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태백산 천제단으로 오르는 취재팀. 모난 구석이라고는 찾아보기 힘들다.
|
염치마저 내팽개치는 집단문화
깃대배기봉에 도착하자 해는 정수리를 벗어나기 시작한다. 조릿대밭 사이로 참나무를 세워둔 깃대배기봉은 봉우리라고 할 만한 분위기가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사실 이곳에서부터 천제단 직전까지는 기복이 거의 없는 구릉 지대 같다. 일설에 의하면 측량용 깃대 때문에 이름이 유래됐다 하는데, 독립된 봉우리라기보다는 길고 둥두렷한 태백산 정상부의 남쪽 들머리라고 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또한 깃대배기봉부터 백두대간은 남한 구간이 끝날 때까지 강원도 땅을 지나게 된다.
깃대배기봉에서 장군봉(1,566.7m)까지 약 4Km의 대간 길은 산책로라 불러도 좋을 호젓한 분위기다. 하지만 동네 뒷산의 산책로와는 전혀 다른 차원이다. 부소봉까지 끊임없이 펼쳐지는 조릿대밭 사이로 참나무들은 자연의 손만이 빚을 수 있는 눈꽃을 피워 올려놓고 있다. 해발 1,500m를 넘나드는 하늘길은 특별하다.
부소봉 마루의 서쪽을 비껴가면서부터는 주목의 시린 기운이 고산 특유의 고적감을 안겨 준다. 주목 사이로는 철쭉이 무리지어 있다. 철쭉의 앙가슴에서 봄을 예감해 본다. 그것만으로도 나는 행복하다.
▲ 만항재에서 함백산으로 오르는 길에서 만난 눈꽃 터널.
그러나 부소봉을 내려서면서부터 나의 행복감은 산산이 부서지기 시작한다. 천제단에서 하단으로 내려서는 사람들의 무례하고도 난폭한 행태 때문이다. 대부분 관광객으로 보이는 그들에게서 내리막을 걷는 사람의 양보 같은 것은 조금도 기대하지 않았지만, 등산로치고는 넓은 길의 가운데를 차지하고는 거의 폭력 수준으로 나를 밀쳐낸다.
그 가운데서 나는 어떤 규칙을 찾아냈다. 혼자서, 혹은 부부끼리 온 사람들은 그렇지 않았다는 점이다. 주로 단체로 온 사람들이 그랬다. 그런데도 옷들은 하나같이 전문 클라이머 뺨치는 수준이다. 제대로 갖춰 입은 외양과는 저 아득한 거리의 가난한 산행문화는 언제나 고쳐질까. 아니 이건 산행문화의 문제가 아니다. 떼거리만 지으면 예의는 두고라도 염치마저 내팽개치는 집단문화의 문제다.
천제단 일대는 장터보다 더 북적댄다. 천제단에서는 돼지머리를 놓고 ‘하늘을 팔고’ 있다. 돈을 놓고 절을 하게 하는 솜씨는 가히 하늘을 찌르는 수준이다. 차마 그곳으로 발을 들여놓을 수 없다. 로또 당첨이든 가족의 건강이든, 돼지 머리에라도 빌지 않을 수 없는 사람들의 뒷모습이 너무 애절해 보여서다. 그들을 비난하기도, 동정하기도, 따라하기도 다 힘들다.
신라 때부터 태백산(북악)은 토암산(동악)·계룡산(서악)·지리산(남악)·부악(중악, 팔공산)과 함께 오악의 하나로 기림을 받았고, 고래로부터 하늘에 제사를 올리던 곳이다. 이런 곳이 싸구려 장사의 수단이 되는 것은 곤란하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은 고려 때의 사람인 최선(崔詵)의 예안 용수사기(龍壽寺記)를 인용하여 ‘천하의 명산은 삼한에 많고, 삼한의 명승은 동남에 가장 뛰어나다. 동남에서는 태백이 가장 뛰어나다’고 적고 있다.
태백산이 영산으로 기림을 받는 것은, 환인(桓因)의 서자이자 단군의 아버지인 환웅이 하늘에서 내려와 나라를 세운 곳이라는 삼국유사의 기록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삼국유사의 기이편을 보면, ‘환웅은 무리 3천 명을 거느리고 태백산 꼭대기의 신단수에 내려와서 이곳을 신시(神市)라 했다’고 적혀 있다. 하지만 일연 스님은 분명히 태백산 옆에 ‘지금의 묘향산’이라 병기했고, 지리적·역사적 의미로 봤을 때는 ‘백두산’이 바로 그곳이라는 게 많은 학자들의 견해다.
▲ 눈 덮인 매봉산 고랭지 채소밭. 겨울은, 푹 쉬어가는 계절이다.
화방재에 도착하자 어둑살이 돋기 시작한다. 계획보다 한나절쯤 지연이 된 것이다. 올 겨울 제대로 눈을 밟아보지 않아서 상황을 만만하게 본 결과다. 계획대로라면 함백산 아래 만항재에서 야영해야 한다. 계획을 수정하지 않을 수 없다. 체력도 바닥에 가까운 상태다. 계속 밀어붙였다가는 고생은 고생대로 하고 목적도 이룰 수 없을 것 같았다. 우리는 미련 없이 계획을 수정했다. ‘집’으로.
▲ 함백산 오름길. 한밝은 세계로 오르는 길.
가끔은 허리 넘는 눈밭을 허우적거리며
이틀 뒤 눈발을 해치며 다시 화방재에 섰다. 상황은 더 좋지 않다. 눈은 더 몸집을 부풀리고 있는데 바람까지 거칠게 등성마루로 눈을 몰아붙이고 있다. 그렇다고 또 물러설 수도 없는 상황이다. 대간 종주자들이 붙여 놓은 표지기들이 유혹적으로 흔들린다.
화방재(930m)에서 함백을 향하는 대간 트레일은 도로 절개면 동쪽의 민가 사이로 나 있다. 폐가가 된 한 집의 마루에 빈 소주병과 종이컵이 산마을의 오늘을 대변하는 설치미술처럼 보인다.
낙엽송숲을 지나는 초입은 평화롭다. 조금 전의 스산했던 마음을 다 내려놓게 할 만큼. 10분쯤 지나 묘 한 기가 보이는 곳에서부터 수리봉(1,214m)까지는 된비알이다. 이곳에서부터 창옥봉(1,238m)을 지나 만항재까지는 까탈스럽지 않다. 만항재(1,341m)는 포장도로가 지나는 고갯마루로는 우리나라 최고 높이다. 태백시와 정선군 고한읍을 잇는 고개로 414번 지방도가 지난다.
한때 이곳은 ‘검은 불’의 땅이었다. 이 일대 대부분이 탄광이었던 것이다. 산경표에는 함백산을 대박산(大朴山)으로 적고 있는데, ‘크게 밝은 산’이라는 뜻이겠다. 산업화 초기 ‘대박’의 꿈을 안고 전국에서 모인 광부들로 하여 태백·고한·사북은 또한 불야성을 이루었으니, 대박산은 예언성 지명이었을까. 석탄 산업이 막을 내리면서 도시 자체가 빛을 잃어 가다가 카지노가 들어서고부터는 ‘잭팟’이라는 대박을 노린 전국의 꾼들이 모여들고 있다. 참으로 끈질긴 대박의 꿈이다.
만항재에서 대한체육회 선수촌으로 가는 도로를 만나기까지의 대간길은 (눈만 아니라면) 편안하다. 하지만 눈길은, 한 걸음 한 걸음을 최후의 걸음처럼 만들어 놓는다. 사실 무릎을 살짝 넘는 깊이가 걸을 수 있는 상한이다. 허리까지 묻힐 정도가 되면 운행은 불가능하다. 평소 한 시간 거리에 한나절이 소요되니까.
가끔 허리를 넘는 눈에 묻혀 허우적거린다. 바람의 장난이다. 움푹 들어간 부분을 눈으로 평평하게 만들어 놓았기 때문이다. 그래도 대부분은 무릎 정도다. 걸을 만하다는 얘기다. 신설이어서 정강이를 팍팍 때리지 않는 것만도 고맙다. 함백산 정상 직전은 코에 눈이 닿을 정도로 가파르다. 그러나 갓 피어오른 눈꽃을 따먹는 즐거움은 최면제이자 진통제이다.
함백산(1,572.9m) 정상은 큰 바윗덩어리를 얼기설기 쌓아놓은 형국이다. 불끈 솟은 그 기운은 남으로 태백, 북으로 매봉·두타·청옥의 기운을 응축시켜놓은 듯하다.
이제 곧 만나게 될 중함백은 이내 속에 잠겨 있다. KBS와 MBC의 중계시설을 뒤로 하고 철조망이 둘러쳐진 주목 군락과 함께 평탄한 길이 계속되다가 불쑥 솟구치면 중함백이다. 중함백에서부터도 그리 큰 기복 없이 오르내리면서 전체적으로 200m 정도 고도를 낮추었다가 은대봉(상함백·1,442.3m) 전에서부터 허리를 높인다.
▲ 매봉산 고랭지 채소밭을 지나는 취재팀. 풍력 발전기가 대지의 수평성을 더 확장시키고 있다.
은대봉에서 허리를 낮춘 대간이 금대봉으로 솟구쳐 오르기 전 잠시 쉬어가려는 듯 길을 열어두고 있다. 두문동재(1,268m)다. 지금은 아래로 터널이 지나고 있어 길로서의 구실은 미약해졌다. 만항재와 달리 제설도 되지 않은 상태다. 이 고개의 서쪽 기슭에 있는 두문동에 얽힌 비극적 전설의 분위기를 함축하고 있는 듯하다.
본디 두문동은 북녘 땅 개풍군 광덕산 자락에 있던 마을로, 72명의 고려 문신과 48명의 무신들이 조선에 반대하여 은거하던 곳이다. 이들은 조선조의 갖은 회유와 협박에도 ‘두문불출’했고, 인내의 한계에 이른 이성계가 불을 질렀다. 그 때 가까스로 살아남은 사람들이 흘러들어온 곳이 바로 고한의 두문동이라 한다.
금대봉(1,418.1m) 정상의 헬기장 눈 속에 하루를 묻는다. 요즘 들어 금대봉은 양강 발원봉이라고도 불린다. 한강과 낙동강의 젖샘 중 하구에서 가장 먼 거리에 있는 곳이라는 말이다. 한강 발원의 상징인 검룡소는 금대봉의 북동쪽 계곡 끝자락에 있다.
금대봉에서 북동쪽으로 휘어지는 대간은 길게 허리를 낮춘다. 잔잔하게 오르내리던 대간은 비단봉을 이루기 전 또 고개 하나를 만난다. 수화밭령이다. 태백시의 화전과 창죽을 잇는 고개로 쑤아밭골로 통하는 고개다. 그런데 이 특이한 이름의 내력은 한자로 적어보면 쉽게 이해된다. 水禾田(수화전). 벼를 키우는 밭이라는 얘기다. 산비탈에 간신히 밭을 일구던 곳에서 논작물인 벼를 키우게 된 일은 동네 이름으로 삼을 만큼 기념할 만한 사건이었을 것이다.
비단봉 오름길은 숨이 턱에 닿게 하는 오르막이다. 정상의 조망은 흐릿하지만 태백시가지와 금대봉, 함백산, 태백산이 한눈에 들어온다. 비단봉에서 살짝 내려서면 매봉산 고랭지 채소밭으로 연결된다. 밭과 경계를 이루는 주능선으로 가든, 밭을 가로지르든 내키는 대로 하면 된다.
매봉산 정상에는 산불감시초소와 유선 방송 안테나가 서 있다. 정상의 형국은 볼품이 없으나 조망은 좋다. 특히 매봉산과 피재 사이의 1145m봉은 낙동정맥이 갈래 치는 곳임을 기억해 둘 만하다.
매봉산에서 피재까지는 계절에 따라 다양한 방법으로 갈 수 있다. 주능선을 고집할 수도 있고 밭을 가로지르거나 농로를 따라가도 된다. 능선상의 트레일이 아니라고 해서 대간을 벗어났다고 말하는 것은 편협한 문자주의(文字主義)다. 우리는 다섯 대의 풍력발전기를 배경으로 기념촬영을 하면서 광활한 눈밭에 백두대간이라는 글자를 새기기도 했다. 그리고 농로를 따라 피재에 선 다음, 어둠이 깔리는 검룡소에서 한강의 첫물을 마셨다. 대간이 뱃속으로 들어왔다.
/글 윤제학 현대불교신문 논설위원
/사진 허재성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