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윌리엄 브래드포드와 그의 저서 《Of Plymouth Plantation》
| 이 책은 17세기, 사실상 중세 영어로 쓰여져 있어서 정신을 바짝 차리지 않고 읽으면 혼란스러운 철자법 때문에 헷갈리게 하는 부분이 여기저기 많았다. 예를 들자면 here(여기)를 hear로, indian(인디안)을 indean으로, you(너)를 ye로, hot(덥다)를 hott로, two(2)를 tow로, do(하다)를 doe로, peace(평화)를 peece로, small(작은)을 smale로, heart(심장)을 harte로, angry(화가난)을 angrie로〜 등등 이었다. 영어는, 사무엘 존슨 박사(Dr, Samuel Johnson)가 1755년에 ‘영어사전’을 편찬, 발간되기 전이라서 특히 각 단어에 대한 철자는 물론, 같은 뜻의 단어라도 사람에 따라, 혹은 지역에 따라 각양각색으로 사용 되고 있었다.
그러나 내가 알기로는 존슨 박사가 사전을 만들어 놓은 후에는 비로서 영어단어의 철자에 대한 논란이 크게 줄어 들었다. 서로가 자기가 애용하는 단어가 표준어라고 주장했다가 존슨박사의 사전을 들이대면, 그 때서야 진짜 표준어가 판가름이 났다. |
▲ 윌리엄 브래드포드 저서
| 이처럼 모두가 정확한 철자는 존슨박사의 사전을 의존하여 이를 표준어로 삼았다.
그런데 윌리엄 브래드포드가 1651년에 그 책을 다 썼을 때에는 존슨 박사의 사전이 나오기 전인 약 100년 전의 일이었다. 그러니까 그도 헷갈리는 단어는 주로 ‘셰익스피어’나 ‘밀톤’이 쓴 단어를 표준으로 하여 많이 썼다고 했다. 아무튼 나는 그가 쓴 책인 《플리머스 플랜테이션의 역사》를 참고로 하여 그간 정리되었던 생각들을 써서 나의 손녀인 <까칠이>가 혹 미국에서 성장하거나 공부를 할 때 한글도 배우고, 아니면 한글 배우기용으로 이 글이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지금도 이렇게 쓰고 있고, 또 앞으로도 좀 더 써 보려고 한다. |
윌리엄 브래드포드(William Bradford)는 영국 요크셔 출신이다. 그는 큰 농장을 소유한 집안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런데 한 살 때 부친이 사망했다. 설상가상으로 4세 때, 어머니가 재혼을 하였다. 윌리엄 브래드포드는 외할아버지가 양육을 맡았다. 그런데 6세 때 외할아버지 마저 세상을 떠났다. 이렇게 되자 재혼을 했던 어머니가 다시 양육을 맡아 계부와 함께 살게 되었다. 그런데 1년후에 어머니마저 병사했다. 그야말로 그는 천애고아가 되고 말았다. 그때부터 삼촌이 양육을 맡았지만, 성격이 고약한 삼촌은 인정머리 조차 없는 사람이었다. 그는 조카인 윌리엄을 혹독하게 일을 시켰다. 몸이 아파도 제대로 치료도 해주지 않았다. 그래서 윌리엄은 중병에 걸리게 되었고, 이제는 삼촌이 일을 시켜도 더 이상 노동을 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는 고난의 와중 속에서도 독서에 열중했다. 성경은 매일 읽었고 그리스나 로마의 고전 책들도 수 없이 많이 읽었다. 그는 지적 호기심이 남달리 컸기 때문이다.
| ▲ Dr, Samuel Johnson |
그는 12세였을 때 리챠드 클립톤(Richard Clifton)목사의 설교를 듣기 위해서 16km나 떨어진 교회를 다녔다. 그 목사는 로마 카톨릭 교회의 관행을 비난하고 영국 국교와 분리되어야 한다는 주장에 앞장 선 청교도 목사였다. 그래서 그도 어려서부터 청교도 어린이가 되었다. 당시 영국은 제임스 1세 왕이 청교도를 박해하며 통치를 하던 때였다.
한편 같은 청교도였던 존 로빈슨(John Robinson) 목사의 설교에도 귀를 기울렸다. 존 목사는 "영국 교회는 희망이 없다"며, 개혁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윌리엄 소년은 크게 감동했다. 존 로빈슨은 종교개혁에 앞장섰던 목사였다. 그는 스쿠루비(scrooby) 마을에 있는 자신의 집에 매일 50여명의 교인을 모아놓고, 카톨릭식의 절차를 무시하고 칼빈주의를 받아들인, 개혁된 간략한 방식으로 비밀예배를 올렸다. 윌리엄도 항상 그 회중 속에 있었다. 그런데 1607년에 비밀 교회가 탄로가 났다. 스쿠루비 마을 집회에 참석한 다수의 교인들이 체포되거나 투옥을 당하여 그야말로 쑥대밭이 되었다. 다행히 붙잡히지 않았던 교인이나 구속에서 풀린 교인들은 합세하여 아예 조국인 영국을 탈출하여 네델란드로 종교적 망명을 계획했다. 이 계획에 물론 윌리엄도 참여했다.
당시 네델란드는 종교개혁이 된 개신교 국가여서 비교적 종교적 자유가 허용된 곳이었다. 그러나 밀항을 약속한 선장이 변심하여 출항일에 당국에 밀고를 해버렸다. 그래서 일단은 모두가 구속되었다가 풀려났지만, 다음 해인 1608년 8월에 다시 스크루비 청교도들은 소수로 나누어 탈출을 시도했다. 이번에는 탈출에 성공하여 네델란드의 암스텔담에 도착하였다. 이 때 윌리엄 브래드포드는 나이가 16세였다. 그 다음해 4월 경에 소도시인 라이덴으로 옮겨서, 그곳에 있을 때 윌리엄은 브루스터(Brewster)집에서 더부살이를 하며 기거하였다. 그러나 그에게도 작은 희망이 생겼다. 1611년에 21세가 되었는데 생각하지도 않았던 영국에 두고 온 재산 소유권에 대한 판결에서 승소가 확정되어 큰 유산이 생겼다. 그래서 더부살이도 청산하고 이제는 집을 한 채 사서 자기 소유의 집에서 떳떳하게 생활을 했다. 그러면서 그는 라이덴에서 면직물 공장을 차려서 제법 몫돈을 모으기도 했다. 게다가 암스텔담에서 어느 영국계 부자집의 딸인 도로시 메이(Dorothy May)를 만나 결혼하게 되었다. 이제 먹고 사는 문제는 해결되었다. 그 때 그의 나이는 21세였다. 게다가 결혼 후 4년만에는 득남까지 했다. 그러나 이제는 네델란드를 떠나 신천지인 아메리카로 떠날 준비를 했다. 부인인 도로시는 약간 떨떠름한 표정으로 응했지만, 먼저 결심이 흔들리지 않도록 살던 집을 매각 처분했다. 이때가 바로 메이플라워호를 탑승하기 1년 전인 1619년이었다.
네델란드로 이주 해 있던 영국인 교도들이 다시 아메리카로 개척 이민을 가기로 한 주된 이유는 종교의 자유와 고국에 대한 애향심이었다. 네델란드에 와서 종교의 자유는 비록 누리고 있었으나 늘 불안한 상태였다. 자기들이 떠나온 고향인 스크루비(Scrooby)에서는 1617년에 비밀집회가 탄로나 수 많은 사람이 구속되고 수배를 당하였다. 이 때 일부 집회 지도자들은 수배를 당하자 그들도 네델란드 라이덴으로 피신을 해 와 있었는데, 영국 당국에서 이곳에 밀정을 보내어 은밀히 체포해 가려고 한다는 소문이 횡행했다. 그래서 종교의 자유를 누리고 있지만 완벽한 자유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리고 대부분이 10여년 전에 영국 고향을 떠나왔는데 자녀들의 교육문제가 대두되었다. 그들 자녀들은 영어보다 현지어인 네델란드 말을 더 선호하고 신앙생활도 부모들 처럼 신실하게 하려 하지 않았다. 그리고 고향에 대한 전통이나 문화적인 것을 잃어가고 있었다. 이제 그들은 신앙 공동체를 만들어 자기네 식으로 예배를 볼 수 있는 종교의 자유가 보장되고 자기들을 두고 온 고향의 전통과 문화를 자녀들에게 계승시켜 나가기에 좋은 곳을 물색하기 시작하였다. 바로 그곳이 신세계로 알려진 북 아메리카 지역이었다. 그들은 그곳에 가서 새로운 영국, 그러니까 진정한 신앙이 중심이 된 ‘뉴 잉글랜드’(New England)를 만들어 잘 살아보자는 생각이 바로 메이플라워 배를 탑승하게 된 동기였다.
바로 그 때 영국 런던에서는 돈 많은 사람들이 주식회사를 만들어 신대륙인 아메리카에 이민사업을 추진 중이었다. 당시 영국 왕은 미국 동북부지역에 대한 영유권을 확보하고 이런 주식회사들에게 식민지를 허용하는 특허장을 발급하고 있었다. 당시 사실상 남 아메리카는 스페인이나 포르투칼이 자기네 식민지라고 영유권을 주장해 놓고 식민지 장사를 하던 때였다. 이에 비해 북 아메리카는 무주공산이어서 영국이 먼저 이곳에 눈을 돌렸다. 그리고 영국 왕실에서는 어떤 의미에서 식민지 개척이란 명분으로 땅 장사를 하기 시작했다. 스패인과 포르투칼은 남미 지역에서 말만 식민지였지 사람들이 이민을 가서 살수 있는 정착촌을 개척하려 하지 않고, 현지에 있는 돈이 되는 금이나 은으로 된 물건을 사실상 약탈해 와서 자국과 유럽에 팔아서 일확천금을 벌려고 하거나 아니면 유럽상품을 싣고 가서 현지 원주민들에게 왕창 바가지를 씌워 비싸게 팔아서 이윤이 많은 장사를 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그러나 영국은 영토확장이란 한 수 높은 장기적 관점에서 자국민을 이민을 보내서 아예 그곳에서 뿌리를 내리고 영구히 정착시키려는 식민지 정책을 썼다. 그러면서도 통치하기에 골치를 아프게 하는 종교인들이나 범죄자들을 모두 몽땅 이민을 시켜버리고 좀 더 국내 통치를 편안하게 하고 싶었던 것이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네델란드에 와 있었던 청교들이 미개척지인 아메리카로 개척 이민를 가는 일은 누님도 좋고 매부도 좋고, 서로가 좋은 일이었다. 말하자면 요새 말로 윈윈(Win-win)사업이었다.
존 카버(John Carver)와 로버트 쿠시맨(Robert Cushman)이 앞장서서 3년간 교섭 끝에 1620년에 버지니아 지역의 일부 특정 지역에 식민지를 개척할 수 있는 특허장을 영국 왕으로부터 받았다. 당초 출항 계획은 네델란드 라이덴에서 청교도 가족 50여명을 태운 스피드웰(Speedwell)이라는 범선이 델프스헤븐(Delfshaven) 항구를 출발해서 영국 플리머스에 있는 메이플라워 범선과 합류하여 아메리카 버지니아 지역을 향하여 출항할 계획이었다. 특히 두 척의 배는 신세계인 북아메리카 버지니아 지역 중에서도, 허드슨 강의 입구에 있는 북쪽 지역을 식민지 대상지역으로 특허를 받았고 그곳으로 출항 계획이 잡혀있었다. 스피드웰 범선이 네델란드 라이덴을 떠날 때 일부 이산 가족도 생겼다. 노약자나 어린이들은 다음 이민선에 오기로 했다. 그때까지 그들은 존 로빈슨 목사가 돌보기로 했다.
스피드웰이 떠나던 날 항구에는 윌리엄 브래드포드의 아들 존도 병약해서 부모와 함께 떠날 수가 없었다. 장시간 대서양을 횡단하는 뱃길에는 건강이 우려되어 외조부에게 맡겨야만 했다. 라이덴에서 출항하던 그날, 세살인 어린 존은 "아빠, 엄마, 같이 갈래. 날 버리지 마세요", 하고 울부짖으며 작별을 서러워 했다. 부두에서 작별을 하던 사람들이나 배에 탑승한 사람들이나 모두가 이 광경을 목격하고 눈물을 흘리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그러나 어머니인 ‘도로시’는 눈물을 꾹 참고 이렇게 소리쳤다. “오! 마이 베이비! 내 아들 죤아! 울면 안 돼! 하나님이 널 우리에게 곧 데리고 올꺼야!” 그런데 메이플라워호가 플리머스에 도착한 후에는 부인을 배에 두고 남편인 브래드포드가 탐색대원들과 먼저 상륙했었다. 막상 정착촌 자리를 탐색하고 배로 돌아 와 보니 부인이 사망했다는 비보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부인인 도로시는 암스텔담 대부호의 딸이어서 2달간의 고된 항해 중에 지쳐있었다. 더욱이 4살짜리 아들을 두고 온 죄책감에 괴로워 하였는데, 홀로 갑판에 나갔다가 우울증으로 인하여 바다에 투신했던 것으로 전해졌다. 그러나 배에 있던 사람들은 갑판에서 갑자기 들이 닥친 파도에 휩싸여 발생한 사건이라고 하면서 애써 진상을 말하지 않았다. 모든 일을 꼼꼼하게 기록했던 브래드포드는 부인 사망 사건을 아무말 없이 1620년 12월 7일 부인이 사망했다고 그저 단순히 기록하고 있어 더욱 후세 사람들에게 그런 추정을 하게 한다.
아무튼 브래드퍼드 부부는 아들과 이별을 하고 영국 플리머스 항에서 스피드웰 범선은 기다리고 있던 메이플라워 범선과 조우하였다. 드디어 두 배는 도로씨의 앞으로의 운명을 모른 채 신세계를 향하여 출항하였다. 그런데 막상 출항하여 대서양을 향하는데 얼마 못 가서 <스피드웰> 범선에 고장이 생겼다. 이름 처럼 스피드가 쾌속이 아니라 더디 가는 굼뱅이 신세의 배가 되었다. 그리고 게다가 배에 물이 침수되기 시작해서 두 척의 배가 일단 회항을 해야만 했다. 그 배는 이름만 쾌속한다는 <스피드웰>이었지, 알고보니 더디 가는, 아니 고장난 <스피드배드.Speedbad>였다! 그러나 수리가 빨리 되지 못해서 메이플라워 단독으로 떠나기로 했다. 그래서 스피드웰에 탔던 사람들 모두 메이플라워 배로 옮겨탔다. 이 때문에 배안은 그야말로 초만원이 되었다. 이렇게 되지 일부 탑승객 중에는 준비를 보다 철저히 해야되는데, 청교도들이 이성을 잃고 너무 서둘렀다고 청교도가 아닌 일부 이방인들은 불평과 함께 후회도 쏟아냈다. 아마 이때 브래드포드의 부인인 도로시도 이 때 두고 온 아들 때문에 속으로 후회가 많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대부분 청교도들인 탑승자들은 자기들 앞길은 하나님이 이미 예비해 두웠고 지금 자기들이 떠나는 것은 단순한 이민이 아니라 하나님과 성경의 말씀을 더욱 잘 믿고 하나님이 계시는 천국으로 가기 위해 성지인 신세계를 경유해야 하는 일종이 순례길로 생각했다. 특히 그들이 라이덴을 떠날 때 마지막 예배에서 로빈슨 목사가 성경 히브리서 11장 13절을 말하며 떠나는 길에 축도를 해주었다. 아마도 이 축도에 감명을 받은 청교도들은 순례자와 같은 사명감을 느낀 것으로 보인다. 특히 로빈슨 목사는 그 히브리서의 성경 말씀을 인용하면서 아메리카를 향하여 먼저 떠나는 청교도들에게 용기와 믿음을 주기위해서 그들을 ‘필그림들’(Pilgrims: 순례자)로 비유하여 말하며, 용기를 갖고 떠나도록 축도를 해주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리고 신세계는 종교적으로 오염이 될 것이 없는 곳이므로 가나안 땅과 같이 신이 점지해준 성지나 다름이 없다고 생각했다. 만일 성지가 아니더라도 자기들이 신앙공동체가 되어 굳은 믿음으로 성지를 만들 수 있다고 굳게 믿었다. 그리고 일부 청교도는 순례길에 죽어도 곧장 천국이나 하나님께 직행으로 간다고 믿었다. 그래서 거친 파도도 두려울 게 없다고 믿었다. 아울러 순례길이니까 하나님의 보호가 필히 계실거라 믿었다. 그리고 자기들은 종교적으로 부패나 오염이 없는 순수한 순례자라고 자처하며 <일단 빨리 신세계로 떠나고 보자> 하며 서둘러 재촉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너무나 감성적 출발(emotional Departue) 준비라고 하면서 더 준비를 잘 하자는 측도 있었다. 이렇게 옥신각신 하다보니 신세계를 향한 출항이 생각보다 훨씬 지연되었다. 일부 이방인들은 신세계를 포기했다. 따라서 런던의 상인들이 만든 <머천트 어드벤쳐>회사에서 50명을 다시 채우려고 애를 먹었다. 개척 이민자들은 청교도와 비청교도 합하여 총 수가 모두 102명이었고, 추가로 선원들의 숫자는 정확한 기록은 없지만 약 30명 쯤으로 추정되어 결국, 총 탑승자는 130여명이었다. 이 탑승자 수는 선폭이 겨우 30미터 정도의 배에 무리였다. 메이플라워 범선의 수용능력을 볼 때 너무 초과된 탑승 인원이었다.
메이플라워호가 영국의 플리머스 항구를 출항한 것은 1620년 9월 6일이었다. 배 안은 화물과 탑승자들로 입추의 여지가 없이 만원이었다. 어쨌든 한 달 동안은 그런대로 순항했다. 그러나 두 달 째 접어 들면서 돌풍을 자주 만났다. 배는 돌풍에 휘청거렸다. 배가 심하게 흔들리며 배 안으로 파도가 넘쳐 들어 왔다. 탑승자들 대부분이 파도에 흠퍽 옷이 젖었다. 상당수는 배멀리에 시달렸다. 이 때 고얀 젊은 선원이 멀미를 하며 아우성치는 소리를 듣고 못 참겠다는 듯이 욕설을 퍼 부었다.
"젠장! 앞으로 한달 더 가야하는데, 그렇게 못 견디면 되겠소? 하나님을 믿고 배를 탄 사람들이, 그렇게도 멀미를 참지 못하면, 남에게 피해 주지 말고 일찍 죽는게 났겠소. 죽으면, 내가 수장을 책임질터이니 수고비나 듬뿍 많이주고〜 잘 가시요" 이런 못 된 소리를 듣자 일부 탑승자들은 그 선원을 보고 소리쳤다. "이 나쁜 놈아! 그런 말을 함부로 하다니! 오, 주여! 저 무례한 자를 벌하소서, 아멘!" 그런데 며칠 후 그 젊은 선원은 갑자기 발병하여 앓다가 죽었다. 모두가 한 마디 씩 했다. "하나님께서 그 자에게 벌을 주셨도다!"
메이플라워호는 어려운 항해 끝에 드디어 9월 19일에 플리머스 만 앞에 있는 케이프 코드(Cape Cod)에 도착했다. 그러니까 영국을 떠난지 약 10주, 정확하게 말하자면 65일 만에 북 아메리카 연안에 도착한 것이다. 당초 식민지 특허를 받은 지역은 버지니아 지역으로 허드슨강 북쪽에 있는 땅이었다. 당시 버지니아는 현재의 버지니아 보다 훨씬 더 넓은 지역을 지칭했다. 버지니아는 엘리자베스 여왕 때 최초로 이 지역을 영국의 식민지로 삼았던 곳이다. 그 당시 여왕이 처녀여서 여왕에게 헌정하는 충정에서, 첫 식민지를 기념하기 위하여 그 지명이 버지니아가 되었다. 그 지명은 <처녀>를 뜻하는 영어 버진(Virgin)이라는 단어에다 통상 인명이나 지명 끝에 붙는 아(a)를 추가하여 버지니아(Virginia) 라고 명명된 것이다. 당초 특허를 받은 버지니아 지역을 찾기 위해서 메이플라워호는 해안을 따라 남쪽으로 7〜8일간을 더 내려갔다. 그러나 심한 겨울 바람에 버지니아를 찾지 못하고, 뱃머리를 돌려서 케이프 코드에 있는 프린스타운 항구로 되돌아 왔다. 그리고 그곳에서 11월 11일부터 열흘간, 드디어 닻을 내리고 메이플라워호는 정박했다.
바로 이 때부터 미국 동부지역은 뉴잉글랜드라는 식민지를 만들게 된다. 이곳에서 첫 식민지로 정착한 곳이 바로 플리머스이다. 이 장소가 또한 미국 역사에서, 첫 페이지에 기록되는 역사적인 장소로 등장한다. 물론 영국 입장에서는 버지니아의 제임스타운이 첫 식민지였지만 그 결과는 실패였다. 본격적으로 식민지에 정착의 깃발을 꽂은 곳은 바로 <플리머스 정착촌>이었다. 그래서 미국사람들은 자기네 역사를 말할 때 플리머스는 미국역사에서 <정신적 고향>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다. 플리머스 식민지, 이제 다시 그간 언급했던 플리머스 정착촌의 전후 사정을 다시 쉽게 정리해 보며 지나 가겠다.
메이플라워를 탔던 영국인 청교도들이 아메리카로 갈 생각을 한 첫 번 째 사람들은 아니었다. 그 전에 프랑스에서도 순례자를 자처하는 개혁 신교도들이 있었다. 그들은 영국 청교도들 보다도 이미 55년 전에 종교의 자유를 찾아서 아메리카로 떠나 왔던 프랑스 정착민들도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그들은 아메리카에 와서 정착촌을 결코 이루지를 못 했다. 자기들이 도착한 곳에는 이미 스페인 사람들이 죽치고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프랑스인들이 <포트 케롤라인>이라는 한 정착촌을 잠시 세웠던 루터주의의 개신교들이었다. 그들은 이제 카톨릭이 판을 치고 개신교를 탄압하고 있는 유럽에서 멀리 떠나왔거니 했었다. 그래서 이제부터는 개신교도의 신앙촌을 만들어 새로운 삶을 시작하려던 참이었다.
그런데 바로 카톨릭교를 국교로 삼고 개신교를 증오하던 스페인 사람들을 만나게 된 것이다. 그 곳에 주둔하고 있던 스패인 군대들이 프랑스 개신교도들을 하룻 밤에 몰려 와서 모두를 몰살 시켜버렸다. 그들이 내뱉는 이유는 바로 이 한마디 였다. “너희는 루터를 따르는 개신교놈들이야!”
스페인 군대들은 프랑스 개신교들이 살고 있는 정착촌의 담벽에 사디리를 걸치고 넘어 들어 와 야간 급습을 감행했다. 그리고 침실에서 자고 있는 사람들까지 모두 잔인하게 살해했다. 이 때 프랑스에서 온 개척민들이 무려 132명이 학살을 당하고 만다. 이런 일이 있은 후 프랑스는 당분간 아메리카 식민지 사업에서 손을 떼고 말았다.
다시 메이플라워에 탔던 특이한 탑승객들인 어린애 4명 이야기를 잠깐 언급해 보고 지나 가겠다. 메이플라워호가 영국을 떠나기 전에 부인에게 침을 뱉고 자기 자식들을 메이플라워에 태워서 멀리 보낸 비정한 아버지의 이야기도 있다.
메이플러워에 탔던 탑승자 명단에는 좀 드문 성인 모어(More)라는 성이 있다. 그래서 모어 자식들(The More Children)이라고 적혀있다. 메이플라워에는 당초 102명 중에서 탑승자들의 자녀들인 어린애들이 무려 32명이나 동승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들 중에서 이 어린이들 4명은 동반한 부모가 없었다. 사연인 즉 이러했다. 4명의 어린이는 모두 부모가 없이 메이플라워호에 태워졌다. 이들은 아메리카로 가는 9세 이하의 어린 나이였다. 이 애들의 부모는 사무엘(Samuel)과 캐서린(Katherine)이었다. 부인 캐서린은 모어의 자식들이라고 해도 의처증이 있는 남편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고, 부인이 그저 남자 친구 사이라 해도 그 놈의 자식들이라고 의심을 했다. 왜냐하면 얘들이 커 갈수록 자기를 닮지 않고 그 자를 꼭 빼다 박은 듯이 닮아 보였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모아라는 자는 자기 부인과 이혼을 했다.
그런데 당시 영국 법에는 자녀는 남편이 양육하도록 되어 있었다. 그런데 그는 부인이 미워서 악의를 품고 애들을 청교도들에게 맡겨서 메이플라워에 태워버린 것이다. 물론 메이플라워 운임요금인 배 삯은 그들의 아버지인 그가 지불했었다.
그 4명의 어린애들은 65일의 항해기간은 잘 견디고 플리머스에 잘 도착했으나 첫 겨울을 못 보내고 한 명은 먼저 죽었다. 그 후 두 명도 죽었고 마지막 한 명이 살아남아서 쌀렘 지역에 정착해서 살다가 죽었다. 그런데 그는 분명히 아버지의 나쁜 혈통을 받았는지, 말년에 남의 부인과 불륜을 저질러서 유죄판결을 받고 처형을 당해 죽었던 것이다.
메이플라워호는 모두 청교도들만 탄 배가 아니었다. 사실상 메이플라워를 탔던 102명 중에서 순수 청교도인들은 과반수를 넘지 않았다. 60명은 영국 국교도(Anglicans)들이었다. 그러나 메이플라워호를 렌트했기 때문에 비용을 덜기 위해서 그들이 함께 가겠다는 것을 막지를 못 했다. 배를 두 척이나 임대를 해서 2개월 이상 항해를 하여 신세계인 아메리카로 가기 위해서는 많은 돈이 필요했다. 물론 정착촌을 형성할 때가지 필요한 준비물을 마련하자면 비용도 많이 들었다. 투자자들도 필요했고 식민지에 가기를 원하는 사람들을 모집하는 것도 필요했다. 그러나 청교도들은 자기들의 아메리카로 가는 목적만은 뚜렷하게 구별하고 싶었다. 그들은 비청교도들을 이방인(Strangers)이라 칭하고 자신들은 순례자(Pilgrims)나 성자들(Saints)라고 자처하고 싶어 했다.
영국 플리머스 항구에서 두 척의 배가 신천지, 아메리카를 향해서 출발했다. 그러나 얼마 안 가 항구를 벗어나기도 전에 한 척의 배인 <스피드웰> 호가 고장이 났다. 게다가 배에 틈이 생겨 물이 선실로 흘러들어 왔다. 그래서 두 배는 일단 회선했다가 <스피드웰>호는 수리가 제 때에 될 수가 없어서 메이플라워 한 척만이 단독으로 가기로 했다. 그렇게 되자 <스피드웰>에 탔던 탑승자들이 우루루 메이플라워로 합류를 하여 총 102명이 탑승하게 되어 메이플라워 호의 선실은 그야말로 초만원 상태가 되고 말았다. 메이플라워의 길이는 겨우 30미터이고 선적 용량은 160톤 규모의 크기여서 선실의 크기도 작은 교실 두 개를 겨우 합해 놓은 정도였다. 우리나라 세월호가 길이가 약 150미터이고, 선적 용량이 약 6800톤이라고 하니, 이를 비교해보면 얼마나 비좁고 작은 배였나를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메이플라워호가 플리머스에 도착했을 때 살아남은 청교도는 단지 32명이었다. 약 70명이 비청교도들이었다. 이러다간 정착촌이 형성되었을 때 자기들이 원했던 신앙촌 사회를 만들기에 주도권이 상실되지 않을까 하는 걱정과 두려움이 들었다. 그래서 청교도들 중에는 몇 명의 탁월한 지도자급 사람들이 나서서 상륙하기 전에 협약을 미리 맺어, 그 협약에 따라 선출한 지도자에게 누구나 복종하기로 했다. 사실상 정착촌이 형성됐을 때 계속해서 청교도들 중에서 플리머스 식민지 지사가 선출되었고, 결국은 비청교도들도 정착촌의 질서와 법규에 따르도록 했다. 이렇게 해서 비청교도들과의 질서 유지를 도모했다.
플리머스를 정착지로 삼은 이유 중에는 배 안에 싣고 온 맥주가 거의 동이 났기 때문이라는 주장도 있어 여기에 소개해 본다.
청교도들은 검소 근면 금욕 생활을 앞세워 청빈한 기독교인을 꿈꾸어 왔다. 그래서 금지하는 음식물이 많았다. 그러나 맥주는 예외였다. 청교도들은 도가 넘을 정도로 맥주를 많이 마셨다. 사실, 그들은 탑승 전에 메이플라워호에 식수보다도 맥주를 더 많이 싣고 왔었다. 당시 영국은 산업화 시대가 열리면서 공업용수가 하천에 흘러들어 식수 공급이 부족했다. 따라서 대부분 사람들은 오염 가능성이 있는 물 보다는 집이나 공장에서 빚은 맥주를 물 대신에 즐겨 마셨다. 게다가 물은 집에 오래 보관할 수가 없었다. 영국인들은 왜 맥주를 자주 마시느냐고 물으면 이렇게 대답한다, “물은 쉽게 오염되어 함부로 마시면 배탈이 나니까요” 마치 왜 위스키를 자주 마시느냐 물으면 이런 대답으로 변명하는 것처럼 들린다. “위스키는 충치를 예방하니까!”
크리스마스가 되자 맥주 때문에 소동이 일어났다. 두 달 이상이나 좁은 공간에 틀어 박혀 항해를 계속해 왔기 때문에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질병에 시달린 사람도 많이 발생했다. 그러나 맥주가 바닥이 나고 있다는 소문에 한 동안 배안에서 소동이 벌어졌다. 맥주는 당시 영국인들에게는 식수였다. 식수가 바닥이 났다고 하니 서로 창고에 있는 맥주를 꺼내먹으려 했다.
드디어 맥주는 배급제로 통제되었다. 맥주를 마시고 싶을 때 못 마시시게 되자 이들에게는 그 시간이 악몽처럼 느껴졌으며 이런 불평을 토해냈다. “아! 영국에서는 시도 때도 없이 이 핑계 저 핑계 대며, 물 마시듯이 맥주를 마실 수 있었는데∼ 젠장 이럴 수가!” 이 때문에 당초 특허를 받았던 버지니아 일부 지역에 정착하는 일을 도중에 포기하고 서둘러 플리머스에 정착촌을 세웠다. ‘맥주 사건’이 바로 그렇게 촉구시켰기 때문이라는 그럴듯한 주장도 최근에 나오고 있다.
그런데 당시를 기록한 윌리엄 브래드포드는 이렇게 적고 있다. “우리는 선상에서 비를 받아 마셨다” 사람들은 불평을 하며 물바가지를 발로 걷어차 버린 사람도 있었다. 그래서 맥주를 찾는 사람들 먼저 상륙시켜, 숲 속에서 냇물을 찾아 마시라고 사실상 강제로 배에서 내리게 했다. 특히 진짜로 맥주가 바닥이 났는지를 확인하겠다고 선실에서 소란을 피우는 자는 모두 하선시켰다. 그러나 이런 고통과 소동도 얼마 가지 않아서 끝이 났다. 왜냐하면 우선 급선무로 맥주를 빚는 임시 가설 공장을 만들어, 물 대신에 마실 수 있었기 때문이다.
청교도들, 원주민들 무덤을 약탈 사건도 있었다고 하는데 이것도 잠깐 언급하고 지나가 보겠다.
청교도들이 플리머스에 상륙했을 때 그 주변에는 상당수의 인디안들이 마을을 이루고 살고 있을 것으로 예상했었다. 그러나 막상 해안 지역에서 내륙으로 들어가도 어떤 인디언의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다만 밤이면 아주 먼 곳에서 인기척을 알리는 모닥불이 깜박깜박 이따금 희미하게 보였다. 그래서 그들은 인적을 찾기 위해 여기저기를 훑고 다녔다. 그러다가 텅빈 마을을 발견했다.
살아 있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고 하얀 뼈들과 해골들이 군데군데 굴러 다녔다. 그리고 마을 저장소에는 식량으로 비축해둔 옥수수와 콩이 쌓여 있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이곳 원주민들은 한동안 전염병이 마을에 심하게 돌아서 몽땅 떼죽음을 당했다고 한다. 그 전염병은 유럽의 어부들이 고기를 잡으러 왔다가 옮긴 병이라고 했다. 아마도 이 마을뿐만이 아니라 인근에 있는 뉴잉글랜드 지역의 여러 마을에서도 90퍼센트 이상이나 마을 사람들이 이 병 때문에 죽어 나갔다고 했다. 그래서 마을마다 사람들은 없어도 비축된 식량은 다소 남아 있어 이것은 영국 청교도들에게는 엄청난 횡재나 다름이 없었다.
청교도들은 우선 다 죽어 없어진 그들에 대한 연민의 정보다는 오히려 하나님이 순례자들인 자신들을 보살펴 주려고 미리 예비한 것으로 보고, 오히려 하나님의 은혜 주심에 감사드렸다고 한다. 죤 윈드롭은 이를 기적이 일어났다고 이렇게 그의 글에 남겼다
“하나님께서 이곳을 우리의 땅으로 예비하여 주셨다”
청교도들은 인디언이 남긴 옥수수를 차지했고 게다가 그들의 무덤도 약탈했다. 그 속에 있는 부장물 속에서 쓸 만한 것은 꺼낸 후에 다시 시신은 묻어 주었다. 플리마스 청교도들이 살아 있는 인디언을 찾으려다 자포자기하고 있는데, 어느 날 갑자기 맨 처음 만난 인디언이 나타났다. 그가 맨 처음 요청했던 것은 바로 ‘맥주’였다. 청교도들이 한 창 정착촌에서 살 집들을 짓고 있을 때 여기저기 떠돌아다니던 중 그 인디언 남자는 용감하게도 그들 앞에 접근해 오더니 다짜고짜로 영어로 인사를 하며 다가왔다.
“환영해요, 영국 사람들!”(Welcome, Englishmen!)
모두 깜짝 놀랐다. 서툰 그의 토막 영어였지만 의사소통이 되었다. 그의 이름은 사모세트(Samoset) 였다. 그는 손을 내밀며 서툰 영어 발음으로 뭘 달라고 했다. |
▲ 청교도 정착촌을 찾아 온 ‘사모세트’ 인디안(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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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어, 비어, 비어!” 바로 그가 원하는 것은 맥주였다. 그는 전에 이곳 연안에 고기를 잡으러 왔던 영국인 어부들을 자주 만났다고 했다. 그리고 맥주도 얻어 마셔 본 경험이 있었다. 그래서 그들로부터 몇 마디 토막 영어를 배웠다고 했다. 맥주가 그에게까지 줄 것이 없어서 그 대신에 독한 술을 마시라 했다. 그는 그 술이 더 기분을 좋게 한다고 하면서, 계속 더 마시려고 했다. 이제 자기네 마을로 돌아가라고 해도 가려 하지 않고, 술을 자꾸 더 달라고 칭얼댔다. 할 수 없이 독한 술을 많이 마시게 해서 그날 밤은 캠프에서 곯아떨어진 채 자게 하고, 다음 날 자기네 마을로 돌려보냈다. 그런 인연으로 그 후에 ‘사모세트’는 청교도들이 죽음의 고비를 맞이했을 때 여러 번 구해주었다. 그리고 그는 앞장서서 청교들과 인근 원주민들인 ‘왐파노아그’ 부족들과 화평조약을 맺게 알선해 주었다. 그리고 자기 소유의 땅이 아님에도 자기 땅이라고 하면서 최초로 돈을 받고 인디언 땅을 청교도에게 팔아먹었다. 말하자면 그는 미국판 봉이 김선달 노릇을 한 인디언이었다. 그는 땅 매매 문서에 서명까지 한 최초의 인디언이 되었다. ‘사모세트’는 자기보다 영어를 훨씬 더 잘하는 사람을 소개해 주겠다고 했다. 그것은 거짓말이 아니었다. 그가 소개해 준 인디언이 바로 ‘스콴토’(Squanto)였다. 스콴토는 영어를 영국사람 못지않게, 유창하게 잘했다. 그런데는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다. 스콴토는 6년 전에 토마스 헌트(Thomas Hunt)라는 영국인을 만나게 되었다. 헌트는 버지니아 제임스타운 식민지 정착촌에서 존 스미스 선장의 뒤를 이어 지도자급으로 정착촌에서 살았던 사람이었다. 그런데 처음엔 헌트가 다른 23명과 함께 그를 납치해 갔다고 한다. 헌트는 그를 스페인으로 싣고 가서 노예로 팔아먹었다. 그곳에서 스콴토는 다시 한 영국인에게 팔려 갔다. 그는 그 영국인의 하인이 되었고, 그에게서 영어를 배웠고, 그의 통역사가 되어 북아메리카 뉴파운드랜드에서 식민지 사업을 벌이려고 한 그를 따라서 왔다 한다. 그런데 뉴파운드랜드에서 다시 팔렸다. 이번에 주인은 영국인 토마스 더머(Thomas Dermer)였다. ‘더머’는 그를 메사추세츠로 데리고 왔다. 이런 천재일우의 기회를 잡게 되어 그는 고향까지 돌아오게 된 것이다. 그가 고향인 플리머스에 도착해 보니 그가 알고 있는 사람들은 모두 죽어 있었다. 2∼3년 전, 고향 마을에 전염병이 휩쓸어서 몽땅 참변을 당한 것이다. 전화위복이라고 그가 납치되어 노예 신세가 된 것이 오히려 그를 살아남게 한 것이다. 고향 지역에 있을 때 자기 주인인 더머가 왐파노아그 인디언들에게 붙잡혀 죽음에 처해 있었다. 이때 스콴토는 왐파노아그 추장에게 애걸복걸 호소하여 주인인 더머의 목숨을 구해주기도 했다. 이에 감명받은 더머는 스콴토를 노예의 신분에서 벗어나 자유인이 되도록 허용해 주었다. 이렇게 스콴토는 플리머스가 식민지로 정착하는데 통역사로서 큰 역할을 했다. 스콴토는 청교도들을 인디언들에 대한 정복자나 박해자로 보지 않고 오히려 청교도들이 정착하도록 많은 도움을 준 인디언이다. 만약 그의 통역과 또 도움이 없었다면 청교도들의 플리머스 정착촌 건설은 지난했을 것이다. 그는 옥수수 심는 방법과 땅을 북돋아 주고 거름을 주어 재배하는 방법을 정착민들에게 가르쳐 주었다. 청교도들이 영국에서 올 때 밀, 완두콩 등 여러 농작물 씨앗을 가지고 왔는데, 씨앗이 상했거나 아니면 아메리카 토양과 기후 탓인지 발아가 잘되지 않았다. 발아된 씨앗도 거친 토질에서 성장이 더디었다. 그러자 스콴토는 인근 개천이나 해안가에서 많이 잡히는 생선이나 이들을 말리다가 썩힌 것들을 옥수수를 심을 구덩이 마다 생선 3∼4마리를 묻어서 거름으로 삼는 법과 한 구덩이에 옥수수 낱알을 3∼4개 함께 심고, 이것들이 움이 트면, 북돋아 주고, 바람이나 빗물에 견디는 방법을 가르쳐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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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수수 심기와 생선으로 거름 이용법을 가르쳐 주고 있는 스콴토 모습 | 그리고 장어나 생선들은 갈대 줄기로, 한쪽은 막았다 열 수 있는 통발을 만들어 물고기 떼가 모이는 곳에 설치하여, 잡는 방법도 가르쳐 주었다. 그 통발은 박물관에 전시품을 보니까 마치 옛날 우리나라에서 죄수들의 머리에 씌웠던 용수처럼 생겼다. 그리고 그는 과일이나 식용 열매를 많이 채취할 수 있는 장소도 가르쳐 주고, 약초들도 가르쳐 주었다. 그리고 조개 등 어패류를 바닷가에서 돌이니 바위를 들추어서 잡는 방법도 가르쳐 주었다. 그리고 인디언들의 특산물이 무엇인지를 가르쳐 주고, 또한 인근 인디언들과 물물교환을 할 수 있는, 상거래도 가르쳐 주었다. |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그는 도가 지나쳤다. 그는 일부 정착민과 인디언들에게 총이나 고급 기술 등 무기 거래도 주선했다. 그리고 영국인 말고 기타 유럽인들과 인디언 사이에 교역도 관여하였다. 그는 그런 거래를 통해서 선물이나 대가도 양쪽에서 받으며 나름대로 챙겼다. 어떤 경우에 인디언들이 거래 상품가를 너무 비싸게 부르고, 자기가 요구한대로 들어 주지 않으면, 영국인들이 무서운 전염병을 뿌리거나, 총이나 대포로 마을을 쑥대밭으로 만들 거라는 등 헛소문이나 겁박을 주기도 했으며, 영국인들을 믿고 권력자 인양 과시하기도 했다. 그래서 그는 점차 인디언들로부터 미움을 사고, 생명의 위협을 받기도 했다. 이처럼 그의 행동은 거침없이 너무 멀리 나가고 있었다. 그는 왐파노아그 부족의 추장인 ‘마사소이트’ 면전에서도 화를 버럭버럭 내기도 했다. 그는 추장이 자기 말을 듣지 않게 되면 영국인들을 동원해서 그를 죽여 없앨 수 있다고까지 했다. 그리고 때로는 영국인들마저도 속이려고까지 했다. 어떤 때는 영국인들에게 왐파노아그 족을 먼저 공격해서, 추장을 없애야 한다고 확신시키려 했다. 이렇게 되자 왐파노아그 추장인 마사소이트는 스콴토가 2중 간첩으로 농간을 많이 부리고 있다는 것을 눈치채고, 영국인들에게 알리면서 그의 목을 달라고 요구했다. 영국인들은 한때 그렇게 하려다가, 아무래도 당분간은 스콴토의 도움이 더 절실하다고 믿고, 오히려 당분간은 스콴토 편을 들며 그를 한층 보호했다. 실제 그가 중요한 역할을 잘 해왔기에, 청교도들도 그를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그도 1622년에 인디언 열병에 걸려 사망하고 말았다. 당시 플리머스 지사였던 윌리엄 브래드포드는 그의 죽음을 “청교도와 정착촌에는 큰 손실”이었다고 안타까와하면서 그의 저서에 기록을 남기었다. 아무튼 플리머스 식민지(Plymouth Colony)는 버지니아 다음으로 북아메리카에서 두 번째로 영국의 식민지가 된 곳이다. 물론 뉴잉글랜드 지역에서는 첫 번째이다. 플리머스 식민지는 1620년부터 1691년까지 71년간 북아메리카에 개척된 영국 식민지의 선구적 지역으로 있다가 메사추세츠 식민지에 통합이 되어버렸다. 그런데 최초의 플리머스의 지명은 존 스미스 선장에 의해 사전 탐사되어 그 이름이 ‘뉴 플리머스’로 지어졌었다. 이 ‘뉴 플리머스’는 그 지역 식민지의 수도가 되었고, 현재는 매사추세츠 주에 속하는 ‘플리머스’ 카운티가 되어 있다. 그 전성기의 플리머스 식민지는 현재의 매사추세츠 주 남동부의 대부분의 땅을 영유하고 있었다. 플리머스 식민지는 앞서 여러 번 언급했듯이 청교도들, 일명 ‘필그림 파더스’(Pilgrims fathers)로 알려지게 된 종교 분리파에 의해 설립되었으며, 북미 뉴잉글랜드 지역에서 설립된 가장 초기의 영국 식민지가 되었다. 그리고 뉴잉글랜드 지역에서는 최초로 상당한 규모의 개척지가 되었다. 특히 앞서 말한 인디언 스콴토의 도움을 받아, 플리머스가 식민지로서의 성공을 보증해 준, 〈마사소이트 추장과 평화조약〉을 맺을 수도 있었다. 플리머스 식민지는 특히, 인디언과 가장 초기의 유혈 전쟁이 된 ‘필립 왕 전쟁’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했다. 그 후 1691년에 플리머스 식민지는 ‘매사추세츠 주와 합병’되어 버린 것이다. 플리머스 식민지는 미국 역사에서 특별하다. 제임스 타운의 많은 개척자들은 돈을 벌기 위해서 왔는데, 플리머스 청교도들은 종교적 박해를 피해 종교적 자유를 누릴 수 있는 삶터를 찾기 위해서 왔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식민지 사회제도, 법적 체계는 개척민들의 믿음을 바탕으로 구성하였다. 플리머스 식민지의 많은 사람들과 또 그것을 둘러싼 사건은 미국의 신화가 된 ‘추수감사절’과 더불어 북아메리카의 전통이 된 ‘플리머스 바위’라는 기념비를 탄생시켜 놓기도 했다. 플리머스 식민지는 비교적 단기간에 소멸되었지만, 오늘날 ‘미합중국’이라고 부르는 나라에 초석이 되는 중요한 표상이 되어 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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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산 이상완 | |
호: 월산越山, 전남 고흥(1945), 향토사학자, 수필가, 고흥동초등학교, 고흥중학교, 광주제일고등학교(1964), 서울대학교 언어학과(1974) 졸업, 카이로 아메리칸 대학원 수료, 아랍어 및 고대 이집트 문화사 전공(1977〜1979), 미국 조지타운대학원 졸업(이슬람 문학 및 중동관계 전당)(1981〜1986) 주이집트, 주리비아, 주미대사관 및 주호놀룰루 총영사관, 바로영어전문학원 경영(서울, 1992〜2012-20년), 《한강문학》 수필부문 추대 등단(2020),한강문학회 편집위원, 저서 《사하라》(김영사, 1987), 현재활동: 향토사 연구 및 블로거, 발간작품: 〈조선시대 천재 이야기꾼〉, 〈어우당 유몽언〉, 〈오리점에 묻힌 슬픈 로맨스〉(화가 나혜석 이야기), 〈한국미술계 큰 별이 지다〉(화가 천경자 이야기), 〈마크 트웨인 & 스토우 부인 하우스 탐방기〉, 〈헤밍웨이 주요 작품 탄생지 ‘키웨스트 섬’ 탐방기〉 외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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