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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몽주
님 향한 일편단심(一片丹心)이야 가싈 줄이 이시랴 |
백설(白雪)이 잦아진 골에 구루미 머흐레라. 반가온 매화(梅花)는 어느 곳에 픠엿는가. 석양(夕陽)에 홀로 셔 이셔 갈 곳 몰라 하노라. 목은(牧隱) 이색(李穡,1328-1396)의 시조입니다. 단순히 외로움을 읊은 시라고 하기에는 시조 속에 들어있는 상징적 시어들이 눈에 걸립니다. ‘백설(白雪)’은 고려 유신을, ‘구름’은 신흥세력, 즉 이성계 일파를 뜻합니다. 그렇다면 이 시조의 초장은 고려의 신하는 사라져가고 신흥세력이 부상하는 것을 안타까워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하겠습니다. 그렇다면 중장의 ‘반가온 매화(梅花)’는 말할 것도 없이 고려의 몰락을 걱정하는 고려의 ‘우국지사(憂國之士)’를 뜻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국지사가 있다한 들 고려의 ‘석양(夕陽)’, 즉 몰락을 막을 길은 없었습니다. 역사는 그렇게 흐르나 봅니다. 이색에게는 두 명의 뛰어난 제자가 있었습니다. 한 사람이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1337-1392)이고, 다른 한 사람이 삼봉(三峰) 정도전(鄭道傳,1337-1398)입니다. 이 둘은 일찍이 성리학을 받아들여 성리학적 세계관으로 현실정치를 바라보고 개혁적 성향을 갖게 됩니다. 불교의 폐단을 지적하는 데에도 둘은 의견을 같이 했으며, 원나라를 적대시하고 명나라와의 친분관계를 유지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에도 같은 입장이었습니다. 고려의 정치를 혁신하고 토지개혁을 실행해야 한다는 점에서도 둘은 동지였습니다. 그러나 이 둘은 그 방법에 있어서만큼은 양보할 수 없는 차이점을 갖고 있었습니다. 정몽주는 고려 사회를 유지할 수 있는 점진적 개혁을 주장했던 반면에 정도전은 공사전(公私田)의 급진적 개혁을 요구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정몽주는 개혁파였다면 정도전은 혁명파였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결국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1388) 이후, 이성계 세력이 지배세력이 되면서 우왕을 폐하고 공양왕을 옹립합니다. 이러한 가운데서도 정몽주와 정도전의 비록 불완전한 것이지만 공조관계는 유지됩니다. 하지만 공양왕 시절에 이전의 공사전적(公私田籍)을 완전히 불사르는 혁명적 토지개혁이 단행됩니다. 권문귀족 세력들은 자신의 발판을 잃었고 민중들은 환호합니다. 혁명의 기운이 이제 완전히 무르익게 됩니다. 여기서부터 정몽주와 정도전은 길이 달라집니다. 정도전은 이성계와 함께 혁명을 꿈꾸었으나, 정몽주는 이성계에 반대하여 단심(丹心)으로 몰락해가는 고려왕조를 수호하려 합니다. 처음은 같았으나 나중은 다른 두 개의 길. 동원이류(同源異流)! 역사는 혁명으로 기울어지고 정몽주는 죽음으로 다가갑니다. 이방원의 하여가(何如歌)에 대답으로 불렀다는 정몽주의 단심가(丹心歌)를 남긴 채. 이 몸이 주거 주거 일백 번 고쳐 주거, 백골(白骨)이 진토(塵土)되여 넉시라도 잇고 업고, 님 향한 일편단심(一片丹心)이야 가싈 줄이 이시랴. 아시다시피 정몽주는 이방원의 수하인 조영규 등에 의해 선죽교에서 철퇴를 맞아 죽습니다. 그의 목은 저자에 걸리고 정몽주의 세력 역시 제거됩니다. 혁명은 이처럼 냉혹한 것입니다. 자신과 같은 편마저도 제거해야 할 만큼. 그러나 역사의 아이러니는 여기에서 멈추지 않습니다. 이성계와 함께 조선을 건국하고 조선왕조의 시스템을 설계하고 끝까지 충성을 다했던 정도전마저도 결국은 이방원에 의하여 제거됩니다. 토사구팽(兎死狗烹)! 한편 이방원은 왕이 되자 오히려 자신이 사주하여 죽인 정몽주에게 시호를 내리고 복권을 단행합니다. 죽은 자는 살아나고 산 자는 죽게 되는 이 어처구니없는 사태. 나는 죽은 자를 살리는 이 조선왕조의 통치술의 음험함에 몸서리칩니다. 그것은 산 자의 충성보다는 죽음으로 충성하는 자를 더 높이 사려는 극단적인 통치술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지배 방식은 조선조의 이후 역사에도 계속됩니다. 보통 조선조의 유학의 흐름을 정몽주로 대표되는 의리파(義理派) 계열과 정도전으로 대표되는 사공파(事功派)로 구별하거니와, 이 두 흐름 중에서 높은 가치 서열을 갖고 성리학의 도통(道統)으로 대접받는 것이 바로 의리파입니다. 이 의리파는 정몽주(鄭夢周)로 시작되어 길재(吉再), 김숙자(金叔滋), 김종직(金宗直), 김굉필(金宏弼), 조광조(趙光祖)로 이어지는 사림(士林) 세력입니다. 사림이 어떤 세력입니까. 평소에는 산림에 묻혀 성리학을 연구하고 후배양성에 힘쓰다가 왕이 부르면 나아가 순수한 자신의 이상을 펼치려했던 이데올로그들 아닙니까. 뭔가 이론적인 것 같고 뭔가 순수한 것 같고 뭔가 고결한 것 같은 이들 사림파에 비해, 정도전에서 시작되는 사공파(事功派)들은 그 반대적 이미지, 즉 뭔가 무식한 것 같고, 뭔가 불순한 것 같고, 뭔가 천박한 것 같은 부정성을 띄게 됩니다. 이런 긍정/부정성의 이미지를 띤 두 세력을 적절히 이용하고 갈아 치운 것이 바로 조선 왕조의 통치술이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물론 이런 저의 평가가 극단적인 것일 수 있습니다. 권력 가까이에 있는 정치가치고 욕심을 갖지 않는 자가 드물었을 것이며, 권력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자일수록 현실에 대한 개혁적 성향을 갖게 되지만, 따라서 똥물 가까이에는 파리가 들끓고 청류(淸流)에서는 깨끗한 물고기가 살았겠지만, 역으로 진흙탕 속에서 연꽃이 피고, 깨끗하게 정화된 물에서는 생물이 살 수 없다는 것도 진실이기 때문입니다. 이론・원칙 중심의 사림파에 대한 과도한 긍정과 실무・현실 중심의 사공파에 대한 과도한 부정은 역으로 비현실적이고 시대착오적인 흐름을 형성하게 됩니다. 저는 조선조 후기의 사림파 내부의 명분론에 입각한 당파싸움에서 그 부정적 흐름을 읽습니다. 물론 사림파 내부에서도 자기반성과 자기 혁신을 하며 실학이라고 하는 하나의 흐름을 형성하지만, 실학은 이후 조선조를 장악했다기보다는 시도조차 되어보지 못한 미완의 프로그램에 그치고 말았다는 점에서 조선조 정치역사는 사림의 총체적 실패가 아니었는가 생각합니다.
정몽주는 자신의 정치적 신념에 의해서 죽었습니다. 그리고 그 죽음은 당대의 가치관에 입각해 보건대 의미 있는 죽음에 틀림없습니다. 변절과 변신을 무기로 삼는 오늘날의 정치 현실에서 보자면 우리에게 정작 필요한 것은 정몽주와 같은 인물일 것입니다. 그러나 정몽주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여기서 멈춰져야 합니다. 더욱이 정치적 숙청을 감행했던 세력에 의해서 미화되는 일은 없었어야 했습니다. 정몽주의 입장에서 보더라도, 자신을 제거했던 세력의 의한 정치적 복원은 수치스러운 일이며 정몽주 스스로도 결코 바라지 않았을 일입니다. 만약에 정몽주의 넋이 있다면 어찌 통탄할 일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역사는 정몽주에게 죽음의 대가로 승리의 월계관을 선사했고, 그 월계관을 계승한 세력들이 의리와 명분을 장악하게 되었고, 그 의리와 명분 때문에 조선조 역사는 이후 한번도 혁명을 경험하지 못한 채 지리멸렬해지고 말았습니다. 혁명세력은 더 이상 혁명을 기대하지 않았고, 명분 세력 또한 더 이상 혁명을 꿈꾸지 않았습니다. 혁명의 시도가 있었다면 민중들의 분노에 찬 미완의 혁명이 있었을 뿐입니다. 그러기에 고려왕조의 몰락을 애도하며 읊었다는 삼봉(三峰) 정도전(鄭道傳,1337-1398)의 다음과 같은 시조가 역설적으로 조선 왕조에 대한 진혼곡(鎭魂曲)처럼 메아리치는 것입니다. 선인교(仙人橋) 나린 물이 자하동(紫霞洞)에 흘너 드러, 반천년(半千年) 왕업(王業)이 물소리 뿐이로다. 아희야, 고국흥망(故國興亡)을 무러 무삼 하리오. ■ |
출처 :리얼리스트 100 원문보기▶ 글쓴이 : 김경윤 |
첫댓글 선생님 덕분에 포은 문예관에서 유익한 시간을 가져 봅니다. 건강하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