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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장 교세확장과 기독교 민족운동(1907~1918) [ 한국교회사 6 ]
1. 교회의 부흥운동과 교회조직
1) 1907년 대부흥운동의 전개과정
⑴ 시대적 배경: 일본과 미국은 가츠라(桂太郞)-테프트(W.H. Taft) 비밀 각서 교환(1905. 7)을 통해 미국은 필리핀에서 일본은 한국에서 주도권을 갖는다는 밀약을 하였다. 이로써 냉엄한 국제 현실 앞에서 미국을 짝 사랑했던 조선의 순진함은 비극으로 끝이 났다.
1905년 11월 일사늑약이 선포되면서 조선은 일본의 보호국이 되었다. 조선을 일본에 넘기는데 앞장섰던 매국노들은 다음과 같았다.
을사늑약 당시 궁궐을 포위한 일본군
을사오적 : 권중현, 박재순, 이근택, 이완용, 이지용 을사조약 체결 기념사진
1907.3.25 을사5적을 처단하려다 실패한 義士들
을사늑약 이후 자결한 민영익(1861-1905) 형조판서
1907년 일제는 정미7조약을 맺고 조선의 외교권을 빼앗아 갔고, 구한국군대를 해산시키고 고종을 강제로 퇴위시켰다. 구한국 군대와 국민들은 이에 저항하며 의병항쟁을 시작했다.
헤이그 밀사에게 주었던 고종의 칙서 헤이그 밀사: 이상설, 이준, 이위종(상동교회 교우들)
헤이그 회의장에 입장을 거절 당하고 순국한 이준 열사와 그의 무덤
군대 해산 이후 봉기한 의병 일제에 끝까지 저항하다 체포된 의병들
처형된 의병의 모습
⑵ 대부흥 운동의 발단 1903년 원산 선교사 사경회에서 장로교 감리교 침례교의 여성 선교사들은 에큐메니칼적으로 모여 기도회를 하던 중 중국선교사 화이트( Miss M. C. White)를 초청하여 집회를 가졌다. 이 자리에서 화이트 양은 1900년 중국에서 의화단 사건으로 많은 선교사들과 중국의 교인들이 학살 당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이에 대해 한국의 선교사들은 자신들의 편안함과 게으름에 대한 반성을 하게 되었다. 또한 이 모임에 초청된 남감리교 선교사 하디(R.A. Hardie)는 다음과 같이 자신의 잘못을 통회 하였다.
“나는 지난 3년 동안 강원도 일대에서 나름대로 최선의 노력을 다했으나 아무런 결실도 없었다. 뿐만 아니라 이 실패의 원인은 나의 신앙적 허물, 곧 한국인 앞에 백인으로서 우월의식과 자만심에 차 있었던 더 있음을 고백한다.”
대부흥회 당시의 하디의 모습과 그의 기념비
선교 초기의 선교사들의 조심스럽고 겸손한 자세는 서서히 변화하여 선교사들의 일부는 화려한 개인 사택과 생활도구를 두고 한국에서 미국인 중산층의 삶을 누리고 있었다. 그리고 백인우월주의에 사로잡혀 한국인을 무시하고 있었는데 하디의 고백은 바로 이러한 잘못을 고백하는 것이었다. 이때에 성령이 무리에게 임하였다.
1904. 1 원산에서는 교파별 연합기도회가 열렸고, 캐나다 장로교의 롭(A. F. Robb) 한국인 목사 전계은과 정춘수가 열심히 집회를 인도했다.
최초의 부흥집회가 열렸다. 원산 창천교회(태극기가 이색적이다)
1905년 8월에는 평양 선교사 사경회와 목포를 비롯한 삼남지방에서 사경회가 개최되었고 기도와 부흥이 일어났다. 1906년 여름에 평양의 선교사들은 하디 목사를 강사로 초빙하여 장로교회와 감리교회가 연합하여 일주일간 기도회를 개최했다. 이때 뉴욕의 존슨 목사는 웨일즈 부흥운동 소식 전달했다.
1903-7년 사이 부흥운동은 한국만의 현상이 아니었고 웨일즈와 인도, 미국의 로스엔젤레스에서도 일어났다.
⑶ 부흥운동의 진행 1907. 1.6~15일 사이 평양 장대현교회에서 열린 평남도사경회에서 길선주 장로, 블레어 목사(W.N. Blair), 그래함 리 목사가 집회를 인도했다. 사경회는 주로 새벽기도, 낮 시간의 성경공부, 저녁의 전도집회로 진행되었다. 이 사경회는 통회, 자복, 회개운동, 화해, 도덕적 갱신운동, 성령체험이 일어났다.
길선주 장로는 새벽기도회를 인도했다. 사경회 첫날 집회에 1500명이 모인 집회에서 있었던 일이다.
“그날 밤 길선주 목사(당시는 장로) 의 얼굴은 위엄과 능력이 가득 찬 얼굴이었고 순결과 성결로 불붙은 얼굴이었다. 그는 길목사가 아니었고, 바로 예수님이었다. 그는 눈이 소경이어서 나를 보지 못하였을 터이나 나는 그 앞에서 도피할 수가 없었다. ....나는 몹시 번민하였다. 어떤 사람은 마음이 너무 괴로워 예배당 밖으로 뛰쳐나갔다. 그러나 전보다 더 극심한 근심에 싸인 얼굴과 죽음에 떠는 영을 가지고 예배당으로 되돌아 와서 오! 하나님 나는 어떻게 했으면 좋겠습니까 하고 울부짖었다.” (정익로 장로의 훗날 증언)
1월 12일 (토)밤, 블레어 목사는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다"(고전 12:27)라는 말씀의 설교를 했고,그후에 신자들 사이, 선교사들과 한국교인들 사이에 갈등과 사랑의 결핍을 통회하는 일이 일어났다.
1월 14일(월) 그래함 리 선교사가 "나의 아버지여!"라는 말을 할 때, 회중들은 밖으로부터 강한 힘이 밀어 닥치는 체험을 하게 되었다.
1월 15일(화) 부흥회 마지막 날, 길선주 장로의 집회이후 특별기도 중에 참가자들은 선교사를 미워한 죄, 음란과 증오, 아내를 사랑하지 못한 죄, 기억할 수 없는 온갖 죄를 통회 자복하는 일이 일어났다. 그 내면적인 죄 고백이 쏟아져 나왔다. 그리고 사회도덕적으로 이웃에게 피해를 입힌 행위에 대해서는 직접 보상하면서 회개 운동을 했다. 도둑질한 것은 직접 돈을 갚았고, 미워한 것은 찾아가서 사과했다. 그것은 삶의 변화가 일어나는 진정한 회개였다.
장대현교회 장대현 교회
장대현교회 당회원들(마펫 길선주 이길함) 여성사경회의 모습
길선주 목사(1869-1936) 그는 평북안주 출신으로 젊은 시절 관성교에 입교하여 21세부터 선도에 몰두하고 차력을 연하마여 20대에 이미 도사의 칭호를 받았다. 그는 평양지역의 선도에 입교한 집단의 일원이었다. 자신의 동료 김종섭을 통해 천로역정을 읽고 깊은 감명을 받았다. 그는 김종섭의 권유로 "예수가 진정 하나님의 아들인지를 묻기 위해" 옥황상제에게 기도 하던 중에 성령을 체험하고 회심하였다.
1897년 개심하여 장대현 교회의 영수를 지냈고 33세에 장로로 선출되었다. 1902년 마펫 선교사의 조사로 장대현 교회와 황해도 교회들을 보살피는 목회를 했다. 1903년에는 평양장로회 신학교에 입학하여 1907년 한국최초의 장로교 7인 목사들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1919년 삼일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33인중에 1인이었다. 감옥에서 말세론을 저술하여 전국적으로 종말론을 가르치면서 부흥회를 이끌었다.
길선주 목사와 그 가족
길선주 목사가 그린 말세도
평양의 기독교 지도자들(길선주, 김종섭, 정익로)
⑷ 전개
성령강림 체험과 부흥운동의 열기는 여성과 학생들에게 전이되었다. 2월부터 숭실대학, 숭실, 숭덕, 광성 학교의 2500명의 학생들은 부흥운동을 경험하고 전도운동에 열성을 보였다. 3월에는 여자사경회를 통해 은사와 기쁨을 받은 여성들로 인해 불신자의 가정이 기독교 가정들로 변화되었다. 5월에 장로회신학교가 개강했을 때 특별 사경회로 시작되었다. 이때 학생들은 성경을 받았는지 여부가 학생들의 대화 주제가 되었다고 한다. 부흥운동은 하디, 저다인, 길선주에 의해 전국교회로 확산되었다. 또한 봉천, 요양, 만주, 북경 등 중국의 부흥운동으로 확산되었다. 1907년 내한 한 존 모트 박사는 “한국은 비기독교 국가권에서 처음으로 기독교 국가가 될 것”으로 전망했다.
한국을 방문한 존 모트는 부흥운동을 보고 한국의 평양은 제2의 예루살렘이라고 말했다.
2) 부흥운동의 성격과 의미
⑴ 원인론: 첫째는 한국인들의 깊은 고뇌와 종교적 성숙에서 비롯되었다. 둘째는 국가 민족이 멸망하는 과정에서 사회정치적 불안과 동요가 작용했다. 세번째는 한국교인들이 정치적 동요에휘말리지 않고 내면적 종교성을 경험하기를 원했던 선교사들의 의도가 작용했다.
⑵ 긍정적 의미:
① 한국교회의 정화 및 순수 신앙의 전통을 확립했다. 성령의 임재를 확신했고, 죄고백, 하나님의 심판, 공의와 사랑에 대해 체험적인 이해를 하게 되었다. ② 한국기독교인과 선교사간의 화해―백인우월주의와 고자세에 대한 반성이 일어났고, 모두가 죄인임을 자복함으로 앙금이 정화되었다. ③ 한국기독교의 도덕성 향상과 경건성 확대―입교동기의 불순수성 때문에 비윤리적이었던 교인들의 삶이 변화되었다. ④ 성경공부의 열기가 뜨거웠고 기도하는 교회로서의 전통을 구축하였다. ⑤ 교회의 신앙과 한국의 토착적 문화의 만남이 일어났다. 그것이 새벽기도회, 성미, 통성기도 등으로 정착되었다.
⑶ 대부흥운동이 한국기독교사에 미친 총체적 영향
① 교세의 변화
② 새로운 신앙 형태의 구형
③ 교회 지도부의 변화
④ 교파교회의 구형
⑤ 부정적 측면:
⑸ 일본 기독교인의 1907년 대부흥운동 평가: 우찌무라간조의 견해 “소문에 의하면 조선에 대단한 성령강림이 있단다. 행복한 조선국, 조선은 이제 정치적 자유와 독립은 잃었으나 그 심령적 자유와 독립은 얻고 있는 듯하다.”
3) 백만명구령운동(1909-10) 일제에 의해 나라가 병탄되던 시기에 “백만인을 그리스도에게”라는 표어 아래 대규모 신자화운동이 전개되었다.
조선병탄 1910.8.29 경복궁 근정전 일장기 계양 한일병탄 직후 고종과 일본고관 병탄 이후 남산의 일본 통감관저 ⑴ 배경 이 운동의 배경에는 식어가는 부흥운동의 열기를 되살리려는 일군의 선교사들이 있었다. 1909년 여름 개성에스 스톡스 목사(M. B. Stokes) 등 3인의 선교사들은 입산기도회로 모였다. 그후 스톡스 목사는 교인들에게 1년 안에 5만 명 증가를 위해 기도해 줄 것을 부탁하였다. 1909년 9월 남감리회 13차 선교연회는 표어를 “20만 심령을 그리스도에게”라고 정했다. 그후 복음주의선교부연합공의회는 이 표어를 더 크게 수정하여 “100만 심령을 그리스도에게”라고 결정했다. 그 당시 장로교 감리교인들은 ‘8000여명에 불과했으나 선교사들은 당시 교인들의 수를 20만명으로 추산하고 있었다. 이렇게 비현실적인 대규모 전도운동을 시도한 배경을 살펴보자 게일은 “모든 것을 박탈당하고…이 나라는 한 구세주를 찾고 있다.” “오늘이 전도하는 그날이요 이곳이 전도할 그곳이다.”라고 말했다. 부정적인 관점에서 보면 선교사들은 망국(亡國)의 상황을 전도하기 좋은 “절정의 날”로 이해하고 있었다. 한국인이 아닌 그들에게 조선 백성과 같은 정서를 기대하기는 어렵지만 함께 아파하는 정서 없이 그 상황을 부흥운동과 전도운동의 기회로만 보았다면 그것은 몰역사성(沒歷史性)으로 볼 수 있다. ⑵ 진행 1910년 9월 19일 장로회 제4회 독노회(선천)는 “100만명구령운동” 결의안을 통과 시켰다. 이것은 조선이 일제에 병탄 된지 불과 20일 후의 일이었다. 선교사들은 순방 중이던 미국인 부흥사 채프만(J.W. Chapman)과 알렉산더(C.M. Alexander)를 초빙하여 집회를 열었다. 그리고 미국인 부흥사 데이비스(G.T.B. Davies)는 한국에 남아 계속 부흥사경회를 인도했다. 서울에서 교파를 초월한 대전도단을 조직하여 전국에 순회전도를 하였다. 평양, 서울, 전국 각 지역의 기독교계 학교의 학생과 교사 등이 대거 전도운동에 참여하였다.
10일간 180명을 회심시킨 목포학생들
채프만과 알렉산더의 한국방문 1909 서울 선교사들 모임 백만명 구령운동집회 (알렉산더) 전도를 위해 성경을 지게로 나르는 모습(협성신학교:현감리교신학대학) 박람회장-초교파연합전도사무실(1915) 백만명 구령운동은 “날연보”(Day offering)라고 하는 특이한 전도방법이 나타났다. 날연보는 헌금을 할 수 없는 가난한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의 시간을 연보로 드리는 것이었다. 하나님과 약속한 날은 모든 생업을 뒤로하고 전도하는 일에 사용했다. 평양에서는 1천명의 교인들이 연 2만2천일의 날연보를 드렸고, 재령에서는 1만일을 드렸다. 전국적으로 10만일의 날연보가 드려졌다. 이를 통해 수백만매의 전도지와 70만권의 마가복음이 배포되었다. ⑶ 평가 4) 교회의 조직과 정비
교회를 조직한다는 것은 교회 안에 장로와 목사로 구성된 당회, 노회, 총회 등 조직을 설립하는 것을 의미한다.
⑴ 장로교의 경우
① 당회 최초의 당회는 1887년 9월 27일 새문안교회에서 설립되었다. 황해도 소래교회는 서경조(1898)가 장로 임직을 하면서 당회가 설립되었다. 평양 장대현 교회에는 이영언(1898), 김종섭(1900), 방기창, 길선주(1901)가 장로 임직을 하였고 1909년에는 33명의 장로 임직이 있었다.
② 장로회공의회(1901) 4개의 장로회의 선교사들의 만든 장로회 공의회에 한국인이 참여하기 시작한 것은 1901년이었다. 교회의 치리권과 행정권은 ‘선교공의회’에 있었다.
장로교공의회 1901 ③ 독노회 창립 1907년 9월 17일 평양 장대현교회에서 최초의 노회가 결성되었다. (회장: 마펫, 부회장: 방기창, 장로36, 선교사 33, 찬성원 9/ 총78명). 독노회(獨老會)란 교회가 선교회로부터 독립했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 말이었다. 정미7조약으로 인해 사실상 조선의 주권과 국권이 강정 당한 상태에서 조선의 교회가 독립했다는 것은 큰 의미가 있다.
조선야소교장로회 독노회 창림 1907. 9.17 1] 7인의 목사 안수 1901년 마펫은 김종섭과 방기창을 데리고 신학교육을 시작했다. 1902년학생 수는 6명, 1904년에는 19명, 1905년에는 3학급 40명으로 자라났다. 장로회신학교는 1년에 농한기 3개월을 수업했고, 9개월은 교회에서 사역을 수행했으며 5년제로 운영되었다.
평양장로회신학교의 모습 평양장신 1회 졸업생 양전백, 서경조, 방기창 한석진, 이기풍, 길선주, 서경조 7인 목사의 안수식
1907년 안수 받은 7명의 인적사항은 아래의 표와 같다.
교세: 목사7인, 장로53명, 교회 989개, 세례교인 19,000명 전체교인 7만명
2] 장로회신경채택: 인도 자유교회가 채택한 12신조(1904)를 그대로 수용하여 채택했다. 그 내용은 엄격한 칼빈주의를 담고 있었다.
12신조는 한국 장로교회의 신학적 특성을 규정지었다. 그러나 우리 말과 얼이 깃든 신앙고백서를 작성하지 않고 선교사들이 주도하여 인도에서 채택한 신조를 그대로 수용했다는 점은 비판의 대상이 된다. 1907년의 부흥운동은 교회조직에 기여했다. 그러나 교회는 민족 운동에서 멀어졌다.
3] 선교사들은 노회원의 자격 선교사들은 토착교회가 설립된 이후에는 노회의 치리를 받는 것이 당연한 것이었다. 그러나 한국선교사들은 노회의 회원권은 유지하면서, 선교사 임명과 치리는 본국 교회에 속한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한국교회의 치리를 받지 않았다. 이것은 선교지 교회의 권위를 존중하지 않는 교만한 모습을 드러낸 것이었다.
4] 총회의 창립 1911년 9월 총회는 전국 7개 대리회를 노회로 승격하였다. 1912년 9월 1~4일 평양 여자성경학교에서 창립총회(한국인 목사 52, 선교사 44, 장로 125, 총221명)가 개최되었다. 선출된 임원은 아래와 같다.
초대회장: 언더우드, 부회장: 길선주, 서기: 한석진, 부서기: 김필수, 회계: 블레어
당시 총회장에 언더우드가 선출된 것은 1910년 105인 사건으로 인해 서북 교계가 큰 피해를 입었기 때문에, 총독부와 유대관계가 깊었던 언더우드를 총회장으로 선출하여 교회의 피해를 줄이려는 뜻이 있었다. 그리고 총회의 회계는 늘 북장로회 선교사가 임명되었는데 그것은 조선교회가 경제적으로 어려워서 재정이 늘 선교부에 의존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때 총회는 7개의 노회를 상징하는 7색으로 된 사회봉을 만들었는데 그 이름을 고퇴라고 하였다. 총회는 200명의 총대들 가운데 선교사 숫자를 40명으로 제한하였다.
장로회 창립총회 1912
5] 선교하는 교회 한국교회는 1907년도 독노회를 설립하였을 때 이기풍 목사를 제주도로 파송하였다. 당시에 제주도 선교는 해외선교라는 인식이 있었다. 이것은 전국적으로 목사가 부족한 상황에서도 복음의 빚을 갚는다는 결단으로 이루어졌고 이기풍 목사는 평안도 출신으로 제주도에 자원을 하였고 평생을 호남지역에서 목회를 하였다.
1909년에 평양신학교 2호 졸업생 최관홀 목사가 블라디보스톡으로 파송되었다. 또한 한석진 목사→일본 동경, 이관선 목사→제주도(평양 여전도회), 김영제 목사→북간도, 김진근 목사→서간도, 방화중 목사→구미지역으로 파송하였다.
1912년 장로회 총회 형성된 이후 김영훈, 사병순, 박태로를 중국의 산동성에 선교사로 파송했다.
이기풍 목사의 가족
일본의 동경교회(1940년대)
평양장신2회 졸업생 김창선, 김필수, 윤식명, 이원진
산동선교 개척자 1912 박내로, 김영훈, 사병순
⑵ 감리교회의 조직
① 미감리교회의 조직 1897 서울구역회→교회치리 조직←미감리교선교회의 하부조직이었다. 1901 서지방회(인천), 북지방회(평양), 남지방회(서울)로 구분했다. 1905. 6.21 제1회 한국선교연회(The Korea Mission conference)를 조직했다. 1908. 3.11 한국연회(The Korea Annual Conference)가 조직되었는데 이것은 부흥운동의 열매였다. 이 연회는 일본주재 감독 해리스(M.C. Harris)의 감독 아래 있었다. 한국의 감리교회 선교사들은 모두 한국 감리교회로 이명을 하였다.
② 미남감리회의 조직 1897. 9.10 한국의 남감리교회는 중국 연회 소속의 지방회 조직으로 출발했다. 1897. 12.8 중국 연회에서 독립하여 한국선교회가 만들어졌다. 1914 한국선교연회가 조직되었다. 1918 한국연회가 출발한다.
③ 기독교조선감리회 (1930. 1. 20) 미국에서 남.북감리교회의 통합 논의가 이루어지면서 한국의 감리교인들은 교회 합동의 희망이 높았다. 미국 감리교회의 합동이 실패한 후 한국인들은 두 교파를 통합하여 하나의 조선 감리교회를 이룩했다. 이것은 한국 감리교회의 중요한 성과였다. 그러나 한국 감리교회는 선교사들로부터 경제적으로 완전히 독립하기는 어려운 실정이었다.
2. 기독교 민족운동의 전개
1) 기독교인의 민족의식 형성
⑴ 신교육기관의 설립 신교육기관들은 기회균등의 원칙, 남녀평등, 근로에 대한 인식, 자주자립에 입각한 민족정신 고양, 개인의 개성존중, 근대적 시민소양, 봉사자로서 자질을 갖추기 위한 인격도야를 목표로 설립되었다. 이러한 기독교계 학교들은 민족의식을 고양시켰다.
이동휘(기독교인으로 구한국군 참령을 지낸) 선생은 전국에 100여개의 보창(普昌) 학교를 설립하였다. 안창호 선생은 1907년 2월에 귀국하여 평양에 대성학교(大成學校)를 설립하였다. 그리고 이승훈 선생의 오산(五山) 및 가명(嘉明)과 신흥(新興) 학교도 기독교 정신으로 세워진 민족계학교였다.
이상설이 세운 서전서숙 김약연 목사가 세운 명동 학교 유적지
남강 이승훈이 세운 오산학교 오산학교의 모습
오산학교 2회 졸업식 (태극기를 들고 졸업하는 학생들)
안창호가 세운 대성학교 이시영의 신흥 학교의 수업모습(무릎을 꿇고 공부하고 있다)
⑵ 언론의 공헌 〈독립신문〉(1896) : 국가의식 및 민권사상을 고취시켰고, 부패한 국정을 비판하였고, 열강들의 경제적 침탈을 고발하여 자주 국권의식과 민족의식을 고취시켰다. 〈죠션크리스도인회보〉(1897.2)는 감리교회에서 만든 신문이었다. 〈그리스도신문〉(1897.4)은 장로교회에서 제작한 신문으로 신앙 뿐만이 아니라 사회윤리관과 도덕심을 함양시켰고, 근대적 농법과 산업육성을 위한 기술을 소개했다. 〈대한매일신보〉(1904.7)는 국권 회복을 목적으로 양기탁, 신채호, 박은식이 주동이 된 신문으로 민족의식 형성에 가장 큰 공헌을 하였다. 신채호와 박은식은 기독교인이 아니었다. 성경의 영향 ― 한국기독교인은 성경에 대한 절대적 신뢰를 가지고 신앙과 민족 문제를 성경과 일체화시켰다. 특히 출애굽사건과 십자가 사건은 기독교인의 민족의식을 부양시켰다.
⑶ 충군애국의 종교로서 기독교 1890년대 초기 기독교인들의 민족의식은 충군애국적인 형태로 표출되었고, 황실의 안녕을 국권수호의 길로 이해했다.
① 기독교인들은 국왕과 황태자의 탄신일에 초교파적 연합축하 행사를 열고, 기도회와 연설회, 애국가를 제창했다. 교회마다 태극기를 계양했다. 예를 들면 1896년 국왕탄신일에 장로교, 감리교 선교사들과 기독교인들이 회집하여 수 백 명의 군중들이 찬송과 주기도문을 외웠다. 이것을 본 사람들이 고향에 돌아가 황해도에 은율 교회를 설립했다. . ② 을미사변(1895. 10.8) 이후 선교사들은 고종을 보호했다. 일제는 육군 준장 미우라를 일본영사로 파송했다. 그는 대원군의 사주 하에 러시아와 가까운 명성황후를 시해했다. 이 장면을 미국 군사 고문 다이 장군과 러시아 전기 기술자 사바틴이 목격하였다. 의화군은 이 사변 이후 언더우드 집으로 피신하였다. 선교사들은 교대로 고종의 침실을 불침번하였고, 릴리아스(언더우드 부인) 등은 독살을 두려워하는 고종에게 음식을 공급하였다.
명성황후(추정)
명성황후의 글씨
명성황후를 시해한 일본 낭인의 칼 ‘히젠도’(肥前刀)
언더우드 부인 릴리아스
고종의 아들 의친왕
③ 춘생문 사건 이 사건은 친미파와 친러파가 협력하여 친일파에 의해 연금 상태에 있는 고종을 출궐 시키는 계획이었다. 공사관 직원의 통보를 받은 언더우드, 헐버트, 에비슨은 이 소식을 듣고 고종에게 달려 갔으나 밀고자에 의해 사전에 발각이 나서 출궐이 실패했다. 윤웅렬 장군(윤치호의 부친)은 언더우드 집으로 피신하였다. 이 사건은 언더우드의 정치개입 사건으로 비화되었다.
윤치호와 부친 윤응렬 장군 그의 가솔
2) 기독교민족운동과 신민회 활동 ⑴ 한국기독교와 민족운동이 결합될 수 있었던 요인 유독 한국은 비기독교 국가인 일본에 의해 식민지가 되었기 때문에 기독교와 민족운동이 결합할 수 있는 요인이 되었다. 한국의 기독교는 일정 기간 제국주의 세력에 저항하는 동력으로 기능할 수 있었다. 기독교는 근대 국가 형성을 위한 정치운동인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 신민회, 삼일운동, 임시정부 활동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⑵ 기독교계 인사들이 항일민족운동에 참여한 시기 조선 정부는 미국에 의존하여 주권을 회복하려는 노력을 했으나 미국과 영국은 러일전쟁에서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해 일본을 지원했고, 그 후에 1905년 7월 일본 수상 가쓰라와 미육군성 장관 테프트 사이의 비밀 약속이 이루어졌다. 기독교계인사들이 항일민족운동에 참여한 시기는 다음과 같다. ⑶ 1905년 이후 기독교인 항일 민족운동의 유형 ① 구국 기도회 9월 장로회공의회에서 길선주 장로의 발의로 11월 감사절 후 1주간 구국기도회를 전개했다. 소극적 저항이었으나 민족의식과 국가의식을 고취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을사조약이 체결된 후 상동교회 내의 상동청년회와 엡윗청년회 등이 연합하여 11월 수천의 청년과 교인이 모여 기도회를 전개했다. ② 행동적 저항 상동기도회를 주도한 전덕기, 김구, 이동녕, 옥관빈, 조성환 이지간 등은 기도회가 끝난 후 도끼를 메고 궁궐로 가서 조약반대 상소를 올리려고 했고 일본 경찰과 충돌했다. ③ 무력응징 정순만과 같은 사람은 평안도 장사 수십 명을 모아 을사조약의 체결자 박제순 등 을사5적 암살을 모의하였다. 상동청년학원의 회원들은 1907년 신민회의 핵심 회원들이 되었다. 전덕기 목사 3) 신민회 조직과 활동 1907년은 기독교계의 민족운동노선과 종교운동노선이 분화되는 시점이었다. 1907년에는 정치적으로 정미7조약이 체결되었고, 고종이 폐위되고, 의병항쟁이 시작되었다. 이러한 정치적 혼란상황에서 선교사들이 지도하는 한국교회는 1907년 평양을 중심으로 하는 대부흥운동이 일어나고 있었다. 그러나 다른 한편 민족의식이 강한 기독교인들을 중심으로 신민회가 결성되었다. ① 신민회의 창립(1907. 4.20) 안창호가 미국에서 귀국한지 2개월 후, 양기탁, 전덕기, 이갑, 유동열, 이동휘, 이동녕 등이 발기인이 되어 창립되었다. 신민회의 중심축은 서북 기독교계, 전덕기 전도가가 이끄는 상동청년회, 그리고 YMCA조직이 그 중심이되었다. ② 목적과 방향 창립의 목적은 “부패한 사상과 습관을 혁신하야 국민을 유신케 하며 쇠퇴한 발육과 사업을 개량하야 사업을 유신케 하며 유신한 국민이 통일연합하야 유신한 자유문명국을 성립함”이었다. 그러나 그 숨겨진 목적은 봉건 왕조를 청산하고 근대적 공화정을 설립하고, 다른 한편 외세의 침략을 물리치고 자주 국가를 수립한다는 반봉건 반외세의 동학정신을 계승하는 것이었다. 신민회의 운동노선은 실력양성론와 준비론(민중의 의식개혁, 계몽운동, 민족 산업의 육성)이 강했다. ③ 조직과 구성원 서울에 중앙조직을 두었고, 평양, 선천의 의주, 정주, 용천 등 평안남북도의 교회와 학교(대성, 숭실, 일신, 양실 등)의 교사와 학생, 토착 상공업자가 중심이었다. 평안북도의 핵심인사는 주로 상공업자, 교사와 학생들(이승훈, 양준명, 이용화, 홍성린 등)이었고, 평안남도는 평양 내 3개 학교와 지방유지들(최광옥, 장응진, 차이석, 변인서 등)이었다. 1910년 105인 사건을 통해 기소된 신민회원들의 종교별 분포도를 보면 123명중 장로교인 96명, 감리교인 6명, 동학교인 2, 천주교인 2명으로서 기독교인은 총 104명이었다. 기독교인들은 전체 신민회원의 85%를 차지하고 있었고, 목사 5명, 장로 8명, 영수 10명, 세례교인 42명, 학습교인 13 등이었다. 초기 민족주의운동에서 기독교가 차지하고 있었던 비중이 절대적이었음을 알 수 있다. 4) 선교사와 민족운동 ① 청일전쟁 이후 교회에 몰려드는 사람들은 주로 비신앙적 동기로 교회를 찾아왔다. 이에 대해 선교사들은 당혹감을 느끼고 있었다. 1901년 장로회공의회는 “교회와 정부 사이의 교제할 몇 가지 조건”이라는 명의로 교회의 비정치화선언을 하였다. 그들은 기독교인 개인의 정치운동은 가능하나 교회가 정치운동의 장이 될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했다. “국가의 백성으로서 교인으로서 개인의 자격으로 정치에 참여하는 것을 교회가 간섭할 수 없다”… “교회는 나라 일을 의논하는 집이 아니니 그 집에서 나라 일을 공론하러 모이는 곳은 아니다.” ② 1905년 을사조약 이후 미국이 일본을 지지하는 것이 분명해지면서 선교사들은 일본과 한국인 사이에서 처신이 곤란해졌다. 선교사들은 교회 학교 등에서 실시하는 군사교육과 시위등 민족운동에 대해 그것을 반대해야 했기 때문에 한국인과 마찰을 빚었다. ③ 선교사들은 교회를 지키기 위해 ‘정교분리’ 원칙을 내세워 비정치화를 시도했다. 그러나 그것은 결국 선교사들과 일본의 ‘정교유착’으로 나타날 수 밖에 없었다. 많은 민족적인 기독교인들이 교회를 떠났고 선교사에 대해 비난이 나타났다. 선교사들이 거리에서 한국인에게 구타를 당하는 일도 있었다. 안창호는 귀국 직후 마펫의 전도사 청빙을 거절하였다. ④ 일제는 선교사들을 기만적으로 회유했고 선교사들의 다수는 일본의 한국지배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였고 그것이 한국의 근대화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1907년 이또 히로부미는 친일파 감리교 감독 해리스를 불러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정치상의 일체의 일은 불초 이토가 그 책임을 맡겠지만, 금후 조선에 있어서 정신적인 면의 계몽 교회는 원컨대 귀하들이 맡아주시오. 그리하여야만 이 조선 인민의 유도사업이 비로소 완수 될 수 있소.” 친일감독 해리스 ⑤ 선교사들은 의병운동 등 한국인의 민족운동에 비판적이었다. 게일은 “미친 듯한 사이비 애국심”이라고 폄하했다. 교회는 기독교 지도자들을 의병들을 회유하는 선유사로 파견되기도 했다. 길선주 목사는 “모든 권세는 하나님이 정하신 바”라고 하는 발언을 했다. 그러나 여운형(게일)과 안창호(마펫) 등의 민족 운동가들은 선교사들에게 반발했다. ⑥ 헐버트(H.B. Hulbert)와 같이 한국 민족을 사랑했던 선교사도 있었다. 그는 1886년 육영공원의 교사로 입국했고 1909년 일제의 압력에 의해 강제출국 당했다. 그는 23년간 한국의 역사, 풍습, 언어 등을 연구하였고, 책을 출판하여 한국 민족과 문화의 우수성을 세계에 알렸다. 1895년 명성황후 시해사건 이후 고종을 궁에서 이거하려는 춘생문 사건에도 개입했다. 〈The Korea Repository〉와 〈The Korea Review〉를 편집 발간했고, 한국 YMCA 초대회장을 지냈다. 그는 1905년 고종의 친서를 품고 백악관과 국무성과 의회에서 한국의 독립을 위한 외교적 노력를 했다. 1906년 3월 내한하여 세계 만국평화회담의 개최 된다는 사실을 고종에게 알려서 헤이그 밀사를 파송하도록 정보를 제공했다. 그는 《대한제국의 몰락》에서 “미국은 …굿바이 말 한 마디 없이 가장 모욕적인 방법으로 한민족을 배신하는 데 제일 앞장섰다.”고 기록했다. 호머 헐버트(1863-1949) 한국근대문화사(1906)
3. 국권상실과 기독교의 수난 1) 105인사건(‘데라우찌총독모살미수사건’)의 발단과 조작경위 일제는 한국병탄 직후 항일 독립운동을 사전에 방지하고 제거할 목적으로 대규모 항일민족 탄압사건을 날조했다. 일제는 비밀결사 조직의 근거지를 서북기독교로 보았다. 1908-10년 사이의 테러 사건의 인맥은 “해외에 나가 문명공기에 접촉한” 인물이고, 기맥은 기독교계 인사로 파악 했는데 이 두 조건을 갖춘 곳이 바로 서북기독교였다. 총독부 경무총감 아카시 겐지로가 이 사건을 날조했다. 일제는 각종 고문을 동원해서 이 사건을 날조하는 과정에서 비밀결사 신민회 조직을 파악하게 되었고 최종 105인이 유죄선고를 받았다. 데라우치 총독의 부임 (1910.7.13) 105인 사건 피의자 신민회 간부들 이승훈 이동휘 이동녕 전덕기 양기탁 김 구 유동렬 노백린 이 갑 신채호 문일평 차이석 윤치호 조성환 이 강 임치정 이회영 이상재 윤기섭 안창호 김창환 김진호 2) 기독교인의 수난과 대응 ① 일제는 이 사건을 통해 기독교 세력을 제거하고 선교사들을 추방하려 했다. 심지어는 친일파였던 해리스 감독까지도 이 사건에 관련되었다고 날조하였다. ② 그들은 72 종류의 고문을 사용하여 고문에 의한 허위 자백을 받아내었다. 선우훈, 홍성린 등 몇 사람은 그 무서운 고문을 견디면서 허위 자백을 하지 않았다. ③ 이 사건 이후 꾸준히 증가하던 한국교회는 전년에 비해 2만 명이 감소했다. ④ 선교사들은 외교활동과 국제여론을 통해 이 사실을 알리며 적극적으로 대응했다. 친일성향이 강했던 미장로교 선교본부 총무 브라운은 이 사건을 기독교 박해가 아닌 국내 정치 문제로 다루었다. 그러나 YMCA 총무 질레트를 통해 이 사건은 미국의 〈New York Herald〉,〈The Sun〉, 일본의 〈The Japan Advertiser〉등에 실렸고, 일본의 야만성이 세계 언론에 폭로되었다. ⑤ 미국 해외선교부는 대통령 타프트(Taft)에게 탄원서를 제출했고, 선교사들을 우호적으로 대할 것을 일본대사관에 요청했다. 미국 정부는 일본과 막후교섭을 벌였다. ⑥ 미국해외선교부는 이 사건을 다룬 〈The Korean Conspiracy Case〉를 발간했다. 평가: ① 이 사건에 공동대응하면서 선교사와 민족운동 사이의 불신과 괴리현상이 어느 정도 회복되었다. ② 기독교계 안에 민족운동에 대한 인식의 편차가 크게 극복되었다. 105인 사건 연루자들은 삼일운동과 해외독립운동의 주도자로 등장하게 되었다. ③ 악랄한 고문과 고통을 극복하는 힘은 신앙의 힘이었다. ④ 세계 에큐메니칼 운동의 중요성이 나타났다. 3) 일제의 주권침탈과 종교정책 미국과 영국이 러일전쟁에서 일본을 지지한 것은 중국과 만주에서 이권을 노리던 구미 열강들이 동남 아시아를 분할하려는 정책의 일환으로 이루어진 것이었다. 일제는 형식적이나마 영국과 미국과의 밀월 관계를 고려하여 종교 정책을 수립했다. 일제는 조선의 식민지화를 묵인해준 영미에 대한 보답으로 선교사들에게 ‘치외법권’ 면세특권, 관세특권을 주었고 유리한 통상을 보장했다. 미국은 이러한 일본의 행정에 찬사를 보냈다. ① 통감부는 선교사들에게 여러 가지 특혜를 주고 회유하여 이용했다. ② 일본은 우선 일본 기독교를 통한 한국 기독교의 종속화 획책했다. 그리고 친일 해리스 감독 휘하의 일본감리교회를 한국에 침투시켰고, 일본의 조합교회도 침투시켰다. ③ 그러나 1910년 총독부가 설치된 후, 10년동안 무단 통치기에는 탄압정책으로 일관했다. 105인 사건도 그 일환이었다. 4) 일제의 교육정책과 기독교 교육 박해 일제의 교육 목적은 충실한 황국의 신민을 양육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기독교계의 학교들은 기독교 전파의 선교를 1차 목적으로 삼고 있었다. 그러나 많은 한국인 기독교 지도자들은 기독교 학교가 선교만이 아닌 민족정신을 가르치는 요람이 되도록했다. 일제는 한국 교회를 민족 운동의 산실로 보고 기독교 학교를 탄압하게 되었다.
일제하 국민학교 교육 ① 일제는 1905년 이후, 학부 참여관을 두고 식민지 교육을 위한 기초 작업에 착수했다. 보통학교, 고등보통학교 제도를 만들고 수업 연한을 단축시켜 우민화 교육을 실시했고, 일본어 교과서를 편찬하여 식민지 교육을 실시했다. 1907년 통감부는 ‘조선인의 일본화’라는 교육방침을 선언했다. ② 민족사학탄압 1908년 발표된 〈사립학교령〉은 5000여 사립학교를 820개로 축소시켰다. 일제의 탄압으로 인해 한국 기독교인들은 많은 수의 사학 운영권을 선교사들에게 넘겼다. 그 결과 마펫은 134개교, 노블은 74개교, 쿤스는 35개교의 운영자 겸 교장을 겸직하게 되었다. ③ 일제는 선교사들을 설득해서 기독교계 학교도 인가를 받도록 하였다. ④ 한일병탄이후 일제는 제국신민육성을 교육의 지표로 하면서 기독교에 대해 공개적으로 탄압하였다. 초대 총독 데라우치 마사다케는 입법, 사법, 행정, 군사에 관한 전권을 장악하는 권력을 가지고 있었고 기독교에 대해 반기독교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배경이 안중근, 장인환, 전명운, 이재명 등의 기독교의 무장 항쟁과 안악사건의 배경이 되었다. *반응 기독교계 학교의 학생들은 같은 과정을 공부하고도 동등한 자격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학교에 항의하고 동맹 휴학을 일으켰다. 감리교 선교사들은 규칙을 따르면서 학교를 지속했으나 장로교 선교사들은 성경 교육과 예배가 없다면 학교의 존재 의미가 없다고 보았다. 이로써 장감 사이의 교육에 분열이 생겼다. 감리교의 배재, 이화, 배화, 평양의 광성, 정의, 개성의 송도, 호수돈, 원산의 루씨 등의 학교는 총독부의 인가를 받고 “고등보통학교”로 개칭했다. 그러나 장로교 학교는 잡종학교로 분류되었다. 1912년 494개의 기독교 학교가 1918년 318개 학교로 축소되었다. 삼일운동 이후 문화통치가 이루어지면서 어느 정도 기독교 학교에 대한 유화조치가 취해졌다. 4. 기독교의 항일운동 1) 무장투쟁운동의 전개 국권 침탈의 시기에 수용된 한국기독교는 ‘종교성’과 ‘정치성’이 강하게 나타났다. 항일 무장투쟁에 참여했던 기독교인들은 대체로 서울과 서북계의 망명중인 신지식인 계층으로 교파나 제도 교회에 묶여있지 않았다. 1905-6년 을미의병 출신 구연영은 감리교 전도사가 되어 민족계몽운동을 하였고 1907년 일본군에게 총살을 당했다. 1905년 전덕기 정순만 등은 ‘을사오적’ 암살계획으로 박제순 등 평안도 장사를 모집했다. 평양의 기독교인 최재학, 이시영은 상경하여 을사조약 철폐와 5적 처단을 요구하는 격문을 살포했다. 김하원, 이기범, 차병수 등은 “2천만동포에게 보내는 글”을 배포하고 일경과 충돌했다. 1907년 경기도 양주 목사 홍태순은 고종의 강제 퇴위에 격분하여 대한문 앞에서 자결했다. 기독교 교육가 정재홍은 이또 히로부미를 척살하려다가 실패 한 후 자결했다. 1908. 3 친일 미국 외교관 스티븐스는 “한국인은 우매하여 독립할 자격이 없다”는 기자 회견을 하였다. 미국에 사는 기독교인 전명운과 장인환은 스티븐스를 사살하려고 계획했다. 전명운 권총이 불발되자 장인환은 스티븐스를 사살했다. 재미단체인 공립협회와 대동보국회는 변호사 비용을 모금했다. 그러나 이승만은 이들의 행동을 비난하고 이들을 위한 변호를 거부하는 행동을 보였다. 그러나 한국인을 동정한 아일랜드 변호사가 이들을 위해 무료로 변론을 했다. 미국 여론은 이들에 대해 동정적이었다. 장인환은 종신형을 받았고 3.1운동 후에 감형되었으며 가출옥 후 1924년에 완전 석방 되었다. 전명운과 장인환 ( 출옥 후 만남) 평가: ① 이들의 행동은 한국인의 독립 의식을 전 세계에 알리게 했고, ② 미국에서 〈대한인국민회〉를 결성하는 계기가 되었다(1909.2). 2) 안중근ㆍ우연준의 이토 암살사건/ 이재명의 이완용 암살 미수 ① 1909. 10.26. 하얼빈 역에서 안중근은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하였다. 안중근은 황해도 해주 출신 대지주의 가문 태생으로 어려서 한학을 공부했고 18세에 천주교에 입교하였고 도마라는 세례명을 받았다. 그는 1906년에 가산을 정리하여 진남포에 삼흥 학교와 돈의 학교를 설립하여 교육을 통한 민족운동을 계획했다. 안중근은 대학교를 설립할 계획을 가지고 고해신부와 의논을 했으나 신부는 한국인의 교육을 무시하였다. 이때 안중근은 외국인의 심정에 대해 불신을 가지게 되었다. 그는 “교(敎)는 믿되 외국인을 믿지 말라”고 하였다. 안중근은 선각적 교육자였고, 민족주의에 입각한 주체적 신앙을 소유하고 있었다. 이토를 저격한 후에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사람을 죽임은 죄악이라고 되어있다. 그러나 남의 나라를 탈취하고 사람의 생명을 빼앗는 자를 수수방관한다는 것은 죄악이므로 나는 그 죄악을 제거한 것뿐이다.” 안중근 의사와 이토 히로부미 안중근 의사의 가족 한복을 입은 이토 하얼빈 역 거사 직후의 모습 뤼순 감옥 안중근 의사의 옥중 수기 처형 2일전 안의사의 모습 (동생면회시) 뤼순 감옥에서 처형장으로 가는 모습 안중근의사가 주장한 〈동양평화론〉의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동양의 항구적인 평화를 위해서는 중국ㆍ일본ㆍ한국이 상호 연대 관계를 갖고 러시아를 비롯한 서구 열강의 침략의 위기에 공동 대처해야 한다. 그러나 이토는 이것을 무시하고 자국의 욕심에 이끌려 한국을 강제 병합했다. 그로 인해 동양은 삼국이 멸망하고 백색 인종의 유발(蹂跋)을 당하게 될 것이다. 러시아와 청은 다시 일본과 싸우려할 것이고 미국도 일본의 발호를 좋아하지 않는다. 이등 공을 죽이는 따위는 이 대 목적을 달성한 사업 중의 한부분이다. ② 우연준 (우덕순)은 상동교회에서 민족운동과 접촉하였다. 그는 을사늑약 이후 블라디보스톡으로 망명하였다. 1906년 계동 학교를 설립하여 청년 교육사업을 시작했고 항일 의병운동을 전개했다. 그러다가 1908년 안중근을 만나 이토를 암살할 비밀 계획을 세웠다. 두 사람은 하얼빈 역와 채가구 역에서 각각 기회를 엿보기로 했다. 원래 하얼빈은 우연준이 맡기로 하였으나 거사 직전 안중근이 하얼빈 역으로 갈 것을 주장하였다. 거사 직후 우연준은 채가구 역에서 체포되었고 그는 거사가 성공한 것을 알고 “‘코레이시케우라!”(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다음은 우연준이 거사 직전에 남긴 시(詩)이다. 만났도다 만났도다 원소서로 만났도다/(중략) 앉을때나 섰을때나 앙천하고 기도하길 살피소서 살피소서 주예수여 살피소서 동반도의 대제국을 내원대로 구하소서 오호간악 이도적아 지금네명 끊어지니 너도원통 하리로다 덕닦으면 덕이오고 죄범하면 죄가온다” ③ 이재명의 이완용 자상사건 이재명은 평양 선천출신으로 평양 일신학교를 졸업했다. 그는 1905년 안창호의 도움으로 도미하여 “공립회원”이 되었다. 그는 1907년 10월에 귀국하여 이토 살해 계획을 세웠으나 안중근의 거사가 성공한 이후 국내에 잠입하였다. 그 당시 안창호의 주장을 따라 “부모처자”가 없는 자로서 자원하여 20명의 결사대 중에 일원이 되었다. 이들 대부분은 기독교 청년들이었다. 이재명은 1909년 12월 23일 명동 성당 앞에서 군밤 장사로 변장하고 있다가 벨기에 황제 추도식에 왔던 이완용의 허리와 어깨를 칼로 찔렀으나 마부의 제지로 미수에 그쳤다. 이재명 의사와 매국노 이완용 이완용 암살 미수사건은 해외의 거사와는 달리 생환이 힘든 결사의 각오가 필요했다. 이재명의 거사는 안중근의 이토 저격 사건보다 국내에서는 더 큰 충격을 주었다.
3) 항일 경제운동의 추진 러일전쟁 이후 일본 상인들의 침투가 본격화되었다. 일제는 경의선를 부설한다는 명분으로 농토와 가옥을 강제로 빼앗았다. 이에 대해 조선 정부는 전혀 대처를 할 수 없었고 농민과 주민들은 스스로 자구책을 강구했다. 경의선 공사 철도부대 일제의 수탈과 경제적 침탈에 대한 일반 기독교인들은 항일 경제 운동을 추진했는데 이것은 생존권 운동의 성격이 강했다. 특히 서북지방은 상공업이 발달해 있었고 초기 신앙인들은 상인 출신이 많았기 때문에 서북의 경제적 항일은 기독교인들이 주도적이었다. ① 민족기업성장 민족 기업성장은 신민회 지도부의 장기적인 구상이었다. 그 구상 가운데 용천 양시의 商務同事, 선천의 상무동사총지점, 정주 잡청정 協成同社 등이 설립되었다. 또한 수입 상품을 취급하던 토착 상인들은 주식회사 운동을 전개 했는데 일제의 방해로 실패하고 말았다. 이승훈은 관서자문론(關西資門論)에 입각하여 평양 마산동에 자기주식회사(磁器株式會社) 설립운동을 전개했다. 그는 신민회의 재정 지원단체로서 이 사업을 시작했으나 주식 자금을 모으는데 실패하고 말았다. 그러나 항일 운동의 의미는 크다. ② 시장세 등 잡세 징수에 대항 항세운동 1909년 4월 통감부령으로 시장세 제정 공포되었다. 평북 용천 양시의 상무동사 일원이며 기독교 지도자였던 송자현과 황국보가 주도하여 이 운동을 전개하였다. 이 운동은 일제의 시장 점유에 대해 소상공업자들의 자구책(기독교인 중심의 운동)으로 일어난 운동이었다. 1910년 1월에는 평남 순천 시장에서 일인 상점을 파괴하고 방화하며, 일본인 여러 명을 타살하는 봉기가 일어났다. 함경도 경성군 세금 불납 운동은 기독교인들과 선교사들이 연계하여 연초경작세, 주세를 거부하는 운동이었다. 성진에서는 선교사 그리어슨과 로스의 지시로 시장세 불납운동이 일어났다. 진남포에서도 예수교인들의 항세운동이 있었다. 이미 구한 말부터 교세가 강한 지역은 명분 없는 잡세를 거부하는 일들이 전개되어 왔었다. 그래서 지방관들이 기독교인이 많은 곳은 가지 않으려고 꺼리는 일들이 자주 일어났다. 이렇게 교회는 전통적 부패와 착취에 저항하는 중심 거점이 되었는데 이러한 운동이 일제하에서 경제적 항일로 이어진 것이었다. ③ 일본상품불매운동 일본 상품 불매운동을 전개 할 때에 한국 상인들은 그것을 위반 하는 사람이 나오면 강력하게 징계하였다. 정부의 압력이 가해질 때는 철시를 하였다. 서북지역에서 일본인의 목욕탕은 4전을 하였고 한국인의 목욕탕은 7전이었다. 그러나 한국인들은 일본인들의 목욕탕을 이용하지 않았다. ④ 국채보상운동(國債報償運動) 1907년 2월 대구출판사 광문회의 사장 김광제와 부사장 서상돈이 중심이 되어 국채보상기성회가 조직되었다. 이 조직이 모체가 되어 대한매일신보와 황성신보가 적극 홍보한 결과 이 운동은 범민족운동으로 확산되었다. 이 운동의 취지는 1300만원의 국채를 갚지 않으면 자주적 국권회복이 불가능하니 2천만 국민이 3개월간 금주ㆍ금연하여 부채를 갚자는 것이었다. 기독교계는 전도 운동의 일환으로 이 운동에 참여하였다. 금주 금연운동은 기독교의 절제 운동과도 맥을 같이 하고 있어다. 황성기독교청년회(YMCA) 내에 국채보상운동본부를 설치하였다. 강연회, 토론회, 음악회, 사경회 등을 통해 교인들을 격려하여 국채 보상금을 모금했다. 서울여자교육회, 진명부인회, 대한부인회, 선천의성회, 안악국채보상탈환회, 제주도 삼도리부인회 등의 여성단체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미주 하와이 교포와 일본 유학생들도 담배 값을 모아 보냈다. 금, 은, 장식품, 땔 나무 판돈이 모였다. 1908년 5월 말 231만원이 모였다. 일제는 〈대한매일신보〉총무 양기탁에게 횡령 혐의를 꾸며 이를 저지하였다. ⑷ 해외에서의 민족운동 ① 일제의 조선 병탄과 105인 사건을 전후해서 기독교 민족운동가들은 대거 해외로 망명을 하였고 중국, 러시아 미주 등지에서 국권회복 운동 전개하였다. 특히 중국의 북간도, 서간도 및 상해 지역에서는 무장독립 전쟁론이 우세했다. ② 신민회 지도부는 서간도에 무관학교를 설립하였고, 일미, 일청 전쟁이 일어나게 되면 독립전쟁을 일으켜 공화정에 기초한 독립국가를 수립한다는 목표를 세웠다. ③ 안중근의 동생 안명근은 독립군 기지를 확보하기 위한 군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황해도에 들어와서 활동을 했다. 이때 고해신부였던 빌렘(J. Wilhelm)은 이 사실을 뮈텔 주교에게 알렸고 뮈텔 주교는 총독부에 밀고했다. 당시 천주교회는 종현(명동)성당 입구에 진고개 땅의 소유권 소송을 해결해 주는 조건으로 이 사실을 밀고한 것이다. 일제는 안명근을 비록해서 황해도에서 해서교육총원의 주요 인물들(김구, 최공옥, 도인권 등)을 체포하여 징역, 유배형을 내리고 황해도의 개신교 민족운동세력을 제거하였다.
안명근 백범 김구와 해서교육총회 학무위원(1906) 안명근 사건의 생존자들 1946.1.23 앞줄: 김홍량, 백범, 도인권 뒷줄: 감익용, 최익형, 알수 없음, 우덕순(안중근과 함께 이토 저격에 가담) 간도의 독립전쟁론을 이끌었던 인물은 의병장 출신의 유인석과 홍범도 장군이 이었다. 그리고 종교보다 민족을 우선적으로 생각했던 기독교인들로는 안중근, 이재명, 안명근, 이동녕, 조성환, 김구 등이 있었다. 그리고 신앙심을 확실히 유지했던 독립운동가는 김약연 목사, 구춘선, 정재면, 마진, 황병길 등이있다. 김약연 목사가 세운 간도의 명동학교는 기독교 정신에 입각한 민족 독립운동가의 양성소가 되었다. 이 학교에서 윤동주, 문익환 등이 배출되었다.
김약연 선생 기념비 이 기념비는 문화혁명 시기에 파괴되었으나 교우들에 의해 땅속에 파묻혀 있다가 훗날 다시 복원되었다.
명동학교 유적지
윤동주의 생가 (복원) 용정 용두레 우물 용정여름성경학교교사들 1935 (뒷줄 가운데 윤동주, 뒷줄 오른쪽 문익환)
해란강 1922년 용정교회와 교우들 본래 일송정이 있던 자리(원래 소나무는 일본인들이 잘라냈다고 전해짐) 1920년 경신참변(명동습격) 1919년 삼일운동이 전개되자 일본군은 선교사들이 없는 간도지역에서 한인촌을 습격하여 무참하게 한인들을 학살했다. 명동의 장암동을 습격한 일본인들은 주로 기독교인들로 구성된 이 마을의 남자들을 학살했다. 그리고 부녀자들을 모두 모아서 이 학살 장면을 목격하도록 했다. 일본군이 물러간후 살아남은 주민들은 이들의 시신을 모아 매장하였으나 일주일 후 일본군들이 다시 몰려와 그 시신을 파내어 기름을 부어 불태우는 천인공로할 만행을 저질렀다. 필자가 만난 최근갑 옹은 사재를 털어 한인들의 항일 역사의 기록을 남기는 활동을 하고 있다.
일본 군인들이 한인들을 학살 하는 장면 ④ 해외 한인교회들은 독립 운동의 거점이 되었다. * 샌프란시스코 한인교회는 훗날 국민회가 된 “공립협회”의 본부였다. * 도쿄 YMCA는 민족의식을 지닌 유학생의 집결지였고, 2.8 독립 선언의 근거지가 되었다. * 상해한인교회는 3.1운동의 배경이 된 신한청년당 및 민족운동 단체의 배경이 되었다. * 만주, 특히 간도의 교회들과 학교들은 망명한 독립 운동가들의 활동무대가 되었다. 간도에 정착한 한인들의 삶의 모습 간도 용정 명신학교 부흥회 (37.11.11) 설교자 한경직 목사 ⑤ 해외 독립운동 지도자들은 대부분 기독교인들이었다. 특히 이승만, 안창호, 김구, 박용만, 이동휘, 여운형, 김규식, 서재필 등이 있다. 정리: 을사늑약 이후 기독교 민족운동은 충군애국운동, 민족계몽운동으로 싹이 텄고, 항일운동으로 발전했다. 기독교인들의 항일운동은 기도회, 상소와 같은 소극적 방법으로부터 적극적 무장투쟁까지 다양하게 나타났다. 한일병탄 이후 일본의 경찰력과 군사력이 강화되면서 항일운동에 대한 탄압이 극심해졌다. 1910년 105인 사건이후 대부분의 주도 급 민족주의자는 해외로 망명해서, 만주, 노령, 일본, 미주, 상해에서 독립운동 전초기지를 설립하였다. 다른 한편, 국내에서 기독교인들은 교회와 기독교 학교에서 민족의식을 계승 발전시키고, 신앙훈련과 교육을 통해 독립의지를 키웠다. 이러한 국내외의 힘은 3ㆍ1운동에서 결집되었다.
[출처] 제6장 교세확장과 기독교 민족운동(1907~1918) (9)|작성자 물길손길
[출처] 제6장 교세확장과 기독교 민족운동(1907~1918) (7)|작성자 물길손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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