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신부 주변에는 사람들이 넘친다.
사회 지도층에서부터 외국인 노동자·탈북자에 이르기까지 정말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든다.
그의 부지런함이야 학창 시절부터 충분히 짐작했지만 정말 놀라운 것은 그가 가진 남다른 소통능력이다. 이 신부의 요청으로 외국인 노동자들을 위한 주일 영어 예배에 몇 년간 계속 참석했던 때가 있었다.
영어로 설교를 하고 나서도 무엇인가 충분히 소통하지 못한 안타까움이 언제나 있었는데 이 신부는 정말 거침이 없었다.
그가 외국인 노동자들과 이야기하고 있는 모습을 보면 소통을 위해 언어가 반드시 필요한 것은 아니라는 생각마저 든다.
몇 개의 영어 단어, 몇 마디의 우리말로도 아무런 불편 없이 의사소통하는 사람이다.
머리가 아니라 가슴, 손과 발로 소통하는 그의 모습은 때로는 우리를 부끄럽게 하기도 한다.
그는 만날 때마다 새로운 이야기를 쏟아내는 사람이다.
우리는 재치 넘치는 그의 입담에 취해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둘러앉아 있게 된다.
그런 이 신부를 선배들과 동역자들은 ‘도깨비 신부’라고 한다.
대부분의 성직자들은 주어진 틀 안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데 익숙하다.
하지만 이 신부는 정말 도깨비다.
보아도 못 보는 것을 보는 사람이고, 보지 않아야 한다는 전제에 얽매이지 않고 보는 사람이다.
그런 도깨비였기에 그가 ‘샬롬의 집’에 둥지를 틀 수 있었을 것이다.
사제 서품을 받고 그가 사역지로 택한 곳이 바로 지금은 샬롬의 집이 자리 잡고 있는 경기도 마석 성생원이었다.
한센 환우들이 지켜 온, 버려져 있다시피 했던 작은 성당에서 성직자로서 첫 사역을 시작했다.
세상을 등지고 살았던 환우들을 마을 밖으로 이끌어 내 세상 사람들과 어울리게 한 사람이 바로 이 신부다. 어느 날 도깨비처럼 불쑥 나타나더니 마을 분들을 데리고 영국에 가겠다고 했다.
“웬 영국이냐”는 말에 한센 환자들을 위해서 마석에 성생원을 세워주었던 영국 선교사 신부의 묘지를 찾아서 감사의 인사를 드리겠다는 것이었다.
그 이후에도 미국으로 일본으로 틈 날 때마다 마을 분들을 이끌고 나들이를 했다.
이 신부가 가는 길은 늘 한결같다.
우리들이 만든 편견의 장벽에 갇힌 사람들과 함께하면서 참으로 경쾌한 발걸음으로 그런 장벽들을 넘어서는 일을 계속하고 있다.
국적이나 피부색이 다른 사람도 병든 자나 가난한 자도, 그가 만들어 가는 샬롬의 공동체 안에서 각기 귀한 생명으로 되살아 난다.
가깝다는 핑계로 제대로 표현을 해 본적은 없지만 그가 만들어 내는 감동이 나에게도 큰 위로가 되었음을 알고 있다.
<중앙선데이 2010. 7. 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