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허영숙이 밝힌 이광수와의 이혼 사유 세 가지
이광수·허영숙 두 사람의 이혼은 해방 후 이광수가 친일파로 몰리고 있는 상황에서
허영숙이 혼자서 저지른 일이다. 허영숙은 이광수의 오산학교 제자이자 백병원 설립자인 백인제 씨의
친동생 백붕제 변호사(형제 모두 6·25때 납북)와 상의해 이광수가 경기도 사릉에서 지낼 때 남편도
모르게 이혼 수속을 했다. 해방 이듬해인 1946년 봄의 일이다. 허영숙은 백붕제 변호사와 함께
종로구청 호적계를 찾아가 이혼 수속을 끝냈다. ‘이광수의 지병으로 인한 오랜 병간호와 이 씨의 생활력
부족으로 부부생활을 원만하게 유지할 수 없기 때문’이란 게 이유였다.
이유는 짐작하다시피 재산을 지키기 위한 것이 가장 컸다. 이에 대해 허영숙은 계속되는
이글 ‘남편 춘원을 생각하고’에서 이혼사건에 대해 장황하게 설명하고 있다.
특히 이광수를 따르던 모윤숙 (1910~1990) 등 일부 여성들에 대해서는 적개심을 숨기지 않고 있다.
이혼사건이 있었던 1946년 겨울 사릉에 있던 춘원은 돌베개를 베고 자다가
입이 돌아간 일까지 있었다. 허영숙의 글은 이렇게 이어진다.
내가 이혼한 이유는 세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째 나는 원래가 서울 한바닥 종로 상인 허종이란 분의 막내딸로 자라났습니다. 우리 아버지는 드름전(포목상)도 하셨고 배전(배만 파는 곳)도 하셨고 집장사도 하시고 종종 고리대금도 좀 하신 것 같습니다. 그런 분위기에서 자란 나는 물질이라든지 금전에 대해서 담백한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일확천금을 하려고 서두르지는 아니하였어도 절검저축을 목적으로 삼고 한 가정의 장래의 생활을 위해서는 남의 일을 돌아볼 줄 모르는 사람이었습니다. 여기에 당신과 갈등이 있었습니다.
춘원을 잘 아시는 분은 다 아시는 바와 같이 춘원은 돈이라든지 물질이라든지에는 거의 떠난 사람이었습니다. 거지가 문전에 오면 나는 일 전짜리를 주지마는 춘원은 손에 잡히는 대로 일 원짜리도 십 원짜리도 아낌없이 내어주는 사람이었습니다.
(……)
은행 보증을 서서 차압의 독촉장이 나오고 가난한 친구들의 방문으로 제때에 밥을 제대로 먹을 수가 없었습니다. 너무 방문객이 많아 병환이 나고 그 병구완은 나 혼자 도맡아 하게 되니 가정생활의 충돌이 자주 생겼습니다. 지금 나이 육십이 되어 남편을 잃어버린 자리에 앉아 생각하면 그것이 다 내 잘못이며 이제 다시 안 그러리라 깨닫지마는 젊은 시절 상인의 가정에서 자란 나로서는 진정 견디기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 그리하여 이분하고 이러고 살다가는 늙게 아이들 공부도 못 시키고 거지가 되겠다 하는 것이 내가 이혼한 하나의 이유였습니다.
둘째로 내가 이혼한 이유는 반민법 때문이었습니다. 국회에서 정한 반민법 법규에 의하면 중한 자는 사형, 종신, 십오 년 이상, 경한 자는 재산을 몰수하고 귀양 보낸다. 이러한 것이었습니다. 나는 원래부터 춘원이 여기에 걸려서 죄를 받으리라고는 믿지 아니했지마는 재산 몰수를 당하지나 아니할까 하는 의심을 혼자 가지고 있었습니다. 대개 다른 나라의 예를 볼지라도 정치적 소동이 일어나면 그 일에 흥분된 민중들은 시비를 가리지 못하고 날뛰면서 잔인한 행동으로 나가는 것입니다. 내 이혼문제에 대해서는 북쪽으로 납치되어 가신 P(백붕제) 변호사(당신의 친구)께서 많이 조언해 주셨으며 그것은 전혀 우리 가족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P 변호사가 안 계셨더라면 내가 할 줄 몰라서도 또는 겁이 나서 못 하였을는지도 몰랐을 것입니다. 재산이라야 내가 친정에서가지고 시집온 집 두어 채 논 마지기였던 것이나 만일 그것조차 빼앗기면 우리 아이들의 장래가 암담했기 때문입니다.
(……)
내가 이혼한 원인의 마지막 이유는, 춘원을 따르는 여성이 많았던 것입니다. 혹은 문학을 배우러 오고 원고를 가지러 오고, 문학 이야기를 하러 오시라고도 오고, 원고 쓰는 법을 가르쳐 달라고도 오고, 춘원의 방에는 문학소녀의 센티멘탈한 그림자가 떠날 날이 없었습니다. 병이 나서 입원하고 있는 동안에도 여자들이 늘 와 있어서 내가 가도 들어가 조용히 이야기 할 틈이 없는 것이 나는 끔찍이도 싫었습니다. R양, P양, M여사, L여사 미망인 N, K, 기생 출신, 또 K양, 꼽아보면 열 사람은 됩니다.
춘원이 그들을 찾아간다든지 은근히 둘이 만난다든지 그런 일은 없었다고 나는 생각합니다. 늘 앓고 있었고, 또 춘원은 양심적이었기 때문에, 나를 속이는 일은 절대 없었으리라 나는 믿습니다마는 그들이 찾아다니는 것이 나는 싫었습니다. 춘원은 나더러 "어머니나 형님과 같은 마음으로 그 여자들을 애무해 주라"그러지마는 나는 그러한 선녀 같은 마음을 가질 줄 모릅니다. 마침내 M여사와 P양에 대해서는 세상에서 떠들게 되었습니다. 춘원을 두고 시집을 썼느니, 이십 리나 떨어진 춘원의 정양처인 자하문 밖으로 매일같이 방문을 한다는 둥, P양은 내가 일본에 가 있는 동안에 영근이의 가정교사로 집에다 데려다 두었다는 둥 - 나는 이 여러 가지 소문을 듣는 게 싫었습니다.
춘원이 그 여자들하고 세상 사람이 말하는 그러한 저속한 연애에 빠지지 아니하리라고는 깊이 믿는 바이지마는 공연히 쓸데없이 내 존재를 무시하는 짓을 하고 있는 것 같고, 몸이 조금 건강해지면 이런 소문을 내고, 그 계집아들과의 교제에 피곤하여 병이 나면 그 병구완은 내가 하게 되고, 나에게는 얼마나 원통한 일인지 몰랐습니다. 그런 일 저런 일로 내가 민적을 갈라놓고 가만히 되어가는 모양을 보고자 한 것이 이렇게 나쁜 일을 저지르게 된 것 입니다.
(……)
나는 춘원에게 과연 매달려 산 사람이었습니다. 입으로는 강한 체하고 잘난 체 했지마는 기실은 춘원에게 대롱대롱 매달려 살다가 그 줄이 끊어지니, 나는 구렁텅이에 빠져버린 것입니다.(……) 당신은 지금 어디 계십니까, 살아계십니까, 살아계시면 어느 곳에 계십니까, 진정으로 살아계신 줄만 안다면은 괴나리봇짐 짊어지고 지팽이 짚고, 삼천세계를 다 돌아 걸어도 당신을 찾아내고야 말 것이언마는 그것조차 못하는 이 슬픔이여!
1955. 10. 20
허영숙
《유정》 이야기를 하다가 여기까지 왔다. 이광수는 《유정》을 연재한 다음해인 1934년 끔찍이도 사랑하던 아들
일곱 살 된 아들 봉근이를 병으로 갑자기 잃고 크게 낙담했다. 허영숙과의 사이에 결혼 8년만에 낳은 첫아이였다.
상심한 그는 〈조선일보〉 부사장을 사직하고 중이 되기 위해 금강산에 들어갔다. 그러나 이를 안 허영숙이
금강산까지 달려가 난리를 피우는 바람에 속세로 돌아오고 말았다.
허영숙은 훗날 이광수가 납북되고 생사조차 알 수 없을 때 차라리 그때 남편이 중이 되도록 내버려두었다면
더 이상의 불행을 겪지 않았을 것이라며 후회하기도 했다고 한다.
[출처] 이정식, 시베리아 문학기행
♣ 다음은 ‘자신의 운명을 저주했던 천재, 그 안타까운 일생’ 편을 올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