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화 가루
정 성 천
꽃의 계절이다. 사방을 둘러보아도 울긋불긋한 꽃들의 잔치로 시끌시끌하다. 꽃들은 향기로 말을 하는가 보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자두꽃 향기가 이 골짜기에 왁자지껄하더니만 지금은 라일락 꽃향기와 아카시아 꽃향기의 의사 표시가 너무 강해서 창문을 열 수가 없다. 밖에라도 나가는 날이면 향긋하면서도 알싸한 꽃향기에 취해 나비와 벌이 아니라도 몽환 속을 거니는 것 같은 야릇함에 휩싸인다. 왜 5월을 계절의 여왕이라고 하는지 그 이유를 충분히 알 것 같다. 시각의 화사함은 두 말할 것도 없고 후각의 요란함은 가히 여왕의 나들이에 걸 맞는 축제의 한마당이라 할만하다.
여왕의 행차에 빠질 수 없는 것이 또한 빵파르의 나팔소리와 더불어 꽃잎을 허공에 뿌리는 꽃보라가 아니겠는가? 빵파르는 꾀꼬리의 몫이다. 5월의 시작과 함께 여왕의 등장을 알리기라도 하는 듯이 꾀꼬리가 울기 시작한다. 다른 새들은 봄을 기다리기라도 한 듯이 봄의 시작과 더불어 앞서거니 뒤서거니 울기 시작하지만 꾀꼬리는 변덕스러운 꽃샘추위가 완전히 물러 간 5월이 되어야 등장하는 것이다. 가히 여왕의 나팔수다운 새라고 할 수 있겠다.
꽃 보라의 담당은 소나무다. 소나무는 여왕의 행차를 축하하는 노오란 송화 가루를 중요한 행사 때 흩뿌리는 꽃 보라처럼 허공에 날린다. 5월은 아침이슬 함초롬히 머금은 붓꽃 한 다발 가슴에 안고 꾀꼬리 울음소리를 빵파르 삼아 꽃 보라처럼 날리는 노오란 송화 가루를 맞으며 우리 정원에 왕림하시는 여왕인 것이다. 나는 푸르러진 잔디밭에 서서 옷깃을 여미고 연둣빛 하늘을 우러르며 다시 한 번 더 이 좋은 계절을 볼 수 있게 됨을 감사하는 마음으로 정중히 여왕을 알현한다.
그런데 원래 큰 잔치에는 뒤치다꺼리의 수고스러움이 많은 법이다. 아내는 송화 가루 때문에 빨래를 밖에 말리지 못한다고 투덜댄다. 자동차 보닛위나, 장독대위나, 집 앞 데크위나 심지어는 집안 까지 들어온 송화 가루를 치워야하는 수고스러움이 무척 성가심을 주는 모양이다. 마치 금의환향하는 스포츠 스타들의 시가행진 때 꽃 보라로 날린 색종이 조각들을 치워야하는 거리청소부들의 푸념처럼 아내의 건짜증도 오월이라는 화려한 잔치에 그냥 묻어 흘려버려도 좋을 것이다. 하지만 걱정스러운 점이 한 가지 있다. 송화 가루가 해마다 자꾸 더 많아진다는 것이다. 예전에는 그러지 않았는데 비라도 오는 날이면 빗물 고이는 웅덩이에는 어김없이 송화 가루가 노랗게 수면을 덮을 정도로 많아 졌다.
왜 송화 가루가 해마다 점점 더 많아지는 걸까? 언젠가 신문에서 읽었던 앙스트 블루테(angst blute), 즉 불안개화와 어떤 연관이 있는 것은 아닐까? 평소에 꽃을 잘 피우지 않는 전나무는 죽음을 앞둔 마지막 해에 유난히 화려한 꽃을 피운다고 한다. 그리고 이렇게 죽은 전나무는 스트라스 바리우스 바이올린, 과르네리 델 제수 첼로 같은 명악기를 만드는데 재료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죽음의 불안이 다가오는 죽기 전 마지막 해에 생애 최고의 꽃을 피우고, 그의 몸은 죽어서 역사에 길이 남는 명악기에 헌납된다는 것이다.
지구 온난화로 우리나라의 기후에도 많은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봄이 빨리 도래하고 그 기간도 점점 짧아져 가는 것 같다. 이 기후 변화로 우리나라 소나무들이 죽어가고 있다고 한다. 울진의 200년 된 금강송들이 하나 둘 죽어가고 있고 그 이유는 점점 빨라져 가는 봄 때문이라고 전문가들은 진단한다. 송화 가루가 점점 더 많아지는 것도 소나무의 죽음을 예고하는 앙스트 블루테와 관련이 없지 않을 것이다. 어쩌면 1세기 후의 우리 자손들은 바위 절벽 사이에 뒤 틀리며 자라나 고고한 자연의 예술품이 된 우리 조선 소나무의 흥취를 감상하지 못할 지도 모른다.
나무뿐만 아니라 생명을 가진 모든 생명체들은 죽는 마지막 순간에는 종족을 보존하려는 행동을 하는 것은 아닐까? 고교시절 동네 아저씨가 너구리 한 마리를 올무로 생포한 적이 있었다. 모두들 가난하게 살 때이니까 그 너구리를 잡아먹기 위하여 감나무에 목을 매달아 죽이는 것을 목격한 일이 있었다. 발버둥 치며 죽어 가는 그 너구리가 불쌍하기도 하고 호기심도 들어서 차마 그 자리를 뜨지 못하고 지켜보고 있었는데 충격적인 일을 목격했다.
너구리가 마지막 숨이 넘어 가는 절명의 순간에 뒷다리 사이의 생식기에서 하얀 액체가 마구 분출되는 것이 아닌가? 처음에는 그 것이 오줌인 줄 알았다. 자세히 보니 그 것은 너구리의 정액이었다. 숨이 넘어가는 마지막 순간에 너구리 사타구니를 흥건히 적시던 그 하얀 액체와 남김없이 사정을 다함으로서 살아 있는 것에 대한 마지막 의무를 마친다는 그 이유가 어린 나에게 커다란 충격으로 다가왔다.
인간도 마찬가지라고 한다. 지금은 전기 충격으로 사형을 집행하지만 옛날 교수형으로 사형을 집행하던 시절에는 젊은 남자 사형수들은 마지막 절명의 순간에는 반드시 사정을 한다고 책에서 읽은 적이 있었다. 마지막 종족 보존행위는 사회적, 인간적, 동물적인 그 어떤 테두리도 모두 벗어난 보다 근원적인 생명의 본능 행위인 것 같다.
송화 가루가 많아지는 것이 소나무의 종족보전을 위한 몸부림이라고 생각하니 칼칼해진 목과 시도 때도 없이 닦아내야하는 자동차위의 노오란 먼지도 참아 낼만하다. 우리에게 불편함과 성가심을 주는 그 노오란 송화 가루에서 자연의 오묘한 의미를 읽고 자연의 엄숙함에 저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이 세상에 생명을 가지고 태어나는 어떠한 생명체라도 후손을 갖는 것이 생명을 부여 받은 자의 신성한 책무를 다하는 일이라는 사실이 새삼 가슴으로 깨닫게 된다.
요즈음 결혼을 하지 않으려는 젊은이들도 많고 설사 결혼을 하더라도 아이를 갖지 않으려는 젊은 부부들도 많다고 하는데 모두들 한 번 쯤은 저 송화 가루가 주는 의미를 깊이 생각해 봐야 하지 않을까? 인간이 늙어 간다는 것은 자연의 관심에서 멀어져 가는 것이다. 자연의 관심은 어린아이와 젊은이들 즉 앞으로 신성한 책무를 할 수 있는 사람들에게만 쏠려 있다.
신성한 책무를 할 수 있는 시간도 길 것 같지만 그리 길지 않다. 자연의 관심이 내게서 멀어지기 전에 서둘러 책무를 마쳐야 하지 않을까? 짝을 찾기 위해 밤새도록 피를 토하듯 울고 있는 저 소쩍새처럼 모두가 내 반쪽을 찾는 일에 최선을 다하고 결혼한 부부들은 아이를 가지기위해 최선을 다하는 부부들이 되어야 한다. 그래야 자연의 무관심인 늙음이 나에게 도래해도 존재적 자유로움을 떳떳하게 누릴 수 있는 것이다.
늦게 결혼을 하고서도 애써 임신한 딸아이가 자연의 큰 뜻을 저버리지 않은 것 같아 다행스럽기도 하고 고맙기도 하고 한편 대견하다는 생각을 새삼 하게 된다. 내일 모레 친정 다녀간다고 집에 내려온다고 하니 만나면 꼭 안고 등이라도 토닥여 주고 싶구나.
첫댓글 오월엔 결혼합시다. 처녀 총각들 얼른 결혼합시다. 자연에 대한 숭고한 의무를 다 합시다! ^^
오월은 좋은 계절이지요. 이 참에 충전을 듬뿍 해두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