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감록’에 대한 이야기는 아무리 해도 끝이 없다.
주제를 40개 정도로 나눠 일년 가까이 연재를 해왔지만 손길이 미치지 못한 부분이 아직도 많다.
우선 생각나는 것이 예언에 관한 흥미로운 일화들이다.
그 중엔 그냥 버려두기 아까운 것이 꽤 많아 몇 가지를 간추려 보았다.
특히 암울했던 일제시대엔 독립을 향한 민중의 염원이 간절해서인지 각종 예언과 관련된 일화가 많았다.
또 혼란스러웠던 시기에 동학과 관련된 일화도 빼놓을 수 없다.
▲ 중국 창춘의 옛 만주국 국무원.1931년 일본군은 만주사변을 일으켰고 이듬해에는 만주국이란 꼭두각시 정권을 수립했다.
만주국의 등장은 당시 한국인들에게 불길한 조짐으로 해석되었으며
어떤 사람들은 오래된 예언시를 만주국과 관련해 재해석하기도 했다. 서울신문 포토라이브러리
● 예언에서 찾은 조선독립의 희망
1920년대에는 천도교가 예언과 관련해 많은 일화를 남겼다.
천도교는 동학의 후신이라 이상세계의 실현에 대한 믿음이 유달리 강했다.
당시 교단 지도부는 재정에 충실을 기하려고 성미(誠米) 적립운동을 펼쳤는데, 성미운동에서도 예언이 등장했다.
대강 이런 식이었다.
천도교 신도는 성심을 다한다는 의미에서 끼니 때마다 가족 수만큼 쌀 한 숟가락씩을 모아 교단에 바쳐야 된다고 했다.
하늘은 성미가 많고 적음에 따라 신도들의 성심을 상중하로 판단해 장부에 기재하므로,
성심이 깊으면 복을 많이 받지만 적거나 없으면 벌을 받는다고 가르쳤다.
▲ 경북 상주군 우복동의 향토사적비. 우복동은 예로부터 길지로 손꼽혔으며,
일제시대 십승지를 찾아 나선 인근 지역 사람들로 무척 붐비기도 했다.
어떤 사람들은 이 마을을 거점 삼아 독립의 꿈을 펼치려고도 했다.
교단에 따르면, 교조 최제우는 동학이 창건된 지 61주년째 되는 1920년 한국에 갱생한다 했다.
세상에 다시 내려온 최제우는 오만 년 무극대도(無極大道)를 펼쳐 전세계를 통일한다는 것이다.
그는 국제연맹을 대신해 세계정부를 세운다 했다.
이것은 정말 믿기 어려운 예언이었다.
기독교의 재림예수이야기를 방불케 한다.
천도교 신도들은 교단의 가르침을 성심껏 믿고 따르기만 하면 된다 했다.
그들 각자가 바치는 정성은 하늘을 감복시켜, 성미를 많이 바친 이는 새 세상에서 고위관직을 얻게 된다는 것이다.
이들은 본인은 물론, 자손들까지도 무한한 행복을 누릴 수 있다고 설명했다.
이런 가르침은 통했다.
1920년경 천도교 측이 거둔 성미 수입은 당시 화폐로 수십만 원이나 되었다.
참고로, 일제말기 초등학교 교원의 초임은 45원에 불과했다.
천도교의 성미운동을 식민지 당국은 사기적인 약탈행위로 간주했다.
하지만 그렇게만 볼 것은 아니다.
성미는 물론 천도교단의 운영자금으로 사용되었으나, 그 상당부분은 독립운동과 계몽운동에 투입되었다.
1919년의 3·1운동 때도 천도교 측은 운동자금의 대부분을 부담했다.
그 뒤에도 천도교 측은 ‘개벽’과 같이 선진적인 계몽잡지를 발간했고 농촌운동을 일으켰다.
기꺼이 성미를 적립했던 신도들도 마음속으로 조선독립을 꿈꾸고 있었다.
심지어 천도교의 곁가지인 무극대도교나 상제교 측도 그러했다.
무극대도교는 일제의 보안법을 자주 위반한 것으로 유명했다.
상제교도 교주 김연국이 상제로부터 홍서(紅書)를 받았다고 주장해 관심을 끌었다.
또 다른 일파인 수운교도 교조 최제우를 부처의 후신으로 보았다.
이들 교단은 여러 예언을 동원해 곧 지상천국이 실현된다고 주장했다.
지상천국은 당연한 일이겠지만 독립을 기본전제로 했다.
일제가 조사한 결과를 보면, 이런 신종교에 입교하게 된 동기는 ‘감언이설´을 믿었기 때문이다.
실상 그것은 단순한 감언이설이 아니었다.
“이 교단”은 혁명 즉, 정권창출에 성공할 것이고 따라서 새로운 정치지도자를 배출하게 되며,
“이 교”에 입교해 신앙 활동을 잘 하면 생활이 안정되고 새로운 정치지배세력의 일원이 된다는 확신이 뚜렷했다.
이미 언급한 천도교 등 여러 신종교들을 비롯해 보천교, 금강도 및 청림교의 사정도 마찬가지였다.
이들 역시 기존 예언서인 ‘정감록’을 중시했고, 거기에 자기네 나름으로 새 예언을 덧붙였다.
심지어 전혀 이름조차 없는 소규모 단체들도 ‘정감록’에 기대어 독립을 점쳤다.
1931년 3월31일, 경상북도 칠곡군 왜관경찰서 고등계는
경북 상주와 문경 등지에 사는 평범한 남녀 주민 4명을 보안법 위반자로 검거했다.
당시 40∼50대 나이로 장년층에 속했던 이들은 조선독립을 목표로 비밀결사를 조직했다는 혐의를 받았다.
그들은 ‘정감록’의 한 구절, “땅값이 똥값이 되며 천 마리 말이 소가죽을 입는다.(土價如糞 馬千牛服)”라는 대목을
장차 반드시 일어날 미래의 현실로 받아들였다.
그들의 해석은 특이했다.
장차 세계대전이 일어나 10년간 지속된다고 보았고, 결과적으로 일본은 멸망하고 조선독립은 의심할 여지없는 사실이 된다 했다.
우연한 일이지만 이 예언은 거의 들어맞았다.
1939년 제2차대전이 터졌고, 전쟁은 장기화되었다. 일본은 연합국 측에 패전해 무조건 항복했으며, 마침내 한국은 해방되었다.
그런 주장을 펼치던 사람들은 ‘정감록’ 예언을 따라 십승지를 찾아갔다.
그들은 경북 상주군 화북면 중대리에 있는 우복동에 주목했다.
거기 피난처를 정한 다음, 그들은 조선독립을 위해 본격적인 준비를 시작했다.
1928년 5월, 우복동에서 결사를 맺고 사찰을 지어 승려로 가장했다.
이웃한 지역사회에서는 그들의 취지에 공감해 사찰건립기금을 낸 사람이 20명가량이나 되었다.
우복동의 ‘선민’들은 장차 이 나라를 이끌어 나갈 진인 정씨의 출현을 기다리며,
그 때 긴요하게 쓰일 인재를 양성하기 위해 종교 교육활동에 몰두했다 한다.
사실 19세기 이후 한국에는 수많은 예언이 난무했다.
그 중엔 ‘정감록’에 전혀 나오지 않는 예언도 많았다.
1933년 8월21일, 충청북도 영동 출신의 박모라는 사람은 그동안 누구도 풀이하지 못한 예언시를 독자적으로 해석했다.
그 일부가 우연히도 사실로 입증되었다.
문제의 예언시는 첫 구절이 이러했다.
“봄날 나무에서 원숭이가 우니 귀신도 알지 못한다.”(猿啼春樹鬼不知)는 것이다.
박 도사는 여기 나오는 원숭이(猿)를 임신년 즉 1932년으로 간주했고,
그 해 3월 만주국이 창건될 것을 예견한 시라고 주장했다.
시의 둘째 구절은 “비바람이 치는 날 닭이 울 때”(一天風雨鷄鳴時)라 했다.
박 씨는 닭이 울 때(鷄鳴時)를 계유년(1933)으로 상정했다.
그 해에 만주국의 주권을 둘러싸고 국제회의가 열린다고 예견했다.
회의에서 일본이 만주를 불법 점령한 사실이 국제적으로 인정받지 못하게 되며,
그 결과 일본은 국제연맹을 탈퇴하는 사태가 벌어진다고 내다보았다.
엄밀한 의미로, 이것은 틀린 해석이었다.
그러나 역사의 긴 흐름에서 볼 때, 만주국의 성립은 장차 1937년 중·일전쟁이 일어나리란 예고편이었다.
그 전쟁이 확대되어 마침내 1939년, 세계 제2차대전으로 번진 것도 사실이다.
이런 점에서 박씨의 예언 풀이는 제법 타당한 점이 있다고 볼 여지가 있다.
예언시의 마지막 부분은 “만국이 진을 이루고 개가 울 때” (萬國成陳犬吠時)란 구절이었다.
박씨는 이 구절에 대해,“개가 울 때”(犬吠時)는 갑술년(1934)이며
만주 문제가 직접적인 원인이 되어 세계전쟁이 유발되고 악성 전염병이 유행한다는 뜻이라 했다.
그러나 그 말대로 1934년에 무슨 큰일이 일어나지는 않았다.
식민지 시대 말기에는 일본의 패망을 예언한 대본교(大本敎) 같은 신종교도 있었다.
그 교주 왕인은 1945년에 “국체변혁”(國體變革), 즉 일본이 망한다는 예언을 내놓았다.
그의 위험한 발언이 나오기가 무섭게 식민지 당국은 대본교의 교당을 헐어버렸다.
왕인 등 교단 지도부도 몽땅 체포했다. 본래 왕인이란 사람은 농부였다.
그런데 예언능력이 탁월해 신종교의 교주가 된 것이다.
그는 교당의 터를 잡을 때 여기를 파면 반석같이 큰 바위가 나오리라 예언했다.
과연 그 말 대로였다.
세상 사람들은 왕인이 땅속까지 꿰뚫어보고 일제의 패망을 예견할 만큼 형안을 가졌으면서도,
자기 교당이 허물어질 줄은 미처 내다보지 못했다며 비웃었다.
중요한 사실은 평범한 개인이든,
크고 작은 신종교 단체든 일제시기 내내 많은 한국인들이 늘 조선독립을 점쳤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 예언은 대부분 ‘정감록’을 토대로 했다.
‘정감록’은 민중의 희망이었다.
■ 동학과 정감록-최제우, 동학정신에 정감록 ‘弓弓乙乙’ 담아
동학을 창시한 최제우는 ‘정감록’에 대해 미묘한 태도를 보였다.
동학경전을 읽어보면 그는 정감록을 믿는 것 같으면서 부정하고, 부정하는 듯하면서도 믿는 것 같다.
그가 “기이한 동국 참서”, 즉 ‘정감록’을 손에 쥐고 들려준 가르침을 좀 풀어보면 이렇다.
과거 임진왜란 때는 이재송송(利在松松 이여송 형제가 도움이 됐다)이라 하였고,
가산 정주 서적(西賊 홍경래 난)때는 이재가가(利在家家 가만히 집에 있는 것이 좋았다)라고 ‘정감록’ 등에 기록돼 있지.
다 맞는 말이었네. 그런 선례를 본받아 우리의 미래도 한번 설계해 보세.
앞으로 세상을 제대로 살려면 ‘정감록’에 나오는 구절이네만
이재궁궁(利在弓弓 궁궁이 유리하다)을 알아내는 것이 정말 필요하다고 봐야 하네.
매관매직을 일삼는 세도가들도 그 마음은 오직 궁궁에 있는 듯하고, 돈 많은 부자들도 궁궁만 찾고 있네.
거지들도 궁궁, 풍수에 미친 사람들도 궁궁촌을 찾아 더러 깊은 산중으로 들어간다네.
더러는 서학(西學 천주교)에 입교해 그것이 궁궁인 줄로 믿고들 있지.
세상 사람들이 옳거니 그르거니 따지는 것이 몽땅 궁궁에 관한 것뿐이네.
그러나 제 몸을 닦고, 집안일을 바로 다스리지 않은 사람이 강산을 찾아가면 뭐하나.
경박한 세상 사람들 같으니!
다들 이익이 송송(松松)이니 가가(家家)에 있다고 한 말뜻은 겨우 알아낸 듯하지만
정작 궁궁이 무엇인줄은 전혀 모르고 있군.
최제우는 자신이 발견해낸 종교적 진리가 바로 궁궁이라고 믿었다.
그래서 자신의 가르침을 “무극대도”라 불렀고, 앞으로 5만년간의 태평시절이 온다고 주장했다.
그는 ‘정감록’에 적힌 궁궁을을(弓弓乙乙)이란 구절에 모든 진리가 압축돼 있다고 생각했다.
이 구절에 입각해 그는 궁을부(弓乙符)를 만들었다.
이 부적을 몸에 붙이면 상처가 생기지 않고, 이것을 불살라 먹으면 만병이 사라진다고 최제우는 가르쳤다.
그러다 고종1년(1864) 그는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하지만 동학의 인기는 더욱 높아져, 그가 죽은 지 30년이 되던 갑오년에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났다.
전봉준이 이끈 동학군들의 깃발에는 ‘오만년수운대의´(五萬年水雲大義)란 글귀가 높이 매달려 있었다.
그것은 수운, 즉 최제우가 설파한 5만년 이상세계의 꿈을 이루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요컨대 궁을을 이 세상에서 실현하겠단 것이었다.
고종30년(1894)에 시작된 동학농민운동을 전후해 민간에 여러가지 노래가 유행했다.
단순한 노랫가락이 아니라 요참(謠讖), 즉 노래형태를 빈 예언이었다.
더러는 일제시대까지도 남아 인구에 회자되었다.
“가보세 가보세 을미적 을미적 병신되면 못간다.(甲午歲 甲午歲 乙未 乙未 丙申되면 못 간다)”
기왕 일을 벌이려거든 갑오년(1894)에 서울까지 밀고 올라가서 일을 마무리지어야지,
그렇지 않고 우물쭈물하다 을미년이나 병신년까지 지연되면 실패하게 돼 있다는 것이다.
이 예언 노래는 갑오 동학농민운동 당시 김개남 등 급진파 측에서 퍼뜨렸을 가능성이 있다.
그게 아니라면 운동이 실패로 끝난 다음, 뒤늦은 후회를 예언의 형태로 담아냈다고 추측해볼 수도 있다.
동학농민군이 서둘러 서울로 진격하지 못하게 된 이유가 있었다.
그 가운데 하나는 남원 방면을 공략하다 뜻밖의 거센 저항에 부딪힌 사실과 관련이 있다.
운봉 아전 박봉양이 이끈 반항세력이 만만치 않았기 때문이다.
박씨의 저항은 요참에도 담겨 있어 우리의 주목을 끈다.
“아랫녘 새야, 윗녘 새야, 전주 고부 녹두새야, 녹두밭에 앉지 마라. 하루박(하눌타리), 후-여!”
전라도 고부 출신 녹두장군 전봉준은 ‘하루박´으로 표현되는 박봉양에게 밀린다는 말이다.
참시에서 저항세력을 하눌타리 또는 하루살이에 불과한 박씨라고 일컬은 점은 재미있다.
이런 비유로 볼 때 노래를 만든 이나 부른 이는 농민군 편이었다.
노랫말에 보이는 “후-여”는 새 쫓을 때 내는 소리다.
녹두새 전봉준에게 미리 경고해 농민군이 남원쪽으로 움직이지 말게 했어야 한다는 후회가 느껴진다.
알다시피 동학농민군은 공주 우금치 전투에서 일본군에 패배했다.
이로써 운동은 돌이킬 수 없게 되었다. 결국 전봉준과 김개남을 비롯한 지도자들이 체포되어 처형되었다.
수많은 농민군들이 가혹한 처벌을 받은 것도 물론이다.
이런 동학농민군들의 비원을 담은 노래는 한둘이 아니었다.
가장 유명한 것은 “새야 새야 파랑새야, 녹두밭에 앉지 마라. 녹두꽃이 떨어지면 청포장사 울고 간다.”란 노래였다.
전봉준을 녹두꽃에 비유해 그의 죽음이 곧 민중의 비극이란 것이다.
그밖에 “솔잎과 댓잎이 파르라니 봄인 줄 알고 찾아 왔는데,
흰눈이 펄펄 흩날리니 송죽이 나를 속였었구나.”란 노래도 널리 유행했다.
솔잎과 댓잎만 보고 겨울을 봄으로 착각했다는 가사는,
농학농민군이 시세판단을 잘못해 너무 일찍 군대를 일으켰다는 비판을 담고 있다. 농민군의 준비부족을 한탄한 것이다.
이들 가요는 내용을 가지고 보면 농민운동이 실패로 돌아간 다음, 그 편에서 만들어 부른 것이 아닌가 짐작된다.
그러나 노래를 채집한 이은상의 조사결과에 따르면 일제시대 민중은 이 노래들을 후일담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그들은 이 모든 노래가 운동이 발생하기 전에 유행한 예언이었다고 믿었다.
민중은 동학농민운동의 최고지도자 전봉준에게 특별한 예지력이 있다고도 생각했다.
1894년 음력 4월경 전라감사 김문현은 농민군을 조기에 진압하기 위해 전봉준을 암살하려고 했다.
그는 자객 2명을 밀파했다.
자객들은 담배장사로 변장해 전봉준에게 접근했다.
그러나 그들은 곧 신분이 탄로되어 붙들리고 말았다.
전봉준은 점술에 밝았기 때문이다.
점괘를 던져본 그는 자객이 온 사실을 금방 알아차렸다고 한다.
믿고 따를 지도자라면 당연히 예언능력이 있어야 된다고 민중은 생각했다.
요즘도 연말이 되면 국가기관이나 공신력을 자랑하는 주요연구소에선 다음해의 경제성장을 전망하곤 한다.
이런 예언, 예시능력은 예나 지금이나 지도자의 필수조건인 모양이다.
새날의 희망
‘정감록’ 연재도 막바지라 맺음말이 없을 수 없다.
지난 한 해 동안 나는 고대부터 현대까지 한국의 예언문화를 다각도로 다루려 노력했다.
하지만 따지고 보면 화제는 조선후기로 집중되는 경향이 있었다.
바로 그 시기에 ‘정감록’이 등장했고, 그것이 한동안 정치 및 종교운동의 모태가 되었다고 믿어지기 때문이다.
조선후기엔 이른바 ‘정감록’ 사건이 참 많기도 했다.
그런데 ‘정감록’은 과연 무슨 사상을 담고 있단 말인가, 하는 의문이 제기될 때가 많다.
아무리 ‘정감록’을 읽어봐도 어떤 체계라든가 사상성이 전혀 발견되지 않는다는 볼멘소리가 들린다.
설사 ‘정감록’에 예고된 정진인(鄭眞人)의 세상이 된다 해도,
그것은 또 하나의 왕조일 뿐 세상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달라질지 잘 알 수 없게 되어 있다는 것이다.
▲ 동학 창시자인 최제우가 포교의 거점으로 삼았던 경북 경주시 가정리 용담정.
17세기 이후 신종교 운동은 많았으나 대부분 실패한 반면 최제우는 ‘정감록’의 터전 위에서 동학 창립에 성공했다.
‘신약성서’의 ‘요한계시록’ 은 예수의 재림이 가져다 줄 인류역사의 완성을 예언하고 있는데,
그에 비해 ‘정감록’은 기껏해야 왕조교체를 논하는 수준이란 평가다.
그렇게만 볼 일이 아니다.
‘정감록’이란 텍스트를 어떻게 읽느냐에 따라 결론은 달라질 수 있다.
‘정감록’을 읽는 나의 방법은 적혀 있는 글자만 읽는 것이 아니다.
그것을 문화적인 맥락에 비추어 읽는 방식이다.
텍스트의 안과 바깥을 부지런히 오가며 ‘정감록’을 읽는 것이다.
그러면 수수께끼가 풀린다.
● 정감록, 지배이데올로기에 맞선 대항이데올로기
‘정감록’은 조선시대의 지배이데올로기인 ‘성리학’에 맞서 평민 지식인들이 준비한 대항 이데올로기였다.
이 점은 19세기 후반에 등장하기 시작한 여러 신종교의 가르침에서 뚜렷이 드러난다.
동학·증산교 및 원불교는 하나같이 곧 밝아올 새 세상을 노래했다.
그들이 선포한 새날은 ‘정감록’이 민중에게 약속한 새 나라였다.
그것은 역사상 존재했던 여러 왕조 가운데 하나가 아니라, 근본적으로 다른 새 하늘, 새 땅이었다.
새 날의 모습은 성리학자들이 추구해온 목가적 이상세계와는 달랐다.
그것은 ‘정감록’으로 빚은 대항 이데올로기의 핵심이었다.
연재 가운데 이미 검토된 사실이지만 동학과 같은 새 종교를 만들기 위한 노력은 17세기 이후 끊임없이 이어졌다.
이런 운동은 ‘정감록’을 매개로 평민 지식인들이 주도했다.
신종교 운동은 실패에 실패를 거듭하면서 나름대로 조직적 경험과 이론을 확립해갔다.
마침내 19세기 후반에는 동학이란 교단으로 화려하게 부활해 민중에게 널리 지지를 받았다.
최제우의 동학은 ‘정감록’운동의 터전 위에서 창립된 것으로,‘정감록’없이는 동학도 존재할 수 없다는 말이 옳다.
나중에 동학의 교명을 천도교로 바꾼 손병희 같은 지도자도 ‘정감록’을 무척 중시했다.
● 오만년 대운, 전환기의 괴질
동학을 비롯한 여러 신종교에서는 조선왕조가 망하고 나면 새 세상이 열린다고 보았다.
바로 ‘정감록’에 예언된 정진인의 나라다.
그때가 되면 문자 그대로 과거에는 찾아볼 수 없는 새롭고 복된 사회가 건설된다고 한다.
이를 두고 오만년대운(五萬年大運)이 새로 시작된다고 표현했다.
▲ 충남 논산시 은진면 관촉사에 있는 미륵불상.
미륵세상은 바로 불교적 이상향이었으며,‘미륵하생경’이란 경전에 자세히 기록돼 있다.
‘정감록’이 선포한 새 세상은 미륵세상이란 것이 많은 사람들의 생각이었다.
동학의 경전 ‘용담유사’에는 ‘오만년’이라는 표현이 여러 번 등장한다.
‘용담가’에 “한울님 하신말씀 개벽 후 오만 년에 네가 또한 첨이로다.”라는 대목이 있다.
세상이 열린 지 오만 년 만에 최제우가 큰 가르침을 열었다는 말이다.
최제우는 인류역사상 최초로 이상적인 종교를 창립했다며,
“무극대도 닦아내니 오만년지 운수로다. 만세일지 장부로서 좋을시고”라고 했다.
불교와 유교는 이미 낡은 것이 되었고, 이제는 인류 최상의 가르침인 동학을 통해 새 세상을 건설할 때라는 것이다.
최제우는 동학의 유행을 천운(天運)이라 했다.
그러면서 보통사람들은 근심걱정 없이 이러한 시운에 따라 최제우가 가르치는 대로 따라오기만 하면 된다 했다.
최제우에 앞서 세상이 바뀔 거란 점을 누누이 강조한 것은 ‘정감록’이었다.
그 유행에 힘입어 사람들은 최제우의 주장을 쉽게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다.
‘정감록’엔 새 세상이 밝아올 때 여러 가지 끔찍한 일이 일어난다고 예언돼 있다.
전쟁과 질병과 굶주림이 그것이다.
최제우는 ‘정감록’ 예언을 대폭 수용해 과도기의 징후를 ‘몽중노소문답가’에서 이렇게 정리한다.
“십이제국 괴질운수 다시개벽 아닐는가.”
여기서 말하는 십이제국이란 문자 그대로 열두 나라가 아니라 온 세상을 가리키는 것으로 봐야 한다.
온 세상이 정체불명의 질병으로 시달리게 된다는 이야기다.
다른 곳에서 그는 ‘삼년괴질’이니 ‘연년괴질’과 같은 말을 한다.
요컨대 여러 해 동안 인류가 조류독감이나 에이즈와 같은 질병으로 시달린 다음에 “개벽”이 완성된다고 보았다.
이것은 마치 성경에서 말세에 큰 환란을 겪은 뒤 예수가 재림한다는 식이다.
조선 후기엔 천주교가 수용되어 종말론이 널리 전파되었다.‘정감록’에 기록된 환란도 그와 관계가 있어 보인다.
최제우의 동학 역시 마찬가지다.
동학은 이름부터 천주교(서학)에 반대한다는 점을 명백히 하고 있지만, 그 주장이 꼭 대립된다고 보기는 어렵다.
동학을 계승한 증산교의 경우는 더욱 심하다.
증산교의 창립자 강일순은 한국에 출생하기 전에 로마 교황청 꼭대기에 오랫동안 머물러 있었다고 했다.
그는 서양신부 마테오리치를 중국으로 파견한 장본인이라고도 했다.
이런 증산교도 전환기에 찾아올 환란에 많은 관심을 가졌다.
구체적으로 들어가면 강일순의 생각은 동양적이었다.
그는 이른바 괴질의 원인을 과거의 모든 악업(惡業)과 신명들의 원한과 보복이 쌓인 것이라 했다.
악업과 신명을 강조한 점에서 그의 생각은 다분히 불교적이다.
강일순은 괴질의 발생을 사계절과 비교한다.
봄과 여름에는 큰 병이 없다가 봄여름의 죄업에 대한 인과응보가 가을에 접어드는 환절기에 병으로 나타난다고 말했다.
말세에는 이런 식으로 큰 병이 세상을 휩쓸게 되는데,
한국에서 최초 발병자가 나오며 병을 치료할 구원의 도(道) 역시 한국에서 일어난다 했다.
괴질은 전라북도 군산과 순창에서 발생해 49일 동안 전국을 휩쓸고는 외국으로 건너가 3년 동안 전 세계를 휩쓴다.
이것이 강일순의 예언이다.
그는 한국을 세계의 중심으로 간주했는데 이런 사고방식은 ‘정감록’에서도 확인된다.
동학의 최제우 역시 오만년 대운을 열 새 가르침을 받았다고 말함으로써, 한국을 세상의 중심으로 여겼다.
19세기 한국은 내우외란이 겹쳐 위기의식이 팽배했다.
종교적인 면에서도 외래종교인 천주교가 들어와 전통사상이 도전에 직면했다.
이런 판국이라 ‘정감록’을 비롯한 각종 예언은 더욱 인기를 끌었고, 마침내 말세의 환란과 새 세상에 대한 기대가 꽃을 피웠다.
동학과 증산교의 등장이 바로 그 보기다.
● 새 세상은 미륵세상
최제우의 글에는 새 세상이 구체적으로 묘사되어 있지 않다.
그러나 강일순의 경우는 달라 다가올 세상을 비교적 자세히 예고했다.
언제나 발뒤꿈치를 땅에 붙이고 살기 마련인 사람들도 하늘에 올라갈 수 있게 된다 했다.
새 세상은 밤도 낮처럼 환해지며, 들에는 백가지 곡식이 풍성하고 만 가지 과일이 다 굵고 커, 음식이 풍성하게 된다.
아름다운 옷도 무척 흔해진다.
강일순이 꿈꾼 새날은 의식이 풍족하고 교통이 편리하게 되며 어둠이 사라진 세상이다.
이런 세상에선 거짓이 사라지고 온갖 차별도 없어지며 수명이 늘어난다고 했다.
많은 사람들은 강일순의 예언이 적중했다고 말한다.
이제 비행기를 타고 얼마든지 하늘을 날게 되었고, 전깃불로 밤을 밝히게 되었다.
또한 대형 할인마트에는 국산과 외국산을 막론하고 음식과 과일 그리고 의복이 넘친다.
헐벗고 굶주리던 옛 모습은 자취를 감췄다.
인권이 잘 보장되며 평균수명도 많이 늘었다.
그런데 알고 보면 강일순이 예고한 새 세상은 불교에서 말하는 미륵세상이다.
‘미륵하생경’에 비슷한 모습이 더욱 자세하게 그려져 있다.
새 세상이 되면 거리마다 번화하기 짝이 없고, 밤마다 향수가 가랑비처럼 내린다 했다.
길바닥은 거울처럼 맑고 깨끗하고 평탄하며, 식량이 풍족해 인구도 번창한다.
보배가 무수하고 감미로운 과일나무, 향기로운 풀과 나무도 무성하다.
기후는 늘 온화하고 화창하며, 계절의 변화가 순조롭고 사람들은 착하고 고운 말만 서로 주고받는다.
대소변을 볼 때면 땅이 저절로 열렸다 닫혀 아무런 냄새도 안 난다.
인간의 수명도 늘어나 보통 8만 4000세까지 살게 된다.
이것이 지금 도솔천에서 수행 중인 미륵이 세상에 내려와 건설할 새 세상의 모습이다.
물질이 지극히 풍족하고, 평화로우며, 아름답고, 누구나 심신에 고통을 받지 않고 오래 사는 이상향이다.
불교신자라면 누구나 이런 세상에 다시 태어나기를 염원하는 것이 당연하다.
불교는 오랫동안 한국의 국교였다.
삼국시대, 통일신라시대 및 고려시대까지 늘 그랬다.
상하를 불문하고 모두 불교를 믿었다.
조선시대에야 사정이 달라졌다.
유교를 국시(國是)로 삼아 불교를 업신여기는 풍조가 유행했다.
그렇지만 많은 사람들은 여전히 불교적 세계관에 익숙했다.
19세기에 강일순이 미래의 이상향을 언급하면서 미륵세상을 사실상 그대로 옮긴 것도 우연이 아니다.
미륵세상은 한국사람 누구나가 지향한 이상향이었다.
그 점을 감안하면 조선후기 신종교운동을 펼친 평민지식인들이 이상세계를 구체적으로 논하지 않은 것도 납득이 된다.
‘정감록’에 미래사회의 모습이 나오지 않는 것도 놀랄 일이 아니다.
그 때는 누구나 미륵세상을 가슴에 품고 있었다.
‘정감록’이든 또는 동학의 경전이든 이상향에 관해 따로 설명할 필요가 없던 시절이다.
조선시대 민중이 궁금했던 것은 이상향의 모습이 아니라 과연 언제 새날이 밝느냐는 문제였다.
‘정감록’이 선포한 새 세상은 미륵세상이란 것이 많은 사람들의 생각이었다.
미륵이 얼마나 중시됐는가는 전국각지에 미륵신앙이 퍼져 있다는 사실에 나타난다.
일제시대 함경도 함흥에서 수집된 무가(巫歌)를 보면, 미륵은 인간을 창조한 조물주로 인식될 정도였다.
바로 그 “미륵님 세월에는 섬(石)으로 말(斗)로 밥을 배불리 많이 먹고 인간 세월이 태평하였다.”
과거 미륵세상이 태평했다는 대목은 앞으로 다가올 미륵세상이 그러리란 기대를 역으로 투사한 것이다.
● 정감록은 후천세계로 귀결
다가올 미륵세상을 신종교에서는 후천(後天)이란 용어로 표현한다.
인류의 역사를 양분해 지난 세상은 선천(先天), 다가올 세상은 후천으로 설명한다.
선천은 각종 모순이 쌓여 불합리하고 상극이 되어 충돌하던 어두운 세상,
후천은 상생의 논리가 지배하는 밝은 세상으로 본다.
원불교 교조 박중빈은 이미 선천과 후천이 교대를 시작했다고 말한다.
이 후천세계는 평화롭고 평등한 문명 세상이다.
그것은 온갖 종류의 차별과 대립이 사라진 지상낙원인데, 한국이 중심적 위치를 차지한다.
‘정감록’이 기약했던 정진인의 나라는 결국 후천세계로 귀결되었다.
■ 정감록과 임진왜란
▲ 보물 제391호인 부산진순절도.
1592년 4월12일 부산진에서 벌어진 임진왜란의 첫번째 전투 장면을 그렸다.
임란은 ‘정감록’이 등장하는 데 큰 영향을 끼쳤다.
‘정감록’이 등장하는 데 큰 영향을 끼친 것은 임진왜란이었다.
선조25년(1592)에 일어난 왜란의 여파는 무척 컸다.
전쟁이 끝나고 얼마 안 돼 전쟁에 관한 예언이 수집되었다.
일종의 사후 약방문인 셈인데, 그것은 뒷날 ‘정감록’에 녹아들었다.
‘조선금석총람’ 하편을 보면 세조5년(1459) 원각(圓覺)이란 승려가 81세를 일기로 입적하며 앞날을 예언했다.
자기가 죽고 130여년이 지난 뒤 고래 같은 도적(왜적)이 쳐들어와 나라가 의지할 곳을 잃게 된다고 했다.
그 때가 되면 산과 냇물에 시체가 쌓이고 피가 천리를 적시는데 서쪽(중국) 병사들이 와서 구원하리라 했다.
임진왜란 발생과 경과를 대강 맞춘 셈.‘산과 냇물에 시체가 쌓인다.’는 식의 표현은 ‘정감록’에도 보인다.
원각은 참혹한 전쟁에도 불구하고 나라가 망하지는 않는다고 했다.
하늘의 신들이 도와주기 때문이란 것이었다.
그는 향불을 태우며 무릎꿇고 관세음보살의 주문을 외우면 화를 입지 않게 되며 오래 살 수 있다고 하였다.
당시 유행한 예언서에 “적은 부산에서 일어나 부산에서 그친다.”라고 돼 있었다 한다.
임진왜란은 일본과 지리적으로 가장 가까운 경상도 부산포에서 시작돼 어찌보면
거리가 매우 먼 평안도 부산에서 끝난다는 이야기였다.
보통은 잘 모르고 있지만 평양 서쪽 30리에 부산 고개라는 곳이 있다.
그 왼쪽 언덕에는 사람 모양의 석상이 있는데 언제 누가 무슨 일로 세웠는지는 알 수 없다 한다.
임진년(1592년) 봄, 석상이 피를 흘려 이웃한 부산 고개까지 흘러 내렸다.
전쟁이 일어날 징조였다.
전라도 광양에선 돌에 적힌 예언서가 발견되었다.
쇠무덤(鐵叢)이라 알려진 곳에서 출토된 예언서에는 이상한 내용이 적혀 있었다.
“동쪽으로 시오리 되는 곳에 황금총이 있을 것이다.
그것을 발견하면 만 배 이익이 될 것인데 그리 되면 아들은 능지기가 되고 노비가 능 주인이 되어 상하가 뒤집힌다.
승려가 승려노릇을 그만 두고 선비가 붓과 먹을 버리게 되며, 베 짜는 여인이 베틀을 버리고 농부가 쟁기를 버린다.”
상하의 질서가 무너지고 사람들이 본업에 충실하지 않는 괴상한 일이 일어난다는 예언이었다.
비슷한 표현이 ‘정감록’에도 있다.
“임진년에는 나라가 셋으로 갈라졌다가 계사년에 다시 평정되리라.
말해 또는 양해에 다시 태평하여질 것이다.
두류산에 들어가 난을 피하는 것이 제일이다.
호서는 조금 편안하고, 한양에 도읍하면 마땅히 팔백년을 갈 것이다.
당나라 병사가 임진강을 건너면 국운이 2백년은 더 하리라.”
이 대목은 ‘정감록’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삼국으로 갈라졌다 하나로 통일된다는 것, 말해와 양해가 대길하다고 예언한 것은 모두 ‘정감록’에 수용되었다.
이런 점을 보더라도 한 번 나온 예언은 어떤 식으론가 계승되게 마련인 것을 알 수 있다.
선조 때 명신인 이항복에 관한 이야기도 전한다.
왜란이 일어나기 한 해 전 겨울날이었다.
이항복이 퇴궐해 막 집에 도착하자 청지기가 뛰어 나와 어느 괴상한 남자가 뵙자고 야단이라 하였다.
그 사나이는 헤진 갓에 다 떨어진 신발을 신고 있었다.
더러운 누더기를 몸에 걸쳤고 좁은 바지 자락은 정강이까지 돌돌 말아 올렸는데 얼굴은 큰 돌 같았고 키가 무척 컸다.
붉은 입을 괴물처럼 열고 한참 동안 무슨 말인가를 늘어놓은 뒤 갑자기 사라졌다.
이웃집에 살던 이덕형이 이를 목격하고 사정을 캐물었다.
이항복은 근심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말하기를,
그 사나이는 자칭 백악산의 야차(범어의 yaksa, 두억시니)라고 하는데
장차 내년에 큰 난리가 터질 텐데 아무도 걱정하는 사람이 없어 이렇게 내게 알려주러 왔다고 하더라고 했다.
이 이야기에 등장하는 야차는 10세기 초 철원에 모습을 드러냈다는 토성 신을 연상케 한다.
그는 고려태조의 등극을 알리는 ‘고경참’을 시장에 내다 판 것으로 돼 있다.
(푸른역사연구소장)
첫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