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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삿갓 61,62
▣ 방랑시인 김삿갓 (61) 오얏나무 이씨 조선, 한양의 풍수와 인심.
참담한 가슴을 안고 남한 산성을 내려온 김삿갓은 무거운 발걸음으로 한양으로 향했다. 이렇게 며칠을 보내다 보니 어느덧 봄도 무르익어 이 집 저 집 담장마다 복사꽃과 오얏나무 꽃이 만발해 있었다.
오얏나무는 이씨 조선과 인연이 깊다. 김삿갓은, 李씨를 뜻하는 성씨가 "오얏나무 이" 라는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고려 말엽 공민왕때, 그 당시 한양 땅에는 난데없이 오얏나무가 무성하게 자라며 꽃을 피웠다. 누가 일부러 심은 것도 아닌데 이같이 오얏나무가 무성하더니, 해를 갈수록 그 숫자가 차고 넘쳤다.
"이상하다" .. 모두가 이렇게 여기고 있을 때, 어떤 술사(術師)가 이를 보고 장차 이씨 성을 가진 사람이 한양 땅에서 크게 일어날 것이라고 예언을 했다. 또, 이런 소문은 사람들의 입을 통해 점점 퍼져 나가게 되었고, 급기야 공민왕의 귀에까지 백성들 사이에 떠도는 소문이 흘러 들어가게 되었다.
공민왕은 그런 소문을 듣고 크게 걱정하며, 민심을 되돌리는 조치로 송도에서 벌리사(伐李使)를 보내어, 한양 땅에 무성히 자라고 있는 오얏나무를 모조리 베어 버리게 하였다. 그러나 오얏나무는 웬일인지 베어도 베어도 없어지기는 커녕, 더욱 무성해 가고 있었다.
그러던 중 결국 고려가 망하고 ,이성계가 새 나라를 일으켜 송도에서 천도하여 이곳, 오얏나무 무성한 한양에 새로운 도읍지를 정했으니, 한 나라의 흥망이 인력으로는 어쩔 수 없는 천운에 의해 결정 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광나루를 건너온 김삿갓이 한양 도성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흥인지문(興仁之門 : 東大門)이나 수구문(水口門 : 光熙門)을 통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나 수구문으로 불리는 광희문은 한양 장안에서 죽은 송장이 나가는 유일한 문이었다. 남달리 유난한 김삿갓은 남들이 다니기 꺼리는 수구문을 거리낌 없이 택하여 도성에 입성하였다.
이렇게 장안에 들어서니 고래등같은 기와집이 즐비하고 사람이 어찌나 많은지 길을 오가며 사람들끼리 어깨를 부딪칠 정도로 복잡 하였다.
" 사람도 많고 집도 크고 많구나 ! "
김삿갓은 처음 보는 낯선 도시의 풍경에 눈이 휘둥그래졌다. 게다가 시장이란 곳에서는 오만가지 장삿꾼이 저마다 목판을 깔아놓고 물건을 팔고 있는데, 지나는 누구라도 붙잡고 ,
"싸구려 싸구려~ 이야~ 기가 막히게 좋은 호박이 나왔어요 ! "
"동경 사시오, 동경(銅鏡) ~ 노친네 새치도 잘 보고 뽑을 수 있고, 규중 처녀 모양새도 다듬는 데는 동경이 최고요 !" 하며, 호객(好客)을 일삼는다.
김삿갓은 전국 이곳 저곳의 시장판을 다녀 보았으나 한양 저자 거리처럼 장사꾼들이 요란스럽게 떠드는 곳은 처음 보았다. 그리고 그들이 떠들어대는 소리가 무슨 소리인지를 도데체 알아들을 길이 없었다.
"헛참, 조선 제일의 한양에서도 사람들이 먹고 살기가 어려운 모양이군 ! "
..
김삿갓은 종로 육의전(六矣廛) 거리를 지나 남산으로 올라갔다. 이곳으로 오른 까닭은 한양 도성의 면면을 살펴 수학(修學)할때 읽었던 한양의 풍수 지리를 실제로 확인하여 보기 위함이었다.
그때 김삿갓이 어렵게 구해 읽게 된 한양의 지세와 풍수는 아래와 같았다.
한양은 400 여년전, 도읍지로 결정될 당시에 백호(인왕산:仁旺山)가 너무 강하여 청룡(북악산:北岳山)을 누르는 형세였다. 이러한 지형아래에서는 장손 보다는 지손이 성(盛)하게 된다.
따라서 이씨 조선 3대 임금이셨던 태종 대왕부터, 다음대인 세종 대왕을 비롯하여 지손이 번성하였다. 이런데도 불구하고 장손으로 등극을 한 경우도 있었으나, 이렇게 권좌에 오른 임금은 권좌를 오래 지탱하지 못하고 물러났거나 (5대 문종 대왕) 올랐더라도 정변에 의해 폐위되었다. (단종 대왕)
한양의 지세가 이러했기에 약한 청룡을 보완하여 흥인문을 흥인지문이라 하여 산맥같이 생긴 之자 한자를 추가하여 문의 이름을 불렀고 성을 산맥과 같이 둥글게 쌓았던 것이다.
그런데도 지금까지 도성의 출입문에 이름을 고치고 성을 둥글게 쌓은 효과가 없었던지 조선의 권좌의 이동은 개국 초기부터 지금에 이르기 까지 격변에 의한 논란이 끊임없었다.
한편, 한양을 처음 수도로 정하고 성(城)과 궁궐을 축조할 때 풍수지리에 근거로 무학(無學) 대사와 정도전(鄭道傳)의 의견이 서로 달랐는데 ,무학 대사의 주장은 강한 백호를 누르기 위해 궁궐을 지을때 인왕산을 뒤로하여 동향으로 앉혀 짓게 되면 그 왼쪽의 청룡이 북악산과 삼각산이 되므로 장손이 번성하는 이상적인 왕도(王都)가 된다는 주장이었고,
반면에 정도전은 유교의 옛 경전까지 인용하면서 "왕은 마땅히 남면(南面) 하는 법인데 궁궐의 대문을 어찌 동쪽으로 앉힐수 있는가 ?" 하는 주장을 조금도 굽히지 않았다.
당시 새로 집권한 이성계의 추종 세력은 ,고려시대의 숭불(崇佛)정책에 회의를 품은 유교학자 출신의 문신(文臣)들 이었다. 이성계는 집권 초기에 혼란한 왕권을 유지하는데, 이들의 의견을 무시할 수 없었다. 결국 그들의 의견이 받아 들여져 경복궁은 남향으로 지어지게 되었다.
그때 무학 대사는 크게 탄식했다.
"허, 이거 큰일 나지 않았나. 이렇게 대궐을 조성하면 몇 해 안에 국모가 죽고 용상 바로 앞에서 붉은 피 낭자한 골육상쟁이 일어날 것인데. 이 일을 장차 어찌할꼬."
무학 대사의 예언은 과연 적중하여 한양에 도읍을 정하고(1392년) 궁궐을 조성한지 불과 2년도 못되어 신덕 왕후가 갑자기 돌아가시고 이후로 왕자의 난을 거쳐 이성계의 다섯째 아들인 정안군 이방원이 보위에 오르게 되었던 것이다.
이후에도 권좌의 이동은 장자 세습의 전통은 이어지지 못하고 오늘에 이른 것 아니던가?
김삿갓은 쓸쓸한 왕조의 궁궐을 한참동안 바라보았다. 어느덧 멀리 서산으로 해가 기울기 시작하였다.
남산에서 내려온 김삿갓은 하룻밤을 보낼 잠자리를 구하기 위해 이곳 저곳을 살펴보았다. 그러나 절간이나 서당이 쉽게 눈에 띄지 않았다. 할 수 없이 오늘은 여염집에서 신세를 지리라 생각하고 이집 저집 대문을 밀어 보았다. 그러나 어느 집을 막론하고 대문은 모두 굳게 잠겨 있었다.
(허, 문이라는 것은 사람과 사람이 만나고 헤어지는 교류의 장이 아니던가. 이렇듯 대문을 걸어 잠근 것은 지나는 나그네에게 물 한 잔도 주지 않겠다는 표시가 아닌가. 한양의 인심이 이렇듯 고약한가?)
김삿갓은 한양이라는 고장의 정나미가 뚝 떨어졌다. 그러나 어디선가 밥도 먹고 잠도 자야 하겠기에 어느 집 대문을 두드렸다.
"이리 오너라 ! "
제법 크게 소리를 질러 보았다. 그러나 누군가 나오는 듯 하더니, 중문 안에서 대꾸를 하는데,
"누구시냐고 여쭈어라 ! "
하고 거꾸로 묻는 것이었다. 누구냐고 묻는 폼이 집 주인인 것이 틀림없었는데, 김삿갓은 한양에 사는 사람들은 하인이 없음에도 하인에게 이르는 것처럼 간접 화법을 쓴다고 이미 들은바 있었다.
따라서 주인 편에서 하인을 둔 것처럼 대꾸할 때에는 손님인 이 편에서도 하인을 둔 척하고 간접 화법으로 대화를 해야 한다.
"지나가는 나그네가 하룻밤 신세를 지고 싶어 찾아 왔노라고 여쭈어라 ! "
하고 솔직하게 대답을 하였다. 그러자 중문 안에서는,
"우리 집에서는 그런 손을 재울 방은 없다고 여쭈어라 !"
하며, 씹어 뱉듯 이 같은 소리를 내 던지고 중문을 힘차게 닫는 소리가 들려왔다. 김삿갓은 기가 막혔다. 하는 수 없이 다음 집으로 가서 대문을 또 두드리며,
"이리 오너라 !"
하고 소리를 크게 질렀더니, 이번에는 숫제 안마당에서 소리가 들려온다,
"아무도 안계시다고 여쭈어라 !"
그러자 약이 바짝 오른 김삿갓이,
"아무도 안 계시다고 대답하는 그 소리는 개 소리냐고 여쭈어라 ! "
하고 독설을 퍼부었다. 그러자 ,
"뭣~이 ! 어떤 놈이 !" ...
안 마당에서 건장한 사내놈의 "씩씩" 거리는 소리가 나더니,
중문이 급하게 벌컥 열리는 소리가 났다.
"이크" !!! ..개 같은 놈이 뛰쳐 나오는구나 " !!!! ..
김삿갓은 지팡이와 삿갓을 각각 손으로 움켜 잡고 , ("걸음아 날 살려라" ...) 삼십육계, 줄행랑을 놓았다.
...
▣ 방랑시인 김삿갓 (62) 한양 광교 다리 밑에서 하룻밤을 보내며 ..
잠자리를 찾아 이곳 저곳을 찾아다니는 동안 어느덧 거리는 더욱 어두워지기 시작하였다. 얼마 후 어디선가 종소리가 들리자 ,사람들이 저마다 도망이라도 치듯이 황급히 사라져 버렸다. 그리하여 그렇게도 야단스럽던 한양의 거리가 삽시간에 쥐 죽은 듯이 고요해졌다.
김삿갓이 나중에 알게 된 일 이었지만 , 조금전 들렸던 종소리는 통행금지를 알리는 인정(人定) 소리였던 것이다. 그러나 한양 도성에 통행금지가 있다는 것을 알 턱없는 김삿갓은,
(그 많던 사람들이 별안간 어디로 가버렸을까 ? )
하는 궁금증을 가지고 어둠이 깔린 거리를 혼자서 유유히 걷고 있었다. 얼마를 걸어가다 보니, 저만치서 순라군(巡羅軍)인듯 한 사람, 네 댓이 김삿갓 쪽으로 비호같이 달려와 사방으로 둘러싸며,
"이 도둑놈아 ! 통행금지 시간에 네 놈은 어디로 무엇을 훔치러 가느냐! "
하고 벼락 같이 호통을 치는 것 이었다.
그러자 김삿갓이 ,
"나는 도둑이 아니오."
"이놈아 ! 네가 도둑이 아니라면 어째서 통행금지 시간에 거리를 활보하고 다니냔 말이냐?"
"통행금지라뇨? 한양에 통행을 금지하는 시간이 있단 말이오 ? "
"허허 ..이런 촌놈을 보았나! 너는 도데체 어디서 굴러왔기에 통행금지도 모른단 말이냐 ?"
"나는 시골서 조금 전에 한양에 올라온 사람이오. 한양 땅에 통행금지가 있다는 것은 금시초문이오."
그러자 순라군들이 큰소리로 웃으며 말을 한다.
"통행금지도 모르는 이런 시골뜨기를 잡아다 가둘 수도 없고 ..이걸 어쩌지 ?"
그러자 두목인 듯싶은 순라군이 말하는데,
"아무 생길 것도 없는 놈을 잡아다 가두면 뭘해 ! 숫제 광교 다리 밑에 움막 아이들한테 갖다 맡기지."
그러면서 김삿갓을 쳐다보며 말한다.
"이놈아! 한양에는 통행금지 시간이 있다는 것을 알고 다녀라."
김삿갓은 기가 막혔다. 본시, 하늘과 땅이란 남여 노소, 귀천을 불문하고 만인이 공유하는 소유물일진데 , 누구나 낮이나 밤이나 마음대로 다닐수 있는 곳이 땅이 아니던가 ? 그러나 이렇듯 황당한 경우를 당하고 보니 땅을 마음대로 밟지 못하는 시간이 있다는 것이 참으로 이상하였다.
그러나 잠자리를 구하고 있던 차에 순라군 이야기로 짐작컨데, 잠자리를 구해 주겠다는 것이 아닌가 ?
(그것 참 다행이다.)
김삿갓은 광교 다리밑 움막 이라는 곳이 궁금해 ,
"지금 나를 데려 가는 곳이 어떤 곳이지요 ?"
하고 , 광교 다리 밑으로 자신을 데리고 가는 순라군에게 물어 보았다.
" 이놈아! 통행 금지도 모르는 놈이 그런 건 알아서 어쩌겠다는 것이냐. 감옥 속에서 자는 것 보다는 백번 낳을 것이니 잠자코 따라 오너라. 그리고 오늘밤은 움막에서 자고 ,내일 아침 파루(罷漏)가 울리거든 어디든지 마음대로 가란 말이다."
김삿갓이 광교 다리까지 끌려와 보니, 다리 아래 개천가에는 제법 큰 움막이 쳐져 있고 그 움막 속에서는 불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순라군은 김삿갓을 다리 위에 세워 놓고 움막에 대고 소리를 크게 지른다.
"애들아 ! 통행금지도 모르는 촌사람 하나 데려왔다. 오늘밤 너희 틈에 재우고 내일 아침에 보내 주도록 하거라."
그러자 움막 속에서 네 댓 아이들이 날치기처럼 잽싸게 달려 나오더니 김삿갓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순라군에게 대뜸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아저씨, 아저씨 ! 오늘은 좀처럼 구하기 어려운 비단 구렁이 한 놈을 잡아 왔어요. 그놈을 고아 먹으면 아저씨 가운데 다리가 "뻘떡뻘떡" 일어설 테니 , 한번 써 보세요. 아저씨한테는 특별히 싸게 드릴께요."
구렁이를 팔아먹으려고 덤비는 소리였다. 김삿갓은 그 말을 듣는 순간 ,
(아하, 이놈들이 광교 다리 밑에 사는 땅꾼놈들이로구나 ! )
하고 아이놈들의 정체를 대뜸 알아낼 수 있었다.
순라군이 웃으며 대답했다.
"예끼, 이놈들아 ! 나는 그런 것을 먹지 않아도 밤마다 육봉(肉棒)이 후끈후끈 달아올라 못 견딜 지경이다. 내가 무엇 때문에 비싼 돈을 내고 그런 것을 사먹느냐. 쓸데없는 소리 그만하고 어서 이 손님이나 받아라 ! "
"아저씨가 안 쓰시려거든, 돈 많은 부자 양반들한테 좀 팔아 주세요. 삼백 냥만 받아 주시면 이번에는 섭섭치않게 구문으로 백냥을 드릴께요."
"알았다, 알았어. 장사 애기는 나중에 다시 하고, 어서 이 손님이나 받어 !"
"네, 손님은 받을 테니까 ,이번 구렁이는 아저씨가 꼭 좀 팔아 주세요. 우리들은 이번에도 아저씨만 믿어요."
순라군과는 예전부터 어떤 거래가 있었든지, 땅꾼 아이들은 그렇게 당부를 하고 김삿갓을 움막으로 데리고 들어왔다.
"아저씨는 어쩌다가 여기까지 끌려 오셨소. 한양 도성에 통행금지가 있다는 것을 정말 모르셨던가요?"
"나는 한양이 초행이라네. 하늘 아래 땅은 누구나 마음대로 다닐 수 있는 곳인데, 통행금지가 있다는 것 자체가 도무지 말이 안되는 소리야 !"
김삿갓은 무심결에 통행금지에 대한 비난을 한마디 씨부렸다. 그러자 땅꾼 아이들은 약속이나 한 듯이 손뼉을 치며 웃는다.
"그것 참 옳은 말씀 입니다. 하늘 아래 땅은 누구나 마음대로 다닐 수 있는 것인데, 대감이니 영감이니 하는 날도둑들을 보호하기 위해 통행을 금지 한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웃기는 애기지요."
광교 다리 밑에 있는 땅꾼들의 움막은 겉으로 보기에는 허술하기 짝이 없었는데 ,김삿갓이 이곳에 와서 움막 안을 두루 살펴보니 아이들의 살림살이가 놀랄 만큼 풍성하였다.
"오늘밤은 아저씨도 우리와 한식구요. 밥은 넉넉하니까 많이 잡수세요."
하며 늦은 저녁을 차려 내는데 , 개다리 소반에 얹힌 저녁 반찬만 하여도 호박 볶음에 낙지 젓갈이 차려져 있고 , 돼지 고기 구운 것과 훈제 오리 고기며,부추 무침에 각종 쌈 채소 조차 있는 것이, 정승 댁 잔칫상이 부럽지 않을 지경이었다.
김삿갓은 땅꾼 아이들이 이렇게 처음 보는 사람에게 조차 ,스스럼 없이 인정을 베푸는 것을 보니 , 그들의 인간성은 대문을 겹겹히 걸어 잠그고 허세를 부리며 살아가는 한양 양반님네와는 비교가 안될 만큼 다정 다감 하였다.
"그럼 나도 자네들과 같이 먹기로 하겠네 ! "
김삿갓은 몹시 허기지던 판인지라 염치 불구하고 저녁을 먹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넌즈시 말을 걸었다.
"자네들이 이렇게 잘 살아가는 것을 보니, 장사가 잘되는 모양일쎄.."
하며 그들의 생활상을 떠 보았다. 그러자 우두머리인 듯 싶은 땅꾼 아이가 자신 만만한 어조로 이렇게 말을 한다.
"우리들의 장사는 언제나 잘됩니다. 그것만은 자신있게 장담할 수 있지요."
"이 사람아 ! 장사란 경기를 타는 법인데 자네는 어디에 근거를 두고 그런 장담을 하는가?"
"물론 다른 장사라면 시세와 물량에 따라 굴곡이 있겠지요. 그러나 뱀 장사만은 땅 짚고 헤엄치긴걸요."
"어째서 땅 짚고 헤엄치기란 말인가 ? 얼핏 들어서는 알 수 없네..."
"생각해 보세요. 사내들치고 계집 싫어하는 사람은 없쟎아요. 돈이 많은 사람일수록 좋아하는 계집을 만날 수 있는 기회가 많은 것도 사실이고요. 그러나 돈이 많은 사람들은 대부분 나이가 많아 , 하초가 영 신통치 못한 법이지요 ..젊고 아름다운 소실이 있어도 배꼽아래 물건이 영 신통치 못하니까 , 값은 고하간에 뱀을 사먹지 않을 수 없답니다. 그러니 우리네 장사는 경기도 안타고 , 땅 짚고 헤엄치기이지요."
김삿갓이 듣고 보니 과연 그럴 듯한 소리였다.
"아까 잠깐 듣자하니 구렁이 한 마리에 삼백 냥이라 하던데, 뱀의 값이 그렇게나 비싼 것인가?"
"아저씨도 참! 뱀의 값이 너무 싸 버리면 뱀을 사려는 사람이 효과를 의심하기 마련이예요. 그러니 처음부터 높은 값을 불러 놓고, 흥정을 할 때 못 이기는 척 하고 조금 깎아주면 인심도 얻고 뱀도 팔수 있고, 서로 좋은 일이지요."
"그래도 그렇지 뱀 한 마리가 삼백냥이면 너무 비싸군. 이건 일종의 사기로구먼, 안 그래?"
김삿갓이 웃으며 이렇게 말을 하자, 땅꾼 아이는 고개를 가로 저으며,
"아저씨는 잘 모르시는가 본데, 한양 장안에 부자 양반들은 모두가 백성의 등을 쳐서 부자가 된 사람들이예요. 그런 사람 돈을 좀 나눠 먹기로 무슨 죄가 된다고 생각 하세요?" ...
"하하하, 그 말을 듣고 보니 자네 말에도 일리가 있네 그려. 그러고 보면 세상만사가 돌고 돌아가며 절로 균형을 이루게 되는 모양일세 ! "
"우리들은 그런 어려운 이야기는 몰라요. 아무튼 뱀이라는 것은 값을 비싸게 부를수록 잘 팔리는 법이예요. 그럴수 밖에 없는 것이 돈이 썩어나는 양반들에게는 돈 같은 것은 문제가 아니고, 오직 정력을 왕성하게 하는 것 만이 대단히 중요 하거든요."
"음 ..그렇기도 하겠네."
..
다음날 아침, 땅꾼 아이들은 아침을 먹기 무섭게 제각기 꼬챙이와 자루를 하나 씩 들고 움막을 나서며 김삿갓에게 이렇게 말한다.
"우리들은 이제부터 산으로 뱀을 잡으러 갈 거예요. 아저씨는 서울 구경을 다니다가 잠자리가 없게 되거든 우리한테 또 오세요."
밤사이에 정이 들었는지, 고맙기 짝이 없는 소리를 한다.
"말만 들어도 고맙네. 덕분에 신세를 많이 지고 가네. 오라는 곳은 없어도 갈 곳은 많은 사람이니, 섭섭하지만 이만 작별하세. 그리고 앞으로 건강하고 일 열심히 하면서 돈도 많이 벌게 되기를 빌어줌세 !"
"그래요 ? ... 이거, 섭섭해서 어떡하죠 ?"
그러면서 땅꾼 아이들은 저희끼리 눈짓을 하더니 , 한 아이가 엽전 열 냥을 불쑥 내밀면서,
"이거 몇 푼 안되지만, 가시다가 술이라도 한잔 사 드세요."
하고 말을 하는 것이 아닌가. 밤새 신세를 진 것도 고마운 일인데 돈까지 내밀다니 .. 너무도 고마운 인정을 만났기에 김삿갓은 눈시울이 후끈 달아올랐다.
"나는 본시 돈이 필요치 않은 사람인데, 자네들이 정으로 주는 돈이니, 이 돈을 고맙게 받겠네."
김삿갓은 엽전을 주머니 깊이 간직하고 다시 서울 거리로 나왔다. 그리고 오늘은 풍수 지리상 백호의 기(氣)를 담고 있는 인왕산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인왕산에서 굽어보는 장안의 풍경은 글자 그대로 장관이었다. 만호 장안(萬戶長安)을 굽어보던 김삿갓은 어제 겪은 일들이 불현듯 떠올랐다. 한양 도성에 사는 사람들은 저마다 고래등 같은 기와집을 쓰고 살면서도 , 지나가는 나그네에게 밥 한그릇 먹이려 하지 않으니 그게 어디 사람이 할 짓이란 말인가.
그런 일에 비한다면 양반님네들이 멸시하고 더럽다 여기는 땅꾼 아이들의 고마움은 상대적으로 크게 비교가 되는 것이었다.
(한양이란 매우, 극과 극의 삶이 서로 섞여 돌아가는 곳이군 ...)
이런 생각으로 장안을 내려다보던 김삿갓, 갑자기 뒤가 마려 옴을 느꼈다.
그리하여 바위 사이에 쪼그려 앉아 장안을 내려다보며 뒤를 보려는데, 별안간 방귀 한 방이 요란스런 소리를 내며 나왔다. 어젯밤 땅꾼 움막에서 과식을 한 탓인지, 방귀 냄새가 고약하기 짝이 없었다. 그러나 요란스런 방귀 한 방을 뀌고 나니, 속이 그렇게도 시원할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김삿갓은 뒤를 보며 다음과 같은 즉흥시 한 수를 읊퍼댓다.
인왕산에서 똥을 누려니 방귀가 먼저 터져 나와
향기로운 냄새로 온 장안이 진동했다.
放糞仁旺 第一聲 방분인왕 제일성
香震長安 億萬家 향진장안 억만가.
이 시는 김삿갓이 인심 사나운 한양 도성을 떠나는 "이별의 시"이기도 하였다.
.. (계속)
★★★★★★★★
서삿갓의 스트리킹(스트리킹:74년대에 미국에서 시작된 발가벗고 뛰는 행위)
1974년 7월 그 때도 몹시 더웠다,
거의 매일 저녁마다 영남공전(지금의 영남전문대)에서 친구들 넷이 모였다.
집을 떠나 거기에 가면 잔소리 하는 사람도 없고 시원하기 때문에 거기에 모였다.
특히 좋은 점은 술을 돈을 그리 들이지 않고 마실수 있다는 잇점이 있다는 것도
그기에 모이는 주요한 이유중의 하나였다.
술집에 가면 안주를 비롯한 술값이 만만찮기 때문에. 거기서 마시면 막걸리를 병채로 사면 되고 안주는 김치정도면 아주 훌륭한 술자리가 만들어진다.
시내에서 아르바이트를 마치고 곧장 여기에 오는 대명동 김모, 철학에 관심이 많은 동인동 김모,
용의주도 하지만 어설픈 남산동 윤모. 이렇게 모이면 보통 12시가 넘어야 자리가 끝나곤 했다.
그때는 통금이 있을 때였지만 어떻게 통금에 한번도 걸린 적이 없었다.
어떤 행위든 동기가 있어야 실행이 되는 법….
나를 빼고 셋 모두 술은 타인의 도전을 불허하는 멤버들이다.
술이 약한 나는 어느정도 마시면 그때부터 자리에서 버티기가 힘들어진다.
그때가 되면 술안주는 나의 주량의 취약함에 쏠린다.
술도 취하고 집에는 가고 싶지만 일찍 일어났다간 무슨 봉변을 당할지 모른다.
자리를 마칠 때 쯤이면 오빙달(오줌을 빙자한 달xx) 교주의 설교도 들어야 하고….
12시가 넘어 화제의 초점이 나에게로 슬슬 넘어오기 시작하는 순간,
내 무의식 속에 잠재해 있던 술을 많이 마시지 못하는 열등감을 다른 행위로
대체해보자는 방어기제가 머리속에 떠 올랐다.
입대를 한 달 정도 앞두고 있었고 다른 3명도 거의 다 군입대를 앞두고 있는 싯점이었다.
군입대를 앞둔 대부분의 남자들은 평소에 없던 용기도 생겨 평소에 엄두도 내지 못하는
일을 솔선해서 하는 경우도 많이 본다.
그 당시 사회분위기는 군입대를 앞둔 사람들에게는 어지간한 잘 못이 있어도 별로 문제를
삼지 않던 사회적인 공감대도 있던 때였다.
내 머리속에 그 날 아침 신문에서 본 스트리킹이 생각났다.
바로 이거다 , 이거 한 번 해보자 라는 생각이 불현듯 머리에 떠올랐다.
생각이 듦과 동시에 삼각지 로타리 쪽으로 발가벗고 뛰기 시작했다.
조금 뛰었을까? 싶었는데 뒤에서 나를 따라오는 발자국 소리가 들린다.
속으로 ‘이크 걸렸구나 잡히면 안된다. 뛰자 ‘
발가벗고 파출소에 연행되어 취조를 받을 생각을 하니 눈앞이 캄캄하다.
이런 생각이 들면서 뒤도 돌아보지 않고 죽어라고 뛰었다.
뒤에서 따라오는 사람의 속도도 만만치 않다. 나도 빠른 편인데 뒤에 따라오는 이도
잘 달리는구나 라는 생각도 잠시. 삼각지로타리 까지 약 700M를 뛰고 나니 술도 취한
상태이고 하늘도 샛노랗게 보이고 숨도 차 ,더 뛰다간 죽겠다 싶어 그자리에 서버렸다.
오늘 잡혀가면 내일 법원에 가서 훈방조치를 받으면 저녁에는 집에 가겠지 하는
생각으로 뒤를 돌아보니 따라온 사람은 순경이 아니라 3명의 친구였다.
신문에 나지는 않았지만 대한민국의 1호 스트리킹은 대구 대명동에서 야간에 일어났고
우리 4명의 경북의 건아들은 대구시민의 긍지를 살리고 (?)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였다고 생각함(?).
맨발로 뛰지는 않았지만 이 글을 쓰니 그 옛날 큰 힛트를 친
최희준의 ‘맨발의 청춘’이라는 노래가 생각난다.
친구을 이 노래 들으며 오늘 밤도 맨발로 옷입고 걸어봄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