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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서 가장 급격한 변화를 맞이한 땅 잠실이다.
상전벽해(桑田碧海)는 바로 오늘날 잠실의 변화를 두고 하는 말인 것같다.
그 변화는 풍수상 이미 예견된 것이라고 한다.
"누에는 무지막지하게 먹어댄다.잠실은 누에의 속성을 닮았다고 한다.
그 잠실은 마치 누에처럼 급격한 변화를 할 수밖에 없다고 한다." 최창조교수(풍수학자)
'매미가 하품을 해도 또 개미가 침만 뱉어도 침수되는 잠실이다.'
그만큼 물에 약한 땅, 바로 잠실의 취약함을 웅변하는 말이다.
한강을 끼고 있는 잠실을 포함한 하남은 온조가 도읍지로 정하면서 오늘날의 강남개발을 이미 예고한 것이다.
'삼국사기'백제본기 시조 온조왕조에 실린 글을 살펴본다.
온조왕 13년(기원전 6세기) 5월에 왕이 신하들에게 이르기를
"내가 어제 나아가 순행하다가 한수의 남쪽 토양이 비옥함을 보았으니 그곳으로 도읍을 정하여 영구히 편안할 계책을
도모하겠다"고 했다. 그런 다음 같은 해 "9월에 성을 쌓고 궁궐을 세웠다"고 하였다.
바로 송파와 강동에 걸쳐 있는 하남 위례성인 풍납토성을 일컫는 말이다.
"검소하되 누추하지 않고 화려하되 사치하지 않는 도시"
삼국사기에는 풍납토성을 그렇게 표현하고 있다.
백제는 이렇게 발현하여 500년동안 풍납을 도읍지로하고 고대국가의 기틀을 세웠다.
하남의 그 땅은 잠실이라고 한다.누에치기를 하였던 잠실이 있었던 곳이다.
예로부터 양잠은 풍수지리사상에 따른 식생과 관련이 있다.
서울의 남산은 누에의 머리처럼 생겼다고 하여 잠두봉(蠶頭峰)이라 하였다.
누에머리 주위에는 누에가 먹는 뽕잎이 많아야 된다고 믿고 한양 곳곳 남산 주위에 풍수 지리사상에 따라 뽕을 심었다.
동서남북 사방에 뽕밭(桑田)을 조성하여 누에(남산)에게 먹임으로써 서울의 번창을 도모하였던 것이다.
그래서 전국 곳곳에 잠실을 두고 한양의 중요한 자리에 잠실을 두었다.
오늘날 강동구 광진구 강남구 일대에 동잠실을, 서대문구 연희동 일대에는 서잠실을,
성북구(성북 초등학교 앞 부근)에 선잠단을, 여의도 개발 때 폭파하여 얼마 남지 않은 밤섬에는 남잠실을 두었다고 한다.
양잠은 잠실에 뽕나무가 무성해야 태평성대라 할 정도로 중요시하였던 국가 산업이면서 신앙체계 속에 존재해왔다.
송파는 여러가지 학설이 있으나 옛날 한강변의 빽빽한 소나무언덕(松坡)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지금은 이러한 송파가 잠실 석촌 가락 문정 거여-마천 등을 포함하고 있다.
지난 63년까지는 경기도 광주군에 속했으나 이후 서울이 확장되면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70년대 주택대량공급시기에 잠실지구가 개발되면서 최근 20여년동안 급속히 도시화를 이룬 곳이다.
조선시대 이곳에는 송파나루를 중심으로 270여 호의 객주가 있어 전국의 15대 상설시장의 하나로 번성한 적도 있었다.
풍수지리적으로 송파지역은 워낙 광활한 지역이라서 해석의 어려움이 있다.
거여-마천 등과 신도시가 들어가는 지역을 좁혀서 본다면 '대붕포란형'에 속한다는게 전문가들의 일치된 견해다.
서울이 무궁화 모양을 하고 있는 형세로 송파는 다섯 꽃잎 중의 처진 위치에 있으나 전체적인 균형상 필수적인 자리에
놓여 있는 형국이다. 풍수연구가들은 대붕포란형의 형세는 날개를 펼치고 쉬고 있는 자세로 다산과 풍요를 낳은
것으로 설명된다. 주거와 상업 교육 문화 등의 기능을 수행하기에 알맞은 자리로 정치나 군사 행정 등과는 다소
거리가 있다는 분석이다. 북서쪽을 전망으로 할 경우 우측의 검단산과 남한산성이 위치한 청량산이 불곡과 청계
광교로 나아가 관악산으로 이어지면서 전형적인 명당의 형태를 띠고 있다.
실제로 풍수연구가들은 송파가 남산과 북한산을 마주 하고 한강을 끼고 있어 권력과는 멀지만 사람들이 모여살고
짐승과 새들이 깃드는 형국이라는 설명이다. 특히 중국적인 풍수로 해석한다면 다른 지역과는 달리 '龍의 길'
이라 할 수 있는 대로들이 잘 정비된 지역이라고 분석한다.
다만 풍수가들은 최근 몇년새 서울 동남부의 '바람길'이 달라졌다고 설명했다.
과거 바람이 든다는 풍납지역에서 산자락을 타고 흘렀으나 한강에서 발현한 바람이 탄천을 따라 흐르는 길과
성남대로를 따라 흐르는 길 암사 일대에서 길동-오금-거여-마천으로 이르는 길로 나뉘어져 있다는 것이다.
이는 최근 급격히 개발된 주상복합 과 아파트단지들의 영향으로 풀이된다.
1982년에 대한지리학회에서 편집하고 국립지리원이 간행한 한국지명요람을 보면 지금의 송파구 잠실이 아닌 강남구
잠원동에 동잠실을 두고 있다고 했다. 또 이 책에서 이들은 부리도라는 하중도에 잠실동이 있다고 했고,
이 섬의 원래 이름은 부리도이며 잠실도는 속칭이거나 잘못 알고 있는 이름이라고 했다.
1960년대 지형도에도 잠원동과 잠실동 모두에서 잠실 지명이 표시되어 있다.
김정호의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에 포함된 경조오부(京兆五部)라는 도성 중심의 한양 지도를 보면오늘의 뚝섬인
저자도가 보이고 그 동쪽에 인접한 섬에 상림(桑林, 뽕나무밭)이 표시되어 있어 조선 말기까지 많은 뽕나무밭이 지
금의 잠실에 있었다.1970년까지 오래된 뽕나무와 그 고목들이 더러 보였다고 전한다.
잠실이 자양동에 붙어 있어서 성동구였다가 1971년 한강개발로 자양동과 잠실 사이의 하천이 본류가 되면서
잠실은 성동구에서 분리되어 남쪽의 강동구로 편입되었다.
1960년대는 신천동과 잠실동마을이 독립된 하중도 내에 위치하고 있으며 이 섬의 동쪽에는 부리도
(浮里島 마을) 마을이 있다. 한강의 범람에 의해 운반 퇴적되어 만들어진 하중도 상에 있다.
신천동과 잠실동은 하나의 하중도인 잠실도에 있고 부리도와 분리가 되었으나 사이 셋강이 토사에 막혀 합쳐졌다.
전체 섬 이름을 부리도라고 부르고 속칭으로 잠실도라고 불렀다.
현재의 정신여고 아시아선수촌, 우성 아파트 정도가 부리도에 해당된다.
1966년부터 시작된 한강종합개발계획(김현옥 시장 시절)은 양택식 구자춘 시장까지 계속 이어져 1975년까지 계속된다.
아시안 게임과 올림픽 대회를 준비하면서 거의 1988년에 마무리되었다고 볼 수 있다.
조선시대의 신천(新川)은 잠실도의 북쪽을 흐르던 샛강에서 나온 이름이다.
전국적으로 신천이라는 지명은 많이 남아 있다. 잠실도 아래로 흐르던, 사실상의 본류였던 강은 개발계획에 따라
메워지고 그 일부가 잠실 4거리의 석촌호로 남아 있다.
석촌호수를 조성하던 11979년 당시는 흙 제방으로 겨우 모양만 갖춘 상태였다.
잠실도 위쪽을 흐르던 한강 본류(원래는 지류)에도 토사가 매우 많아 하폭이 좁았다.
개발계획과 줄기찬 모래 골재 채취로 하폭이 넓어지고 하도변의 모래톱도 많이 줄어들었다.
서울 한강의 골재 채취는 1988년까지 계속되었다.
1980년대 신천 일대가 개발되기 시작할 무렵 공터에 조성된 ‘새마을 시장’이 발전하여
지금의 서울에서도 유명한 신천의 먹거리 골목으로 바뀌었다.
지금의 석촌 호수는 송파 나루터가 있던 곳이다.
고려와 조선왕조에 이르는 1천 년 동안 양잠을 중심으로 한성 충청도 경상도로 이어지는 중요한 상업 교통로였다.
당시 송파장은 조선시대 15대 장터 중 하나로 전국 각 지방의 생산물이 모이는 중심지로 5일장이 아닌 상설점포가
형성된 중요한 장터였으며 지금은 그곳에 가락시장이 자리하고 있어 그 명성을 이어가고 있다.
잠실동은 유난히 행정구역이 많이 변경되었다.
조선시대는 경기도 양주군 고양주면, 일제강점기 때인 1914년에는 경기도 고양군 독도면(조선총독부령 제 111호)
으로 편입되어 잠실리가 되었다. 광복 후 1949년에는 서울특별시가 확장됨에 따라 고양군 독도면 전부가
서울시로 편입(대통령령 제 159호)되었고 잠실동은 서울시 성동구에 속했다.
이후 한강개발사업에 의해 1971년 잠실동은 신천동과 함께 한강이남 지역 육지와 연결되었고,
강남지역 개발과 인구증가에 따라 1975년 성동구로부터 강남구가 분리 신설(대통령령 제 7816호)되었다.
1979년 강동구가 신설(대통령령 제 9630호)되어 이에 속했다가 1988년 강동구에서 송파구가 분리 신설
(대통령령 제 12367호)되어 현재 송파구 잠실동이다. 개발 이전 잠실도에는 새내(신천) 잠실 부렴마을(부리도) 등
3개의 마을로 구성되었다. 마을사람들은 갖가지 음식을 준비해 놀이와 축제를 즐겼다.
인정이 넘치는 이들 마을은 아름다운 이웃사촌이었다.
각 마을끼리는 안마당 넘나들듯 공동체 문화를 유지하며 서로서로 징검다리 역할을 했다.
1960년대 개발 이전에 잠실지구 빛바랜 사진 속에는 강이 지금의 잠실지구 앞으로 흐르는 한강과 파트가 들어선
신천 뒤편에 한강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 속에서 잠실도는 고 꽤 큰 마을로 구성된 섬이었다.
신천 뒤편으로 흐르는 한강 한 쪽에 있는 거대한 호수가 지금의 석촌 호수이다.
또 새내마을에는 한강 중지도 노들섬처럼 물맛이 매우 좋은 우물이 있었다.
체한 사람에게 효험이 있었다고 알려져 전국 각지에서 찾아와 한강의 명소로 자리 잡았다.
마을 사람들은 매년 봄에 우물을 청소했고 이곳을 찾아온 사람들이 던져놓고 간 동전을 모아 어려운 이웃을
돕기도 했다. 특히 송파나루터, 부렴마을 나루터 신천나루터는 서민들의 고단함과 열정이 녹아 있은 생생한
삶의 현장을 그대로 보여주는 정겨운 나루터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당시 새내마을은 100여 가구 부렴마을 50여 가구 잠실마을은 30여 가구가 있었다.
부리섬은 잠실과 백사장을 사이에 두고 연결돼 있었다.
강과 모래섬으로 이웃한 이들 섬사람들은 그렇게 개발 이전까지 인정 많은 공동체 생활을 이어갔다.
그러던 1971년 잠실지구 토지구획 정리사업 기공식과 하중도 물막이 공사 사진 등이
역사의 한 면을 장식하면서 잠실도는 변모를 시작한다.
나룻배를 타고 한강을 건너고 탄천에서 고기잡이 하고 문화재 위에서 고추 말리던 시절이 흑백의 옛 추억으로
남아 있다. 나무다리 만들어 탄천을 건너고 양수기로 한강물 퍼 올려 농사짓고 삼륜자동차 한 대면 부러울 것이 없던
시절이었다. 하루 세끼 먹는 것조차 호사스런 시절이었다고 그때 그사람들은 말한다.
강남구와 송파를 가르는 개천인 탄천은 바로 한강으로 연결돼 서울의 젓줄로 하나가 된다.
탄천(炭川)은 우리말로 ‘숯내’라는 뜻이다.
이 하천이 지나는 지역에 따라 장장포, 검내, 험천 등으로 불리어졌다.
탄천은 경기도 용인군 부석면 중리 석행산에서 발원해서 용인 서쪽에 이르러 장장포라고 부른다.
다시 광주산을 지나 꺾이면서 북쪽으로 흘러 광주군 남석면에 이르러 기우제를 지내는 하천을 검내,
또는 험천으로 불렀다고 한다.조선시대 강원도 등지에서 목재와 땔감을 한강을 통해 싣고 와서 뚝섬에서 부린다.
이걸 가지고 숯을 만든 곳이 바로 탄천 부근이었다. 이 때문에 개천물이 검게 변했다고 해서 탄천 또는 검내라고
부르게 된 것이다. 아무튼 시대가 변하면서 그리고 산업화 속도가 빨라지면서 잠실과 부리도도 육지로 변모한다.
일명 한강 공유수면 매립 사업.
지금의 신천역 남쪽으로 흐르던 송파강을 메워 잠실도를 75만평의 육지로 만들어 당시의 잠실 북쪽은 물속으로
사라졌다.1973년 340만 평에 이르는 잠실지구 종합개발계획 사업이 추진된다.
잠실은 거대한 아파트 단지로 변해 강남의 새로운 주거개발지로 변했다.
당시의 잠실도 사람들 중 새내마을 사람들은 토지 보상을 받고 이주하여 지금의 신천역 새마을 시장 부근에 새로운
터전을 마련했다. 그래서 새내마을의 뜻인 ‘신천’으로 계속 부르고 있다.
3년 뒤인 1976년, 잠실주공아파트 단지와 시영아파트 등 대단위 아파트가 조성되면서 원주민들은 외지인들에게
그 자리를 내주고 또 다시 성남 하남 등 외곽으로 뿔뿔이 흩어져 갔다.
2호선 신천역 사거리에서 한강 쪽으로 들어선 잠실 1, 2, 5단지는 새내마을과 잠실마을이다.
잠실 7동, 정신여중, 아시아공원 근처는 당시 부리섬의 부렴마을에 해당한다.
송파강 자리에는 롯데월드가 들어서 있다. 탄천 자리에는 잠실종합운동장이 자리 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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