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임진년 새해. 60년 만에 찾아온 ‘흑룡의 해’라고 한다. 흑룡이든 청룡이든 백룡이든 이 동물은 12간지 동물가운데 유일하게 현존하지 않는 상상의 동물이다. 그러나 용은 용기와 비상, 희망을 상징하는 영물로 오랜 세월 한국, 중국 등 동양인들의 정신세계에 각인돼왔다. 예부터 권부의 정상인 임금님을 일컬을 때도 얼굴은 ‘용안‘, 옷은 ’용포‘, 자리는 ’용상‘이라고 했고, 또 우리사회에서는 ‘등용문’과 ’용 꿈‘이란 말도 자주 쓴다. 어려운 환경에서 고생 끝에 출세하는 경우는 ‘개천에서 용 났다.’고도 한다. 용의 해에 태어난 사람은 건강하고 정직하며 용감할 뿐만 아니라 신뢰감이 두텁다고 해 2007년 ‘황금돼지의 해’처럼 연초부터 출산과 결혼의 행렬이 이어지고 있다. 흑룡의 해 임진년에는 떠오르는 태양을 가슴 가득 안고 힘찬 기운으로 희망찬 한 해를 이어갔으면 좋겠다.
아무튼 올 해는 우리나라를 비롯하여 미국 러시아 프랑스 등 전 세계 60여 개국이 대선이나 총선을 통해 새로운 지도자를 뽑게 된다. 스포츠계도 4년마다 개최되는 하계올림픽이 7월 런던에서 열려 각 종목마다 슈퍼스타의 탄생을 예고하고 있다. 정치지도자든 스포츠 스타든 새로운 ‘용’이 승천할 형국이다.
새해를 앞둔 지난 연말 엘리트 체육인들의 오랜 숙원이었던 학교체육진흥법 제정안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 학생선수들의 학습권보장에 한층 힘이 실리게 됐다. 사실 한국의 엘리트 체육은 그 동안 금메달 지상주의에 몰입, 학생선수들이 학업과는 거리가 멀 수밖에 없었다. 일반선수는 물론 국가대표선수 조차 현역에서 은퇴한 뒤 취업 등에 많은 어려움을 겪어야했다. 이런 와중에 엘리트 체육인의 장래를 위한 학교체육진흥법이 제정된 것은 우리나라 스포츠계에 한줄기 낭보가 아닐 수 없다. 이 법안이 그 동안의 잘못된 훈련제도나 시스템을 탈피, 정상적인 체육인재 발굴 및 육성의 바탕을 마련할 수 있기 때문이다.
외국은 정부 주요 보직에 로게, 펠레 등 엘리트 체육인들 수두룩
외국의 경우 올림픽이나 세계선수권대회 메달리스트 등 선수출신들이 정부요직이나 국제올림픽위원회(IOC)의 위원장, 위원, 또는 올림픽이나 월드컵 대회조직위원장을 맡고 있는 사례가 부지기수다. 2001년부터 국제올림픽위원회(IOC)의 수장을 맡고 있는 자크 로게 위원장은 정형외과 의사출신으로 젊은 시절 요트와 럭비를 즐겼던 올림피언이었다. 88서울올림픽 때는 벨기에 선수단 단장 자격으로 올림픽에 참가했고 이후 벨기에 올림픽위원회(NOC) 위원장을 맡아 올림픽운동에 헌신했다. 1952년부터 20년간 IOC위원장을 지냈던 에이버리 브런디지(미국)도 1912년 스톡홀름 올림픽 육상 5종 경기에서 5위를 하는 등 올림픽에만 4번 출전했던 선수출신. 그는 IOC 위원장 시절 유독 아마추어리즘을 강조, ‘미스터 아마추어’라는 별칭을 얻기도 했다. 당시 한국의 이상백 IOC위원과도 절친한 사이였다. 현역 IOC위원가운데 세르게이 붑카(우크라이나), 토마스 바흐(독일)는 각각 올림픽 육상 장대높이뛰기와 펜싱의 금메달리스트다. 1988년 서울올림픽에서 우승했던 붑카가 1994년 6m14의 장대높이뛰기 세계신기록을 수립했는데 아직도 18년 전 그 기록이 깨지지 않고 있다. 바흐는 작년 7월 남아공에서 평창에 맞서 2018년 동계올림픽 개최지의 뮌헨 유치를 위해 선봉에 섰던 독일 스포츠지도자로서 2013년 선출될 유력한 차기 IOC위원장 후보. 또 올 런던올림픽 대회조직위원장 세바스찬 코는 1980년과 84올림픽 육상 남자1,500m에서 거푸 우승한 뒤 은퇴, 영국 보수당 하원의원으로 활약한 바 있다. 1998년 프랑스 월드컵 조직위원장 미셀 플라티니는 ‘그라운드의 예술가’로, 2006년 독일월드컵 조직위원장 프란츠 베켄바우어는 ‘카이저(der Kaiser, 황제)’로 각각 불린 세계적인 축구선수 출신. 이뿐만 아니다. 지난 2006년 93세를 일기로 타계한 제럴드 포드 미국 38대 대통령은 명문 예일대 출신으로 학창시절 유명한 미식축구 선수였다. ‘축구 황제’ 펠레는 브라질의 체육장관을 지낼 만큼 행정력을 인정받았다.
한국은 혼자 뛰어 IOC위원 당선된 임기 8년의 문대성이 고작
그러나 우리나라의 실정은 어떤가. 아직 국가대표 선수출신이 IOC위원이나 장, 차관 등 정부요직 또는 동, 하계 올림픽, 월드컵, 세계육상선수권대회 등의 조직책임자에 기용된 적이 없다. 영화감독이나 배우출신들이 정부 요직에 기용되는 것과도 극명한 대조를 이루고 있다. 그나마 국가대표 선수출신으로 2004년 아테네올림픽 태권도에서 우승했던 문대성이 혼자 힘으로 2008년 베이징올림픽 참가선수들의 투표에 의해 선수출신에게 주어지는 임기 8년의 IOC위원에 당선된 것이 고작이다.
지난 연말 ‘피겨요정’ 김연아가 KBS와의 인터뷰에서 “IOC위원이 되고 싶다.“고 장래 희망을 피력했지만 이 또한 쉽지 않다. 물론 2010 밴쿠버 동계올림픽 금메달리스트로서 영어를 유창하게 구사하는데다 깜직한 외모까지 갖춘 김연아가 IOC위원이 될 수 있다면 누가 반대하겠는가? 그러나 IOC는 선수출신에게 주는 임기8년의 IOC위원 정원이 15명인데다 한국은 이미 문대성이 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따라서 IOC회원국이 204개나 되는데 한국에게만 2명의 선수출신 IOC위원을 뽑아 주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굳이 김연아가 IOC위원이 되려면 2014년 소치동계올림픽에 참가해 메달을 딴 뒤 2018년 평창동계올림픽 때 출마해 당선되는 방법밖에 없다. 문대성의 IOC위원 임기는 2006년에 끝난다. 물론 문대성도 장대높이뛰기의 세르게이 붑카가 선수출신 IOC위원 임기가 끝난 뒤 70세에 은퇴하는 개인자격 IOC위원에 선출되었듯 개인자격 IOC위원 자리에 도전할 수도 있다.
한국 특유의 훈련시스템 적응하느라 학업 멀리할 수밖에
그렇다면 국가대표 선수출신 등 엘리트 체육인들이 외국과는 달리 우리나라에서 홀대를 받는 원인은 어떻게 설명해야할까? 두말할 것도 없이 한국 특유의 훈련시스템에 적응하기 위해 정상적인 학창시절을 보내지 못한데서 찾을 수밖에 없다. 학업에 열중하지 못했으니 당연히 정부나 기업의 조직에서 경쟁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고 적응 또한 어렵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잘못이 있다면 초등학교 때부터 훈련에만 몰두, 태극마크를 단 뒤 국제대회에서 메달획득 등으로 국위를 선양한 ‘잘못’밖에 없다. 예를 들어 2010년 밴쿠버 동계올림픽에서 한국선수단은 금메달6개로 종합5위에 오름으로써 국가브랜드 가치 상승 등 20조1,768억 원의 경제효과를 올렸다고한다. 이 자료는 2010년 3월23일 대한상공회의소 국제회의장에서 열린 ‘국제스포츠이벤트와 국가브랜드’세미나에 삼성경제연구소가 내놓은 것이다. 단언할 수 없지만 한국의 IT와 조선, 자동차산업 등이 세계 정상의 경쟁력을 갖추고 국격 또한 날로 높아 가는데에는 태릉선수촌에서 각고의 노력으로 강훈을 이겨낸 태극전사들의 공헌이 컸음을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국가는 이들 선수들에게 무엇을 해주었는가. 국가원수가 청와대에 이들을 초청, 오찬 베풀고 훈장 달아주고 연금혜택 주면 그것으로 끝이다. 하지만 이것이 다는 아니다. 취업 보장 등 항구대책을 마련해주어야 하는데 무엇보다 엘리트선수들이 ‘운동기계‘에 머물지 않도록 국가가 제도나 시스템을 바꿔 주어야한다.
이런 의미에서 때늦은 감은 있으나 이제라도 국회가 학교체육진흥법을 제정, 학생선수들의 학습권을 보장한다고 하니 다행이다. 그러나 ‘구슬이 서말이라도 꿰야 보배다’라는 말이 있듯 관련 법안이 무용지물이 되지 않도록 관계당국이 그 운용에 각별한 주의를 기울여 입법취지를 잘 살려나가야 한다.
올해는 임진년. 비상하는 용의 힘찬 기운을 받아 한국선수단이 2012 런던 하계올림픽에서 페어플레이로 우리의 국격을 한 단계 더 업그레이드 하면서 메달도 많이 따 시름에 젖은 국민들에게 위로와 격려가 됐으면 좋겠다. 아울러 2018 평창 동계올림픽 준비 원년을 맞아 완벽한 마스터플랜이 마련됐으면 하는 마음 간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