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장 하나님 나라는 어떤 세상일까?
2024.4.28. 송지미
- 바울서신과 복음서의 중심이 십자가 대속 신학인데 비해 예수의 어록 Q복음과 도마복음은 예수가 전한 하나님 나라에 초점을 맞춤.
예수는 지혜의 스승으로 대안 사회로 나아가는 전복적 지혜를 가르침.
신약학자 크로산은 당시 그리스-로마의 제국 체제에 대항한 견유학파에 주목함.
〈예수와 견유학파〉
세계정복을 시작하는 알렉산더 대왕이 지혜를 얻기 위해 디오게네스를 찾음.
디오게네스로 시작한 무리들을 견유학파라 부름.
서양에 개처럼 자유롭게 떠돌며 인간이 누리는 진정한 자유가 무엇인가를 장터와 길거리에서 외침.
그들이 가진 자유 개념은 욕망으로부터의 자유, 불안, 분노, 슬픔이나 다른 감정들로부터의 자유, 종교나 도덕의 통제로부터의 자유, 관리들의 권위로부터의 자유, 여론에 대한 염려로부터의 자유, 재산에 대한 걱정으로부터의 자유, 여론에 대한 염려로부터의 자유, 재산에 대한 걱정으로부터의 자유, 지방색에 국한되는 것으로부터의 자유임.
견유학파의 철학자들은 시대의 문제를 간파하고, 그 모순을 드러냈지만, 단지 지적하고 그 모순을 설교하고 다니는 개인일 뿐이였음.
예수의 선교사들은 농촌으로 다니며 병자들을 치유하고 그들과 함께 먹고 마셨기 때문.
예수의 선교사들은 병자를 고쳐주며 “하나님 나라가 너희에게 가까이 왔다”라고 말했다.(눅10:8-9)
- 예수의 선교사들은 함께 하는 공동체를 목표로 함. 그것이 하나님 나라임.
〈포도원 품꾼의 비유〉
이 비유는 노동을 상품으로 생각하는 것을 금지함.
인간은 노동을 파는 장사꾼이나 기계가 아니라 존엄한 존재임.
노동은 파는 물건이 아니라 그 가정의 생계와 기쁨을 유지할 수 있는 보장책이 되어야함.
실로 위대한 노동 선언이 이 비유에 담겨 있음.
노동 존중이 하나님 나라에서 이루어지는 임금 지불의 원칙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천명함.
〈비유의 결어〉
대개의 결어들은 본래 비유가 뜻하는 바와 전혀 다른 강조점이 됨.
교회는 얼마나 오랫동안 일했느냐, 얼마나 많이 일했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부름심을 받은 것 그리고 부름을 들었다는 것 자체가 중요함.
〈비유가 후대에 변형되는 경향들〉
비유가 후대에 변형되는 데는 일정한 경향이 있다. 이는 예수의 비유에 걸쳐있는 베일을 걷어내고 옛 자신의 소리로 돌아가는 데에 도움을 준다.
비유는 그리스어로 번역될 때, 불가피하게 의미의 변화를 동반했다.
구체적인 삶과 사회상이 드러나는 비유들, 표상자료도 그때 같이 ‘옮겨졌다’
비유들이 후대에 변형되는 데는 일정한 경향이 있다.
때로는 이미 널리 알려진 구약의 구절들과 민속적인 설화, 동기들이 자료 변형에 영향을 준다.
원래는 적들과 무리에게 말한 비유들이 초대교회에서는 가능한 교회 내의 윤리로 변형된다.
비유의 강조점이 종말론적인 긴박성에서 생활률로 옮겨진다.
초대교회는 특히 재림의 지연 이후 나타나는 교회의 선교 상황에 비유들을 관련시키고, 이 상황에서 비유들을 재해석 하고 부연했다.
비유들을 알레고리로 만들었다.
초대교회가 비유를 수집한 것을 모아놓았다. 그런 과정에서 두 비유가 하나로 융합되기도 했다.
초대교회는 비유들에, 종종 의미의 변화를 일으키는 룰을 만들었다. 특히 초대교회는 다양한 비유를 결어로 일반화 하며, 보편 타탕한 교훈을 부여했다.
<포도원 소작인의 비유>
- 하나님께서 예언자를 보냈으나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를 죽이고 나중에는 자신의 아들(메시아)까지 보냈으나 백성들이 결국 그를 바깥으로 쫓아내어 죽였다. 교회는 복음을 전하는 상황에 적용하여 예수를 메시아로 받아들이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들 간의 갈등으로 재해석했다.
[이 돌 위에 떨어지는 사람은 부스러질 것이요, 이 돌이 어떤 사람 위에 떨어지면, 그를 가루로 만들어 놓을 것이다.] (44절)
-이 말씀은 본래 예수의 말씀이 주어진 투쟁적 상황에는 잘 어울렸지만 교회가 재설정한 선교적 맥락에서는 어색하다. 앞뒤 맥락에 맞지 않게 불쑥 과격한 발언이 나오므로 어떤 사본에는 과감하게 생략했다.
<달란트의 비유>
마태복음 25장에 등장하는 '달란트 비유'는 널리 알려져 있다. 이 비유의 전통적인 해석은 주인은 예수를, 맡긴 달란트는 우리에게 주신 은사를 뜻한다. 주인이 돌아와서 종들과 정산한 것은 예수의 재림과 최후 심판이다. 첫 번째, 두 번째 종은 은사를 잘 활용한 충성스러운 이들이고, 세 번째 종은 은사를 잘 활용하지 못한 게으르고 무능력한 종이다.
이 비유는 당시 유대나 농촌 사회의 정서와 달리 엉뚱하다. 우선 이자를 금지하는 토라를 위반하며, 당시 소농의 빈곤화를 막아내려는 규범과도 모순된다. 이웃의 돈으로 이익을 내는 것은 마을 주민의 상호 분배 체계에 어긋난다. 대개 그런 행위는 권세자의 수법으로 다른 사람을 제 맘대로 다스리려는 의도로 사회에서 비난받는 대상이었다.
주인의 돈으로 약자를 짓밟고 폭리를 취한 종들을 칭찬하고 보상해주는 것이 하나님 나라라니! 이것이야말로 자신들이 매일같이 체험하는 지옥 같은 현실 아닌가. 예수 비유를 듣던 청중들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농부들이 어떤 느낌을 받았을지 상상하기란 그리 어렵지 않다. 부자들은 다 도둑놈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농부들에게 자기 돈의 백 퍼센트 이익을 챙겨가는 주인은 결코 귀인이라고 할 수 없다. 오히려 탐욕스러운 사람의 전형으로 비쳤을 것이다.
1) 종들의 주인-착취자 노예주
2) 첫 번째 종과 두 번째 종 – 착취하라는 요구를 잘 수행하여 인정받은 노예들
3) 세 번 째 종 – 수탈당하는 피착취 대중들
원래 달란트 비유도 당시 소작인 농민들이 부재지주와의 갈등을 나타내는 상황에서 말했을 가능성이 많다. 그러나 초대교회는 이 비유의 본 뜻을 훼손하였다. 즉 열심히 충성해서 이윤을 많이 남기는 자와 그렇지 못한 게으른 자로 아주 심하게 각색했다.
<청지기의 비유>
청지기가 칭찬받는 이유는 그가 재물을 거두고 남기기 위해서 살다가 이제는 사람을 얻는 방법으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누가복음에 나오는 또다른 청지기의 비유(12:41-48)는 자기가 맡은 사람들에게 얼마나 잘 대해주었는가가 그 청지기를 평가하는 기준이다.
우리는 대개 눈에 보이는 제물, 건물, 일의 결과들을 소중히 여긴다. 그러나 청지기는 그가 해고당할 위험에서야 하나의 진리를 깨닫는다. 재물이나, 눈에 보이는 업적을 남기는 일이 소중하지 않다는 것이다. 오히려 가장 중요한 것은 그 일들을 함께해 가는 사람들이다. 사람이 소중한 것이다. 우리들은 어떤 일, 어떤 조직이냐, 그 일의 결과와 업적 규모, 크기를 그럴듯하게 보이기 위해 얼마나 많은 시간을 소모하며 치중하는가? 그러나 어쩌면 그런 것은 하나도 소용없을 수 있다. 그 일을 해나가는 사람이 중요하다. 가장 중요한 것은 일해나가는 과정에서 만나는 사람들과 어떤 관계를 맺는가이다. 생각해보면, 우리 삶의 모든 일이 그렇다. 바로 사람을 얻는 과정이다. 그래서 불의한 청지기는 칭찬을 받았다. 그가 슬기롭게 대처했다고 칭찬받고 아울러 불의한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고 충고한다.
<거지 나사로의 비유>
거지 나사로도 특별히 착한 일을 한 사람이 아니다. 단지 이 세상에서 살아있을 대 온갖 불행을 다겪었기에 그는 위로를 받는 전도 현상이 일어난다. 이 비유는 그냥 부자이기에, 그냥 가난한 사람이기에 그 입장이 뒤바뀐다. 이 비유는 아마 부자들을 겨냥해서 경고하는 비유이거나 가난한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는 비유일 것이다. 부자는 자기가 있는 것도 못쓰고 불붙는 지옥에 들어간다. 그러나 거지 나사로는 그가 겪은 고통 자체로 칭찬받는다.
<하나님 나라는 어떤 세상일까?>
첫째, 예수는 아무도 병들지 않고, 아무도 장애를 가지지 않는 세상의 문을 여셨다. ‘그는 인간이 질병과 아픔 가운데 있는 것을 참지 못하셨다’는 것을 읽어야 한다. 그들에 대한 간절한 애정으로 기적이라도 솟구쳐 나와 그들의 삶을 왜곡하는 질곡을 해결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둘째, 모두가 자기 명을 다하는 세상을 만들려고 하셨다.
셋째, 예수가 인간으로 태어나 배가 고파 굶주리는 것, 자신의 배를 채우지 못해 겪는 고통을 원초적으로 부정하시고 참지 않으신다는 선언이다.
넷째, 예수께서는 아무도 정죄받지 않는 세상의 문을 여셨다. 예수는 세리나 죄인들의 공과를 따지지 않고 그들의 편이 되었고 그들을 진정 마음으로부터 받아들이는 친구가 되었다. 예수는 자기 의에 도취되어 남을 정죄하는 사람을 실제 죄인보다도 더욱 경계했다.
다섯째, 예수께서는 하나님을 중심에 모시고 사는 세상의 문을 여셨다. 그는 가난한 사람이 기쁜 소식을 듣고, 갇힌 사람이 자유하게 되는 세상을 간절히 바랐다. 그러나 그는 단지 물질적이고 육체적인 구원뿐만이 아니고 전인적인 구원을 향해있다. 그는 물질적, 육체적, 사회적 구원을 뛰어넘은 구원, 그의 마음이 온전히 하나님께 향했을 때 오는 영적 충만함을 전인적인 구원으로 생각했다.
여섯째, 예수께서는 일의 결과보다는 과정에 하나하나 사랑을 쏟고 함께하셨다.
하나님의 나라는 교리나 심오한 신앙적 개념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그 나라는 구체적 사건이다. 예수가 가르치신 하나님 나라가 추상적인 영역이라면 우리가 갖는 신념에 따라 단번에 결정되지만, 그 나라가 당한 민중의 권리, 그들이 가지는 생존권, 자립적 기반이 이루어자는 영
역에 있다면 우리가 생명, 자유, 평화를 이룩해나가는 사건의 과정 속에 서, 우리는 하나님 나라를 경험한다.
사람들은 흔히 예수가 주는 교훈을 오해한다. 예수는 첫째,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하여 주 너희 하나님을 사랑하고 둘째,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했다. 심지어는 이 말씀에 대해서조차 이웃 사랑보다는 하나님의 사랑이 우선이라며 차등한 가치를 부여하기도 한다. 그래서 사회적 구원보다는 영혼의 구원을 우선시하며, 그들의 아픔에 참여하는 선교보다는 복음을 전하는 선교를 말하고, 심지어는 그들이 원치 않아도 강제로라도 주입하는 공격적 선교를 말하기도 한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세상에서 일어나는 구체적인 일들이 결코 남의 일이 될 수 없다. 예수는 바로 그들 안에 계시다. 우리가 그들을 돌보는 일과 예수를 섬기는 일을 동일시 한다. (마태25장 최후 심판의 비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