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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의 고향을 찾아서 11
-해와 햇살과 햇빛의 시인
-박두진 편
바람은 다소 매콤하지만 사갑들에 퍼지는 한낮 햇살은 얇은 얼음처럼 투명하다. 박두진의 시 “해”의 배경이 된 안성 사갑들을 찾았다.
시인 박두진(1916-1998년)이 8살에서 18살까지 살았던, 고향이나 다름없는 곳이다. 취재팀은 혜산의 고향 제자 김유신 시인을 만났다. 이곳 안성에서 나고 자라 지금껏 고향을 지키며 살고 있다는 김 시인은 자신을 소개하며 우스갯소리를 덧붙여 자신을 ‘전국구’라고 했다. 그가 운영하고 있는 안성시 보개면의 ‘청류재수목문학관’을 둘러보니 전국구라는 별명을 가질만하다. 작고시인, 생존 시인, 전국의 유명한 시인들이 거의 다 이곳을 다녀갔다. 시인들이 다녀가며 남긴 코멘트와 육필 시들이 진열장에 벽에, 정원에 즐비하다.
<시인의 생전 모습>
시인 박두진, 그는 1916년 경기도 안성시 봉남동(현재 안성여자중학교 위치)에서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드넓은 농경지를 가진 안성은 삼국시대 고구려. 백제. 신라가 한번 씩은 점령했던 곳이다. 따라서 삼국의 문화가 융합되어 발달한 곳이며 시장이 또한 발달하여 다른 지역에 비해 물자가 풍부한 고장이었다. 그러나 자신이 산문집에서도 말했듯이 어린 시절 박두진은 ‘얼굴이 거울처럼 비치는 조당수를 먹었’을 만큼 가난했다. 안성이 곡창지대인 만큼 일제 강점기 수탈도 악랄하여 마을 사람 대부분이 소작농으로 전락하여 노동을 착취당하며 배고픈 삶을 살았다고 한다. 박두진은 이곳 사갑들 ‘고장치기’의 다변한 자연에 몸과 마음을 흠씬 적시며 서울로 직장을 옮기기 전까지 산다.
그가 문학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17.18세 때다. 그에겐 “어질고 얼뜨고 착하고 눈물 많은 누님”이 있었다. 누님이 고향을 떠나 청주의 제사공장 여직공으로 가 있었는데 누님은 사흘돌이로 두진에게 장문의 편지를 보내왔다. 청년 두진은 누님에게 답장을 쓰면서 감정의 자유로운 토로와 그 표현 방법을 습득하기 시작했다고 고백한다. 그는 답장을 쓰면서 어떻게 하면 말을 압축시키고 더 지성적으로 감동을 줄 수 있을지 고민하며 문장 표현의 필요와 실제를 의식했다고 한다. 그러면서 글 쓰는 재미를 느꼈고 표현에 대한 의욕, 자신의 내적 정신적 성장을 의식하며 인격과 정서, 지적인 욕구와 인생의 설계를 하게 되었다고 한다.
누님은 박두진의 삶에 두 가지의 결정적인 영향을 준다. 하나는 신앙을 갖게 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두진으로 하여금 사색과 깊은 내재적 갈망과 구원한 꿈, 무한한 추구를 일깨우게 한 것이다. 하지만 누님은 안타깝게도 청춘의 꿈도 펴보지 못한 채 일찍 죽는다. 그런 누님이지만 시인은 누님에 대한 시는 한 편도 쓰지 않았다고 하는데 누님에 대한 정감과 안쓰러움이 시로 바꿀 수 없을 만큼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박두진은 안성군청에 재직하며 공무원으로 일하다 19세 때 서울의 ‘을유문화사’로 직장을 옮긴다. 그리고 1939년 “묘지송”, “향현”, “들국화” 등의 작품으로 정지용의 추천을 받아 <<문장>>지를 통해 문단에 데뷔한다.
北邙이래도 금잔디 기름진데 동그만 무덤들 외롭지 않어이.
무덤 속 어둠에 하이얀 髑髏가 빛나리. 향기로운 주검의ㅅ 내도 풍기리.
살아서 살던 주검 죽었으매 이내 서럽고,
언제 무덤 속 화안히 비춰줄 그런 太陽만이 그리우리.
금잔디 사이 할미꽃도 피었고 삐이삐이 배, 뱃종! 뱃종!
메ㅅ새들도 우는데, 봄볕 포군한 무덤에 주검들이 누웠네.
-‘묘지송’ 전문
그의 저서 <<한국현대시론>>(일조각)에서 그는 데뷔작 “묘지송”을 ‘인생의 혹은 민족의, 혹은 인류의 열렬한 비원, 열렬한 염원, 끊을 수 없이 강렬한 동경이면서 이루어질 수 없는 영원한 소망, 죽음에서 생명, 죽음에서 부활을 갖는 그러한 열정을 오히려 정돈되고 가라앉힌 감정으로 불멸의 종교적인 믿음으로’ 노래한 것이라고 해설한다.
이 시는 일제 강점기, 저들의 잔악한 민족말살정책이 최악에 달한 1939년에 씌어졌다. 이러한 시대적 상황에서 주검은 비참한 생명보다 차라리 외롭지 않은, 그래서 무덤은 외롭고 어두운 곳이 아니라 오히려 촉루가 빛나고 향그럽기까지 한 곳으로 표현한다. 즉 희망을 포기하지 않고 부활을 꿈꾸게 하는 삶과 죽음의 반어적 표현인 것이다.
1946년 그는 조지훈 박목월과 함께 3인 시집 <<청록집>>(을유문화사)을 출간한다. 청록집에는 총 40편이 수록되는데 목월의 시 16편, 조지훈과 박두진의 시가 각각 12편씩 담긴다. 해방직후인 이 시기 문단은 두 진영으로 갈린다. ‘문학가동맹’을 주축으로 한 좌익진영은 문학을 정치적 선전도구로 이용하려는 목적의식으로 상당히 우세한 기동력을 과시하는 반면, 민족문학 진영은 그렇지 못했다. <<청록집>>은 당시의 정세 속에서 출간한, 민족문학 진영의 신예시인으로서 내놓은 첫 작품집이다. ‘청록파’라는 호칭은 이 <<청록집>>에서 유래한다. 한편 청록집 발간을 계기로 세 사람의 우정과 문학적 결합은 한층 더 굳어졌다고 한다. 이 책에서 조지훈의 “고풍의상”과 “승무” 박목월의 “윤사월”과 “나그네” 그리고 박두진의 “묘지송”과 “어서 너는 오너라”가 대표작으로 꼽힌다.
박두진의 첫 시집(단행본)은 1949년에 출간된다. 책 제목은 오늘 날에도 그의 대표 시로 꼽히고 있는 <<해>>(청만사)이다.
해야 솟아라. 해야 솟아라. 말갛게 씻은 얼굴 고운 해야 솟아라. 산 넘어
산 넘어 어둠을 살라 먹고, 산 넘어서 밤새도록 어둠을 살라 먹고,
이글이글 앳된 얼굴 고운 해야 솟아라
달밤이 싫여, 달밤이 싫여, 눈물 같은 골짜기에 달밤이 싫여,
아무도 없는 뜰에 달밤이 나는 싫여….
해야, 고운 해야, 늬가 오면, 나는 나는 청산이 좋아라.
훨훨훨 깃을 치는 청산이 좋아라. 청산이 있으면 홀로래도 좋아라.
사슴을 따라, 사슴을 따라, 양지로 양지로 사슴을 따라
사슴을 만나면 사슴과 놀고,
칡범을 따라 칡범을 따라 칡범을 만나면 칡범과 놀고….
해야, 고운 해야. 해야 솟아라. 꿈이 아니래도 너를 만나면,
꽃도 새도 짐승도 한자리 앉아, 워어이 워어이 모두 불러 한자리 앉아
앳되고 고운 날을 누려 보리라.
-‘해’ 전문
<안성 고창치기 사갑들-‘해’의 배경지>
김유신 시인과 함께 보개도서관으로 간다. 도서관으로 오르는 언덕 입구에 박두진의 시비(-고향 수록)가 세워져 있다. 도서관 3층에는 박두진 문학자료관이 있다. 이곳에는 그의 육필원고와 초판본저서들이 전시되어 있고, 그의 서예작품들도 몇 점 전시되어 있다. 초면인데도 불구하고 ‘전국구’답게 전혀 낯설지 않고, 시종 환하게 웃던 김유신 시인은 자료관을 내려오며 조금 가라앉은 어조로 “어서 (혜산)선생님의 문학관이 세워져야 하는데….” 라고 혼잣말을 한다. 이곳에 시비를 세울 때 자신이 자연석을 구해와 세우게 됐다며 뿌듯해하던 모습과는 다르다. 박두진 시인은 고향엘 내려오면 꼭 김 시인을 먼저 찾았고, 김 시인이 쓴 글을 보고는 시를 배워보라고 해 김 시인은 3년여 넘게 시를 써가지고 서울을 올라 다니며 박두진 시인에게 시 공부를 했다. 기껏 써가지고 올라가면 빨간 줄만 쫙쫙 그어져 몇 번 포기하려다 선생님의 끈질긴 격려와 설득에 시인이 되었단다.
<보개도서관 입구 시비-김유신 시인>
보개도서관을 나와 사갑들로 간다. 박두진 시인이 꿈속에서도 자주 찾았다는 그의 고향 ‘고장치기’마을이다. 드넓은 평야를 멀리 야트막한 산들이 둘러싸고 있다. 들판 한가운데 서서 주변을 둘러보니 마치 거대한 돔 안에 서 있는 듯하다. 박두진 시인이 태어난 곳은 지금의 안성여자중학교 자리이지만 그는 8세부터 18세까지 ‘가장 여리고 순수하던 인생 중의 알고갱이 시절’을 이곳 고장치기에서 살아 고향 중의 고향이라고 이르던 곳이다. 굽이치는 차령산맥이 마을을 두르고 그 주봉이랄 수 있는 청룡산이 동편에 우뚝 서 있다. 이 청룡산을 시인은 ‘뒷날 내 시세계와 그 사상의 기반과 골격을 형성하는데 커다란 정신적 상징체’였다고 말한다. 이곳은 분지다. 마치 돔형지붕처럼 고장치기 하늘은 반원을 그리고 있다. 그의 대표 시 “해”는 이곳 청룡산에서 떠오르는 태양을 소재로 했다. 청룡산 동쪽 능선에서 말간 아침 해가 솟아오를 때는 ‘구약성경에서 말하는 새신랑의 얼굴’ 같았다고 한다. 그 햇덩어리는 시인에게 언제나 기적이며, 황홀이며, 힘이며, 마음이며, 불멸의 불, 뜨거움이었다고 한다.
박두진의 시에서는 해, 햇살, 햇빛 등 해가 많이 등장한다. 이 햇덩어리는 청룡산에 떠오르는 해, 사갑들의 해, 안성의 해, 조선의 해, 동양의, 세계의 해로 확장되어 간다. 이는 박두진, 그의 시세계가 아니겠는가. 취재팀이 다시 사갑들에 선 시각은 오후 5시쯤. 해는 서편 낮은 곳으로 기울며 선홍으로 물들고 있다. 김유신 시인이 손으로 가리키며 “요즘은 저 자리에서 해가 떠요.” 하는 곳을 바라보니 산자락 주변 경관과 어울리지 않게 웬 고층아파트가 뻣뻣하게 서 있다.
안성시 금광면 금광저수지가 내려다보이는 언덕에 혜산집필실이 있다. 집필실에서 오른 쪽 아래로는 그의 아들(셋째) 박영하(홍익대 미대교수)씨의 화실이 있다. 취재팀은 아들과 인터뷰를 하기 위해 먼저 작업실을 찾았다.
<시인의 3남 박영하 교수(왼쪽)>
박 팀장이 묻는다. “(박두진)선생님의 집필실이 여기 있는 걸 보면 은퇴 후 줄곧 여기에 기거하시며 글을 쓰셨나봐요?” 박 교수는 “아니요. 방학 중이나 주말에만 내려오셨어요.” 박 팀장은 “아버님이 시인이셨는데 내(아들) 인생에 어떤 영향을 끼쳤다고 생각하십니까?” 박영하 교수는 멋쩍게 웃으며 “꼭 집어 얘기하기는 좀 그렇고…. 제가 그림을 시작할 때 아버님이 좋아하셨습니다. 격려하며 성원을 아끼지 않으셨지요.” 라고 한다. 이번엔 필자가 묻는다. “아버지께서 글을 써보라고 권하신 적은 없으셨나요?” “예, 없었습니다. 아버님은 뭘 강요하시진 않았습니다.” 라고 간단하게 대답한다. “그럼 혹 (박두진)선생님의 후손 중에 누구라도 문학을 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박 교수는 “아니요, 유감스럽게도 지금까지는 없습니다. 나중엔 혹시 모르죠.”라고 대답한다. 박 팀장이 묻는다. “아버님에 대한 일화나 어떤 특별한 기억이 있다면요?” 라고. 말수가 적은 박 교수는 “아버님은 가족들에게 긴장감을 주신 일이 없고, 늘 글만 쓰시며 시간을 잘 관리해 오시는 모습을 뵈어왔습니다.” 라고 한다. 마지막으로 미망인은 지금 어디 계신가라는 취재팀의 질문에 박 교수는 의자를 당겨 앉으며 “어머님은 지금도 연희동에 살고 계세요. 연로하신데도 컴퓨터로 아버지의 문학 자료들을 하나하나 정리하고 계세요.” 라고 대답한다. 그때 옆에서 가만히 듣고 있던 김유신 시인이 한마디 한다. “사모님이 고생이 많으셨어요. 선생님은 길을 지나다 딱한 걸인을 보면 데리고 들어와 같이 주무시기도 했거든요.” 라며 고개를 흔들어 그뿐이었겠느냐는 표정을 짓는다.
<혜산 집필실>
집필실로 들어서니 책도 책이지만 거실 바닥과 진열장, 책상 위 등 어디 할 것 없이 수석들이 즐비하다. 생전 시인이 수석 수집광이었다는 말을 실감한다. 집필실 내부는 모두 시인의 손때가 묻은 자신의 작품들, 서예작품, 그림, 조각품 등으로 채워져 있다. 한 점 한 점마다에서 그분의 체취가 배어나오는 듯하다. 박두진 시인은 시. 서. 화에 능했다. 초서와 해서체는 누가 봐도 아마추 어 수준이랄 수 없는, 놀라운 솜씨다. 그는 동양의 고전예술과 현대미술에도 깊은 조예와 수준 높은 미적 감식안을 지녔었다고 한다. 아들 박영하 씨가 그림을 하겠다고 했을 때 좋아했다는 시인의 마음을 이제야 알겠다.
집필실을 나오니 들어갈 때 예사로 보았던 마당에 있는 돌들도 모두 시인이 생전에 수집해 놓은 수석들이란다.
먹빛 구름이
바람에 빗겨서 쏟아지고,
천둥소리 하늘 허물어뜨리고,
짐승 우는 소리 귀신 우는 소리 가득한
충충한 숲속에,
황황한 횃불처럼
고정된 번개처럼 번뜩이는
눈알
외눈박이 외눈이
분노를 켜고 있다.
그것은 떨고 있다.
그것은 울고 있다.
떨면서 응시하는 숲속의
낮에는,
짐승에게 쫒기는 짐승,
새에게 쫒기는 새,
벌레에게 쫒기는 벌레들의,
밟히고 밟는 소리, 빼앗기고 빼앗는 소리,
찌르고 찔리는 소리, 죽이고 죽이는 소리,
으르렁대고 으르렁대는 소리에
저질린,
차마 죽일 수도 살릴 수도 없는
넋들,
용서할 수도 미워할 수도 사랑할 수도
없는 넋들,
스스로가 스스로를 어쩌지 못하는
눈은,
다만 낮에도 불을 켜고
혼자서 떨며 있다.
주룩주룩 뜨건 눈물
혼자서 울고 있다.
-노(怒) 중에서
“노”는 돌에 든(새겨진) ‘눈알’의 형상을 보고 우주의 생성을, 그리고 그 안의 삶의 현장에서 필연적으로 일어나는 약육강식의 생태를 들여다본다. ‘외눈박이 외눈은 분노를 켜고’ 있지만 그 분노는 결국 폭발보다 뜨거운 눈물로 정화되어 ‘별과 별이 서로 엉겨 종 울리는 소리’로 하늘의 소리를 듣는다.
시인 박두진 그는 1939년에 문단에 데뷔하여 1998년 타계할 때까지 시집, 산문집, 시론집 등 30여 권에 이르는 저서들을 출간했다. 한편 1956년엔 아세아문학상, 1963년 12회 서울문학상, 1970년 3.1문화예술상, 1976년 대한민국 예술원상, 1988년 인촌상(문학부문), 1989년에는 정지용문학상을 수상했다.
박두진은 일제강점기에 태어나 6.25동란을 거치고 4.19와 5.16쿠데타 그리고 군부독재의 질곡의 역사를 살아오면서 시로 시대를 대변한 시인이다. 그런 그는 ‘청록파’ 시인의 한 사람으로 주로 자연을 소재로 한 시를 썼지만 그 내면에는 인간에 대한, 민족에 대한, 국가 현실에 대한 고뇌가 담겨져 있다. 한편 기독교인으로 <<거미와 성좌>> <<예레미야의 노래>> 등과 같은 신앙 시집도 출간했지만 그는 시인이 종교에 관해서 쓸 때 그것은 목사가 종교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과 달라야 한다고 했다. 즉 그리스도인이든 불교인이든 교리 자체를 노래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세계관으로 세계와 사물을 볼 때 시가 된다는 것이다.
바쁘신 중에도 취재를 도와주신 김유신 시인님, 박영하 교수님께 진심으로 감사의 말을 전한다.
취재팀 기 획: 박인식
사 진: 정동희
글 : 유영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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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니나님, 애쓰셨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