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삼성 자동차 말고 삼성 상용차
1990년 삼성중공업은 닛산의 상용차부분인 닛산 디젤과 기술제휴를 맺는다.
명목상으로 중장비용 파워트레인의 기술도입이 목적이었지만, 사실 삼성의 자동차 사업은 이때부터 본격화 된 것이라
봐야 할 것이다. 완성차 제조는 그룹의 오랜 숙원사업이었으며, 기술 제휴는 이것을 위한 첫 발걸음에 가까웠다.
1992년에는 대형트럭 도입인가까지 받아내면서 본격적인 트럭 생산이 시작된다. 닛산의 대형 트럭 빅썸(big thumb)을
가져다 만든 차 SM510과 SM530은 저렴한 비용과 품질 덕분에 국내수요는 물론 일본 닛산의 특장 수요에 맞춰 역으로
수출되기까지 한다.
1996년, 삼성상용차가 중공업에서 분리되면서 창원의 트럭 생산 시설은 대구의 성서공단에 새로이 자리를 잡는다.
궤도에 안착한 상용차 사업을 본격적으로 확대하기 위해 선택한 두 번째 모델은 역시 1톤 트럭. 현대와 기아가 오롯이
양분하고 있던 소형 트럭 시장은 충분히 승산이 있어 보였다. 여지가 충분한 곳이기도 했다.
제휴선인 닛산의 소형트럭이 검토되고 최종적으로 2.7리터 엔진을 올린 아틀라스 100(F23)기 선택된다.
삼성의 1톤 트럭의 원본이 된 닛산의 아틀라스 트럭 F23. 사진은 2002년의 마이너체인지 사양
하지만 거의 변화 없이 생산되었던 대형 트럭과 달리 삼성판 아틀라스는 프론트캡을 새롭게 디자인한 차였다.
내수시장 위주로만 차를 팔던 닛산 트럭 대신 유럽시장을 두드리고 다니던 삼성은 더 많이 팔릴 1톤 트럭을 아예 고유
모델화 하고자 했다. 디자인 용역을 맡은 회사는 이탈리아의 명망 있는 카로체리아였던 베르토네. 삼성이 만들게 될 새
트럭에 대한 높은 기대감은 전문 디자인 하우스의 손을 거친 세련된 모습이 공개되며 한껏 치솟아 올랐다.
1998년 11월, 삼성 최초의 1톤 트럭 ‘SV110’이 발매된다.
엔진은 직렬 4기통 2.7ℓ 디젤 한 가지. 최고출력 85마력, 최대토크 18.0kg·m의 성능은 포터보다는 좋지만 프론티어보다
는 조금 낮았다. 하지만 정숙성과 연비 위주로 세팅해 실내소음이 적고 경쟁자보다 좋은 연비를 자랑했다.
트랜스미션은 수동 5단 한 가지로, 대부분 2단 기어로 출발하는 습성에 따라 2단에 더블 싱크로나이저링을 써 부드러운
변속이 가능하게 했다. 길이×너비×높이는 4975×1695×1965mm로 1톤 트럭 중 가장 길었다.
국산 트럭에서 처음 선보인 메탈릭 컬러는 트럭에 대한 이미지를 바꿀 정도로 세련미가 넘쳤다.
삼성 상용차는 부산이 아닌 대구의 삼성 상용차 공장에서 생산되었다.
대시보드와 앞유리창을 최대한 밖으로 밀어낸 뒤 옆과 화물칸의 창문을 큼직하게 만들어 시야가 좋았다.
계기판 시인성도 높았으며 각종 스위치는 운전자가 쓰기 편하게 배치되었다. 운전석 왼쪽 공간이 넉넉하고 기어 레버
를 옆으로 접을 수 있어 조수석으로 내려야 할 때를 배려했다. 파워와 틸트까지 지원되는 스티어링, 파워 윈도, 오토
도어록을 갖추었고, 의자를 접으면 나오는 콘솔박스에는 여러 종류의 홀더를 갖춰 실용성도 강조했다. 롱캡의 화물칸
사이즈는 2870×1620×380mm로 포터와 비교해 10×20×30mm 더 컸으며 싱글캡 사양은 포터보다 80mm가 더 길었다.
도장은 일반 트럭보다 훨씬 두껍게 올린 것도 모자라, 메탈릭 컬러를 선택하면 여기서 두 배 가까이 올라갈 정도로
방청에도 신경 썼다. 시작가격을 700만원 후반대로 책정해 경쟁모델 대비 가격 경쟁력도 충분했다.
SV110이라는 이름으로 팔리던 차는 좀 더 부르기 쉬운 고유명사가 필요하다는 지적에 따라 10개월 뒤 이름을 바꾼다.
야무진. (Yamuzine) ‘Yes, Mount the Zone of Imagine’이라는 말장난 같은 이니셜에도 불구하고 ‘누구나 꿈꾸던 1톤
트럭의 새로운 세계’라는 의지만큼은 명확했다. 이름만큼이나 ‘야무진’ 트럭이 탄생한 것이라 생각하고 싶었을 것이다.
정말 그랬다면 여기 나올 일도 없었겠지만.
야무진의 운전석. 개방감과 조작성만큼은 동시대 트럭 중 가장 앞선 차였다.
◆ 문제는 과적이라고!
재앙은 트럭을 사용하는 한국과 일본의 실정이 다른 것에서부터 비롯됐다.
경쟁차들의 사이드 멤버에 비해 야무진의 ㄷ자 멤버는 과적을 버텨낼 구조적 특성을 갖추지 못했다. 멤버 2개를 용접해
만든 구조체에 비하면 비틀림에 약하고, 단면 높이가 낮아 굽힘 강성도 낮았다. 삼성 또한 이런 과적문화를 모르는 바도
아니었기에 나름의 방편을 마련했다. 야무진은 한 체급 높은 1.5톤 사양을 기반으로 한 차였던 것. 하지만 여기다 3톤을
실어 버리면 버틸 재간이 없다.
예나 지금이나 정량을 초과한 화물 적재가 당연하게 여겨지는 한국에서 원리 원칙대로 만든 일본 설계의 트럭은 현장의
기사들에게 원성이 자자했다. 프레임이 휘고 볼조인트가 빠지는 차가 속출하면서 삼성이 만든 차에 대한 드높은 기대도
바닥으로 수락했다. 여기에 주차브레이크까지 말썽을 부렸다. 일반적인 핸드 파킹 브레이크 대신 사용한 케이블식 파킹
브레이크는 걸핏하면 빠져버리며 빈축을 샀다. 외환위기의 한복판에서 생업을 찾아 나선 사람들 때문에 그나마 트럭
수요는 꾸준했지만, 말 많은 차를 선뜻 사 줄 중소상공인은 많지 않았다. 점유율이 4%를 넘는 적이 없었음에도, 삼성은
포기하지 않고 매달렸다. 현금손실에도 불구하고 삼성 금융계열사를 통해 비용지원이 이어졌다.
상품성 개선 모델이 선보이고, 쌍용과 판매 제휴를 하는 한편 1만여대가 넘는 차를 수출하며 버텼다.
하지만 결정타는 엔진이었다. 2001년 강화된 배기규정을 충족시킬 디젤엔진 공급에 닛산이 난색을 표하면서 야무진을
계속 만들 방법은 완전히 사라진다. 2000년 12월, 삼성 상용차는 파산을 선언한다.
법인이 존속하는 동안 만들어낸 트럭의 수는 2만7천 여대였다.
◆ 삼성 상용차의 파산. 그 뒤
야무진은 단종 뒤에도 욕을 먹었다. 삼성 상용차가 파산하면서 야무진의 유지보수를 받을 방법도 사라진다.
기업 정체성의 통일을 위해 같은 회오리 마크를 썼지만, 삼성 자동차는 상용차와는 완전한 별개의 회사였다.
후속조치를 위한 부품 한조각도 받지 못한 상황. AS를 기대하며 찾아온 고객들에게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손사래
치는 것 밖에 없었다. 부품공급과 AS가 중단된 트럭의 운명은 뻔했다. 야무진은 도로에서 빠르게 자취를 감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