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世 모재공(慕齋公) 휘 중교(重喬) 유사(遺事)
통덕랑(휘 석승20世)공의 3남으로 태어난 모재공께서는
귀미마을에서 인구마을로 살림나
후손들이 대를 이어 한마을을 차지하여 잘 살고 있다가
1970년대에 댐건설로 수몰되어 산지사방으로
흩어져 지금은 망향의 그리움에 젖고 있다.
인재공(忍齋公)께서 모재공이 돌아가시자 “순박(淳朴)한 성품으로 족친들과 목족(睦族)하고, 양친(兩親)에게 효도(孝道)했고, 글은 높은 경지에 올랐네”라고 인품을 말씀하였다.
모재공께서의 한 일을 묘비문과 각종 기록을 통해 정리해보았다.
앞 시내의 동쪽이 인구마을이다. 수몰 직전이라 기와집들은 이건해 버렸다.
모재공께서 귀미마을에서 인구마을로 살림나 입향하신 마을이다.
자양면 소재지로 면사무소와 학교 등이 있었다.
인구마을 뒤 '뒤솔밭'에는 신석기시대의 고인돌이 여러 곳에 있었다.
그르니 지금부터 3천여년 전에 사람이 살았던 곳이라는 뜻이다.
특히 모재공께서 살림난 시대에는 월성이씨들의 집성촌 이였는데
내가 어릴 때는 온 마을에 타성은 주씨, 손씨, 김씨, 양씨 넷집 뿐이고
모두가 우리들 뿐이였다.
모재공께서 인구마을에 살림나 사셨고, 대를 이어 주손들이 살았던 모재고택.
수몰 전의 모습과 수몰 후 월연의 귀연공 문중에서 사가
지금은 성곡리에 서 있다.
중귀미에 서 있는 모재공과 자언공 부자 분을 위한 성산재와 추모당.
매년 11월 첫째 주 일요일에 성자산의 수위인 모재공의
묘사를 지내고 있는 자손들의 모습.
묘사를 지내고 성산재에서 제관들이 점심식사를 하고 있다.
공(公)의 휘(諱)는 중교(重喬 21世)이고, 자(字)는 수보(壽甫),
호(號)는 모재(慕齋)이다.
1.가계(家系) : 영일현(迎日縣) 사람으로 고려 때 휘 습명(襲明)이 그 시조인데 추밀원지주사(樞密院知奏事)를 지내셨고. 6대 후에 판도판서(版圖判書) 휘는 임(林 7世)공의 두 자제가 있는데 장남 휘 인수(仁壽 8世)는 포은선생의 증조이며, 차남 휘 인언(仁彦 8世)은 전공판서(典工判書)로 공의 선계(先系)이다.
판서공 휘 광후(光厚 9世)께서는 고려조 상주목사이고, 조선조(朝鮮朝)에 공조판서(工曹判書)이며, 휘 위(瑋 10世)는 사정(司正)이고, 휘 문예(文裔 11世)는 생원(生員)이며, 휘 종소(從韶 12世)는 문과(文科) 중시(重試)에 급제하여 사성(司成)을 지냈고, 호수공(湖叟公) 휘는 세아(世雅 16世)이고, 일찍 진사(進士)가 되어 임진왜란 때 의병장으로 영천(永川) 경주(慶州) 양성(兩城)을 회복한 공으로 황산도 찰방이 되셨고, 후에 증직이 병조판서(兵曹判書)이고. 시호는 강의공(剛義公)이다. 휘 수번(守藩 17世)은 용양위부호군(龍驤衛副護軍)과 내금위장을 지내셨다. 증조부는 삼휴공 휘 호신(好信 18世)시고, 사과공 휘 시우(時羽 19世)는 조부시며, 통덕랑 휘 석승(碩升 20世)은 아버지이다.
어머니 경주최씨(慶州崔氏)는 현령(縣令) 국성(國成)의 따님이시다.
2.생몰(生沒) : 공(公)은 조선(朝鮮) 수종(肅宗) 기묘년(己卯年) 1699년 2月 26日 귀미(龜尾)의 본가(本家)에서 태어났다.
병자년(丙子年) 1756년 2월 1일에 세상(世上)을 떠나니 인재공(忍齋公)께서 곡(哭)하여 말하기를 “순박(淳朴)한 풍도(風度)로 종족(宗族)에 돈목(敦睦)하며 마땅함을 실행(實行)하여 양친(兩親)에게 효도(孝道)했네. 인구(仁邱)의 산수(山水)는 청전(靑氈)註1)은 아니나, 이미 사문(斯文)註-2)은 높은 하늘에 매우 뻗쳤도다.“ 하였다.
o註1 청전(靑氈) : 대대로 전해오는 오래된 물건
o註2 사문(斯文) : 유학을 깊이 연구하여 높은 경지에 오른 사람
3.면학(勉學) : 배움은 횡계(橫溪)의 사종형(四從兄) 훈수(塤叟) 지수(篪叟) 양 선생의 가르침을 받았다.
할아버지의 명(命)으로 백형(伯兄) 구계공(龜溪公)을 따라 횡계에 가서 소의(小儀)와 제자직(弟子職)등을 청(請)해 익히니 훈수선생(塤叟先生)께서 이른바 제자(諸子) 좌우(左右)에서 오직 쇄소응대(灑掃應對)註3)의 가르침을 삼가 보는 자(者)는 바로 이 사람이라 하였다.
또 진사(進士)인 종형(從兄) 인재공(忍齋公) 중직(重稷)과 매부(妹夫)인 박공 (朴公) 태후(泰厚)와 손공(孫公) 효숭(孝舜)과 김경석(金慶錫)과 권만전(權萬銓) 등과 더불어 창수(唱酬)하면서 학문(學文)을 논(論)함에 날과 달로 갈고 닦은 공(功)이 많았다.
o註3 쇄소응대(灑掃應對) : 물을 뿌러 쓸고 응대한다는 뜻으로, 집안팎을 깨끗이 거둔다는 뜻.
4.유시(遺詩) : 백부(伯父) 오회공께서 우애(友愛)가 매우 돈독(敦篤)하여 가묘(家廟)의 동쪽에 오회당(五懷堂)을 지어 자질(子姪)들의 수학(修學)하는 곳으로도 삼으니, 지은 사성시(四聲詩)가 계부(季父)인 월송재(月松齋)가 지은 서문(序文)에 잘 나타나 있다.
5.효성(孝誠) : 단정하고 근엄하며 효성(孝誠)과 우애(友愛)가 지극하셨다. 병진년(丙辰年) 1736년에 어머님이 돌아가시고 무오년(戊午年) 1738년에 아버님이 세상(世上)을 떠나시니 상제(喪制)를 지성(至誠)으로 하였으며 조상(祖上)을 받들고 후손(後孫)들을 넉넉하게 하는 모든 절차는 삼휴(三休)와 오회(五懷)의 가법(家法)을 잘 지키셨다.
6.묘소(墓所) : 묘소(墓所)는 자양(紫陽) 중귀미(中龜尾) 성자산(聖子山) 정좌(丁坐)이니 합폄(合窆)이다. 배위(配位)는 밀양손씨(密陽孫氏) 효자(孝子) 한봉(漢鳳)의 따님이시다.
7.후손(後孫) : 一男二女를 낳으니 아들은 휘 일필(一鉍)이요. 딸은 민노현(閔魯賢)과 조옥신
(曺沃臣)에게 시집갔다.
o 아드님이신 자언공께서는 四男二女를 낳으셨으니 아들은 하문(夏汶) 하신(夏澵)
하주(夏澍) 하로(夏潞)이며 딸은 장일민(蔣逸民)과 남내환(南來煥)에게 시집갔다.
o 하문(夏汶)의 아들은 범휴(範休)이며 딸은 최윤해(崔潤海)와 이한경(李漢慶)에게 시집갔다.
o 하신(夏澵)의 아들은 헌휴(憲休) 가휴(家休) 보휴(寶休)이며 딸은 남대건(南大楗) 신우성(辛
宇成)에게 시집갔다.
o 하주(夏澍)의 아들은 성휴(性休) 진휴(進休) 채휴(採休) 정휴(禎休)이다.
o 하로(夏潞)의 아들은 후휴(煦休) 서휴(書休)이며 딸은 서원일(徐元一)과 권찬운(權贊運)
에게 시집갔다.
8.특별히 하신 일
1)임진년1592년 경주성 복성전에서 부공이신 호수공을 구하고 전사한 백암공의 애사(哀詞)를
모아 하천에 장사지냈다. 그래서 시를 묻었다하여 시총(詩塚)이라 부른다.
공이 1749년 1월 3일 시총에서 열린 백암공 분황제(焚黃祭)註4)에 참사(參祀) 하다.
o註4)분황제(焚黃祭) : 죽은 자에 대한 임금의 고명문(誥命文)의 부본(副本)을 그 영전에서
불살라 고하던 제사.
2) 기사1749년 10월 과 계유1753년 11월에 남성재(南城齋) 이건(移建) 관계의 진정서
(陳情書)에 연기명(連記名) 하였다.
그리고 아드님이신 자언공께서 남성재 건립에 크게 기여하였다.
o모재공의 남기신 詩
o오회당창수록(五懷堂唱酬錄)에 차운(次韻)을 지으셨다.
우(又) 종자(從子) 중교(重喬)
新搆茅簷揭五懷陶陶幽致外形骸姜公被裏深情洽范子堂中至樂佳對月三更
談笑穩開樽一榻醉醒偕箕구遺業傳來久不肖長期竟勿乖
아담한 새 정자(亭子)에 오회당액(五懷堂額)을 걸었으니,
모년(暮年) 형제(兄弟) 여년(餘年)을 즐기심이 넉넉하도다.
안봉(案峰)의 뛰어난 경색(景色)은 아직도 씩씩하며,
오호(五皓)의 한가로운 시정(詩情)도 다 함께 가상(佳賞)함이다.
형제분(兄弟分)이 함께 즐기실 곳을 이미 얻었으나,
그 일사(日事)는 세상을 더불어 속류(俗流)와 함께 하심이라.
삼휴고택(三休古宅)에 참신한 여복(餘馥)이 머물러 넉넉한 바이며,
대(代)를 이어온 그 유범(遺範)을 어긋치지 말지어다.
o매곡의 산수정(山水亭) 차운(次韻)하심.
매산공께서 벼슬을 그만두고 귀항하여 강학하던 정자인 산수정
山水亭 次韻
산수정 차운
族弟 鄭重喬
족제 정중교
山水中間結素盟 산수 속에 맺은 평소의 맹세로
산수중간결소맹
晩來新構屋三楹 만년에 세 칸 정자 새로 지었네
만래신구옥삼영
簷前秀岳層層色 처마 앞 수려한 산봉우리 층층이 빛나고
첨전수악층층색
軒外淸流曲曲聲 헌함 밖 맑은 시내 굽이굽이 소리 내네
헌외청류곡곡성
雲接阿尼傳毅象 구름은 이산에 닿아 의연한 기상 전하고
운접아니전의상
波連玉磵溯幽情 냇물은 옥간정과 이어져 그윽한 정 떠 올리네
파연옥간소유정
閑居興味人誰識한가로이 사는 흥취를 누가 알까
한거흥미인수식
長臥書窓度一生 서창 아래 길게 누워 일생을 보냈네.
장와서창도일생
<참고문헌>
o모재오천정공묘갈명(慕齋烏川鄭公墓碣銘) 6세손진소근찬(六世孫鎭韶謹撰)
<자료정리>
o9세손 병극(9世孫 炳極)
<자료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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