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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연수 3일째 판문점 견학(2010.9.8, 09:40) - 뒤로 보이는 건물이 사진으로만 보던 '공동경비구역(JSA)' 앞에서 기념사진
판문점 견학을 하기전에 사전 교육(슬라이드)을 받고 서약서 제출 (불미스러운 일이 발생해도 모두 본인의 책임이라는 무시무시한??)
북쪽에 보이는 '판문각'에서 북한 군인이 망원경으로 계속 우리 연수단들을 보고 있었다.(긴장감이 100배 ㅠㅠ)
푸른 색 건물은 남한에서 관리하고, 좌우의 흰색 건물은 북한에서 관리하고 있다고 함.
오른 쪽 위 작은 흰 건물이 북한 초소
JSA 경비병들의 부동 자세가 엄청 힘들어 보임 ㅠ
1953년 7월 27일 정전 협정이 열린 테이블, 이 테이블을 정확하게 남북으로 2등분하여 군사 분계선이 그어짐.
이 건물 안에서만큼은 남북으로 왔다갔다 할 수 있음.(방북 ㅠ),
JSA 헌병들은 한결같이 꽃미남
항상 부동 자세의 헌병
사진 찍을 시간이 그렇게 많지 않아 너도나도 빨리 빨리 찰칵~
배경은 하나, 사진 찍을 인물은 많이 ㅎ
금새 없던 북한군 병사들이 나타나 버스로 한 바퀴 돌면서 사진 촬영ㅠ
바로 코 앞에 북한군 병사가 ㅠㅠ
판문점을 견학하려면 꼭 이 통일의 관문을 통과해야만
1사단 전진부대가 이 지역(파주)을 관할하네요.
# 아래 통일연수 감상문을 적어 봤습니다.
분단의 현장, 판문점을 다녀와서
교사 최철상
평소 매스컴이나 사진으로만 보던 판문점을 견학하고 싶었는데 이런 저런 학교일정으로 연수를 갈 기회가 없었다. 마침 올해 통일교육원에서 실시하는 중등일반교사 통일연수(9.6~9.8)를 신청하여 그동안 궁금했던 통일관계 연수와 판문점을 생생하게 체험할 수 있었다.
연수 첫날인 9.8(월) 아침 일찍 연수 등록을 해야 되기 때문에 포항에서 하루 전날 KTX를 타고 서울로 향하였다. 수유전철역 주변에 숙박을 하고 다음날 아침 일찍 수유역을 순환하는 통일교육원 통근 버스를 기다렸다. 통일교육원 직원들과 같이 버스를 타고 자연환경이 빼어난 북한산자락에 있는 통일교육원에 도착하였다.
버스에 내리니 통일교육원의 상징물이라 할 수 있는 거대한 화강암 돌기둥이 나를 압도하였다. 탑의 앞뒤에는 ‘조국통일(祖國統一)’, ‘민족자존(民族自尊)’의 글자가 크게 새겨져 있어 이곳이 통일교육의 산실이라는 것을 금방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 사물함에 물품을 보관해 놓고 등록하기 전까지 통일교육원 내 여러 곳을 구경하였다. 통일교육원은 1972년 국토통일원 소속의 통일연구소로 발족하여 1987년 통일연수원, 1996년 통일교육원으로 개칭하여 지금까지 남북간 화해·협력과 통일에 관한 교육을 실시하고 각급 학교·사회교육기관의 통일교육을 지원하고 있다. 북한산(삼각산)자락에 자리잡은 통일교육원 내의 여러 건물들이 친환경 건물로 자연과 잘 어울리도록 디자인 되었다는 것과 오래 된 멋있는 소나무, 아름다운 잔디로 조성되어 오래 머물고 싶은 생각이 저절로 느껴졌다. 2박 3일간 연수를 받을 교육관과 식당이 있는 후생관, 숙소인 기숙사를 한 바퀴 둘러 보았다. 모든 건물이 나름대로 지형과 자연에 어울리도록 잘 건축되었지만 특히 잔디 구장을 한 눈에 내려다보이도록 지어진 기숙사가 마음에 들었다.
등록 시간이 되어 등록부에 확인을 하고 통일교육관련 연수교재(4권)와 명찰을 받았다. 전국 각 지방에서 27명의 일반교과 선생님들이 모두 등록을 하였는데 포항, 울진에서 근무하시는 선생님도 오셔서 반갑게 인사를 하였다. 한 쪽 편에는 연세가 지긋하신 많은 분들이 등록을 하였는데 ‘이북5도 위원회(이북5도 도지사,시장,군수)’ 임원들도 통일 교육을 받으러 오셔서 우리와 연수 일정이 같았다. 다음 날부터는 정훈장교팀들이 통일연수 계획이 되어 있는 등 통일교육원에서는 1년 내내 연수 일정이 빼곡히 잡혀 있었다.
드디어 연수 입교식을 마치고 첫 강의가 시작되었다. 통일교육원 소속의 여러 교수님들이 각자 연구한 분야를 강의하였다. 이미경 교수의 ‘남북관계 현황과 대북정책 방향’이라는 주제의 강의로 연수를 시작하였다. 한반도 주변정세를 전반적으로 설명하고 남북한 관계의 현황과 북한동향, 대북정책의 추진방향에 이어 통일미래비전의 주제로 시원시원하게 강의를 잘 해주셨다. 그동안 피상적으로 알고 있는 내용들을 나름대로 정리할 수 있어 좋았다.
후생관내 식당에서 점심을 맛있게 먹고 오후 강의를 들었다. 강의에 앞서 강당에서 북한 관련 영상물을 관람하였다. 북한 주민이 두만강을 탈출하여 중국, 태국, 라오스를 거쳐 한국으로 입국하는 장면을 다큐멘터리로 제작한 것이었다. 국내 한 방송사에서 이와 비슷한 내용을 방영한 적이 있었는데 자유를 찾아 수만리를 돌아 온갖 고난을 겪으면서 자유대한의 품으로 안기는 내용으로 자유가 얼마나 소중함을 잘 깨우쳐 주는 영상물이었다. 이어서 양재성 교수의 ‘최근 북한 사회의 변화와 전망’이라는 주제의 강의가 계속되었다. 고등학교 한국근현대사 교재에 들어있는 친근한 내용이 많아 쉽게 이해할 수 있었다. 북한 사회의 동인, 주민생활 및 의식구조의 변화, 시장과 관료의 관계 변화 등의 주제로 강의를 재미있게 하였다. 최근 북한주민의 생활 실태 내용으로 주민 건강(영양) 실태, 보건․의료 환경, 대북 지원물품 처리, 이동통신 가입자수, 북한 주민의 최신 유행 현황 등의 내용을 구체적으로 설명하였다. 요즘 남한에서 성형이 보편적으로 행해지는데 북한 여성들의 성형(쌍꺼풀, 입술선․눈썹 문신 등)은 ‘02~‘03년 정도부터 유행하여 현재는 보편적인 현상이며, 주로 집에서 무허가․무면허로 시술이 이루어진다는 것이 흥미로웠다.
첫날 마지막 연수는 북한이탈주민과의 대화 시간이었다. 아무래도 모든 선생님들이 북한의 최근 모습을 생생하게 들을 수 있는 시간이라 긴장되면서 호기심을 갖고 대화 시간을 기다렸다. 사회자와 함께 정장 차림의 북한이탈주민 여성 두 분이 들어오셨다. 먼저 두 분이 자신의 소개를 한 뒤 우리 선생님들이 평소 북한 주민의 생활과 여러 가지 의문점에 대해 질문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두 여성은 똑 같이 북한에서 신분도 괜찮으며 평안북도와 함경북도에서 태어나 사범학교를 졸업 후 수학교사로 재직하다가 탈북하였다. 두 사람 모두 90년대 고난의 행군으로 어려운 시기를 거치면서 교사인데도 불구하고 생계가 어려워 탈북을 하였다. 처음에는 탈북 후 중국에서 한동안 생활하면서 돈을 벌었고 한국의 생활을 알게되어 2007~2008년에 입국하였다. 하나원에 적응 교육을 받은 후 지금은 한민족 학교(새터민) 교사로 생활하고 통일교육원 강사와 탈북학생들의 1:1 멘토링을 하면서 생활하고 있다고 했다. 우리 선생님들이 북한 주민들의 생활, 학제와 역사 교육, 영재 교육, 남한에서의 생활 등 그동안 궁금했던 많은 질문을 하여 알게 되었다. 두 분이 100분 동안 우리들의 많은 질문, 가끔은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에도 성의껏 대답을 해주는 친절함을 보여주어 감사했다. 첫 날 연수를 모두 마치고 저녁 식사 후 통일교육원 맞은 편 북한산(삼각산) 자락에 잠들고 있는 수많은 애국지사들의 묘역을 둘러 보았다.
통일교육을 받으면서 역사교과서에 나오는 중요한 인물들을 이 곳 삼각산 자락에서 만날 수 있다는 것이 이번 연수의 또 다른 수확이었다. 즉 이준 열사, 해공 신익희, 이시영, 조병옥, 서상일, 김도연, 김병로 선생 등 수많은 애국지사들의 묘역과 4.19 국립묘지가 통일교육원 맞은 편에 있어 역사교육의 산 교육장으로서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었다. 특히 관심을 끈 것은 헤이그 특사로 파견되었다가 그 곳에서 분사한 이준 열사의 묘역이 성역화 되어 있었다. 묘역 입구에는 위훈비와 홍살문이 서 있고, 묘역으로 올라가는 숲속 오솔길 곳곳에 이준의 어록을 적은 비석들이 배치되어 있었다. 그 비석 중 하나에는 “땅이 크고 사람이 많은 나라가 큰 나라가 아니고 위대한 인물이 많은 나라가 위대한 나라가 되는 것이다.”라는 말이 새겨져 있었다. 그 외에도 위에 열거한 인물들의 묘역 하나하나를 그 분의 업적을 생각하면서 둘러보고 기념촬영도 하여 역사수업 시간에 학생들에게 보여줄 자료로 활용하기로 하였다.
다음 날 아침 일찍 일어나 통일교육원 부근에 있는 ‘국립4.19민주묘지’를 관람하였다. 연수가 끝나는 시간에는 묘역 개방시간(06:00~18:00)이 끝나기 때문에 아침 식사 전에 산책도 겸해서 동료 연수선생님 몇 분과 관람을 하였다. 이른 시간임에도 4.19묘역은 아침 운동과 산책을 하러 온 수유리 주민들로 북적대고 있었다. 상큼한 삼각산 공기를 마시면서 조깅과 산책을 하는 주민들을 보고 자연 환경이 좋은 곳에 사는 분들이라고 생각했다. 1963년에 건립된 4.19묘역에는 당시 사망자와 부상자 중 사망한 296명의 영령이 잠들고 있으며, 정부의 성역화 사업으로 1993년 첫 공사를 시작하여 종전 묘역을 96,837㎡로 넓혀 새로 단장하고, 1995년 4월 국무회의에서 4.19묘역을 국립묘지로 승격하여 현재 국가보훈처에서 관리하고 있다. 입구의 넓은 주차장을 지나 묘역에 들어서니 다목적 광장, 휴게 공간, 좌우 연못, 참배 대기 광장이 있었다. 중간 쯤 올라가 상징문을 통과하니 참배로(參拜路), 좌우에 깨끗이 정리된 잔디광장, 유명한 시인들의 수호예찬비(碑)가 있었고 그 위로 4.19묘역의 거대한 기념탑, 분향소, 영령들이 잠들고 있는 1, 2, 3묘역, 제일 꼭대기에 유영봉안소(遺影奉安所)가 있었다. 아침 일찍 봉안소 개방이 안되어 문살 틈으로 들여다보니 젊은 학생들의 영령 사진이 벽에 걸려 있었다. 평소 역사 시간에 교과서에만 의지하여 4.19 혁명 수업을 하다가 묘역을 직접 둘러보니 당시 불의에 항거한 젊은 학생들의 민주화 정신을 숙연하게 느낄 수 있었다.
아침 식사를 마친 후 오전에는 ‘독일통일 교훈과 시사점’, ‘통일미래 버전과 과제’의 강의를 들었고, 오후에는 ‘한반도 주변정세와 통일환경’, ‘통일교육 사례’에 이어서 이틀에 걸친 강의에 대한 종합토론 시간을 가졌다. 세 분의 교수님이 참석한 가운데 연수 선생님들의 질문에 대한 강사님들의 응답 시간으로 진행되었다. 그동안 피상적으로만 알고 있었던 통일에 대한 지식과 생각을 진지하게 고민할 수 있는 시간이 되었고, 배운 지식을 수업 시간에 활용할 수 있어 짧은 기간이었지만 의미가 큰 연수라고 생각했다. 모든 강의를 마치고 저녁에는 몇몇 선생님들과 어울려 삼각산 주위를 둘러보고 찻집에서 연수와 학교 현장에 관한 얘기를 나누는 친교의 시간을 가졌다.
드디어 통일연수에서 백미라고 할 수 있는 마지막 날 판문점 견학 시간이 되었다. 아침 식사를 마치고 나오니 통일교육원 앞 마당에는 벌써 관광차 1대가 주차해 있었다. 기숙사에서 각자 짐을 챙겨 통일교육원 인솔 담당자 한 분과 같이 탑승하였다. 출근 시간과 겹쳐 서울 시내를 빠져 나오는데 약간 시간이 걸렸다. 판문점에는 하루에도 여러 단체에서 견학을 하기 때문에 정해진 시간에 도착해야만 견학이 가능하다고 했다. 올해 2010년은 6.25전쟁이 발생한지 60주년이 되고, 6.25 정전협정이 판문점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에 판문점을 견학한다는 것은 특별한 의미가 있다. 버스가 서울 시내를 빠져나와 자유로를 이용하여 북쪽으로 달렸는데 파주 출판문화 산업단지를 지나니 임진강변에 위치한 오두산 통일전망대, 국가대표 축구연습장도 보였다. 비가 많이 와서 그런지 자유로 왼쪽의 임진강물이 넘실거렸고 임진강 넘어 바로 코앞이 북녘땅 개성시라고 하니 실감이 나질 않았다.
1시간 남짓 달려 임진각을 지나 통일대교 위 ‘통일의 관문’에서 인솔 담당자가 내려 통과 절차를 밟았다. 차창 밖을 내다보니 지그재그 형태로 바리케이트가 몇 겹으로 쳐져 있었고 판문점 견학 혹은 개성공단으로 가는 차량이 수속을 밟기 위해 줄지어 서있었다. 판문점이 가까워지니 왠지 긴장감이 더해 갔다. 드디어 목적지인 판문점에 도착하니 JSA(공동경비구역) 헌병이 무뚝뚝한 표정으로 차에 올라 주의사항을 일러주고 신분증 검사와 복장, 신발까지 검사하였다. 관광버스에서 군용버스를 이용하여 JSA교육관으로 이동, 사전 교육을 받았다. 영상과 사진을 이용하여 JSA에 대하여 전반적으로 설명하고 마지막으로 JSA에서 일어나는 모든 책임은 본인이 진다는 서약서를 제출하니 갑자기 긴장감이 엄습해왔다. JSA 내에서는 개인적으로 일절 사진을 찍을 수 없고 정해진 장소에서 별도의 지시에 따라 촬영을 해야 한다고 주의를 줬다.
JSA 헌병의 인솔 아래 먼저 매스컴과 사진에서만 보던 판문점을 향해 갔다. 건물 안에는 몇 명의 헌병이 부동자세로 마네킹처럼 서 있었다. 판문점 앞에서 인솔 헌병의 설명을 들었다. 바로 북쪽에 보이는 판문각에서 북한군 병사가 망원경으로 우리 관람객을 주시하고 있어서 겁이 났다. 최근 남북한 사이가 좋지 않아 JSA 지역에서도 한층 긴장감이 감돈다고 하였다. 북한군 병사를 향해 어떠한 불미스러운 손짓이나 행동을 해서는 안된다고 몇 번이나 강조하였다. 판문점 주위에는 우리 헌병들만 나와 경계를 하고 있었고 북한군 병사는 보이지 않았다. 북한에서 판문각을 방문하는 북한 주민들이 오면 경계를 선다고 했다.
드디어 6.25 정전협정이 체결되었던 판문점으로 들어갔다. 2명의 헌병이 꼿꼿하게 기마자세로 무표정하게 서있는 것을 보고 JSA에 근무하는 헌병들이 무척 힘들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탁자 위의 마이크 선을 경계로 남북으로 완전히 갈라져 있었다. 이 건물 안에서만큼은 남북한을 자유로이 왕래할 수 있는 것이 신기하였다. 대신에 건물 밖에는 건물 사이를 가로지른 10cm 높이 시멘트선이 남북 분계선으로 절대로 넘어갈 수 없는 경계였다. 오늘 내일이라도 빨리 자유롭게 왕래할 수 있는 시간이 와야 할텐데... 지구상의 유일한 분단국가인 한반도가 왠지 서글퍼졌다. 판문점 안에서 사진촬영이 허용되어 우리 연수선생님들이 앞다투어 기념사진과 헌병을 배경으로 셔터를 눌렀다. 밖으로 나와서 북한지역의 판문각을 배경으로 사진도 찍었다. 우리가 판문점을 나온 사이에 북한 지역에서 관람객들이 와서 북한 병사가 판문점에 나와 경계를 섰다. 우리는 버스를 타고 판문점을 한 바퀴 돌면서 가까이에서 북한군 병사를 보았다. 긴장감을 뒤로하고 JSA의 다른 지역으로 버스를 타고 가면서 설명을 들었다.
버스로 이동하면서 필요한 곳에 잠시 정차하여 헌병이 설명을 해줬다. 먼저 1976년 8월 18일 ‘도끼만행 사건’ 일어났던 곳에서 설명을 했다. 당시 남쪽 국제연합군측 제3초소 부근에서 시야를 가리는 미루나무의 가지를 치는 한국군에게 갑자기 수십 명의 북한군 사병들이 달려와서 도끼와 몽둥이 등을 휘두르며 폭행, 미군 장교 2명을 도끼로 살해하고 나머지 9명에게는 중 ·경상을 입힌 사건을 자세히 설명하였다. 지금은 그때의 장소를 표지로 남겨 북한군의 비인도적인 행위를 알리고 있다. 조금 이동하니 정전협정 후 남북 포로교환이 이루어졌던 ‘돌아오지 않는 다리’가 나왔다. 민족 분단의 비극을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돌아오지 않는 이 다리는 도끼만행 사건이후 초병이 직접 근무하지 않고 전자장비를 설치해 감시하고 있다고 했다. 우리가 탄 군용 버스는 앞에서 지프차가 인도하는 대로 벼가 누렇게 익은 들판을 따라 이동하였다. 버스 안에서 북측 최남단 마을인 기정동 마을의 인공기가 바람에 펄럭이는 것을 보았다. 깃발 크기가 가로 35m, 세로 28m, 또한 깃대 높이가 150m이며 매일 깃발을 올리고 내릴 때마다 40여명의 인민군이 달라붙어야 한다고 했다. 한편 현재 남측 최북단 마을인 대성동 태극기의 깃대 높이는 100m라 하였는데 오늘은 태극기가 보이지 않았다. 헌병 얘기로는 태극기가 바람에 펄럭이며 훼손되는데 2~3개월에 한 번씩 교체를 해야 하는데 오늘이 바로 태극기 교체 날이라 게양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마을 안에 있는 유일한 학교인 대성동초등학교는 미군들이 학교에 와서 영어를 가르쳐 주고 초등학교를 졸업하면 밖에 있는 중․고등학교 및 대학교를 다닌다고 했다.
뜻 깊은 판문점 견학을 마치고 내려오면서 가까이에 있는 ‘통일촌농산물직판장(식당)’에서 점심식사를 하고 농산물 직판장을 구경하였다. 이 지역의 특산물인 ‘장단콩(된장,고추장)’, 청정지역에서 생산된다는 ‘통일촌 특미’ 및 여러 종류의 북한산 술을 판매하고 있었다. 이제 공식적인 통일연수를 마치고 버스는 서울로 출발하였다. 개인적으로 임진각 주변의 통일관련 역사 유적을 구경하고 오기 위해서 인솔담당자에게 부탁드려 임진각에서 하차하였다.
임진각 역 주변에 엄청 큰 규모의 건축비가 서 있었는데 가까이 가서 확인해보니 전두환대통령 시절 버마 방문 때 북한 간첩이 설치한 아웅산 국립묘지 테러 사건으로 희생된 분들의 위령탑이었다. 그 옆에 철도 중단점(철마는 달리고 싶다)에 당시 기차가 그대로 놓여 있었고, 야외 전시장에는 6.25 전쟁 때 사용했던 각종 무기(탱크,장갑차)와 항공기 등이 역사의 교육물로 전시되어 있었다. 임진각 전망대에 올라 망원경으로 임진강 넘어 북한 지역을 볼 수 있었다. 임진각 안에는 실향민들이 고향을 향해 제사를 올리는 ‘망배단’과 세계 분쟁지역에서 가져 온 돌로 구성된 ‘평화의 돌’ 전시, ‘평화의 종’ ‘망향의 노래비’ 등이 설치되어 있었다. 한 쪽 켠에는 6.25전쟁으로 멈춰 선 장단역의 기관차를 특수 처리하여 야외에 전시하고 있었고, 6.25 전쟁 휴전협정으로 포로를 송환하였던 ‘자유의 다리’도 있었다. 자유의 다리 주변에는 관람객들이 통일의 염원을 적은 글들이 철조망 주변에 빽빽하게 걸려 있어 이 곳 임진각이 바로 통일의 장으로서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쉽게 오기 힘든 임진각의 여러 통일관련 유적을 꼼꼼히 둘러보는 것을 끝으로 발걸음을 돌려 집으로 향하였다. 이번 2박 3일간의 생생한 통일연수가 그 어떤 연수보다도 의미가 있고 누구나 한번 가봐야 할 연수라고 생각하였다. 보고 느낀 대로 학생들과 같이 역사 수업 시간에 진지하게 통일에 관해 이야기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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