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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언약으로 보기 04
창세기 2:15-25
아담 언약
아담 언약을 이해함에 있어서 어디서부터 보아야 하느냐 하는 것은 중요한 문제이다. 왜냐하면 대개 아담이 선악과를 먹고 타락한 후에 하나님께서 여자의 후손에 대해 말씀하신 것으로 아담 언약을 설명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선악과를 먹지 말라고 하신 말씀을 ‘행위 언약’으로 지칭하고 여자의 후손에 대해 말씀하신 것을 처음 하신 언약이라는 의미에서 ‘원시 복음’, 즉 여기서 처음 복음을 제시하신 것으로 본다는 것이다. 이렇게 말하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이유와 그 창조를 통해 이미 자기 언약을 드러내신 말씀을 제대로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처음부터 하나님께서 자기 언약을 계속 드러내신 것으로 본다면 아담이 선악의 나무를 취한 것을 ‘타락’으로 볼 수 없다. 왜냐하면 이 모든 것이 언약의 계획 속에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7절에 보면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7절)라고 하였는데 사람을 지으신 이유를 바로 앞 구절에서 “여호와 하나님이 땅에 비를 내리지 아니하셨고 땅을 갈 사람도 없었으므로 들에는 초목이 아직 없었고 밭에는 채소가 나지 아니하였으며 안개만 땅에서 올라와 온 지면을 적셨더라”(5-6절)라고 밝히셨다. 즉 땅을 갈 사람이 없었다는 것은 땅을 섬길 온전한 사람이 없었다는 뜻이고, 하나님이 비를 내리지 아니하셨다는 것은 말씀의 은혜가 주어지지 않은 그때 땅에서 취한 흙으로 사람을 만드셨다는 것이다. 그래서 본격적으로 땅을 섬길 온전한 사람이 어떤 존재인가를 드러내고자 하셨다.
“땅의 흙”이라고 하였는데 ‘그 땅으로부터 (취한) 티끌’(히, ‘민 하아다마 아파르’)이란 뜻이다. 하나님께서는 땅에서 취한 먼지, 티끌로 땅적 존재의 사람을 만드심으로 진짜 사람이 하는 일이 어떤 것인지를 보여주고자 하신다. “생기”란 히브리어로 ‘니쉬마트 하이욤’인데 ‘생명의 호흡’이라는 말이다. 그리고 “생령”의 히브리어 ‘네페쉬 하야’는 1장에서 “생물”이라고 번역된 말과 같은 말이다. 즉 ‘살아 있는 존재’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라고 표현은 생명의 호흡이 주어져 하나님과 관계된 살아 있는 존재로 만드셨다는 의미이다. 이 표현을 사용한 바울 사도의 증언을 들어보면 이 말씀이 의미하는 것이 무슨 뜻인지 분명히 알 수 있다.
45 기록된 바 첫 사람 아담은 생령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 주는 영이 되었나니 46 그러나 먼저는 신령한 사람이 아니요 육의 사람이요 그 다음에 신령한 사람이니라 47 첫 사람은 땅에서 났으니 흙에 속한 자이거니와 둘째 사람은 하늘에서 나셨느니라(고전 15:45-47)
첫 사람 아담이 생령이 되었다는 것은 영적인 사람이 되었다는 것이 아니라 살려주는 영을 증거하기 위한 생령이다. 살려주는 영을 보여주기 위해 살아 있는 존재로 만드셨다는 뜻이다. 흙에 속한 자를 통해 하늘에 속한 자를 보여주신다. 첫째 아담이 흙에 속했다는 것은 육에 속한 자로 육의 사람이다. 신령한 자, 즉 하늘에 속한 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주기 위해 첫째 아담은 육의 사람으로 지음을 받았다. 결국 첫째 아담은 둘째 아담을 증거하기 위해 죽은 자가 되어야 한다. 그래서 첫째 아담은 선악의 나무를 취함으로 다시 흙으로 돌아가야 한다(창 3:19). 즉 죽은 자라는 말이다.
오늘 본문으로 돌아와서 15절을 보면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동산에 두어 그것을 경작하며 지키게 하시고”(15절)라고 말씀한다. “여호와 하나님”이라는 표현은 1장에서 ‘엘로힘’으로 나타내셨던 하나님께서 ‘창조의 톨레도트’(2:4)를 통해 ‘언약의 하나님’을 역사 속에 구체적으로 보여주시는 표현이다(출 3:14-15). “여호와”로 말씀하셨다는 것은 언약을 출애굽을 통해 구원을 이루시는 하나님이시다. 이런 점에서 하나님은 자기 언약을 전제하고 창조하셨으며 그 언약을 통해 구원을 이루실 것을 출애굽으로 보여주시기 위하여 조상들에게 언약하신 여호와라고 말씀하셨던 것이다.
“경작”(히, ‘아바드’)이란 ‘일하다, 섬기다, 예배하다’라는 뜻이고, “지키게 하시고”(히, ‘샤마르’)는 ‘지키다, 보존하다’라는 뜻이다. 하나님께서 아담을 에덴에 두신 이유는 에덴에서 하나님을 섬기고 그 하나님의 뜻을 품고 새겨서 보여주어야 할 것이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생명’에 대한 것이다. 그래서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 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더라”(9절)라고 하였다. 여기서 “나무”라는 말의 복수 ‘에츠임’은 없고 단수 ‘에츠’로만 되어 있어 ‘한 나무’이다. 그래서 직역하면 ‘생명 나무가 선악의 지식 나무로 있더라’라는 말이다. 그 나무를 동산 중앙에 두셨다는 것은 생명의 원칙을 이제 나무를 중심으로 설명하고 보여주시겠다는 뜻이다.
이런 점에서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이르시되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16-17절)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각종 나무”라고 하였는데 정확하게 표현하면 ‘한 나무의 모든 것’이라는 말이다. 단수로 쓰였다는 것은 동산의 모든 나무를 하나의 나무에 어떤 목적을 담아 무엇인가를 보여주신다는 뜻이다. 우리 성경에는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라고 번역하였는데 ‘열매’와 ‘임의로’라는 표현은 히브리어 성경에 없는 말인데 직역하면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 사람에게 말씀을 맡기시되 그 동산 모든 나무를 (하나로) 먹고 먹으라’라고 먹는 것을 강조한 표현이다. 즉 나무를 양식으로 취할 것으로 말씀한 것이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란 ‘선악의 지식(히, 다아트) 나무’라는 말이다. “반드시 죽으리라”라고 한 말씀은 히브리어로 ‘모트 타무트’인데 직역하면 ‘죽고 죽는다, 죽음으로 죽는다’라는 뜻이다. 죽음을 강조한 표현이라 우리 성경에서는 “반드시 죽으리라”라고 번역하였다. 그리고 우리 성경에 번역되지 않은 말이 있는데 그것은 ‘밈멘누’라는 단어인데 3인칭 단수로 ‘그것으로부터’라는 뜻이다. 직역하면 ‘선악의 지식 나무로부터는 먹지 말라 그 나무로부터 먹는 날에는 죽고 죽으리라’라는 말이다.
선악의 나무를 취한 이후 하나님께서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 같이 되었으니 그가 그의 손을 들어 생명 나무 열매도 따먹고 영생할까 하노라”(3:22)라고 말씀하셨는데 여기서도 빠진 표현이 3인칭 단수 ‘밈멘누’이다. 우리 중 하나 같이 되었다는 표현이 하나님과 같이 되었다는 것이 아니라 ‘그것으로부터 하나가 되었다’라는 말로 선악의 지식 나무와 하나가 되었다는 뜻이다.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선악의 지식 나무를 먹지 말라고 말씀하신 것은 그 나무로만 먹고 그 나무와 하나 되면 죽음으로 끝난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하지 말라’라는 식으로 율법적인 명령을 주심으로 인간이 선악의 나무를 취할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것을 보여주신 것이다. 그래서 오늘날 우리 역시 죽은 존재라는 의미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동산 중심에 생명 나무를 선악의 지식 나무로 주셔서 먹을 수밖에 없는 상태로 만드셨고 그것으로 죽음을 통과하여 생명을 주시기 위함이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하지 말라’라는 율법(선악의 지식 나무)을 주신 것은 죄 가운데 두신 후 은혜로 영생을 주시기 위함이라고 말씀한다.
20 율법이 들어온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 21 이는 죄가 사망 안에서 왕 노릇 한 것 같이 은혜도 또한 의로 말미암아 왕 노릇 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하려 함이라(롬 5:20-21)
은혜가 왕 노릇 하는 것을 보여주시기 위해 사망이 왕 노릇 하는 이것을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만드셨다는 것이다. 우리는 죽는다는 말 때문에 무조건 좋지 않은 의미로 받아들이지만 성경이 말씀하는 것은 이 죽음 안에 생명을 담아 놓았다고 선언한다. 즉 죽음 안에 생명을 담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영생을 이루실 계획을 하나님은 이미 세워놓고 계셨던 것이다. 이런 점에서 첫째 아담은 둘째 아담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모형이다(롬 5:14).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죄 가운데 가두어 두심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긍휼을 베푸실 언약을 보여주시기 위함이다(롬 11:32).
그러나 성경이 모든 것을 죄 아래에 가두었으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약속을 믿는 자들에게 주려 함이라(갈 3:22)
결국 그렇게 하신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으로 생명을 주시는 은혜, 긍휼을 보여주시기 위함이다. 다시 말해서 생명 나무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생명 나무가 되는 은혜를 나타내시기 위함이다(계 2:7, 22:1, 14). 그러므로 선악의 지식 나무를 주신 것에 대해 원망하고 불만을 품을 것이 아니라 생명 나무와 하나 되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요 긍휼임을 알아야 한다. 그래서 아담은 선악의 나무를 취하여 언약을 반역하였으나(호 6:7) 하나님은 계획하셨던 그대로 언약을 계속 보여주신다.
“(그리고)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15절). 히브리어 성경에는 우리 성경에 번역되지 않은 ‘그리고’라는 말이 접속사가 있는데 앞의 14절 말씀을 이어 다시 반복하여 말씀한다는 의미이다. ‘뱀과 여자’, ‘뱀의 후손과 여자의 후손’의 관계가 “원수”가 되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즉 뱀의 말을 듣고 선악의 지식 나무와 하나가 된 여자와 뱀, 즉 뱀의 배후 실체 편에 서게 된 여자 사이에 적대적인 관계로 만드셔서 다시 하나님 자신의 편으로 당기시겠다는 말씀이다.
이것을 보여주시기 위하여 여자를 만드신 것으로 말씀하셨다. 그래서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니 잠들매 그가 그 갈빗대 하나를 취하고 살로 대신 채우시고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 아담이 이르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부르리라 하니라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21-24절)라고 말씀한다.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니”라는 표현은 아담의 죽음을 의미한다(참고 시 76:5-6). “떠나”(히, ‘아자브’)라는 표현은 버려진 상태를 표현하는 말이다. 즉 남자가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버림을 받아(마 27:46) 이 땅에 오심으로 죽음을 통해 여자가 나오듯이 남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에 의해 신부가 탄생되는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와 교회의 비밀이다(엡 5:31-32).
그러기에 “아담이 속은 것이 아니고 여자가 속아 죄에 빠졌음이라”(딤전 2:14)라고 말씀한다. 단순히 여자가 먹었는데 아담도 아무 생각 없이 하와가 주는 것을 먹었다는 것이 아니다. 여자가 선악과를 취함으로 아담이 죽음을 의도적으로 취하였다는 의미이다. 이러한 사건을 통해 성경은 남자와 여자의 관계로 복음을 설명하기 위함이었다. 즉 뱀과 여자의 관계는 사탄과 교회와의 관계를 나타내는 것이다. 뱀이 여자의 후손 발꿈치를 상하게 한다면 여자의 후손(씨)을 통해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하시는 타격을 한다는 말씀이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통해 세상에 발을 붙이고 사는 발꿈치가 들려진다는 것은 십자가로 하늘의 것을 나타내신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요 13:18, 막 12:36).
결국 발을 땅에 대고 사는 발꿈치를 상하게 하심으로 새로운 머리, 교회의 머리로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말씀한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라는 머리로만 하나 되는 것이고 그것을 성경은 통일되게 하시는 것으로 말씀한다(엡 1:7-10).
22 또 만물을 그의 발 아래에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삼으셨느니라 23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 이의 충만함이니라(엡 1:22-23)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알지 못한다면 흙에 속한 자이고 육에 속한 자로 죽은 자에 불과하다. 뱀이 배로 다니는 것을 저주로 표현하였듯이 우리는 자기 배라는 욕망에 사로 잡힌 자로 살 수밖에 없다. 그러나 마지막 아담이신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 살려주는 영으로 오셨다. 그러므로 성경은 산 자와 죽은 자,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와 예수 그리스도 밖에 있는 자로 구분할 뿐이다. 2분설, 3분설의 사람이 아니라 전인(全人)으로서 말이다. 우리의 요청이나 행위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의 계획 속에서 이루신 은혜의 언약이다(20230329 강론/주성교회 김영대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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