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세종의 가족들
세종은 총 6명의 부인에게서 22명의 자녀를 두었다. 이들 중 정비 소헌왕후 심씨가 8남 2녀,
영빈 강씨 1남, 신빈 김씨 6남, 혜빈 양씨 3남, 숙의 이씨 1녀, 상침 송씨가 1녀를 낳았다.
조선의 제4대 왕인 세종(충녕대군)은, 1397년에 태어나 1450년에 세상을 떴다. 재위 기간은
1418년 8월부터 1450년 2월까지로 31년 6개월간이다. 아래에 세종의 가계도를 약술한다.
세종은 태종과 원경왕후의 셋째아들로 조선의 제4대 왕이 되었으며, 부인 6명에게서 18남
4녀의 자녀를 두었다.
정비 소헌왕후 심씨에게서 8남 2녀를 두었는데, 조선의 제5대 왕인 문종, 제7대 왕인
세조(수양대군), 안평대군, 임영대군, 광평대군, 금성대군, 평원대군, 영응대군, 정소공주,
정의공주가
그들이다. 영빈 강씨에게서는 1남 화의군을 두었으며, 신빈 김씨에게서는 계양군, 의창군,
밀성군, 익현군, 영해군, 담양군 등 6남을 두었다. 또한 혜빈 양씨에게서 한남군, 수춘군,
영풍군 등 3남을 두었고, 숙원 이씨에게서 1녀 정안옹주를, 상침 송씨에게서 1녀 정현옹주를
두었다.
소헌왕후 심씨(1395-1446)
세종의 정비 소헌왕후 심씨의 본관은 청송으로 문하시중 심덕부의 손녀이고, 영의정 심온의
딸이다. 1408년 충녕군 도와 가례를 올려 빈이 되고, 경숙옹주에 봉해졌다. 1417년
삼한국대부인에 봉해지고 이듬해 6월 충녕대군이 왕세자에 책봉되자 경빈에 봉해졌으며, 같은
해 8월에 내선을 받아 세종이 즉위하자 12월에 왕후로 책봉되어 공비로 불려졌다. 하지만
1432년에 중전에게 별칭을 붙이는 것이 관습에 없다 하여 공비라는 호칭은 없어지고 그냥
왕비로 개봉되었다.
심씨의 아버지 심온이 세종 즉위 초에 영의정에 올라 사은사로 명나라에서 귀환하던 중,
아우 심청이 군국대사를 상왕인 태종이 처리한다고 불평을 했다가 옥사가 일어났다. 심온은
이 사건의 수괴로 지목되어 수원으로 폄출되어 사사되었다. 이 때문에 심씨를 폐하자는
논의가 있었으나, 그녀의 내조의 공이 인정되어 폐비 사태는 면하였다.
심씨는 8남 2녀의 자녀를 두었는데 맏아들 향(문종)을 비롯하여 수양(세조), 안평, 임영,
광평, 금성, 평원, 영응 등 아들 8형제와 정소, 정의 등 딸 2자매가 그들이다.
소헌왕후 심씨는 1446년 52세로 죽었으며, 그녀의 능은 영릉으로 세종이 승하한 뒤
합장하여 조선 최초의 합장릉이 되었다.
세종은 조선의 역대 왕들 중에 아들을 가장 많이 둔 왕이었다. 18명의 아들 중에 정비
심씨의 소생이 8명, 영빈 강씨의 소생이 화의 1명, 신빈 김씨의 소생이 계양, 의창, 밀성, 익현,
영해, 담양 등 6명, 혜빈 양씨의 소생이 한남, 수춘, 영풍 등 3명이었다. 이들 중 소헌왕후
소생인 향과 수양은 등극하여 문종과 세조의 묘호를 얻는다. 이들 중 향과 수양은 문종, 세조
편에서 다루기로 하고 정비 소생의 나머지 여섯 아들의 삶을 아래에 약술한다.
안평대군(1418-1453)
1418년 세종과 소헌왕후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이름은 용, 호는 비해당, 낭간거사, 매죽헌
등이다. 1428년 안평대군에 봉해졌으며 이듬해 좌부대언 정연의 딸과 결혼하였고 1430년
성균관에 입학하였다.
함경도에 육진이 신설되자 1438년 왕자들과 함께 야인을 토벌하였으며, 권신 황보 인,
김종서 등 문신들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며 수양대군측의 무신 세력과 맞서 인사행정인
황표정사를 장악하는 등 점차 조정의 배후 실력자로 부상하였다.
1452년 단종이 즉위한 후, 수양대군은 사은사로 명나라를 다녀오고 난 뒤 황표정사를
폐지하였다. 안평은 이에 반발하여 황표정사 회복에 주력했으나 이듬해 계유정난으로 황보 인,
김종서 등이 살해된 뒤 자신도 강화도로 귀양갔다가 교동으로 옮긴 후 36세를 일기로
사사되었다.
안평은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하고 시, 서, 화 모두에 능해 삼절이라 불리었고 당대 제일의
서예가로 명성을 떨쳤다. 그의 서풍은 고려말의 조맹부에게서 영향을 받기도 했지만 자신의
개성을 강조해 독자적인 영역을 확보하고 있었다. 그 때문에 조선 전기에는 그의 서풍이 크게
유행하기도 했다.
현존하는 그의 작품으로 안견의 '몽유도원도 발문'이 대표적이며, 법첩과 각첩으로 전하는
작품들이 다수 있다. 금석문으로는 경기도 광주 구(옛 구)영릉터에 있다가 현재 서울 동대문구
청량리동 세종대왕기념사업회에 옮겨놓은 '세종대왕 영릉신도비'의 비문이 대표적이다.
임영대군(1419-1469)
세종과 소헌왕후의 넷째 아들로 이름은 구이며, 자는 헌지이다. 1428년 대광보국 임영대군에
봉해졌으며, 1430년 안평과 함께 성균관에 입학하였다.
임영은 세종의 총애를 받아 1442년 원윤이 되었으며, 1445년에는 세종의 명을 받아 총통
제작을 감독하였고, 1450년(문종 1년)에 문종의 명을 받아 화차를 제작하였다. 그리고 세조가
정권을 잡자 그를 보좌하여 신임을 받았다.
광평대군(1425-1444)
세종과 소헌왕후의 다섯째 아들로 이름은 여, 자는 환지이다. 1432년 광평대군으로 봉해지고
1436년에 신자수의 딸과 결혼했으며, 그 해에 성균관에 입학하였다.
광평은 '효경', '소학', '사서삼경', '좌전' 등에 능통하였고 이백, 두보, 구양수, 소식 등의 문집
을
읽고 국어, 음률, 산수에도 밝았다.
1437년 태조의 일곱째 아들이자 신덕왕후 강씨의 첫 번째 소생인 방번에게 봉사손으로 입양,
아버지 세종과는 오촌지간이 되어 왕가의 종실이 되었다. 이듬해에 새로 개척한 북방 육진의
국방 강화 및 풍속 교화를 위하여 서울에 경재소를 두고 종친으로 하여금 주관하도록 할 때
종성을 맡았다.
성품이 너그럽고 총명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으며 서예와 격구에도 능했지만 아깝게도
20세의 나이로 요절했다.
금성대군(1426-1457)
세종과 소헌왕후의 여섯째 아들로 이름은 유이다. 1433년 금성대군에 봉해지고 1437년 참찬
최사강의 딸과 혼인했으며, 그 해 태조의 여덟째 아들이자 신덕왕후 강씨의 두 번째 소생인
방석의
봉사손으로 출계하였다.
1452년 단종이 즉위하자 수양대군과 함께 사정전으로 불려가 물품을 하사받으면서 왕을
좌우에서 보필할 것을 약속하였다. 그리고 수양대군이 정권을 탈취하자 이에 반발하여 삭녕에
유배당했다. 이후 유배지를 전전하다가 단종이 노산군으로 강봉되어 강원도 영월로
유배당하자 자신의 유배지였던 순흥에서 부사 이보흠과 함께 모의하여 단종 복위 계획을 세웠다.
하지만 관노의 고발로 실패로 돌아가 반역죄로 처형당했다. 이때가 그의 나이 32세였다.
1791년(정조 15년) 단종을 위해 충성을 바친 신하들에게 어정배식록을 편정할 때에 육종영의
한 사람으로 선정되었다.
평원대군(1427-1445)
세종과 소헌왕후의 일곱째 아들로 이름은 임, 자는 진지이다. 1434년 8세에 평원대군으로
봉군되고 1437년 종학에 입학, 호군 홍이용의 딸과 결혼했다. 이후 학문에 진력하다가 1445년
1월 두창(천연두)으로 죽었다. 광평대군이 죽은 이듬해 닥친 그의 갑작스런 죽음은 세종을
무척 고통스럽게 했으며, 세종의 신병을 악화시키는 원인이 되기도 했다. 또한 세종은 아들의
죽음을 경험한 후 불교를 숭상하기도 했는데, 이 때문에 한동안 조선의 억불정책은
누그러지는 경향을 보였다.
자식이 없었기 때문에 예종의 둘째 아들인 제안대군 현이 그의 뒤를 잇게 되었다.
영응대군(1434-1467)
세종과 소헌왕후의 여덟째 아들이며 이름은 염이다. 1441년 영흥대군에 봉해지고 1443년
역양대군, 1447년에 영응대군으로 개봉되었다. 세종의 총애가 지극하여, 1450년 세종은
영응대군의 저택인 동별궁에서 별세하였다. 1463년 '명황계감'의 가사를 한글로 번역하였고
글씨와 그림에 능했으며, 음악에도 조예가 깊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