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岳陽 大會合
정오가 조금 지나서 냉검상과 금봉문의 세 자매는 이십여 명의 수행인원을 거느리고 금봉문을 떠났다. 네 사람은 거대한 마차에 같이 자리를 했는데, 희봉아는 냉검상의 옆에 바싹 붙어서 한시도 떨어질 줄 몰랐다. 아무리 총명한 그녀였지만 사랑에는 한없이 천진스럽고 귀여운 여인일 뿐이었다. 희봉아는 무엇이 그리 기쁜지 연신 종달새처럼 지저귀며 웃음이 떠나지 않았다. 냉검상은 그녀의 물음에 담담히 대답을 하며 비교적 조용히 앉아 있었다. 그러나 흘깃 희문연과 눈이 마주치면 마음이 유쾌하지는 않았다. 혈봉 희문연은 노골적으로 질투의 빛을 보이고 있는 것이었다. 아무리 동생이라지만 사랑은 빼앗길 수 없다는 기색이었다. 더욱이 냉검상과 육체관계를 맺었기 때문에 더욱 그런지도 몰랐다. 금봉 희수빙도비교적 담담한 표정을 짓고 있었는데, 마음만은 편치 않았다. 그녀는 냉검상에게 발견했던 야수의 눈빛을 기억하고 있었다. 잔인하고 파괴적인 그 모습과 눈빛! 여자로서 묘한 호기심과 함께 두려움을 느끼게 하는 눈빛이었다. 희수빙은 남몰래 냉검상을 살피면서 한숨을 내쉬곤 했다. 그러다가 문득 희문연의 질투에 불타는 눈빛을 보고는 그만 가슴이 철렁해지는 것이었다. (설마...... 문연 저 아이도 냉검상을?) 그러나 희문연의 눈빛을 보면 볼수록 우려는 현실로 그녀의 가슴에 새겨지고 있었다. (아...남녀의 사랑 앞에서는 부모의 정(情)도 끊어지는 것이거늘,
냉검상 때문에 우리 자매의 의가 깨지는 것은 아닐지..) 희수빙은 못내가슴이 답답했다. 그러나 마차는 열심히 악양으로 향하고 있었다. 마차는 두 시진 만에 악양에 도착했다. 악양의 제일 큰 객점인 악양제일루(岳陽第一樓)에서 마차가 멈추자 많은 점소이들이 나와 이들을 맞이했다. 금봉문이 악양에 인접해 있기 때문에 익히 금봉문의 위명을 아는 점소이들은 깍듯하게 이들을 모셨다. 단지 여인방파로 알려진 금봉문 일행 중에 유일하게 남자로 끼어 있는 냉검상을 이상한 눈빛으로 볼 뿐이었다. 더욱이 금봉문의 지다성(智多星)이라는 희봉아가 냉검상의 팔에 매달려 있는 것이 도대체 이해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러나 점소이란 궁금한 게 있어도 그대로 덮어두어야 할 직업. 그들은 개의치 않고 냉검상 일행을 안내했다. 이미 무림의 회합을 알고 있는지 점소이는 그들을 악양제일루의 별원으로 안내했다. 대부분의 수행인들은 각자의 처소를 정해 주어 그곳으로 갔고,
냉검상과 금봉문의 세 자매들은 별원에 위치한 별전으로 들어갔다. 별전은 꽤 넓었고, 이미 백여 명의 군웅들이 모여 삼삼오오 짝을 지어 이야기를 나누며 웅성거리고 있었다. 금봉문의 세 자매가 등장하자 갑자기 별전은 조용해졌다. 또한 모든 시선이 금봉문의 세 자매에게 쏠렸다. 이유는 간단했다. 세 자매와 함께 온 냉검상의 존재 때문이었다. 금봉문에 남자가 있다는 것도 의심스러웠지만 지다성 희봉아가 냉검상의 팔에 매달려
천진스러운 어린애처럼 웃고 있다는 것도 더더욱 의심스러운 일이었다. 금봉 희수빙은많은 사람들의 눈빛에도 아랑곳없이 일문의 문주답게 고아한 태도로 일일이 인사를 나누었다. 희수빙이 인사를 나누는 동안 희봉아와 희문연은 냉검상과 함께 자리를 잡았다. 자리를 잡은 냉검상은 별전을 둘러 보았지만 별로 아는 사람이 없었다. 특히 그가 제일 관심을 가진 취옥성의 삼공자 냉곡의 모습을 찾아보았지만 어디에도 냉곡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전혀 아는 얼굴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별전의 상좌에는 해연이 앉아 있었고, 해연과 시선이 마주친 냉검상의 두 눈에서는 시퍼런 불길이 치솟았다. 냉검상의 시선을 접한 해연은 빙그레 웃을 뿐이었다. 냉검상이 계속해서 노려보자 해연은 전음으로 말했다. "소시주, 이곳에서 그대와 빈승이 싸워 봐야 서로 불이익만 있소. 우리의 결투는 훗날로 미루는 것이 어떻겠소?" 냉검상도 공연히 소란을 피우고 싶지는 않았다. "땡추! 기억하고 있어라. 언젠가 네 얼굴을 문질러 주고 말 것이다!" 해연은 기가 막혔다. 정도에서는 신화처럼 존경을 받는 자신이 냉검상의 혓바닥에서 완전히 뭉개지고 있기 때문이었다. 해연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진정 어쩔 수 없는 위인이로구나.) 해연은 쓴입맛을 다시면서 냉검상을 외면했다. 냉검상은 해연에게서 시선을 떼어 다시 별전을 훑어보다가 애소군과 흑의문생을 발견했다. 황제를 모시고 있던 둘은 무슨 일로 이곳에 왔는지 조용히 식사를 하고 있었다. 한동안 냉검상이 바라보자 애소군도 냉검상쪽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순간적으로 놀랜 표정이었으나,
냉검상의 곁에 있는 금봉문의 미녀들을 보고는 이내 표정이 차갑게 변했다. 냉검상은 애소군을 향해 슬쩍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러자 애소군은 코웃음을 치며 차갑게 시선을 돌려 버리는 것이었다. (후후.. 아직도 남장을 하고 있지만 재미있는 계집이야.) 군웅들과 일일이 인사를 나눈 금봉 희수빙이 돌아와 자리를 잡자 해연이 조용히 몸을 일으켰다. 그러자 좌중은 금봉문의 세 미녀가 나타날 때보다 더욱 조용해지며 해연에게 시선이 쏠렸다. 해연은 군웅들을 돌아보며 담백한 음성으로 말했다. "아미타불... 여러분! 빈승이 한 사람의 영웅을 여러분께 소개해 드리겠소이다." "......?" "......!" 군웅들은 모두궁금한 표정으로 해연선사를 응시했다. 그러자 해연선사는 냉검상을 가리키며 말했다. "근간에 들어 혜성처럼 나타나 무림의 화제를 일으키고 있는 불세출의 기협,
천산마도(天山魔刀) 냉검상(冷劍霜) 공자이시오.
바로 얼마 전에는 십이비천신마의 세 노마를 단신으로 제거하고 금봉문을 위기로부터 구해낸
바로 그 사람이오!" 군웅들은 술렁대며 냉검상을 향해 경이의 시선을 보냈다. 그들 역시 천산마도 냉검상에 대한 소문은 귀가 따갑도록 듣고 있었다. 마치 폭풍처럼 등장해서 단 일 년 만에 전 무림을 격동시킨 그 이름. 이때 해연선사는 유쾌하게 웃으면서 냉검상에게 말했다. "하하...냉공자, 빈승이 소개를 했으니 이제 여기 모이신 여러분께 한 마디쯤 인사를 해야 할 차례가 아니오?" 냉검상은 어쩔수 없이 몸을 일으켰다. 희봉아는 냉검상의 모습을 보면서 너무 기뻤다. 무림계에서도 가장 많은 존경을 받는 해연선사가 냉검상을 영웅으로 소개한 것이 얼마나 대단한 일인가? 그러나 일어선 냉검상은 잠시 해연선사를 응시했다. 해연선사가 무슨 심리로 자신을 소개했는지 짐작할 수 없었다. 달리 할말도 없는 냉검상은 좌중을 한 차례 둘러보며 간략하게 말했다. "냉검상이오." 어찌보면 지극히 오만한 태도였다. 냉검상의 간단한 인삿말에 많은 군웅들이 눈살을 찌푸렸다. 특히 상청관 관주이며 이 회합의 주최자인 태헌진인은 냉검상의 태도가 몹시 못마땅했다. (허어...기도는 극히 출중한데 상대적으로 성정(性情)은 극히 오만하고 편협하군.) 이때 난데없이별전의 입구쪽에서 껄껄 웃는 소리가 들렸다. "으하하! 천산마도란 이름이 너무나 쩡쩡해서 한 번 만나보고 싶었는데 이런 곳에서 보게 되다니
실로 기쁜 일이로다." 모든 시선이 입구쪽으로 옮겨졌다. 그곳에는 꾀죄죄한 옷차림에 별 볼일 없는 노인 하나가 술취한 얼굴로 웃고 있었다. 한 십 년은 물구경을 못한 장삼에 성성한 백발이 어지럽게 엉켜 까치집을 연상케 했고,
등에는 자신의 몸집보다 큰 호로병을 지고 있는 거지노인이었다. 이 거지노인을 일견하는 순간 제일 상좌에 앉아 있던 해연선사를 비롯해 주최자인 태허진인 등
모든 사람들이 일어서 공손하게 인사를 하는 것이 아닌가? 그러나 거지노인은 인사를 받는둥 마는둥 비틀걸음으로 들어오면서 중얼거렸다. "클클...좋아, 좋아. 젊은 녀석이 실로 대단한 기도야.
그나저나 십이비천신마의 세 명을 파리잡듯 잡았다니 실로 경천동지할 일이 아닌가?" 고약한 술냄새를 풍기며 거지노인이 다가온 곳은 바로 냉검상이 앉아 있는 자리였다. 거지노인은 신트림을 하며 냉검상에게 불쑥 손을 내밀었다. "소형제, 우리 인사나 하지. 이 지저분한 늙은 거지는 개방의 취선개 악승(岳勝)이라고 한다." 그러나 냉검상은 눈살을 찌푸리고 선뜻 손을 내밀지 않았다. 이때 해연이 황망히 다가와서 합장을 하며 말했다. "아미타불... 악노시주님 실로 오랜만에 뵙습니다." 취선개 악승은거슴츠레한 눈으로 해연을 보면서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응? 누가 이렇게 못 생겼나 했더니 가물가물 기억이 나는군.
돌중 해연이 아닌가? 하도 오랜만에 만나니 그 곰보자국이 아니었다면 몰라볼 뻔했군." 해연은 담담하게 웃었다. "노시주님의 입심은 여전하시군요." "쯧쯧...천불암에 틀어박혀 시주돈이나 챙기지 않고 왜 이 먼 곳까지 놀러나왔어?" 해연은 고소를머금었다. 이때 소림사의 굉지대사가 옆으로 다가오며 정중하게 인사를 했다. "아미타불... 그 동안 별래무양하셨는지요." 취선개 악승은다시 거슴츠레한 눈으로 굉지대사를 보았다. "자넨 또 누구야?" "소림의 굉지옵니다." 잠시 미간을 좁히며 생각하던 악승은 생각이 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맞아..그때 그 소사미였군. 많이 컸어..그때는 싱싱하더니 세월이 쬐금 흘렀다고 왜 그렇게 폭 삭았나?" 냉검상의 옆에앉아 있던 희봉아는 악승의 입심에 그만 입을 가리며 웃음을 터뜨렸다. "킥!" "엥? 이건 또 무슨 소리야?" 악승은 희봉아를 내려보았다. 희봉아는 수줍은 듯 고개를 숙이고 있었는데 여전히 웃음을 참을 수 없었는지
입을 가린 채 어쩔 줄을 모르고 있었다. 악승은 짐짓 눈을 부라렸다. "고약타! 허어.. 나이도 어린 여아가 어른 앞에서 함부로 웃다니..." 희봉아는 금방얼굴이 새빨갛게 변하면서 안절부절하지 못했다. "죄, 죄송합니다.." 악승은 희봉아의 모습을 보면서 싱긋 미소를 지었다. "괜찮아. 이 늙은 거지의 주책을 보고 웃어줄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것도 즐거운 일이야." 냉검상은 어이가 없었다. (대체 이 노개가 누구이기에 이토록 모두들 공손하단 말인가?) 취선개 악승. 냉검상이 어찌이 인물을 알랴! 간단하게 그를 설명하면 개방의 이십삼대 장문인인 취선개 악승. 현 장문인이 이십 칠대를 내려오니 그는 개방 사조의 사조뻘이 되는 현 무림 최고 배분의 기인이었다. 세수 이백이 넘었고, 이제는 인간의 오욕칠정(五慾七情)마저 초월했다고 전해지는
이 시대 최고의 기인이 바로 취선개 악승이었다. 이런 악승이니 해연조차도 공경하게 대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다. 취선개 악승은다시 냉검상을 보며 손을 내밀었다. "참, 그건 그렇고 우리의 일은 아직 끝나지 않았잖나?
소형제, 이 늙은 거지의 손이 더럽게만 느껴지지 않는다면 서로 수인사나 하세." 말이야 바른대로 손은 때가 반질거렸다. 그러나 악승이 냉검상에게 스스럼없이 손을 내민 사실은 모든 군웅들에게 크나큰 놀라움을 주기에 충분한 일이었다. 냉검상은 가만히 악승을 응시했다. 악승의 봉두난발 속에 가려져 있는 눈은 게슴츠레하지만은 않았다. 어린아이의 눈처럼 맑고 순진한 빛이 어려 있는 눈이었다. 냉검상은 왠지 악승의 태도와 눈빛이 마음에 들었다. 천방지축 사람을 곤혹스럽게 만드는 입심이 왠지 십년지기라도 만난 듯한 기분이 들 정도였다. 냉검상은 흔쾌히 손을 내밀어 악승의 손을 잡았다. 악승은 냉검상의 손을 굳게 잡으면서 유쾌한 듯 껄껄 웃었다. "이 노개가 죽지 않고 이 나이까지 살았더니 자네같이 좋은 친구를 다 만나게 되는군." 악승은 무엇이그리 좋은지 연신 대소를 터뜨리고 있었다. * * * 악승의 등장으로 한바탕 소란스러웠던 장내가 진정되자 주최자 태허진인은 화합의 모임을 이끌기 시작했다. 이 회합은 밤이 될 때까지 계속됐다. 주제는 새롭게 등장한 천마교와 십이비천신마에 대한 것이었다. 그러나 결론은 쉽게 나지 않고 서로 상반된 의견 속에 갑론을박으로 일관하는 것이었다. 별로 무림의 정세에 대해 정통하지 못한 냉검상은 회의가 따분하고 지루하기만 했다. 하니 무림정세에 대해 잘 알고 있다 해도 냉검상의 성격에는 이렇듯 지루한 회합이 맞지 않았다. 도무지 마음에 들지 않는 회합이었다. 냉검상은 그저앉아서 술만 축낼 뿐이었다. (빌어먹을...무슨 놈의 토론이 저리 길어? 천마교가 문제가 되면 직접 천마교로 가서 해결하면 되는 것이고,
십이비천신마가 골치 아프면 모두 제거해 버리면 되는 게 아닌가?
간단한 것도 오히려 복잡하게 만드는 바보 같은 인간들..) 다시 한 잔의 술을 마신 냉검상은 슬그머니 일어나 밖으로 나왔다. 따분했기 때문이었다. 할 일 없이 마신 술이 제법 얼큰했는지라 밖으로 나오자 바람이 시원했다. (무림의 일이란 이렇게 복잡한 것인가? 천산에 있을 때는 어떤 일이든지 간단하게 해결을 했는데..)
냉검상으로선 이해하기 힘든 회합이었다.
그러나 회합에대해서 진중하게 생각하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너희들끼리 떠들어라, 나는 조용하게 산책이나 하겠다는 심정으로 그는 화원을 거닐었다.
화원에는 주로국화를 심어놓았는지 밤이 됐는데도 그윽한 국향이 감미롭게 번지고 있었다.
"이렇듯 좋은 밤에 쓸데없는 소리로 시간을 허비하다니..."
냉검상이 중얼거리며 앞으로 걸어갈 때 느닷없이 한 복면인이 앞으로 뚝 떨어져 내리면서
다짜고짜 공격을 해 오는 것이 아닌가?
"?"
냉검상은 눈살을 찌푸리며 복면인의 공격을 양 손으로 막아 내었다.
그러자 복면인은 냉검상의 손을 뿌리치면서
원앙각(鴛鴦脚)의 수법으로 연속 열 한 번의 발길질을 해 오는 것이 아닌가?
발길질이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마치 풀밭을 기는 독사의 소리처럼 매서웠다.
그러나 냉검상은 조금도 당황하지 않고 마보쌍교(馬步雙橋)의 수법으로 원앙각을 막아내며
오히려 천괴조를 펼치면서 복면인을 가볍게 물러나게 했다.
"하핫....하늘을 속여도 나를 속일 수는 없다
. 얼굴을 가린들 내가 못 알아볼 줄 알았더냐? 이미 너의 체취는 내게 너무도 익숙하다."
뒤로 밀려난 복면인은 냉검상의 말에 멈칫하더니 선 채로 복면을 벗는 것이었다.
복면 속에 드러난 얼굴은 애소군이었다.
애소군은 싸늘하게 냉검상을 노려보았다.
"후후..그런 눈보다는 그윽한 눈빛이 더욱 어울리는데?"
"흥!"
애소군은 차갑게 웃었다.
냉검상은 어깨를 으쓱해 보이고는 물었다.
"황제는 어디다 두고 이곳에 나타났지? 그리고 복면을 뒤집어쓰고 나를 공격하는 심보는 또 뭐냐?"
애소군은 어이없는 표정이었다.
잠시 냉검상을 보던 그녀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 당신이란 인간은 알 수 없군요."
"겨우 그 말을 하려고 내 앞에 나타난 것인가?"
애소군의 표정이 싸늘하게 변했다.
그녀는 원망스러운 듯 냉검상을 보다가 입을 열었다.
"당신... 그 날 밤 이후, 내게 아무런 감정도 없나요?"
말을 하면서 애소군의 얼굴은 붉어졌다.
황제의 방에서 나와 냉검상을 만나고 그 밤에 이루어졌던 정사를 기억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냉검상은 피식 웃었다.
"바람을 아나? 바람은 정해 놓고 불지 않는다. 그저 어디고 스쳐갈 뿐이지.
나에게 있어서 너는 스쳐가는 바람일 뿐이야."
애소군은 충격을 받은 듯 안색이 하얗게 변해 버렸다.
"!"
그녀는 이마를짚으며 한동안 자신을 추스르더니 눈물마저 글썽거리는 시선으로 냉검상을 보며 중얼거렸다.
"아무리 목석이라 해도... 아니 철혈의 사내라 해도 어떻게 그런 심한 말을..."
냉검상은 냉정했다.
"어서 황제에게나 가봐. 이제 나는 더 이상 너에게 볼 일이 없다."
애소군의 교구가 격렬하게 전율했다.
"그래. 알았어! 만나는 여자마다 노리개처럼 건드리는 인간!
너를 조금이라도 영웅(英雄)으로 생각했던 것이 실수였다.
어느 새 금봉문의 미녀들을 유혹해서 그녀들과 재미를 보고 있지만,
그녀들이 싫증나면 또 다른 여인들을 찾아 떠나겠지?"
냉검상은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그야 알 수 없지. 그리고 네가 상관할 바도 아니고 말이야."
애소군은 너무기가 막혔다.
그저 따뜻한 말 한 마디만 해 주어도 이토록 비참해지지는 않을 텐데...
눈물이 왈칵 쏟아질 것 같았다.
그녀는 억지로 눈물을 참아내면서 증오처럼 외쳤다.
"더러운 음적 놈!"
순간, 냉검상의 표정이 무섭게 변했다.
차갑게 식어 버린 눈빛으로 애소군을 쏘아보는데 그 눈빛을 응시하기조차 두려울 정도였다.
"음적이라고?"
냉검상은 무섭게 노려보며 애소군에게 다가왔다.
애소군은 알 수 없는 두려움을 느끼며 뒤로 물러났다.
그러나 냉검상은 느릿하게 그녀를 향해 다가오며 일말의 감정조차 느껴지지 않는 차디찬 음성으로 말했다.
"나보고 음적이라고 했느냐?"
나무에 걸려 더 이상 물러날 때가 없게 된 애소군은 냉검상을 보면서 더듬거렸다.
"나, 나는 단지..."
"건방진 계집!"
외침과 함께 냉검상의 손이 허공을 갈랐다.
찰싹! 하는 소리와 함께 애소군의 얼굴이 한쪽으로 돌아갔다.
입 안에 아릿한 피가 고일 정도로 강한 따귀였다. 냉검상은 돌아서면서 중얼거렸다.
"나에게 그런 말은 용납되지 않는다. 네가 여자이기 때문에 그 정도로 그친 것이다."
애소군은 고개를 바로 했다.
선명한 손바닥 자국이 뺨에 새겨져 있건만 아픔조차 잊은 표정으로 냉검상의 뒷모습을 망연하게 바라보았다.
아주 짧은 순간 수 없는 갈등의 빛이 그녀의 눈 속에서 엉키고...
냉검상이 시야에서 벗어나려는 순간 그녀는 악을 쓰듯 외쳤다.
"냉검상! 나는 이제 당신을 알았어! 당신의 동생은 냉유림. 그리고 당신은 취옥성의 적자..
. 바로 서평왕 전하의 아들이 아니냐? 내 말이 틀렸어? 당신은 바로 그 냉검상이야!"
"!"
냉검상의 걸음이 멈추어졌다.
돌아서지는 않았지만 그의 어깨가 가늘게 떨리고 있는 것을 애소군은 분명하게 볼 수 있었다.
강한 충격을 받았슴이 분명했다.
그러나 애소군 역시 충격을 받은 상태였다.
(트, 틀림없어...실종됐던 냉공자였어.)
그때 냉검상은돌아섰다.
그의 얼굴은 무서울 정도로 창백하게 변해 있었다.
두 눈에서는 시퍼런 불꽃이 일어났으며, 그것은 걷잡을 수 없는 살기(殺氣)로 빛나고 있었다.
"내 일을 아는 자...아무도 살려둘 수 없다
. 내 동생 유림의 이름과 취옥성의 일을 거론하는 자 역시 살려둘 수 없다."
냉검상은 천천히 다가왔다.
애소군은 냉검상의 모습에 그만 겁에 질리고 말았다.
"다, 당신..."
냉검상은 천천히 다가왔다.
나무에 기댄 채 애소군은 어찌할 바를 모르며 하소연하듯 외쳤다.
"나도 취옥성의 사람이예요..취옥성의 가신이었던 애조관이 나의 부친.
당신과 나는 어려서부터 약혼한 사이예요, 검상..."
그러나 냉검상은 애소군의 말을 듣지 못하는 것 같았다.
애소군의 일 장 앞까지 뚜벅뚜벅 다가온 냉검상은 어느 새 미인혈을 뽑았고, 두 눈의 살기는 짙어지기만 했다.
"취옥성은 이미 내 기억 속에서 죽어 버렸다..
죽어 버린 이야기를 다시 살려내 나를 고통스럽게 하는 자는 모두 죽여 버리겠다!"
애소군의 표정은 하얗게 변해 있었다.
그녀는 냉검상의 눈을 보면서 깨달을 수 있었다.
(진정으로 나를 죽이려고 한다!)
냉검상은 미인혈을 들어올려 애소군을 잔인하게 겨누었다.
애소군은 절박한 심정이 되었다.
(안돼! 죽을 수 없어!)
다급한 심정이된 애소군은 소매 속에서 철선을 꺼내 벼락같이 냉검상을 공격해 갔다.
촤르르륵!
철선은 활짝 펼쳐지면서 무서운 강기를 소나기처럼 퍼부었다.
그러나 미인혈의 광채가 번뜩이는 순간, 철선의 무서운 기세는 씻은 듯이 사라지고
철선은 그대로 반 쪽이 난 채 떨어져 내렸다.
애소군은 더욱 겁에 질려 반 쪽의 철선마저 놓친 채 암담한 심정에 빠져들었다.
(아아...)
냉검상은 무섭게 일그러진 표정으로 미인혈을 수평으로 세웠다.
그리고 차갑게 외쳤다.
"애소군! 잘가라."
다음 순간,
번쩍!
한 줄기의 극렬한 광채가 동공을 파열시킬 듯이 쏘아지며
애소군은 언뜻 요사할 정도로 아름다운 여인의 웃음을 보았다.
그 웃음을 보면서 애소군은 절망했다.
(끄, 끝장이야...)
그녀는 포기하는 심정으로 눈을 감았고, 감은 눈 위로는 처절한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뺨을 타고 흐르는 그녀의 눈물을 보는 순간 냉검상은 자신도 모르게 멈칫했다.
그 바람에 미인혈은 애소군의 머리 위에 스쳐갔고, 애소군의 잘린 머리칼이 무섭게 비산했다.
"......"
냉검상은 입술을 꽉 깨물고 애소군을 보면서 한동안 자신의 마음을 주체하지 못했다.
그는 오래도록 애소군을 보다가 신경질적으로 미인혈을 칼집에 꽂으면서 중얼거렸다.
"다시는.. 다시는 내 눈 앞에 나타나지 말아라! 그리고 오늘 일을 언급하지 말아라.
만약 오늘 일을 언급하고 내 정체를 밝힌다면 반드시 용서치 않으리라!"
이어 찬바람이일도록 몸을 돌린 냉검상은 어둠 속으로 사라져갔다.
어느 새 눈을 뜬 애소군은 망연한 시선으로 냉검상의 뒷모습을 보면서 하염없이 눈물만을 흘릴 뿐이었다.
냉검상의 모습이 완전히 어둠 속으로 묻혀 버리자 애소군은 무너지듯 쓰러지면서 더욱 오열을 삼켰다.
(신이여...)
* * *
별전에는 아직도 결론이 지어지지 않은 듯 설왕설래하고 있었다.
별전으로 돌아온 냉검상은 자리에 앉기가 무섭게 술잔을 들이켰다.
희봉아는 어디를 다녀왔냐고 물어보려다, 냉검상의 어름장 같은 기세에 그만 말이 나오지 않았다.
군웅들은 비교적 화기애애하게 이야기를 하면서 열변을 토하기도 하고 개탄을 하기도 하면서
무림정세에 대해 걱정을 했지만 냉검상의 귀에는 한 마디도 들어오지 않는 이야기들이었다.
냉검상은 그저술을 마실 뿐이었다.
애소군...
애소군이 애조관의 딸이었다니...
그래 어린 시절 취옥성에서 깜찍하게 웃던 계집아이.
아버님의 팔에 안겨 웃음을 터뜨리며 웃던 그 계집아이..
그 계집애가 애소군이었다니?
후후...
참으로 세상의 인연이란 우습구나.
하필이면 그 계집이 나타나 내 아픈 기억을 들추어 내다니..우스워.
모든 것이 우스워!
냉검상은 마지막 나무에 기대어 절망의 표정으로 눈물을 흘리던 애소군의 얼굴이 자꾸 뇌리에 떠올랐다.
애소군의 영상을 지우려는 듯 술을 마시고 또 술을 마셨다.
희봉아는 끽소리 못한 채 근심스러운 얼굴로 냉검상의 술시중을 들 뿐이었다.
너무 마시는 것 같아 걱정스러웠지만, 냉검상의 일그러진 표정을 보고는 아무 소리도 할 수 없었다.
그저 자상한 아내처럼 안주와 술시중을 들 뿐이었다.
금봉 희수빙은옆자리에 앉아 희문연과 함께 다른 군웅들과 담소를 나누면서도 내내 냉검상이 거슬렸다.
어디를 갔다왔는지 돌아오자마자 술을 마시는 것이 마치 도화선에 불이 붙은 폭발물을 보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더욱이 희문연이 간간이 곁눈질을 하면서 질투의 눈빛을 불태우는 것을 보면 더욱 마음이 조여왔다.
(문연...저 아이 분명히 냉상공을 좋아하고 있다.)
자꾸만 불안했다.
아무래도 세 자매지간의 좋던 우의가 깨질 것 같은 기분이었다.
(아무리 착한 봉아라고 하지만 사랑만큼은 양보할 리가 없지 않는가?)
금봉은 남몰래한숨을 내쉬었다.
그때 냉검상 옆으로 취선개가 다가오는 모습을 그녀는 볼 수 있었다.
"허허헛...자네도 제법 술을 마실 줄 아는군?"
냉검상은 힐끗악승을 올려보더니 대답대신 아예 술병을 들어 입에 쑤셔박았다.
그리고는 순식간에 술을 위장 속으로 털어넣는 것이었다.
희봉아는 그저 불안한 표정이었다.
냉검상이 술을 다 마시고 술병을 내려놓자 악승은 냉검상의 어깨를 치며 말했다.
"이 친구야! 늙은이가 아는 척을 하면 앉으란 소리도 못해? 입술이 붙어 버렸어?"
냉검상은 싱긋웃었다.
"앉으십시오."
웬만 하면 반말로 통하는 냉검상이었지만 악승에게만은 그럴 수 없었다.
악승은 엉덩이를 털며 자리를 잡으면서 코를 벌름거렸다.
"이거야 원, 앉아서 절 받기지..."
희봉아는 재빠르게 악승에게 술을 권했다.
"노선배님, 제가 한 잔 올리겠습니다."
악승은 유쾌하게 잔을 받으면서 웃었다.
"허허허...남자 놈은 예의가 눈꼽 반만큼도 없는데 그 마누라는 아주 예의가 바르구나."
악승의 말에 희봉아는 그만 얼굴이 능금빛으로 변해 버리고 말았다.
"어머..."그러나 결코 싫은 기색은 아니었다.
악승은 더욱 유쾌해져서 껄껄 웃었다.
"으허헛.. 농담 한 마디에 얼굴까지 붉어지는 것을 보니 요 계집애가 진실로 이놈을 좋아하는 모양이군!"
희봉아는 아예얼굴을 들지도 못할 지경이었다.
악승은 단숨에 술잔을 비우더니 희봉아에게 한 잔 권했다.
"자자, 우리 귀여운 아가씨도 한 잔 하지?"
겨우 고개를 든 희봉아는 고개를 살래살래 저었다.
"죄송하지만 저는... 술을 못해요."
"무슨 소리? 이 취선개 앞에서는 한 살짜리 어린애도 술을 마셔야 되는 법이거늘, 한 잔도 안 받겠다니.."
무림의 대선배가 권하는 술잔을 마다할 수만은 없는 일이었다.
희봉아는 예를 취해 보이며 술잔을 받았다.
"아암, 그래야지..."
악승은 연신 유쾌하게 지껄이며 희봉아의 잔을 채워 주었다.
희봉아는 호박색의 맑은 술을 한참 내려보다간 용기를 내어 입술에 대고 마셨다.
순간 목구멍이 화끈해지며 그녀는 기침을 토해내야 했다.
"콜록...콜록..."
악승은 껄껄 웃었다.
"허허헛... 금봉문의 지다성(智多星)이 술 한 잔 못 이기다니..
하지만 이 늙은 거지도 처음부터 술을 잘 마신 것은 아니니까.. 허허허!"
그저 한 모금 정도가 속으로 들어갔을 뿐인데 희봉아는 금방 얼굴이 발그레져서 숨을 색색 몰아쉬었다.
그 모습은 더욱 아름답고 귀여운 것이었다.
악승은 희봉아를 힐끗 보다가 술잔을 들었는데, 조막만한 술잔이 영 마음에 안 드는지
대뜸 등 뒤에 메고 있는 거대한 호로병을 꺼내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호로병의 마개를 따고는 그대로 번쩍 들어 입에 대고 마시는 것이 아니라, 들이 붓는 것이었다.
(세상에... 어쩜!)
희봉아가 너무기가 막혀 입을 떡 벌리고 있을 때,
악승은 어느 정도 술을 마셨는지 냉검상에게 불쑥 호로병을 내밀었다.
"자네도 한 잔 마셔!"
마다할 리가 있겠는가! 천산에서도 술 하면 냉검상이 아니었던가?
냉검상은 호로병을 받아들었다.
순간, 그는 그만 호로병을 놓칠 뻔하면서 깜짝 놀라고 말았다.
호로병은 사기로 된 것이 아니고 강철로 만들어진 것이었다.
무게만 해도 수천 근이 나갈 무게였다.
(이...이걸 메고 다니면서 이걸로 술을 마셨단 말인가?)
기가 막힌 일이었다.
웬만한 고수라도 들고 다니기조차 부담스러운 것을 술병으로 사용하다니..
그러나 무거운 강철 술병을 바라만 보고 있기에는 냉검상의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좋다!)
냉검상은 내공을 끌어올려 번쩍 강철 호로병을 들어 자신의 입술에 대었다.
그리고는 주저없이 벌컥벌컥 술을 들이키는 것이었다.
순간 악승의 눈에는 이채가 스쳐가고 있었다.
한동안 술을 마신 냉검상은 입술을 떼어내고는 천산에서처럼 소매로 입가를 쓰윽 닦으면서
악승에게 호로병을 넘겨주었다.
"허허헛...내 오랜만에 진짜 술벌레를 만났군."
악승은 호로병을 받기가 무섭게 다시 술을 들이키기 시작했다.
그리고 한참을 술을 마신 후에는 다시 냉검상에게 권했다.
냉검상은 마다하지 않고 호로병을 받아 술을 마셨다.
악승의 호로병에는 기실 열 말에 가까운 양이 들어가는 것이었다.
이런 호로병이 몇 번이 채워지도록 악승과 냉검상은 질세라 술병을 교환하면서 술을 들이키는 것이었다.
냉검상과 취선개 악승이 아무리 술에 대가라 한들 이렇게 마셔대는 데야 취하지 않을 리 없었다.
열 말이 족히 들어가는 호로병을 열 번 정도를 비우자 군웅들의 시선은 두 사람에게 향한 채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고 있었다.
(늙은 술귀신과 젊은 술귀신이 만났구나.)
거의 모든 사람들이 이런 눈빛이었다.
그러나 악승은 사람들의 이목을 조금도 개의치 않고 다시 술을 마신 다음에
술병을 냉검상에게 넘겨 주며 혀꼬부라진 소리를 했다.
"크윽...정말 대단하구나.
백 칠십 년 전에 고향에서 함께 술을 먹다가 뒈진 친구 놈을 빼고는 네가 단연 제일이다!"
악승의 눈은 몽롱하게 풀려 있었다.
냉검상의 눈빛도 많이 풀어져 있었다.
냉검상은 호로병을 번쩍 들어올리며 말했다.
"노개, 난 아직 멀었소, 아무래도 당신은 많이 취한 것 같소이다."
"클클...어린 놈이 이제는 아예 맞먹으려는구나. 좋아, 좋아..
술친구는 격차가 없다고 했거늘..크윽!"
악승은 연신 신트림을 토해냈다.
이때 애소군은 흑의문생과 함께 별원으로 들어와 우연히 냉검상의 뒤쪽을 걸어가고 있었다.
호로병을 입으로 가져가던 냉검상은 돌연히 술병을 기울여 술잔에 따르더니
술잔을 집어들어 냅다 애소군의 얼굴을 향해 끼얹는 것이었다.
"빌어먹을 놈! 아직도 이곳에서 얼쩡거리느냐?"
졸지에 술세례를 받은 애소군은 멍청한 표정이었다.
군웅들도 대다수 놀란 기색이었지만 냉검상이 술주정을 하는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애소군의 옆에 있던 흑의문생은 냉검상을 그대로 지나칠 수 없었다.
그는 표정을 찡그리며 짙은 눈썹을 꿈틀했다.
"냉검상! 명성을 조금 얻어 기고만장하여 눈에 보이는 것이 없는 모양이구나!"
외침과 함께 그는 냅다 냉검상의 턱을 향해 발길질을 했다.
"후후... 성격이 급한 친구군."
냉검상은 묘한웃음을 흘리며 앉은 채로 몸을 눕혀 흑의문생의 발길질을 피해 내었다.
동시에 몸을 앉은 채로 반회전시키면서 오히려 흑의문생의 가슴팍을 노려가는 것이었다.
흑의문생은 흠칫 뒤로 물러나더니 자존심이 상한 듯 크게 소리치며 득달같이 냉검상을 덮쳐갔다.
"이놈! 너의 오만함을 꺾어 주겠다!"
독수리처럼 냉검상을 덮쳐가면서 벼락같이 쌍장을 교차시켰는데 흑의문생의 장심에서는
계란만한 황금색 반점이 나타나면서 수천 개의 벼락이 치는 듯한 가공할 기세가 뻗어 나오는 것이 아닌가?
빠빠빡!
마치 금빛 광채가 거미줄을 만들어 내는 듯한 장세였다.
그 수법을 본 소림의 굉지대사는 탄성을 터뜨렸다.
"금황지주장(金皇蜘蛛掌)!"
굉지대사의 옆에 있던 태허진인도 처음보는 무공인지 급히 물었다.
"대사께서 아는 무공이오?"
"그렇소. 저 장법(掌法)은 황실친위대의 고수들에게 비전되는 황실의 무학이오.
몇 년 전 우연히 견식한 적이 있는데.. 저 청년은 내가 본 누구보다 더욱 노련하게 펼치고 있구료."
굉지와 태허진인의 옆에 있는 해연도 익히 그 무공을 알고 있는지 묘한 눈빛으로 응시하고 있었다.
이때 냉검상은 자신을 향해 빗발치듯 덮쳐오는 금빛 장세를 보고는 용수철처럼 몸을 일으켜
그대로 우장을 빙글 돌리며 뻗어내렸다.
장세가 심상치 않음을 깨닫고 옥정기공을 십성이나 운용하여 마주쳐낸 것이었다.
쿠쿠우..
흑의문생의 장세와 달리 냉검상의 장세는 오색의 은은한 서기를 뿌리며 금빛 장세를 맞이해 나갔다.
다음 순간,
퍼펑!
요란한 폭음성이 별전을 뒤흔들었다.
"우- 욱!"
흑의문생은 고통에 찬 신음성과 함께 뒤로 십여 걸음이나 밀려나 벽에 둔중하게 부딪쳤다.
겨우 중심을 잡고 앞으로 한 걸음 나서다간 그만 피를 왈칵 토해내고는 주저앉듯 쓰러졌다.
애소군은 급히 흑의문생에게 다가가 부축했다.
"초형!"
흑의문생은 애소군의 부축을 뿌리치면서 냉검상을 무섭게 노려보았다.
흑의문생과는 대조적으로 냉검상은 그 자리에 우뚝 서 있는 상태였다.
흑의문생은 가슴을 움켜쥔 채 외쳤다.
"냉검상! 오늘의 이 원한을 반드시 기억해 두겠다.
두고봐라. 청산이 푸르고 녹수가 흐르는 한 반드시 복수를 하겠다!"
흑의문생은 다시 한 번 피를 토해내더니 비틀거리며 별전을 빠져나갔다.
애소군은 잠시 원망스런 눈빛으로 냉검상을 보다간 급히 흑의문생의 뒤를 따랐다.
그들이 사라지는 모습을 보면서 냉검상은 앙천광소를 터뜨리는 것이었다.
"으하하하하!"
굉지대사는 냉검상의 모습을 보면서 눈살을 찌푸렸다.
"쯧쯧... 실로 안하무인이로다."
굉지대사의 말을 듣고 있는 해연선사의 눈빛도 무섭게 변해갔다.
(맞다. 저런 성격은 결코 우리에게 이득이 될 리가 없다. 오히려 십이비천신마보다 더 큰 위험을 지닌 자다.)
냉검상은 한참웃다가 돌연 자신을 직시하는 군웅들의 차디찬 시선을 의식했는지 웃음을 뚝 그쳤다.
그리고는 몸을 일으켜 비틀거리며 별전을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희봉아만이 안타까운 듯 냉검상의 뒤를 쫓았다.
취선개 악승은냉검상의 뒷모습을 보다가 답답한 듯 술호로를 집어 들었다.
(메마른 놈이야. 인간에게 가장 필요한 원초적인 정(情)마저도 상실해 버린.
마치 황야에 홀로 버려진 늑대처럼 잔인하고 외로우며..뜨거운 인간의 감정을 잃어버린 황무지 같은 놈이야.)
악승은 가슴이무거운 듯 술호를 들어 벌컥벌컥 술을 들이키기 시작했다.
그러나 아무리 술을 들이켜도 그의 무거운 마음은 해소되지 않았다.
(백리종... 그가 그토록 신경을 써서 죽이려는 상대가 궁금해서 찾아온 것이거늘..)
악승은 계속 술을 들이켰다.
숨 한 번 쉬지 않고 완전히 호로병을 비운 악승은 호로병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백리종...자네는 저 아이를 악(惡)이라고 단정하고 있지만 하나.. 나는 자네와 생각이 다르다.)
악승은 엉거주춤 일어서며 술호로를 등에 달았다.
그리고 느릿하게 별전을 빠져나가며 콧노래를 흥얼거리는 것이었다.
"메마른 땅에도.. 식물은 자랄 수 있고, 꽃이 필 수 있거늘.."
* * *
하늘도 돌고 땅도 돌고 사람도 돌았다.
냉검상의 눈 앞은 모두 돌아가고 있었다.
애소군의 일로 마신 술이 취해도 너무 취한 상태였다.
냉검상은 만취한 상태로 희봉아에게 부축되어 방 안으로 들어왔다.
냉검상은 몸의중심조차 잡을 수 없을 정도여서 희봉아가 침상으로 인도해 가자 그만 벌렁 드러눕는 것이었다.
누운 채로 올려보는 천정이 빙빙 돌아갔다.
냉검상은 식은땀까지 흘려가며 눈을 깜박거렸지만 술기운을 어쩔 수는 없었다.
오직 희봉아만이 안타까움에 젖어 꿀물을 타와 먹이고, 비단수건을 찬물에 적셔 땀을 닦아 준다 난리였다.
그러나 꿀물을 먹고 나니 오히려 속이 메스꺼웠다.
울렁이는 속을 주체하지 못하고 냉검상은 몸을 일으켜 부축하는 희봉아도 뿌리치고 변소로 가서 한 바탕 토해내었다.
먹은 것은 오직 술 뿐이어서 토해내는 것도 오직 술 뿐이었다.
한 바탕 토사를 하고 난 냉검상은 욕실로 가서 찬물에 머리를 담그자 조금 술이 깨면서 정신을 차릴 수가 있었다.
그러나 술기운으로 인해 온몸이 무겁고 나른함에 어쩔 수가 없어 다시 침상에 벌렁 누웠다.
희봉아는 냉검상이 토한 것을 알고 더욱 안절부절하지 못했다.
그녀는 연신 냉검상의 식은땀을 닦아 주고, 몸을 주물러 주고 했다.
냉검상은 속이 약간 편함을 느끼면서 희봉아를 보았다.
자신을 위해 애써 주는 그녀가 사랑스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여인.. 남자를 최대한으로 편하게 만들어 준다.)
문득 냉검상은부산하게 움직이느라고 느슨해진 앞섶 사이로 언뜻 희봉아의 젖가슴이 뽀얗게 보이는 것을 느꼈다.
젖가리개로 바싹 조였지만 풍만한 가슴은 반쯤 삐져나와 있었다.
갑자기 희봉아의 속살을 훔쳐보게 된 냉검상은 희봉아를 부수고 싶다는 욕망이 치밀어올랐다.
술기운 때문일까?
단 한 번도 욕망의 대상으로 생각하지 않았던 희봉아의 육체에 욕정을 느낀 것이었다.
희봉아는 그런것도 모르고 냉검상의 팔을 주무르다가 반듯하게 눕히면서 말했다.
"좀 편하게 누워 보세요. 예?"
냉검상은 팔을뻗어 희봉아를 낚아챘다.
"어머!"
희봉아는 놀란탄성을 내지르며 그대로 냉검상의 품으로 딸려왔다.
냉검상은 그대로 그녀를 안은 채 빙글 돌아섰다.
그러자 희봉아는 그대로 냉검상에게 깔린 형상이 되었다.
"!"
희봉아는 놀란표정으로 냉검상을 올려보았다.
냉검상의 두 눈은 뜨거운 불길로 이글이글 타오르고 있었다.
짙은 술 냄새가 코 끝을 찔렀다.
그녀는 직감적으로 느끼고 냉검상을 밀쳐내었다.
"시, 싫어요!"
그러나 그녀의행동은 이미 불붙기 시작한 냉검상의 욕정에 기름을 끼얹는 격이었다.
냉검상은 완강하게 거부하는 희봉아의 어깨를 잡고 무섭게 노려보았다.
"아...안돼요... 이렇게는..."
애처롭게 애원하는 그녀의 모습은 오히려 야성을 자극하는 것이었다.
냉검상은 한 손으로 그녀의 장삼 앞자락을 잡고 그대로 당겨 버렸다.
부욱!옷이 길게 찢어졌다.
냉검상은 거칠 것이 없이 희봉아의 젖가리개마저 풀어 버렸다.
패앵...
소리가 날 정도로 풍만한 젖가슴이 그대로 노출되었다.
희봉아는 창백하게 질린 채 몸을 뒤틀어 보았지만 냉검상의 완강한 힘에 눌려 그 동작은 미약하기만 했다.
냉검상은 더욱 욕정을 느끼며 희봉아의 입술을 정복하려 했다.
그러나 희봉아는 필사적으로 도리질을 하며 냉검상을 회피했다.
그럴 수록 냉검상의 행동은 거칠어 졌고, 급기야 강제로 그녀의 입술을 부비는 것이었다.
일단 입술을 정복한 냉검상의 손은 우악스럽게 희봉아의 젖가슴을 움켜쥐고는
한동안 젖꼭지를 애무하다간 치마 속으로 쑤욱 들어갔다.
그리고 허벅지 사이로 손을 넣으려는 순간, 완강하게 조여져 있는 허벅지를 느껴야 했다.
냉검상은 강제로 손을 우겨넣었다.
까실한 체모의 느낌과 함께 여인의 가장 소중하고 민감한 부분이 손 끝으로 느껴졌다.
그때 문득, 냉검상은 입술 사이로 찝찔한 액체가 스며드는 것을 느끼고는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들었다.
"!"
희봉아는 울고있었다.
모든 것을 체념한 듯 감은 눈 위에 서럽도록 긴 속눈썹을 적시면서 그녀는 울고 있었다.
그러나 마지막 반항처럼 이미 손이 침범해 있는 허벅지를 꽈악 조이고 있었다.
갑자기 모든 욕망이 소나기를 맞은 모닥불처럼 꺼져 버렸다.
냉검상은 그녀의 치마 속에서 손을 빼내고 벌떡 몸을 일으켰다.
무엇인가 엉망진창으로 엉켜 버린 기분이었다.
아니 참담한 심정이었다.
이제까지 느껴보지 못한 패배감이 전신을 휩쓸었다.
희봉아는 돌연한 냉검상의 행동에도 아랑곳없이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오열했다.
냉검상은 더 이상 그녀를 보고 있을 수가 없었다.
그는 홱 돌아서서 침상 모서리에 기대 있는 자신의 칼을 잡더니 그대로 방을 나가 버렸다.
***
한 조각 편월이 기우뚱 하늘 끝에 걸려 있었다.
어둠 속을 헤치고 불어오는 바람이 제법 서늘했고, 그 어둠 속을 걷는 냉검상은 이미 술이 반쯤은 깨어 있었다.
한동안 걸음을 걷던 냉검상은 문득 하늘을 올려보았다.
별빛도 달빛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오직 막막한 어둠 뿐이었다.
어둠을 바라보자니 웃음만 나왔다.
"쿡!"
우스웠다. 이유도 없이 그냥 우스웠다.
"쿡쿡쿡...."
희봉아의 울던모습이 눈 앞에서 어른거렸다.
(바보 같은 놈.. 강제로 했으면 결코 거부하지는 않을 여자인데, 왜 중간에서 멈춰?
그리고 이 꼴이 무어냐? 이제까지 모든 것에서 주저함이 없었던 네가 이처럼 참담한 패배감 속에
초라해진 네 꼴이 무엇이냐? 검상... 말해 봐라? 지금의 네 꼴이 무엇이냐?)
메마른 웃음만더욱 흘러나왔다.
한참을 툴툴거리며 웃던 냉검상은 인기척을 느끼고는 불현듯 뒤를 돌아보았다.
푸른 실처럼 흘러내리는 달빛 아래 한 여인이 서 있었다.
가볍게 화장까지 하고 요염한 자태로 눈웃음을 흘리고 있는 혈봉 희문연의 모습이었다.
희문연은 냉검상의 시선을 받자 까르르 웃었다.
"호호호... 무슨 일로 봉아를 놔두고 여기에 홀로 외롭게 있는 거죠?"
냉검상은 희문연을 보면서 생각했다.
(그래... 내게는 이런 유의 계집애가 더 어울려.)
냉검상은 약간희문연쪽으로 접근하며 말했다.
"화장을 했군."
"흐흥... 예쁘게 보이고 싶으니까! 당신이 혹시나 나올까 하고 배회 중이었는데 다행히 예감대로 됐어요."
냉검상은 미묘하게 웃었다.
"동생 때문에 더 적극적인 행동은 못했군."
희문연은 부인하지 않았다.
"아무래도 봉아를 의식하지 않을 수는 없지요.
하지만 봉아 곁에 있는 당신을 보고 참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예요."
"후후후..."냉검상은 희문연에게 다가갔다.
그녀는 생글생글 웃으면서 냉검상이 다가오기를 기다렸다.
냉검상은 손을 뻗어 희문연의 턱을 치켜들면서 말했다.
"너는 언제나 피가 뜨거워... 선천적인 요부야."
"다른 사람에게는 몰라도 당신에게만은 괜찮은 일이지요. 아니 당신에게는 더 뜨거운 탕녀가 될 수도 있어요."
말을 하면서 한 눈을 찡긋해 보이는 것이었다.
냉검상은 희문연의 눈웃음을 보면서 욕정을 느꼈다.
희봉아의 눈물에 식어 버렸던 욕정이 다시 꿈틀대기 시작한 것이었다.
희문연도 냉검상의 눈빛을 보면서 그것을 느낄 수 있었다.
희문연은 두 눈을 사르르 감으면서 흰 치아가 살풋 드러나게 입을 벌렸다.
그 모습은 더없이 육감적이었다.
냉검상은 희문연을 보면서 싱긋 웃었다.
(그래 잊자...모든 것을 이 순간만은 철저하게 잊어 버리자!)
냉검상은 그대로 희문연의 입술을 빼앗아 버렸다.
그리고는 서두르는 어린아이처럼 성급하게 그녀의 앞가슴을 헤쳤다.
단추가 툭툭 떨어지면서 그의 손은 더 이상 풍만할 수 없는 희문연의 젖가슴을 거칠게 움켜쥐었다.
"아아..."
희문연은 단내나는 신음을 토하며 냉검상에게 매달렸다.
그녀의 육체는 금방 불덩이처럼 뜨거워졌다.
그야말로 선천적으로 뜨거운 피를 가진 여인이었다.
냉검상의 손에 질세라 희문연의 손도 뱀처럼 꿈틀거리며 어느 새 냉검상의 하복부를 더듬고 있었다.
냉검상은 하체가 뿌듯해짐을 느끼며 희문연의 가슴 앞자락을 벌리고 젖가슴으로 입을 가져갔다.
"아하... 아..."
희문연은 고개를 가파르게 젖힌 채 신음을 토했다.
냉검상은 젖가슴을 격렬하게 입으로 애무하면서 그녀의 하체를 더듬었다.
여인의 비소는 뜨겁게 젖어 있었다.
냉검상의 손과 입술이 움직일 때마다 희문연은 교성을 내질렀고, 전신을 꿈틀거렸다.
냉검상은 더욱 거칠게 손을 움직이며 젖꼭지를 잘근 깨물었다.
"아.... 아파!"
약간 찡그린 콧등에 주름이 살짝 잡히는 모습은 더욱 더 요염하게 보였다.
냉검상은 젖가슴에서 입술을 떼고 희문연의 얼굴을 보다가 한 손으로 그녀의 뒷머리를 거칠게 움켜쥐었다.
그리고 다른 한 손으로 치마를 들어올려,
고의를 밑으로 내린 다음 그녀의 한 쪽 다리를 들어올리고 자신의 하체를 밀착시켰다.
"으흑..."
순간적으로 희문연은 몸을 떨면서 냉검상의 뒷머리를 두 손으로 움켜쥐었다.
냉검상은 희문연을 나무로 몰아붙인 채 허리를 격렬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희문연은 고개를 발딱 젖힌 채 연신 가쁜 숨결과 함께 교성을 터뜨렸고 그런 그녀를 고문하듯
냉검상은 더욱 격렬하게 몸을 움직였다.
***
얼마나 시간이지났을까?
희문연은 벌어진 앞섶을 가릴 생각도 없는 듯 나른한 표정으로 나무에 기대어 앉아 있었다.
그녀는 몽롱한 시선으로 옷을 추스르고 있는 냉검상을 올려보며 붉은 멍울이 진 젖가슴을 어루만졌다.
"너무 했어요...... 온몸이 멍들고, 등이 아마 다 까졌을 거예요. 이렇게 심하게 다루는 법이 어딨어요?"
얄미울 정도로애교스럽게 눈을 흘겼지만, 냉검상은 무심히 옷을 추스를 뿐이었다.
희문연은 조용히 몸을 일으켜 앞섶을 챙기며 냉검상에게 물었다.
"봉아에게도 이렇게 해요?"
"봉아?"
"그래요. 잔인한 사람..."
냉검상은 피식실소를 머금었다.
그리고 간단하게 말했다.
"그녀하고는 안 했다. 그녀하고는 단 한 번도 관계를 맺은 적이 없다."
희문연은 불신의 빛을 자욱하게 보였다.
"설마.. 거짓말이죠? 후후.. 당신 같은 야수가 봉아 같은 귀여운 사슴을 그냥 둘 리 있어요?"
냉검상은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사실이야."
"왜요? 이렇게 하면 그 아이가 죽어 버릴까 두려워서인가요?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나요?"
희문연은 냉검상의 팔에 매달려 자신의 젖가슴을 바싹 밀착시키면서 요염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러나 냉검상은 희문연의 팔을 뿌리치면서 말했다.
"알고 싶으면 말해 주지. 그녀를 노리개로 만들고 싶지 않아서야."
"노리개?"
순간적으로 희문연의 표정이 묘하게 변했다.
"그럼 내가 노리개였단 말이예요?"
"그건 내가 대답할 필요가 없다. 네 스스로 아무렇게나 생각해도 되니까."
말을 한 냉검상은 몸을 돌려 걸어갔다.
희문연은 그만 다급한 심정이 되어 황급히 냉검상의 앞을 막으면서 말했다.
"자, 잠깐만... 당신 나를 어떻게 생각해요? 이제 나를 어떻게 할 셈이예요?"
냉검상은 무표정하게 희문연을 보며 말했다.
"어떻게 하다니?"
"다, 당연히...당신은 나를 책임져야 하잖아요?"
냉검상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희문연의 코를 살짝 튕겼다.
그리고 말했다.
"이봐, 희문연 소저. 나는 그런 말을 제일 싫어해. 구속 따위는 나는 원치 않아. 딱 질색이야."
희문연은 그만질린 표정이 되어 입술을 부들부들 떨었다.
"그럼....나는..."
"그만, 그만. 네가 나를 원했고, 나는 너를 필요로 했지. 그래서 서로가 필요로 만났고 즐겼을 뿐이야
. 그 이상은 복잡하게 문제삼을 것이 없잖아?"
희문연은 창백한 표정 위로 참을 수 없는 모멸감을 떠올렸다.
"어, 어떻게 그런 말을... 함부로..."
"그럼 너는 나에게 무엇을 원하느냐?"
"......"
희문연은 더 이상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그녀는 육체의 관계로써 냉검상을 잡아둘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결코 냉검상은 그녀에게 잡혀 있을 인물이 아니었다.
냉검상은 아무런 말도 못하고 눈물을 글썽이는 희문연을 한동안 바라보다가 그대로 몸을 돌려 걸어갔다.
희문연은 냉검상의 차디찬 등을 바라보다간 그대로 외마디 비명처럼 소리를 질렀다.
"이...짐승 같은 놈아!"
그리고는 냉검상의 등을 향해 그대로 공격을 해 갔다.
냉검상은 이미 예측이라도 한 듯 살짝 몸을 피해 공격을 젖혀내었다.
그러자 희문연은 맥없이 바닥으로 쓰러지고 말았다.
쓰러진 희문연은 참을 수 없는지 격렬한 울음을 터뜨리는 것이었다.
아무리 피가 뜨거운 그녀도 여자로서 여린 심정을 어쩔 수는 없는 것이었다.
냉검상은 쓰러져 있는 희문연을 향해 무정한 음성으로 말했다.
"분명히 말을 해 두겠다. 나는 너를 좋아하고 있지 않다."
그리고는 더이상 희문연에게 미련을 두지 않고 걸어갔다.
등 뒤에서 희문연의 애절한 울음소리가 들리건만 냉검상은 단 한 번도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그러나 냉검상은 스무 걸음을 가기도 전에 걸음을 멈추어야 했다.
그의 길을 막고 서 있는 한 사람 때문이었다.
냉검상이 길을 막고 서 있는 인물은 바로 금봉 희수빙이었다.
희수빙은 더없이 싸늘한 표정으로 냉검상을 바라보고 있었다.
"냉공자... 나는 당신을 군자로 보았는데 아무래도 내가 사람을 잘못 본 모양이군요?"
표정만큼이나 서릿발 같은 음성이었다.
"......?"
"봉아와 사귀면서 문연을 유혹해 그 아이의 몸을 망치다니..."
냉검상은 살짝눈살을 찌푸렸다.
"희씨 자매 중에서 막내를 빼놓고는 모두가 돌머리들이군."
희수빙은 어이없는 표정이었다.
냉검상은 그런 그녀를 똑바로 바라보면서 말을 이었다.
"아까 그 숲속에서 희문연과 관계하는 것을 보면서 당신이 숨어 있었던 것을 나는 알고 있었다."
"그, 그걸 알면서 문연과 그 짓을......"
"그럼 소저는 왜 우리 두 사람을 말리지 않았지?"
"......"
희수빙은 오히려 말문이 막혔다.
"금봉소저, 확실하게 이야기를 하겠어. 나는 봉아를 건드리지 않았다
. 그리고 희문연은 내가 유혹한 게 아니라 스스로 나를 원해서 유치하게 연극까지 꾸민 장본인이야.
나를 원해서 꼬리치는데 사내인 내가 가만 있을 리가 있는가?"
희수빙은 입을봉한 듯 아무 말도 못한 채 안색만이 여러 차례 변할 뿐이었다.
그러다가 저 멀리 있는 희문연을 보다가 나직한 탄식을 터뜨렸다.
"그래요. 당신의 잘못이 아니예요. 문연의 저돌적인 행동이 능히 그대를 유혹했을 거예요.
하지만 이제까지 우리 세 자매는 부모없이 자라오며 누구보다 우애가 있었고, 행복했어요
. 하지만 당신 때문에 자매의 우애가 모두 깨질 것 같아 두려워요.
차라리 우리 자매곁을 조용히 떠나 주세요."
냉검상은 잠시희수빙을 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떠나 주지. 나 역시 희씨 자매들 속에서 더 이상 지내고 싶은 마음도 없으니까!"
냉정하게 말한냉검상은 희수빙을 지나쳐 어둠 속으로 걸어갔다.
한참 걸음을 옮겨 밖으로 통하는 문까지 온 냉검상은 문득 뒤를 돌아보았다.
저 멀리 아직 불이 꺼지지 않은 자신의 거처가 눈에 들어왔다.
냉검상은 희봉아의 모습을 떠올리고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봉아, 미안하다. 언젠가 만나게 되면 네 얼굴에 밝은 웃음을 띄울 수 있게 해 주면 좋으련만..)
잠시 깜박이는불빛을 보던 냉검상은 몸을 돌렸다.
그리고 더 이상의 미련이 없이 악양제일루를 떠났다
계 속 |
|
첫댓글 감사합니다
감사...
감사합니다.😘
즐감.
감사합니다
감사 드립니다
즐감하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