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Ⅲ
우리나라 산악운동의 선구적 활동을 한 산악단체인 한국산악회는 그 뿌리를 백령회에 두고 있다. 한국산악회는 《한국산악회 70년》(2016)에서, 백령회는 1937년 설립되었고 “김정태의 《登山 50年》에 따르면 백령(白領)의 ‘백(白)’은 백의민족과 백두산, 그리고 순결을 의미한다. ‘령(領)’은 높은 뜻과 이상의 산을 지향한다는 의미”라고 기록하고 있다. 또한 등산사가 손경석은 《韓國登山史》(2010)에서 백령회는 “1933~34년에 금요회로 시작한 백령회는 초기에 정치적인 비밀결사가 아닌 등산 동호인의 산악단체였다. 엄흥섭·양두철·주형렬 등이 창설하였고, 엄흥섭의 지도력에 의해 금요회라는 친목회로부터 시작했다.”고 한다.
백령회에 대한 기록은 전부 김정태의 기록에 기초하는데, 그의 여러 기록 중 자전적 등반기인 《登山 50年》(1976)이 알려져 있고 그가 등산사 정립을 위해 쓴 월간 《山》(1983. 9)의 〈한국 등산사 考察⑩ - 정사초록〉의 기고문 등이 있다. 《登山 50年》과는 일부 차이는 있으나 이를 수정·보완된 기록으로 보고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한국 등산사 考察⑩ - 정사초록〉의 백령회 기록
한국 등산사 考察⑩ - 정사초록 | 김정태 선생 유고집 외 자료기록 | |
설립 | 1937. 3. 1. | 창립일을 언급한 유일한 기록, 이 기록을 근거로 대개 1937년을 설립으로 표기 |
설립 회원 | 嚴興燮, 朱亨烈, 梁斗喆, 金鼎泰 등 8명 | 김정태는 설립 이후 입회 |
배경 | - 1929년 북한산 백운대 정면 상반부 초등반 - 1930년 인수봉에 오른 李春峰, 金鼎泰 등 5명의 白雲會 활동 - 1931년 도봉산 만장봉 추락(그중의 李奉九, 養正高 2년생)사고 - 1936년 여름, 금강산 집선봉 동복릉 제2봉에 오른 嚴興雙, 李在碎, 金鼎泰 등 7명의 회의 설립 의견 - 日政에 대한 반발 - 조선일보사의 백두산 탐험과 손기정 선수의 올림픽 마라톤 우승 | - 1929년(14세) 봄 백운대 등산 기록 없음 - 첫 인수봉 등반은 1936년 4월 29일 - 이봉구의 만장봉 추락은 1936년 5월 31일 - 1936년 금강산 등반 등반 기록 없음 |
성격 | 비밀결사 | 정치적 비밀결사는 아니라는 회원 전언 |
회명 | -민족적인 자각과 자립 -白嶺의 「白」은 백의민족과 백두산과 순결을 뜻하는 것이며 「嶺」은 높은 의지와 이상의 산을 지향 | - 엄흥섭 주석의 개인 성향과 회의 운영 방침 - 양두철은 백령의 령은 ‘領’의 의미라 언급 |
회원 | 회장격인 嚴興燮(三國석탄(주) 기술실장)씨를 비롯, 朱亨烈, 渠斗喆, 金鼎泰(이상 리더급) 嚴興雙(同名異人, 製靴業, 필자의 파트너), 李億允, 李元世, 韋亨順 등이 창설 멤버 | 김정태는 엄흥섭(제화 기술자)과 1936년 12월 6일 도봉산 선인봉 첫 만남 이후 등반을 함께 함 |
2차 회원 | -蔡淑, 李在浩, 朴順萬, 方炫, 金正浩, 柳在善, 李起晚의 3명 등 10명과 이를 따르는 嚴翼煥, 李熙成, 金鍾南 등 고교생들이 가세 | 1942년 회원 주소록은 엄흥섭 외 13명으로 총 14명의 회원 기록 |
후원 | YMCA 총무 玄東完 | 엄흥섭의 스승으로 회의 정신적 후원자 역할 |
정기 모임 | 매주 금요일에 모임, 월 1회 과제 연구회 | 1943년 월례회에서 과제 연구 활동 기록 |
결의 | 평소에는 등산활동을 정진하면서 민족자립을 생각하고 언제든지 이를 위해 一朝有事시에는 앞장서 나가 싸울 것을 맹세하며 다짐 | - ‘민족 자립’은 엄흥섭 주석의 개인 성향과 회의 경영 방침 - 엄흥섭이 1943년 11월 월례회의 ‘혈맹단식적 결의’를 언급 |
활동 | - 각자 자기 파티 본위로 자유롭게 활동하며 일제에 대한 보안과 침투를 위해 일본인과 표면상으로는 동조하고 이용도 하자는 매우 현실적이고 탄력성 있는 방침 - 일본인들의 등반실적을 앞질러 리드하게 되었다. 그리고 40년대부터는 공동의 사업과 직장까지도 가지고 발전시킬 직장까지도 가지고 발전 | - 당시 등반 파티별 등반이 주류였고 김정태 는 1940년까지 주로 조선산악회 한인 파티로서 활동 - 김정태·엄흥섭(제화기술자)·양두철·주형렬의 리딩으로 서울근교, 금강산에서 암벽등반 및 적설기 등반에 성과와 징용을 피해 삼국석탄에 근무 |
김정태는 백령회의 설립연도를 1937년 3월 1일이라 했으나 이에 대해 다른 증언이나 기록은 없고 대개 설립 연도 외에 설립일을 표기하는 경우가 거의 없어 공식적으로 인정하고 있지는 않는 듯하다.
김정태는 《라테르네》(1954)의 〈백령회 회고록〉에서 “이러한들 적 때 엄흥섭 형(엄성환 군의 부친)을 만났다. 나의 세컨드 엄동지로부터 동성동명의 엄흥섭 형의 존재를 알았으며 또한 초면 소개를 받았다. 그를 알고 조금 후 그를 중심으로 백령회(白嶺会)라는 모임이 생겼다는 것과 그들의 열열한 수련과 진출이 있음을 들었다.”고 하였는데, 그가 제화기술자 엄흥섭을 만난 것은 1936년 12월 6일 도봉산 선인봉이다. 세브란스의전산악부 방현도 김정태가 조선산악회 가입(1937년 6월 1일, 정식회원은 1938년 1월 11일)한 후 몇 년이 지나 백령회가 설립됐다고 하니 적어도 1937년 3월 1일은 아니다.
설립 배경으로 언급한 김정태 자신의 등반과 활동을 《김정태 선생 유고집》의 일기에서 살펴보면, 1929년 그가 14세에 올랐다는 백운대 상등부인 소위 말등바위 크랙 초등반은 코스 난이도나 이후 그가 1936년 4월 29일에 첫 암벽등반을 한 것으로 보아 실제 등반 여부가 불분명 하고 그가 첫 인수봉 등반이라 한 1930년은 실제 1936년 4월 29일이며, 이봉구의 만장봉 추락은 1936년 5월 31일로 기록되어 있고 1936년 금강산 등반 역시 그 해 금강산 등반은 없고 한인 클라이머의 첫 금강산 초등반 기록임에도 관련 기록을 명확히 전하고 있지 않다. 그리고 그가 1936년 7월 15일, 그를 인수봉 선등으로 이끈 이수창과 이춘봉, 이봉구 등의 지인·인척과 산악회를 만들어 암벽등반 활동한 바가 있다.
그는 자신의 경험을 배경으로 설명하고 있지만 실제 기록과는 연도를 달리하고 있고 알려진 대로 그가 금요회 설립에 직접 참여하지는 않았다.
김정태의 집선봉 동북릉 제2봉 초등 기록
연월 | 대상지 | 등반자 | 출처 |
1936.여름 | 금강산 집선봉 동북릉 제2봉 | 嚴興雙, 李在洙, 金鼎泰 등 7명 | 〈한국등산사 考察⑩ –正史抄錄〉의 〈비밀결사 白嶺会〉 |
1936. 7 | 금강산 집선봉 동북릉 제II봉 꿀롸르 초등반 | 엄흥섭, 김정태 등 7명(신혼부부 한 쌍을 포함) | 〈한국등산사 考察⑨ –正史抄錄〉 |
1937. 7~ 8 | 금강산 집선봉 동북릉 제II봉 꿀롸르 초등반 | 엄흥섭, 김정태 등 7명(신혼부부 한 쌍을 포함) | 《등산》(1970, 9) ‘집선 제II봉 꿀롸르 초등반’ |
1936. 10 | C, II 峰꿀롸르岩溪초등 | 金鼎泰, 嚴興燮(故) | 《등산》(1970, 9) 金剛山 岩壁登攀 抄錄(1932~43년간) |
회원에 대한 기록은 손경석이 한국등산사에서 언급했듯이 명확하지 않은 부분이 있고 박순만과 양정고보 고희성 등 학생 산악부원은 정식회원이 아니라는 것이 확인된 정도이다.
공식적으로 남아 있는 기록은 《백령 문서》의 1942년 회원 주소록의 14명이다. 그러나 회원으로서 활동이 확실한 이억윤, 김병옥, 박상현 등이 없어 이 기록의 명단만을 회원으로 볼 수는 없다고 본다.
당시 회원의 평소 활동은 파티별 활동이었고 구속력은 크지 않지만 백령회가 수준 높은 등반활동을 하며 한인 클라이머들의 활동의 구심점 역할을 하여 비회원들과도 함께 등반을 했으며 ‘은령행’ 스키행사 등과 같이 회원이 다수 참여하는 행사에도 비회원이 참여하여 회원 구분에 어려운 점이 있다.
登山 50年과 백령 문서의 회원 명단
구분 | 登山 50年 | 추계 금강산 등행 (1942. 10. 15~19) | 白嶺 문서 (1942년 회원 주소록) | 스키연성합숙예정표(1943년 기획서) | 김정태 유고집 (1943년 11월 총회) |
명단 | 嚴興燮(주석) 朱亨烈 梁斗喆 金鼎泰 嚴興燮 李億允 李元世 韋亨順 蔡淑 李在睟 朴順萬 方炫 金正浩 柳在善 方鳳德 玄基彰 趙東昌 李起晩, 嚴翼煥 李熙成 安鍾南 朴商顯 金漢培 金文培 趙男天 趙南英 趙南鎭 | 岩越(엄흥섭, 대표) 辰海(김정태) 本城(주형렬) 松本(채숙) 淸水(이재수) 趙東昌(조동창) 金炳玉(김병옥) 玄川(현기창) 車 張 金OO 新O 외 6명 | 岩越興燮(엄흥섭, 주석) 本城敬三(주형렬) 趙東昌(조동창) 李起脕(이기만) 常平景弘(류재선) 辰海泰夫(김정태) 玄川基彰(현기창) 梁川斗喆(양두철) 嚴興燮(엄흥섭) 松本正雄(채숙) 松方康二(방봉덕) 木川元世(이원세) 淸水洋(이재수) 広村武雄(이위재) | 岩越(엄흥섭, 주석) 辰海(김정태) 本成(주형렬) 松方(방봉덕) 玄川(현기창) 淸水(이재수) 金澤 趙東昌(조동창) 李起晩(이기만) 松本(채숙) 嚴興燮(제화기술자) 金正浩(김정호) 朴商顯(박상현) 金宇鎭(김우진) 金漢培(김한배) 李允在(이윤재) 金城 張基重(장기중) 隹山 宗原 新本 常平(류재선) 安田 新居 延岡 德川 | 岩越(엄흥섭, 주석) 本城(주형렬) 趙(조동창) 李(이기만) 辰海(김정태) 玄川(현기창) 松本(채숙) 松方(방봉덕) 淸水(이재수) |
계 | 27 | 18 | 14 | 26 | 9 |
* 창씨개명 사례를 참고하면, 1943년 스키연성합숙예정표의 ‘常平’은 대개 柳씨의 창씨 사례인데 마찬가지로 ‘安田’은 安씨 성의 안종남으로 여겨지며 나머지도 한인 클라이머의 창씨 개명 성으로 생각된다.
회의 명칭인 백령의 의미는 한복의 옷깃을 뜻하는 ‘白領’의 의미를 내포하여 설명하고 있다. 모임은 “매주 금요일에 만났고 월 1회 과제 연구회”를 개최했다는 것은, 《백령 문서》의 1943년 사업 계획서의 “6. 金曜日会硏究事項: 월 1회 지형도, 등산식량, 암등방법에 대하여 등 주제 발표”에서 엿볼 수 있는데, 이즈음에야 활발한 과제연구를 시행한 듯하나 언제서부터 시작했고 실제 실천과 그 내용의 수준은 정확히 알 수 없다. 다만, 김정태의 과제인 백령문서의 스키체조 문서가 전하는데는 상당히 깊이 있는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1943년 백령회 사업계획서
기/월 항목 | 사업계획내용 | ||||
제명 | 담당자 | 제명 | 담당자 | ||
동기 | 12 | 스키체조연구 12/20 | 김정태 | ||
1 | 스키합O(대안 설악산) | 현기창, 주형렬 | 스키연구원내지파견(약1개월) | 김정태 | |
2 | 온돌회(温突会)척사(掷擲)대회 | 이기만, 이재수 | 스키강습회(서울) | 엄흥섭 | |
춘기 | 3 | 은령을 넘어(銀嶺越~)전원참가 | 엄흥섭, 방봉덕 | 두운봉초등반(3/20~4/5) | 김정태, 주형렬 |
4 | 백두산동계연성참가 | 김정태 | 식물, 곤충채집연구회 | 주형렬, 채숙 | |
5 | 화신(和信) 산악사진과 장비전람회 | 조동창, 현기창 | 주최: 조선산악회, 산의 스키, 영사(映寫) 강습회 | 김정태, 이재수 | |
하기 | 6 | 암장코스촬영 | 조동창, 주형렬 | 식물 곤충 채집 | 전원 |
7 | 백두산등반거행, 주최 매일신보 | 김정태 | 식물 곤충 채집 | 전원 | |
8 | 임간막영작업강습 | 주형렬 | 식물 곤충 채집 | 전원 | |
추기 | 9 | 암등연구회 | 주형렬, 김정태 | 가족친목회 | |
10 | 금강산 바리에이션(variation) 개척 | 김정태, 류재선 | 반성회 | 현기창 | |
11 | 총회 | 엄흥섭 |
회원의 활동은 파티별 활동을 말하고 있다. 당시 가장 활발한 활동을 한 파티는 김정태 파티로 김정태, 엄흥섭, 이시이(石井)가 주된 구성원이다. 별도 언급이 필요 없을 정도로 뛰어난 등반을 하였다. 김정태가 백령회 활동을 적극적으로 하면서 주형렬과의 등반도 알려졌는데 주형렬은 평소 자신과 김병옥, 박수동과 자일파티를 이루었고 대표적인 등반이 1940년 5월 도봉산 선인봉 남측면길 개척이다. 양두철은 자일파트너로 언급되는 기록을 못 찾았았으나 주로 주형렬과 등반 하였다고 한다.
이렇듯 개별 파티의 등반은 당시 경향이었고 김정태는 백령회 이전에 엄흥섭(제화 기술자), 방현(세의전 산악부), 김정호 등과 조선산악회 회원이었으며 양두철, 주형렬, 이재수 등이 1941~42 마천령종주 백두산 등반을 위해 조선산악회에 가입했다.
김정태는 사진의 뒷면에 “1937년 법기암 주형렬, 김정태, 김병옥, 박수동”으로 기록하고 있다. 아마도 1937년 10월 연휴의 등반이 있었던 것일까. 아니면 1938년의 등반일까. 와세다 대학 출신이자 최초의 한인 클라이밍 사진작가라고도 할 수 있는 주형렬은 김정태·양두철과의 등반으로 많이 알려졌는데 그는 평소 김병옥, 박수동과 함께 ‘주형렬파티“를 이뤄 등반을 했다고 한다. 1937년 당시 스웨터를 목에 두른 그의 패션 감각이 돋보인다.^^;
김정태가 백령회를 ‘비밀결사’라고 하였지만 백령회 설립 회원인 양두철 등에 의해 비밀결사는 아니라는 증언이 있어왔다. 그런데 ‘비밀결사’, ‘민족자립을 생각’, ‘一朝有事시에는 앞장서 나가 싸울 것을 맹세하며 다짐’라고 한 것은 의도적인 공허한 말로만 볼 수는 없다.
YMCA 현동완의 영향을 받은 엄흥섭의 독립의 의지나 민족주의 성향을 김정태는 《라테르네》(1954) 〈백령회 회고록〉의 첫 엄흥섭과 환담을 나눈 자리에서 “우리들의 (고유한)산으로의 지향! 우리들의 할 일(民族自立)에 대한 결집!”으로 같이 공감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이후 이 둘은 1940년 11월 3일의 ‘인수봉대등반’을 기획·진행을 맡아 실행하였고 이로 인해 며칠 후 11월 5일 조선산악회 월례회에 경찰국 고바야시(小林)가 찾아와 사찰한 바도 있었다. 그리고 민족의 자주와 자립을 늘 얘기하고 실천했던 엄흥섭은 1943년 연말 백령회의 월례회에서 엄흥섭은 “혈맹단식적 단결”을 내세웠다.
이러한 그의 리더쉽은 실제 회원들과 구체적인 공감대를 형성하거나 실천은 없었으나 그는 자신의 뜻을 백령회 등반활동으로 펼친 것만은 확실하다. 등반에 경쟁적 요소가 없을 수 없는 만큼 일인 클라이머들과의 경쟁은 당연한 것이고 그것은 곧 한인 클라이머들의 자주적인 산악활동인 것이다. 1941년 이후 수시로 엄흥섭 집에 들려 등반을 상의하며 가까이에서 지켜본 김정태는 이런 그의 개인 성향과 회의 운영 방침을 회의 의지로 확대 해석해 표현한 것이 아닌가 한다.(이어서)
註:
1)《한국산악회 70년》에서 백령회의 표기가 ‘領’인 것은 등산 50년의 ‘嶺’의 오기가 아니라 원래 ‘領’의 의미가 있음을 나타낸 것이라 본다.
2)전문은 다음과 같다. “1937년 3 월 韓人 클라이머 「白嶺会」 조직 발족, 嚴興燮, 朱亨烈, 梁斗詰, 金鼎泰 등 8명(기록 : 승전 <登山50年> 「비밀결사 白嶺会」) 1929년 북한산 먹을대 정면 상반부 초등반, 30년 인수봉에 오른 李春峰, 金鼎券泰 등 5명이 「白雲會」 라는 모임으로 매주말 압력등반을 하였으나 31년 도봉산 만장봉 추락(그중의 李奉九, 養正高 2년생)사고로 그만 두었으며, 36년 여름, 금강산 집선봉 동북릉 제2봉에 오른 嚴興雙, 本在洙, 金鼎泰 등 7명이 다시 순수한 클라이머 클럽의 조직을 뜻하고 면식이 있는 日書(당시 西大門暑)에게 허가수속을 알아보았으나 오히려 不審喚問의 조사를 받게 되어 중지하고 말았다. 이러한 경위가 있은 후 37년 3월초에 日警의 눈을 피하여 은밀히 한인 최초의 산악회라고 할 수 있는 「白嶺會」를 조직하게 되었다. 이는 무조건 한인의 단체활 동을 억압하는 日政에 대한 젊은 클라이머들의 민족적인 반발심의 발로와 36년 조선일보사 「백두산담험」의 영향도 있었다. 그리고 때마침 36년 孫基顧선수가 伯林 올림픽 마라톤 우승으로 일제의 억압에 질식 상태였던 우리 겨레와 사회가 온통 「우리도 하면 된다」는 활기찬 용기와 신념을 갖게 하여 각계활동이 전개된 것을 계기로 우리 클라이머들도 민족적인 자각과 자립의 정신을 바탕으로 은밀한 비밀결사식의 조직을 갖게 된 것이다. 白嶺의 「白」은 백의민족과 맥두산과 순결을 뜻하는 것이며 「嶺」은 높은 의지와 이상의 산을 지향한다는 뜻을 가졌다. 그래서 3 · 1 독립선언 운동의 3월1일을 서둘러 발족의 날로 잡았었다.”(〈한국등산사 考察⑩ –正史抄錄〉, 월간 《山》(1983. 9), p.165)
3)《라테르네》(1954)의 〈백령회 회고록〉은 《김정태 선생 유고집》의 일기와 부합한다. 김진덕은 그의 글 〈백령회는 과연 김정태가 만들었는가? 등등 백령회의 허상에 대하여 1〉에서 김정태가 백령회를 창립하지 않았다는 주장 등 백령회의 창립과 활동에 대한 글이 있다. ‘등산의 재구성’ 참조https://re-rock.tistory.com/232
4)김정태는 1936년 암벽등반을 시작한 이후 그해 오우치(大內), 이시이(石井), 엄흥섭(제화 기술자)을 차례로 만나 1937년 활발한 등반과 조선산악회에 가입하기 전까지 이수창, 이춘봉, 이봉구와 함께 구성된 회의 회원으로 활동했다. 김정태가 산에 입문한 중요한 기록으나 그는 언급한 바가 없다. 당시 한인 클라이머가 몇 안되는 가운데 사촌 형제 3인(김정태, 이춘봉, 이봉구)이 클라이머로 이는 클라이머 일가를 이룬 드물게 보는 경우다. 1937년경을 전후한 한인 클라이머들의 진출 시점의 등반 파티로서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으며 이 같은 사료가 남아 있는 경우가 없다. 우리나라 초기 등반사에서 김정태가 차지하는 위치를 감안하더라도 이에 대한 조사·연구가 필요하다고 여겨진다.
5)이 등반에 대해 손경석은 《韓國登山史》(2010)의 〈한국인만의 등산조직 백령회 결성〉에서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김정태에 의하면 1936년 여름에 금강산 집선봉 동북릉 제2봉에 엄흥섭 이재수 김정태 등이 올랐다고 하고, 이보다 앞서 저술한 김정태의 <등산 50년>에선 전혀 언급이 없다. 또한 동인지인 <적설기 등반초록>에도 기록이 전혀 없다. 이 <등산 50년>에선 1937년 1월에 금강 산 집선봉 동북능선 7연봉중 제1봉(C-1)에 김정태와 엄흥섭, 일본인 이시이 요시오(石井吉 雄)가 첫 겨울 등정을 했다고 발표했다.”
손경석은 1936년의 금강산 집선봉 동북릉 제2봉 초등 기록이 일관성이 없고 이어서 지명의 혼선에 따른 등반 여부에 대한 이해가 어렵움을 토로하고 있다. 이 등반은 〈한국등산사 考察⑨ –正史抄錄〉(1983, 8월호)에 그 기록이 있고 월간 〈등산〉(1970, 7·8월)에 상세한 내용이 있다. 그 부분 중 중요 부분만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936년 7월, 한인 클라이머 금강산 집선봉 동북릉 제II봉 꿀롸르 초등반
(기록 : 〈등산〉誌, 70, 「한국의 산과 등산」)
엄흥섭, 김정태 등 7명(신혼부부 한 쌍을 포함)한 7인 일행의 등반이었다...지금까지 東京大, 독일인 훕파 교수, 일본인 飯山, 泉 등 여러 동반대가 제Ⅰ봉 꿀롸르를 올라 이쪽으로 하강은 했으나 아래서 동반한 기록은 없었다. 그래서 한인 클라이머의 금강산 첫 암벽등반의 초등반 대상으로 이곳을 선택한 것... 18시에 고차 200여 m의 제II봉 정상에 올랐다. 중간 30m의 슬랩벽이 어려웠지만 무난히 올랐는데, 이곳이 33~34년간 일본인 飯山, 泉 등이 두 번이나 등반 실패하고 35년 독일인 훕파의 리드로 올랐다고 했으므로 여기서 당시 한 · 일인 클라이머의 실력비교가 된 듯하였다.”
김정태는 이 등반의 의미를, 제2봉 꿀르와르를 등반한 것은 처음이며 제2봉(S2) 슬랩을 앞 선 등반을 한 일인 클라이머인 이이야마나 이즈미가 오르지 못하고 1935년에야 크리스티안 후퍼의 리딩으로 초등된 것에 비해, 한인 클라이머들의 불과 1년 후에 등정”을 하였다고 ‘루트 초등반’으로 기록하고 있다. 이는 일인 클라이머들의 독무대였던 금강산 집선봉을 대상으로 한인 클라이머들의 암벽등반 활동의 이정표가 되는 중요한 등반으로 여겨진다. 더욱이 이 등반은 능선상에서 제2봉 등정을 한 것이 아니라 꿀르와르 등반에 이어 제2봉을 등반한 것으로 그 난이도가 더 높다.
그리고 이 등반에 참여했던 김정태, 엄흥섭(제화 기술자), 이재수, 등 7명이 앞선 일인들의 등반 활동을 극복하면서 얻은 자신감이 산악회의 조직을 생각하고 논의한다는 것은 자연스러운 과정인 듯 여겨진다. 그런데 이 등반이 사실이라면, 김정태가 언급하지 않은 또 하나의 중요한 기록은 엄흥섭의 친구 부인인 여성(암벽등반을 두어 번 해보았다고 함)이 얼떨결에 당대 최고의 일인 여성 클라이머였던 이토 다마키(伊藤玉喜)에 앞서 동북릉 제2봉(S2) 여성 초등을 한 것이다.
이어서 인용 원본인 《등산》의 〈한국의 산과 등산〉 기록을 보면 1937년으로 기록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관련 내용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집선 제II봉 꿀롸르 초등반’ 년도를 1936년이 아닌 1937년으로 적고 있다. “1937년 여름(7월 25일 서울 출발) 金剛山행은 36~7년경 현저하게 늘어난 한국인 클라이머들과 山에서 어울리고 얘기가 되어” 홀가분한 마음으로 등반을 가게 되었다고 하는데 이는 문맥을 보아도 오기나 편집상의 오류가 아니라 1937년임을 말하고 있다.
둘째, 《등산》(1970, 9)에는 ‘집선 제II봉 꿀롸르 초등반’ 등반기를 포함하여 금강산 암벽등반 기록을 서술하고 작성한 표가 있는데, 기록표인 〈金剛山 岩壁登攀 抄錄〉에 ‘집선 제II봉 꿀롸르 초등반’ 기록이 없다. 표의 한인 클라이머의 암벽등반 중 비슷한 시기 등반으로는 ⑪1936년 10월 집선봉 C2봉 꿀롸르 암계를 김정태, 엄흥섭(제화기술자로)이 초등과 ⑱1938년 10월 집선봉 C1~C7 전연봉순등을 김정태, 엄흥섭(제화기술자로), 류재선(철도국), 백령회라고 두 기록만이 있다.
한편 ⑪1936년 10월 집선봉 C2봉 꿀롸르 암계 등반 기록의 부연 설명에 일본 유학 중 이시이(石井)과 귀국하여 엄흥섭(제화기술자)와 함께 S2 꿀롸르 암계 초등(한인 초등이 아닌 코스 초등)으로 기록하고 있고 이 등반을 초등으로 기록하고 있다. 그렇다면 누락된 1936년 7월의 초등은 어떻게 된 것인가. 두 기록 중 하나는 초등이 아니다. 같은 코스이기 때문에 비슷한 등반 내용을 적을 수밖에 없었겠지만 그 내용을 보면, 동일한 등반 내용을 두고 동일한 잡지, 동일한 월호 기사에 두 개의 같은 내용의 등반을 연도를 달리한 듯 기록하고 있다.
金剛山 岩壁登攀 抄錄(1932~43년간)
순위 | 시일 | 코오스등반 경유 도달지점 | 등반급 | 등반별 | 등반자(소속) | ||||||||||||||||||||||||||||||
① | 1932. 7 | 彩霞峰東北稜 六仙峰第 4.5峰 | Ⅱ | 초등 | 原正典, 泉靖一(城大豫科) 人夫一名 | ||||||||||||||||||||||||||||||
② | 1932. 7 | 集仙峰 1351峰 南稜 CI,Ⅱ,Ⅲ峰 | Ⅳ | 초등 | 小川登喜男 등 6名(東京帝大) | ||||||||||||||||||||||||||||||
③ | 1932. 7 | 世尊峰東稜一部 | Ⅲ | 초등 | 小川登喜男 등 6名(東京帝大) | ||||||||||||||||||||||||||||||
④ | 1933. 3 | 集仙峰 CⅢ峰北稜(積雪季초등) | Ⅲ | 초등 | 泉靖一(城大豫科) 單獨行 | ||||||||||||||||||||||||||||||
⑤ | 1933. 4 | 集仙峰 1351峰~C, I縱走 (積雪季초등) | Ⅲ+ | 등반 | 飯山達雄(鐵道局)泉靖一(城大豫科) | ||||||||||||||||||||||||||||||
⑥ | 1933. 8 | C,Ⅲ峰 南稜 | Ⅱ | 등반 | 甲本, 泉外 1名 | ||||||||||||||||||||||||||||||
⑦ | 1933. 9 | C, I ~C, II 꼴 縱走 | Ⅲ | 등반 | 飯山, 泉外 1名 | ||||||||||||||||||||||||||||||
⑧ | 1935. 4 | C, I ~C, Ⅱ峰縦走 (積雪季초등) | Ⅳ+ | 등반 | 飯山, 泉,크리챤·훕피(城大豫科) | ||||||||||||||||||||||||||||||
⑨ | 1935. 8 | C, Ⅲ 南稜 | Ⅱ | 등반 | 谷川, 前川智春(故人, 城大) | ||||||||||||||||||||||||||||||
⑩ | 1936. 10 | C,I~C,Ⅱ峰(C, I 꿀롸르초등) | Ⅳ+ | 등반 | 奧野正亥(鐵道局) 川村光三(총독부) | ||||||||||||||||||||||||||||||
⑪ | 1936. 10 | C, II 峰꿀롸르岩溪초등 | Ⅳ+ | 등반 | 金鼎泰, 嚴興燮(故) | ||||||||||||||||||||||||||||||
⑫ | 1937. 1 | C,I岩溪 氷瀑 積雪季 | Ⅳ+ | 등반 | 金鼎泰, 嚴興燮(故) 石井吉雄 | ||||||||||||||||||||||||||||||
⑬ | 1937. 10 | 센터 · 피이크 第I峰 | Ⅲ | 등반 | 奧野正亥, 川村光三 | ||||||||||||||||||||||||||||||
⑭ | 1937. 10 | C, I ~C, Ⅳ峰氷縱走 | Ⅳ | 초등 | 金鼎泰 嚴興燮(故) 白嶺會 | ||||||||||||||||||||||||||||||
⑮ | 1938. 1 | 彩霞峰~集仙峰~1, 482峰~C, I 縱走(積雪季초등) | Ⅳ | 등반 | 奥野正亥, 渡部泰造(齒專) | ||||||||||||||||||||||||||||||
⑯ | 1938. 1 | 集仙峰 1351峰氷瀑~C, I ~ C, I col(多期초등) | Ⅳ+ | 등반 | 金鼎泰, 嚴興燮, 朱亨烈(故) | ||||||||||||||||||||||||||||||
⑰ | 1938. 10 | 世尊峰 東岩稜 全連峰順登 | Ⅴ | 초등 | 奥野正亥(金剛山協會), 渡部泰造 | ||||||||||||||||||||||||||||||
⑱ | 1938. 10 | 集仙峰 C, I ~C, 7 全連峰順登 | Ⅴ | 초등 | 金鼎泰,朱亨烈(故),柳在善(鐵道局) 白嶺會 | ||||||||||||||||||||||||||||||
⑲ | 1939. 1 | 集仙峰 C,Ⅱ南西面꿀롸르雪溪 | Ⅴ | 초등 | 金鼎泰,嚴興燮(故),方炫 | ||||||||||||||||||||||||||||||
⑳ | 1939. 10 | 센터피이크 第II峰 | Ⅲ | 초등 | 遠藤登(故人 京中O.B) 單獨行 | ||||||||||||||||||||||||||||||
㉑ | 1940. 10 | 센터피이크第I,II,I,IV 峰全連第逆登 | Ⅴ | 초등 | 朱亨烈(故), 金鼎泰(白嶺會) | ||||||||||||||||||||||||||||||
㉒ | 1941. 10 | C, II 正面北壁 | Ⅳ | 초등 | 金鼎泰, 梁斗喆, 朱亨烈(故)(白嶺會) | ||||||||||||||||||||||||||||||
㉓ | 1942. 10 | C, I ~C, 7 全連峰逆登 | Ⅳ | 초등 | 朴商顯, 金鼎泰 (白嶺會) | ||||||||||||||||||||||||||||||
㉔ | 1943. 10 | 1351峰 西北主稜 | Ⅳ+ | 초등 | 金鼎泰, 朴商顯 (白嶺會) |
*⑭의 C, I ~C, Ⅳ峰의 ‘氷縱走’는 ‘順縱走’의 오기이고 ⑪은 등산백과 8월로 적혀 있으나 《김정태 선생 유고집》의 1936년 일기에 따르면 실제 등반이 없었기 때문에 두 기록 모두 의미가 없다. 참고로 손경석은 《韓國登山史》에서 ②, ③ 동경대 등반을 모두 8월로 기재하였고 ⑨의 1935년을 1936년, ⑪은 10월이 아니라 8월로 기재하였다. 동경대는 8. 25~9. 7 등반을 하였고 집선 주봉(1,351m)은 8월 29일, S2와 세존봉은 9월 4일, S1과 S3~S5는 9월 6일 등반을 하였다.
*여기서 표의 “C"봉은 동경대에서 초등을 하며 ”S"로 칭하였고 이는 집선봉 동북릉의 봉우리를 말한다.
또한 《등산》(1970, 12)에서 1936년의 여름 등반에 이어 1937년 다시 동일한 일행이 금강산을 찾았고 직전에 오쿠노의 세존봉 종주가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본문 표 “⑰ 1938. 10. 奥野正亥(金剛山協會), 渡部泰造 世尊峰 東岩稜 全連峰順登”에도 오쿠노의 기록이 있다. 김정태는 오쿠노의 기록을 본문에는 1937년으로 도표에는 1938년으로 연도를 달리 기재하고 있다. 그런데 조선산악회의 계간 회지의 기록에 따르면, 오쿠노의 세존봉 종주등반은 1938년 7월 28일에서 29일에 있었다.
여기까지 검토한 이 등반의 연도를 재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연도 | 대상지 | 등반자 | 출처 |
1936.여름 | 금강산 집선봉 동북릉 제2봉 | 嚴興雙, 李在洙, 金鼎泰 등 7명 | 〈한국등산사 考察⑩ –正史抄錄〉의 〈비밀결사 白嶺会〉 |
1936. 7 | 금강산 집선봉 동북릉 제II봉 꿀롸르 초등반 | 엄흥섭, 김정태 등 7명(신혼부부 한 쌍을 포함) | 〈한국등산사 考察⑨ –正史抄錄〉 |
1937. 7~8 | 금강산 집선봉 동북릉 제II봉 꿀롸르 초등반 | 엄흥섭, 김정태 등 7명(신혼부부 한 쌍을 포함) | 《등산》(1970, 9) ‘집선 제II봉 꿀롸르 초등반’ |
1936. 10 | C, II 峰꿀롸르岩溪초등 | 金鼎泰, 嚴興燮(故) | 《등산》(1970, 9) 金剛山 岩壁登攀 抄錄(1932~43년간) 표 |
따라서 1936년에 김정태가 금강산 암벽등반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1936년 집선봉 동북릉 제2봉 꿀루와르 초등반”은 1936년이 아닌 1937년과 1938년 둘 중에 하나이며 첫 번째 금강산 등반에서 올랐다면 1937년 8월이고 이듬해 금강산 등반에서 오쿠노에 이은 등반에서 올랐다면 1938년 8월이 된다. 이 등반이 1936년의 백령회 설립 배경 등반으로 언급되는 것은 맞지 않는다.
(*한인클라이머 첫 금강산 집선봉 초등반으로 등반사적 의미가 있는 이 등반에 대해 《김정태 선생 유고집》의 번역으로 별도 언급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