대로 개명을 권장하고 고맙다고 술도 얻어 마셨다.
그러다가 된통 혼이 났다.
군시절 '8.18 판문점 도끼만행사건(76.8.18)' 때 일이다.(판문점 공동경비구역(JSA)에서 미군장교 2명이 미루나무 가지 작업 중 북한군 병사들의 도끼에 무참히 피살된 사건)
전군에 비상령이 떨어져 장교들도 영내에 대기해야 했다.
작전사병인 나는 보초 대신 상황실 근무를 했는데 며칠 지나니 긴장이 사라지고 시간이 지루해지기 시작했다.
그 때 시간을 보낼냥으로 장난삼아 상황장교의
이름을 풀어주었다.
장터의 서생이 한 것 처럼 박타령 한 번 읊조리고 일필휘지로 이름을 써제끼니 장교는 껌뻑한다.그 다음은 일사천리다.
과거를 족집게 처럼 밝혀내고(그렇게 믿는다)
미래는 장밋빛으로 물들인다.
그게 탈이었다.
다음날 상황실 앞에 장교들이 줄을 선 것이다.
"아뿔사!"
난리가 났다.
복채도 없는 이름풀이에 온갖 감언이설을 만들어야만 했다.
졸지에 유명 작명가(성명철학자)가 되었지만 나는 언어의 사기꾼으로 날마다 가슴을 쥐어뜯어야 했다.
고교시절 한 때 성명철학에 심취하여 도서관에서 엉뚱한 짓을 꽤 많이 했다.역학(易學)서적을 뒤적이느라 교과서를 멀리하기도 했다.
그러나 구도(求道)의 길은 멀기만 했고 시험지의 가위표는 늘어만 갔다.그 바람에 황야의 방랑자 생활이 길어졌다.
오십년 전 친구의 사례를 얘기하지 않을 수 없다.(실명 사용 이해 바람)
명문 K고를 졸업한 친구가 S대 공대 시험에 떨어졌다.의대냐 공대냐 어딜 가도 문제 없다 했는데 충격이 매우 컸다.
광화문 옆 '김봉수 철학관'을 찾아가 이름을 내밀었다.
李和洙.
고개를 갸우뚱하던 철학자가 일갈했다.
"가운데 和자가 문제야.바꿔야 돼."
거금 3만원에 개명을 했다.
李赫洙.
명함크기 종이에 '이혁수'라 적어 친구들에게
돌려주며 간청했다. "앞으로 이렇게 불러 줘."
일년간 대성학원에 재수한 혁수는 모의고사
점수에 낙담하고 말았다.S대는 갈 곳이 없었다.
부득이 K대 수학과에 들어갔다.
다시 김봉수를 찾아가 이름을 내밀었다.
李赫洙.
대뜸 철학자가 말했다.
"가운데 赫자가 문제야 갈아야겠어."
그 다음 상황은 불문가지다.
"야 이 사기꾼아.나쁜 xx야!"
친구는 K대 수학과를 나와 대우 전산실에 들어가 컴퓨터 1세대가 되었다.이후 여의도에 컴퓨터회사를 차려 한 때 잘 나갔다.
이름은 그대로 아직 和洙다.
사람들은 대부분 일이 안풀리면 핑계를 만들어
낸다.그러다 개명을 한다.
지인 중에 몇 명 있다.돌이켜보건대 이름 바꿔
성공했는지 알 수 없다.
이름에 좋고 나쁨은 없다.부르기 쉽고 어감이
좋으면 좋은 이름이다.
한 때 성명철학에 심취했던 내가 아이들 이름을 순우리말로 지었다.이름풀이할 漢字가 없다.
아는 사람 다 알지만 가훈과 함께 변천한 환경친화적 이름이다.
'새롬,푸름,맑음' 아름답지 않은가?
과거 얼치기 작명가의 언어유희에 일희일비했을 모든 분께 늦게나마 사죄한다.
'세상에 나쁜 이름은 없다.누군가 예쁘게 지어준이름이다.스스로 사랑하면 좋은 이름이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