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대체 그런 일이 즐겁다고? 가느다란 실 한 오라기에 목숨을 매는 행위인데도 즐겁단 말인가? 등산가에게는 언제나 무서운 상대인 죽음이 따라다닌다. 이러한 일은 등산을 하지 않는 사람은 절대 모른다. 우리는 생명이 무엇인가를 알고 있다. 그때 그때 싸워서 새 생명을 얻는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알고 있다. 인생이 얼마나 아름답고 세상이 얼마나 멋진가 알려면 사람이 적어도 한 번 벼랑가에 서서 밑을 굽어봐야 한다.'
'저기 남쪽에 어머니 고향이 있다. 흰 파도같이 보이는 저 찔러탈러 알프스 연봉 너머가 돌로미테이리라. 거기가 어머니 고향이다. 그 곳으로 내 마음도 달려간다. 어떠한 장해물도 이것만은 막지 못한다. 해가 지평선 너머로 질 무렵 우리는 정상을 뒤로 했다. 우리 가슴은 아무에게도 허락되지 않는 길을 갔다는 기쁨과 자랑으로 가득했다. 그것은 북 칼크 알프스에서 제일 큰 루트를 완등했다는 바로 그 기쁨과 자랑이었다.'
'눈은 묘한 물건이다. 별처럼 생긴 눈송이가 그렇게 부드럽고 고울 수가 없다. 그야말로 미와 완벽의 기적이다. 그러나 이러한 아름다움이 언제나 그대로 있는 것은 아니다. 미의 성질은 억측하기 어렵고 변덕스러운 때가 많은데 눈의 경우도 그렇다. 만일 눈과 오랫동안 어울리고 싶으면 우선 눈을 잘 알아야 한다. 이에 비하면 바위가 훨씬 성실하다. 바위는 제대로 생겼거나 그렇지 못하거나 굳든가 무르든가 둘 중의 하나다. 경험 있는 사람이 바위에 속는 일은 거의 없다. 눈은 원래 여섯 모가 난 매혹적인 작은 모양으로 하늘에서 땅으로 떨어지지만 바위는 그 흰 덩어리처럼 오랫동안 사람을 흘리지 않는다.'
'언제나 현실은 생각보다 나쁘지 않아 이렇게 하켄 없이 오르는 것보다 멋진 일이 또 어디 있을까!'
'우아한 설릉에 나는 발자국을 남겼다. 눈에 덮인 능선은 돌출부에서 돌출부로 다리를 놓고 있었다. 그런데 이 놀라운 자연의 솜씨를 망치며 나가기가 여간 가슴 아프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은 이렇게 심미적 관념에 사로잡혀 있을 때가 아니었다. 나는 앞으로 앞으로 나가지 않을 수가 없었으니까.......'
'지금 여기는 깊은 고요 속에 있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말할 수 없이 춥고 말할 수 없이 외롭다. 그러나 은총에 듬뿍 젖은 시간이다.'
'드디어 나는 이 산의 최고 지점에 섰다. 8,125미터의 낭가 파르바트다! 더 이상 오를 곳이 없었다. 주위는 작은, 펀펀한 설면인데 한두 걸음이면 사방이 낭떠러지다. 저녁 7시였다. 지금 여기에 나는 지구가 생긴 이래 인간으로 처음 서있다. 내가 바라던 목표, 그 지점에 서있다. 그러나 마음이 취해서 잠길 행복감도 즐거운 환희도 일어나지 않는다. 승리자로서의 고양된 기분도 없다. 이 순간의 의미를 나는 조금도 느끼지 못했다. 그저 모두 끝났다는 느낌뿐이었다.'
'나는 자기 그림자에 끌리고 쫓기며 또한 놀림감이 되어 앞으로 쓰러지듯 하며 전진했다. 이제 나는 내가 아니었다---그림자에 지나지 않았다.--그림자 뒤를 그림자가 따라가고 있었다. '
헤르만 불은 역사적인 등정 외에도 산에 대한 천진하리만큼 순수한 열정 때문에 더 존경심이 가는 인물이다.
처음 책을 읽기 시작할 때는 반복적인 등반 기록이 좀 지루하게 여겨 지기도 했지만, 아이들의 놀이를 구경하다가 나도 모르게 그 놀이에 빠져 드는 것처럼 어느덧 그의 등반선을 따라가게 된다.
죽음에 대한 공포 만큼 삶의 진실을 가장 확연히 드러내 주는 것이 있을까?
진실로 위대한 등반가들은 자신의 위대성을 의식하면서 살아가는 것은 아닌 듯 하다. 오직 삶과 죽음의 냉엄한 경계를 오르내리면서, 삶을 두텁게 싸고 있는 거추장스러운 군더더기에서 일찌감치 벗어나 생명의 본질을 체득한 것일 뿐. 그래서 생명의 본질에 치열했던 사람들은 이른 나이에 세상을 버리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인간의 생에서 삶에 대해 깨달아야 하는 모든 것을 이미 다 알았으니 가장 치열하고 깨끗한 죽음의 순간을 맞이하는 것이려니........
삶과 죽음의 본질을 직시한 사람들의 꾸밈없이 소탈한 삶의 태도와 유머, 우정, 자연 앞에서의 겸손 등 인간적인 모든 요소를 그는 가지고 있다. 그의 자서전 문장의 대부분은 인간이 자연 앞에서 느끼는 감정이 그대로 드러나 행간에 시적 여운마저 감돌아 어느 순간 독자의 가슴에 잔잔한 떨림을 준다.
하늘을 향해 산이 그리는 창조적 선 위에 인간의 선을 그리며 오르 내린 불세출의 예술적 산악인. '헤르만 불'
위대한 등반가의 대서사시가 이십대 초반에 처음 산을 접하면서 느끼던 내 설레이던 순정을 다시 깨운다. 2009. 7.24
첫댓글 이 책을 읽은지 10년은 넘은거 같은데, 그때 이후로 돌로미테에 대한 알 수 없는 그리움이 마음 한켠에 자리잡고 있답니다. 그곳에서 해르만 불의 숨결을 한번 느껴보고 싶다는 막연함이 남아 있습니다.
헤르만 불의 숨결이 돌로미테 쪽도 그렇고 서부알프스 쪽도 아주 많더군요. 오르진 못해도 헤르만 불의 등반선을 상상하면서 봉우리들을 쳐다보는 기분만으로도 남달랐는데, 하얀능선님도 그런 시간 가지게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